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강의 줄거리 이 여행의 기행문은 정사 부사 종사관 3 사람이 다 각기 지은 작품이 있는데 다른 두 사람의 작품은 1936년 10월 6일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온 경로만 썼지만 이 작품은 동년 8월 11일 임금으로부터 임명을 받고 2달 동안 부산으로 가는 노정까지 있기 때문에 이글을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 작품에서 부산까지 가는 경로와 부산에 있으면서 겪었던 일을 자세히 기록한 10월 5일까지의 기록만 번역하고 10월 6일부터는 정사인 임광의 기록을 번역하기로 했다. 물론 여행의 일정과 겪은 경로는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일본 관리들과 접촉한다든지 하는 면에서 부사와 종사관의 일기보다는 접촉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는 그 작품을 번역하는 도중에도 부사와 종사관의 작품 중에 특기할 만한 일이 있으면 같은 날짜 뒤에 부사의 작품은(부)로 쓰고, 종사관의 작품은 (종사관 황만랑 <해사록>)으로 표시하여 추가해 기록하기로 하였다.
|
1636년 8월
11일, 새벽에 대궐에 나아가서 종사관 황호과 함께 임시로 만든 막사에 들어갔다. 당시 상사(上使,정사) 임광은 통화문(通化門) 안에 있는 부장청(部將廳)에 있었다. 장령 김휼.참판 박로.동시의금부사 김대덕.수찬 오달제.참판 민남형.참지 이상급.필선 유수회.수찬 이도.사서 남노성 등이 찾아왔고, 영의정 승평부원군 김유.영돈녕부사 해창부원군 윤방은 사람을 시켜 축하해 주었다.
날이 밝자 임금님에게 숙배(肅拜)를 하니, 임금님께서 사옹원에 명령을 내려 술을 내어다가 대접해 주도록 하고, 또 우리들에게 각자 호랑이 가죽 한 장과 기름먹인 자리 2 개와 활과 화살 1조 그리고 후추 5 되.부채 1 자루.납약(臘藥,섣달에 조제한 상비약) 9 가지를 내려 주었다.
임금님에게서 물러 나자 상사는 다시 부장청으로 가고 군관은 절월(節鉞,의장기)를 받아 쥐었으며 서리(書吏)는 마패(馬牌)를 받아 남관왕묘(南關王廟)로 나왔다. 거기에는 내승(內乘) 신종술이 먼저 와 기다렸고, 참판 박황.전전주부윤 오단.문학 황일호 등은 우리 일행을 따라왔다. 조금 있으니 상사도 도착하였고, 정랑 조석윤.수찬 이조.안변부사 이기조.경기감사 윤이지.도승지 김경징.능성부원군 구굉.동양위 신익성 등이 모였다. 경기감사가 잔치를 베풀었는데 동양위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사람들이 만리 먼 타국 땅에 가는데 어찌 평범하게 대접하여 배웅할 수가 있겠는가?”
오후에 한강으로 나가서 배 12 척을 띄웠다. 수찬 이조가 따라 왔고, 도사 김인룡은 배에 올라와서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는 유정(柳亭) 정자에 올라갔는데 당숙인 생원 허부와 하륜 및 과천현감 이건.정자 주인인 첨정 유박이 찾아와서 전송해 주었다. 저녁에 수찬 이조는 돌아갔고 나는 당숙과 함께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으로 갔다. 하인들이 강마을에 있는 서당에 막사를 지었다. 옛글에 선생이 아니면 서당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는 손님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까 두려워해서다. 양릉군 허적.생원 이희립.좌랑 최문식.생원 이종길이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밤에 상사는 과천에서 돌아왔다. 참의 나만갑도 왔으며 승지 신계영과 전청산현감 이원준이 찾아왔다.
이보다 앞서 왕세자(王世子)께서 능을 배알하는 행차로 인부와 말들을 많이 동원한 데다가 또 중국의 감군(監軍)이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경기감사가 인부와 말들이 부족하여 차출하기 힘들다는 상항을 아뢰니 정원(政院,비서실)에서 우리 통신사 일행을 배로 부산까지 이동시키면 어떻겠느냐고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배로 보내는 것은 통신사들에게 미안할 뿐 아니라 각관청의 폐해가 더 크다고 하였다.
이 때 종사관은 부모님을 뵈러간다고 임금에게 글을 올린 뒤에 청주로 내려갔다. 광주(廣州)목사 허휘가 지응차사원(支應差使員,접대책임자)이 되고 경안찰방(慶安察訪) 한정이 부마차사원(夫馬差使員,인부와 말의 수급책임자)이 되어 우리 일행을 대기하고 있었다. 이날 동풍이 세게 불었다.
12일, 해가 돋자 곧 배를 탔다. 경안찰방이 사방으로 배저을 인부를 구하려고 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오후에 양주의 군인이 도착하여 겨우 출발하였다. 양릉군이며 좌랑인 최환과 생원 허괴.인동현감 허청.과천현감 이건.생원 이종길.감역 조송년.이 한배로 신천(新川)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조감역은 우리를 따라 광진(廣津)까지 따라왔는데 그때 상사는 먼저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미호촌(迷湖村) 숙소까지 오니 밤이 2경(8시경)이 되었다. 이날도 동풍이 세게 불었다.
13일, 날이 밝자 배를 출발 시켰는데 조감역이 돌아가고 광주 목사는 뒤에 처졌다. 마탄(馬灘)을 타고 두미(斗迷)를 지나 보안(保安)에 이르니, 수찬 정양윤이 광주에서 왔다. 사천(沙川)에 도착하니, 안성군수 이경인과 음죽현감 이시재가 응접 책임자가 되어 물가에 막사를 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정촌(水精村)에 도착하여 참판 여이징의 집을 찾아 조문을 했다. 대탄(大灘)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다. 배를 매어놓고 저녁을 지어 먹었다. 마을에 들어가 숙소를 정하려고 했으나 마침 유행병이 돈다고 하여 밤에 배를 몰아 대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정덕여의 별장에 들렀다. 그러나 그집은 낡고 허물어져서 풀만 우거졌다. 세상이 무상함을 새삼 느꼈다. 그집 벽에다가 절구로 시 2 편을 써서 걸었다. 듣자니 상사의 배는 이미 앙덕촌(仰德村)에 도착하였다고 했다. 밤은 이미 4경(새벽2시경)이었다. 이날도 동풍이 그치지 않았다.
14일,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 남시면(南始面)에 이르니, 감찰 박문엽과 생원인 조사주.조흥주가 찾아왔다. 양근군수 한회일도 왔다. 우리는 가던 배를 멈추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중우의 집에 들러 조문을 하고 앙덕탄을 거슬러 올라 자진(紫津)에 이르니, 죽산 하리(下吏,아전)가 강가에 막사를 지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파사성(婆娑城)에 도착하니, 찰방으로 있는 숙부(叔父)께서 이천에서 오셔서 이포(梨浦)에 와 계신다는 것이다. 사람을 시켜 가 보라고 했더니, 돌아와 보고하기를 숙부께서는 거기서 이틀을 기다리다가 오늘 저녁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양화포(楊花浦)에 가서 기다리시겠다고 했다. 듣자니 상사는 청심루(淸心樓)에서 숙박한다는 것이다.
15일, 우리 일행에게 앞으로 지켜야 할 행동 지침을 시달하였다.
이포를 지나 양화포에 이르니 숙부께서 오시지 않으셨다. 배를 머무르게 하고 한참 기다리다가 군졸 하나를 보내어 청심루에서 만나자는 소식을 전하게 하였다. 죽산부사 구인기가 영릉(英陵)에서 조그마한 배를 타고 와서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여주에 이르러 청심루에 올라갔다. 목사 한필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생원 임석지와 함께 한참동안 있자니 숙부께서 나의 동생 2 명과 권익을 데리고 양화에서 오셨다. 나는 그들과 함께 배를 타고 벽사(甓寺)까지 왔다. 거기서 그들과 헤어지고 강천(江川)에 이르니 날이 저물었다.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 흥원(興原)에 이르니 밤이 이미 깊었다. 우리 행차가 뒤떨어진 이유는 배를 젓는 사공들이 앞서 간 상사의 배를 끌고 가는데 많이 갔고 우리 배에 탄 사공들은 절반 이상이 노약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듣자니 상사의 군관들은 온종일 동안 음식을 얻어먹지 못하여 불평이 많았다고 하는데 목사는 오히려 그들에게 성을 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목사 이중길이 상사를 기다린 지가 이미 이틀이 되었기 때문이란다. 나는 몸의 왼편이 좋지 않아 의원 백사립을 시켜 소뿔을 가지고 뜨게 하였다.
일행에게 내린 지침은 다음과 같다.
