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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주(權(黑+主)) 평창일기(平昌日記)
권주(權(黑+主) ; 1576∼1651)는 남천(南川) 권두문(權斗文 ; 1543~1617)의 차자로서 권주의「평창일기(平昌日記)」는 임진왜란에 왜군이 부산 상륙 후 서울 가도로 조령과 죽령도 예상되자 권 군수의 고향인 영주에서 권주는 서모 강녀를 데리고 피난으로 부친의 임지인 평창군 동촌(현 정선군 동면)으로 와서 이후 정동굴에서 권군수(부친)과 함께 왜구에 대항하다 포로가 되어 강원 감영인 원주로 압송되었다 탈출하는 과정의 기록으로 권 군수의『호구록(虎口錄)』에 이해를 확연히 할 수있는 기록으로 이 두 권의 사서는 임진왜란 당시 전란속에서 평창에서 임진왜란의 실제 상황을 겪은 당사자의 기록으로 중요성을 가진다.
남천(南川) 권두문(權斗文 ; 1543~1617)의 『호구록(虎口錄)』에서는 평창군수로서 왜군이 멧둔제를 넘어오자 淸野戰法으로 평창 郡, 官民이 함께 남쪽 시오리길의 천동리 절개산 절벽의 상,하굴( 관굴과 민굴)로 잠적 후, 8월 11일 난을 피한 군대를 굴에 매복하여 지키게 하였지만 결국 적의 총탄에 관군은 죽고 군수와 아들 권주는 체포되자 강녀는 왜적에게 욕을 당할 것을 두려워 절벽 아래로 투신하였다. 권 군수 일행은 포로로서 원주의 강원 감영에 투옥되어 포로생활을 하던 중 9월 2일 새벽에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비가 내림에 그 틈을 타서 탈출을 하게 되는 전말을 매우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평창일기(平昌日記)」는 권주(權(黑+主) ; 1576∼1651)의 시 문집인『춘수당일고(春睡堂逸稿)』 권 1에 수록되어 있다.
권주는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독서와 수양에 몰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면서 조정에서 청나라와 강화(講和)하기로 결정을 내리자 그때부터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집 이름을 모명재(慕明齋), 춘수당(春睡堂)이라 하여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병남서원(屛南書院)에 제향되었다.
권주의 자는 자지(子止), 호는 춘수당(春睡堂)ㆍ모명재(慕明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두문(斗文)의 아들이며 영주(榮州)사람이다. 그는 임란 때 아버지와 함께 평창임소(平昌任所)에 있다가 왜병을 정동굴에서 방어하다가 마침내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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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日記
출처: 권주(權(黑+主))의 시 문집인『춘수당일고(春睡堂逸稿)』 권 1.
壬辰三月、家君知平昌郡。四月遭倭變、郡南
임진년 (1592년) 3월에, 저희 아버님께서 **평창군(平昌郡)**을 맡고 계셨습니다.
4월에 **왜란(倭變, 임진왜란)**을 당하셨습니다. 郡南(군의 남쪽에서)
▣ 027
📜 한문 원문 및 해석
| 한자 원문 | 해석 |
| 壬辰三月、家君知平昌郡。四月遭倭變、郡南 | 임진년(1592년) 3월에, 저희 아버님께서 평창군수로 계셨습니다. 4월에 **왜란(임진왜란)**을 당하셨는데, (상황이) 군의 남쪽... |
| 井洞有上下二窟、絶壁削立、千仞上可容數百人。 | **정동(井洞)**에는 위아래로 두 개의 굴이 있는데,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 있고, 천 길 위에 수백 명을 수용할 만했습니다. |
| 家君以郡人前奉事智士涵抄兵百餘人、設柵於外臺、多置軍器峙糧窟中、以備禦賊。 | 아버님(군수)께서는 군 사람인 **전 봉사(前奉事) 지사함(智士涵)**과 더불어 100여 명의 병사를 모아, 밖의 넓은 터에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군기(軍器)를 많이 두고 식량을 굴 속에 쌓아 적을 막을 준비를 했습니다. |
| 六月二十五日、余以省覲陪庶母自榮川沙文川避亂、所發程往寓于郡之東村、德川留內甲山石連等家。 | 6월 25일, 저는 문안을 살피기 위해 **서모(庶母)**를 모시고 **영천(榮川) 사문천(沙文川)**에서 난을 피해, 발길 닿는 대로 군(郡)의 동쪽 마을인 덕천(德川)의 유내(留內), 갑산(甲山), 석연(石連) 등의 집에 머물러 지냈습니다. |
| 七月二十三日、移寓郡南面井洞、僧惠正草幕。 | 7월 23일, **군(郡)의 남면(南面) 정동(井洞)**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승려 혜정(惠正)**이 지은 **초막(草幕)**이었습니다. |
| 八月初七日、倭先鋒自旌善入郡、於是陪家君曁庶母、率中房彦英奴彦伊希壽、千壽婢彦眞李代彦眞夫林孫、及假吏孫壽千等同入于 | 8월 7일, 왜적의 선봉대가 정선(旌善)을 거쳐 (평창) 군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에 아버님과 서모를 모시고, 중방(中房) 언영, 노복(奴僕) 언이, 희수, 천수, 비(婢) 언진, 이대, 언진의 남편 임손, 그리고 가짜 아전(假吏) 손수천 등을 인솔하여 모두 함께 (...으로) 들어갔습니다. |
* 주2) 前奉事 : 종 8품직
* 주3) 혜정스님의 암자는 천동리 정동굴 절벽 위로 중도마치에서 절개산 절벽 이치골?로 내려간다.
따라서 당시 임란당시 평창은 청야전법으로 군관민 전원이 천동의 정동 상 하굴로 숨어들어갔다. 오후에 출발하여 저녁에 떨어지면 혜정스님 암자에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정동굴로 내려간 듯하다. 또한 정동굴은 천동에서 정동굴 아래 강변으로 가서 올라 갈 수가 있다. 하지만 물이 조금만 불어도 강옆길에 5m정도는 경사진 물속 바위를 밟지 못해서 키가 넘는다.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는 정도(천동을 오기)에서 배를 타고 정동굴로 갔다고 보지도 못한 기록을 하고있다. 만약 조금만 강물이 불어서 찬동에서 걸어서 정동굴을 오르지 못한다면, 이때는 읍에서 천동으로 가기에 하평, 유동, 약수의 세번 강을 건너야 하는데, 물이불때는 아녀자는 건널 수 도 없다. 정원대는 평창에 잘 기록된 역사도 모두 왜곡시키는향토사가가 아닌 소설을 쓰고 있다. 따라서 남의 책을 그렇게 헐뜯던 정원대와 김진백의 책은 오히려 평창역사 전반을 왜곡시키고 있다.그들의 책은 평창역사가 아니다.
* 주4) 及假吏孫壽千을 ai는 무식하게 손수천을 가짜 아전(假吏) 이라고 번역하는데, 당시 손. 나씨는 평창의 토속성씨로 손수천은 무급으로 관아 일에 협력한 듯하다.
* 주5) 도적(賊)은 임진왜란시 쳐들어온 일본의 왜구를 말함.
* 주6) 정동(井洞) 석굴- 평창읍 천동리 절개산 절벽에 있는 상, 하굴이다.
