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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하계 박현 선생님 이야기마당
‘마음의 길 몸의 길’
(2024.07.10 / 서해진)
(박현 선생님 이야기마당이 지점 몇 곳에서 진행 중입니다. 이번 주제는 두 갈래라고 하셨는데요. 하나는 '마음의 길, 몸의 길' 그리고 '차의 길, 삶의 길' 이렇게 두 가지 입니다. 내용은 비슷한 것 같아 둘 중에 하나의 갈래를 중심으로 정리가 되는대로 올립니다)
1회 (2024년 6월9일)
오랜만에 인사 올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늘은 제가 부끄럽게 일 벌려 놓은 것 하나 설명 좀 드리고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천강칠식 거중호에 대한 소개는 별도)
이제 다음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이번에 주제는 가당치 않게 ‘마음의 길, 몸의 길’이라는 주제로 했는데요. 몸의 길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의 길이라니요?
먼저 제가 <반야심경>이라는 경전을 하나 이야기를 해 볼 게요.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반야’를 빼고, ‘경’을 빼고 나면 남는 글자 하나는 ‘심(心)’입니다. 그러니까 심에 대해서 다룬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은 그래요. ‘심’이라는 것이라고 했지만 경전 내부에서는 표현 안 되고 ‘공(空)’으로 표현되죠. 빌 ‘공’자!
“이 공(空)안에는 어떤 구체성도 없다. 이 공이라는 것은 더해지지도 않고 빼지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깨끗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죽음이 다함도 없고, 이 안에는 무언가를 내가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맛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하는 모든 것도 없다”라고 그랬어요.
이게 반야심경에 나오는 마음이죠. 어쨌든 그런 마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우리는 마음을 이상하게 쓰고 있어요. 일단 다른 얘기를 덧붙여 하겠습니다. 먼저 보면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더 보태지지도 않고 빼지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고 깨끗해지지도 않다고 하는 그 마음이 뭐 어디에 들어가긴 어디에 들어갈까요?
그러면 ‘마음에 안 든다’, ‘마음이 따뜻하다’, ‘마음이 차다’, ‘마음을 내놓는다’, ‘마음이 흔들린다’ 등등 이렇게 해서 우리는 두리뭉실하게 자기의 적나라한 삶을 숨겨요.
원래 마음이라는 개념을 찾아내는 단계에서는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죠. 현실적으로 우리의 적나라한 실제 마음과 거의 상관이 없는 것들을 마음이라는 말을 가지고 와서 숨겨요. 그리고 어떤 분들은 거기에 매몰돼서 마음이라는 걸 찾아가려고 해요.
마음! 마음! 하면서 많이 찾아가는데, 가령 ‘마음수련’ 한다는 것도 있죠. 마음은 수련도 안 되는 거예요. 따라서 더러워지지도 않고 깨끗해지지도 않고 보태지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고 살아나지도 않고 죽음도 없고 죽음이 다함도 없고, 그 모든 감각을 떠난 것이에요. 그걸 어떻게 수행할 거예요?
그러므로 ‘마음의 길’이라는 것은 그냥 꺼낸 말이라는 거죠. 식당에 갔어요. 예민한 사람이 음식을 먹고나서 '마음에 안 들어' 그러면 마음이 무언데 안 들겠어요? 내 입맛이나 내 취향이나 내가 생각하는 요구 조건에 안 맞아! 그걸 ‘마음에 안 들어’라고 해버린 거예요. 그렇게 말해버리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이 드러나잖아요.
내가 이런 것도 마음에 안 들어 하면서 불평불만 하는데, ‘마음에 안 든다’면 괜찮은데, ‘내가 이런 요구조건을 갖고 있었던 인간인가? ’자기를 돌아보게 돼 버리죠. 누가 집을 새로 옮겨요 그리고 ‘이 집 마음에 들어!’하면, 집이 어떻게 마음에 들겠어요? 무슨 얘기죠? 내가 생각하는 편리함, 경제성, 어쨌든 넓은 의미의 내가 욕망하는 바와 어울려!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려고 그러니까 조금은 창피한 거죠.
이 보다 더 창피한 것들이 많이 나와요. 누가 너무 고맙게도 이런 물건을 가져와서 같이 누리게 하셨네요! 이렇게 할 표현을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마음을 내주셨네요!” 마음이 어디 피조개인가요? 물 나오면 나오고 들어가는 게 아니잖아요.
마음이라는 말을 그런데 써요. 마음이라는 게 직설적으로 적나라하게 쓰여야 되는 자리 대신에 쓰이는 게 아주 많아요.
일상에서 제가 한번 사전을 대충 그냥 뒤져봤어요. 영(靈)이라는 말, 스피릿(spirit)이 있는데, 영이라는 말이 성경에 498번 나와요. 소울(soul) 즉 혼(魂)이라는 말이 성경에 523번 나와요. 서양에서 그런 걸 세어놓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500여 가지의 표현이 각각 그 안에 있다는 얘기죠.
