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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 니항사건 :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1편) https://cafe.daum.net/shogun/9xp/1033
(1부에 이어서)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통합본 2부)
По следам нижнеамурской трагедии
러시아, 일본, 중국, 한국에서의 논쟁
알렉산드라프스크 무혈함락과 짜프카의 살해
4월 21일에서 22일경 사할린섬 북부의 알렉산드라프스크(薩哈嗹 亞港, Александровск)에 일본군 파견대가 상륙하여 빨치산들을 물리치고 쩸스토우측 백군계 정권을 다시 수립하였다. (1920년 5월 5일자 동아일보)
2,000여명의 일본군 병력과 군함 미카사, 미시마 등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1925년까지의 사할린섬 북부 점령기간중 일본군이 사단 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다는 소리도 있다)
이 과정에서 파르티잔과 주민들에 의한 결사항전은 없었다.
알렉산드라프스크 주민 대다수는 아직도 러시아내전에서 중립적인 자세를 지키고 있었으며, 장기간에 걸친 내전과 4월 참변으로 피난갈 곳도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당시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주민들의 상당수는 1905년 일제의 사할린섬 학살을 피해 쫓겨온 사람들이었다. 놀랍게도 사할린섬 북부의 지배층 상당수가 일본군에게 협조하였다.
사할린섬 북부 파르티잔 부대의 니콜라예프스크(니항) 후퇴
사할린주를 해방시켰던 트리피츤이 파견한 파르티잔 부대원들과 사할린섬 혁명위원회의 군대는 니콜라예프스크(니항) 지역으로 후퇴해야 했다. 일본군은 알렉산드라프스크 공격중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북사할린섬의 최대 도회였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의 건물들은 모두 무사했다.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주민들이 나중에 불타버린 니항 주민들처럼 께르비, 하바로프스크, 블라가베셴스크, 자유시, 북사할린섬으로 피난을 떠나 고생하지는 않은 것이다.
(※ 오늘날 확인되는 바에 따르면, 1920년 주로 목재로 지어진 사할린섬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대부분의 건물들과 당시 부잣집 대저택 등도 오늘날 거의 대부분 버려지거나 철거되어 남아 있지 않는 것을 볼 때, 당시 기술적 한계와 구식으로 지어진 1920년대의 모든 건물들이 문화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든다.
대다수 니항의 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 6‧25사변중 한국 서울과 평양의 건물들이 니항, 하바로프스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보다 더 파괴되었지만 모든 주민들이 학살당한 것은 아니다.)
무혈함락으로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의 건물들은 보존되었다. 도시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일본군의 무혈입성을 허용해서 사할린섬 북부 주민의 주택 등의 편의를 확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일본군 역시 연해주 4월 참변처럼 백파와 중국‧미국 간섭국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드는 무고한 주민들에 대한 대학살극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볼셰비키인 짜프카(Цапко, Александр Трофимович, 1884년경 출생 ~ 1920년 5월경 사망)는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기 위해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에 남았다.
1920년 5월 17일(~ 혹은 5. 20.일 사이) 아침쯤, 일본군은 짜프카를 체포하였고 저녁에 군함에서 사할린섬 집행위원회 초대 의장이었던 그를 살해했다.
알렉산드라프스크(Александровск) 점령에 대한 신문 보도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인 <사벳스키 사할린>이 일본군의 사할린섬 북쪽 절반을 점령한 방법을 보도한 것입니다......
“1920년 4월 22일, ‘사할린섬의 일본인을 보호’하기 위해 2,000여명의 일본군이 알렉산드라프스크에 상륙했습니다. 소비에트 정부의 지지자 중 일부는 본토로 피난갔고, 일부는 탄압 받았습니다. 북사할린섬의 권력은 일본군에 넘어갔다.
토지 소유 및 처분과 관련하여 러시아인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여러 법령이 발표되었으며, 광업, 어업, 벌목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도입되었으며, 추출된 자원을 러시아 본토로 수출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수많은 세금과 수수료가 부과되었습니다. 러시아계 주민의 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
1925년까지 러시아계 인구는 거의 1/3로 감소했습니다.
가장 수익성이 높은 기업과 산업은 일본의 손에 있었습니다.
사할린섬 석유는 일본인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1920년 초에 중단되었던 지질 조사가 재개되었습니다. 이 작업은 쿠하라 회사와 일본 해군부에서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1921년부터 오하(Оха, 혹은 ‘아하’) 유전의 상업운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할린 유전을 개발하기 위해 쿠하라, 미쯔비시, 오쿠라, 니혼 오일 컴파니를 포함하는 호쿠신카이(Хокусинкай) 주식 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사할린의 거의 모든 석탄 매장량이 일본 기업으로 넘어갔습니다......”(신문보도 중략)
Вот как описывает оккупацию северной половины острова старейшая газета области «Советский Сахалин»: «22 апреля 1920 г. в Александровске был высажен 2-тысячный японский военный десант с целью «защиты япон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острова»… Часть сторонников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ушли на материк, часть была репрессирована японцами. Власть на Северном Сахалине перешла к японскому военно-административному управлению. Был издан ряд постановлений, ограничивающих права рус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относительно владения и распоряжения земельными участками, введён жёсткий контроль за горными выработками, рыбными промыслами, лесоразработками, наложен запрет на вывоз добытых ресурсов на материк, были установлены многочисленные налоги и поборы. Началось вытеснение рус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К 1925 г. население граждан России сократилось почти на треть. Наиболее доходные предприятия и отрасли оказались в руках японцев. Особое внимание японцев привлекла сахалинская нефть. Были возобновлены геологиче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прерванные в начале 1920 г. Работы финансировались фирмой «Кухара» и морским министерством. С 1921 года началась промышленная эксплуатация Охинского нефтепромысла. Для разработки сахалинских нефтяных месторождений было создано акционерное общество «Хокусинкай», в которое вошли фирмы «Кухара», «Мицубиси», «Окура», «Ниппон ойл компани». К японским фирмам перешли практически все угольные месторождения Сахалина».
1920년 4월 21일에서~22일경 사할린섬 북부의 도회였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가 일본군 2,000여명과 군함 미카사, 미사마 등의 공격을 받고 무혈 함락되었다.
트리피츤이 파견한 파르티잔 대원중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알렉산드라프스크 일대에 주둔한 파르티잔들이 니항과 연해주로 후퇴함에 따라, 알렉산드라프스크는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니콜라옙스크)처럼 불타거나 파괴되지 않았고, 일본군들도 연해주나 니항처럼 민간인학살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물론 파르티잔들은 처형되었다. 북사할린섬의 유전과 석탄광산, 산림, 어장 등은 일본이 러·일전쟁 이전부터 노리던 것이다.
니항의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島田元太郎)도 사실은 일본의 간첩으로 니콜라예프스크에 온 것이었다.
니콜라예프스크 코뮌의 마지막 날들
1920년 5월 8일 니콜라예프스크에 있던 소비에트 공화국(РСФСР) 인민위원회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보가 수신되었습니다.
:
“영국 언론에 발표된 일본 공식 크루고프(японских кругов, 일본 원모양)에 따르면, 포병을 갖춘 보병 1개 대대의 병력으로 사할린섬 알렉산드라프스크에 아무런 저항 없이 상륙한 일본군은 사할린섬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얼음이 녹는 즉시 니콜라예프스크를 공격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이 전보가 없이도, 아무르강 하류의 사람들이 얼음이 녹아 항해가 시작되면 일본 침공이 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의 공격로로는 세 가지가 고려되었습니다.
첫 번째 : 일본군이 데-카스트리 만에 상륙한 다음 수상 선박을 타고 아무르 강어귀에 진입하여 도시를 봉쇄한다.
둘째 : 일본 함대가 아무르의 입구로 직접 진입.
세 번째 : 하바로프스크(하바롭스크)에서 아무르강을 따라 일본 선박이 진입.
이러한 모든 수법에 대해 니콜라예프스크를 보호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4월 19일, 데-카스트리 수비대의 대장인 차쉰(Чащин)은 바다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관찰된 내용을 매일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대규모 일본군이 도착하면 모든 방들을 불태우고 가능하면 등대를 불태워라. 가능하면 바위의 러시아어 또는 일본어 수로(фарватер) 표지판을 다시 칠하고 일반적인 모든 등대와 바다 표지판을 제거하십시오.”
4월 20일, 블라가베셴스크의 셰리셰프(П. Серышев, 나중에는 자유시 참변 당시 진압군 사령관) 장군에게 보낸 전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일본군이 포함를 타고 아무르강 하류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하십시오.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와 함께 행동하고 안내할 수 있는 사람을 아무르 강의 개통과 함께 강을 따라 우리에게 보내십시오. 필요합니다.”
5월 3일, 블라가베셴스크로 또 다른 요청이 발송되었습니다.
“본부, 스마긴(Смагин).
가능하면 비커스사의 대포 두문을 니콜라예프스크로 보내십시오.
우리는 많은 포탄을 가지고 있고, 당신들은 대포가 있으나 포탄이 없습니다. 아무르 입구를 막는 모든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 우리는 사람들은 많지만 무기와 탄약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있다면, 전문가를 보내십시오 :
자물쇠기술자, 선반공, 주조 및 성형 작업자, 우리는 포탄 공장이 있지만 전문가가 없습니다. 추가 조치에 동의하도록 귀하의 사람을 보내십시오.”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니콜라옙스크) 주민들의 협조
아무르강 하류 주민들은 일본이나 다른 국가로부터 니콜라예프스크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협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스티판 셰리(Степан Шери)는 이쿠추크(야쿠추크, Якутск), 이르쿠츠크 및 크라스나야르스크(Красноярск)에 파견되었습니다.
“...... 시베리아 소비에트 정부와의 관계 및 이들 도시의 소비에트 조직과의 협상을 위해서, 셰리(Шери) 동지(Тов)는 니콜라예프스크 지역 본부의 공식 대표이며, 본부를 대신하여 협상할 권한이 있습니다.”
다가오는 일본 침략과 관련하여 5월 8일 니콜라예프스크 지역의 파르티잔 부대와 니콜라예프스크시 주민중 18세에서 35세 사이의 남자가 전부 동원되었습니다.
지역 집행 위원회는 니콜라예프스크에 노동군을 창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어려운 시기에 창설된 소비에트 러시아 노동군의 모범을 따름.”
일반 노동 서비스가 지역에 설립되었습니다.
“국적의 구별 없이 남녀 모든 러시아 시민에 대하여, 니콜라예프스크시와 전체 지구에서 즉각적인 노동 동원을 도입하십시오.”
노동군대 부서에 선출된 사람은 : 하리토노프(Харитонов), 프라예르만, 벨스키(Вельский)였고, 사무국에는 : 부드린, 굴치카프(Гультиков), 즈마이티스(Жемайтис), 스티파노프-수사닌(Степанов-Сусанин), 바라니코프(Воротников)가 선출되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방위의 날이 개최되기 시작했습니다.
니항 방어에 대한 신문 보도
신문 <전화(프리지프, Призыв)>는 “5월 15일부터 16일에 국방의 날이 니콜라예프스크에서 개최되었습니다.
7시부터 자본가계급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위대한 대의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 남녀노소, 심지어 청소년들까지도 도시 각처에서 집행위원회 건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일본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일본의 니콜라예프스크 공격에 대한 예상은 모두의 힘을 북돋아 줄 뿐 아니라 작품에 대한 각별한 에너지와 각오를 남겼다.”
아무르강 하구에 장애물 설치
아무르 어구에서 일본 선박의 통과를 방해하기 위해 아무르 해협의 물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짧은 시간에 20척의 바지선이 돌로 채워져 아무르강 하구에 가라앉았습니다.
전직 고려인 부대장 사소프
바가로츠키 전선(Богородский фронт)은 전직 고려인 파르티잔 부대(корейского отряд) 사령관이었던 사소프가 이끌고 만들어졌습니다. 트르(Тыр) 마을 근처 아무르강의 가장 좁은 곳의 수로(фарватер)에 기뢰가 부설되었습니다.
1920년 5월 13일 사할린 지역 집행 위원회는 포위 상태를 고려하여, 이 지역의 모든 권력을 이양할 군사혁명 본부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평화로운 자연적 노동이 아니라 조국의 수호, 그것만이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염두에 두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권력기관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지구집행위원회는 모든 권한을 집행위원회 위원 중에서 선출된 혁명군 사령부에 이양한다.”
아우셈, 젤레진, 페리구다프(И. Перегудов), 야코프 트리피츤 및 니나 레비제바가 비밀투표를 거쳐 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20년 5월 하순이 되자 일본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가 불가능함이 더욱 명백해졌다. 사할린 섬 북부와 마주보는 데-카스트리 만에 약 2만여명 일본군이 상륙했다.
5월 24일경, 타막(Тамак)이 지휘하는 일본군 부대가 하바로프스크에서 마리인스크(Мариинск)에 도착했다. 니콜라예프스크는 포위되기 시작했다.
파르티잔 사령부는 니콜라예프스크 주민들중 주로 여성과 어린이, 부상자와 병자들을 암군강을 따라 께르비 일대의 광산 지역으로 대피시키기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여자와 어린이들의 피난길은 극동의 타만 피난길 (Героический поход Таманской армии)
그것은 극동의 타만 행군길이었습니다.
(※ таманский поход, 1918년경 러시아 적백 내전중 타만반도 일대에서 피난했던 볼셰비키 계열 타만 군대와 주민들의 피난 행군길. 그러나 2022년경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에 전쟁이 벌어져 크림반도와 타만반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2022년경 파괴되었다)
대략 15,000 피난자 중 7,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였으며 거대한 행열을 이루었다.
3천여명의 파르티잔 부대는 피난민들을 호송하며 암군(Амгунь), 타이가 숲, 마럄(марям), 께르비 지역의 늪을 따라 이동했습니다.
5월 20일 첫 번째 증기선이 니콜라예프스크를 떠나 암군(Амгунь, 암군 강)으로 향했고, 그 후 매일 두세 척의 증기선이 음식을 실은 바지선을 이끌고 출발했습니다. 증기선, 바지선, 어선, 돛단배, 보트 등등, 이용 가능한 모든 수상 수송선이 피난에 동원되었습니다.
5월 말까지 약 4,000여명의 사람들이 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대피했습니다.
배로 피난갈 수 없는 사람은 걸어서 대피
선박을 통한 피난 목록에 없는 사람들은 걸어서 께르비로 피난을 떠났다. 지난 5월 중순, 지역 집행위원회의 명령으로 도시 주민들이 께르비 마을로 대피하기로 하고, 약 600 베르스타(верст, Верста́, 약 600km 정도) 정도의 걸어서 피난하기 위한 도로와 이동로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도로는 수리되었고, 다리가 부분적으로 건설되었고 경로를 따라 영양(식량) 보급소들이 건설되었습니다.
께르비로 가는 고난의 피난길
그러나 이러한 사전 작업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예프스크 주민들의 께르비로 가는 피난길은 “죽음의 길(дорогой смерти)”이 되었다. 수천 명의 민간인과 파르티잔들이 이 길을 지나갔다.
파르티잔 지휘관중 한명인 스트롈쵸프-쿠르바타프(Стрельцов-Курбатов)는 이 피난길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습니다.
“나의 지휘 하에 후퇴하는 부대는 매우 번거로웠습니다.
위생부대, 의사들과 의료진, 봉제작업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걸어서 타이가 숲을 지나갔고 몇 마리의 말만이 우리와 함께 있었고 음식은 꾸러미로 운반되었습니다.
모든 말들이 마리(мари)지역 등의 습지 피난길 이동에 성공한 것은 아니며, 일부 말들은 전혀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말들은 총에 맞았고, 우리들은 말고기를 먹게 되었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습지와 늪에 떨어졌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 파괴 준비
대부분의 니콜라예프스크 주민들이 도시를 떠났을 때 그들은 파괴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5월 중순, 혁명군 사령부 회의에서 도시의 운명이 결정됐다.
(※ 당시 한국내 신문보도와 일본군측 자료에 따르면, 니콜라예프스크 주변에 숨어있거나 잔류했다가 일본군측에 투항한 주민들도 최소 500여명부터 ~ 2,000여명 이상이었다.
오늘날 공개된 일본측 사진에도 이 사실이 명확하게 나온다.
‘여자와 어린이들은 트리피츤 부대가 몰살시켰다’는 등의 헛소리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거의 하는 사람이 없다.)
트리피츤의 도시 파괴 주장
일부는 주민들을 피난 보내고, 도시는 그대로 놔둘 것을 제안했지만, 트리피츤은 도시의 파괴를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도시를 불태우고 전체 인구를 피난시키면, 외국에게 매우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 많은 외침을 받았던 한국에서 방화를 통한 후퇴전술(청야전술 등)은 매우 자주 쓰여진 방어기술중 하나다. 무기•식량•병영을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주는 것은 한국 역사에서 적의 침략을 영구화시키는 등등 매우 위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저항 없이 후퇴하는 것도 침략자에게 침략을 정당화하는 그럴싸한 명분을 주었고 자주독립을 위한 장애물이 되곤 하였다.
