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의 예수님
성경 말씀: 예레미야 23:5-8; 요한복음 1:1-18
요약
성육신은 창조 전 하나님과 함께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한 말씀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있은 생명이 세상에 육신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성육신은 세상에 육신을 입어 드러난 생명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창조된 생명체로 보이는 생명이 아닌 성육신의 생명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육신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으로, 성육신된 생명이 말해집니다. 예수님으로 서사되는 생명은 창조되지 않고 성육신됩니다.
생명의 성육신
성육신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생명이 말씀에 있었음으로, 성육신되 생명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세상에 창조된 생명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분 육신으로 세상에 계셨지만, 그분 생명은 성육신되 생명, 즉 창조 전 하나님과 함께한 생명이었습니다.
성육신된 예수님의 생명은 보통 사람들의 생명의 참 빛으로 비추입니다(요 1:4,9). 그러므로 성육신은, 예수님은 그분 육신으로 세상에 계셨지만, 그분 생명은 창조된 생명이 아닌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창조된 생명이 아닌 성육신된 생명으로 서사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생명을 성육신의 생명으로 착상합니다. 예수님은 그분 생명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별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보이는 특수한 특성을 지니시기 때문에 구별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침의 능력은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 위로 보이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이시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드러남입니다. 예수님의 고침이나 가르침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드러남으로 서사됩니다. 즉 막강한 능력이 아닌 새 생명이 예수님으로 드러납니다. 막강한 능력은 세상의 능력에 건주어집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서사는 전반적으로 성육신으로부터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일인칭 진술, “나는 이다(Ego eimi)”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성육신의 예수님은 스스로 드러내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성육신의 예수님으로 식별할 수 없습니다.
성육신의 예수님은 성육신의 예수님에 의해서만 말해질 수 있습니다. 성육신의 생명은 세상의 어떤 창조된 사람에 의해서도 말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드러나는 성육신의 생명은 단지 성육신의 예수님에 의해서만 들려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으로 말해지면, 이 점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 속성으로 말해지면, 세상 속성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세상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예수님은 아마 종교의 창시자나 혁명가로 서술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비교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구별됨으로, 성육신의 예수님이십니다. 창조 이전과 창조 이후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구별됩니다. 그렇지만 창조 이후로부터 창조 이전의 구별됨은 창조 이전으로부터 오신 분에 의해 보여질 뿐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언어는 창조된 보통 언어와 구별됩니다. 생명의 언어는 존재의 언어와 구별됩니다. 요한복음은 생명을 서사하기 위해 “성육신”과 같은 생명의 말을 씁니다. 따라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6:48),”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참이요 생명이다(14:6),” 그리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15:5)”와 같은 표현이 여기저기 나옵니다.
존재는 대상으로 지적되지만, 생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은 세상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서술합니다. 생명에 대한 말도 생명을 존재하는 대상으로 언급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은 사람의 말로 언급될 수 없습니다. 대상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육신으로 함께
예수님의 생명은 예수님 자신에 의해 보여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말씀이나 고침의 사역은 예수님의 생명의 보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성육신의 예수님으로 사사될 때 뜻있습니다. 성육신의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고침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고침은 고침이 생명과 접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 되지 않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몸 상태를 바꿈으로 고칩니다. 그의 약 처방이나 수술은 환자의 병든 몸 상태를 건강한 몸 상태로 바꾸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사는 세상의 인과관계를 이용합니다. 과학은 그런 지식을 축적합니다. 지식의 축적은 변화의 야기 가능성을 확장합니다. 즉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을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의 확장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성육신 같은 극단적 표현이 사용되지 않으면, 예수님에게 적용되는 말은 세상에 적용되는 말의 외삽으로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막강해서 기적적으로 병자를 고치거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적 가르침의 극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특출한 사람이라고 절찬됩니다.