우리의 몸과 육체에 해당되는 단어들보다 두 배 이상 많아요.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마음이 차갑다 따뜻하다, 마음을 낸다, 마음이 움츠러든다 등등, 마음과 관련된 단어가 우리 일상생활에 쓰이는 걸 대략 보니까 100여 가지가 넘어요. 그 100 가지 대신에 마음이라는 걸 쓰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 100 가지를 풀어버리면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이 보일 거예요.
저는 한번 권해드리고 싶어요.
“한 달 정도 마음이라는 말 지우고 살아보기!”
마음이라는 단어 안 쓰고, 마음이라는 것이 보통 통상적으로 쓰였던 자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서 자기 뜻을 펴보기를 해보자! 쉽지 않을 거예요. 무심결에 나와요. 그만큼 깊이 습관화된 거죠.
즉 우리가 옷을 입는 것이 습관화되고, 문화가 되고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필수품처럼요. 우리 삶을 이야기할 때 식의주 또는 의식주라고 표현하잖아요. 근데 그것처럼 옷을 벗고 사는 것을 생각하지 않듯이 아예 마음이라는 것도 옷처럼 그렇게 입고 살면서 그 마음이라는 옷 안에 가리고 있는 것이 참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는 마음이라는 영역과 거의 상관이 없는 단어를 쓰고 있어요.
우리말이 좀 심해요. 중국도 마찬가지예요. 쓰긴 써요. “네 마음 안에 있는 말을 얘기해 봐!” 아니 마음이 어떻게 쪼개지나요? 마음의 겉과 속이 있어야 되는 데 말이죠.
그렇게 마음이 쓰이고 있는 자리를 다음 시간에 한번 적나라하게 꺼내 볼 거예요. 꺼내 보면, 이렇게 내가 가리고 사는구나! 그러니 내 속에서 너무나도 뚜렷하게 있어야 될 것들이 사라졌구나 하실 거예요.
예를 들어서 삶과 죽음도 그렇게 사라졌구나! 삶만 남아있고 죽음을 버리는 것에서 쓰였구나! 죽음을 하나의 관념으로 굳혀놓고 내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도록 멀리 숨겨놓는 역할도 했구나!
진지하게 산다는 분들이 어설프게 마음이라는 얘기를 많이 써서 거기에 갇혀가지고 그냥 고리타분하게 살다 가요. 수행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병이 마음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거예요.
참 저 분은 마음이 깨끗해! 마음은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은 게 없다고 하면서도 저 사람 마음은 깨끗해! 심지어 안 되면 마음씨라는 표현도 써요. 솜씨도 아니고 마음씨래요.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가리고 있는 것만 들여다봐도 자기가 혐오스러울 정도까지 갈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하나 털잖아요. 가려 놓았던 옷은 추위도 가리고 더위도 도움되게 해 줄 수 있고 하지만 부끄러운 것도 가리거든요. 지금 이런 날씨에 부끄러움을 가리는 역할이 없으면 다 나체로 다녀도 아무 문제없는 날씨이죠. 그리고 조금 저녁에 쌀쌀하다 싶으면 그냥 그 사람에 따라서 얼마나 큰 수건이냐에 따라서 그냥 수건 하나 쫙 걸치면 되는 정도이죠. 그런데 옷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크게 마음이라는 말은 가리고 있어요. 많이 가리고 있어요. 여러분들, 안 쓰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이라는 표현 하루에 적어도 10번은 쓰실 거예요.
특히 어떤 장소에 가서 ‘마음에 그리움이 일었어!’하는데, 마음에 일긴 뭐가 일어요? 내 마음에 물결이 일고, 마음이 일렁거리고, 마음은 온갖 걸 다 하는데 실상은 마음과 전혀 상관없는 것을 그렇게 쓰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적나라하게 한번 다음시간에 드러내 보자고요.
일단 드러내기 전에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옛말은 우리 옛말로는 '마움'이죠. 우리 '음'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현대의 표준화가 되면서 생긴 말들이고, '으'로 표현되는 우리 한국의 현대어는 대부분은 '어' 아니면 '우'가 '으'로 바뀐 경우이죠. 예전에는 발음이 다 '어' 아니면 '우' 였는데 표준화가 만들어지면서 바뀐 거죠.
이 표준화는 어떤 분이 만들었는가를 보면, 일제시대 때 영문학 등을 하시고 온 지식인들이죠. 요즘 보면 대졸학사 학위 가진 분들이죠. 당시 그분들이 교수 아닙니까? 그분들이 모여 서로 돌려가면서 학위를 줘가지고 박사들이 양산되던 그 시기 무렵이죠. 일제시대 후기이니 그래도 그분들의 뜻은 대단하죠. 말을 지켜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신이 오랫동안 국어를 전공한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양에서 배웠던 영문학을 가지고 표준말을 많이 만들었죠.