* 주7) 家君- 남에게 자신의 부친을 이르는 말. 춘부장
▣ 028
| 井洞石窟。 | 정동(井洞) 석굴. |
| 初十日賊連絡入郡弱水井洞等處、亦皆充滿。 | 초열흘날(初十日) 도적(賊)들이 군(郡)으로 연락하여 들어왔는데, 약수(弱水)의 정동(井洞) 등지에도 역시 모두 가득 차 있었다. |
| 夕賊始到窟下。 | 저녁 무렵에 도적들이 비로소 석굴 아래에 도착했다. |
| 十一日曉、賊大至、 | 열하루날 새벽(十一日 曉), 도적들이 대거 밀어닥치자, |
| 使郡武士智士涵、智大成、禹應緍、智大用。 | 군의 무사(武士)인 지사함(智士涵), 지대성(智大成), 우응민(禹應緍), **지대용(智大用)**과, |
| 大明李仁恕、李大忠、及忠州避亂人、崔嶪、禹胤善等、 | 대명(大明)의 이인서(李仁恕), 이대충(李大忠), 그리고 충주(忠州)에서 난리를 피해 온 최업(崔嶪), 우윤선(禹胤善) 등이, |
| 率軍出禦于窟外、 | 군사를 이끌고 굴 밖으로 나가 막아 싸웠다. |
| 士涵、應緍、仁恕、大忠皆中鐵丸而斃、 | 사함, 응민, 인서, 대충 네 사람은 모두 **쇠 탄환(鐵丸)**을 맞고 쓰러져 죽었고(斃), |
| 餘軍走入于窟、 | 남은 군사들은 석굴 안으로 달아났다. |
| 賊徒十餘已登窟口矣。 | 도적 떼 십여 명이 이미 굴 입구에 올라선 뒤였다. |
| 賊刃及家君、庶母以身蔽之。 | 도적의 칼날이 **가군(家君)**에게 미치자, **서모(庶母)**가 몸으로 이를 막아 가리었다. |
| 家君及窟中男女皆披擄、 | 가군과 굴 속에 있던 남녀 모두 포로로 잡혀갔으며(披擄), |
| 庶母自知辱及於身、 | 서모는 자신이 욕을 당하게 될 것을 알고(自知辱及於身), |
| 遂墜絶壁而死。 | 마침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
| 群倭見之、却立歎賞良久。 | 무리 지은 왜적(群倭)들이 이를 보고, 뒷걸음쳐 서서 오랫동안 탄식하며 칭찬하였다(歎賞良久). |
| 被縳 | 묶여 잡힌 (被縳)... |
▣ 029
| 入郡日已午矣。 | **(도적들이 포로들을 이끌고) 군(郡)으로 들어온 시각은 이미 오시(午時, 정오)**였다. |
| 東上房庭中先已設柵、被擄之 人、皆囚其內。 | 동상방(東上房) 뜰 가운데에는 먼저 울타리(柵)가 설치되어 있었고,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은 모두 그 안에 갇혀 있었다. |
| 十二日設柵于厠舍空廊、囚吾父子及彦英。 | **열이틀날(十二日)**에는 변소(厠舍)의 빈 행랑(空廊)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나와 아버지(吾父子) 그리고 언영(彦英)을 가두었다. |
| 十五日賊先鋒分向酒泉寧越等地。 | **열닷샛날(十五日)**에 도적들의 선봉대가 주천(酒泉)과 영월(寧越) 등지로 나누어 향했다. |
| 十六日賊大軍盡向寧越、賊攜馬而來、朝夕且無所食、 | 열엿샛날(十六日), 도적들의 **대군(大軍)**이 모두 영월로 향했으며, 도적들이 말을 끌고 와서, 나와 아버지를 억지로 말에 태웠다. |
| 纏縳在身、驅策不已、殆不勝其苦矣。 | 온몸에 칭칭 묶인 채, (도적들이) 쉴 새 없이 몰아세웠으니, 그 고통을 거의 이겨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
| 昏抵寧越、囚吾三人、于鳳棲樓下、 | **해 질 무렵(昏)**에 영월에 도착하여, 우리 세 사람을 봉서루(鳳棲樓) 아래에 가두었다. |
| 本郡之人、亦多擄入、 | 본래 이 군(郡)의 사람들도 많이 포로로 잡혀 들어와 있었다. |
| 是日途中家君墜馬傷足、臥痛不能起。 | 이 날 도중에 아버지(家君)께서 말에서 떨어져 발을 다치는 바람에, 아파서 누워 일어나지 못하셨다. |
| 余取火熨之、朝夕且無所食、 | 나는 불을 가져다가 (다친 곳을) 찜질해 드렸으나,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이 전혀 없었다. |
| 得菁根于擄入之人、以進之。 | 포로로 잡혀온 사람에게서 **순무 뿌리(菁根)**를 얻어 아버지께 드렸다. |
*주8) "8월 19일 고종원·고종길 형제는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과 함께 영월 봉서루(鳳棲樓)에 갇혔다. 이후 주천 빙허루(憑虛樓)를 거쳐 원주관아로 끌려가서 감금되었다."라는 『호구록』의 기록에서 영월, 주천에는 봉서루 기록은 없고 영월 객사인 관풍헌이나 주천 빙허루의 완전인듯 하다.
평창서 원주 감영가기엔 주천길로 가야하며 영월읍은 반대의 길이기에 왜구들은 영월이 아닌 주천길로 접어 들었어야 정상이다.
*주9) 동상방(東上房)은 평창관아의 건물.
▣ 030
| 十七日監役李士岳亦擄入、 | **열이렛날(十七日)**에는 감역(監役) 이사악(李士岳) 또한 포로로 잡혀 들어왔다. |
| 李乃名士也、以其容貌俊美、 | 이(李士岳)는 바로 이름난 선비였는데, 그의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
| 誤認爲永春縣監而並囚之。 | (도적들이) 영춘현감(永春縣監)으로 잘못 알고 함께 가두었다. |
| 見吾父子、垂淚良久。 | (그가) 나와 아버지를 보고는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
| 十八日寧越郡吏被擄者嚴守一、贈余大豆數升。 | (그 콩은) 그때 (관청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
| 守一爲倭所使出入官廳、時所取來者也 | 엄수일은 왜적에게 사역되어 관청을 출입하고 있었는데, |
| 忠州北村居女人德非、持菁根來饋、 | 충주 북촌에 사는 여인 **덕비(德非)**가 순무 뿌리(菁根)를 가지고 와서 대접하였고, |
| 且取鐵頭具炰黃豆以進之、 | 또 **철두구(鐵頭具, 쇠 솥이나 그릇)**를 가져다가 볶은 콩(炰黃豆)을 만들어 (우리에게) 드렸다. |
| 自是守一德非每事有眷顧之意、極感。 | 이로부터 엄수일과 덕비는 매사 우리를 돌보아주려는 뜻이 있었으니, 심히 감사했다. |
| 十九日寧越士人高宗遠、宗吉兄弟擄入。 | **열아홉날(十九日)**에는 영월의 사림(士人, 선비)인 고종원(高宗遠)과 종길(宗吉) 형제가 포로로 잡혀 들어왔다. |
| 蓋高君橫城世族、新寓寧越聞倭變、 | 대개 고종원은 횡성(橫城)의 세족이었는데, 새로 영월에 우거하다가 왜적의 변란을 듣고, |
| 與其弟宗慶募 | 그의 아우인 종경(宗慶)과 함께 (군사를) 모집... |
*주10) 고종원(高宗遠) 3형제는 영월에서 의병의 창의를 하여, 원래 횡성세족으로 횡성 등지에서 지원하여 500여명이 창의하였다.
고종원 형제의 증조부 고형산은 우찬성 출신의 과거제의 현량과를 철회하는등 전국적 명성을 가졌기에 명문집안으로 의병이 가능하였다. 필자는 영월 고씨굴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조명하였습니다.
▣ 031
| 兵赴亂。宗慶竟死非命。 | 군사를 모아 난리(亂)에 나섰으나. 종경(宗慶)은 마침내 비명(非命)에 죽었다. |
| 今又兄弟被執、見家君垂泣而言曰: | 이제 또 (나머지) 형제(종원, 종길)가 붙잡혔는데, (그들이) 가군(家君)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 公何至此。公我所遭何其酷相似也。 | "공(公)께서는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공과 제가 당한 일이 어찌 이리도 잔혹하게 비슷합니까?"라고 하였다. |
| 因與之相慰焉。 | 이로 인해 (가군과 고씨 형제는) 서로 위로하였다. |
| 夕有着倭服者來、視良久問之、 | 저녁 무렵에 **왜복(倭服)**을 입은 자가 와서,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묻자, |
| 則乃郡人嚴仁進之子也*주9)。 | 곧바로 군 사람 엄인진(嚴仁進)의 아들이었다. |
| 二十日平昌於是寺僧、前此擄入、將放還告歸。 | **스무날(二十日)**에 평창(平昌)의 어시사(於是寺)의 스님이 이전에 포로로 잡혀왔다가, 풀려나 돌아가게 되었다. |
| 家君得紙筆於嚴守一、寄書家兄。 | 가군께서 엄수일에게서 종이와 붓을 얻어, 맏형(家兄)에게 편지를 부치려 하였다. |
| 時家君臂血、滴染滿紙、 | 이때 가군 팔의 피가 떨어져 종이 가득히 물들었고, |
| 家君乃擲筆歎曰:家人見此、應倍傷心。 | 가군께서 이에 붓을 던지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집안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필시 두 배로 마음 아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 因昏仆委席、余在傍扶救、心懷罔極。 | 이로 인해 (가군이) 혼절하여 자리에 쓰러지시니, 내가 곁에서 부축하고 구하느라, 마음속에 끝없는 근심이 가득하였다. |
| 二十二日有女子石介進襦裙單裙及綿襪於家君、寒甚得衣、深感厚意。 | **스무이튿날(二十二日)**에 석개(石介)라는 여자가 저고리, 홑치마, 그리고 솜 버선(綿襪)을 가군께 바쳤는데, |
| 寒甚得衣、深感厚意。 | 날씨가 몹시 추운데 옷을 얻게 되니, 그 두터운 마음에 깊이 감격하였다. |
| 石介本靈光人、數年 | 석개는 본래 영광(靈光) 사람인데, 수년... |
*주11) 則乃郡은 ai번역에 바로 옆 군이라 하는데, 이ㄴ즌 바로옆 정선군으로, 정선은 잉매현(仍買縣)이었다.
