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베트남에서 생활할 때, 저는 ‘호치민’ 시내 항산 로터리 근처에 있는 ‘티 응에 성당’에 가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베트남 미사 경본 낭독 연습을 했었습니다. 어느 날 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저에게 뭐라고 말하고는 저를 어디론가 이끌더군요. 영문도 모르는 채 따라가서 보니 그곳은 성당 부속건물 2층 추모관에 유해를 모셔둔 방이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는데, 잠시 후에야 왜 이분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을까를 생각하면서 부끄러움과 고마움이 한꺼번에 다가왔습니다. 그날은 바로 위령의 날이었기에, 저를 그곳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 방에서 잠시 돌아가신 연령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순간을 가졌지요. 그런데 지난 11월 2일 서울에서 동반자 부부가 저를 방문했습니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도 하고 처음 안성을 방문했다기에 무심코 미리내 성지로 가게 되어 자연스레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묘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뜻밖의 선물을 그분들에게 제가 드렸다기보다, 오히려 제가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성지를 찾으셨고, 성인의 묘지 앞에서 기도하시더군요.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그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늘 깨어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티응에 성당 추모관에서 그리고 미리내 성지의 성인의 묘 앞에 잠시 머물면서, 그리스도를 믿고 살다가 하늘로 귀천하신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새삼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늘 깨어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위령의 달, 오늘 복음에서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처럼, 우리 또한 각자의 등잔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복음에 의하면 열 처녀는 똑같이 등잔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이할 충분한 채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도 겉보기에는 신랑을 기다리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등잔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남들이 보기에는 열심히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녀들은 신랑을 기다릴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등잔의 불을 밝힐 수 있어야 하는데, 그녀들은 등잔을 들고 있었지만, 불을 밝힐 기름을 마련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단지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의 의무로서 등잔만을 가지고 있었지, 왜 등잔이 필요한지 잘 몰랐나 봅니다. 빈 등잔은 어둠이 짙어지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기름 없는 등잔은 불을 밝힐 수 없으므로 있으나 마나 합니다. 그녀들이 신랑을 맞이하려면 등불을 밝혀야 하는데,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들이 신랑을 올바로 기다리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세례를 통해 등잔은 준비하고 있었지만, 신앙과 신앙 행위로서의 사랑이라는 기름은 전혀 준비하지 못했고, 준비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겉으로만 준비한 껍데기 신앙,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신앙이었을 뿐입니다. 남들이 보기엔 훌륭한 종교인이었지만, 결코 구원받을만한 올바른 신앙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주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겉만이 아니라 속까지도 준비해야 합니다.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도 주님을 만나기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 속에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랑을 생각하며, 신랑을 맞이하면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준비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녀들의 신앙은 겉만이 아니라 속까지도 꽉 채워진 신앙이었고, 진실로 기다리며 준비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녀들의 신앙은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적 신앙이었으며, 참다운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겉만 아니라 속 깊은 곳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는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맞이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는 ‘사랑’으로 드러나고 표현되는 참다운 신앙이라는 기름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겉이 화려하고 번지레하더라도, 아무리 율법이나 계명을 잘 지킬지라도 마음속에 믿음과 사랑을 담고 있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떠나지 않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왜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련한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주지 않은 것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눔은 자기 것을 다 챙기고 난 다음, 그 나머지를 필요한 사람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또한 나눔의 한 측면인 것은 분명하지만, 교회가 가르치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나눔의 의미는 나눔의 참된 의미는 충분하지 않음에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없지만 함께 먹고, 함께 나누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자신 삶의 수확들을 나누는 것이 참된 나눔입니다. 때문에,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달라고 청할 때, 나눠주어야 하는 게 마땅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혹, 잔치 집에 가다가 등잔불이 꺼져버리면, 비록 좀 어두워서 불편하겠지만, 신랑의 손을 잡고 잔치 집에 가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모습입니다. 참된 나눔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동료들과 기름 나누기를 거절합니다. 그 까닭은 혼인 잔치에 가기 위해, 마지막 날에 하느님 앞에 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나눌 수 없고, 또한 남과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등잔 속의 기름을 꺼내어 남과 나누거나 남에게 빌려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름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써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신앙 행위로서의 사랑이란 기름은 남에게 빌려주거나 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미련한 처녀들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고소했을까요? 샘통이다. 잘난 척 하더니만 하면서 좋아했을까요? 그렇지 않았다고 봅니다. 오히려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을 것입니다. 십수 년 동안을 함께 지내며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동료들이었습니다. 이웃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기름을 빌려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름은 나눠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나 형제, 자식이 아무리 나를 사랑하고, 나 대신 희생과 자선을 할지라도 마음속에 있는 믿음과 사랑까지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만나도록 하는 믿음과 사랑의 행위란 오직 본인의 것이지, 그 어떤 사람의 것을 대신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 믿음과 사랑을 키워가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문이 닫힌 뒤에는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25,11) 하고 목을 놓아 소리 질러도 문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날고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깨어 살아야 합니다.”(25,13참조)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속성 곧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는 평신도는 자신이 생활하고 활동하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참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평신도의 존재 이유이며 역할이라고 봅니다. 더욱 급변하는 세상 안에 살아가는 평신도들의 역할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강력히 요구되며, 특히 예전 한국을 처음 방문하셨던 프란치스코 교종도 <평신도 사도직 지도자들과 만남>에서 “평신도들이 인간 증진에 힘써 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평협은 평신도 주일을 맞아 인간 증진을 <인간의 잃어버린 하느님의 모상성 회복>이라고 화답했었습니다. 이는 곧 하느님의 모상성 회복은 교회 가르침에 따라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현존하고 활동하는 평신도는 이런 차원을 의식하면서 어떻게 자신이 살고 활동하고 있는 곳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절박한 요구를 해결해 줄 것일 것인가를 명심하면서 사제요 예언자요 왕으로 직분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평신도인 여러분은 자신이 소속한 본당 사제와 수도자들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인간 증진’에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실천해 온 모든 평신도에게 감사드립니다. 혹여 본의 아니게 여러분들 가운데 본당 사제나 수도자와 불편한 관계 혹 갈등으로 상처받으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하면서 기도드립니다. 사제인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제는 세상 안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자기의 말과 행동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지지하면서 평신도들이 신앙과 사랑으로 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그들의 ‘바람막이와 비빌 언덕’이 되어 주어야 하며, 평신도들 역시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제를 존경하고 순명하고 기도하면서 함께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준비해야 하리라 봅니다. 하느님 백성인 우리 모두(=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다 함께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참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내 아들과 딸들아! 너희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나의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5,21.23)라는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