이런 분들에 의해서 아쉽게도 '어'와 '우'가 '으'로 다 바뀌어 버렸어요. 원래 우리 대한제국 교과서가 있었던 1897년 이전에 있던 어떤 문헌을 봐도, '으' 발음은 매우 적어요. '으' 발음으로 돼 있던 것을 다 찾아보면 전부 이렇게 표현돼 있어요. 마음도 '마움'이었어요. ‘아름답다’도 마찬가지였죠. ‘알움답다’였죠. 그렇게 억지로 만든 것들 중에 이렇게 바꿔버린 단어도 많아요.
'어'와 '우'를 '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심지어 '우'를 '어'로 만들어버린 경우도 많아요. ‘아부지’가 ’아버지’가 된 경우이죠. 여기 적어도 4~50 넘으신 분들에 한해서 보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자라신 분들 거의 없으실 거예요. 다 아부지이죠. 근데 학교에 갔더니 아부지는 촌스러운 말이 되고 아버지를 해야 해서, 학교에서는 ‘아버지’ 집에 가면 ‘아부지’죠. 글로 쓰면 ‘아버지’고, 읽으면 ‘아부지’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부지라고 불렀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돼 있어요.
그렇게 모음 하나 바꿈으로써 ‘어소(語素)’가 달라져요. 우리는 음소(音素)를 결합해서 어소(語素)를 만들어 내잖아요. 우리는 애초에 글자 자체가 이렇게 두 개의 음소가 결합돼서 하나의 음소가 돼 있잖아요. 그래서 ‘산토끼’를 거꾸로 읽으면 ‘끼토산’이라고 그러잖아요. 기계에 돌리고 음소대로 읽으면 그렇게 안 나오겠죠.
우리말을 이렇게 쓰는데 ‘마음’이라는 것도 그랬고요. 이 마음이 언제부터 생긴 말이냐? 알 수 없죠. 뜻은 알 수 있지만 언제 생긴 건 지는 모르죠. 그런데 문화마다 쓰고 있는 이 유사한 ‘마음’이 많아요. 이 유사한 단어들을 한번 늘어놓아 볼 거예요. 다음 다음 시간이에요. 그렇게 늘어놓아 볼 수 있는 유사한 단어들, 제가 늘어놓을 수 있는 것만 하더라도 100가지 이상의 단어가 나와요. 물론 이제 동서도 조금 안 가려야 되고, 문자도 표의와 표음문자도 안 가리고 해야겠죠.
한자만 한번 보시겠어요? 심, 혼, 영(靈), 성(性) 등등 많아요. 정신할 때 신(神)도 있죠. 영어로는 스피릿, 소울, 마인드, 하트도 있죠. 그렇게 많아요. 이 많은 말들의 뜻이 다 달라요. 우리는 전 세계인이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개념을 쓰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민족마다 거의 달라요. 이것은 현대화가 돼 있는 이 사회에서도, 전혀 비슷한 뜻으로 모아지지 않은 영어를 향해서 항복해가고 있고 접근해가고 있는 추세, 즉 영어에 대해서 양성(陽性)으로 접근해가고 있는 세계적인 추세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특징들과 차이는 전혀 근접되지 않고 있어요.
이게 근접되고 같이 이해되면 거의 한 문화권이에요. 중국이 56개 종족으로 구성돼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따져도 8개에서 9개 정도의 문화권으로 나눠져요. 마음과 몸에 대한 이해가 달라요. 몸도 마찬가지죠.
동사 '뮈다' 즉 ‘움직이다’, 동명사형 '뮈욤' 그리고 이 ‘뮈욤’에서 나중에 몸이 온단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에 해당되는 서양말은 영어로 ‘바디(body)’잖아요. 바디는 우리말로 다시 번역하면 몸덩어리, 즉 몸뚱이에요. 그건 완전히 맞지 않아요.
몸은 처음부터 움직이다, 움직임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몸뚱이가 움직여지고 있는 시스템’이 우리에게는 몸이었던 거예요. 이 몸이라는 말을 모르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러면 기(氣)철학하면서 몸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바디가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하게 되는 일이 벌어져요.
몸이란 말 자체가 애초에 바디가 아닌 거죠. 육체의 움직임의 체계, 즉 ‘system of movement of body’가 되죠. 그러니까 몸에 대한 우리말의 어근만 알아도 일부 사람들이 기철학 얘기하면서 힘들 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요. 몸이라는 말에도 체(體)가 있고, 신(身)이 있죠, 이렇게 다르잖아요. 몸을 기르는 것은 체육(體育)이라고 하고, 신육(身育)이라고 하지는 않죠. 신은 양신(養身)이라 그러죠. 기를 양(養)자를 쓰죠. 뜻이 다르다는 이야기이죠.