그러나 도시 거주자들의 가옥을 불태운다는 점에 있어서 고통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때 이 지역의 주도(州都)였고 아무르강 하류의 가장 오래된 도시의 운명은 도시를 파괴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 오랜 역사를 갖는다고 알려진 니항의 러시아계 주민 역사는 당시 100년도 되지 않았다. 건물의 90% 이상이 완공된 지 30년 미만이었고 완전 파괴되었다고 알려진 니항의 일본인 거주지는 대부분이 완공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건물들이었다.)
1920년 5월 말. 아무르강 하류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니콜라예프스크는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1920년 5월 29일, 전화 메시지가 니콜라예프스크(니항, 니콜라옙스크)로부터 발송되었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모스크바로 보낸 전화메시지
“이르쿠츠크에서 얀손(Янсон)으로, 복사본 : 모스크바의 레닌(Ленин)에게.
우리는 귀하가 보낸 전보 9562번을 받았고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두 달 전 일본이 극동 전체를 장악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그들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했습니다. 귀하는 완충국가 건설로 볼셰비키 군대 전체를 배신했습니다.
극동의 군대는 시베리아에 남아있는 일본군을 축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이제 일본군은 하바로프스크에서, 바다에서, 그리고 데-카스트리의 3면에서 니콜라예프스크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사할린과 데-카스트리에 상륙한 그들의 군대는 20,000여명 정도입니다.
수만 파운드의 화약, 수만 개의 포탄 및 기타 귀중한 재산을 포함하여 여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저장품들을 파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우리는 라디오 방송국을 불태우고 우리 뒤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입니다.
주민들은 대피시킬 것입니다......
민주공화국을 선언하면, 일본이 인수를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소비에트 정권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이길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은 ‘젬스트바 완충국가를 만들라’라는 명령을 반복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겠지만, 중대한 실수이자 배신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니콜라예프스크를 지키기 위해 소비에트 정권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블라가베셴스크에서 니콜라예프스크로 보낸 전화 메시지
5월 30일, 블라가베셴스크에서 니콜라예프스크로로 전화 메시지가 수신되었습니다.
“군부대가 벗어났습니다. 지역 사령관 트리피츤.”
아무르 혁명위원회의 지시
아무르 혁명 위원회 위원인 즈다노프(Б. Жданов)가 극동 공화국 창설 목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극동공화국 군대(НРА) 사령관 동지(тов)의 명령에 따라, 치타 근처에서 활동하는 에이히(Эйхе)에게, 모든 전선에서 활동하는 드미트리 쉴로프(Дмитрия Шилов), 라조, 셰르셰프, 트리피츤은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중앙의 정책은 일본과 싸우지 않고 그들에게 양보하고 모든 전선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편의 어떤 실제적인 무력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에 대한 물리적 가능성은 없으며, 이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일본인들은 그런데, 모든 협상과 연설에서 3월의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의 공포를 강조하며, 일본 민간인의 파괴를 지적했습니다. 당신은 극동공화국 정부를 인정하기 위해, 지역의 노동자들 뿐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대해 공식 성명을 발표해야 합니다.”
트리피츤의 상급부서 지시 불복종
트리피츤은 이전의 지침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지침을 준수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은, 그의 성격 특성과 아무르 강 하류 상황의 복잡성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트파르타(истпарта) 책 <극동에서의 혁명(Революция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에서 이러한 상황은 다음과 같이 고려되었습니다.
러시아 내전 시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실수들
“일단 집권한 동지들은 혁명의 일반적인 흐름뿐만 아니라 하바로프스크 시 근처에 위치한 지역 혁명 사령부로부터도 단절되었기 때문에 많은 전술적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 동지들은 그들의 실수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께르비 마을에서 총에 맞았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완전히 고립되고 국가 및 외교 활동에 대한 준비가 거의 없었던 그 지독하게 어려운 혁명적 상황에서 특정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니항사건 생존자들의 회고록
아무르 강 하류 지역에서 소비에트 권력 회복을 위한 투쟁에서 살아남은 거의 모든 생존자들은 회고록에서 트리피츤은 1920년 5월 중순과 그 이후부터는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었다고 썼습니다.
사할린 주 집행 위원회의 전 부의장 아우셈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아우셈의 주장
“피난이 시작되자마자 모든 것이 드라마틱하게 변화되었습니다. 트리피츤이 바뀌었습니다. 니나 레비제바가 달라졌습니다. 왜요? 답은 하나뿐입니다. 심리적 패배입니다.
트리피츤의 변화
두 명의 트리피츤이 있었습니다. 한명은 우리의 승리 기간에 있었습니다...... 훌륭한 조직가, 재능있는 군사 지도자, 열정적인 혁명가, 말로만 듣던 전우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상당히 우위를 점하고, 일본군으로부터 니콜라예프스크를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이 트리피츤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자이 야습에 나섰던 일본군과 아나키스트 지휘관에게 쿠데타를 계획했던 공산주의자의 처형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대중이 동정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트리피츤은 모든 것에서 음모와 배신을 보았고, 니나 레비제바와 함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쳤습니다.”
<“테러 ! 소비에트 혁명의 모든 적들에 대한 동정 없는 테러 ! 우리 중에 적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일본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아우셈 회고록 하략>......
기록보관소의 다양한 자료들
다음과 같은 유형의 많은 문서들이 기록보존소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파호모프(Пахомов)에게 위임합니다.
당신은 파괴될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하라는 긴급 명령을 받았습니다. 혁명적 양심은 당신의 것입니다.”
또는 :
“위임.
이 것의 소지자는 무료입니다. 반혁명 요소를 조사, 수색 및 체포하기 위해 니콜라예프스크 지역의 파르티잔 본부에서 암군 지역으로 파견됩니다. 집행(처형)을 실행할 권리가 있습니다. 모든 농촌 조직은 그에게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고
그의 모든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트리피츤, 레비제바-”
“당신의 혁명적 양심”이라는 말, 적어도 그들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권리가 모든 면에서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품위 있는 사람에게 부여된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떨까요?
나는 이미 앞서,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군대에는 차르(제정러시아) 정부 시절 사할린 주에서 범죄 노동 교화소를 다녔던 꽤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 중 몇몇이 파르티잔 군대에서 지휘관 자리를 가졌고, 트리피츤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혁명적 양심”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의 민간인 중 많은 무고한 희생자가 이 사람들의 양심에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공산당원 아우셈의 회고록 중에서
다시 아우셈의 회고록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때 아쳬빌리-파블루츠키(Оцевилли-Павлуцки)는 부르주아지가 중립적인 중국 마을로 야간 이동하는 것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재판 없이 처음 사형이 집행된 것은 이 ‘중단’ 기간 동안이었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에 머무는 마지막 날에 발생했습니다. 이 마지막 상황을 특히 강조합니다.
야코프 트리피츤과 니나 레비제바 근처에서 무리를 이룬 소수의 도적들에 의해 수행된 이러한 재판 없는 처형은 도시를 떠나기 며칠 전 밤 동안에 이루어졌으며, 일본과 백파 군대 소식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니콜라예프스크 코뮌의 전체 기간에서 결코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우셈 회고록 중략>......
사람들이 트리피츤의 개인 명령에 의해 처형된 사실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관련 문서를 가져옵니다.
아나키스트 트리피츤에 대해 쿠데타를 준비했던 공산주의자들과 일본군 포로의 처형
“1920년 5월 24일.
1연대 사령관.
군사 혁명사령부는 당신에게 의무실에 있는 체포된 일본인과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에 대해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령합니다.”
명령이 수행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인 미진, 부드린, 그의 아들 바리스(Борис), 카발요프(Ковалев), 베례조프스키(Березовский), 코나노프(Кононов), 카랴킨(Корякин), 이바녠카(Иваненко)가 총으로 처형되었습니다.
트리피츤의 지지자들인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주장
아나키스트 발로진(М. Володин)은 아나키스트 헤럴드 잡지(베를린, 1923)에 게재된 그의 기사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의 비극’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처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ЦК РКП (б))의 승인을 받은 빌롄스키(В. Виленский, 공산주의자 : 볼셰비키)의 적절한 지시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파르티잔 군대와 지역 주민들에게 ‘완충국가 건설에 대해 복종’을 하는 방향으로 부패 작업을 시작하였고, 무장 대중들을 공산당 중앙에 예속시키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총에 맞았습니다.”
일본군 포로의 처형
도시가 파괴되기 전 마지막 날에는 131여명의 일본 포로가 처형되었습니다. (※ 일본군 포로의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니항사건 관련 일본 외무성 자료 (한국의 각종 백과사전 등이 사실이라고 인용)
니콜라예프스크의 마지막 날에 대해 일본 외무성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일본 외무성의 자료는 조선 독립군은 → ‘비적, 악마, 강도, 강간범’으로
볼셰비키는 → ‘과격파’로, 니항 조선인 민회는 → ‘선인 민회, 귀순 선인, 온순한 사람, 조선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이라고 주로 표현되며, 니항사건과 관련된 날짜는 틀리는 게 많으며 러시아측 자료가 비교적 날짜가 정확합니다.)
니콜라예프스크의 볼셰비키는 일본군 원정대(공격부대)의 도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그들은 돌을 실은 바지선으로 항구 입구를 막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일본군 원정대의 주력 부대가 니콜라예프스크에 도착하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타막(혹은 타마카, Тамака)의 파견대는 해군 원정대와 함께 5월 24일 마리인스크에 도착했습니다. 이것은 2차 처형을 앞당겼습니다.
(※ 일본이 주장하는 일명 ‘제2차 니항사건’으로 날짜들은 일본군이 그냥 대충 적어 놓은 듯하다.)
유혈 사태는 5월 24일 자정에 시작되어 5월 27일에 끝났습니다. 첫 번째 학살에서 살아남은 남성, 여성, 어린이 등 약 200명의 일본인 거주자가 사망했습니다.
(※민간인 일본인 남성과 여성들도 반자이 기습공격에 동참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의 파괴는 1920년 5월 30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석조 건물은 폭파되고 목조 건물은 불탔습니다.
츠니르라흐 요새의 거의 모든 군사용 구조물이 폭파되었습니다.
(니항의 석조건물과 츠니르라흐 요새 폭파에는 츠니르라흐 요새의 해안포용 화약이 활용되었다.)
강한 바람이 도시를 거대한 모닥불로 만들었습니다. 거의 이틀 동안 불은 도시를 집어삼켰고, 니콜라예프스크 대신 단단한 재를 남겼습니다. 야코프 트리피츤은 농촌 혁명 위원회에 보낸 정보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아랫쪽 마을 주민들과 도시 전체 주민들이 대피했고, 모든 마을과 어장이 불에 탔습니다. 모든 식량은 가져갔고, 도시에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습니다. 도시 전체가 불탔고 학교, 작업장, 전기 발전소 및 기타 대형 건물이 폭파되었으며 일본인에게는 재만 남았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에는 돌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 1920년대 조선 내의 신문보도 등에 따르면, 수백여명~수천여명의 피난민과 잔류자가 니콜라예프스크 주변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항구시설을 비롯한 전체 건물이 불탄 것은 아니다.
트리피츤은 당시 부상으로 완전 회복을 하지 못한 상태로 부하들이 보낸 결과를 사실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백파 출신 기자 에치의 저서
(한국에서 니항사건과 관련되어 자주 인용)
블라디보스토크의 기자 에치(В. Эч 혹은 칠리킨 : В. Чиликин)는 1920년 7월 13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니콜라예프스크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어디를 봐도 집의 폐허만 있었고 여기 저기 건물 굴뚝이 보였습니다. 발전소의 높은 굴뚝, 반쯤 물에 잠긴 배...... 도시의 모든 건물들 중. 상업학교와 감옥이 남아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도시가 그런 식으로 파괴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에치(В. Эч 혹은 칠리킨 : В. Чиликин)는 A.Y.구트만과 함께 최근 한국의 각종 백과사전에서 니항 사건의 중요 증거로 인용되는 책의 저자이다. 역시 친일파다. 니항주민이 거의 안보였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피난민들이 러시아를 떠도는 내전 시기
당시 동아일보 등 국내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최소 500여명에서 ~ 수천여명의 잔류자들이 니항 일대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피난을 온 사람들일 수도 있다. 당시 내전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시베리아에는 피난민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마 마가 마을이나 츠느르라흐 요새 주변, 혹은 북사할린섬에서 피난 온 주민들이었을 수도 있다.
수많은 전란을 경험한 한국 역사에서 청야전술은 흔히 있던 일이었다. 1950년 6·25사변중 니항보다 더 완전 파괴된 도시도 많았다.)
이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러시아 적백 내전중 자주 있던 파괴행위
러시아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과 스베르들로프도 허용함
파르티잔 부대 사령관 야코프 트리피츤은 러시아 인민위원회(СНК) 위원장 레닌과 전 러시아 중앙 집행위원회(ВЦИК) 위원장 스베르들로프(Я. М. Свердлов)가 1918년 6월 2일자로,
“적의 침공이 있을 경우, 모든 지역 소비에트에 적을 돕는 사람들을 완전히 근절할 것을 제안” 한 것을 이행했습니다.
이 제안은 적군이 접근했을 때 소비에트의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제거하지 않을 모든 것을 파괴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아무르강 하류 지역의 주민들은 이 제안의 사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르 하류의 트리피츤은 소비에트 정부의 요구를 충족했습니다.
불타버린 니콜라예프스크 시
니콜라예프스크 시는 불에 탔습니다. 트리피츤은 파르티잔 본부 및 호위 부대의 수장으로 6월 1일 도시를 떠났고, 이틀 후 스트롈쵸프-쿠르바타프(Стрельцов-Курбатов)의 지휘하에 마지막 파르티잔 부대가 떠났습니다.
이 두 그룹은 타이가 숲을 통해 께르비 지역으로 피난 갔고, 일본군은 이미 수로를 막았습니다.
힘든 피난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삼가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의 공동 아파트에 살았고, 이웃 사람이며 살아 있던 증인인 마리아 쿠쿠쉬키나(Марии Кукушкина)로부터 피난 과정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잘 기억합니다. 그녀는 니콜라예프스크 해방을 위한 파르티잔의 캠페인에 참여한 다음 트리피츤의 부대와 함께 께르비로 가는 길을 찾아 타이가 숲을 헤매었습니다. 트리피츤과 레비제바는 그녀의 파르티잔 영웅이었습니다.
(※: 압도적인 대규모 적의 공격에 거주지를 불태우고 피난 가는 것은 한국 역사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적에게 무기와 주거, 식량 등을 넘겨주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결사항전은 군사력이 압도적 차이가 있을 경우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타이가 숲, 늪, 호수, 식량부족
아무르 강 하류 지역에 있는 타이가 숲은 교통, 특히 말을 타고 다니기 위한 곳이 결코 아닙니다. 뚫을 수 없는 바람막이 언덕, 언덕 저지대의 늪, 오호츠크 해 연안으로 물을 운반하는 수백 개의 빠른 강과 개울,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기떼 등의 장애물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께르비로 가는 도중에 트리피츤의 작은 부대가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식량 부족
며칠 후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실 그는 길을 잃고 길을 잃었으며 아렐-칠야(Орель-Чля) 호수 거주지에 미리 준비된 식품 창고에 제 시간에 가지 못했습니다. 아우셈, 들진 및 빌랴예프(Беляев)를 포함하여 그보다 먼저 니콜라예프스크를 떠난 파르티잔 그룹은 호수에서 약속된 시간에 그를 기다리지 않았고, 그가 이미 이 식량비축 지점을 통과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음식을 취하고 나머지는 파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리피츤이 타이가를 헤매다가 아렐-칠야 호수에 갔을 때 거기에는 음식이 없었습니다. 배고프고 의복도 헤어진 그들은 더 멀리 암군(Амгунь)으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볼셰비키인 아우셈, 들진, 빌랴예프의 체포
트리피츤과 그의 부대가 6월 16일 께르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렐-칠야호수의 식품 창고 파괴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들진및 빌랴예프 및 아우셈을 체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심문은 께르비의 체카(ВЧК, 러시아내전기 볼셰비키측 방첩 경찰) 비나그라다프(П. Виноградов) 회장이 수행했습니다.