▣ 032
| 前行乞來此。云其夫彦福也。 | 전에 구걸하러 다니다가 이곳에 왔으며, **그녀의 남편은 언복(彦福)**이라고 하였다. |
| 因平昌吏李應壽之放還、具書其由、使傳于家庶、 | 평창 아전(吏) **이응수(李應壽)**가 풀려나 돌아가게 된 것을 기회로, 그 (구호의) 사유를 상세히 적어 집안의 **서모(庶, 집안사람)**에게 전달하게 하였으니, |
| 得認此不忘之恩。 | 이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알게 하고자 함이었다. |
| 二十三日引吾等而出騎馬于大門外、 | **스무사흣날(二十三日)**에 우리 일행을 끌어내어 대문 밖에서 말을 타게 하였고, |
| 午後至堤川、 | 오후에 제천(堤川)에 도착했다. |
| 引吾三人及李景鎭[士岳字]于舊衙、 | 우리 세 사람과 **이경진(李景鎭, 이사악의 자)**을 **옛 관아(舊衙)**로 끌고 들어갔다. |
| 昏引入於東上房厠間空廊、設柵囚之。 | **해 질 무렵(昏)**에 동상방 변소(厠間)의 빈 행랑(空廊)으로 끌어들여, 울타리를 치고 가두었다. |
| 二十四日雞鳴、引吾等騎馬過新林、 | 스무나흗날(二十四日) 닭이 울 때, 우리 일행을 끌어내어 말을 태우고 신림(新林)을 지나갔다. |
| 改騎他馬。 | (신림에서) 다른 말로 바꾸어 탔다. |
| 午後入原州從倭等引入民舍、饋飯。 | 오후에 원주(原州)에 들어갔는데, 왜적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민가로 우리를 끌어들여 밥을 먹였다. |
| 昏後入囚。于東上房文書樓上庫、 | 해 진 후에 동상방 문서루(文書樓)의 위층 창고에 갇히게 되었다. |
| 庫凡四間、多積各官帳籍、 | 창고는 모두 네 칸이었는데, 각 관아의 장부와 서적들이 많이 쌓여 있었고, |
| 只虛中一間、僅容吾四人。 | 오직 가운데 한 칸만 비어 있어, 겨우 우리 네 사람 (나, 아버지, 언영, 이사악) 을 수용할 수 있었다. |
▣ 033
| 二十六日、賊魁豐臣吉成*주10)領軍陷靈原城、牧使 金悌甲及其子時進並被殺、以其頭來示吾等 曰:此誰人頭耶。等皆無言、因相視嗟嘆而已。 | 26일, 왜적의 괴수 **풍신길성(豊臣吉成)**이 군대를 이끌고 **영원성(靈原城)**을 함락시켰습니다. **원주 목사 김제갑(金悌甲)과 그의 아들 김시진(金時進)**이 함께 피살되었는데, 그 머리를 가져와 우리들에게 보이면서 "이것이 누구의 머리냐?" 하고 물었습니다. 우리 모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서로 쳐다보며 탄식할 뿐이었습니다. |
| 二十七日皮匠天祐亦擄入、來見吾等自稱縣 監黃是之奴也。因其出入而與之相語、稍可慰 也。是夜夜直稍歇。 | 27일, 피장(皮匠, 가죽장이) **천우(天祐)**도 포로로 잡혀 들어왔는데, 우리를 찾아와 스스로 황시(黃是) 현감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왜적의 사역으로) 출입하는 틈을 타 그와 서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날 밤에는 야간 경계(夜直)가 조금 소홀했습니다. |
| 二十八日守直漸不如初時、或緩其結縳、而間 又久曠不來。自今可以謀出、是日始穿壁穴、先 以帳籍掩蔽、使賊不得知。 | 28일, 경비(守直)가 점차 처음 같지 않아서 때로는 우리를 묶은 포박이 느슨해지기도 했고, 때로는 오랫동안 감시하러 오지 않기도 했습니다. 지금부터는 탈출을 모의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날 비로소 벽에 구멍을 뚫기 시작하였고, 먼저 장부(帳籍)로 구멍을 가려 적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
| 二十九日州人李德守來饋西瓜等、分食曰:此 | 29일, 원주 사람 **이덕수(李德守)**가 와서 수박 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나누어 먹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
주) 풍신길성(豊臣吉成) - 4번대 번대장은 모리야스나리(毛利吉成)이다. 권 군수의 호구록에서도 풍신길성으로 나오는데 당시 정보의 한계인 것이다.
▣ 034
| 文山在燕獄時所食、其所遭千載而同也。德守、 李參判 墍之奴、而忠州品官李允成之蘖四寸 也。厚意可感、是日彦英項鎖自絶、生道始兆。 | (이덕수가 수박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문산(文山) 이이(李珥) 선생이 연옥(燕獄, 감옥)**에 계실 때 드셨던 것과 같으니, 그 처지가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같구나." 하였습니다. 이덕수는 **이참판(李參判) 이확(李墍)**의 종이며, 충주 품관(品官) **이윤성(李允成)**의 서얼 사촌이었습니다. 그 두터운 마음에 감격했습니다. 이날 언영(彦英)의 목에 채워진 쇠사슬이 저절로 끊어져, 살아갈 방도(生道)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
| 家 君因元店壽寄書于號召使李墍 巡察使 姜紳、 助防將缺三處蓋密通賊情也。 | 아버님께서는 **원점수(元店壽)**를 통해 **호소사(號召使) 이확(李墍)**과 **순찰사(巡察使) 강신(姜紳)**에게 편지를 부쳤습니다. 다만, 조방장(助防將) 자리는 세 곳이 비어 있었는데, 이는 몰래 왜적의 정황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 九月初一日、州內居人張同亦在擄中來、進生 栗數升、西瓜一顆。張同卽張寬之變名、而本三 陟人也。元店壽亦進西瓜、右二人於吾四人俱 有眷眷之意。 | 9월 초하룻날, 원주에 살던 사람 **장동(張同)**도 포로 중에 있었는데, 우리에게 와서 생밤 몇 되와 수박 한 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장동은 곧 **장관(張寬)**의 변명(變名, 이름을 바꾼 것)이며 본래 삼척(三陟) 사람이었습니다. **원점수(元店壽)**도 역시 수박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우리 네 사람에게 모두 간절한(眷眷) 마음이 있었습니다. |
| 而張同以諺書示逃出之路曰:自 鴨脚樹下、從貳衙後、直扺南山之外、無賊云云。 | 그런데 장동이 **언문(한글)**으로 도망쳐 나갈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내용은 "은행나무(鴨脚樹) 아래에서부터 이아(貳衙) 뒤를 따라 남산(南山) 밖으로 곧바로 가면 왜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 035
| 其意尤可感。 | (앞 문장과 연결되어) 그 뜻이 더욱더 감격스러웠습니다. |
| 初二日昏雷雨大作、不分咫尺。直倭滅燈閉門 而下宿於樓底、夜未二更、余扶家君與高彦英、 李景鎭由壁穴而逃出。 | 초이튿날(9월 2일) 해 질 녘에 천둥과 비가 크게 쏟아져 지척(咫尺)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당직을 서던 왜적(直倭)이 등불을 끄고 문을 닫은 채 누각 아래로 내려가 잠을 잤습니다. 밤 **이경(二更)**이 채 되기 전에, 제가 아버님을 부축하고 고언영, **이경진(이사악)**과 함께 벽에 뚫어 놓은 구멍(壁穴)을 통해 도망쳐 나왔습니다. |
| 景鎭先去、吾父子曁彦 英同行至可里峴、賊追幾及、遂避路下、仍登如 攢山、雨始止、而日已曙矣。 | 이경진이 먼저 가고, 우리 부자와 언영은 함께 **가리현(可里峴)**에 이르렀는데, 왜적이 거의 따라잡아 마침내 길 아래로 피했습니다. 그리고는 **여찬산(如攢山)**에 올라갔습니다. 그때서야 비가 그쳤는데, 날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
| 初三日在山中日暮、三人共依巖樹而宿。夜乍 雨旋霽、餒甚。欲摘山果、無一結實、因攀登採松 葉和炰豆而幷齧之。 | 초사흣날(9월 3일) 산속에서 해가 저물어, 세 사람이 바위와 나무에 의지하여 잠을 잤습니다. 밤에 잠깐 비가 오다 곧 그쳤는데, 배고픔이 너무 심했습니다. 산과(山果)를 따 먹으려 했으나 하나도 열매 맺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기어 올라가 솔잎을 따서 볶은 콩에 섞어 함께 씹어 먹었습니다. |
| 初四日、跋涉艱難、終日未過一崖、漸漸下山、乃 | 초나흣날(9월 4일), 험한 길을 건너느라 어려움을 겪었으며, 하루 종일 깎아지른 절벽(一崖) 하나를 넘지 못했습니다. 점점 산을 내려오니... |
▣36