물론 현대권에서 점점 영어화 돼 가고 있다는 얘기는 78억 인구의 언어가 상당부분 영어를 향해서 지금 접근해가고 있고 거의 모여가고 있는 중이죠. 그 현상은 동남아시아의 나라들보다는 중국이 더 심해요. 현대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영어식 개념으로 자기들의 언어를 써요. 중국인들에게 體와 身을 물으면 구분이 안 돼요.
몸이 체(體)만 있는 것 같고 신(身)만 있는 것 같죠. 기(己)라는 말, 즉 몸기(己)도 있어요. ‘자기를 극복한다’고 하죠. 그럴 때는 극기(克己)라 그러지 극신(克身)이나 극체(克體)라고 안 해요. 뜻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몸뚱이는 이렇게 육성하는 거예요. 체육시간이 그러면 아이들 우유주는 시간 아니잖아요. 엄밀하게 말하면 이 신(身)과 체(體) 개념을 통틀어가지고 과목 이름으로 썼어야했겠죠. 옛날에 그렇게 했죠. 보건(保健)이라고 그랬죠. 지금은 그냥 체육이라 그러고 잘못 쓰고 있는 줄도 몰라요. 왜냐하면 애초부터 이것은 영어개념의 번역어예요. 체육이라는 말은 영어의 사투리에 불과한 거죠.
재미있는 것은 이 신(身) 발음이 현대어로는 상당히 비슷합니다만 과거 당송시대의 발음으로도 身이 ‘신’이고, 己가 ‘기’였습니다. 이 身과 비슷한 발음에서 이것과 관련된 활성화된 뜻도 같은 소리를 가지고 있어요.
이것과 상관되어 있는, 인간 몸에 같은 음가를 유지하고 있는 음가는 지금도 같습니다. 이 신(神)은 이 신(身)과 같은 음을 가지고 있어요. 신(神)의 작용이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 결과물이 신(身)이에요. 이 기(己)는 기(氣)가 작용하고 있는 체 안에서 또는 체와 관련해서 기(氣)가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애초에 같은 음가가 같은 뜻을 갖고 있다가 표의문자가 되기 시작하면서 뜻을 더 표현 못 할 때, 우리 한국어 같은 경우에는 표음문자로서 두 가지 어소를 결합시켜서 뜻을 만들어 나가면 되죠.세 가지를 결합시키거나 하죠. 그런데 표의문자는 그 발음을 유지하면서 글자를 분할시키는 거죠. 글자의 방향이 다르면 다른 언어가 되는 거죠. 지금 표의문자는 사실상 몇 군데 안 쓰고 있으니까요.
이것을 두고 ‘이거 우연 아니야!’ 그러는 데요. 이 신으로 발현되고 있는, 같은 성조까지 갔거나 같은 중국어를 다 늘어놓으면 그 안에서 뜻의 최소 공배수가 나와요. 또는 최대공약수가 나와요. 애초에는 음가가 있었죠. 그 음가가 처음 작용할 때부터 마음이라는 말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이죠. 왜 만들었을까?
인간이 문화를 누리는 동물이고 의식적인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그 출발점은 마음이라고하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 개념을 넓은 의미에서 그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공통된 내 몸을 보고 받아들이고 움직이는 그것 이외에 무엇으로 정의하지 않겠습니다. 봤는지, 찾아냈는지, 설정했는지 그 개념을 떠나서 그것은 언젠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개념 이후부터 문화라는 게 있어요. 마음이라고 하는 영역을 설정하고, 받아들임 또는 보게 됨, 찾게 됨, 갈구함 그러한 개념 자체의 탄생과 인류문화는 시작을 같이 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인류라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원인류에 가까워요. 이제 정신이라는 영역을 설정을 한 거죠. 이렇게 설정하면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갈구하고, 찾고, 믿고 하는 거죠.
때로는 그것이 믿음이 되고 때로는 갈망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탐구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가림의 목적으로도 쓰이죠. 지금의 문화는 마음을 어느 정도 가림의 문화로 쓰고 있어요. 심지어 종교도 그래요.”믿습니까?” 그러자 “네” 한다면, 그러면 “참마음으로 믿습니까?”하죠. 그러면 그 마음에 가짜도 있나요? 어쨌든 마음의 역할은 믿음도 되고 갈구도 되고 탐구도 되고 가림도 되고 다 되는 데요. 그 개념이 탄생하는데 왜 조금씩은 다를까?
