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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8일 [부활 제4주일]
요한 10,27-30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 손절 대상 1순위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와 관계를 지속하고 또 누구와 관계를 끊어야 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손절다가 결국 혼자 남겨질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을 붙잡으려다 사람에 치여 고통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관계의 주체를 나로 두기 때문입니다.
‘금쪽상담소’에 모니카 씨가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니카 씨는 주위의 모든 사람을 자신이 다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큽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책임져야 해서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합니다. 더 깊어지는 사랑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너무 힘겹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모니카 씨가 태어날 때부터 아프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평생 아프셔서 모니카 씨와 외식 한번 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아버지 마음을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모니카 씨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다른 아이들과 비교되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의 부재를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분명히 져 주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관계의 지속과 끊음에 관한 판단이 명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를 위해 ‘파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으신 분이십니다. 세례받은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받습니다.
파견받은 사람은 파견하는 대상이 보내는 바로 그 대상에게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파견할 때 파견받는 이를 알아볼 수 있는 바로 그 대상에게 파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5,44-45)
이것이 파견받은 이의 관계에 대한 자세입니다. 파견받은 이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굳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파견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라고 하시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셨기에 아버지의 힘이 나를 통해 그가 떠나지 않게 만들 것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서 떠나는 사람은 나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없어질 때
나는 나의 곁에 있는 사람이 떠나지 못하게 갖은 집착을 하다가 나만 피곤해집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내 힘으로 모두를 책임지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더 큰 피해를 봅니다.
소위 ‘종교개혁자’라 불리는 ‘마르틴 루터’란 인물이 있습니다.
한때 벼락으로 친구는 죽었고 자신은 살았습니다. 그는 살려만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수도회에 들어온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철저한 고행 생활하였습니다.
이때 바티칸 성당을 짓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교황과 교회가 소위 ‘면죄부’라는 것을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면죄부는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닌 연옥벌을 면하게 해 주는 ‘대사’였습니다.
죄와 벌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 떨게 했던 죄책감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교회의 모습을 참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95개 조 반박문을 내걸었습니다.
교회도 탐욕에 눈이 거의 멀었을 때였기에 자신이 하는 행위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성경을 근거로 반박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을 통해 주장을 펼쳤고 이것을 루터도 성경을 통해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이 됩니다.
만약 유대교와 개신교가 성경을 놓고 싸운다면 어떨까요? 싸움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를 두고 그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인지 아닌지, 개신교와 싸우면 어떨까요?
그 싸움도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진리의 기둥이 교회라고 하는데도, 교회가 루터의 생각에 말려버린 것입니다.
교회를 거부하는 루터에게 교회는 오히려 끌려다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 루터는 그 논박 내용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여 유럽에서 루터의 명성은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결국 교회가 세력이 너무 커진 루터를 이젠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루터가 하는 일을 그냥 지켜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의 싸움은 승리하였고 현재의 개신교가 탄생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세상 것에 집착할 때 오히려 관계에 대한 집착도 커집니다.
교회는 본인이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되었고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는 가차 없이 끊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파견한 대리인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상대해 주는 것 자체가 자신의 권위가 인간적인 것들 안에서 나온다고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파견되었다면 굳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파견하신 분은 파견된 자를 알아볼 수 있는 이에게 파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예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프리카 대륙으로 선교를 나간 이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자신들을 몰라보는 이들에게 결국엔 무력을 쓰고 학살하고 강제로 믿게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달루페 성모님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을 보며 그들은 드디어 자신들이 섬기던 신이 가톨릭교회를 통해 들어왔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회가 노력하지 않아도 수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자 몰려들었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갈 때 무력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가 아닙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눈이 열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파견받은 자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만 다가가면 됩니다.
그리고 나의 사람들이 되었다고 그들에게 집착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계의 주체는 내가 아닙니다.
나를 그리스도의 파견자라 여기면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집니다.
우리는 어차피 승리할 수밖에 없는 관계로 파견받은 것입니다.
다윗 왕은 우리야 장군을 가장 싸움이 치열한 곳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다른 군인들은 뒤로 빠지라고 몰래 일렀습니다.
이는 우리야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야를 죽이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만약 승리할 수 없는 곳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파견하신다면 더는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임금이 암행어사를 파견하는데 마패도 알아보지 못하는 산적 떼에게로 파견하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파견받는 것이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은 당연히 우리가 파견받아 만나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것처럼 “네가 할 일을 하여라!”라고 하며 떠나보내면 됩니다.