| 如攢里也。畏賊不敢投宿人家、遇粟田各授數 穗、而嚼之。 | (앞 문장과 연결되어) 여찬산(如攢山) 아래 마을이었습니다. 왜적이 무서워 감히 인가에 투숙하지 못하고, 기장 밭을 만나 각각 몇 개의 이삭을 얻어 씹었습니다. |
| 得小坎泥水亦飮一瓢。止宿松下、夜 半驟雨衣濕寒重、其苦甚矣。 | 작은 웅덩이의 흙탕물이라도 얻어 한 바가지 마셨습니다. 소나무 아래에서 잠을 잤는데, 한밤중에 소나기가 쏟아져 옷이 젖고 추위가 심해 그 고통이 매우 심했습니다. |
| 初五日早朝、下山尋得小逕。披草萊而上、乃避 亂人結幕處也。 | 초닷샛날(9월 5일) 이른 아침, 산을 내려와 작은 길을 찾았습니다. 풀ᇁ을 헤치고 올라가니, 바로 피난민들이 막을 치고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
| 問其姓名、則新林驛子李忻孫、 朴虫去之李一山也。三人各分朝飯而饋之、 | 그들의 성명을 물으니, 신림(新林) 역자(驛子) 이흔손(李忻孫), 박충거(朴虫去)의 아들 **이일산(李一山)**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각각 아침밥을 나누어 먹여 주었습니다. |
| 又 有金注叱同朴今孫、自他適至、脫其蔽陽子進 于家君、又貸升米而饋之、贈彦英以草鞋。 | 또 **김주질동(金注叱同)**과 **박금손(朴今孫)**이라는 사람이 다른 곳에서 마침 도착했습니다. 박금손은 **햇빛 가리개(蔽陽子)**를 벗어 아버님께 드렸고, 또 쌀 한 되를 빌려 먹여 주었으며, 언영에게는 짚신을 주었습니다. |
| 今孫 亦贈余蔽陽子忻孫亦饋以升米。午從間、道發 行、未數步逢驛子福只佩飯而至、彦英借而持 | 박금손은 저에게도 햇빛 가리개를 주었고, 이흔손 역시 쌀 한 되를 먹여 주었습니다. 정오 무렵 샛길을 따라 길을 떠났는데, 몇 걸음 가지 않아 역자 **복지(福只)**가 밥을 차고 오는 것을 만났습니다. 언영이 그것을 빌려 들고... |
▣37
| 之踰一峴、至求利坡有草家四五、乃林元所居 也。元設席邀入、饋以肉饌、待之甚厚。 | (앞 문장과 연결되어) 하나의 고개(峴)를 넘어 **구리파(求利坡)**에 이르니 초가 네댓 채가 있었는데, 바로 **임원(林元)**이라는 사람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임원이 자리를 마련하고 맞아들이더니, 고기 반찬을 대접하는 등 매우 후하게 대접했습니다. |
| 元時年六 十五、其子守元 守丁、銀希五十同也。其婿張五 十、金也替相。來見尤致誠、款留元家。 | 임원은 이때 나이 예순다섯이었는데, 그의 아들 수원(守元), 수정(守丁), 그리고 **은희(銀希)**와 **오십동(五十同)**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의 사위인 **장오십금(張五十金)**도 와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며 우리 일행을 임원의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
| 初七日、張五十金邀入其家、饋飯肉甚厚、此地最 近賊路、欲乘夜發。 | 초이렛날(9월 7일), 장오십금이 우리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 매우 후한 고기 반찬으로 밥을 대접했습니다. 이곳은 왜적의 길목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밤을 틈타 떠나려 했습니다. |
| 程元與其子等相議護送之 計、適新林驛子朴連攜馬而至。 | 임원과 그의 아들들이 호송할 계책을 서로 논의하던 차에, 마침 신림(新林) 역자(驛子) **박연(朴連)**이 말을 끌고 도착했습니다. |
| 元等力勸借乘、連許之。守元亦許陪去。元裏飯相隨、有同一家 之人焉。 | 임원 등이 말을 빌려 타기를 강력히 권유하니 박연이 허락했습니다. 아들 수원 역시 함께 따라가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임원이 밥을 싸서 동행했고, 또 한 사람의 같은 집 사람이 함께했습니다. |
| 黃昏踰紅峴、過新林、入石、南、夜已黑矣。 踰杻峴入新興、朴連扣路傍一家、有僧先出、主 | 해 질 녘에 **홍현(紅峴)**을 넘어 신림을 지나 석남(石南)에 들어가니, 밤은 이미 깊었습니다. **추현(杻峴)**을 넘어 신흥(新興)으로 들어가는데, 박연이 길가의 한 집을 두드리니, 한 스님이 먼저 나와 있었고, 주... (문장이 여기서 끊겼습니다.) |
▣38
| 人隨之秉火以迎坐。余父子於溫叟作粥饋之。 主人名金彦、僧則西珍也。 | (앞 문장과 연결되어) 주인(집 주인)이 그를 따라 횃불을 들고 나와 우리 부자를 맞아 앉게 하였습니다. 따뜻한 아궁이에 우리 부자를 앉히고 죽을 끓여 먹여 주었습니다. **주인의 이름은 김언(金彦)**이었고, **스님은 서진(西珍)**이었습니다. |
| 本居李大震齋舍、而 於李景鎭亦有素聞。景鎭被擄還出、驚歎不已。 是時夜已半矣。卽發行、西珍請從指路、其意可 感。 | 이들은 본래 이대진(李大震)의 재사(齋舍)에 머물렀는데, **이경진(李景鎭, 이사악)**에 대해서도 평소 알고 있었습니다. 이경진이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것을 보고 놀라 탄식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이미 밤이 깊었습니다. 곧바로 다시 출발하려 하자, 서진 스님이 길 안내를 자청하여 따라가고자 하니, 그 마음에 감격했습니다. |
| 由間道至酒泉中房里。安百齡家、西珍所知 也。迎入虛廳、作粥饋之、仍留宿。 | 스님의 안내를 따라 샛길로 가서 **주천(酒泉) 중방리(中房里)**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안백령(安百齡)**의 집이었는데, 서진 스님이 아는 곳이었습니다. 우리를 맞아 **빈 마루(虛廳)**로 들여보내 죽을 끓여 먹이고 하룻밤 묵게 했습니다. |
| 未明縣校生李 夢吉聞之來見、曾亦被擄還脫者也。相慰甚殷勤。 | 날이 밝기 전에 현교생(縣校生) **이몽길(李夢吉)**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는데, 그 역시 전에 왜적에게 잡혔다가 탈출한 자였습니다. 서로 위로하기를 매우 정성껏 했습니다. |
| 初八日未明踰葛峴、抵李千福家、作飯饋之。縣 人元生員、澈因百齡送鴉靑破道袍、及米數升、 | 초여드렛날(9월 8일) 날이 밝기 전에 **갈현(葛峴)**을 넘어 이천복(李千福)의 집에 도착하여 밥을 지어 대접받았습니다. 고을 사람 **원생원(元生員)**이 안백령을 통해 **까마귀색 헌 도포(鴉靑破道袍)**와 쌀 몇 되를 보내 주었습니다. |
▣39
| 脯五條、千福亦進蒜二束、過於于論里入縣戶 長 尹希慶家、日已午矣。 | (원생원은) 육포 다섯 줄을 보냈고, 이천복(李千福) 역시 마늘 두 묶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곳을 지나 우론리(于論里)를 거쳐 고을 호장(戶長) 윤희경(尹希慶)의 집에 들어가니, 해는 이미 정오(正午)가 되었습니다. |
| 家君使西珍往視平昌、 珍卽去、吾父子仍留宿。 | 아버님께서는 서진 스님을 시켜 평창의 상황을 살펴보게 하셨고, 서진 스님은 곧 떠났으며, 우리 부자는 그대로 머물러 잤습니다. |
| 初九日朝後、踰沙五叱峴、峴上逢假吏孫壽千、 官奴、萬千鶴、只乃西珍率來以迎也。 | 초아흐렛날(9월 9일) 아침 후, **사오질현(沙五叱峴)**을 넘는데, 고개 위에서 **가리(假吏) 손수천(孫壽千)**과 관노(官奴) 만천(萬千), **학지(鶴只)**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바로 서진 스님이 이끌고 와서 맞이한 것입니다. |
| 珍辭去座 首、羅壽千 別監、羅士彦亦來迎入郡地。 | 스님은 (맞이할 사람들에게 임무를 넘기고) 좌수(座首)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났습니다. **좌수 나수천(羅壽千)**과 별감(別監) 나사언(羅士彦) 또한 와서 맞이하며 군(郡) 경계 안으로 우리를 인도했습니다. |
| 八音吞 里金莫石家、孫壽千呈其裏飯、盤中有江魚、別 監 李敬祖所送也。 | 팔음탄리(八音吞里)의 김막석(金莫石)의 집에서 손수천이 싸온 밥을 바쳤는데, 밥상 위에는 민물고기가 있었습니다. 이는 **별감 이경조(李敬祖)**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
| 卽送鶴、只往榮川、以告脫還 之、奇莫石之弟、莫大進呈糖酒。 | 곧바로 학지(鶴只)를 영천(榮川)으로 보내 탈출하여 돌아왔음을 알리게 했습니다. **김막석의 아우 김막대(金莫大)**는 **단술(糖酒)**을 가져다 올렸습니다. |
| 昏南從年妻、亦 進糖酒及餠果、衙中官屬皆來見。 | 해 질 녘에는 남종년(南從年)의 아내 또한 단술과 떡, 과일을 가져다 바쳤으며, 관아의 관속(官屬)들 모두 와서 뵙고 갔습니다. |