제가 아까 스피릿을 영(靈)으로 번역하고 소울을 혼(魂)으로 번역했습니다만, 한자문화권에서는 혼(魂), 영(靈) 심지어 백(魄), 신(神), 성(性), 심(心)등 이런 게 있었죠. 그 어떤 것도 다 차이를 보여주죠. 그런데 불교가 중국에 들어올 때 구마라습이 불교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인도식 시타(citta)를 번역할 단어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고 했지만, 그 안에 심(心)자 하나도 안 나오죠. 혼을 쓰자니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영도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번역하다가, 번역하다가 마침내 찾아낸 결론이 공(空)입니다. 그런 개념이 많이 발전 돼있고, 그런 개념에 의해서 문명을 만들고 있던 그 문화권에 있는 단어 속에서, 인도문화에 있던 이 시타(citta)개념을 번역시킬 마땅한 단어가 없었다는 거예요. 차이가 있다는 얘기죠. 그럼 우리의 마음을 번역하면 이게 또 공인가? 이것도 아니에요.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고, 전 세계인들은 다 마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78억이 생각하는 마음의 뜻은 다 달라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 ‘가림’으로 쓰고 있다는 거예요. 인류는 가림으로 마음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쓰면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가라앉히는 용도로는 쓰고 있다는 거예요. 그 용도로 쓰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문명은 타락해요.
문명이 왜 쉽게 타락하는 줄 아세요? 마음이 힘들다고 하는데, 마음에 무슨 힘이 들겠어요? 다른 표현이 분명히 있죠. 내 마음이 너무 힘들고 하는 이것뿐이 아니죠. 마음이 너무 무겁고 하죠. 마음이 또 무게까지 있는 거예요. 오늘은 마음이 가볍고, 오늘은 마음이 날아갈 듯하다고 하죠. 그렇게 마음이 어떨 때는 가벼워서 날아갈 듯하기도 하고, 마음이 찌뿌둥하기도 하다고 하죠. 다른 걸 써야 되는 말이 다 있는 거죠. 그걸 찾아서 드러내 보자는 거죠. 적어도 몇 십 개를 한번 드러내 보자는 거죠. 드러내 보는 순간에 창피한 것은 우리 모두의 몫으로 둘 그 영역들이 많이 나와요.
‘저 남자 마음에 들어!’ 이러는데,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죠. 어쨌든 마음이라는 말로 통일시키고 가려버렸어요. ‘저 남자 마음에 들어’는요, ‘저 남자가 나 먹여 살릴 능력도 있어 보이고 뭐 잘 생겼고’ 등등이 있을 수 있겠죠.
이건 어쨌든 공통적으로 이성이라는 관점에서 ‘저놈은 내 욕구와 어울려’하는 게 될 거예요. 그런데 그에 대한 내 욕구가 뭔지 몰라요. 이것을 다 드러내 보면 적나라해지는 거예요. 잘못하면 어떤 건 심각하게 적나라해질 수도 있어요.
아무튼 그렇게 가리는 용도로 ‘마음’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가리면 가릴수록 타락해요. 가리면 가릴수록 타락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 적나라한 모습은 다음 시간에 얘기하겠습니다만 거기에 안 맞으면 안 하고 싶어하잖아요. 욕구와 맞지 않는 건 피하고 싶어하잖아요. 그런데 엄밀하게 가리지 않고 부딪히면, 이렇게 부딪히는 게 나와요. 부딪히면 피해요. 마음에 들면, 잘 가려지면 받아들인다는 뜻이죠.
누군가 마음에 묵직한 느낌이 있어서 마음을 가볍게 하고자 사회봉사단체에 갔습니다. 봉사단체에 갔더니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하려고 온 사람도 있고, 마음이 더럽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씻으려고 온 사람도 있고 하는 등등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마음이라는 표현을 갖고 온 사람과 안 맞는 거예요. 부딪히겠죠. 그러니 저 사람과 안 맞으니 마음에 들지 않는 거죠. 그래서 뭐라고 하죠?쟤는 봉사하러 온 애가 아닌 것 같아! 왜냐하면 마음을 씻으러 온 사람과 마음을 가볍게 하러 온 사람과 다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고, 부딪히는 만큼 진심이 아닌 걸로 보이는 거예요. 가짜로 보이니까 의심하고 멀리하고 배척하죠.
마음이 너무 경건하게 산 것 같아서 마음을 조금 넉넉하게 아니면 느긋하게 내려놓는다고 하면, 이때도 마음을 내려놓는다고 그대로 쓰여요. 어떤 사람은 욕심을 내려놓은 다음에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러죠. 어떤 사람은 가치관을 내려놓는 걸 마음 내려놓는다 그래요. 만일 타락하러 간다고 해볼까요? 그런 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같이 타락하러 왔는데 누가 누구를 의심해요? 만일 여기 전부 마약 하러 왔어요. 마약 하러 온 사람들끼리 모였는데 누가 진짜 마약 하러 왔는지 가짜마약 하러 왔는지 의심하겠어요? 다같이 열심히 하면 그만이지. 나쁜 것을 하러 모인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지 않아요.