그가 회고록에 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우셈, 들진 및 빌랴예프는 트리피츤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트리피츤의 부대가 지나갔고 퇴각을 서둘러야한다고 말한 동지를 만났습니다. 이 문제가 고려되는 동안 안드레예브 일파의 봉기가 있었고 모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트리피츤과 그의 그룹이 타이가 숲을 헤매는 동안 도시의 대피 인구 중 일부가 께르비로 왔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역사상 유례 없는 피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겪은 모든 문제에 강도(強盜)가 추가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범죄자들의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파르티잔 군대도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르강 하류 파르티잔 부대의 사회적 구성
나는 이미 파르티잔 군대의 사회적 구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다시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여기에는 사할린 형무소 출신의 전과자들이 많이 포함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죄수는 범죄자였으며 ‘사할리(сахалы)’라고 불렸습니다. 사할린에서 고된 노동을 한 후 그들은 아무르강 하류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 사할린섬의 백만장자 페트로프스키(Петровский, Филипп Емельянович)도 유배온 사람이었고, 유명작가 안톤 체호프(Чехов, Антон Павлович)도 사할린 주에 유배를 온 것이었다.)
진정한 철의 규율로써, 이 자유인들은 승리하는 동안은 제지되었지만, 후퇴할 때 자연스럽게 통제력이 약해지고 어딘가에서 통제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1920년 5월 19일
군사 혁명 사령부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암군 지역으로 볼스키(Вольский?) 대표를 ‘처형을 집행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반혁명 요소를 조사, 수색, 체포를 실행하기 위해’ 파견했습니다.
트리피츤 사령부의 강도행위 저지 노력
그리고 6월 19일 사령부는 아무르 강과 암군 강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 (명령내용)
“어떤 식으로든 일본군과 백파군대를 지원하는 모든 사람은 명백한 반혁명 분자로서 즉석에서 총살될 것입니다.”
“일부 파르티잔들의 통제되지 않는 행동에 대한 정보를 받았기 때문에 본부는 위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파르티잔들이 가장 엄격한 혁명적 규율을 준수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전투 임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모든 사람은 물론
전투 중에 임의로 위치를 떠나고 부대를 이탈하고, 우스꽝스럽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려 노동자 ‘그리고 소작농’ 의 파르티잔 군대 대열에 불화, 혼란을 일으킨 모든 사람은 노동자 ‘그리고 소작농’ 사회 혁명의 공동 대의에 대한 반역자로서 현장에서 총살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로서는 불완전한 조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을 읽을 때 당연히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반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강도질’과 ‘반혁명’의 개념이 대체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은 1920년 6월 18일 트리피츤에게 보낸 소규모 파르티잔 부대장중 한명인 니호친(Нехочин)이 보낸 전보에 의해 제공됩니다.
백파 잔당들의 준동
“솔란츠이(Солонцы), 크라스니 야르(Красный Яр), 바가로츠카예(Богородское), 타흐타(Тахта), 마리인스크 마을에서는, 도주한 농민들로부터 백파 농민 경비대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들은 65명으로 솔란초프(Солонцов)보다 2베르스타(2-х верстах, 약 2킬로미터 정도) 위에 있는 우리를 상대로 매복을 시작했습니다.
※ 이 무렵 러시아 백파들도 일본과 친일파가 장악한 만주에서 아무르강을 건너 사할린 주와 아무르 주 일대를 수시로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일본군과 접촉하여 작업합니다. 그들의 주요 목표와 임무는 지휘부와 소비에트 지도자를 잡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지역이 국제화되었다고 말합니다.”
파르티잔 지도부와 친밀한 사람들이 강도로 돌변
피난 무렵 많은 강도들이 파르티잔 대열에서 나왔고 때로는 파르티잔 부대 사령관과 가까운 사람들에서도 나왔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트리피츤의 신뢰를 누렸던 비첸카(Биценко, 혹은 비첸코)는 피난민들에게 진정한 공포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는 트리피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를 폭로한 후 트리피츤으로부터 신뢰를 얻었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그는 부진-비치가 지휘하는 사피이스크 파르티잔 그룹(Софийской группы)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밀정 비첸카(비첸코)의 암약과 폭력
그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지 않았지만, 범죄자들과 함께 <암군강의 강도 트리피츤>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뒤에 숨어, 대량 처형과 폭력을 실행했습니다.
비첸카는 트리피츤의 동료가 맞는가?
역사 문헌에서 비첸카와 트리피츤은 전우이자 친한 친구로 제시됩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보관된 문서와 해당 사건 참가자의 회고록을 살펴 보겠습니다.
밀정 비첸카(비첸코) 사살
비나그라도프(П. Я. Виноградов)는 비첸카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암군의 한가운데서 비첸카가 배를 타고 여행하고 주민들을 위협하고 피난민을 방문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6월 초 혁명재판소 의장인 바리스 들진이 니콜라예프스크에서 께르비에 도착했다.
며칠 후 비첸카는 무리와 함께 배를 타고 께르비에 도착하여, 무기 작업장이 된 과거의 거주지(주택)에 들렀습니다. 들진과 비나그라도프는 그를 구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비첸카가 작업장을 떠났을 때, 들진은 그를 만나 해안을 따라 걷도록 초대했습니다.
비나그라도프는 준비된 상태에서 그들을 따랐습니다. 대화에서 그들은 보트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비첸카는 들진과 헤어지고 들진을 쏘았지만 놓쳤습니다. 들진이 반격하고 비첸카가 쓰러졌습니다. 비첸카는 들진을 다시 쐈지만, 또 놓쳤습니다. 들진은 비첸카가 암군니(Амгу-ни)의 높은 강둑에 죽은 채로 있게 끝냈습니다.
우리 동지들은 죽은 비첸카에게 다가가 수색했습니다.
가죽 자켓 안감 아래에서 수 놓은 백파 콜차크 군대 장교 견장을 발견했습니다. 비첸카의 테러는 파르티잔 부대의 어두운 얼룩처럼 떨어졌습니다 ....... 비첸카의 사건을 알게 된 트리피츤은 나를 그의 집으로 소환했고 모든 것이 어땠는지 트리피츤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행동을 승인했고 비첸카에 대해 ‘개에게-개의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6월 21일 신문 <크라스니 클리치(Красный клич, 빨간 전화)>는 이 강도 비첸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는 재판이나 조사 없이 영유아까지 포함해 모든 가족을 대량 처형함으로써 혁명본부를 자극했고, 본부에 대한 이해할 수 있는 불신과 비난을 퍼뜨렸습니다.”
신문은 비첸카의 목표를 매우 정확하게 공식화했습니다. 비첸카는 소비에트 정부의 권위를 훼손하고, 전선과 파르티잔과 의용병 부대를 해체하고, 내전을 일으키고, 적의 편으로 넘어가 대중들을 배반하였던 것입니다. 비첸카는 이를 위해 백파 군대 장교 견장을 미리 준비했습니다.
비첸카와 밀정들에 대한 조사
군사 혁명 사령부의 특별 조사위원회는 비첸카 사건을 조사했습니다. 증인의 증언에서 파르티잔 부랴(Буря), 라바스타프(Лобастов) 및 주르빈(Журбин)이 그와 함께 행동했음이 밝혀졌습니다. 비첸카는 조사위원회, 트리피츤 및 기타 많은 구성원들을 파괴하기를 희망했습니다.
1920년 6월 ~ 7월이 아무르 강 하류 지역이 완전한 무법천지였고, 당국은 질서 회복에서 완전히 물러났고, 어떤 비판도 견딜 수 없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트리피츤이 이끄는 군사 혁명 본부가, 즉 대다수 주민의 이익을 위한 폭력 독재 (‘적색 테러, красный террор’)를 확립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6월 21일 야코프 트리피츤은 다음 명령에 서명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조직이 농촌 집행위원회의 임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암군-께르비 지역의 군사 혁명 본부는 폐지합니다. 그리고 대중은 소비에트 권력 조직의 일반 원칙에 따라 새로운 평의회 조직을 위한 선거에 초대됩니다.”
야전 법원의 개설
뒤늦게나마 최전방군 야전법원이 만들어졌다. 6월 29일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특별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법원 판단은 다음과 같은 정치적 성격에 따라 달라집니다 : 백파군대 소속, 도발, 거짓 소문 퍼뜨리기, 지휘관 명령 불이행 및 탈영에 대한 혐의.”
조선인 (사할린) 의용군들의 통합 부대 조직
내가 말했듯이 파르티잔에는 중국인, 조선인, 지역 원주민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인들은 조선인 의용군 부대(корейский добровольческий отряд)로 통합되었습니다. 인종간 갈등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불화를 방지하기 위해 야코프 트리피츤은 특별 명령을 내립니다.
조선인과 조선인 통합 부대의 시련
『로농군대, 국제주의 군대인 우리 군대 유격대원 중 일부는 국적을 이유로 조선인 동지들에 대하여 난폭한 행동을 하고 있다. 이 파르티잔들은 조선인들을 모욕하고, 무례하게 꾸짖고, 억압하고, 음식과 물건을 빼앗고, 일부 파르티잔(조사가 끝날 때까지 이름이 아직 공개되지 않음)은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한 이 조선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기 타이가 숲에서 고통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리피츤의 조선인 의용군 비호
“그러한 행동은 악당들의 어리석은 행동일 뿐만 아니라,
붉은 군대의 완전 부끄러운 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나는 이 극악무도한 농담에 모든 파르티잔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자신의 힘으로 이 악과 싸우고, 노동자와 농민의 권력을 성실하게 옹호하고 인터내셔널(интернационал)을 옹호하는 모든 동지들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가해자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조치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체포하여 법정에 넘깁니다......
소비에트 정부의 숨은 적이며
우리 파르티잔 대열에 불화를 일으키려는 사람들만이 조선인 파르티잔들을 모욕하고, 파르티잔에게 다른 파르티잔들을 괴롭히도록 지시합니다. 붉은 군대 전체를 대표하여 조선인 동지들에게 연설하며, 우리는 그들을 동지, 형제로 맞이하고 만민의 형제애, 모든 나라 노동자들의 형제애라는 우리의 이념을 반대하여 조선인 파르티잔들을 모욕하는 개별 러시아 파르티잔의 행동에 항의합니다.
일부 파르티잔들이 계속해서 조선인을 모욕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억압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도발자, 노동자 농민 권력의 반대자, 국제적(интернационал) 이념의 적으로 간주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체포되어 야전 군사 법원에 회부될 것입니다.”
저자 스말야크의 주장
나는 이 문서를 거의 전부 인용했습니다. 일부 ‘트리피츤의 강도 갱단’은 여전히 계속해서 부르는 것처럼 이러한 호소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르티잔 부대 지휘관들인 라브로프-트그라프(Лавров-Тигров), 스트롈쵸프-쿠르바타프 등은 트리피츤에게 군대의 분해가 시작되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은 트리피츤에게 니콜라예프스크의 피난 상황을 설명하고 니콜라예프스크 피난민들의 대피를 더 잘 조직하기 위해 아무르주의 블라가베셴스크로 빨리 가라고 조언했습니다.
(※ 블라가베셴스크는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곳과 가까운 도시이다. 현재는 아무르주의 ’주도’이다.)
1920년 7월 4일,
야코프 트리피츤은 파견 부대와 함께 ‘중앙 소비에트 정부와의 연락을 회복하고 피난민을 위한 식량 수령과 블라가베셴스크로 추가 피난을 위해’ 아무르 주의 블라가베셴스크로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안드레예브, 일제 주구, 백파 잔당들의 반란과 트리피츤의 체포
그러나 1920년 7월 어느날 아침. 야코프 트리피츤, 니나 레비제바 및 그들의 내부 조직원들이 안드레예브 일파의 기습공격을 받고 체포되었기 때문에 여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 과거 니항에서 니항 조선인 민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던 자들도 기습공격에 가담하였다가 조선인들 사이에서 반역자로 간주되었다.
안드레예브는 아무르주 자유시에 도착하여 최소 3차례의 살해공격을 받았다. 소련시대에 안드레예브가 일제로 도주한 사실은 비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았다.)
1920년 6월 중순의 1만 5천여명 피난민 상황
1920년 6월 중순까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온 대다수의 피난민들은 피난의 중간 단계쯤인 께르비(오늘날의 도시이름은 Село имени Полины Осипенко, ’실로 이미니 빨리느 아시펜카’, 니항에서 서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300킬로미터. 자유시에서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588킬로미터 정도) 지역의 금광 일대에 도착했습니다.
15,000여명의 피난민들을 위해 계획된 께르비 마을에서 5,452명의 피난민이 멈췄으며 그 중 2,351명의 어린이가 있습니다.
작은 니콜라예프스키 광산(Николаевском находилось)에는 3,216명이 있었고 그중 1,355명은 어린이였습니다.
께르비의 식량난, 주택난
기본적으로 피난민들은 추운 날씨가 시작될 때까지만 살 수 있는 바지선과 텐트들에 수용되었습니다. 식량 공급은 극도로 제한적이었습니다. 밀가루와 곡물은 1920년 9월 중순까지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철은 좋았지만, 나중에 사용할 물고기를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 왜냐하면 소금이 없었습니다. 굶주린 피난민의 유일한 구출 방법은 추가적인 피난뿐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해했습니다.
어디로 피난 갈 것인가?
아무르강 하류 주민들의 추가 대피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암군강과 아무르강을 따라 하바로프스크까지 가는 수상 교통로이고,
다른 하나는 께르비에서 에킴찬(Экимчан)까지의 타이가 숲의 도로를 따라 가서,
셀렘즈이(Селемджи, 혹은 실림자강)강의 상류에 위치합니다. (373 베르스타, 약 380킬로미터 거리) 강을 따라 더 나아가, 배를 타거나 강가를 따라 스토이바 창고까지 갑니다. (112 베르스타, 약 112킬로미터)
스토이바에서 제야강을 따라 증기선을 타고 블라가베셴스크까지 가는 것입니다.
매우 편리하고 쉬운 첫 번째 선택가능 경로가 일본군에 의해 폐쇄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번째 경로만이 남았습니다.
(※ 이 무렵 아무르주의 자유시, 블라가베셴스크는 일본군이 물러나고 볼셰비키가 해방시킨 상태였다. 상당수의 아나키스트와 맥시멀리스트들도 블라가베셴스크 일대에서 일제 침략자와 백파공격에 맞서 볼셰비키 편을 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수개월 후에는 일제의 간도토벌과 만주친일군벌, 백파군대의 공격에 쫓긴 한국 독립군까지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로 모여들게 된다.)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온 트리피츤은 블라가베셴스크 당국과 피난민의 이동 경로를 조정했습니다.
주요 운영 본부 의장 :
“총, 포탄, 탄약통, 자동차, 휘발유, 가장 중요한 라디오와 같은 귀중품 대피를 시작하고 필요에 따라 다른 장소에 설치할 수 있도록 모든 부속품들을 가져가는 것이 좋습니다.
군대를 대피시키고, 매우 필요한 전신 및 전화선, 절연체, 갈고리 장치에도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암군(Амгуни)에서 께르비 - 에킴찬 - 스토이바 (Керби — Экимчан — Стойба)방향으로 대피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당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르 지역 당국과의 접촉을 위해 니콜라예프스크 지역의 파르티잔 붉은 군대 본부 대표인 네기예비치-스루차이느이(Негиевич-Случайный)가 아무르주의 블라가베셴스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에서는 니콜라예프스크의 피난민에 대한 태도가 모호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아무르강 하류 주민들에게 빈약한 보급품들을 공유했고(제공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트리피츤이 블라가베셴스크에 도착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내전기 동시베리아의 다른 지역 사람들은 자기 앞가림에도 바쁜 형편
5월 말,
트리피츤 부대의 네기예비치-스루차이느이는 트리피츤에게 피난민들의 대피 경로를 따라 식량 공급 지점을 준비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에 대해 알렸고, 추가 보고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추가 보고서) 블라가베셴스크는 우리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고 덧붙입니다. 내가 이미 당신에게 말한 것을 준비하는 데 많은 노력이 들었습니다.
(그는 귀리 23,000푸도프, 쌀 105푸도프(пудов), 기장 800푸도프, 소금 300푸도프, 기름 300푸도프, 등유 200푸도프, 비누 50푸도프, 부츠 – 1000켤레, 따뜻한 속옷 – 3000개를 포함하여 27,000 푸도프를 스토이바에 배달했습니다. - 저자 스말야크)
거기에는 철저한 통제와 여러 면에서 거부가 있었습니다.
당신들 덕분에, 일본인들로부터 많은 것을 견뎌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아무르강 하류 사람들에 대한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의 부정적인 태도는 에피소드가 아니라 일련의 행동이었습니다.
(※ 러시아 대기근 시기 아무르 주로의 피난경로에 피난민들을 위해 준비된 식량은 상당한 양이다. 적든 많든 식량지원은 분명 있었다. 물론 한국에 잘못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인 이르쿠츠크파가 했다는 주장은 믿을 수 없다.
한국에서 과거 역사적 사실로 잘못 알려진 이르쿠츠크파의 일방적인 자화자찬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등의 주장에 따르면, 사할린주 출신 고려인 의용대의 선발대중 일부가 흑룡강을 거슬러 상류방향으로 올라가다가 일본군과 전투후 1920년 8월경에 흑룡주의 인에 도착하였다.