1,일행중에 만일 개인적으로 돈이나 물건을 가지고 가는 자는 모두 법률에 정한 바에 따라 금할 것.
1,우리 일행은 만리 먼길에 고락을 같이 할 것인데 만일 화목하지 않는다면 일에 협조가 잘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로 탈이 생길 수 있다.
1,우리 사이에 아래위의 등급이 분명하지 않으면 예절을 지킬 수가 없다. 우리 일행의 많은 인원은 각자 차례를 지켜 질서를 혼란시키지 말 것.
1,여행 중에는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일을 절대로 금할 것이며, 각 관청에 이르렀을 때에 하인들이 요란스레 떠드는 일은 일체 금할 것. 만일 이 지시를 따르지 않는 자는 벌로써 다스리겠음.
1,여행 중에 공연히 말썽을 일으킨다든지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낸다든지 또는 아래위를 오가며 이간질한다든지, 또는 같은 부류들끼리 뭉치어 이간질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믿지도 말고 듣지도 말 것이며, 만일 이일에 적발되면 벌로써 다스리겠음.
1,통역관들도 우리 일행 중의 한 구성원이니 이 지시에 차별을 두지 않겠으며, 군관(軍官,군인통솔자)들은 우리 3 사신(정사 부사 종사관) 거느린 인원이 각기 다르지마는 우리 3 사신의 뜻을 알아서 한 마음으로 존경하고 화목하게 할 것을 각별히 조심할 것.
1,역졸들이 끼치는 폐해는 고금을 통하여 우환으로 여긴다. 이번에는 이러한 폐해를 절대 금한다.
1,역졸들의 식사는 간혹 서민들의 집에서 제공하기도 하는데, 제공한 음식을 물리친다든지 또는 서민들을 구타하는 일은 절대로 금지한다.
1,모든 종들은 서민들을 상대로 큰소리를 친다거나 명령을 할 수가 없다. 만일 시킬 일이 있으면 해당 군관에게 부탁하여 군관들로 하여금 시키도록 하라. 절대로 각 고을 사람들의 일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
1,비장(裨將)이나 통역관이 거느린 종들도 역시 각각 그 주인되는 사람들이 단속하도록 하고, 만일 이 지시 사항을 몰라서 일행의 화목한 질서를 어기면 낱낱이 찾아 벌로 다스릴 것이며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음.
1,지위가 높든 낮든 우리 인원은 절대로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여 술로써 실수가 없도록 할 것.
1,인부나 말을 통솔하는 데 있어서 그것을 담당한 군관이 특별히 주의할 일은 좋은 말을 서로 가져가기 위하여 나쁜 말을 물리치는 일이다. 종들에게 말을 태우는 것도 과분한 일인데 게다가 좋은 말을 골라 타게 한다는 것은 더욱 부당한 일이다. 이런 일은 일체 금지하라.
1,인부나 말은 정해진 수량외에 만일 한사람의 인부나 한 마리의 말이라도 정수 외에 더 정하게 되면 병방군관은 중벌로 다스리겠다.
1,비장 이하는 각각 조심하여 우리가 경유하는 각 관청에 만일 횡포를 자행하는 일이 있으면 용서할 수가 없음을 알라.
1, 군관이나 통역관의 만일 서민을 종으로 삼아 데리고 온 자가 있으면 적발되는 대로 벌을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수하면 벌은 내리지 않겠다.
이리하여 이날 일행중에 군관들의 종을 수색한 결과 종이 아닌 듯한 자가 있어서 그를 추궁해 보라고 하였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아서 그냥 쫓아버렸다. 이 사람은 권경의 종이었다. 권경도 내어 보내려고 하였더니, 일행들 중에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냥 두었다.
16일, 상사는 충원(忠原)을 향해 출발하였다. 나는 일찍이 임금님께 글을 올려 지나는 길에 부모님을 찾아 뵙겠다고 하였더니 허락이 내렸다. 그리하여 나는 원주로 떠나는데 군관 4명과 통역관 1 명 그리고 의원(醫員) 1 명만 데리고 갔다. 나머지 일행은 상사를 따라 충원으로 먼저 가게 하였다. 여주목사가 안창(安昌)의 물가에까지 따라와 점심을 대접했다.
판관 김영구와 생원 김만일이 찾아왔다. 지나는 길에 배를 멈추고 정(正,벼슬 이름) 원진하를 칮아 조문하였다. 날이 저물어 화천(花川)에 이르니 부모님을 비롯하여 온 집안이 모두 평안하였다. 형수께서는 서곡(瑞谷)에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찾아오셨다. 사당에 들러 절을 한 뒤에 자리에 앉았는데 별좌인 최기벽과 진사 변윤중과 생원 이한 그리고 생원 이덕익과 및 이시온이 찾아왔다. 밤에 중 혜기(惠琦)가 치악산에서 찾아왔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 건너갔다가 송운(松雲)을 따라 돌아온 사람으로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진부역(珍富驛)에 근무하는 아전 심애남이 찾아왔다.
17일, 원주에 머물렀다. 생원 홍여박.생원 권이급.부장 이동녕.이산립.원 안선.생원 이시화.이일화.생원 최문오.생원 변집중.진사 이극성.내금(內禁,내금위장) 이대형.감관 이대순 부자와 부장 최응기.감역 정기방.지평현감 허후.이산현감 황유중.생원 조순.통진부사 이경오.내금 이포.생원 박승한 그리고 고향에 계신 노인들이 모두 모였다. 오후에 목사가 와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생원 조순과 이덕익은 나와 함께 같이 잤다.
18일, 한낮에 사당과 부모님에게 작별을 고하고 출발하였다. 지나는 길에 허 태안(태안군수)댁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대현(大峴)을 넘어 구래촌(求來村)에 이르니 여기가 청산 이원준의 별장이었다. 윤대복 부자와 황정일이 모두 왔다. 횡성현감 김익렬이 응접관으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19일, 고개를 넘어 목계(木溪)에 사는 지평 조공숙의 집에 이르니 제천현감 한필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찰방 심작과 진사 심담률이 모두 와 있었다. 그리고 첨지 유대화와 생원 이심은 가흥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한낮에 판서 김시양을 강가 마을에서 찾아보니 눈병이 더욱 심하다고 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 무렵에 작별을 고하고 북창(北倉)에 이르니 충원에 도착하였던 우리 일행들이 모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충원에 이르니 문의현감 이선득과 단양군수 서경수.음성현감 홍시립.괴산현감 이응협이 모두 나와 맞이해 주었다. 듣자니 현감 서정현의 아내가 그의 고향에서 죽은 지 얼마 인된다고 하였다. 덕진이 청안에서 회라는 계집종과 그 자식을 잡아다가 내앞에 꿀렸다. 이 종은 수십년전에 도망간 자였다.
20일, 충원에서 머물렀다. 심 찰방 형제가 찾아왔다. 청하현감 심동구는 임기가 끝나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인데 안보[수안보]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소문을 듣고 새벽에 출발하여 왔다고 했다. 우리는 동헌(東軒)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에 여러 수령들을 만나보았다. 연원찰방 우필모는 종사관의 서신을 가져 왔다.
21일, 닭이 울자 길을 떠나 안보로 향했다. 문의현감이 도차사원(都差使員)이 되어 연풍현감 이구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를 한 뒤에 고개[조령]를 넘어갔다. 유곡에서 마중 나온 인부와 말들이 용추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 마루까지 온 자도 많았다. 용추에는 함창현감 권적이 와서 기다렸다. 연원 역말꾼들이 싸움을 일으키자 함창현감이 그들을 잡아 묶었다. 그러자 상사가 이는 법에 어긋난다고 하며 안동으로 데리다가 가두라고 하였다. 연원찰방이 돌아가자 김천찰방 김식이 인부와 말을 차출하는 도차사원으로 되어 왔고 선산부사 맹세형이 응접관으로 되어 왔다. 중 영일이 가은에서 와서 나는 그와 함께 잤는데 그는 혜기의 사형(師兄)이었다. 일찍이 송운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온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보고들은 일들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감사 최현이 선산에서 편지와 함께 작별시를 보내왔다.
22일, 구탄(狗灘,犬灘,개여울)에서 점심을 먹었다. 성산현감 이시만이 와서 기다렸다. 우리 일행이 가는 길에 접대가 매우 융숭하였다. 이는 모두 사신을 접대하던 전례에 따른 것이었다. 우리가 목계(木溪)에 도착하였을 때에 제천현감이, 크기가 한 자씩이나 되는 유밀과(油蜜果)를 만들어와서 접대를 하였다. 그러자 곧 명령을 내려 그것을 도로 가져가게 하고 또 앞으로 도착할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지시하기를, 지금 서쪽지방이 시끄러워 임금님께서도 반찬의 수를 적게 줄이는 판인데 사신으로 가는 신하된 자가 태평한 시대와 같이 풍성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는가? 앞으로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임금님에게 아뢰어 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그러므로 지난 정사년1617.광해9.)이나 갑자년(1624.인조2,)의 행차에 비하여 10분에 7이나 8쯤만 장만하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나 도처에 우리를 접대하는 하인들의 수가 수백인은 되었다. 그러다가 이곳에 내려오니 그 수는 더욱 많았고 성산현감은 이곳에 와서 기다린 지가 6일이나 되었다고 한다.