도둑질을 하러 모인 도둑들끼리는 단합이 잘 되어요. 어느 정도는 그렇죠. 왜냐하면 믿으니까요. 저 놈도 도둑질하고 싶으니까 왔고 나도 도둑질하고 싶으니까 왔으니, 저놈은 가짜도둑질을 연습하러 왔나? 이렇게 의심 잘 안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마음이라는 말을 갖고 가려버린 이면에 가림으로써 타락이 발생할 수 있어요.
타락이라는 표현 자체가 도덕적인 개념인데, 저는 도덕적인 개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쉽게 끌고 가는 능력이 있어요. 그러한 사회일수록 마음이라는 것이 더욱 더 가림의 도구로 많이 쓰여요. 한국역사에서 조선시대와 중국의 명나라 사이에 가림에 대한 용어를 보면 중국이 훨씬 많습니다. 청나라때 오면 더 많습니다. 조선후기 때 오면 조선전기보다 많아집니다, 언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중국과 비교해서는 절반이 안돼요.
가리는 기법에서 보면, 중국은 그 문명이 유치찬란한 것이 훨씬 통합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자기 나름대로 의지를 추구하고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끼리는 통합이 잘 안돼요. 타락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 길로 가는 사람들끼리는 통합이 잘돼요. 중국문화의 위대한 통합성은 그러한 가림의 문화가 발전했기 때문에 생긴 것도 있어요.
그런데 아주 유감스러운 것은 중국도, 한국도, 미국도, 유럽도, 지금 전 세계 어디도 과거 100년전 보다는 적어도 5배이상 가림에 마음의 용법이 많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 현재 사회의 주소입니다. 그 마음이라는 말을 가림으로 쓰는 이상에 그렇습니다.
저도 마음이라는 말을 안 쓰려고 애를 써요. 저절로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많이 안 쓰려고 해요. 마음이라는 걸 유독 많이 쓰는 분들이 있어요. 참 마음이 고우신 분들이고 진심인 분들 같은데 어딘가 답답해요. 그러면 이렇게 꿀 먹은 듯 고구마 먹은 듯 답답해요.
“오늘 마음을 내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그래서 “오늘 이렇게 받아서 제 마음이 무겁고”, “다음에 마음이 가벼워지도록 저도 나름대로 마음을 같이 내보겠다” 등 그럽니다. 이 말을 들으면 속이 갑갑해요. 이렇게 차 마시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고 하시는 분들 중에 특히 많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수행한다 하는 이런 분들 중에 특히 많습니다.
차는 마음의 산물이래요. 차는 차나무 잎을 가지고 제차사가 만든 산물입니다. 이 차는 마음의 산물일 수 없어요. 여기 자사차호 역시 제 생각과 도자기를 만드는 분의 능력과 솜씨가 합쳐져서 나온 하나의 생산물이에요.여기에 생각을 담았지 어떻게 마음을 담아요? “제 마음입니다”라고하면 그렇죠.
마찬가지로 그렇게 마음을 잘 내놓는 분들이 많은데, 옛날 고승들이 왜 그 마음을 안 다스려줬나 몰라요. 그건 무슨 얘기죠? 옛날에 “제 마음이 힘듭니다.”하니, “어디 그 마음 한번 꺼내보라”그러잖아요. 그 고승 앞에서 얼마나 고구마 짓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예요. 그 고승은 마음이라는 말을 쓰지도 않았을 거예요.
요즘 땡초들이 그렇죠. 땡초는 원래 좋은 이름입니다. 고려말 조선 초기에 당취라는 모임을 가졌던 승려들의 모임이 땡초였죠. 지금 땡초라고 하면 당시의 땡초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쓰는 것은 아니죠. 지금 의미로 사용하는 땡초들이 시라고 하고 써 놓잖아요. 문법도 안 맞을뿐더러, 마음이 왔다갔다합니다. 칠언절구 28자중에 마음이 한 서너 개가 막 왔다갔다합니다. 28개를 쓰면 최소한 같은 글자 하나도 안 나오는 게 좋은데 엄청 나오죠. 그리고 풀어보다가 안 되면 “제가 마음은 다하려고 했습니다만 뜻대로 안 돼요”합니다.