▣40
| 初十日、莫石作麪以進。 | 초열흘날(9월 10일), 김막석(金莫石)이 국수를 만들어 올렸습니다. |
| 踰沙峴過弱水洞、越朝 坡已平明矣。 | 사현(沙峴)을 넘어 약수동(弱水洞)을 지나 조파(朝坡)를 넘으니, 이미 날이 환히 밝았습니다. |
| 李汝霖出拜馬首、遂至味屯峴下、 | **이여림(李汝霖)**이 나와 말머리에 절을 올렸고, 마침내 미둔현(味屯峴) 아래에 이르렀습니다. |
| 朴玉孫家訓導 李商霖持酒來見、 | 박옥손(朴玉孫)의 집에서 **훈도(訓導) 이상림(李商霖)**이 술을 가지고 와서 뵈었습니다. |
| 金成慶 羅士 彦 羅壽千 李敬祖 李時霖智太成 大明皆來、 | **김성경(金成慶), 나사언(羅士彦), 나수천(羅壽千), 이경조(李敬祖), 이시림(李時霖), 지태성(智太成), 대명(大明)**이 모두 찾아왔습니다. |
| 因時霖得聞家兄來寧越、蓋聞吾等脫還而尋來 者也。 | 이시림을 통해 맏형님께서 영월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우리가 탈출하여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으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
| 林守元朴連辭歸、各賜布一匹而送之座 首、訓導同宿。 | **임수원(林守元)과 박연(朴連)**은 작별을 고하고 돌아가려 하므로, 각각 베 한 필을 주어 보냈습니다. 좌수와 훈도와 함께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
| 十一日朝後、至其于論里金石陳家、午點。 | 11일 아침 후, 그 우론리(于論里)의 김석진(金石陳)의 집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습니다. |
| 金方福進牛肉、申末叱丁進生梨金玉京呈蒜 | **김방복(金方福)**은 쇠고기를 올리고, **신말질정(申末叱丁)**은 생배를 올리고, **김옥경(金玉京)**은 마늘을 올렸습니다. |
| 家奴 元丁林孫石文介石來自榮川、始聞倭賊八月 | **집안의 종(家奴)인 원정(元丁), 임손(林孫), 석문(石文), 개석(介石)**이 영천(榮川)으로부터 찾아왔습니다. 비로소 왜적들이 8월에... |
▣41
| 十八日犯沙文丹川、一家上下奔竄、云入送林孫石 介于井洞、庶母埋厝處使之堅厚加土、 | (8월) 18일에 (왜적이) 사문단천(沙文丹川)을 침범하여 온 가족이 위아래로 흩어져 달아났다고 했습니다. (아버님께서) **임손(林孫)**과 **석개(石介)**를 **정동(井洞)**으로 들여보내 **서모(庶母)께서 묻히신 곳(埋厝處)**에 흙을 더하여 무덤을 견고하고 두텁게 하도록 시키셨습니다. |
| 午後踰 漆足峴、抵嚴謹臣家宿焉。 | 오후에 **칠족현(漆足峴)**을 넘어 엄근신(嚴謹臣)의 집에 이르러 묵었습니다. |
| 十二日朝後踰火乙谷峴、過石項。午點于寧越 上東面李香家、 | 12일 아침 후, **화을곡현(火乙谷峴)**을 넘어 **석항(石項)**을 지났습니다. 점심은 영월 상동면(上東面) 이향(李香)의 집에서 먹었습니다. |
| 歷直實由十乙峴至瀰沙里、日 已夕矣。宿金世厚家。 | 직실(直實)을 거쳐 **십을현(十乙峴)**을 지나 **미사리(瀰沙里)**에 이르니 해는 이미 저물었습니다. 김세후(金世厚)의 집에서 묵었습니다. |
| 十三日朝食後、過馬孩川、遇僧信寬、延入路傍 家、作飯以饋。 | 13일 아침밥을 먹은 후, **마해천(馬孩川)**을 지나다가 **신관(信寬)**이라는 스님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우리를 길가 집으로 인도하여 밥을 지어 대접했습니다. |
| 踰馬兒嶺、嶺上逢金德鸞。入愚洞 柳戚致雲家、 | **마아령(馬兒嶺)**을 넘었는데, 고갯마루에서 **김덕란(金德鸞)**을 만났습니다. 우동(愚洞) 유척(柳戚) 치운(致雲)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
| 俄而家兄自永春而至蓋尋家君 行而相違也。 | 얼마 지나지 않아 맏형님께서 영춘(永春)으로부터 도착하셨습니다. 이는 아버님의 행방을 찾으러 오셨다가 (길에서) 서로 엇갈렸던 것입니다. |
| 權懷仁閔肇叔朴景承、各持酒來 | **권회인(權懷仁), 민조숙(閔肇叔), 박경승(朴景承)**이 각각 술을 가지고 와서... |
▣42
| 慰。夕後發行初昏到廣峴下馬、拜先祖墓、至助 臥洞、 | (앞 문장과 연결되어)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녁 후 길을 떠나 초저녁에 **광현(廣峴)**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선조의 묘소에 절을 올렸고, **조와동(助臥洞)**에 이르렀습니다. |
| 權景涉 李汝合 羽及堂內諸親率奴輩來迓、 直抵圓塘寓所、夜已深矣。 | 권경섭(權景涉), 이여합(李汝合), 우(羽) 및 집안의 여러 친척들이 노비들을 이끌고 나와 맞이했습니다. 곧바로 원당(圓塘)의 임시 거처에 이르니 밤은 이미 깊었습니다. |
| 先祖南川先生虎口錄曰:賊揮劍擊我、康女卽 趨覆吾背曰:願殺妾而存夫、亦號泣覆之。 | **선조 남천 선생(권두문의 아버지, 평창군수)**의 **《호구록(虎口錄, 왜적에게 잡혔던 기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왜적이 칼을 휘둘러 나를 치려 하자, **강녀(康女, 서모)**가 곧 달려와 내 등을 덮으며 말하기를, '원컨대 첩을 죽여 남편을 살려주소서!' 하고는 역시 소리 내어 울면서 덮었습니다." |
| 適 窟內狹窄、劍頭觸壁、而刃不犯身揮霍之際只 傷吾臂、流血如水。 | 마침 굴 안이 좁아 칼끝이 벽에 부딪혔고, 칼날이 몸을 범하지 못했습니다. (칼을) 휘두르는 급박한 순간에 다만 나의 팔만 다쳤는데, 피가 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
| 賊先縳我、而下又執康女、康 女遂勇身自墜而死。 | 왜적이 먼저 나를 포박하고, 아래로 내려가 또 강녀를 붙잡았으나, 강녀는 마침내 용감하게 몸을 던져 스스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
| 則先我縳出、所着衣 襟大有血痕、問之則亦不省、厲喉唾涎、則乃 純血也。 | (탈출 후) 나를 먼저 묶어 끌고 나왔을 때, 입고 있던 옷깃에 커다란 피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왜적에게) 물어보았으나 (서모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목청을 가다듬고 침을 뱉으니, 순수한 피였습니다. |
▣43
| 賊問曰:汝解文字乎。撓頭曰:未也。諸倭手 持目屬久之。 | 왜적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글자(한문)를 아느냐?" 저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습니다. "아직 모릅니다." 여러 왜적들이 손으로 저를 가리키며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
| 賊曰:窟中墜死者、何人。泣且言 曰:我之庶母也。倭將相與歎美、而言曰:自渡海 以來、惟一汝母而已。 | 왜적이 물었습니다. "굴 속에서 떨어져 죽은 자는 누구냐?" 저는 울면서 대답했습니다. "저의 서모(庶母)이옵니다." 왜장들이 서로 탄식하며 칭찬하고 말했습니다. "바다를 건너온 이후로, 오직 너의 어머니 한 분뿐이로다! (이러한 절의를 본 것은 처음이다.)" |
| 通使倭招入賊魁前問曰:汝名爲誰。紿應 曰:吾名漢臣也。 | 통역하는 왜적이 저를 적괴(賊魁, 왜적의 우두머리) 앞으로 불러들여 물었습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저는 거짓으로 대답했습니다. "저의 이름은 한신(漢臣)입니다." |
| 又問汝知文字否。答以不知。倭 將誘之曰:汝是上官之子、容貌且英邁、豈未之 學乎。 | 또 물었습니다. "너는 글자를 아느냐, 모르느냐?" 저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왜장이 저를 유혹하며 말했습니다. "너는 상관(上官, 아버지 평창군수)의 아들이고, 용모 또한 준수하고 영특한데, 어찌 배우지 않았겠느냐?" |
| 汝若識字、則我不殺汝、將錦衣衣之、珍食 食之、佩汝好刀劍、騎汝美鞍馬、給以徒從待之、 尊重若歸日本、則當作美官、可享富貴、不亦樂 | "너 만약 글을 안다면, 나는 너를 죽이지 않고, 비단 옷을 입히고, 진귀한 음식을 먹이며, 좋은 칼과 검을 차게 하고, 아름다운 안장 말을 태우며, 따르는 사람을 주어 극진히 대접할 것이다. 만약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면 좋은 벼슬을 주어 부귀를 누리게 할 것이니,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