하느님은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곳에만 파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와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그분에게 파견받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8일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요한 10,27-30
사도행전 13,14.43-52 요한 묵시록 7,9.14ㄴ-17
우리에게는 불꽃처럼 활활 자신을 온전히 불사르고 헌신하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성소 주일을 맞아 많은 분들이 큰 걱정을 넘어 탄식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저도 최근 발표된 한국천주교 통계자료 예비 사제·수도자 현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최근 지망자 숫자가 현격히 감소한 것입니다. 어느 한 지표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하락세가 심각합니다.
안 그래도 노령화 시대, 현직에서 물러난 사제·수도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입회자 숫자는 거의 절벽 수준이다 보니, 현상 유지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특히 대부분의 수도회·수녀회들에 있어 공동체나 사업체의 축소나 통폐합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다들 속수무책인 현실을 두려운 시선으로, 절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낙담만 하고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너무 비관적인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수도자들의 급감 현상은 평신도 형제자매들이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교회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선의와 열정을 지닌 훌륭한 평신도 형제자매들은 분명 우리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또 이런 기회에 사제·수도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것입니다.
더 치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온몸과 마음으로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더이상 회원 숫자나 공동체 숫자, 사업체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보다 내실있는 공동체 생활을 통한
증거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제의 삶, 수도자의 삶, 공동체적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보여줘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쓰러져가는 중세 교회를 거의 혼자 힘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돈보스코 홀로 수백, 수천, 수만 명의 청소년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때로 단 한 명의 힘이 이렇게 큰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 불꽃처럼 활활 자신을 온전히 불사르고 헌신하는 착한 목자의 탄생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만 생각하는 착한 목자, 그저 양들이 성장하기만을 바라는 착한 목자, 그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착한 목자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노력할 때, 사제 수도자 성소 전망을 그리 비관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5월8일 [부활 제4주일]
오늘은 성소주일이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그 부르심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진정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는 미사가 되도록 하자.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기리는 착한 목자의 주일을 맞아 또한 교회의 목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어야 하는 날이다.
복음: 요한 10,27-30 :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신지를 입증해 보여 달라고 한다(요한 10,2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탓하시면서 그들이 당신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10,25-26 참조). 이 유다인들의 요구는 진실하지가 못하다. 예수님의 말씀이든 업적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양떼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양떼에 속하고 속하지 못하고는 그분의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에 달려있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집이나 판단을 주님께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르는 데 달려있다. 하나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주님 앞에 단일한 양떼를 이루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고 따르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양떼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면, 인간이 그리스도를 향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먼저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으로 시작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며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은 그리스도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는 말씀에서 기쁨과 평온을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이 말씀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은 악의 유혹이 그리스도인들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보루의 역할을 한다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이시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이다. 이 관계로 하나이시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의 진실한 양떼가 되기 위하여 모든 분야에서 단일한 신앙, 단일한 사랑, 단일한 행동, 일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성삼위의 일치의 모델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들 상호간에 주님과의 깊은 일치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분의 소리를 듣고’ ‘그분은 그들을 알고’ 그래서 ‘그들이 그분을 따른다’(27절)는 사실을 세상에 입증할 수 있겠는가?
복음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 목자는 ‘권력’을 가지신 분의 모습보다는 ‘사랑’을 가지신 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2독서: 묵시 7,9.14b-17: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은 어린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옥좌 한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묵시 7,14.17). 그분은 어린양으로 살해되셨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분’이 되셨으며, 나약하게 되셨기 때문에 인간들의 절대적 지배자가 되셨다. 이‘어린양’이 어떤 점에 있어서 자기 양떼를 보호할 힘과 권능을 행사하시는 ‘목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요한10,11) 사람들을 지배하려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까지 사랑과 봉사를 베푸신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10,14-15).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당신 양떼를 다스리는 목자가 되신다. 인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계신 하느님! 이것이 살해당한 어린양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그렇게 해서 그분은 당신 양떼의 목자가 되셨다.
제1독서: 사도 13,14.43-52: 당신들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현존의 형태는 세상에 ‘목자’로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어린양’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교의 지름길일 것이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전교의 성공에 대해 전하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49절). 그리고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들을 거슬러 주어진 박해를 당하여 이고니온으로 갔을 때 “신도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52절).
만일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형제들에게 사랑과 봉사의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들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만한 것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고 인도해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를 부르시는 목자에게로 항상 가까이 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