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규 논설위원
‘아언각비(雅言覺非)’. 다산 정약용의 역작으로, ‘바르고 우아한 우리말 어원사전’쯤 되는 책이다. 18년 동안의 전남 강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고향집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819년에 3권으로 묶어낸 저작이 아언각비다. 그의 학문적 성숙도가 원숙한 시기의 저작임을 알 수 있는 표기에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제1권에서는 말하다는 뜻의 ‘담(談)’이라고 했지만 제2, 3권에서는 당당히 명백하게 단언한다는 뜻의 ‘저(著)’라고 한 것이다.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 순전히 수작업으로 수많은 서적을 찾아 읽고 종횡으로 자원(字源)을 검증, 어원을 구명해 낸 일은 엄청난 업적이다. 그 가운데는 오늘에도 기억해 둘 만한 어원이 많다.
이를테면, 아버지의 자매를 ‘고모(姑母)’라고 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모름지기 성(姓)이 달라야 어머니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법인데, 어떻게 아버지의 친자매를 고모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이 같은 어머니’ 곧 고모는 천하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그냥 ‘고(姑)’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만 더 들여다보자. 오늘날 빙부(聘父) 또는 빙장(聘丈)이라 하면 장인을 가리킨다. 하지만 본디의 쓰임은 그게 아니었다. 이야기는 주자(朱子)의 장인어른에서부터 시작된다. 주자의 아내는 유(劉)씨였는데 장인은 징사(徵士)였다. 징사란 빙군(聘君)과 같은 말로, 조정에서 벼슬을 시키기 위해 옥백(玉帛)을 보내준 징군(徵君) 곧 ‘초빙된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주자가 장인을 일러 ‘유빙군’이라 했는데 훗날 한국에서는 아내의 아버지를 ‘빙군’이라 하다가 나중에는 ‘빙부’라고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지금 다시 원뜻으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어원만큼은 알아둘 만하다.
국회 인사청문회 이후 ‘부덕(不德)의 소치’란 말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하지만 이 말 또한 부적절한 인용이다. 부적절한 처신을 했거나 법의 경계를 넘나든 후보라면 이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까닭이다. 또한 자신의 행위가 위법인 줄도 모른 사람이라면 애초에 ‘빙군’과는 거리가 멀다. 진정으로 ‘부덕의 소치’를 말해야 할 쪽은 빙군과 거리가 먼 후보가 아니라, 삼고초려해서라도 모셔야 할 징사인지를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 지명권자, 임명권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