우리 대통령부터 그러고 있어요. 대통령은 우리가 마음을 내놓으라고 뽑아드린 분이 아니잖아요. 요리하라고 맡겨 놓았는데 요리 경험 없는 분을 뽑아놓은 분들이 잘못이죠. 다른 분 대통령 되면 안 그럴 것 같으세요? 젊은 정치인들까지도 마음을 쓰더라고요. 마음이라는 말로 얼버무리는 거죠. 그렇게 부끄러움을 가림과 동시에 핑계 대고 대충 넘어가는 거예요. 제대로 안하고 부끄러움을 가리는 어영부영하는 수단으로도 쓰여요. 적나라한 모습을 가리는 수단으로요. 때로는 그 안에도 아름다운 모습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거기서 찾으면 돼요. 그런데 대부분은 부끄러운 적나라한 모습이지만요.
이것 말고도 대충 얼버무리고 싶을 때, 얘기하고 싶지 않을 때 “제마음을 뭐라고 표현하겠습니까?”라고 합니다. 마음은 원래 표현이 안 되는 거예요. 생각을 말씀하시라는 얘기예요. 하고 싶은 뜻을 얘기하고 느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여기에 마음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마음을 나눈다고 하는 단체는 다 실패합니다. 나중에 가면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안 나옵니다.
이 두 번째는 가리지 않고 어영부영 넘어가고 실제로는 제대로 표현 안 하려고 하는 것인데요. 마음의 용법이 또 있어요. ‘관심 없다’라는 표현을 쓸 때 마음입니다. 부조를 하면서 ‘제 마음입니다’라고 하죠. 그러면 5만원이 마음이에요? 7만원이 마음이에요? 10만원이 마음이에요? 그리고 그 마음은 왜 왔다갔다해요? 어떤 집에 30만원, 어떤 집에 20만원 관계에 따라 다를 거거든요. 그러니까 뭔가 설명하기 귀찮을 때도 씁니다.
이처럼 마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쓰는 이유 중에는, 첫 번째는 ‘안을 가림’ 그리고 두 번째는 ‘어영부영함’ 그리고 이외에 거짓을 조작하기 위한 시도로도 쓰여요. 마음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조작도 많이 해요.
어떤 남자가 바람을 피우다가 딱 걸렸어요. 그리고는 여자에게 “마음으로 너를 사랑해! 내 몸은 거기 가 있지만 내 마음은 너를 사랑한다.” 이건 앞에 말한 두 가지와 약간 상통하지만 또 달라요. 이렇게 거짓을 만들기위한 기반으로 쓰이기도 해요.
마음이라는 말로 가리는 이유
이런 용례들을 30가지만 다음 시간에 꺼내 볼 게요. 여러분들이 집에 가셔서 30가지 열심하 고민하셔도 그 용례가 잘 안 나올 거예요. 저는 수십 년을 살펴봤거든요. 왜 이런 일이 되느냐? 사람마다 삶과 죽음을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죽을 때 유니폼을 입고 가긴 해도 사람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달라요.
사람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다른 것이, 마치 그런 것 같다 그럴까요? 어떤 분들이 밤에 어두울 때 돌아다니지 마라 무섭다. 그러다가 누가 어두운데 돌아다니다가 뭐 퍽치기를 당했거나, 얻어맞거나, 강도를 당했거나 하는 일을 당했어요. 그러면 어두운 데 댕기지 말라 그랬잖아라고 말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도 얘기하죠. 퍽 치기 한 놈이 잘못이지 밤에 나간 얘가 뭔 잘못이냐고 그러죠. 요즘 사회풍조가 그러잖아요. 여성들을 보고 젊은 여성들 요즘 옷 좀 짧게 입고 밤에 나가 돌아다니지 마라. 그럼 그래요. 그렇다고 그걸 보고 문제 일으킨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그렇게 나간 애가 뭔 잘못이냐고요. 잘못이죠. 옳고 그름으로만 살자고 하잖아요. 모든 원수를 다 용서할 생각을 갖고 살아야 돼요. 옳고 그름으로 사는 이상 내 부모와 내 자식을 죽여도 용서할 마음으로 살아야만 옳고 그름으로 살 수 있어요. 아니면 상황에 맞춰 살아야 돼요.
어느 것은 상황을 얘기했는데 어느 것은 옳고 그름을 얘기해 버린 거예요. 그러면 밤에 해코지를 한 놈이 잘못 맞죠? 그랬는데 밤에 나간 것 자체는 탓할 게 못 된다.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돼 있는 이게 잘못된 거다. 그걸 논하려고 하잖아요.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다쳐도 그래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럴 수 있는 사람만이 옳고 그름으로 살아야 돼요. 근데 그럴 준비없이 옳고 그름으로 살려고 하잖아요. 그 옳고 그름으로 살려고 할 때 옳고 그름의 인위적인 조작도 마음이라는 단어를 막 쓰면서 생겨요.
모든 파시즘은 마음이라는 단어를 제일 많이 쓰면 생깁니다. 히틀러가 제일 좋아했던 단어가 마음입니다. 무솔리니가 제일 좋아했던 단어도 마음입니다. 전두환 씨가 제일 좋아했던 말도 마음입니다. 특히 그런 사람들일수록 사석에서 많이 써요. 공석에 눈치가 보여가 덜 쓰죠.