교수 채득기는 침술에 능하다고 하기에, 함창에서 찾아온 것을 나는 그에게 우리를 따라 함께 가자고 권유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지나는 길에 군위현감 이찬의 집을 찾아 보았다. 저녁에 용궁에 도착하니 관사가 부족하여 아전의 집에 잠자리를 정했다. 비안현감 성숙이 와서 기다렸다. 삼가현감 황정간은 산양에서 왔고 정자 이시암은 내성(奈城)에서 왔다. 그리고 밤중에 돌아갔다. 종사관의 편지를 받았다.
23일, 군위현감이 찾아왔다. 오후에 예천에 도착하니 군수 이명익과 영천군수 이후기가 마중해주었다. 생원 나이준은 현풍에서 왔고, 참봉 정시형과 고령현감 김호 형제와 생원 김시진 형제가 찾아왔다. 순찰사 심연은 군관을 보내어 안부를 물어주었다. 나 생원과 이 정자와 한 자리에서 잤다.
24일, 비가 왔다. 예천에서 출발하여 풍산에 이르는 동안에 비는 오다가 개다가 했다. 진보현감 최극량이 응접관이 되어 와서 기다렸다. 마을의 백성들 집에 잠자리를 정했다. 정원과 숲이 크고 울창하였는데 그 집주인은 선비인 이광원이라고 했다. 김시설 김시윤 예안현감 남연.생원 이흘이 찾아왔고, 노인 두어 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나의 장인의 친족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이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오후에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였다. 길을 가는 도중에 듣자니 예천과 영천에 사는 선비 40여 명이 우리를 만나려고 기다리다가 돌아갔다고 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저물녘에 안동에 도착하였다. 안동부사 신준과 영해부사 지덕해와 풍기군수 김상빈이 인사차 찾아왔다. 밤에는 이 정자와 나생원과 함께 잤다.
25일, 흐림. 안동에서 머물렀다. 순찰사 심연이 상주에서 와서 내일 만나자고 군관을 시켜 전달해 왔다. 나는 병이 발작하였다. 청송부사 최산해가 왔다.
26일, 안동에서 머물렀다. 영해 사람 주천익과 찰방 김시추 및 선비 두어 명이 찾아왔다. 식사가 끝난 뒤에 김 영흥(전임여흥부사)의 숙모님을 성 동쪽에 가서 찾아뵈었다. 동헌으로 돌아오니 부사가 영해부사와 풍기군수와 함께 잔치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렸다. 잔치는 저녁에 끝나고 우리는 망호루(望湖樓)에 올라갔다. 순찰사는 조정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오지 못했다. 그것은 잣과 같은 토산품을 나라에 바치는 일을 다시 시작하여도 된다는 청에 대하여 사간원에서 준렬히 논박한 것이다.
27일,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 상사는 먼저 출발하고 나는 안동부사와 기타 여러지방의 수령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풍기군수가 이렇게 제의했다.
“어제 순찰사께서 오지 않은 관계로 잔치를 열 수 없었는데 그 비용을 노자에 보태도록 은자로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공께서는 저 중국 당나라때 하던 고사를 본받으려는 것이오?”
안동부사의 얼굴빛이 변하고 풍기군수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물러갔다.
안개가 걷히자 우리는 출발하였다. 이 정자와 나 생원은 돌아가고 우리는 일직현에 도착하였다. 예안현감 박경원이 와서 기다렸다. 생원 이잘이 찾아왔는데 그는 장인의 친족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과 조카들을 인사시키고, 술잔을 나눈 뒤에 붉은 돌로 만든 벼루 하나를 나에게 주었다. 저녁에 의성에 도착하니, 현령 이후배와 영덕현령 이문주가 마중해 주었다. 밤이 깊도록 직강 신열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28일, 장령 신달도의 두 아들이 찾아왔다. 상사와 함께 신 직강을 방문하고 청로참(靑路站)에 도착하니 인동부사 신경함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헌(旅軒,張顯光) 선생이 그 외손자 박황을 보내어 우리의 노고를 위로해 주었다. 그 선생의 제자들이 편지를 많이 보내왔다. 모두 답장을 써서 보냈다. 윤애신은 억이라는 종을 데리고 인동으로 갔다. 저녁에 의흥에 도착하니 현감 홍재형과 군위현감 신기한이 맞이해 주었다.
사복시에서 말먹이는 직책을 가진 김세춘 일행이 비변사의 공문서와 함께 총마(驄馬,푸른빛과 흰빛이 섞인 준마) 1 마리와 화마(華馬,대추빛의 준마) 1 마리를 몰고 서울에서 왔다. 이보다 앞서 대마도주는 우리 조정에 화마를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묘당(廟堂,議政府정승)에서는 모두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평성춘(平成春)이 통신사를 맞이하러 왔다는 핑계로 들어와서 그 말들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자 동래부사가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어 비로소 허락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통역관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저 총마는 흰색에 가까워 일본 사람들이 대단히 싫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29일, 말을 몰고 온 자들이 돌아가는 편에 나는 집으로 보내는 서신을 써 보냈다. 아침 식사후 출발하여 낮에 신녕에 도착하니 현감은 차사원으로서 서울에 올라갔고 군위현감이 그 직책을 겸하여 우리를 대접해 주었다. 고령현감 이기선도 역시 차사원의 임무를 받은 채 서울로 가고 그 고을 아전을 보내어 우리를 접대하게 하였다. 서헌(西軒)에 물과 대나무가 아름다워서 벽 위에 시를 써서 붙인 것이 매우 많았다. 나무판자를 개울 위에 걸쳐놓고 그 다리 이름을 선승교(選勝橋)라고 하였다. 그리고 크다란 대나무 수백 그루가 그 언덕을 덮었는데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나는 상사와 함께 바위 언덕에 올라갔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30일, 일찍이 출발하여 영평에 도착하니 군수 한덕급.합천현감 김효건.송라찰방 이중광.사근찰방 정사무.성현찰방 김감 등이 마중하여 주었다. 외종제 허무가 매원(梅院)에서 와서 6일 동안을 머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현풍 선비들인 박민수.박형동.조함세.곽의창.곽혜 등이 왔다. 생원 이장도는 성산에서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상사와 함께 조양각(朝陽閣)에 올라갔다. 마상재(馬上才,말타는 재주꾼) 2 명을 데리고 성밖으로 나가서 냇물 가에서 재주를 부리도록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말위에서 눕기도 하고 말을 거꾸로 타기도 하며 또는 한쪽 말 등에 찰싹 붙어서 달리기도 하여 그 민첩한 행동은 말로써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온통 담처럼 둘러썼다.
종사관의 행차는 하양(河陽)에 이르렀는데 종기로 고통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자 통역관 최해길이 침 놓는 법을 터득하였다고 하여 그를 빨리 종사관이 있는 곳으로 달려 보냈다. 밤에는 여러 손들과 함께 잤다.
1936년 9월
1일, 비가 왔다. 영천 사는 선비 박돈 등 수십 명이 찾아왔다. 그리고 조 지산(曺芝山)의 비문을 써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으나 그들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릴 수 없어서 내가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뒤에 써보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포원선생집>을 선물로 주었다. 현풍 고을 손님은 돌아가고 외종제는 비를 무릅쓰고 우리 일행을 따라왔다. 아화역(阿火譯)에서 점심을 먹었다. 청도군수 이갱생이 인사차 찾아왔고 청하현감 송희진은 아직 부임 전이라 그 고을 사람들만이 와서 접대를 했다. 오후에 비가 많이 내렸다. 이날 50 리를 가서 저녁에 경주에 도착하였다. 경주부윤 민기와 흥해군수 홍호가 비 때문에 예절을 치르지 못했다. 나는 병이 발작했다. 듣자니 종사관의 행차는 영천에서 잔다고 했다.
2일, 흐림. 최의길이 아침에 영천에서 왔다. 종사관이 종기로 고통을 겪다가 쑥 뜸질을 하고는 조금 낳았으나 이것 때문에 지체하게 되니 행차를 조금 늦추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날 경주에 머물렀다. 경주부윤이 조촐한 찬치를 베풀었다. 저녁에 상사가 관청 안에서 부윤에게 인사로 배례를 했다. 종사관은 날이 저물어서야 도착하여 서로들 한자리에서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각기 숙소로 돌아갔다.