(이 것은 니항에서 하바로프스크 사이의 아무르강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을 고려했을 때 불가능한 것이다. 비무장 민간인을 가장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또는 야코프 트리피츤이 친일파에 의해 살해되자 하바로프스크와 인 지역의 다른 파르티잔 부대에 가담하려고 했다가 한국 독립군들이 러시아측의 협조 아래 아무르 주에 집결하는 것을 알고 다시 자유시 일대의 한국 독립군 부대에 합류하고자 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3명의 대표(고명수, 선우정? 등)를 블라가베셴스크의 대한국민의회에 파견하여 께르비에서 출발한 사할린주 의용군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자기들을 오하묵(吳夏黙)의 한인보병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라 약칭)에 임시 편입하여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자유시의 한인 보병자유대대에서는 도로상으로 700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께르비와 중간쯤의 스토이바(Стойба) 방향으로 대표 5명을 파견하여 식량공급 등 니항군대의 자유시 도착을 도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에서 이러한 식량보급을 한국계 이르쿠츠크파에서 주도했다는 자료는 없다. 러시아측에서 피난민과 트리피츤의 잔존 부대를 위해 보급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의 주장과 같이 니항부대의 일부가 아무르강을 거슬러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블라가베셴스크에 도착했다면
오늘날 공개된 바와 같이, 어쩔 수 없이 트리피츤 부대와 함께 피난길에 올라야 했고, 안드레예브 등과 일제 밀정 활동을 하였기에, 일본군의 도움으로 무사히 자유시에 도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6월 25일 트리피츤의 전화 메시지
6월 25일 야코프 트리피츤이 전화 메시지를 보냅니다.
블라가베셴스크의 군사본부(Военревштаб).
사본 : 공산주의 볼셰비키 위원회, 맥시멀리스트 위원회.
“니콜라예프스크 지역의 군사 혁명 사령부가 께르비에 도착했고, 피난과 관련된 일들에 익숙해지면서, 당신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피난을 조직하고 피난민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합니다.
당신들을 책망하고 싶지도 않고, 당신들이 일부러 그런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우리는 노동자-농민의 군대인 근로 인민의 권력기관인 군사 혁명 사령부가 전혀 우리를 향해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께르비 방어 준비
많은 면에서 피난민 구출 가능성은 일본군이 암군 강을 넘어 께르비까지 공격해올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었습니다.
암군강의 입구를 보호하기 위해 사소프의 지휘하에 암군-마리인스크 전선 부대가 만들어졌습니다. 전선 참모장은 카초바-바르조프(Коцуба-Борзов)였습니다. 이 전선에는 여러 파르티잔 부대가 포함되었습니다.
암군 강 어귀에 위치한 비다(Беда) 농장에는 80명에 달하는 셰몐 바쳬예프(Семен Бачеев)부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트리피츤에 의해 처형된 부드린이 조직했던 이전 광산 연대 파르티잔이었습니다.
강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크냐제바(Князево) 마을에 150명 규모의 알렉산드르 리아도르스키(Александр Леодорского) 중대가 주둔했습니다.
세르고-미하일로프스키(Серго-Михайловском) 마을에는 전직 츠니르라흐 요새 포병으로 구성된 첫 번째 중대가 주둔했고, 니키타 파블라프(Никита Павлов)가 지휘했습니다.
두 번째 요새포병 중대는 알렉산드르 니키파라프(Александр Никифоров)가 지휘했고, 사칼로프스카이(Соколовской) 토지 근처에 위치했습니다.
두 중대의 파르티잔 총수는 약 350명입니다.
안드레예브(Иван Тихонович Андреев)와 친일파들의 암약
그들에 대한 일반적인 지휘는 암군-마리인스크 전선의 세르고-미하일로프스키(Серго-Михайловского) 지역 책임자인 안드레예브가 수행했습니다.
한국독립운동사에 ‘1921년 자유시 참변’이라는 사건이 분명 기록되어 있고
러시아측 역사 자료에서
아무르 하류 지역 내전에서 안드레예브가 한 역할을 고려하여 안드레예브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드레예브와 바실리 박(박병길)
안드레예브는 1884년 피트라그라드(Петроградской) 지방의 두비키(Дубки) 마을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러시아로 귀화한 핀란드인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선원, 화부, 조타수로 발트해 일대의 상선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핀란드어와 덴마크어를 포함한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습니다. 안드레예브는 15년 정도 차르군대에서 군복무를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안드레예브의 군복무 기간과 최종 계급, 니콜라예프스크 항구에서의 역할, 아무르주에서 경찰서장 혹은 경찰국장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안드레예브는 한국의 몇몇 도서와 달리 니항 주민 1만 5천여명이 대피하였다고 주장하고,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할린섬의 거부 페트로프스키(Петровский, Филипп Емельянович)와 같이 사할린섬 북부가 소련에 반환될 때 일본으로 갔다가 중국 상해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무렵, 중국 상해는 만주의 하르빈과 함께 러시아 백파들의 거점중 하나로 알려졌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장교 학교를 졸업하고 소위가 되어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용감함을 대해 그는 두 개의 세인트 조지 훈장(двумя Георгиевскими крестами)을 받았습니다. 1917년 2월 혁명이후 그는 대가족과 함께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니항)로 돌아와 그가 만든 시부치(Сивуч, 바다사자) 어장에서 어업을 시작했습니다.
1918년 일본 시베리아 침략군이 아무르강 하류를 점령하는 동안, 이 무렵 안드레예브가 포병 전문가로 니항 일대의 백파 군대에 동원되기 전까지는 어업에 계속 종사하였습니다.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부대가 1920년 2월경 니콜라예프스크를 막았을 때, 그는 백파군대에서 파르티잔 편으로 넘어갔습니다. 안드레예브는 파르티잔들이 1918년에 해체된 츠니르라흐 요새의 대포를 복구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니항)에서 퇴각한 안드레예브는 포병을 지휘한 후 암군-마리인스크 전선의 세르고-미하일로프스키(Серго-Михайловском)방면의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안드레예브의 부대는 주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거주자로 구성되었습니다.
트리피츤에 의해 집, 재산 및 가족을 잃고 반강제적으로 피난민이 되어 기아에 허덕이는 운명이 된 사람들의 기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예브는 과연 트리피츤 부대에 침투한 일본 밀정인가 ?
안드레예브는 트리피츤에 대한 음모를 이끈 일제와 백파의 밀정입니까?
특히 아무르주 자유시(‘스바보드니’ 라고도 한다) 일대에 있다가 그는 1921~1922년경 이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사할린섬 북부에 살았지만 그를 일본 요원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1925년 소련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되고 일본군이 사할린섬 북부에서 철수할 무렵(1922~1925년경) 그는 사할린섬 북부를 떠났습니다. 그는 1933년경 중국 상하이에서 망명중 사망했습니다.
트리피츤과 파르티잔 지도부를 향한 음모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간단히 대답하기 위해, 아무르강 하류지역 사람들은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역겨운 수단을 사용할 수 있었고 끔찍했던 볼셰비키들의 실험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 일본 밀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시의 파괴와 주민들의 고통
우선, 우리는 대피중 도시의 파괴와 주민들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타이가 숲을 통한 피난길의 어려움, 식량 부족, 대피 경로에 출몰한 강도 및 산적, 이러한 주제 및 기타 주제에 대한 다양한 소문. 공통점은 트리피츤이라는 아나키스트가 비극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입니다.
트리피츤의 금화 약탈설
트리피츤이 피난민은 운명에 맡기고, 소수의 원정대와 함께 블라가베셴스크로 이동하기 위해, 이미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압수한 금 혹은 금화를 보냈다는 소문이 계속되었습니다.
(※ 당시 니항 일대의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권을 장악하였던 일본인 ’시마다’가 발행한 돈이 화폐로 통용되고 있었으나, 금으로 만든 러시아 루블화는 가치를 상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금이라고 하면 니항 주변의 금광에서 채굴한 금과 금으로 만든 돈(루블화)을 말한다.)
(사실, 라브로프-티그라프(И. Лавров-Тигров)의 지휘하에 소수 파르티잔 부대가 실제로 하바로프스크로 갔습니다.
그는 피난민을 위한 식량을 사기 위해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금을 전달해야했습니다. 이 금들의 운명은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라브로프-티그라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가 보이카-파블라프(Д. Бойко-Павлову)에게 금을 넘겼다고 주장했습니다.)
(※ 당시 니항, 연해주 일대에는 내전시기 러시아의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종이돈 루블화는 가치를 상실하다시피 하여, 외국화폐와 금화, 은화 등이 화폐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금’이라고 하면 일반적인 거래를 위해 쓰이는 화폐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피난길에 계속된 유언비어들
다른 사람들의 대피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모든 아프고, 늙은 피난민들이 근절될 것이며, 이를 위해 구덩이를 파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습니다. (실제로는 무선 송수신소의 기초를 짓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니나 레비제바가 유대인이며, 우유로 목욕한 다음 아이들에게 주었고,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대피한 고아들을 독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신 교환원이 편지 메시지 전달에서 실수를 했습니다. 그는 ‘고아원에 보내기 위해’를 ‘고아들을 중독시키기 위해’로 잘못 작성했습니다.)
이러한 유언비어들과 추측들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안드레예브의 반란 성공 원인
트리피츤을 전복하기 위한, 안드레예브의 지도하의 파르티잔 포병부대원의 성공에 대한 원동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략적 이유로 트리피츤은 1연대 아무라프-카자다예프(Б. Амурову-Казадаеву) 사령관에게 우스치-암군스카예(Усть-Амгуньское) 캠프에서 일본인을 몰아내고, 그곳에 파르티잔 방어 기지를 만들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작업은 파르티잔 중대의 지휘관 리아도르스키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는 힘이 부족하여 이 전투 임무 수행을 거부했습니다.
명령 불복종자들의 해임 결정
6월 27일 트리피츤은 우진스키 창고(Удинский склад)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군사 협의회 회의를 열었고 암군-마리인스크 전선의 몇몇 지휘관을 해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방면의 사령관이었던 사소프에게 맡겨졌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사소프 휘하에 있던 리아도르스키와 안드레예브가 1920년 6월 19일 파르티잔 붉은 군대의 제 101호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전투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그 자리에서 총살당합니다.
현재로서는 부적절한 조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라프-카자다예프(Б. Амурову-Казадаев)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우진스크(Удинск)로부터 전방 전선으로 갔습니다.
트리피츤의 안드레예브에 대한 명령
1920년 6월 29일 트리피츤은 전직 포병 지휘관 출신 동지(안드레예브)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안드레예브는 포병 창고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이것은 안드레예브가 이런 포병 창고가 위치한 께르비에 도착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해당합니다. 안드레예브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안드레예브 일파의 반란 시작
아무라프-카자다예프(Амуров-Казадаев)가 안드레예브 일파를 처리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안드레예브는 도착한 사람들을 무장 해제했습니다.
같은 날 저녁, 안드레예브와 리아도르스키는 주로 니콜라예프스크의 전 거주자인 지지자들을 배에 태운 후, 암군강을 거슬러 우진스키 창고로 올라갔습니다.
전직 고려인 부대장 사소프의 체포
그들은 총을 쏘지 않고 전선 사령관이며 상관인 사소프를 무자비하게 체포했습니다.
러시아 기록에 독립유공자 박병길(В. Пак)의 등장
아노쉬킨(М. Аношкин), 리아도르스키, 팔리타예프(Е. Полетаев), 바치예프(С. Бачеев), 바실리 박(В. Пак, 박병길), 파블라프(Н. Павлов), 니키파라프(А. Никифоров) 및 니콜라예프(Н. Николаев)로 구성된 임시 군사 혁명 캠프 본부가 만들어졌습니다. 안드레예브는 이 본부의 회장이자 반란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반란군들은 께르비를 기습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 박병길은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9쪽에 따르면 니항 민회의 주무(主務)였다고 합니다. 대체로 일본 영사관 협력단체인 친일단체의 간부 혹은 회장을 한 것은 맞습니다.)
트리피츤의 체포
1920년 7월 4일 새벽에 안드레예브가 이끄는 반란군 파르티잔들은 께르비 마을의 남동쪽 외곽에 상륙했습니다. 트리피츤은 증기선 암군네츠(Амгунец)에 본부를 두었습니다.
비지마나프(И. Видьманов)의 지휘하에 그에게 충성하는 직계 부대는 두 번째 배인 무람(Муром)에 있었습니다.
강변 근처의 빈 창고에는 또 다른 파르티잔 그룹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야코프 트리피츤 편에는 최소 600명의 잘 무장한 파르티잔들이 있었습니다.
트리피츤의 체포와 지지자들의 무장해제
트리피츤의 체포와 께르비의 수비대의 무장 해제는 어땠습니까? 증기선 암군네츠는 강변 근처에 서 있었지만 통로에 배들은 없었습니다. 강은 조용합니다.
하얀 안개는 아직 물에서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모두 잠들어 있습니다. 리아도르스키, 바실리 살라스킨(Василий Салазкин), 표트르 카발료프(Петр Ковалев), 바실리 박(박병길), 야코프 예시파크(Яков Есипов) 등을 포함한 파르티잔 그룹이 타고 있는 보트가 증기선 암군네츠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근무중인 장교는, 리아도르스키를 알아보았고, 근무중인 장교가 끝내도록 허용했습니다.
리아도르스키가 근무중인 장교와 이야기하는 동안, 다른 파르티잔 그룹이 배에 탑승하고 총을 쏘지 않고 사령관 트리피츤의 경호원들을 무장 해제했습니다. 리아도르스키는 트리피츤이 자는 선실로 갔다.
리아도르스키(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Леодорский)는 누구인가 ?
트리피츤의 체포가 리아도르스키에게 맡겨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리아도르스키는 아무르강 하류 지역인 수하노바(Суханово) 마을의 주민이었습니다. 1919년 시다로프(Сидоров)라는 성으로 께르비 인근 광산의 산악 경찰로 일했습니다. 치미르마노프카(Циммермановка) 마을에서 그는 자발적으로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데올로기적인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라고 소개했고, 곧 마리인스크에서 파르티잔편으로 넘어간 미드베제프(Медведев, 메드베데프) 대령의 백파군대 병사들 중 한개 중대병력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트리피츤의 신뢰를 누렸습니다.
트리피츤의 체포 과정에 대한 회고록들
(순순히 체포되었다.)
많은 회고록들에서 트리피츤의 체포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매우 상세합니다. 차이점은 사소한 세부 사항에만 있습니다. 리아도르스키가 트리피츤의 선실을 두드렸습니다.
- “누구세요? 뭐가 필요하세요? ”
트리피츤의 졸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어주세요. 저입니다. 리아도르스키.
당신의 요구가 도착하였고, 그리고 사소프에게서 긴급한 꾸러미를 가져 왔습니다.”
- “리아도르스키? 체포되지 않았나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침까지 기다릴 수 없나요?”
- “일본군이 예상치 못한 출격을 하여 우리 전초기지 앞에 나타났습니다. 보고서의 세부 사항.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오두막 문이 열리고 트리피츤이 문지방에 나타났습니다. 리아도르스키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고 트리피츤은 꾸러미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 “꾸러미를 주세요.”
조금 물러서서 리아도르스키는 리볼버 권총을 들고 트리피츤을 겨냥했습니다.
- “손 들어 ! 당신은 체포되었습니다.”
박병길의 활약 (일본군의 도움으로 박병길이 트리피츤 체포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박병길과 리비츠키(Левицкий)는 뛰어 올라 트리피츤을 잡았습니다. 카발료프(Ковалев)는 선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지만 트리피츤은 그를 불렀습니다.
- “어디에? 거기에는 벌거벗은 여자가 있다!
그녀가 옷을 입고 나가게 한 다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비제바는 이미 문지방에 서 있었고, 트리피츤의 어깨에 가운을 던졌습니다.
- “무슨 일이야? 왜 불안해 합니까?”
- “당신을 체포합니다. 복도로 나가십시오.”
리아도르스키가 레비제바에게 명령했습니다.
- “누가 반란을 일으켰습니까?
왜 전선이 포기되죠?”
- “전선은 모스크바의 명령에 충성하는 붉은 전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암구나-트르스카바(Амгуно-Тырского) 전선의 모든 수비대원 전체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라고 리아도르스키가 대답했습니다. 트리피츤과 레비제바는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총격 없이 반란군은 께르비의 수비대를 무장 해제했습니다.
※조선인 의용대원들도 박병길이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는 조선인 사이에서도 충돌이 없었다고 합니다.
증기선 무람(Муром)도 무혈 무장해제
증기선 ‘무람’에서 그들은 강변에 접근하는 무장한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경보 신호에 따라, 반란군 전투원들이 해변으로 뛰어 증기선 사슬 아래에 눕습니다. 부대장 비지마노프(И. Видьманов)는 증기선 무람에 없었습니다.