신화적 상상은 세상에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의 가능성의 한계를 넘는 것은 신화적 말로 해집니다. 신화는 어떻든 세상에 일어나는 것의 연장선에서 모든 것을 다룹니다. 불치의 병의 고침이나 죽은 자의 살림은 가능성의 확장으로 말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고 말함으로, 성육신에 눈이 뜨이게 됩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로 말하듯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성육신으로 말합니다. 이 점에서 성육신은 세상의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의 예수님을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세상은 성육신에 의미를 줄 수 없습니다. 하나의 존재로 지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드러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은 세상에 성육신으로 보입니다.
성육신은 육신의 구체성을 내포합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과 함께한 말씀이 세상에 육신으로 구체적으로 보인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따르는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 하나님과 함께하신 분이십니다. 즉 그들은 성육신의 예수님을 따릅니다.
제자들이 성육신의 예수님을 따름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으로 말해집니다. 즉 그들은 언약의 제자들로 말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속성이 아닌 언약의 내용으로 말해집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제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생명의 포도나무로서 예수님에 생명의 가지로 접해진 제자들입니다. 성육신의 예수님에 접해진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생명으로 말해집니다.
성육신의 그리스도
이렇게 생명이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로 자람으로, 생명으로 새 언약은 분명해집니다. 함께의 생명은 성육신에 접함으로 파급됩니다. 성육신의 예수님은 그분 제자들로부터 분리된 예수님의 독자성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그분 제자들과 함께하는 성육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이다(Ego eimi)”로 말씀하신 것은 실존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생명의 빵, 부활과 생명, 길과 참과 생명, 그리고 포도나무는 그분 제자들과 함께의 생명으로 이야기됩니다. 그것들은 제자들과 함께하는 생명의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라고 하심은 그분이 그분 제자들과 분리되지 않음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그분 목숨을 지킴으로 그들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반대로 성육신의 생명으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그분 제자들과 함께의 성육신입니다. 언약의 성육신은 제자들과 언약의 삶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그리스도로 밝히십니다(요 4:26). 이것은 예수님이 그들과 분리되지 않음을 보이려는 것입니다. 성육신의 예수님은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 홀로 그리스도일 수 없습니다. 즉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홀로 성육신될 수 없습니다. 성육신은 개체성을 보이지 않습니다. 개체성은 창조로부터 타락됨의 뜻입니다. 성육신은 창조되지 않음의 구체성을 보입니다. 즉 성육신은 개체성이 아닌 구체성을 보입니다.
새 언약의 삶은 성육신의 구체성으로 이야기됩니다. 새 언약의 삶의 구성요인은 창조된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으로만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의 예수님과 함께로 서사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 언약은 성육신의 함께로 보입니다. 새 언약은 생명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은 성육신의 함께로 펼쳐집니다. 즉 성육신의 함께로 구체성을 보입니다. 성육신의 함께는 세상의 조건성을 갖춤으로 보일 수 없습니다. 성육신의 함께는 세상 조건에 의한 관계성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육신의 예수님과 관계되지 않습니다.
성육신의 예수님은 개체성을 지니지 않고 관계성을 설정하지 않습니다. 세상 생명으로 사람들은 관계성을 설정합니다. 그러나 성육신의 예수님과 어떤 관계도 언급될 수 없습니다. 성육신의 예수님은 존재로 다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창조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육신의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이 경우 성육신의 예수님이 생명으로 말해짐으로, 예수님과 함께도 생명으로 말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성육신으로 다루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다루어짐으로, 예수님은 생명으로 서사되고 어떤 존재의 서술로부터도 구별됩니다. 따라서 성육신의 예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은 생명의 서사로 펼쳐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성육신으로 서사함으로 성육신의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뜻하는 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하는 생명이
육신을 입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신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타락된 세상의 수명이 아닌 성육신의 생명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생명에 접함으로
저희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생명을 누립니다.
타락된 세상에서 수명으로 살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하는 생명으로 삽니다.
성육신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