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예술경험은 타인과 문화에 대한 공감 능력, 이해력, 삶의 질 향상에 영향을 미치고 민주시민으로서 능동적인 행동을 추구하게 만든다고 한다. 예술이 다양한 순기능을 제공하지만, 간혹 도심의 각종 공공조형물이 여러 잡음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공공조형물은 우리의 생각보다 생활 안에 깊이 침투해 있다. 도심의 빌딩에서 지역의 아파트, 관공서나 공공시설까지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어 이것을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건립된 환경조형물이다.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꽃이 피는 구조물 : 아마벨>(1996년) 논란 이후 공공조형물을 둘러싼 잡음은 줄곧 이어져 왔다.
2006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 흥행에 성공하자 서울시는 영화 속 이미지를 한강 변에 재현하였다. 그런데 애초 의도와는 다르게 시민들로부터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조각작품이기보다는 피규어에 가까운 것이며 영화 속 캐릭터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공공공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흉측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시는 심의위원회를 소집해 ‘괴물’ 뿐만 아니라 한강 변의 다른 예술 설치물도 철거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졸속으로 건립된 조형물은 고작 몇 년 만에 철거될 운명에 처했다.
감상자를 배려하지 않은 조형물의 앞날은 비극적이다. 세종시 소방청 앞에 설치되었던 일명 ‘저승사자’로 불리던 금속조형물은 설치 4년 만에 철거되는 수모를 당했다. <흥겨운 우리 가락>은 갓을 쓰고 무용을 하는 남성을 형상화했지만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행인들은 주로 ‘음산하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저승사자’가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재난 안전 관련 부처 옆에 버티고 선 모양새가 되었으니 위치선정의 맥락에도 맞지 않는다.
포항시는 구룡포가 과메기 특구임을 알리자는 차원에서 2009년 꽁치 꼬리를 형상화한 높이 10미터의 대작 ‘은빛풍어’를 설치했다. 그런데 주민들은 마치 ‘비행기가 추락하는 듯한 형상’을 공항 입구에 설치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었다. 그후 <은빛풍어>는 고철업체에 헐값에 매각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이외에도 대구 달서구의 <2만 년의 역사가 잠든 곳>, 거제시의 <거북선>, 서울 무역센터의 ‘강남스타일’ 손목 동작을 본 따 만든 기념 동상 등 골칫덩이가 너무 많아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국민권익위원회의 ‘연도별 공공조형물 건립 현황’을 보면, 1959년 이전에 20점에 불과했던 공공조형물 건립은 1980년대까지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다가 1990년대 288점, 2000년대 1813점, 2010년대 4019점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급격한 증가세를 보인 요인은 1990년대 중반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되면서 선거로 뽑히는 단체장들이 경쟁적으로 공공조형물 건립에 나섰기 때문이다. 여기에 ‘건축물 미술 장식 제도’에 의해 세워진 미술작품까지 더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늘어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조사한 전국의 공공미술 현황(2020년 기준)을 보면 전국에 모두 21,532건의 미술작품이 설치되었다. 국토를 공공조형물로 뒤덮을 만큼 엄청난 규모이다.
한번은 공공미술제도 개정을 위해 마련된 공청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적이 있다. 기존의 문제점을 개선하여 공공미술의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차원에서 마련된 자리였다. 공공미술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미술 단체와 에이전트 등 이해관계자들이 자리를 메웠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공공조형물에서 주요 당사자인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이 법안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공조형물 난립을 막기 위해선 무엇보다 건립과정에 주민참여 등 민주적인 절차가 보장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지만, 현재 공공미술을 추진하는 데에 시민의 의견을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학자 로버트 우스나우(Robert Wuthnow)가 시민사회에서 교회의 역할로 제시한 방안 중에 ‘시민비평’이 있다. 그리스도인 시민들이 지적 세련됨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이슈들에 접근할 때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려면 도시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귀 기울여야 하며 공공조형물의 설치 등 공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필요가 있다. 미래의 삶에 대해 상상한다면 현재의 삶과 장차 도래할 삶 사이의 연속성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며,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도시 문화가 왜곡되지 않도록 개선하는 데도 역할을 해갈 것이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 Wolterstorff)는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까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보시고 “매우 좋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기쁨’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지적은 도시를 단순히 경제성장과 이윤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만 인식하는 우리의 통념을 넘어선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로 잡혔을 때 ‘성읍의 평안’을 구한 것은 많은 암시를 준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속박의 땅에서 벗어날 궁리만 하지 않고 그런 곳에서도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우리 공동체의 안녕과 행복에 밀접하게 연관 짓도록 하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의 본분이다. 더욱이 도시는 하나님 임재의 잠재적 구현이다. 그 임재 안에서 거주자들은 추함에 대항하여 아름다움을, 사회적 무관심에 대항하여 사랑을 증진하라는 도전에 직면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거룩한 도성을 소망한다면 도시를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들이 실현되는 장소로 변혁해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미적 경험을 넓혀 마침내 ‘기쁨의 도시’가 되도록 수고할 때 ‘주님의 샬롬’을 미리 맛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