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마음
慈母手中線(자모수중선)-자애로우신 어머니 손에 실 들고,
游子身上衣(유자신상의)-길 떠나는 아들 위해 옷을 지으시네.
臨行密密縫(림행밀밀봉)-떠나기에 앞서 촘촘하게 바느질 하는 뜻은,
意恐遲遲歸(의공지지귀)-돌아올 날 늦어질까 염려하시기 때문이라네.
誰言寸草心(수언촌초심)-뉘라서 말하리오 풀 한 포기의 마음이,
報得三春暉(보득삼춘휘)-석 달 봄볕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맹교(孟郊)
효자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얽힌 이야기
5월 8일 어버이날에 연이어 길거리에는 석가탄신일 축하 연등(燃燈)으로 장식되었다.
아래 내용은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에서
효자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얽힌 이야기 내용을 옮긴 것이다.
按寺中所傳古記云 慈藏法師初至五臺 欲覩眞身 於山麓結茅而住 七日不見 而到妙梵山 創淨岩寺 後有信孝居士者 或云幼童菩薩化身 家在公州 養母純孝 母非肉不食 士求肉出行山野 路見五鶴射之 有一鶴落一羽而去 士執其羽 遮眼而見人 人皆是畜生 故不得肉 而因割股肉進母 後乃出家 捨其家爲寺 今爲孝家院 士自慶州界至河率 見人多是人形 因有居住之志 路見老婦 問可住處 婦云 過西嶺 有北向洞 可居 言訖不現 士知觀音所敎 因過省烏坪入 慈藏初結茅處而住 俄有五比丘到云 汝之持來袈裟一幅 今何在 士茫然 比丘云 汝所執見人之羽是也 士乃出呈 比丘乃置羽於袈裟闕幅中相合 而非羽 乃布也 士與五比丘別 後方知是五類聖衆化身也 此月精寺 慈藏初結茅 次信孝居士來住 次梵日門人信義頭陁來 創庵而住 後有水多寺長老 有緣來住 而漸成大寺 寺之五類聖衆 九層石塔皆聖跡也 相地者云 國內名山 此地 最勝 佛法長興之處云云
대산 월정사 오류성중(五類聖衆)
*오류성중(五類聖衆)-본불(本佛)을 따라다니는 다섯 종류의 성자들
절(월정사)의 옛 기록을 살펴보면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러 진신(眞身)을 보고자 산기슭에 갈대풀로 지은 집을 짓고(草庵) 있었으나 7일이 되어도 보지 못하고 묘범산(妙梵山)에 이르러 정암사(正庵寺)를 창건하였다.
*묘범산(妙梵山)은 지금의 강원도 태백시 정선군 함백산(咸白山)이라고 한다.
그 뒤 신효거사(信孝居士)라는 이가 있으니 혹은 유동보살(儒童菩薩)의 화신(化身)이라 하는데 충남 공주에 있으면서 어머니를 효도(孝道)로 봉양하였다.
*유동보살(儒童菩薩)-청정(淸淨)한 수행(修行)을 하는 보살
어머니가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하지 않아 신효거사(信孝居士)가 고기를 구하러
산과 들로 다니다가 공중에 학(鶴)이 날라가는 것을 보고 활을 쏘니 그 중 한 마리의 날개에 맞아 깃(羽) 하나를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신효거사(信孝居士)가 깃을 집어 눈에 대고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어머니께 드릴 고기를 구하지 못하자, 자기 다리의 허벅지 살을 베어서 어머니께 요리를 하여 드린 적이 있었다. 그 뒤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출가(出家)하여 자기가 살던 집을 절로 희사(喜捨)하였으니 지금 효가원(孝家院)이 그것이다.
*효가원(孝家院)-충청남도 공주시에 있었던 절. 신라 때 유동보살(儒童菩薩)의 화신(化身)으로 불리던 신효(信孝)가 창건.