종사관은, 의원들이 약품을 보내지 않은 것은 통역관들이 품목을 정하여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백사립과 한언협 및 한상국을 뜰로 끌어들여 곤장을 치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었다가 중지시켰다.
3일, 흐림. 경주를 출발하여 봉황대에 올랐다. 봉황대는 홍살문[紅門] 밖에 있었다.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었는데 이는 모두 흙을 쌓아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쌓은 축대가 성 남쪽에 거의 수십 개가 있다고 하니 아마 옛날 도읍 터는 이 봉황대의 남쪽에 있었는가보다. 반월성이 남쪽이 있고 김유신 묘가 서쪽에 있으며 포석정과 첨성대 및 금장대(金藏臺)가 모두 아스라이 바라보인다. 신라가 나라를 세운지 천년만에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한 시대의 문헌에 그 빛나는 문화가 볼 만하였다. 그러나 불교를 너무 극성스레 믿어서 절들이 서민들의 주거지에까지 퍼져있게 하였으니 애석한 일이 아닌가? 신라 미추왕이 계림에 금궤짝이 내려왔다는 설화는 아무리 역사나 전설에 내려오긴 하지만 증거할 만한 데가 없다. 오늘에 와서 다만 우리 나라에 김씨 성 가진 이가 태반이 신라의 후예라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경순왕 김부(金傅)가 비록 항복하기는 하여 고려왕은 이들을 합병하였으나 그 외손인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는 바로 권행(權幸,안동권씨의 시조)의 후예로 능히 중국을 점령하여 이미 백년 동안을 통치하게 되니 신비스러운 조상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최 고운 선생이 상서했다는 별장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 있다가 출발하여 낮에 구어역(仇於譯)에 도착하니 현풍현감 유여해와 장기현감 양응함이 와서 기다렸다. 현풍의 아전 수십 명과 관비(관청의 계집종)인 설매 등 수십 명이 와서 술과 안주로 접대해 주었다. 이보다 앞서 상사는, 현풍현감이 일본에 데리고 갈 어린아이를 보내주지 않는다고 이는 우리의 행차를 소홀히 한 것이라고 하며 그 고을의 삼공형(三公兄)인 이방과 호장과 수형리를 잡아들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현풍의 아전들이 옛날의 선임 사또가 온다는 것을 모두 기뻐하는 터인데 이들에게 형벌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실망을 시키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현풍현감은 나의 후임입니다. 옛사람들도 후임자를 중히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욕을 보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상사는 웃으면서 내 말을 따랐다. 울산부사 오섬도 역시 와서 기다렸다. 좌병사 허완은 사람을 시켜 문안을 했다. 그는 바로 나의 외당숙이었다. 울산 병영까지 약 5 리쯤 남았을 때에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었다. 우리가 병영에 들어가자 종사관도 뒤따라 이르렀다. 우리는 도로 나와서 곧장 울산부로 향하는데 듣자니 상사는 내일 바로 동래로 가려고 한다는 소식이 왔다.
4일, 아침에 울산으로 향했다. 좌병사(左兵使)가 앞장을 섰다. 한상국이 돌아와 말했다.
“상사는 용당촌에서 숙박하려고 합니다.”
성문을 나와 멀리 증산(甑山)을 바라보니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었다. 이 산이 포구에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위에 성루(城壘)가 아직 있었다. 이 성루는 큰 돌로 쌓았는데 가로세로 굽고 반복된 것이 우리 나라의 성 모양이 아니다. 이곳는 임진난 때에 중국 장수 경리 양호(楊鎬)가 일본 장수 청정을 공격한 곳이다. 당시 중국 마도독(麻都督,이름은 귀)은 말탄 군사로 앞서 공격하고 절강성의 보군(步軍)은 이곳에 먼저 올라가 마치 벼락을 치듯 폭풍이 불어닥치듯 공격하니 일본 군대가 감히 지탱하지 못하고 이곳에 연결된 일본 진영은 무참히 짓밟히었다. 그리하여 중국군이 잇따라 그 밖에 있는 진지를 공격하니 청정을 사로잡는 일이 눈앞에 가까이 닥쳤다. 청정이 급하여 금과 비단 같은 값진 물건들을 성밖으로 내어 던지니 공격하던 군대는 그것을 줍느라고 공격의 고삐가 느슨해졌다. 양 경리가 거만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우리 군대가 굶주렸으니, 내일 다시 공격하여 몰살을 시키겠다.”
그리고 징을 울려 군대를 물러나게 했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밤새도록 수비를 강화하였는데 다음날 새벽에 중국군이 공격하자 포탄이 비오듯 쏟아져서 절강성의 군대가 2천여 명이나 죽었다. 양 경리가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또 때마침 큰 눈이 내려서 병사들이 모두 추위에 얼었다. 이리하여 성안의 적군은 함락되는 것을 모면하였고 바다 위에 있던 우리 해군들은 이 싸움을 도우러 모여들었으나 양 경리는 논박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애석하지만 우리 나라가 저 일본 군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양 경리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징을 울려 공격을 멈추게 하므로 거의 잡혀질 운명에 있던 적장에게 다시 독기를 발산하게 하였으니 이 역시 계획이 부족한 소치이다. 그리고 하늘이 눈을 내려 적군의 곤경을 모면하게 한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울산부에 들어가니 연일현감 전이직이 와서 기다렸다. 좌병사가 조그마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15일 부산에 다시 와서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하고 떠났다. 우리는 60 리를 가서 용당촌에서 숙박하였는데 그곳은 박 우후(우후는 직위)와 김 도사(도사는 직위)가 거처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밀양부사 이필원과 언양현갑 장원이 와서 대접해 주었다. 5일, 늦게 출발하여 저녁에 동래에 도착하니, 이곳은 바로 충신 송상현(宋象賢)이 임진란 때 죽음으로서 절개를 지킨 곳이다. 그리하여 여기에 그를 기리는 사당인 ‘충렬사’가 있었다. 동래부사 정양필과 기장현감 김주우가 맞이해 주었다. 종사관은, 언양현감이 부사인 나에게 인사로서 절을 할 때에 예절에 어긋남이 많다고 하여 벌로써 다스려야 한다고 하며 아전을 시켜 언양현감을 잡아 들이게 하였다.
6일, 식사가 끝나자 출발하였다. 상사와 부사 및 종사관은 각기 자신들이 거느린 군관들을 시켜 앞장을 서게 하고, 3 사신은 차례대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기타 부서의 임원들도 순차적으로 따라왔다. 이는 옛날의 행차에서 행한 전례에 따른 것이었다. 깃대와 칼과 창들이 열을 지어 가지고 부산에서 10 리 가량이나 마중을 나왔다. 부산에는 배를 대는 포구가 있는데 높이 솟은 봉우리들이 우뚝우뚝 서있다. 이 성들은 모두 일본 병사들이 쌓았던 것이다. 김해부사 황이중과 초계군수 이석현과 창원부사 백선민과 함안군수 이원례와 의령현감 김경조와 사천현감 최산흠과 부산첨사 임충간과 칠포만호 등이 갑옷 투구에 군복을 갖추어 입고 5 리 밖까지 마중 나왔다. 성에 들어가서 객사에서 예를 행한 뒤에 각자 숙소로 돌아왔다. 동래부사와 울산부사가 이어 도착하였고 좌수사 신경유와 우후(虞侯) 신대식이 찾아왔다. 윤현립의 종 막송이 거제에서 왔다. 현풍의 선비인 곽홍해와 곽홍연이 찾아왔는데 그들은 이곳에 온 지가 2일쯤 되었다고 했다. 통역관 홍희남.최의길.강위빈.강우성이 일본의 접반사인 평성춘(平成春)을 그의 숙소로 찾아가 보았다.
7일, 부산에 머물렀다. 차사원인 평산만호가 통영에서 자기의 배를 타고 찾아왔다.
8일, 부산에 머물렀다. 울산부사 오섬이 왜관에 가서 평성춘을 만났다. 평성춘은 곧 오천식부(烏川式部)라고 이르는데 대마도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봉행관(奉行官,조선사신을 마주온관원)으로 지난 8월에 입국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오섬에게 그를 접대하는 접위관(接慰官)으로 임명하여 그를 상대하게 했는데 지금에 와서 그의 관사에 나아가 차를 대접하게 된 것이다. 평성춘이 말했다.
“국서(國書,국왕의 서신)의 등본과 예물의 목록이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으니 매우 민망스럽소.”
“우리 조정에서 반드시 알아서 잘 처리하였을 것이오. 귀관께서 너무 염려 안해 될 것이오.”