그의 부관인 알샨스키(И. Ольшанский)는 부대원들에게 전투 준비를 명령했지만, 알샨스키가 개인적으로 아는 파르티잔임을 알게 되었을 때 전투 명령은 없었습니다.
파르티잔 미하일 카자치코프의 기억들
파르티잔 미하일 카자치코프(Михаил Казачков)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그날 아침 형 알릭세이는 부대에서 근무중이었습니다.
일부 군인들이 소총을 준비하고 증기선 무람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고 그는 경보를 울렸습니다. 놀랍게도 접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지인들과 그의 남동생 이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가까이 오라고 소리쳤다. 이반이 와서 알릭세이에게 트리피츤과 그의 본부가 이미 체포되었으며 파르티잔이 그들을 재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알릭세이에게 저항하지 말고 무기를 내려 놓으라고 조언했습니다. 이반은 모든 것이 정리되는 즉시 무기가 반환될 것이라고 형을 안심시켰습니다.
이 중대는 스스로 무장 해제했습니다.”
께르비의 전체 수비대는 거의 같은 방식으로 무장 해제되었습니다. 체포된 약 500명의 사람들이 철제 바지선에 갇혔습니다.
트리피츤에 충성하는 부대의 항복
트리피츤에 충성하는 부대는 왜 전투 없이 반란군에게 항복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것은,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쓴 부진-비치였습니다.
“트리피츤은 자신의 실수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가 불타지 않았다면 주민들이 대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니콜라예프스크 주민들의 피해
트리피츤은 니콜라예프스크 사람들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높은 가격에 지불하도록 강요했습니다.
1920년 7월 6일 께르비에서 반란군 총회가 열렸습니다.
현재 상황에 대한 보고서는 임시 군사 혁명 본부 안드레예브 의장이 작성했습니다. 회의 결의안은 다음과 같이 명시했습니다.
“수비대 회의는 군사 혁명 사령부의 호소와 이 문제에 대한 보고서들을 듣고, 안드레예브, 아노쉬킨(Аношкин) 및 니차예프(Нечаев)는 그들의 견해를 공유하고 승인합니다. 그는 군사혁명본부에 자신이 시작한 일을 과감하게 수행하고, 우리들의 지지를 희망하며,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와 함께 소비에트 노동자 농민 권력의 이상을 함께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청합니다.”
체포된 사람들과 관련하여 공공 인민 법원에서 그들을 재판하기로 결정했으며, 이에 대해 께르비 지역의 전체 인구에서 즉시 선거를 실시해야 합니다.
트리피츤과 동료들에 대한 조사와 재판의 시작
신문 <크라스니 클리치(Красный клич, 빨간 전화)> 의 보도
1920년 7월 7일,
신문 <크라스니 클리치(Красный клич, 빨간 전화)> 는 임시 군사 혁명 사령부의 명령을 발표했습니다.
“올해 7월 6일 수비대 총회 결정 :
인민 법원의 선출된 구성을 보완하기 위해 파르티잔과 나머지 민간인으로부터 모든 시민의 대표, 즉 25명중 한명씩의 대표와 함께 트리피츤과 그의 부하들의 유죄를 고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군사 혁명 사령부는 트리피츤과 그의 부하 사건을 독점적으로 고려하기 위해, 모든 군부대, 단체, 노동조합들이 인민 법원 재판을 위한 대표를 즉시 선출할 것을 제안합니다. 선출된 대표는 위임장을 가지고, 내일 7월 8일 오전 8시까지 조사 위원회 구내에 나타나야 합니다.”
103인 법원의 구성
이것이 법원 구성원 수의 이름을 딴 ‘103인 법원’이 등장한 방식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트리피츤의 재판을 위한 수비대 회의에서, 도주 또는 강제 석방을 피하기 위해 주요 피고인을 족쇄로 묶는다는 결정이 있었습니다.
배 아이다(Аида)의 선박 정비사 오시파프(А. Осипов)가 자원하여 족쇄를 제작했으며, 파르티잔 대장장이 바스카프(И. Басков)가 자원하여 트리피츤을 묶었습니다.
‘103인 법원’의 자료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트리피츤에 대한 예비 심문은 조사위원회 위원장 다브이더프(Давыдов)와 회원 클리친(В. Клячин) 및 슬리파크(С. Слепак)가 수행했습니다.
트리피츤 심문 자료 발췌 내용
심문 자료에서 발췌한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문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답 :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수사위원회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는 판결을 승인했습니다.
문 : 누가 체포 명령을 내렸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수사위원회 자체가 체포하고 수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체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반혁명세력은 반드시 분쇄되어야 합니다.
사실, 나는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단지 혐의로만 체포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일반적인 지침을 주었지만 세부적으로 수행되는 방법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문 : 부드린을 체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부드린은 알려지지 않은 목표를 가진 중국인 부대를 조직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부대가 존재하던 니항의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문 : 당신의 힘? 트리피츤 또는 소비에트 권력?
답 : (피고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볼셰비키(공산주의자) 당원의 체포에 대한 문답
문 : 볼셰비키(공산당원)인 미진, 바클라나프(Бакланов), 카발요프(Ковалев) 및 베례조프스키(Березовский)는 왜 체포되었습니까?
답 : 니항 혁명 정부를 반대하는 음모에 대항하기 위한, 수비대 회의에서 비첸카의 요청에 따라 수행되었습니다.
문 : “무엇이라고, 그들도 공모자야?”
답 : 예.
그들은 혁명 사령부와 집행위원회에 반대하는 연설을 조직한 것으로 의심받았습니다. 조사위원회로부터 결정문 사본을 받았고, 나는 기소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는지, 이것이 잘못된 의혹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고 결정을 집행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문 : 왜 미하일 라리치(Михаил Ларич)를 쐈습니까?
답 : 파르티잔들에게 “우리는 트리피츤을 우리 자신들의 귀로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문 : 당신이 목적지로 선택했던 블라가베셴스크로 떠나기 전에, 의사 카이다라프(Кайдалов)와 광산 부대 지휘관 무르가보프(Мургабов)가 총에 맞았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답 : 무르가보프는 일본군이 아무르 강에 부실하게 배치된 기뢰밭을 뚫었을 때의 지휘관이었기에 총살되었습니다. 카이다라프(Кайдалов)는 위치에 가기를 거부하고 사령관인, 즉 나를 모욕했습니다.
문 :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니항)를 떠나기 전에 주민과 군대의 대피 계획을 세웠습니까? 피난민의 대피를 어디로 이끌 계획이었습니까?
답 : 그런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혁명 본부 구성원에 의해 발전되었습니다.
(귀중품들의 처리)
집행위원회는 또한 모든 귀중품들이 사피이스키(Софийский) 광산으로 보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라브로프-트그라프(Лавров-Тигров) 부대와 함께 32 ~ 38 푸도프(пудов)의 금, 모든 모피, 많은 금은으로 만든 물건과 보석을 보냈습니다.
(※ пуд는 오늘날 질량 단위로 약 16kg 정도이며, 금은 최소 500kg ~608kg 이상이 니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도 엄청난 거금이었다.)
문 : 집행위원회 위원이라고 하면 철수 전 혁명위원회를 이끌었던 5명을 말하는 건가요? 집행위원회의 다른 구성원은 더 이상 도시에 없었습니다.
답 : 예, 저는 레비제바, 젤레진, 아우셈, 페리구다프(И. Перегудов) 및 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동료에 대한 답변
문 : 집행위원회의 일부 구성원이 당신에게 독재의 위험성에 대해 말했고, 신뢰를 일으키지 않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당신에게 더 가까이 데려왔다고 말했습니까?
왜 라프타, 니호친(Нехочин)과 같은 명백한 범죄자들을 처벌에서 풀어주셨습니까?
답 : 전선에 필요하고 유용했습니다.
나는 라프타를 아주 잘 압니다. 라프타에 따르면 니호친(Нехочин)은 그에게 매우 필요했습니다. (르조프(Рыжов)는 고려인(조선인) 부대장(командиром корейского отряд)으로 전선으로 떠났기 때문에 살아 남았습니다.) 라프타 뒤에는, 나는 심각한 범죄를 알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처형될 필요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트리피츤은 밀정 비첸카의 잔학행위를 몰랐다고 주장함
문 : 당신은 왜 비첸카의 잔학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까?
답 :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문 : 하지만 비첸카가 과거에 칼미코프(동시베리아의 백파 군인, Калмыков Иван Павлович. 1890년경 출생 ~ 1920년경 만주에서 사망) 일당의 첩자로 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를 포격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어떻게 그에게 그런 신뢰를 주었습니까?
답 : “나는 비첸카가 이미 전선에 나갔을 때 이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트리피츤과 동료들에 대한 재판의 시작
트리피츤의 심문은 새벽에 끝났고 1920년 7월 8일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피에는 피, 죽음에는 죽음
1920년 7월 8일 점심 식사 후 파르티잔 클리친(В. Клячин)은 ‘103인 법원’ 개정을 발표했습니다.
압친니코프(А. З. Овчинников)가 의장으로, 부의장에는 바라비요프(П. Я. Воробьев)와 미신(И. П. Мишин)이 선정되었습니다.
사무국에는 우소프(В. Усов), 라바나파(Н. Лобанов), 프치츤이 포함되었습니다.
법원 재판은 마을 학교 건물에서 열렸습니다. 작은 방은 재판에 참석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방에는 법원 구성원 외에도 다양한 조직의 대표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학교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재판이 열린 방의 열린 창문에서는 마을 밖 강둑에서 칼에 찔려 숨진 12~13세 소녀의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103인 법원의 구성
‘103인의 법정’은 일반 법정과 다릅니다. 사법 절차는 어떤 대규모 팀의 총회와 비슷합니다. 검사도 없고 변호인도 없습니다. 이러한 기능은 주민들이 선택한 대의원이 수행합니다.
(니항의 전직 재판장이었던 들진에 대한 압친니코프의 심문 요약)
전직 니콜라예프스크의 재판장인 들진(Борис А. Дылдин)이 증인으로 첫 심문을 받았습니다. 심문은 압친니코프(나중에 친일파로 밝혀짐)가 했습니다. :
문 : “누가 대량 처형 명령을 내렸습니까? ”
답 : 전적으로 트리피츤이 했습니다.
문 : (들진이 최고책임자였던)조사위원회 결정외에도 사형이 집행된 사례를 알고 있는가?
답 : 예, 그런 처형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트리피츤의 방첩부대에 의해 수행되었을 것입니다 ......
문 : 대량 처형에 반대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트리피츤이 오른쪽과 왼쪽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나는 더 이상 저항하고 항의할 수 없었습니다. 군중은 저항해야 했습니다.
문 : 트리피츤이 피에 굶주린 것에 대해 항의할 수 있었습니까?
답 : 아니, 최근에 나는 그와 다투었고, 그는 나를 니콜라예프스크에서 께르비로 쫓아냈습니다.
문 : 우진스크(Удинск)의 테러를 막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답 : 나는 더 이상 그쪽에서 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중에 사소프의 총에 맞을 운명이 될지도 모를 아이들을, 비첸카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께르비로 데려 왔습니다.
바라비요프(친일파)의 트리피츤 심문
트리피츤은 바라비요프(П. Воробьев)에 의해 심문되었습니다.
문 : 당신은 어느 정당에 속해 있습니까?
답 : 아나키스적인 개인주의자(Анархист-индивидуалист).
문 : 니콜라예프스크에 거주했던 일본인 거류민들에 대한 파괴에 대해 유죄를 인정합니까?
답 : “물론입니다. 제가 했습니다.”
(니항의 파괴는 트리피츤의 단독 결정이 아니었다. 책임만 트리피츤과 동료들이 졌다.)
문 : 니콜라예프스크 시는 누구의 명령에 의해 불태워졌습니까?
답 : 우리 혁명 사령부의 결정에 따라.
문 : 누가 사할린 주 일대의 민간인을 말살하라고 명령했는가?
답 : 단지 반혁명분자만 파괴되었습니다.
(쿠데타를 음모한 공산주의자는 트리피츤의 명령으로 처형됨)
문 : 누구의 명령에 따라 저명한 소비에트 인물인, 부드린 동지, 이바넨카(Иваненко), 미진 등이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처형되었습니까?
그들은 어떤 혐의를 받았습니까?
답 : 그들은 내 명령에 따라 총에 맞았습니다.
문 : 라프타, 비첸카, 르조프(Рыжов, 조선인부대장출신), 니호친 등과 같은 범죄자들로 자신을 둘러싼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나는 하바로프스크에서의 라프타의 범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나쁜 점을 알지 못했습니다.
문 : 당신은 자신의 방첩부대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
답 : ......아마......
나는 모두를 기억하지 못한다. 라프타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하르코프스키(Харьковский Макар Михайлович), 알샨스키(И. Ольшанский)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거의 사소프였습니다. 이 작은 그룹의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과 여러 가지 일들, 그리고 조사위원회를 감독했습니다.
(트리피츤의 질문에 대한 바라비요프의 답변 요약)
트리피츤이 바라비요프에게 질문합니다.
트리피츤의 질문 : “제가 알 수 있도록 저를 정식으로 기소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
“당신은 저를 무엇에 대해 고발했습니까 ?”
바라비요프는 살해당한 소녀의 시체 근처에 있는 학교의 열린 창문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라비요프의 답변 : 당신은 주민들에 대한 파괴의 주범으로, 소비에트 정부의 주요 지침 이행을 회피한 독재자로 기소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피해자가 있습니다......
트리피츤의 답변 : 나는 내가 독재자였으며 볼셰비키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설명해 주세요. 제가 혁명가로 재판받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반혁명가로 재판받고 있는 건가요?
※ 트리피츤을 재판했던 바라비요프(П. Воробьев), 압친니코프(А.З. Овчинников), 안드레예브(니항 및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의 포병부대장) 등은 나중에 일제로 도주한다.
바라비요프의 답변
(트리피츤의 질문에 대한) 바라비요프의 답변 :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명백한 신뢰 훼손, 무고한 사람들이 사망한 부당하고 잔인한 테러, 소비에트 정부와 공산당의 진로를 따르기를 거부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당신을 반혁명분자로 판단합니다.
니나 레비제바에 대한 심문 요약
그런 다음 니나 레비제바(Н. М. Лебедева)가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전체 심문을 다시 재생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녀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꺼리거나 대답을 거부했습니다.
젤레진에 대한 바라비요프의 심문 요약
바라비요프는 사할린주 지역 집행위원회 위원장 표도르 젤레진(Железин Федор Васильевич)을 심문합니다.
문 : 당신은 어느 정당의 일원입니까?
답 : 볼셰비키.
문 : 자신을 트리피츤의 공범자로 인식합니까?
답 : 전혀 아닙니다.
문 : 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시가 불탔습니까? 누가 명령 했습니까 ?
답 : 트리피츤의 개인 명령에 따라.
문 : 중앙에서 이것에 대한 명령이 있었습니까?
답 : 아무런 명령이 없었다.
문 : 부드린, 미진 등이 총에 맞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나는 죽은 부드린, 미진을 소비에트 노동자라고 생각합니다. 들진과의 합의에 따라 도시에서 대피하는 동안 트리피츤에게 부드린을 석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한 나의 보고서에 대해, 트리피츤은 그를 쏘라는 결의안을 내렸습니다.
오스카 쿠루친니이(Оська Крученный (Трубчанинов))에 대한 심문 요약
오스카 쿠루친니가 심문됩니다.
그는 70대입니다. 1874년부터 그의 삶은 범죄에 대한 형벌로 사할린 형무소의 감옥과 감옥을 거쳤습니다.
문 : 여성과 어린이 살해에 가담했습니까?
답 : 잘랐다(루비?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러시아어 약어 사용함). 사소프, 쿨리코프(Куликов)와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따라.
문 : 잘랐다고 ? (Рубили?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러시아어 약어 사용함)
답 : “잘랐다(?). 우리는 그것에 익숙하다.”
심문이 끝났습니다.
판결은 낭독되었고 법원의 모든 구성원이 니콜라예프스크 지역의 파르티잔 군대의 전직 사령관이었던 야코프 트리피츤이 다음과 같은 혐의로 기소되었다고 만장일치로 받아들였습니다. (판결의 형태는 유지됨).
<......이하 103인 법원의 트리피츤 판결 요약......>
“1920년 5월 22일부터 6월 2일까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시와 그리고 5월 22일부터 7월 4일까지 사할린 지역 내에서, 다양하게, 부분적으로, 무법적으로 공식적인 행동 없이, 민간인과 그 가족에 대한 불합리한 체포와 처형이 다수 허용되었습니다.