▣44
| 乎。曰:父子人倫之至、今到死地、勢不俱全。倘 活我父放而送之、則我雖在此、可以安心。不然、 安有父死而子獨生之理乎。 | (왜장이 부귀영화를 약속하자 제가) 대답했습니다. "부자(父子)는 인륜의 지극한 관계인데, 지금 죽을 지경에 이르러 두 분 다 온전할 형편이 못 됩니다. 만약 제 아버지를 살려주어 풀어 보내주신다면, 제가 비록 여기에 있더라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데 아들만 홀로 살 이치가 있겠습니까?" |
| 倭將曰:汝父之至 今免死者、專爲汝也。當赦汝父子幷歸日本、以 悅汝心。 | 왜장이 말했습니다. "너의 아버지가 지금까지 죽음을 면한 것은 오로지 너 때문이다. 마땅히 너희 부자를 용서하여 함께 일본으로 돌려보내 너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겠다." |
| 曰:我父有老親臨年而終鮮、兄弟奉 養無人不可遠離、身且有病幾至死域、欲悅我 心莫若放父、勿爲他疑。 | 제가 말했습니다. "저의 아버지께는 연세 드신 노모(老親)가 계신데, 임종을 앞두고 봉양할 형제가 없어 멀리 떠나실 수 없습니다. 게다가 몸 또한 병이 있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제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버지를 풀어주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다른 의심은 마십시오." |
| 倭曰:然則汝父之老親、 通書招致共往日本、尤好。 | 왜장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의 아버지의 노모를 편지를 통하여 불러들여 함께 일본으로 가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다." |
| 亦無以爲答、但碎 頭號泣。倭將撫而慰之曰:汝且勿啼、當如汝言。 | (저는) 역시 대답할 말이 없었고, 다만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 내어 울부짖었습니다. 왜장이 저를 어루만지며 위로하기를, "너는 울지 마라. 마땅히 네 말대로 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
| 賊給紙筆令書字、冩數行曰:我父素多疾病、 | 왜적이 종이와 붓을 주어 글을 쓰게 하니, 몇 줄을 써서 올렸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본래 질병이 많고..." (문장이 여기서 끊겼습니다.) |
▣45
| 又且傷毁。雖不加刃、必至自隕。願速放父、而留 子也。 | (앞 문장과 연결되어 쓴 글, "저의 아버지는 본래 질병이 많고...") "또한 몸이 상하고 훼손되었으니, 비록 칼을 가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스스로 쓰러져 돌아가실 것입니다. 원컨대 아버지를 빨리 풀어주시고, 아들인 저를 붙잡아 두십시오." |
| 賊又慰而答之曰:京城有大將、當以汝意 稟之、汝其勿疑。 | 왜적이 또 위로하며 대답하기를, "도성(京城)에 대장(大將)이 있으니, 마땅히 너의 뜻을 아뢰겠다. 너는 의심하지 마라."고 하였습니다. |
| 賊見書後、雖不解縳、而似有 眷愛之意。 | 왜적이 글을 본 후, 비록 포박을 풀어주지는 않았으나, 마치 아끼고 사랑하는 듯한 기색이 있었습니다. |
| 心神喪亂、終日困睡。夜三四結項欲自決、而 泣而力止、幾絶復甦。 | (그러나 아버지는 풀려나지 않고) 마음과 정신이 몹시 상하고 어지러워져 하루 종일 괴롭게 잠들었습니다. 밤에 세 번, 네 번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스스로) 울면서 힘껏 멈추었으며, 거의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기도 했습니다. |
| 吾坐依竈口、濳起而立、以項繩之懸樑者、屢屈 而重。 | (하루는) 제가 아궁이 옆에 기대앉아 있다가, 몰래 일어나 기둥에 목을 매는 끈을 여러 번 구부리고 다시 묶었습니다. |
| 結之朞於自盡、而使不知。聞吾咽喉 聲卽趨入、緩其繩、兩眶如拔血自口出。達曙 涕泣、不敢出聲。 |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옆에 있던) 왜적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왜적이 저의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달려 들어와 그 끈을 늦추었습니다. 두 눈구멍은 피가 뽑혀 나가는 듯했고, 입에서는 피가 나왔습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울었으나, 감히 소리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
▣46
| 吾撫曰:汝年少未冠、稍知向學、將來有望。而 今乃至此已矣、何言。 | (아버님께서 나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이 젊어 아직 관례(冠禮)도 올리지 못했지만, 학문에 뜻을 두어 장래에 희망이 있거늘,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말을 하겠느냐?" |
| 曰:通塞有命、死生在天。 何必爲子傷懷、但願天地日月山川鬼神使父 得脫虎口、則子之一身雖死賊刃何憾。遂相與 泣下。 | 제가 대답했습니다. "막히고 통하는 것은 명이 있고,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아들 때문에 마음을 상하십니까? 다만 천지일월과 산천귀신께서 아버지를 왜적의 입(虎口)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다면 자식의 한 몸은 비록 왜적의 칼날에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마침내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
| 通使倭引往西上房、副將源介緣之前謂曰: 以汝屬副將前自今昵陪左右、汝可宿於此、遊 於此、無有二心。 | 통역하는 왜적이 저를 **서상방(西上房)**으로 끌고 갔는데, **부장(副將) 원개연(源介緣)**의 앞에 이르러 말했습니다. "너를 부장의 앞에 소속시키니, 지금부터 가까이 좌우를 모시도록 하라. 너는 이곳에서 자고 이곳에서 놀며, 다른 마음을 품지 마라." |
| 慮其將殺父存子、卽應之曰: 老父病重不可暫離、況兵家以孝悌爲先、寧有 殺人之父而欲得其子之心者乎。若不放送我 | (저는 왜적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들만 살려두려 할까 염려하여 곧바로 대답했습니다. "노부(老父)께서는 병이 중하시어 잠시도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병가(兵家)에서도 효제(孝悌)를 우선으로 삼거늘, 어찌 사람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아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자가 있겠습니까? 만약 저의 아버님을 풀어 보내주지 않으시면..." (문장이 여기서 끊겼습니다.) |
▣47
| 父、則我當俱死而已。 | (앞 문장과 연결되어) "아버지(를 풀어주지 않으면), 곧 저는 마땅히 함께 죽을 뿐입니다." |
| 倭將與其徒相顧多話、而 未解其言。久之曰:姑從汝言歸汝父所、時時來 此可也。 | 왜장이 그 무리들과 서로 돌아보며 많은 말을 했으나, (저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랜 후 (왜장이) 말했습니다. "우선 네 말에 따라 네 아버지 계신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때때로 이곳으로 오는 것이 옳다." |
| 李監役 士岳、擄入謂曰:賊徒之不卽殺之者、一 則以我等爲奇貨、將徼大功於渠國也。 | 감역 **이사악(李士岳)**이 포로로 잡혀 들어와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적들이 우리를 곧바로 죽이지 않는 까닭은, 첫째는 우리를 **기이한 재물(奇貨)**로 삼아 그들의 나라에서 큰 공을 세우려 함이오." |