등지승(藤智繩)이 말했다.
“이번 사신의 행차는 그 소임이 막중합니다. 국서에 쓰인 문장 중에 혹시라도 잘못된 문구가 나오면 큰 화를 입을 것이오. 식부(式部)께서는 전적으로 그일 때문에 나오신 것이오. 그리고 초를 잡은 원고를 보여주는 것은 전례에 있었던 터이오. 지난 정사년(광해 9년)과 갑자년(인조2년)에 귤지정(橘智正)이 통신사를 맞이하러 나왔을 때에 본관도 따라나왔었소. 당시에도 정본은 볼 수가 없지마는 초본 원고는 보여 주었었소. 또한 우리 나라에서 보내는 국서도 선위사(宣慰使,접대 사신)가 예에 따라 먼저 읽어보고 임금에게 올렸소. 그런데 지금에 와서 하필이면 굳이 숨긴다는 말이오.”
이리하여 통역관이 등본을 내어 그들에게 보였다. 평성춘이 통역관 홍희남을 시켜서 그 서신을 읽게 하고 또 해석하게 했다. 그리고 등지승과 한참 동안 상의를 하더니 울산부사에게 말했다.
“서계(書契,국서)에 쓰인 문장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현군(賢君)이라고 쓴 것은 대단히 좋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어리석다는 뜻으로 성(聖)자를 쓰고 간사하다는 뜻으로 현(賢)자를 씁니다. 지금 우리 대군(大君)을 현군으로 표현한 것은 우리 대군을 크게 욕하는 것과 같아 큰일이 날 것입니다. 그러니 ‘현군’ 2자를 삭제하고 ‘선대의 지위를 이어받아(丕承先緖)…’ 등의 말로 메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페방(弊邦)이라는 말에서부터 경사와 기쁨을 이길 수 없다’ 는 뜻의 16 글자는, 물론 첫째 겸손하기 위해 쓴 것이고, 둘째 경사스러운 일을 함께 누리자는 뜻으로서 우리들은 그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우리 대군의 가까운 주위에는 조흥(調興)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는 자가 많소. 그런데 만일 이 국서에 대하여 우리 나라에서 회답을 할 때에 조선에서 기히 폐방이라는 겸사(謙辭)로써 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조선을 폐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한다면, 그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적당하지 못한 문자는 지워버리고 간략하게 써서 조흥(調興) 같은 무리가 낱말 하나하나를 골라서 흠을 잡지 못하게 해 주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편에서 준마(駿馬)를 보내 달라고 한 것에 대하여 임금님의 윤허를 얻은 것만도 대단히 잘된 일이었소. 그러니 감히 다시 아뢸 수는 없지만 화마(華馬) 몸뚱이가 ,너무 작고, 총마는 흰 색에 가깝습니다.”
지난 전쟁 때에 가강(家康,덕천가강)이 백마를 타고 싸우다가 패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흰 색을 좋지 않은 색이라고 하여 계급이 낮은 장교들도 흰말은 타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른 말로 바꾸어 주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비단은 귀국에서 나는 토산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통신사가 우리 나라에 왔을 때에 조흥(調興)과 대마도주가 중간에서 여러 가지 빛깔을 많이 준비하여 조선에서 예물로 보낸 것이라고 하며 위에 올렸던 사실을, 당시 수행하였던 통역관들은 직접 보았고, 당시 사신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조흥이라는 자는 늙었지만 간교하여 자신이 정당하지 못한 일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대마도주에게 덮어씌울 뿐만 아니라 온갖 방법으로 도주를 모함합니다. 그러니 우리 대마도주는 마치 숯불 위에 올라앉은 어린아이 같은 신세입니다. 그러나 대군의 현명하신 변명으로 어려운 지경에서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곤경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와같이 조선에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애써 간청한 것은, 첫째 우리 두 나라 사이의 우호를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우리 대마도주의 억울함을 씻기 위한 것입니다. 대마도주가 모함을 벗어나기 위하여 예물을 준비하던 때에 그 비용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재물이 손실되고 힘이 모자라서 당시 통신사 일행 4백여 명을 대접할 재력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통신사가 지나는 지방관들이 접대하는 물자에 대한 폐단도 모두 대마도주의 허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청하는 것이 어찌 도주의 이익이 되겠습니까? 게다가 조흥의 모함이 판명되지 않으면 도주는 결국 그 자리를 보존할 방법이 없습니다. 조흥은 만금이나 되는 많은 돈으로 뇌물을 주어서 요직에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친분을 맺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비록 조흥이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고 하더라도 그 밑에 있던 잔당들이 골고루 포진해 있으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도 화근은 늘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도주는 밤낮 근심에 싸여 입맛까지 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지고 가는 예물이 전번만도 못하게 되면 조흥의 모함이 사실로 되고 도주는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니 그가 당할 곤욕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난날처럼 예물을 개인적으로 준비하고 물품 목록을 고치려고 하더라도 지금은 인서당(璘西堂) 소장장로(召長老)가 우리 대마도를 감시하고 있으니 그도 안 될 일입니다. 게다가 조흥의 무리들이 강호(江戶)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귀국에 예물울을 넉넉히 보내달라고 청하려고 하나 조정에서 허락해주려고 하지 않을 듯하여, 온갖 방법으로 생각하다가 일찍이 통역관 홍희남이 돌아가는 편에,우리가 보내주었으면 좋겠다는 품목을 써서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내려온 품목 목록을 보면, 우리가 요청한 물품 중에 응자(鷹子,매) 20 마리를 10 마리로, 호랑이 가죽 15 장을 10 장으로, 표범 가죽 20 장 중에 15 장, 어피(魚皮,물고기 가죽) 100 장 중에 50 장, 붓과 먹은 겨우 40 개씩을 적었습니다. 게다가 이 붓과 먹은 수량이 적어서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저 40이라는 사(四)자는 죽을사[死]와 음이 같아서 우리 나라에서는 매우 싫어하는 숫자입니다. 우리 대군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조선이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어서 예물을 이렇게 적게 보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싫어하는 숫자인 사(四)자를 일부러 써서 보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왕 보내는 총마는 안장을 갖추어 보내 주십시오. 말에 안장도 없이 보내는 것은 예의에도 어긋납니다. 집정관(執政官)에게 보내는 명주와 꽃자리 흰모시 유둔(油芚,기름먹인 자리)들은 우리 나라에도 많은 물건인데 이것도 그 수가 너무 초라하니 차라리 이 5 가지 품목은 빼어 버리시오. 그리고 집정관에게 보내는 물품 중에 호랑이 가죽 2 장만 남겨 두시오. 그리고 매 1 마리와 쪽제비 꼬리로 만든 황모필(黃毛筆) 30 자루와 먹 20 자루로 명주와 꽃자리들 대신 보내 주시오. 봉행(奉行)에게 보내려는 품목 중에 명주와 꽃자리와 흰모시 검은 삼베도 빼어 버리시오. 그리고 호랑이가죽 1 장만 남겨 두시고 또한 매 1 마리와 쪽제비털 붓 30 자루를 대신 보내주십시오. 또한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물품은 집정에게 보내는 물품보다 많아야 될 듯합니다마는 조선에서 보내는 모든 문서를 대군께서 다 보시기 때문에 공평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도주에게 보내는 물품 중에 호랑이가죽 3 장은 2 장으로, 명주 10 필은 5 필로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이번 통신사는 품계가 높은 재상으로 임명하여 보내었다는 사실을 동래부사에게 보낸 서신 중에 쓰여 있을 터인데 여기에 대하여서는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하여서도 다시 임금에게 글을 올리시오. 또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옥색 의관으로 대마도주를 만나보고 검은 색 의관으로 대군을 보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도 일행의 복장이 흰색에다가 갓을 썼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본래부터 흰색을 싫어하는데 수행하는 일행들이 지나는 광경을 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매우 해괴하게 생각하여 우리 대마도주에게 항의를 할 것이오. 그러니 수행원들에게 검은 색 복장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난날 우리 대마도주가 조선의 조정에 부탁하였던 사실들은 하나도 자기가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두 나라의 우호를 위하여 한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도 부탁한 사실대로 해주지 않았으니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비단이나 기타 물품은 부탁한 수량대로 채우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그것을 쓸 자리를 비워둔 채 보내어 대마도주가 개인적으로 준비하여 채우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조흥의 모함이 사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도주가 위험에 빠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리하여 오섬이 이 사실을 그대로 적어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9일, 부산에 머물렀다. 나는 병이 낫고 동래부사와 울산부사는 모두 돌아갔다.
10일, 비옴. 부산에 머물렀다. 종사관의 군관인 전감찰 최유남이 상사의 군관 박홍주에게 말을 함부로 하였다고 하여 상사가 종사관을 시켜 그에게 벌을 주게 하였다. 자여찰방 심총이 찾아왔다.