트리피츤이 5월 27일에 부드린, 미진, 이바녠카(Иваненко) 등과 같은 다수의 활동적인 소비에트 노동자, 공산주의자들을 충분한 근거도 없이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살인과 권력 남용,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투쟁입니다. 같은 기간 동안 트리피츤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니항)시와 사할린 주 일대의 농촌 지역의 민간인과 그 가족의 대량 파괴를 위해 부하들에게 여러 가지 명령과 지시를 내렸습니다.
대부분의 명령은 이미 수행되었습니다. 즉 그의 사무실이 가진 권한을 초과하여 살인과 살인과 폭력을 저지르도록 요청했습니다.
살인과 처형 명령
사실 트리피츤은 파르티잔의 일부 동지와 다른 부대에 대해, 충분하지 않고 심지어 이유 없이, 즉 권한을 초과하여, 살해 그리고 처형을 요구하는 여러 명령과 지시를 내렸습니다.
소비에트의 정책 반대
트리피츤은 붉은 군대 사령관의 위치에 있으면서,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 방향에서 이탈하여, 공무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신뢰를 분명히 훼손했습니다.
즉,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Российской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ой Федеративной Советской Республики)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 지역에서 파르티잔 군대 참모장을 지낸 니나 레비제바, 같은 본부 무장부서 부장 하르코프스키(Харьковский Макар Михайлович),
사할린주 지역 노동위원 아쳬빌리-파블루츠키(Оцевилли-Павлуцкий Иван Куприянович (Кирьянович)),
지역 집행위원회 위원장 표도르 젤레진,
사할린주 지역 식량위원 제트-파나마료프(Пономарёв Степан Лукич (Дед Пономарёв)),
암군-트리스키(Амгуно-Тырски) 전선의 사령관 사소프
앞서 언급한 범죄에 공모.
트루프차니나프(Трубчанинов) - 선동으로 자행한 민간인 살해와 고문.
인민 법원은 트리피츤, 레비제바(1895~1920), 하르코프스키(Харьковский Макар Михайлович), 젤레진, 아쳬빌리-파블루츠키(Оцевилли), 사소프 및 트루프차니나프(Трубчанинов)의 위의 범죄에 대해 유죄라고 판결했으며, 제트-파나마료프(Пономарёв Степан Лукич (Дед Пономарёв))는 무죄이지만 트리피츤 정부를 적극적으로 변호한 것은 유죄라고 판결했다.
양심의 지시에 따라 법원은 다음과 같이 결정했습니다.
사할린주 지역 인구의 약 절반이 사망하고 전체 지역이 황폐화되었으며, 지역 노동 주민들 사이에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신뢰를 지속적으로 약화시켰으며, 전 세계의 눈이 소비에트 권력의 정당성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총살형에 처해진) 시민
야코프 트리피츤(Тряпицын Яков Иванович, 1897년경 출생 ~ 1920. 7. 9. 사망), 니나 레비제바(1895 ~ 1920. 7. 9. 사망), 하르코프스키(Харьковский Макар Михайлович), 표도르 젤레진(Железин Федор Васильевич),
아쳬빌리-파블루츠키(Оцевилли-Павлуцкий Иван Куприянович (Кирьянович)), 사소프 예핌(Сасов-Беспощадный Ефим Варфоломеевич, 한 때 고려인부대장 역임), 투루프차니나프(Трубчанинов-Кручёный Иосиф Сидорович (Оська Крученый))
는 총살 분대에 의해서 사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제트-파나마료프(Пономарёв Степан Лукич (Дед Пономарёв))는 블라가베셴스크 시와의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 공공 사업에 배정되어 투옥될 것입니다.”
<......이상 103인 법원의 트리피츤 재판기록 요약 하략......>
이어 군사 본부의 승인을 거쳐 그날 저녁에 처형이 집행될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둘째 날에도 10명이 사형 선고됨
둘째 날에는 10명이 더 재판을 받았고 이들도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법원은 집단, 친척, 지인들로부터 체포된 파르티잔의 사면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대중을 달래기 위해 법원은 ‘처형’을 집행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처벌 조건은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에 있는 감옥으로 출발하면서 발표되었습니다.
(※ 죄수들을 께르비에서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압송하기 위해 러시아인 21명, 조선인(고려인) 21명 정도가 동원되었다.
께르비에서 체포된 36명 정도의 이송을 담당했던 조선인들은 니항사건에서 활약한 독립군 사할린부대원으로 구성되었다.)
<......감형된 사람들......>
그러한 결정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의 혁명 재판소 의장 들진 바리스(Дылдин Борис Аркадьевич), 체카(ВЧК, 러시아내전기 볼셰비키측 방첩 경찰) 의장 빌랴예프(Беляев Ефграф), 니콜라예프스크 체카 단원 및 께르비 지역 체카(ВЧК, 러시아내전기 볼셰비키측 방첩 경찰)의장 비나그라다프(П. Виноградов), 제트-파나마료프(Пономарёв Степан Лукич (Дед Пономарёв)) - 사할린주 지역 집행위원회 식량위원, 전직 부대 사령관들인 파블리쳔카 표도르(Павличенко Федор) 및 스트롈쵸프-쿠르바타프(Стрельцов-Курбатов Сергею)
를 포함하여 60명 이상의 파르티잔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체포된 죄수들을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 혹은 자유시로 이송
이 그룹은 즉시 감시 아래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보내졌습니다.
체포된 사람들의 이송을 고려인(조선인) 부대가 담당
체포된 사람들은 조선인(고려인) 부대의 호위를 받았습니다.
(※ 니항사건과 1920년 7월의 께르비 재판 이후 조선인 부대를 장악한 사람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박일리야’다.
이르쿠츠크파의 엉터리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과 러시아측 모든 기록에서, 과거 독립군 기록과 일치되게 박일리야를 ‘사할린부대의 실력자’로 기록하였다.
께르비에서 트리피츤이 1920. 7. 4. 일경 친일파 주도로 조직된 반란군의 공격에 체포되어, 며칠 만에 처형된 후에도 박일리야는 조선인 부대의 실권자였다.
광복군을 했던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박일리야는 이미 1910년 이전에 이동휘 등이 세운 학교를 다닌 바 있어, 그 독립정신만은 확고한 분이었다고 한다.
러시아와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니항사건 이전부터 사할린주 일대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비나그라다프(П. Виноградов)가 말했듯이, 그들은 바치예프(Бачеев)의 무장 부대가 타이가 숲에서 그들을 살해한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실제 재판 없이 처형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감시병과 함께 탈출한 트리피츤의 생존 동료들
가렐레(Горелое)의 겨울 주거지에서, 그들은 호위 겸 감시 팀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들과 함께, 다른 경로를 통해 아무르 주 지역에 도착하여 보이카-파블라프(Д. Бойко-Павлов)의 파르티잔에 합류했습니다.
(※ 참고 : 재판 없이 사살된 라프타
파르티잔 지휘관 중 한명이던 라프타(Яков Рогозин Лапта)는 트리피츤이 처형된 후, 재판 없이 1920년 8월 10일경 사살되었다. 니콜례예프스크 사건 이전에 하바로프스크 혁명조직의 일원이었던 그는 백파 칼미크 방첩 조직에 체포된 후 지하 노동자 조직을 배신하고 석방된 과거 경력 때문에 비난받아 왔었다.)
1920년 7월 10일~11일 연해주 공산주의자 회의
1920년 7월 10일에서 ~ 11일 사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러시아 공산당(РКП (б)) 연해주 회의(Примор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에서 아무르 강 하류 지역의 사건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회의의 결의안은 트리피츤과 공범들이, 소비에트 정부를 대신하여 행동하면서, 그들의 아나키적인(무질서한) 행동들은 노동 인민들의 신뢰를 훼손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그것을 불신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의 행동들은 소비에트 정부에 반항하는 선동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명령에 따라,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당한 사람들 중에는 여성, 어린이, 공공 및 사회주의 정당의 사람들, 러시아 공산당 당원(РКП(б))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단지, 하나의 장소 혹은 다른 곳들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우리 조직의 영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공식적인 추정은 오늘날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 오늘날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가중 최호림(崔虎林, 1896~1960, Цой Хорим), 김낙현(김이노껜지), 최고려(崔高麗, Цой Ко Рё, Цой Ко Ре, 1893~1962), 유익정, 김하석(金河錫, Ким Ха Сек)의 견해가 이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과거 1920년 니항사건 무렵부터 5년 이상 계속되었던 소련과 일본과의 평화 교섭과 소련 영토내 독립군 처리에 관한 교섭에 대하여 일제를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 공산당도 일본 제국주의와 내통하는 점이 있었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김좌진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박일리야의 사할린 의용대의 상당수는 레닌이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지만, 소련과 일본의 1925년 국교 수립이후 러시아 영역인 시베리아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이 약화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 론
결론으로, 신문 «DV 시간(Время ДВ)»에 (2004년에서-2005년)사이에 나(저자 스말야크)의 자료가 게재되었을 때의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작업을 아무르 강 하류 지역에 대한 러시아 내전사에 대한 연구의 완성이 아니라 이 문제를 계속 연구하도록 젊은 역사가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출판된 원고에서 기록 및 기타 문서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오늘날의 젊은 역사가들은 사건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편애 없이 기록 보관소에 있는 문서를 읽을 것입니다.
신문 «DV 시간(Время ДВ)»의 편집자는 독자들로부터 여러 편지를 받았습니다.
하바로프스크의 한 학교 역사 교사가 물었습니다. :
“1925년까지 일본이 니콜라예프 사건 때문에 북부 사할린을 점령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역사 과학 박사, 교수 슈리긴(А. П. Шурыгин)(모스크바 주립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나의 지도교수)은 사망 직전에 니콜라예프스크 사건(1920년 3월)이 러시아-일본 관계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고 했습니다.
아나톨리 페트로비치(Анатолий Петрович)는 연구를 마칠 시간이 없었으므로, 저는 그의 원고에서 분리된 조각을 제공하겠습니다.
“일본군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니항)에 있는 일본 수비대의 죽음을 그들 나라의 제단으로 가져가, 러시아 내전에 계속 개입하고 내전을 연장할 구실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20년 3월 일본 전함 미카사와 순양함 미시마가 타타르 해협(Татарский пролив)에 파견되었습니다.
4월 21일, 2,000명의 병력이 사할린섬 북부 알렉산드라프스크(Александровск-на-Сахалине, 일명 ‘아항’)에 상륙했고, 일본은 사할린 섬 북부에 대한 5년간의 점령을 시작했습니다.
(※ 1920년 4월 21일경 일본군의 사할린섬 북부 공격은 사할린섬과 당시 행정구역상 사할린주에 거주중인 조선인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준다.
미국 간섭군 사령관 「윌리엄 S. 그레이브스(William S. Graves)」의 일본 침략정책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라. 일부가 주장하는 1920년 7월의 일본군 북사할린섬 보상 공격점령설은 오늘날 러시아에는 없는 이야기이다.)
4월 27일, 런던 주재 일본 대사관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사건에 대한 공식 보고서를 발표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그곳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일본 거류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다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일본정부는 1920년 7월 3일자 선언에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을 러시아 극동 영토에 일본 군대가 주둔하게 된 근본 원인이라고 다시 한 번 언급했습니다.”
일본과 볼셰비키의 평화교섭
그 후, 일본은 여러 국제회의들, 특히 대련(1922년 7월), 워싱턴(1921년 11월 ~ 1922년 2월), 장춘(Чанчунь, 1922년 9월 2일 ~ 26일) 회의에서 이 문제를 거듭 제기했습니다.
극동공화국 페트로프(Ф. Н. Петров)의 일본 요구에 대한 대응 방법
대련 회의에서 극동공화국대표단은 부총리 페트로프였고, 대표단의 군사 고문은 블류헤르(В. К. Блюхер)였습니다. 일본 대표단은 극동공화국정부에 ‘17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니콜라예프스크 문제를 해결을 위해, 극동공화국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동안 일본 국민이 입은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사할린섬 북부를 80년 동안 일본에 임대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관중인 기록물에는 원본 ‘페트로프의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대한 언급’ 이 있고 그는 일본의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니항)에서 죽은 일본인들의 죽음에 대한 보상 요구’에 대하여, ‘일본군의 간섭기간 동안 일본인에 의해 극동에서 사망한 주민들의 죽음과 파괴들에 대한 보상 요구’로 대응했다고 썼습니다.
(관련 역사토론에서) 저의 요구가 일본인 학자를 여러 번 능가했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대한 토론에서 질문을 없애 버렸습니다.
일본 수비대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 진입한 소비에트 군대에 대한 적대 행위를 먼저 시작했다고 문서화했을 때,
그들은 특히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니항사건에 대한 일본과 러시아 역사 학자간의 대립
토론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러시아 버전의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을 인정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유명 반공학자 김창순, 소설가 박경리, 독립유공자 이지택, 최호림, 김낙현은 일본의 니항사건 주장과 유사한 주장을 반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1920년대의 한국의 신문보도,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주장조차 배제한다.)
대련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습니다. 워싱턴 국제 회의(Вашингтонская международная конференция)는 러시아 정부와 극동공화국 정부의 참여 없이 개최되었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은 태평양에서의 미국(США, 美國)과 일본 대결의 맥락에서 이 회의에서 고려되었습니다. 일본 대표 시데하라(幣原 喜重郎, Сидехара, 일본 거물 정치인으로 수상 역임)는 일본이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과 관련하여 시데하라는 일본의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남은 대안은 하나뿐입니다 :
합당한 만족을 얻기 위해, 의사 소통이 가능한 책임 있는 정부가 러시아에 설립될 때까지, 범죄가 저질러 진 러시아 사할린 섬의 일부를 보복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장춘(Чанчунь, 1922년 9월 2일 ~ 26일) 회의
창춘 회의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РСФСР)과 극동공화국의 공동 대표단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을 북부 사할린섬 문제와 연결하지 말 것을 제안했습니다. 일본 대표단은 북부 사할린섬 점령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거듭 밝히며 북사할린섬에서의 철수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1925년 5월 일본군의 북위 50도 이하 북부 사할린섬 철군(유전, 탄광 등은 1944년까지 계속 활용)
북부 사할린섬에서 일본은 1925년 5월 중순까지 부를 착취하며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추가 연구를 위한 좋은 주제입니다.
트리피츤을 살해한 사람들이 일본 밀정이 맞는가?
하바로프스크에 거주하는 바짐 실룐카(Вадим Силенко)는 “트리피츤을 살해한 사람들이 일본 스파이라는 것이 사실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로 둘 수 없습니다.
야코프 트리피츤 처형후 친일파들의 행동
야코프 트리피츤 처형 이후 이 사람들의 행동은 정말 이상합니다.
주인공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 트리피츤에 대한 쿠데타 조직자, 1921년 자유시참변 무렵 자유시 포병 부대장,
압친니코프(А. З. Овчинников) : 트리피츤의 처형을 결정한 법원 회장(법원 대표)은 트리피츤이 총살된 후 실제로 해외(일본을 거쳐 다른 나라로 이주함)로 나갔습니다.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압친니코프는 1935년 미국에서 ‘러시아 극동에서의 붉은 파르티잔 운동에 대하여(О красном партизанском движении на российском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라는 회고록을 출판했습니다.
1920년 니항사건과 ‘1921년 자유시 사건’ 당시 일제 밀정들의 활약
트리피츤을 처형한 법원의 부회장이었던 바라비요프(П. Я. Воробьев)는 이미 1920년 9월 일본군이 점령한 니콜라예프스크에서‘니콜라예프스크의 비극(Николаевской трагедии)’을 조사하는 민간위원회에 증언했습니다.
바라비요프(일제에 협조)의 진술은 외부와 연결된 파르티잔 붉은 군대 사령관의 행동을 평가하는 데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피난민들의 대피처 제공에 인색했던 다른 지역들
트리피츤을 처형하라는 공산당의 비밀 지시는 과연 없었는가 ?
특히 바라비요프는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의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니콜라예프스크 피난민들이, 금의 제공 같은 특정 조건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식과 동지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트리피츤의 희생자라는 파르티잔의 깨달음은 트리피츤을 전복하려는 계획으로 이어졌습니다. 파르티잔 안드레예브의 지도하에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트리피츤이 니콜라예프스크에 있을 때, 그는 하바로프스크와는 직접 유선으로 연결을 했고 이를 통해 모스크바와도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의 전보가 트리피츤으로 직접 전달되었습니다. 그중 하나의 전보에서 레닌은 그를 지역 소비에트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트리피츤에 대한 학살 이후, 새로운 사령관이 된 안드레예브는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의 볼셰비키인 지역 집행위원회에 편지를 보냈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트리피츤과 그의 측근들이 처벌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 트리피츤 처형후 새로 조직된 위원회의 고려인 대표는 박일리야였다. 독립유공자 이지택이 주장하는 ‘박병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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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시대의 암울함
아무르강 하류에서 소비에트의 권력 회복에 참여한 사람들이 어떻게 대우 받았는지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게라시멘카 나탈리아 미하일로브나(Герасименко, Наталья Михайловна)는 동시베리아의 대도회 하바로프스크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 법학 아카데미의 마케팅 부서장입니다. 그녀의 처녀적 이름은 ...... ‘트리피츠나(Тряпицына)’입니다. 야코프 트리피츤은 그녀 아버지쪽 삼촌입니다.