| 一則以 貴胤爲重寶、姑不加刃於尊丈也。 | "둘째는 **귀하(군수의 아들)**를 중요한 보배로 여겨, 잠시나마 **존장(아버님)**께 칼을 가하지 않는 것이오." |
| 苟活雖非義、 徒死亦無益。盍觀事勢、以求死所乎。 | "구차하게 사는 것이 비록 의(義)는 아니나, 덧없이 죽는 것 또한 무익합니다. 어찌 사세(事勢)를 잘 관찰하여 죽을 곳(죽어야 할 때)을 찾지 않으십니까?" |
| 叩頭濺血於階石曰:老父久係病、日益甚、命 在今明、乞速放還。 | (저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 계단 돌에 피를 튀기며 말했습니다. "노부께서 오래도록 병을 앓으시어 날로 더욱 심해지시니, 명(命)이 오늘내일 합니다. 원컨대 속히 풀어 돌려보내 주십시오." |
| 言淚俱發、倭魁急呼其徒趨 救扶起、溫辭慰之、且令暫緩結縳之索。 | 말과 눈물이 함께 쏟아지자, **왜괴(倭魁, 왜적의 우두머리)**가 급히 그 무리를 불러 달려와 구하게 하고 부축하여 일으키게 했으며,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잠시나마 포박한 끈을 느슨하게 해 주도록 명했습니다. |
▣48
| 賊魁令解文之倭書示我聖上諱字、以示 曰:此何人名耶。不答。 | 왜적의 우두머리가 글을 아는 왜적에게 시켜 **우리 성상(聖上, 임금)의 휘자(諱字)**를 써 보이면서, "이것이 누구의 이름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
| 倭更問曰:果不知乎。 曰:子諱父名、臣諱君名、有何所答。 | 왜적이 다시 물었습니다. "과연 모르느냐?" 제가 대답했습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이름을 휘(諱)하고, 신하는 임금의 이름을 휘하는데, 어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
| 倭曰:汝王棄 國遠走耶。曰:國運不幸、去邠之行、勢所難免。 | 왜적이 말했습니다. "너희 왕이 나라를 버리고 멀리 도망갔느냐?" 제가 대답했습니다. "나라의 운이 불행하여, 빈(邠) 땅으로 옮겨가는 행차(피난)가 형세상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
| 又 書金誠一名曰:此亦知之乎。曰:是我父友也。曰: 今作何官。曰:頃奉王命、出使日本、今受專征 之任、方在嶺南。 | 왜적이 또 김성일(金誠一)의 이름을 써 보이면서, "이 사람도 아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저의 아버지 친구이십니다." 왜적이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느냐?" 제가 대답했습니다. "얼마 전 왕명을 받들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셨고, 지금은 전정(專征, 군사를 지휘함)의 임무를 받아 영남(嶺南)에 계십니다." |
| 又問李德馨何在、答曰:屢有書 報、云扈從大駕矣。 | 왜적이 또 **이덕형(李德馨)**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여러 번 편지로 알려오기를, 대가(大駕, 임금의 행차)를 호종(扈從)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
| 倭曰:金李果汝國之賢相 也。汝國如金李者有幾人耶。曰:汝之所知者、惟 此二人而已。其他將相之賢者不可勝數。倭魁 | 왜장이 말했습니다. "김(성일)과 이(덕형)가 과연 너희 나라의 현명한 재상(賢相)이로다. 너희 나라에 김(성일), 이(덕형)와 같은 인물이 몇 명이나 되느냐?" 제가 대답했습니다. "적(汝, 왜적)들이 아는 자는 오직 이 두 사람뿐일 것입니다. 다른 장수와 재상 중 현명한 이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왜적의 우두머리가... (문장이 여기서 끊겼습니다.) |
▣49
| 外之土、而還入之不令落於其下。手小能出 入於椳孔、非何能爲乎。 | (벽) 바깥의 흙을 (떼어내) 다시 (벽에) 넣어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하였는데, 손이 작아 문지방 구멍(椳孔)으로 들락날락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하늘의 도우심이 아니겠습니까! |
| 僉曰:奇特奇特、土旣去然後仍解椳木、而中有大椳、一介橫揷、卽柞之全木、而年久益堅。 | 모두들 말하기를, "기특하고 기특하다!"고 했습니다. 흙을 다 떼어낸 후에 문지방의 나무(椳木)를 풀었는데, 가운데에 커다란 문지방 나무가 하나 가로질러 꽂혀 있었습니다. 이는 참나무(柞木) 통나무였는데, 오래되어 더욱 단단했습니다. |
| 力不能折、汗流如水、望已絶矣。 | 힘으로는 부러뜨릴 수 없어, 땀이 물 흐르듯 하였으며, 희망은 이미 끊어졌습니다. |
| 思之良久曰:忽得一策、吾等其生矣。以火燃椳、椳可自燒。等皆然之。 | 한참을 생각하다가 (제가) 말했습니다. "문득 계책 하나를 얻었으니, 우리들은 살게 될 것입니다! 불로 문지방을 태우면, 문지방이 스스로 타서 없어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했습니다. |
| 適以瓦片方炙火、以熨病足。嘗任是事、雖下樓取火、賊必不疑。 | 마침 기와 조각으로 불을 달구어 병든 발을 찜질하던 중이었습니다. 제가 평소 이 일을 맡아 했으므로, 비록 누각 아래로 불을 가지러 내려가도 왜적이 반드시 의심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
| 於是以瓦盛火而上、賊果不疑。遂熱其椳、椳卽燒落、景鎭謂曰:吾等若得脫還、再覩天日、則皆君之力也。 | 이에 기와에 불을 담아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왜적은 과연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 문지방을 뜨겁게 달구니, 문지방이 곧 타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경진(이사악)**이 저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만약 탈출하여 돌아가 다시 하늘의 해를 보게 된다면, 이는 모두 당신(君)의 힘이오!"라고 했습니다. |
▣50
| 直倭五人持燈火迭相入見、無可乘隙。吾曰:今 夜事不諧矣。終夜祝之 | 당직을 서는 왜적 다섯 명이 등불을 들고 번갈아 가며 드나들어, 틈을 탈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오늘 밤 일은 이루어지기 어렵겠구나."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
| 曰:天其或者欲活我 父、若迅注雷雨、則倭必不疑。而緩囚、庶有所賴 天乎。天乎其雨、其雨、潛心默禱。 | (기도하며) 말했습니다. "하늘이 혹시 우리 아버지를 살리려 한다면, 만약 갑자기 천둥과 비를 쏟아주시어 왜적이 반드시 의심하지 않게 해 주소서! 그러면 포박을 느슨하게 할 것이니, 거기에 의지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비를 내리소서! 비를 내리소서!" 하고 속으로 간절히 빌었습니다. |
| 通使倭來問曰:近日緩汝之縳、任汝意自便。 汝意何測。且汝於上官前少無親附之意、是何 故耶。 | 통역하는 왜적이 와서 물었습니다. "요 며칠 너의 포박을 느슨하게 해 주고, 네 뜻대로 편하게 행동하게 했었다. 너의 속셈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라. 또 너는 상관(上官, 아버지) 앞에서 조금도 친하게 붙어 따르려는 뜻이 없으니 이는 무슨 이유냐?" |
| 曰:病父足痛未瘳、熨瓦之任非我則誰。 出入無常、不得不爾。若放歸我父、使之調病、則 我雖留此、可以安心。 | 제가 대답했습니다. "병든 아버님의 발 통증이 낫지 않아, 기와로 찜질하는 일은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그 때문에) 출입이 일정치 않았으니 부득이하게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저의 아버님을 풀어주어 병을 조리하게 한다면, 제가 비록 여기에 머물더라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
| 通使倭曰:上官命堅縳汝矣。遂以綿索更加北結、且係項索于樑上、吾等 | 통역하는 왜적이 말했습니다. "상관(왜장)이 너를 단단히 포박하라고 명했다." 마침내 솜줄로 더욱 결박하고, 또 목의 끈을 대들보 위에 매달았으니, 우리들은... (문장이 여기서 끊겼습니다.) |