11일, 비. 거제현감 노성효와 고성현감 강유가 응접관으로 차임되어 왔다. 전라병사 이경진과 통제사 윤숙이 모두 군관을 보내어 안부를 물어왔다. 서묵동이 고성에서 찾아왔다.
12일, 흐림. 자여찰방과 창원부사 및 의령현감 김해부사가 돌아갔다. 내사(內司)의 하인이 화마(華馬) 2 마리를 끌고 서울에서 왔다. 이는 동래부사가 평성춘의 말을 듣고 보고한 사실 때문이었다. 비변사에서 임금에게 진술하기를 ‘일본의 사정이 많이 변하여 일본에서 실권을 잡은 자들은 모두 조흥의 심복들로서 이번 기회에 한번 실수를 하면 후회할 일이 많을 것이니 비단과 화마를 경상도에서 사들여 보내 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은 내사복(內司僕)을 시키어 화마를 사 보내게 하고 비단은 보내지 못하게 했다.
13일, 군관 백사철이 옥포에서 왔다. 훈련도감의 장교인 김광립과 별초청(別抄廳) 무사인 이준망과 옥포만호 백사철은 내가 듣기에 무예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제일가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 유생(儒生)들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뒷날 우리 나라에서 대장이 될 만한 재목을 골라 통신사를 딸려 일본에 갔다 오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 문제를 비변사에 내려보내었다. 그러자 비변사에서는 군관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런 사람을 잘 골라보라고 했다. 나는 앞에 든 3 사람을 추천하였는데 훈련도감과 별초청은 그 추천에서 빼려고 하였으나 임금께서는 특이한 재목이면 보내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대로 하기로 했다. 현풍의 어린아이 김면삼과 심극룡이 찾아왔다. 서묵동은 고성으로 돌아갔다.
14일, 현풍 선비 곽홍해 곽홍연이 돌아가고, 초계군수도 돌아갔다. 현풍 유생인 곽위국곽홍재 김대용 김시준 곽태원과 함안의 선비 박형룡이 찾아왔다. 윤애신이 곤양(昆陽)에서 왔다. 군관을 시켜 격군(格軍,노젓는 군졸)을 사열하게 하였더니 대신 나온 자 4 명을 색출하여 곤장 60 대씩을 치게 했다.
15일, 상사와 종사관은 망전례(望殿禮,망궐례)를 행했다. 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경주판관이 응접관으로 차출되어 왔다. 일본에서 귤성공(橘成供)에게 통신사를 맞이할 특사로 차임하여 서신을 가지고 보내어 왔다. 대마도주는 강호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16일, 흐림. 좌수사가 찾아왔다. 바다 귀신에게 지내는 해신제(海神祭)를 위하여 우리 일행을 모두 몸과 마음을 깨끗이하는 재계(齋戒)에 들어갔다. 밤에 홍희남 강희빈 강우성 등이 왜관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일본 사람인 등(藤)씨와 문답한 내용을 보고했다. 곽위국 곽태원 김대용 등과 함께 잤다.
17일, 덕진(德眞)이 서울로 올라갔다. 오후에 통역관이 서울에서 왔다. 그는 우리 집의 편지도 가져왔다. 아내가 7일 오후 2시경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장모와 조 감역(감역은 직위)의 편지도 왔다. 동래부사가 왜관에서 왔다. 통역관은 임금님에게 보내는 보고문[狀啓]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 보고문에는 등씨가 지적한, 물품을 적은 별폭의 서신 가운데 나라의 도장이 없으면 조흥의 무리들이 위조라고 의심할까 두렵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18일, 4경(四更,새벽 2시경)에 영가대(永嘉臺)로 가서 제사를 지냈다. 제사의식은 <오례의(五禮儀)>에 쓰인 해독제(海瀆祭)의 의식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 영가대는 부산성 밖 나루 위에 있었다. 권분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에 배를 대기 좋게 파서 정박하게 한 곳에 세운 것으로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었다. 우리는 애초에 배를 타는 날을 이날로 정하였기 때문에 이날 배를 타고 5 리쯤 가다가 돌아왔다. 배 위에는 큰 의장기와 대장기 각각 하나씩과 청도기(淸道旗) 순시기(巡視旗) 및 영기(令旗)와 그리고 언월도(偃月刀) 삼지창(三枝鎗) 각 한쌍씩을 꽂았다. 또 피리 불고 북을 치는 취타(吹打) 연주를 성대히 실시하였다. 그런데 상사와 부사의 배 및 짐을 실은 배 2척은 통령에서 만든 것이고, 조사관이 탄 배와 짐실은 배 하나는 좌수영에서 만든 것이다. 부산첨사는 전선(戰船)을 나열하여 뒤를 따랐고, 수사(水使)도 전선을 포구에 나열해 있었다. 동래부사가 조촐한 잔치자리를 마련하였다. 저녁에 생원 곽위국등 여러 사람을 그들의 숙소로 찾아가 보았다.
19일, 어제 배를 탈 때에 상사의 군관 장문준이 선방(船房)에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종사관이 그의 무례함을 질책하니 상사는 군관에게 곤장 30 대를 치게 하였다. 수사가 와서 전송하는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곽위국 등 여러 사람이 현풍으로 돌아갔다.
20일, 상사와 함께 부산성에 올라갔다. 부산성은 일본 사람들이 쌓은 것이다. 산봉우리가 바다 어귀에 우뚝 솟아있고 그 앞에는 절영도(絶影島)가 마주 서 있었다. 북쪽으로 산기슭을 바라보니 옛무덤이 하나 있다. 정씨(鄭氏) 시조의 무덤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안쪽 안산(案山)이고 절영도는 바깥 안산이라고 했다. 일본 배 2 척이 들어왔다.
21일, 일본말 훈도(訓導)인 이형남이 와서 알렸다. 어제 들어온 일본 사람은 대마도주의 심부름꾼으로서 이 달 10일에 도주는 대마도로 돌아왔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평성춘에게 물어보니 그는 말하기를 대마도주가 보낸 서신 가운데 이르기를‘ 이번에 들어오는 통신사는 전번에 비하여 많이 다르다고 관백에게 보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신사를 맞이할 때 실행해야 될 예절과 서로 만나는 절차 등에 대하여 관백의 결재를 받고 왔으니 모든 것을 완벽하고 상세하게 마련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달 16일에 집정관인 평소부(平掃部)를 만나 보았는데 그는 남몰래 사신(私信)을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신에 이르기를 ‘통신사가 강호에 도착하는 시기는 12월 초순으로 날짜를 정할 것. 요즈음 조흥의 심복들이 어찌하든지 흠집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두 나라 사이의 일은 소장로나 인서당에게 숨길 것.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여 오게 되면 집정관이 그 다음일은 주선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대마도주가 집정관과 봉행관의 성명을 써서 보내 주니, 지금 보내주는 서신에는 반드시 편지 바깥에 각각 성명을 써서 누구애개 보낸 것인지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또 집정관인 등대취(藤大炊)와 원찬기수(源讚岐守)와 대마도주인 나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될 수 있는 대로 간략하고 명확하게 할 것이며 거기에는 포로로 잡혀온 조선 사람들을 돌려 보내 달라는 내용을 쓰지 말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봉행관인 원이두수(源伊豆守)와 등풍후수(藤豊後守)와 등가하수(藤加賀守)와 원주방수(源周防守) 등에게는 각자 서신을 따로 보내되 포로들을 돌려달라는 내용을 쓰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서로 상의 할 터이니 그 때 나도 기회를 보아서 힘껏 일이 성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대체로 집정관으로 있는 사람이 3 명이고 봉행관으로 임명된 자가 4 명인데 그 중에 등대취 등가하수 원주방수 들은 조흥의 심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번 통신사가 들어 올 때에 만일 조금이라도 잘못 된 점이 있으면 이들은 온갖 모략으로 대마도주를 모함하여 조선에 해를 끼치도록 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도 시종 조선을 도울 자는 평소부와 원정종 2 사람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듣자니 그 중 원정종은 뜻밖에 죽었고 평소부만이 몰래 전해 준 내용이 이와 같다고 했다. 그래도 이 또한 깊은 염려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를 위해 주선해준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러 사람을 시켜 보내니 빠른 시일 내에 조선 임금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얻어라는 것이었다. 기장현감이 조그마한 잔치를 열어 주었다. 밀양부사도 왔다. 밤이 깊어 잔치가 끝났다.
22일, 기장현감이 돌아갔다. 듣자니 울산부사가 전선을 바르게 정돈하지 못한 죄에 걸려 파직 당했다는 것이다.