마음이라는 말로 기본적으로 자기만의 독선과 독설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독자적인 어떤 선 이런 걸 만들어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가지고 마음이라는 건 너도 동의하지, 니 마음에도 그렇지, 그 사람 마음 지도 마음이 가짜인데, 있지도 않는 건데, 생각인데, 내 생각에 동의해라! 말하면 '노' 할 사람이, 마음으로 너도 인정하잖아!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걸 안 한다 그러면 멀리 가 있는 나쁜 놈이 되는 거예요. 나쁜 놈 나 밖에 모르는 놈, ‘나쁜’이 아니고 ‘나뿐’인 놈이죠.
셀피시(selfish) 같은 인간이 되는 거예요. 우리말에 ‘나뿐’이라는 건 셀피시죠.
근데 아까 국어처럼 나뿐 놈이 나쁜 놈으로 표준화가 돼 버렸죠.그러니까 나쁜 놈 하니까 뜻도 잘 모르는데 옛날에 ‘나뿐’ 놈이에요. 그러니까 마음으로는 동의를 해도 해야 돼요. 근데 생각을 따지기 시작하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나올 수 있어요. 근데 그게 안 나오도록 막아버리는 역할을 마음이라는 단어를 갖고 써요.
심지어 그래서 생각을 갖고 따져야 될 일인데 부모가 아들이나 딸보고 “얘야! 나도 마음으로 너와 같단다!” 생각을 따져보자고요. 그럼 자식도 귀찮잖아요. 어느 순간 이거 토론해봐야 답 안 나올 거 알잖아요. 그러면 아버지 저도 마음으로 그래요! 이렇게 되면 평행. 그냥 겉으로는 해해해, 허허허 이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건 합이 될 수가 없죠. 하나가 될 수가 없죠. 아무튼 하나가 되고 안되고 그런 걸 떠나서 내 모습 보자는 거예요.
이번에 ‘몸의 길 마음의 길’이라고 했는데, 따라서 마음은 길이라는 말도 쓸 수 없지만 그러나 마음이라는 걸 가지고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로 말미암아서 몸에 어떤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한 30가지의 다양한 용례를 말씀드린다고 했습니다. 그 용례에 따라서 내 안에 몸까지 다 다르게 움직여요. 거기서 생기는 병의 모습이 과거와 다른 형태의 병이 생겨요. 마음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암은 예약된 거예요.
왜 그런 가는 다음 시간에요. 오늘은 사실상 예고편이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마음이라는 말을 갖고 쓰면서 그것이 몸까지 어떻게 옮겨가는지 한 루틴을 한번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한번 해드릴 게요. 그래서 마음의 길이라는 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라고 하는 것과 관련된 우리의 삶이 몸에 미치는 길, 이렇게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실제 마음에 무슨 길이 있겠어요? 마음에 무슨 도가 있겠어요?무슨 에비뉴가 있고 스트릿이 있겠어요. 그래서 중국사람들이 도교에서 불교를 받아들여서. 중국 도교의 뿌리는 문화적으로는 우리하고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을 할 때, 성질할 때 성이나 마음 심할 때 심이나, 혼이나 정신학적 신이나 이런 걸 갖고 표현이 안 되는 거예요.
한국사람들이 생각하는 마음, 이 마음과 비슷한 말을 도교사람들이 쓸 때 글자를 엄청 붙였어요. 길게 한 글자로 설명이 안돼서 ‘허령적멸(虛靈寂滅)’이라고 그래요. 영이 비어 있어요. 비어 있는 영에 고요할 적, 없을 사라질 멸을 썼어요. 그래서 허령적멸이란 말은 중기 도교가 빌려간 왕 모라고 하는 중국에서 존경하는 어느 도교의 도사가 채용해서 쓴 말이어요.
자기는 자기만의 번역어로 그 번역어를 내려놓으려면 마음이라는 말로 가리고 있고, 자기도 모르게 조작하고 있고, 자기도 모르게 그냥 얼버무리고 있고, 자기도 모르게 남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그것들의 정체를 살펴보면 좀 마음이 편해져요. 그럴 때도 마음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마음이 편해진 대요. 마음은 어떻게 하면 편해진 대요?
차를 마시고 마음은 어떻게 내려요? 내린다는 건, 기어 뭉치를 옛날에 내릴 때 삼발이 내린다고 그러잖아요. 정위치하라는 뜻이어요. 진짜 내린다가 아니고 정위치하라는 뜻이어요.
아무튼 오늘은 이렇게 뵙고 인사만 하고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정리가 조금 거칠어서 죄송합니다. 여름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박현선생님_이야기마당 #마음길길_몸의길 #차의길_삶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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