당신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 이 고등 교육을 받고 지적인 여성은 이 책이 출판되기 전에는 친척의 운명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소비에트 당국은 사람들의 역사적 기억을 뿌리째 뽑았습니다......
(※ 1917년부터 겉으로 일본과의 평화를 꿈꾸던 일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시도는 야코프 트리피츤이 1920년 처형된 후, 1925년 소련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로 드디어 실현된다.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사할린주 니항에서 중국인 마을 한쪽에 있었고, 멸시받던 조선인 지도자들이 일본-소련간의 평화 교섭에 있어서 의외의 장애물이 되곤 했다고 한다.
2006년경 한국에서 사할린 부대장 박일리야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 스말야크가 쓴 이 책은 그가 사망한 후 몇 년 뒤에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즉, 스말야크의 책은 저자 본인의 사망으로 완성된 내용이 아니며, 몇몇 오류도 있습니다.
그뒤 프치츤, 주코프스키-주크, 예르마코프(Антон Ермаков), 제코타프(Юрий Жекотов), 치마피예프(Сергей Тимофеев)를 비롯해 트리피츤을 언급하는 책들도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의외로 파니 카플란(Фани Каплан), 마리아 스피리도노바(Спиридонова,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주코프스키-주크(Жуковский-Жук И. И.), 마흐노(Махно, Нестор Иванович) 등을 언급하는 역사가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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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자료 1
가라유키상 상인 : 시마다 모토타로
(島田元太郎,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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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1870년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1920년경 러시아 극동 사할린 주의 대표적인 일본인 기업가(Торговый дом Симада П. Н.), 성매매업소 경영자(일명 유곽 혹은 위안소 운영, 가라유키상 Караюки-Сан 상인), 니항사건 관련 사진에 맨 먼저 등장하는 무역 회사 <시마다 상회>의 소유자였으며 조선인 노동자와 가라유키상을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인들의 사할린섬과 연해주 진출을 이끈 사람중 한명.
일제의 시베리아와 사할린섬 침략 시기 시베리아와 몽골 일대의 일본인 밀정 수는 대략 4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이것은 일본 군대내의 정보원과 일본인 민간인(상인) 간첩 등을 모두 합한 수로 볼 수 있습니다.
시마다는 일본 해군 고위층의 지원으로 동시베리아 사할린 주 일대에서는 일본인중에서 최대 규모의 무역회사와 시베리아에 출정한 일본군들을 위한 성매매업소를 경영하였습니다.
독립유공자 박병길과 함께 일한 적 있으며, 조선인 여성 가라유키상과 조선인 광산 노동자를 고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러시아 적백내전 무렵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맹활약한 배정자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정을 위해 활약을 하였으며, 조선인 노예 노동자를 적극 활용했던 사람중 한명입니다.
주로 일본, 사할린섬, 아무르강 하류의 사할린주, 연해주, 조선 평안도, 경남 진해,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시 등에서 상업과 성매매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에는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화폐로 활용된 돈까지 발행했었습니다.
1920년 초 발생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일명 : 니항사건)에서 재산을 잃었고, 니콜라예프스크와 일본 본토에 일본군 충혼탑, 니항사건 순난자비(尼港事件 殉難者碑) 건립을 주도하였고
니항사건에서 생환한 생환자들에 대한 보상 소송에도 앞장섰습니다.
1922년경 일본군이 점령한 북위 50도 이상 북사할린섬에서 석유 개발업도 하였으나, 1925년 일본군의 북사할린섬 철수 후 조선 평안도로 이주하였고 금광개발 등 광산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평안도에서의 광산업은 신통치 않았고, 평소 잘하던 성매매업은 만주사변, 지나사변, 대동아전쟁 등 일본군의 잦은 전쟁으로 괜찮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1945년 소련군이 평안도 평양에 들어올 무렵 소식이 끊어졌으며, 고령으로 인해 일본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 론
시마다 모토타로의 어린 시절
시마다 모토타로는 1870년 8월 5일 일본 나가사키현의 가난한 대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문구점 보조원으로 일하며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한 그는 학교를 중퇴했지만 평생 동안 계속해서 공부했다.
일본에서 러시아 극동으로 출발하여 표면적으로는 러시아 정교회 교인이 됨
러시아 극동 지역에 큰 기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필요한 서류를 받은 후 시마다 모토타로는 15세였던 1880년에 일본을 떠나 연해주(프리모르스키 크라이)의 블라디보스토크 시로 갔다.
시마다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큰 희망을 걸었지만 현지 및 외국인 사업가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1886년 7월 21일경에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일명 니항)시로 이주했다.
여기에서 그는 정통 러시아 정교회(천주교와 비슷한 종교)를 받아들이고 러시아 정교회식 이름인 표트르 니콜라예비치(Петр Николаевич)를 받았다.
물론 표면적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전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니항)에서의 활동
시마다가 스스로 정한 첫 번째 임무는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그 과정에서 시마다는 니프히(Нивхи), 울치(Ульчи), 에벤키(Эве́нки)와 같은 지역 원주민의 방언에 대해 알게 된다.
세계 최대 규모의 어장이 있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생선 매매, 염장, 일본 판매, 소액 대출, 위탁 재판매 등의 업무를 주로 시작했다.
니항사건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시마다 상회>의 설립
1896년에 시마다는 니콜라예프스크 항구에 시마다 상회(Торговый дом Симада П. Н.)를 설립했다.
일본해군의 최고위급 간첩 노릇과 일본정부의 지원.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 신자 자처, 러시아식 이름 사용과 후원, 러시아어에 대한 좋은 지식, 비즈니스의 성실성과 신뢰성, 현지 시장 상황에 대한 탁월한 인식 등의 모든 것이 시마다 상회의 번영에 기여했다.
시마다의 회사(및 기타 일본 기업가)는 향후 어획량을 위해 현지 러시아인 어장 소유자에게 대출을 통해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더욱이 시마다를 비롯한 일본 기업가들의 이자율은 니항의 다른 기업가들보다 낮았으며 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당시 도시(니항 : 니콜라예프스크)에 있던 러시아 신용기관(러중은행, 상호신용협회 등)은 대출금의 상환 이자율을 20~22%로 설정했는데, 일본 기업가(시마다 포함)는 러시아 어업 생산자에게 현금뿐만 아니라 상품(밀가루, 등유, 소금, 그물 등)으로도 빌려주었다.
돈을 빌려줄 때 일본인들은 10% 이자율에 만족했고, 어업철에 러시아 어부가 잡은 물고기를 유리한 조건으로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시마다는 결국 도시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금융기관의 예금자이자 회원이 되었다.
금융기관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에 이미 7개(국고, 상호 신용 협회 및 다양한 은행의 4개 지점(국립, 시베리아 무역, 러시아-아시아, 모스크바)가 있었고,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 <상호 신용 협회>가 개설되었을 때. 시마다는 협회 회원이 된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이었으며, 우대 조건으로 10,000루블의 대출을 받았다.
(※ 당시 1만 루블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적백내전 기간중의 인플레이션은 종이 화폐의 가치를 상실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향후 어획량을 선점하기 위해 이 돈을 러시아인들의 소규모 어업 생산업체 10곳에 빌려주었다.
일본정부의 지원과 밀정 노릇으로 아무르강 하류 지역의 대표적인 회사로 성장
1913년까지 시마다 상회는 아무르강 하류지역의 상위 10개 무역 회사 중 하나가 된다.
1914년에 시마다는 니콜라예프스크 시내 중심가에 두 개의 매장을 열었다.
(하나는 단층, 다른 하나는 2층 : 니항사건 사진에 나오는 2층 건물이 시마다 상회임)
여기서 기성복, 식료품, 담배 제품, 가정용품, 직물 등을 구입할 수 있었다.
시마다는 아무르강 하류 지역의 어업 발전과 많은 것을 연관시켰다.
실제로도 시마다의 사업은 수익성이 높았다.
아마 조선인 노동자와 가라유키상을 싼 값에 활용할 수 있는 강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인 노동자를 쓰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저렴하였다.
시마다는 지역 어장에서 생선을 사서 소금에 절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물고기를 획득하는 어로단을 조직하고 도시 어장을 임대했다.
(예를 들어 1913 ~ 1914년에 그는 니항에서 6번째 어장을 임대한다. 아무르강 하류에는 그물이나 어구만 걸어 놓으면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을 수 있다.)
시마다는 어획된 생선을 주로 일본에 판매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에, 시마다는 이미 아무르 하류 수산업의 선도적인 위치 중 하나를 차지한다.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
일본인들의 니콜라예프스크 거주지는 시마다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당시 니콜라예프스크의 일본인 디아스포라는 일본 수산업의 비공식 리더가 될 정도였다.
지금도 오호츠크해 어장은 세계최대 규모의 어장이다. 또 당시 니콜라예프스크 일대의 어획량은 극동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일부 조선인 노동자들의 내재된 불만
당시 중국인보다 임금이 낮은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친일단체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마다와 일본인들의 돈벌이는 그냥 돈을 쓸어 모으는 수준이었다.
시베리아의 강추위, 식량난, 열악한 기후 환경과 살인적인 노동조건의 광산업, 건축, 어업에 동원된 조선인 사망률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학살수준이었다고도 한다.
이 무렵 조선인들이 니항과 자원의 보고였던 사할린섬에 돈벌이를 위해서는 친일파나 일본인들 통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당연히 친일단체 가입자나 여성 가라유키상을 무조건 친일파로 볼 수 없다.
한인교사 박의 반일 활동
그러나 일본측 기록과 러시아 측 기록에 따르면 니항 도심 우측의 중국인 마을의 한쪽에 있던 식민지배를 받던 조선인과 조선인 가라유키상들은 일본인들에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불만을 숨기고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반일단체 조직을 선동했던 마가 마을의 한인교사 박이 있었다고 한다.
(※ 독립유공자 이지택이 거짓말한 한인교사 박은 바실리 박과는 다른 사람이다. 바실리 박은 조선인 민회의 주무였다.)
1920. 2. 29. 야코프 트리피츤이 니항에 진입할 때 가장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이 조선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니항 해방은 3·1운동과 마찬가지인 민족해방이었던 것이다.
(※ 지금도 사할린섬 일대는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등의 어업이 진출하고 있는 세계 최대규모의 어장이다. 오호츠크 해, 캄차트카, 베링해 어장 등으로 불려진다.)
극동 수산업의 유명한 전문가인 V. K. 브라즈니코프(В. К. Бражников)는 1904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니콜라예프스크의 모든 일본 어업은 긴밀하게 결속되고 잘 조직된 사회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넘치는 시마다 모토타로의 회사(Торговый дом Симада П. Н.).”
또한 시마다는 외국 해운 회사의 여러 대리점을 대표하고 도시의 평판이 좋은 무역 및 중개 수수료 사무소의 소유자가 된다.
1912~14년에 니항에 거주하던 다른 외국인들인 T. D. Kunst와 Albers의 예를 따라 시마다는 일본에서 아무르 강과 니콜라예프스크 시가 보이는 엽서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시마다가 발행한 엽서들
오늘날 이 엽서에는 시마다 상점, 일본 영사관, 아무르 강의 일본 낚시 선박(스쿠너) 등이 불멸의 존재로 남아 있다.
<시마다 상회>의 최대 번영기는 1913~1916년이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러시아의 식량난, 무기 부족, 인플레이션, 노동자 부족에 따른
조선인 여성 가라유키상 동원, 조선인 노동자 동원 등등은 시마다를 거부로 만들었다.
시마다 회사는 무역, 일본으로의 연어 판매, 커미션 및 대리점 업무로 인한 이익 외에도 기계 공장에서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1911~1912년에 건설된 이 공장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18마력 기관차, 선삭, 대패질, 드릴링, 연마 및 기타 기계, 전단 프레스, 4개 프레스, 주조소, 단조 등 당시 최신 기술을 갖춘 장비가 있었다.
(니항에는 발전소, 전력선, 전화, 협궤열차도 설치되어 있었다. 1922년 일본군의 니항 철군시 전선까지 절단해 가지고 갔다고 한다.)
가공 작업, 보트 및 각종 기계 제조, 각종 부품 주조, 주철 부품 등에 이르기까지 공장에서는 모든 종류의 금속을 가공했다. 공장에 고용된 근로자 수는 여름에는 12명, 겨울에는 18명 정도였다.
<시마다 상회 기계공장>은 그 당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현대 산업 기업의 모델이었다.
동시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일본 본토의 신용 기관의 광범위한 지원이 없었다면 시마다의 성공과 수입을 기대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원은 일본 해군부 및 참모부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제공되었다.
가족 관계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시마다는 두 아들을 낳았으며 일본 이름과 함께 러시아 이름도 부여했습니다.
첫 번째 아들 (1902년 출생)-테리히샤(니콜라이),
두 번째 아들 (1903년 출생)-바타루(바실리)
시마다 모토타로에게 몇 명의 자녀, 처와 조선인 첩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발생이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권고
시마다는 당연히 극동 지역과 하류 아무르에서 소련(소비에트) 권력의 확립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러시아와 제정 러시아 국민에 대한 전문가로서 그는 당시 일본군 엘리트 대표들에게 조언을 제공했다.
다나카 장군에게 일본 침략군을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에 파견할 것을 권고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최고위급 밀정중 한명이었던 시마다 모토타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사에서는 시마다 모토타로, 안드레예브(니항과 자유시의 군대 부대장중 한명), 바실리 박, 독립유공자 이지택 등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본군의 사할린주 주도인 니항 점령
시마다 등의 권유로
1918. 8. 2. 일경 일본군이 체코군단 구원 등을 내걸고서는 별 관계가 없는 니항과 사할린섬 북부 등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일본 천황에게 시베리아 출병 청원서를 제출한 러시아 백파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당연히 있었다.
백파 라비치의 소설에는 일본군이 러시아 평화를 위해 온 것으로 묘사되었다. (일본이 주장하는 시베리아 출정 원인은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의 구조 요청, 선량한 사람들의 구원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함)
일본군은 니항에 병영건물과 위안소,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시마다의 돈벌이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 러시아 내전이 백파와 일본 출병군에게 불리해지자 일본군은 사할린 주만큼은 점령하여 괴뢰국가를 건국하고 유전, 광산 등을 확보하고자 대사관 설립까지 획책한다. 이러한 일본군의 목적을 볼 때 니항을 불태운 것을 잘못이라고만 보기는 힘든다)
일본인들이 급속히 증가하여 1920년초 발생한 니항사건 당시 일본인들의 총수를 추측하기 힘드나 러시아 측에서는 대략 850여명 이상으로 보고 있다.
시마다의 밀정 활동과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한 사업 번창
상업만 하는 줄 알았던 시마다는 니항 일대와 아무르강 일대의 시베리아 지역, 사할린섬 일대 등을 돌아다니며 밀정활동을 한다.
이 무렵 조선인 배정자 등도 돌아다니며 조선인회, 보민회, 조선인 민회 등의 명칭을 가진 친일 단체를 조직한다.
1918년 9월경 이후에는 백파정권(주로 콜차크, 메르쿨로프, 시묘노프, 칼미코프 등)의 지원뿐만이 아니라 이들과 내통한 일본군의 아무르강 하류에 대한 개입과 만주 동청철도 장악, 바이칼호에 이르는 지역까지 점령 등의 지원에 힘입어 시마다는 어업 사업도 크게 확장된다.
1917-18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지속과 러시아 내전으로 인한 백파계 러시아인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시마다 매장의 이익도 증가하고 있었다.
독일계 회사의 파산
니항에 있던 주요 경쟁사인 독일 회사인 Kunst and Albers의 백화점은 폐업하였다. 독일회사는 적국이었기에 파산이 쉬웠으나, 미국 영국 중국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과는 같은 연합국이었다.
1918년 중반, 하류 아무르 지역에서는 화폐 부족 현상이 나타난다. 이 무렵 극심한 경제난을 겪던 러시아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및 주변 지역의 주립 은행, 상호 신용 협회, Ust-Amur 협력자 연합, 개별 무역 회사 등에서 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한 러시아 화폐에 대한 문제가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통화 대체에 관한 문제인 <시마다 지폐> 발행은 역사가들에게는 특히 흥미롭다.
일본인이 러시아 혼란기에 일부 지역에서 통용되는 돈까지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정부의 지원과 일본인들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같은 1차 세계대전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니항의 중국인들을 식민지배를 하던 조선인과 비슷하게까지 멸시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고 한다.
형식적으로 시마다 화폐는 식품 및 산업용품에 대한 “임시 영수증” 또는 간단히 쿠폰, 혹은 상품권이라고 한다.