23일, 평성춘이 밀과(蜜果,과일) 3 상자를 우리 일행에게 보내 주었다. 이것은 남만(南蠻) 지방에서 나는 과일 같았다. 그리고 그는 화원(畵員,그림 그리는 사람)과 이마(理馬,말 조련사)와 의원(醫員,의사) 등을 보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대마도에 가면 자연히 볼 수 있을 터이니 먼저 보낼 필요가 없다고 답을 해 보냈다.
24일, 동래부사가 와서 작별잔치를 베풀었다. 밀양부사도 동참하였다. 천성(天城)만호가 우리 통신사가 타는 3 배를 그림으로 장식하는 책임자인 차사원(差使員)으로 뽑혀 왔다. 이는 평성춘이, 우리 사신들이 탄 배의 난간과 좌우에 가리는 휘장과 배의 갑판에 청룡(靑龍)을 그려서, 호화로운 모습을 자기 나라에 보여주고 싶다고 간청하여 조정에서 허락한 것이다. 그리하여 동래에 명령을 내려 붉은 비단 휘장을 만들게 하고 통영에에서는 그림 그리는 것을 담당하게 한 것이다.
25일, 밀양부사가 작별잔치를 베풀어주었다. 예조에서 보낸 공문이 서울로부터 내려왔는데 18일에 보낸 것이다. 예조에서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번에 오섬이 올린 보고문을 보니, 평성춘 등이 한 말의 내용은 우리 나라에서 보낸 국서의 문장과 일본에 보낼 물품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었는데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말의 뜻도 간곡하여 진심에서 울어나온 말인 듯합니다. 곧 그들이 이렇게 간청하는 것은 결코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로 대마도주를 위한 것으로써 일본 관백(關白,총리)에게 신용을 얻어 위험한 지경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입니다. 도주가 지난해에 조흥의 모함을 당하여 거의 큰 화를 입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겨우 목숨만을 보전하였다고 합니다. 그것뿐 아니라 그들의 급박한 사정은 오늘날 와서 더욱 심하여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청한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왕에 대마도주의 청을 따라 사신을 보낼 바에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들어주는 것이 해롭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들이 그의 요구를 따른다고 특별히 손해될 것도 없고, 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데 드는 비용도 대단치 않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우리가 들어주고 안 들어주는데 따라 죽고사는 문제가 걸렸습니다. 그러니 끝까지 안 들어줄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한편 생각해 보면 저들이 불리해 지면 우리도 역시 불리해 집니다. 그리 어렵지도 않은 저들의 부탁을 어찌 인색하게 모른 체하겠습니까? 신등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저들이 부탁하는 일들을 모두 허락해 주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우리가 보낸 국서 중에 현군이라고 쓴 현(賢) 자는 저들 나라에서 기피하는 글자이고, 우리 나라를 겸손하게 가리키기 위하여 쓴 폐방(弊邦)이라는 2 자는 저들이 혹시라도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오인하기 쉽다고 하니 아무리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마는 저들은 본래 한문(漢文)에 무식한 데다가 그들의 풍속이 그러하다면 굳이 그들이 꺼리는 낱말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국서중에 현군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뜻은 알 수 있는 것이니 빼어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말의 색깔은 그들이 요구한 것으로 보낸 것인데 아마도 그 말이 도착하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 같습니다. 또 비단은 비록 우리 나라에서 나는 물건이 아니지마는 그들이 요구하는 수량이 그리 많지 않고, 호랑이 가죽이나 매 표범 가죽 및 물고기 가죽 등은 그들이 요구한 수량에서 모자라게 책정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요구한 수량을 채운다 하더라도 매가 10 마리, 호랑이 표범 및 물고기 가죽을 합해 50 장과 말안장 2 구만 더 보태주면 됩니다. 그리고 보내준 붓과 먹 40 자루의 숫자를 그들이 기피하는 수라고 하니 기왕에 각기 10 지루씩을 더해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집정관에게 보내는 물건과 봉행관에게 보내는 물건들 중에 무거운 것들은 빼 버리고 가벼운 것들만 대신 보내도록 하시고, 또 도주에게는 그들의 청대로 그 수량을 줄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동래부사로 하여금 답서를 쓸 때에 품계가 높은 재상으로 통신사를 차출해 보내었다고 쓰게 하는 것도 해롭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 통신사 일행의 의복 색깔도 그들이 기피하는 색이라고 하나 이는 우리 나라의 국상으로 아직 상복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의 나라를 위하여 상복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여 보면 국법에도 국경지방에서는 국상을 당하여도 애통함을 들어내놓고 행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찍이 중국 송나라의 제도를 보았는데 그들은 국상을 당하면 국경에서는 3일 동안만 상복을 입고 끝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아도 외국에 사절로 가는 데 있어서 임기응변으로 복색을 바꾸는 것이 당연할 듯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의 요구하는 바가 그리 어려운 것들이 아니니 모두 들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드린 것 가운데 비단 문제에 있어서는 지난 번에 비변사와 본 예조에서 그대로 들어 주자고 간청하였사오나 임금님께서 굳이 윤허해 주시지 않아 신 등은 매우 당혹하였었습니다. 예로부터 중국도 그 주변에 있는 오랑캐들과 교제를 한 것은 모두 그 오랑캐가 사랑스럽고 사모할 만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어서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본다면 저 주나라 태왕도 주옥같은 보물과 가죽 및 개와 말 등을 가지고 오랑캐들과 교제를 하였고 한나라 이후에도 해마다 10만의 수량이나 되는 화폐(貨幣)를 오랑캐들에게 보내어 백성들의 피땀으로 만든 재물을 탕진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들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겠습니까?
모두 부득이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는 것도 사실은 부득이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20 필 비단을 아끼어 저들의 비위를 거슬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기왕에 사신을 보내면서 그들의 호의를 얻지 못한다면 보내지 않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신등의 생각으로는 저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주더라도 그 경비는 극히 적지만 만일 주지 않았을 때에 저들로부터 받을 피해는 매우 클 것입니다. 그러하여 임금님의 뜻을 거슬리면서까지 되풀이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자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성춘의 말을 들으면 비단과 그밖에 다른 물건을 요구한 대로 다 주지 못할 경우 그 품목을 쓸 자리를 그냥 두고 보내면 도주로 하여금 대신 준비하여 채워 넣도록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부당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가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그까짓 두어가지 물품을 구입하지 못하여 도주로 하여금 대신 채워 넣도록 하여 되겠습니까? 저들이 요청한 내용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신 뒤에 허락을 내려 주십시오.“
임금이 비답하였다.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처치하라.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은 자세히 따져보지도 않고 함부로 행동하는 데 걱정스러움이 있다. 곧 우리가 꼭 걱정스러워해야 할 일은 소홀히 취급하여 넘기면서 별로 긴요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서는 벌벌 떨며 겁을 낸다. 이렇게 해 가지고 이 어려운 처지를 견디어 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온 조정에서 똑같이 그들의 요구대로 물품을 주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막을 수가 없다. 그러나 비단을 더 주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앞서 들어갔던 통역관들을 불러 문의해 본 뒤에 처리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영의정 김류(金瑬)와 우의정 이홍주(李弘冑)가 말했다.
“기왕에 저들의 요구가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문제도 아닌 데다가 예조에서 그 문제에 대한 보고가 매우 자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어서 비단을 더 보태어 보내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통역관 박언황(朴彦璜)에게 물어 보았다. 그는 지난 선조 37년(1604년)에 유정을 따라 일본에 들어갔었고, 또 인조 2년(1624년)에는 정립(鄭岦)을 따라 갔다가 온 사람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갔던 2 번 다 대마도주가 우리 나라에서 보낸 예물이 약소하다고 하여 인삼과 호랑이 가죽 및 표범 가죽 등을 더 보태어 본국으로 보내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들은 임금은 저들의 요구대로 보내 주라고 허락하였다. 이는 일본 조정안의 사정이 복잡하여 대마도주의 위험이 급박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 조정에서 이와같이 배려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에서는 평성춘과 귤성공(橘成供) 등지승(藤智繩) 등이 잇따라 들어와서 자기들의 요구가 성취되었는가 아닌가를 세밀히도 따지어 한 가지라도 혹 틀릴까봐 온갖 방법을 다 썼다.
26일, 부산에 머물렀다. 내가 이곳 바다에 도착한 이후로 가슴속에 일어나는 통증이 때때로 발생하여 궁하탕(芎夏湯)과 추기산(推氣散)을 복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곤질환(滾疾丸)을 먹어보기도 하였으나 효험이 없더니 지금에 와서 더욱 심했다. 필공(筆工,붓만드는이) 중이가 돌아갔다. 김해부사가 응접관으로 왔다.