신효거사(信孝居士)가 경주에서 하솔(河率)에 이르러 사람을 보니 거기 사람들은 모두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곳에 살려는 마음이 생겨 길가는 늙은 부인에게 살만한 곳을 물으니 부인이 대답하기를
“이 서쪽 고개를 넘어가면 북쪽으로 향한 동네가 있으니 살 만하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생각하기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가르침인 줄 알고,
따라서 성오평(省烏坪)을 지나서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처음 초암(草庵)을 짓고
계신 곳으로 가 있었다. 조금 있다가 다섯비구니가 와서 “네가 가지고 온 가사(袈裟) 한 폭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묻는다. 신효거사(信孝居士)가 무슨 말인지 몰라 멍청해 있자 비구가
“네가 가지고 사람을 본 학의 깃이 그것이다” 한다.
신효거사(信孝居士)가 학의 깃을 내어 주니 비구가 가사(袈裟) 폭이 찢어진 곳에다 맞추니 깃학의 깃이 아니라 한 폭의 천이 되었다. 신효거사(信孝居士)는 비구들과 헤어진 뒤에 비로소 그들이 오류성중(五類聖衆)의 화신(化身)인 것을 알았다.
이 월정사(月精寺)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으로 초암(草庵)을 지었고,
다음에는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와 있었고, 그 다음에는 범일(梵日)의 문인
신의두타(信義頭陀)가 와서 암자를 짓고 있었다.
그 후로는 수다사(水多寺) 장로 유연(有緣)이 와서 있으면서 점차 큰 절이 되었으니 이 절의 오류성중(五類聖衆)과 9층석탑은 모두 성적(聖跡)이다.
지리를 아는 자의 말이 국내에 있는 명산 중에 이곳이 제일 훌륭한 명승지로 불법(佛法)이 흥할 곳이라 하였다.
(위의 내용은 일연의 삼국유사 대산 월정사 오류성중(五類聖衆) 내용이다.
권상노(權相老 역해(譯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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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백범(白凡) 김구(金九)
우리는 김구선생 하면 독립운동가로만 생각한다.
김구선생은 출천지효자(出天之孝子)다.
백범 김구 선생
21세 되던 해 일본군인 스치다(土田讓亮) 중위를 죽인 백범은 해주감옥을 거쳐 인천감옥에서 복역 중, 2년 뒤 감옥을 탈출하여 공주 마곡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노릇을 한다.
마곡사를 떠난 백범은 집으로 돌아왔는데,
연로하신 부친이 병으로 위중한 상태였다.
이미 탕약도 듣질 않는 상황이었다. 백범은 최후로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내기로
결심했다. 백범이 쓴 “백범일지”에서 관련 부분을 옮겨본다.
【산골의 가난한 집에서 고명한 의사를 부른다거나 기사회생의 명약을 드시게 하기에는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 할머님이 임종하실 때 아버님께서 손가락을 자른 것[斷指]도 이런 절박한 지경에서 하신 일이었는데, 내가 또 단지한다면 어머님의 마음이 상하실 터이다.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斷股] 결심하고, 어머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 조각 한 점을 떼어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 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 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 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초종(初終)을 마치고 성복일(成服日)에 원근에서 조객이 왔다. 설한풍이 뼈에 사무치는 때 뜰에 상청(喪廳)을 설치하고 조문을 받는데, 독신 상주라 나는 잠시도 상청을 비울 수 없었다. 살을 썰어만 놓고 떼어내지도 못해 다리는 고통이 심했지만 어머님께 알릴 수도 없었다. 조객 오는 것조차 괴로워 허벅지살 벤 것을 후회하는 생각까지 났다】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생피를 먹였다는 효자 얘기는 더러
들어본 적이 있지만 허벅지 살을 베어냈다는 이야기는 백범이 처음이다.
몰라서 그렇지 백범 같이 제살을 뗀 효자가 있을 것이다.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칠 부모가 듯이
부모를 위해 제 살을 베어내는 자식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만한 자식은 세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 자식 되고 부모 되는데---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