이 시마다 화폐의 생산과 통용은 1919년 봄쯤 부터였다.
시마다 화폐 발행 이후 시마다에게는 “아무르의 표트르 대왕”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사람들은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시마다 모토타로가 때때로 자신이 “아무르의 첫 번째 표트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기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니콜라예프스크(니항) 사건 이후
1919년 5월 말, 시마다는 일본 해군부의 요청에 따라 증기선을 타고 일본으로 귀국한다.
그는 일본의 아무르강 하류 지역에서 간섭과 러시아 내전이 악화되는 시기를 보내게 된다.
1920년 3월 12일 일본군의 반자이 기습공격과 4월경의 일본군 재공격으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이 발생하여 도시 전체가 거의 완전히 불타고 폭파되었을 때 시마다는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
니항 도심의 주택을 포함한 대략 2,107여개 건물 중 35개 건물(대부분 외곽에 있음)정도, 13개 시장 건물, 개울 건너 우측편의 중국인 거주지 내 건물, 4개 부두 등만 남았다. (주택은 대략 1,130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니항 외곽의 거주지들인 츠니르라흐, 마가 등등은 파괴되지 않았으며 니항 도심의 총 건물수 2,100여개소는 오늘날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항구 도심의 1/3정도 수준이다. 그런데도 일부 공식도서는 오늘날 인구의 1/3 정도에 해당하는 인구가 아닌 몇 배에 해당되는 3만명까지 거주했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습니다. 1917년경 니항 인구 조사결과로는 도심 인구는 7천에서~8천명 내외였습니다.
러시아 내전 피난민들도 겨울에는 거의 대부분 돌아간 상황이기 때문에 그 정도 수준이 타당하다고 보여집니다.)
1920년 6월 4일경, 일본 군함이 사할린과 하류 아무르로 파견되면서 시마다는 니콜라예프스크로 돌아왔다.
일본인과 조선인 여성 90명 이상이 시베리아에 출정한 일본군과 일본인들을 위해 성매매하던 가라유키상 유곽, 일본군 병영, 일본인 집단 거주지뿐만이 아니라
시마다의 모든 재산과 부동산이 불타게 되는 ‘니항사건’의 결과 러시아인 거주지, 상점, 창고가 불에 탔고 기계 공장이 폭파되었다.
시마다는 망했다.
일본 제국에서의 시마다의 존재
시마다는 니항사건 이후 자신의 상점들을 재건하고자 한다.
그리고 곧 그는 전쟁관련 부서, 지방 점령 당국, 일본 신용 기관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다시 부활시킨다.
동시대 사람들이 언급했듯이 그러한 일본과 백파의 지원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본 점령군이 러시아 극동 전역에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하류 아무르에 대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시마다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러시아어, 현지 인물, 정치적, 경제적, 시장 상황 등을 볼 때 시마다는 중요한 인물이었고 일본도 이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조선에서의 초혼제 행사. 일본군 충혼탑과 순난자비 건립 주도
시마다와 일본군은 ‘인류 역사에 없었던 대학살극’이라고 선전하며 조선의 경성에서도 초혼제장을 만들어 놓고 전국적으로 친일 조선인들을 대규모로 동원해 선전에 나섰고
일본 본토와 시베리아에서도 황족, 장성, 일본 수상 등이 나서 시베리아 침략의 근거를 삼기위해 니항 사건을 조작하고 선동질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러시아계 친일파로는 Y.A.구트만, 예밀야노프, 에치, 압친니코프, 바라비요프, 라비치 외에도 엄청나게 많았고, 당시 일본의 선동이 맞다고 협조하는 자는 수두룩했던 모양입니다.
시마다는 철근-콘크리트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 높이 15m가 넘는 일본군 충혼탑을 세웠으나 현재는 파괴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혁명세력의 승리로 끝나자, 1922. 10. 2. 일경 일본군은 니항에서 철수합니다.
북사할린섬으로 갔다가 조선 평안도로 이주
일본군이 니항에서 철군할 때 시마다는 한때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자원의 보물섬이던 사할린섬 북부로 이주하여 석유 개발업을 시작했으나, 석유개발과 정유업은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사업이었고, 당시 일본의 대기업들이 이미 선점하고 있었다.
1925. 1. 20일경 일소기본조약(日蘇基本條約) 체결되어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에서 삼림·석유·석탄 채굴권 등 획득하며 소련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되고
조선 비적(독립군)의 활동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1925. 5. 14.일경 북위 50도 이상 사할린섬 북부의 일본 군인들은 철군한다.
(그러나 1944. 3. 30일경까지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 및 석탄 광산은 활용하였다.
2차 세계대전 전황이 악화되자 소련의 중재와 연합국과의 관계회복을 노린 일본은 결국 북위 50도 이상의 사할린섬 북부에서도 완전 철수한다.)
일본군의 북사할린섬 철군 무렵에 시마다는 조선 평안도로 이주하여 여러 차례 금광 사업 등을 하였으나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결국 둘째 아들이 살고 있는 평안도 평양으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직후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
아마 고령으로 인해 일본으로 귀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니항)에서 화폐 발행
50코펙 화폐, 1루블, 3루블, 5루블, 10루블 화폐에 자신의 초상화를 넣고, 뒷면에는 둥근 도장과 서명이 있습니다.
화폐 수집가들에게 시마다가 발행한 화폐는 가치가 있습니다.
러시아 내전 시기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여러 종류의 화폐가 발행되었으나, 러시아의 혼란으로 금과 은으로 된 화폐를 제외한 지폐는 제대로 된 화폐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시마다가 발행한 화폐는 보존 상태도 우수하고 도쿄의 제본소에서 인쇄되었기 때문에 다른 니항의 지폐들보다 인쇄 상태도 양호합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값어치가 있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말엽에는 일본군들이 대량의 군표를 발행했기 때문에 황군 위안부 여성들이 받았던 일본군 군표는 가치가 상실되었고, 오늘날까지 죽어서도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할린섬 강제 징용자중 상당수는 1945년 일본군이 패망 이후 귀국하는 배속에서도 몇 시간의 항해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최근 알려진 이야기들
한 때 1920년 니항사건을 ‘독립군 3대 승리’로 부르는 사람이 많았으나
요즘은 A.Y.구트만의 책이 아니면 역사물에서 인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니항에서 일본군의 반자이 야습과 집단자살에 동참하지 않았고 포로가 되지 않아 생환한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시마다는 ‘생명의 은인’으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니항 일본 영사관의 이시다 토라마츠(Исида Торамац) 영사대리 부영사는 근래 확인한 바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즉 중국군함의 함포 공격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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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자료 2
참고 문헌 및 간단한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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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 참모본부 편(参謀本部 編), 「시베리아 출병사(西伯利出兵史 : 大正七年乃至十一年)」, (大正13年印刷の複製 限定版) 新時代社, 1972
(2) 일본육군 장령 출신 菅原佐賀衛, 「시베리아출병요사(西伯利出兵要史)」, 偕行社, 1925
(3)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모토타로(島田元太郎 :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니항사변 회고 자료(尼港在住の実業家で日本軍への協力者). 니항사건 이후 순난자비 건립 및 가라유키상 유곽 운영
(4) 니항사건에서 처자식을 죽이고 자살한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 石田虎松(Исида Торамац) <尼港事件のときの尼港副領事>관련 기사
(5) Hosoya Chihiro(1920년생~2011년 사망), “ORIGIN OF THE SIBERIAN INTERVENTION, 1917—1918.” / The Annals of the Hitotsubashi Academy, vol. 9, no. 1, 1958, pp. 91–108. // JSTOR. (дата обращения 21.03.21)
(6)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만주의 친일파 ‘시묘노프’의 활약상을 기술한 Борисов Б. Дальний Восток : атаман Г. М. Семенов и его борьба за освобождение России от большевиков. — Вена, 1921. 62쪽.
(7) (친일파) A.Y.구트만(혹은 ‘굿맨’ : ГУТМАН А. Я.), 「니콜라예프스크의 죽음(ГИБЕЛЬ НИКОЛАЕВСКА НА АМУРЕ, 영문도서명은 ‘니콜라예프스크의 파괴’)」
(Английский перевод: Gutman, Anatoly. Ella Lury Wiswell (trans.); Richard A. Pierce (ed.)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 Limestone Press, 1993. — ISBN 0-919642-35-7.) : 한국 독립군이 약 1~2명의 민간인을 처형했다고 주장함.
(8) 에치(В. Эч), <사라진 도시(Исчезнувший город)>, 블라디보스토크, 1920. 70쪽. 일본군 점령지를 방문해 볼셰비키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
(9) 이르쿠츠크파 문건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1922년경,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발행,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2, 1980)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在露 反日鮮人團體 機密文書 送付에 관한 件)
(10) (친일파) 예밀야노프(К. А. Емельянов), <지옥의 사람들> (A.Y.구트만과 라비치의 백파군대 소설에도 자주 등장함)
(11) (만주의 친일파, 미국 이주) 라비치(Яков Львович Лович), <적(Враги) : 소설 이름임>, 가공의 인물을 통해 만주·연해주·사할린주에서의 백파군대와 일본군의 활약상을 기술하고 볼셰비키의 만행을 폭로
(12) 강동진, 「일본근대사」, 한길사, 1985 (※ 일본군 북사할린섬 점령선언을 1920년 7월로 기재. 북사할린섬 공격은 1920년 4월부터 시작되었고 파르티잔 토벌후 1920년 7월 점령을 선언한 것임. 점령선언과 공격은 다른 것임)
(13) 김홍일,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니항사건을 일제의 터무니 없는 생떼라고 주장)
(14) 아무르 주(州) 마자나바 군(郡), 고쉬 전투(Гошский бой) 관련 자료
(15)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아메리카의 시베리아에서의 모험 1918-1920(America’s Siberian Adventure 1918-1920)」 (일제의 시베리아에서의 만행과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진술)
(1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7, [니콜라예프스크에서의 朝鮮獨立示威行列 請願 拒否의 건], (在ニコラエウスク領事代理 副領事 石田虎松), 1919년 04월 03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6_1640
(1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國民의 聲이라는 週刊新聞의 발행에 관한 건], 石田 (領事代理), 1919년 05월 05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7_0100
(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朝鮮新聞 再刊에 관한 건, 石田(니콜라예프스크領事代理 副領事), 1919년 10월 20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7_0830
(19) 세르게이 프치츤(С. Птицын), <니콜라예프스크에서 20일간. 유격대원의 회고록>, 하바로프스크, 2013. 208쪽. 니항사건 참여자 회고록
(20) 드니프로프스키(Днепровский С. П.), <골짜기를 지나 언덕을 넘어>, 하바로프스크, 1956. 232쪽. 소련 공산주의 입장에서 니항사건을 기술
(21) 루빔 프라예르만(Р. И. Фраерман), 「황금색 수레국화(Золотой Василек)」, 1976. 400쪽. 근래 러시아의 유명작가로 니항사건 참여자
(22) 리피킨(Левкин Г. Г.), <그랬지만, 현실과 함께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르 지리 학회, 하바로프스크, 1999.
(23) 유리 제코타프(Юрий Жекотов) 저, 「그 슬픈 아무르의 날들 Те печальные амурские дни.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시의 역사 연구」, 2016~2017년경 출판. 총104쪽~108쪽 분량. (일본의 민간인 학살과 조선인 노예 노동을 기술)
(24) 주코프스키-주크(И. И. Жуковский-Жук), <레비제바와 트리피츤 : Н. Лебедева и Я. Тряпицын (Партиз. движение в низовьях Амура)> Материалы и документы, 1922, 101쪽
(25)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니항사건 당시 일본군의 공격로
친일조선인, 황족, 일본 수상, 장성 등이 대규모로 동원되어 경성, 일본 본토, 시베리아 등지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감행된 니항사건 초혼제
일본군의 주요거점. 1920년 니항의 주택수는 아무리 많아도 1200채를 넘기는 힘든다. 대부분 목조로 대충 지어진 단층의 소형주택이었다. 오늘날의 주택수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오늘날은 도심은 4~5층의 공동주택이 많다.
유리 제코타프(Юрий Жекотов) 저, 「그 슬픈 아무르의 날들 Те печальные амурские дни.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시의 역사 연구」, 2016~2017년경 출판. 총104쪽~108쪽 분량. (일본의 민간인 학살과 조선인 노예 노동을 기술)
최근 발표된 유리 제코타프의 니항사건 관련 도서. 조선인 노예 노동과 일본군의 학살을 비교적 정확하게 다루고 있다.
니항사건에서 처자식을 죽이고 자살한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 일본군 수비대장. 일본영사관 직원들
니항에서도 성매매업을 주로했던 시마다 모토타로. 니항사건 이후 조선 평안도로 이주한 후 조선인여성 가라유키상 혹은 위안부를 모집해 성매매업도 하였다.
니항사건에서 전사한 나우모프
오늘날의 <실로 이미니 빨리느 아시펜카> 마을 . 과거 명칭은 <께르비>
오늘날 아무르강변에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 트리피츤이 지휘하던 유격대 본부터에 세워져 있다.
1920. 7. 9. 친일파 반란군의 공격에 살해된 야코프 트리피츤과 동료들
니항에서 전사한 한국 독립군 장례식 1920. 3월말에서 4. 1.일경
께르비의 암군강 주변 추모비
오늘날 니항 주민 중 조상이나 이웃주민이 한국 독립군에 의해 죽었다는 사람은 전혀 없다.
1918년 9월경 니항을 점령하고 행군하는 일본해군 육전대와 마차를 탄 일본해군 장교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들을 동원해 가라유키상 성매매 위안소를 운영했던 시마다 모토타로의 상회 인근으로 보여진다.
1919년경 니항에서 화폐까지 발행했던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가 경영했던
시마다 상회와 일본군의 니항점령 이후 건립된 일본군 병영 건물
일본군의 반자이 기습공격 실패후 집단자살로 불타버린 니항 일본영사관
1920년 니항사건 당시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는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방화하였고 영사관에 머무르던 일본 거류민 상당수도 광기어린 집단자살을 감행했다고 한다.
니항의 일본인 거류민중 집단 자살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본에 생환해서도 자살을 강요받고 사회에서 냉대 받았다고 한다.
사할린 섬 및 사할린주 일대의 일본인들. 남성의 상당수가 군사훈련을 받은 의용 자경단원 등이었다.
사할린섬 남부의 일본인
1920년 니항사건 무렵 사할린주 일대
1920년 니항사건 당시 파괴된 도심.
일부 몰지각한 친일학자의 주장과 달리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나 감옥 자체가 없었다. 1500여명을 수감해 3일동안 3천여명 이상을 살해할 만한 건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할린섬 일대의 일본인. 일본인 남성의 상당수는 자경단원 등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사할린 섬 일대의 일본인 여성 가라유키상 추정 사진.
가라유키상 여성 상당수는 군사훈련을 받고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에 동참하였다.
최소 높이 15미터가 넘는 일제의 거대 니항충혼탑
1920년 4월경부터 시작된 일제의 니항 재공격 작전. 일본 민간인과 포로구출이 목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20년 4월 일제의 북사할린섬 공격과 연해주 4월 학살 이후에서야, 니항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일본군 포로가 처형되었다. 국경인 북위 50도를 넘어 공격했으면 명백히 공격을 한 것이다.
일제가 1920년 7월에서야 니항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사할린 섬 북부를 공격했다는 주장은 친일파시스트들이나 하는 허위 주장이다. 오늘날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이렇게 까지 조작을 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
1918년경 니콜라예스크의 일본인 수 추정 자료는 세르게이 치마피예프 의 자료에서 참고함.
Сергей Тимофеев,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Нижнеамурская голгофа. Поиски истины» )
1918년경 니콜라예프스크 항구의 여성 가라유키상 은 최소 90명 이상이었으며
1920년 니항사건 무렵에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수가 조선인 여성 가라유키상이었다.
첫댓글 유전이 상업운영을 했고 사할린의 거의 모든 석탄 매장량이 일본 기업으로 넘어갔군요 일본 외무성의 자료에는 조선 독립군은 비적,악마,강도,강간범으로 나와 있군요
일본군은 일제시대에 독립군은 '선비' 즉 '조선비적'이라고 불렀고... 주로 악마, 강도, 강간범이라고 그랬다고 합니다.
일본 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당시 기술부족으로 사할린섬 유전에서 대량의 석유를 생산하지는 못했고,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에서 가져간 석유의 양은 2차대전에서 큰 역할을 할만한 양은 아니라고 하지만,
석탄 등이 활용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요즘은 사할린 섬의 천연가스 전은 효율이 거의 석유와 맞먹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천연가스 LNG를 활용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니콜라예프스크 주민중 한국 독립군에게 죽었다는 사람의 후손이 전혀 없는데
수천명 이상을 학살했다는 주장이 있어
러시아에 이런 책들도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관련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