27일, 밀양부사와 영산현감이 돌아갔다. 어두울 녘에 일본 배 한 척이 들어왔는데 이는 우리 사신 3 사람이 모두 새로 임명되었는데, 전에 우리 사신이 일본에 건너갔을 때에 대마도주는 조선에서 품계가 높은 자로 엄선해 임명된 자들이라고 일본 관백에게 보고하였었단다. 그런데 지금 들어오는 사신이 품계가 낮은 사람으로 차임되었을 경우 큰 문제가 발생되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통역관인 홍희남으로부터 이번에 들어가는 사신이 과연 품계가 높은 사람인가 아니면 전에 온 사신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한 이유는 무엇인가를 글로 써달라고 했다.
28일, 전라좌수사 안몽윤이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물어왔다.
29일, 바람이 거세게 불고 날씨가 추워졌다.
30일, 일행들에게 주위할 점을 시달하였다. 종사관은 군관과 통역관들이 거느린 종들을 불러 점검하였다. 그런데 통역관 최의길의 종이 밤새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명령을 어긴 죄로 그 주인인 최의길을 잡아다가 곤장 20 대를 치게 하였다.
이날 시달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일본 사람은 명분을 중시하여 아래위의 질서를 엄격히 지킨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는 예의를 지키는 나라라고 하여 누구나 존경하는 터인데, 과거에 그 나라에 가서 그들의 웃음거리가 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모두들 그렇지 않게 각자 조심하여 우리
일행 중에는 엄숙한 것으로 목표를 삼을 것.
1.모든 일을 군인들이 시행하듯 하되 만일 잡담이나 우스개 소리로 떠드는 자는 소란죄를 적용하여 곤장을 칠 것이다.
1.우리 일행 중에 관직을 가진 자는 먼저 계급을 정하여 각각 자신이 지킬 예절과 공순함을 보일 것이며 혼잡함이 없게 하여 저들이 보고 해괴하게 여기는 일이 없게 하라. 비장(裨將)들은 각각 자기 소속 중에 최고 책임자를 시켜 주의를 주게 하고, 통역관 이하 여러 직책에 있는 사람들도 당상 역관이나 상통사 중에 최고 책임자를 정하여 주의를 시키되 매일 돌아가면서 그날의 책임자를 정하여 책임을 맡기되 일행중에 혹시라도 과실을 범하거나,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먼저 그 날 책임자를 벌로써 다스리되 만일 과실이 클 경우 그 날의 책임자와 최고 책임자를 연대로 벌을 주겠다.
1.배에 노를 젓는 격군들은 배의 양편에 1 명씩의 통장(統將)을 두고, 그 배의 좌우 양쪽 전체를 통솔하는 영장(領將) 1명을 두되 이들은 모두 성장(船將)이 거느린다. 그리하여 격군이 죄를 지면 통장을 처벌하고, 일반 군졸이 죄를 지면 도훈도(都訓導)를 처벌하고, 사령이나 취수(吹手)가 죄를 지면 패두(牌頭)를 처벌하고 군관이나 통역관의 종들이 죄를 범하면 각기 그 주인에게 벌을 준다.
1.의장기의 깃발이나 창검(槍劍) 등을 드는 사람이나 사령이나 취타수 등은 행진을 할 때면 반드시 열을 지어 가고, 서 있을 때도 줄을 서야 하되 한 발자국도 어긋나서는 안된다. 만일 이 규율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법률에 따라 곤장을 처벌하겠다. 그리고 이 규율을 여러번 범하면 그 책임자를 처벌할 터이니 각 부서의 책임자들은 각별히 주의를 시켜 아랫것들에게 두려움을 알게 하라.
1.우리가 도착하는 곳마다 숙소를 정하게 되면 그 곳에 있는 병풍이나 자리 기타 그릇들을 절대로 더럽히거나 깨뜨리지 못하게 할 것이며, 풀 한 포기 화분 하나도 꺾거나 훼손시키지 말 것.
1. 우리 일행은 어디를 가더라도 함부로 침을 뱉거나 코를 풀어서도 안되고, 대소변은 반드시 정해진 곳에 가서 볼 것이며 함부로 더럽히지 말 것.
1. 우리가 이르는 곳에 가서는 함부로 주민들의 집에 들어가서도 안되고, 떼를 지어 두루 돌아다닌다든지 지나는 사람을 손가락질하지 말 것.
1. 창녀가 있는 집에 들어가는 자는 중한 벌을 내리되, 그 사실을 고발하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겠다.
1. 과거 하인 무리들 중에 간혹 우리 일행에게 시중드는 일본 사람들에게 욕을 하거나 또는 챗찍을 가지고 구타하는 자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매우 한심한 일이다.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1.하인 중에 혹시라도 저 사람들과 싸우거나 언쟁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특별히 곤장을 쳐서 엄격히 다스리겠다.
1. 하인끼리 서로 싸우는 자가 있으면 그 잘잘못을 따져 보아 잘못한 자에게 중한 벌을 내리겠다.
1. 모든 하인들은 저들과 가까이 상대하지 말 것. 그들과 가까이하게 되면 서로 다투기도 쉬울 뿐 아니라 우리들의 사정을 밖으로 흘리는 병폐가 있다.
1. 하인은 저녁마다 문 근처에 있다가 저녁마다 문이 잘 잠겼는가 점검을 해 보도록 하라.
1. 노젓는 격군들은 더욱 무식한 자들이다. 각별히 잘 단속하여 법률에 어긋나지 않게 하라.
1. 과거에 노젓는 격군들이 돈을 나누는 문제 때문에 서로 심하게 싸웠다고 하는데, 체면없는 행위가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노젓는 격군의 죄는 말할 나위가 없고 통역관의 죄도 말할 수 없이 크다. 노젓는 격군의 책임자나 일을 집행하는 통관(通官)에게도 모두 중벌을 내리게 하여 그것을 보고 있는 저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라.
1.배들을 강어귀에 매어둔다든지, 우리 일행이 일본 강호(江戶,에도)를 가는 동안이 하루나 한 달만 걸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할 모든 일에는 착오가 많을 것이다. 그러니 각별히 조심하여 저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하라.
1. 배 위에서는 사공 무상 외에는 절대로 큰소리를 내지 말라. 한 배의 움직임은 모두 사공 무상에게 일임하고 다른 사람은 절대로 지휘하지 말게 하라.
1. 배위에서 몰래 물건을 사고 판다든지 또는 저 사람들과 함부로 교제하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그 벌칙이 따로 규정되어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여 후회가 없게 하라.
선비 전영이 초계에서 왔다.
1636년 10월
1일, 부산에 머물렀다. 새벽에 망전례를 행하였다. 서울에서 보내온 화마(華馬) 2 마리와 매[鷹子] 20 마리를 일본에서 온 차왜(差倭)를 시켜 운반해 가라고 했다.
2일, 종사관이 일행 중 각부서 책임자들의 여행 장비를 점검하고 모두들 확인이 끝났다는 서명을 하여 돌려주었다. 좌수사가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밤이 깊어서 동래부사가 왔다.
3일, 통역관 윤제현이 서울에서 왔다. 국서와 물품목록을 적은 첨부 서류[別幅] 및 보충한 물품을 가지고 왔다. 숙소에 들어와 국서를 열어 보았다.
4일, 종사관이 아침에 항구에 나가서 여행 장비를 점검하였다. 그리고 여행 물품에 표를 하여 여러 배에 나누어 실었다. 오후에 부산 성문을 나와 배를 타려고 했으나 썰물이 되어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시골 마을 집에 숙소를 정했다. 밤이 깊자 동래부사의 군관이 서울에서 왔다. 그는 일본의 봉행관 4 사람에게 보낼 서신[書契] 4 통을 가지고 왔다.
5일, 부산성 밖에 머물렀다. 종사관은 상통사(上通事,통역관) 최의길이 죄를 짓고도 나타나지 않자 다시 곤장 10 대를 치게 한 뒤에 임금님에게 보고문을 올리고 직책에서 내어 쫓았다. 의령현감 및 거제현감이 응접관으로 되어 도착했다. 현풍 관아의 하인 수십 명과 별감 박진립이 찾아왔다. 밤이 깊은 뒤에 현풍현감이 도착했다. 허무는 울산으로 돌아갔다.
자료출처 : 선산김씨 다음카페
첫댓글 동명 김세렴 선생의 묘가 앙성면 본복리 복상골에 있지요. 이런 대단한 분의 묘소가 우리 지역에 있다는 게 큰 영광입니다. 그곳에는 신도비도 있으며, 글을 미수 허목이 썼습니다.
문중에서 다시 이장을 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모양입니다. 문화재로 지정이라도 된다면 움직이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있어 몇먼 이야기 했지만 방법이 없는지 답답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