▣51
| 直倭五人持燈火迭相入見、無可乘隙。吾曰:今 夜事不諧矣。終夜祝之 | 당직을 서는 왜적 다섯 명이 등불을 들고 번갈아 가며 드나들어, 틈을 탈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오늘 밤 일은 이루어지기 어렵겠구나."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
| 曰:天其或者欲活我 父、若迅注雷雨、則倭必不疑。而緩囚、庶有所賴 天乎。天乎其雨、其雨、潛心默禱。 | (기도하며) 말했습니다. "하늘이 혹시 우리 아버지를 살리려 한다면, 만약 갑자기 천둥과 비를 쏟아주시어 왜적이 반드시 의심하지 않게 해 주소서! 그러면 포박을 느슨하게 할 것이니, 거기에 의지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비를 내리소서! 비를 내리소서!" 하고 속으로 간절히 빌었습니다. |
| 通使倭來問曰:近日緩汝之縳、任汝意自便。 汝意何測。且汝於上官前少無親附之意、是何 故耶。 | 통역하는 왜적이 와서 물었습니다. "요 며칠 너의 포박을 느슨하게 해 주고, 네 뜻대로 편하게 행동하게 했었다. 너의 속셈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라. 또 너는 상관(上官, 아버지) 앞에서 조금도 친하게 붙어 따르려는 뜻이 없으니 이는 무슨 이유냐?" |
| 曰:病父足痛未瘳、熨瓦之任非我則誰。 出入無常、不得不爾。若放歸我父、使之調病、則 我雖留此、可以安心。 | 제가 대답했습니다. "병든 아버님의 발 통증이 낫지 않아, 기와로 찜질하는 일은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그 때문에) 출입이 일정치 않았으니 부득이하게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저의 아버님을 풀어주어 병을 조리하게 한다면, 제가 비록 여기에 머물더라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
| 通使倭曰:上官命堅縳汝矣。遂以綿索更加北結、且係項索于樑上、吾等 | 통역하는 왜적이 말했습니다. "상관(왜장)이 너를 단단히 포박하라고 명했다." 마침내 솜줄로 더욱 결박하고, 또 목의 끈을 대들보 위에 매달았으니, 우리들은... (문장이 여기서 끊겼습니다.) |
▣52
| 各望絶。 | 각자 (탈출할) 희망이 끊어지고 절망에 빠졌다. |
| 夜二更、大雨無端急注、雷霆震疊天地、 晦塞不辨咫尺。 | 밤 이경(二更, 밤 9시~11시경), 큰 비가 끝없이 갑자기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천지를 뒤흔들며 겹쳐 쳐서, 어둡고 막혀 지척(가까운 거리)도 분간할 수 없었다. |
| 景鎭曰:今此之雨、豈非令胤祝天之感也。至誠動天、果非虛語。 | **경진(景鎭)**이 말하기를: "지금 이 비는 어찌 **영윤(令胤)**이 하늘에 축원한 감응이 아니겠는가.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움직인다는 말이 과연 헛된 말이 아니로다." |
| 等私喜曰:今夜天意可知、不出何竢。 | (나, 권두문) 등이 사사로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늘 밤 천의(天意, 하늘의 뜻)를 알 수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이때가 탈출할 때이다)." |
| 各自解結而出 | 각자 속박(또는 포위)을 풀고 나갔다. |
| 右虎口錄諸條公、感 | (오른쪽은) 호구록의 여러 조목들이다. 공(公)은 감응했다. |
※ 권주의 평창일기 이해
| 6월 25일, 저는 문안을 살피기 위해 **서모(庶母)**를 모시고 **영천(榮川) 사문천(沙文川)**에서 난을 피해, 발길 닿는 대로 군(郡)의 동쪽 마을인 덕천(德川)의 유내(留內), 갑산(甲山), 석연(石連) 등의 집에 머물러 지냈습니다. |
| 7월 23일, **군(郡)의 남면(南面) 정동(井洞)**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승려 혜정(惠正)**이 지은 **초막(草幕)**이었습니다. |
1) 6월 25일 기록에서 **영천(榮川) 사문천(沙文川)**이란 기록에서 권두문 군수의 본가는 영주시내 구성공원 인근에 소재하는데 사문천은 현재는 부석면으로이는 권주가 나가 살던 곳이다.
권주는 서모(강녀)를 모시고 6월 25일 郡의 동쪽( 동촌- 평창군 오면 중 동면으로 1906년 정선으로 이관되었다 ) 마을 덕천의 여러 집에 피난하였다.
영주시는 죽령을 넘는 큰 도시로 임란시 왜군이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온다는 소문에 죽령을 넘을 것이란 예상에 영주에서 피난온 것이다.( 죽령코스는 넘지 않았다) 그리고, 7월 23일 천동의 정동굴 위에 있는 혜정스님의 암자로 거쳐를 옮겼고, 이곳은 중도마치에서 굴로 내려가기에 암자로 내려가기에 굴의 식량등 준비를 한듯 하다.
그런데, 평창에서는 권주는 평창에서 부친을 도우며 글 공부를 하고 강녀는 평창에 거주한 것으로 서술들함녀 특히 강녀는 강소사라고 역사에 개칠을 하고있다.
강녀는 강소사라 하는데 소사는 고유명사가 아닌 잡일을 하는 사람의 일반명사이고 조선시대에 여자는 누구라도 이름이 없었다.
가령 신사임당은 신인선이라 하는데 원 기록은 없이 요즘에 지은 이름이고, 우리는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인도를 망쳤다 하는데 조선은 주자성리학자의 나라로 사농공상의 계급사회로 공자왈 하는 성리학자 외에는 인간이 아니었다. 노비는 단위가 名이 아닌 口이다.
요즘 사망자를 명(名)이라 않라고 구(口)라 한다. 또한 식구 등의 단어도 있지만,,,
노비는 죄를 지어 노비가 될 수도 있기에 노비는 이름도 있었지만 여자 노비를 구분할때는 칠월이 팔월이 등으로 불렀다.
필자는 이미 2012년에 강소사 어원등 서술하였건만, 지난해엔 어느 지방신문 두 개글에 쪼가리 교수란 짜사들이 권 군수의 호구록을 기술하며, 호객식으로 강녀를 강소사도 아닌 애첩으로 지칭하더구만, 혼좀 날수도 있다.
권군수의 12대손 고, 권태하씨는 당시 권군수의 양쪽 집안에 어른들이 연루하여 권군수 부인은 어른 네분을 공양하기 바빠서 후실부인 강녀가 집안 살림을 하였다 한다.
또한, 평창 사람들은 지금 강녀를 강소사라 불리지만 기실 광해군은 그의 순절의 인품에 "절부"라고 추승하였다. 그러기에 강소사라 부르는 것보다 임금님이 내려준 휘호의 강절부님이라고 예의 표시에 합당한 존어이다.
(광해군 4년에 경상감사의 상소로 절부(節婦)로 추승 정려되어 그의 고향인 영주시 구성공원내에 정려각이 세워졌다.)
영주시 구성공원내 강절부님 정려각
2) 호구록에서도 고향 영주가 평창에서 가까운 근거리처럼 몇번 언급되는데, 필자는 호구록을 역사서로 믿을 수 있는가 왜냐하면 충주에서 피난온 자가 콩을 한 주먹 주었는데 그의 이름까지 인명만 백여 명 이상이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동촌에서 고향 영주로 가는 인편이 었어 연락을 전했다 한다. 이것이 진짜인가 확인해보니 현제 평창읍에서 영주시로 가기에는 제천- 단양의 죽령고개를 넘어 풍기를 지나야 한다.
하지만 옛길은 소백산을 넘는 길로 영주시에서 부석면 부석사를 지나면 소백산이 나오는데, 소백산의 고치령은 특이하게도 동면까지 직선으로 오르고 내리지 굽어돌지 않는다. 그리고 해발 700m의 고개마루에는 영주시의 표지판이 이 길은 상인이 많았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소백산 고치령을 넘어 우편쪽으로는 영월과 동촌으로는 정선의 관문으로 경상도의 물자는 소백산을 넘어서 들어갔고
현재는 정선을 넘는 비행기재(마전치재)에 터널이 있듯이 소백산 정상도 터널로 완공되었다.
평창의 임란사를 위해 일본책 아마 제목은 "조선 정벌사가 아닌 징벌사"란 책이 영문판으로 소련서 인기있었다는데, 아마 그레이트 게임시 블라디보스톡까지 혹한을 뚫고 9500km의 철도를 만들고, 발틱함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여 해양으로 나가려는 19c말의 소련은 이제 중국, 일본, 조선 다 잡아먹는다는 야망으로 일본알기로 일본 서적이 유행했슬 것이란 점에서 아마존 샾에서 다각도로 확인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후 읿본이 조선 식민지 길이 열린 것이다.
이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