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한 약속
아버지 어머니 살아 계셨으면 113세이고
아버지 승천하신지 44년, 어머니 아버지 따라 가신지 어언 2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87세가 되고 보니 부모님께 드렸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생각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하면서 부모님 생각이 갈수록 깊어집니다.
1952년 6.25전쟁이 한창일 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갈 형편이 안 되어
우리 고향 군산공설운동장에 있던 임시 보충대 중대장 님의 전령으로 있다가,
부대가 이동하는 바람에 그것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1년간 솔방울을
따서 20리 거리에 있는 지경(대야)장에 팔아 돈 모아 중학교에 가던 이야기입니다.
그 때 아버지 어머니께 굳게 약속했던 약속 집에서 10리 길에 있던 가까운 중학교를 두고
40리가 넘는 중학교에 가도록 허락해 주시면,
1. "걸어서 다닐 것이며, 2. 반드시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부모님께 그 은혜 꼭 갚겠노라" 고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이제 노인이 되어 눈물을 삼키며 부모님께 바치는 이야기 입니다.
내가 지은 죄를 한 번 가신 부모님께 갚을 길이 없음이 그렇게 서럽습니다.
어머님은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셔 저녁밥을 지으시고 계셨습니다.
그때 동내에 사는 6학년 심 숙희 누나가 찾아와
"아주머니, 저녁 지으세요? 저 장영(저의 아명)이 때문에 왔어요.
장영이 이번에 학교 보내셔야지요.
해방도 되고 해서 그간에 학교에 못 간 아이들 모두 학교에 보내야 돼요." 하며
어머님을 설득하였습니다.
어머님은 깜짝 놀라시며
"아니 저 어린 것을 어떻게 학교에 보내. 내년에나 보내려는데.."
어머님께서 머뭇거린 것은 6남매를 낳아 딸 하나 아들 하나만 남기고
이미 4 남매나 잃은 후라, 하나 남은 아들이 애기로만 보셨던 것입니다.
"아주머니, 아니에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업고라도 다닐 테니 이번에 꼭 보내셔야 해요."
해방 된 다음 해였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그간 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취학하도록 독려하던 때입니다.
어머님은 망설이시다가
"그럼 나는 숙희만 믿을 터이니 잘 좀 봐 줘" 하시며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는 집에서 십 오리(6km)나 되니 어머님 얼굴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습니다. 1946년의 일입니다.
그렇게 하여 초등학교를 마쳤습니다.
그때 거의 그랬지만 무명에 검은 물을 들여 바지는 검은 바지에 하얀 저고리 차림으로
검은 고무신 신고 다니던 기억은 지금도 뚜렷합니다. 졸업 사진을 찍는데 흰 저고리
차림으로 찍기 무엇하여, 김 성수라는 친구의 양복을 빌려 상의만 걸친 채 핫바지 차림으로
사진 찍은 기억을 더듬다 보면 엷은 웃음이 나는군요.
그렇게 1952년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서 주저 앉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1년 후면 어떤 일이 있어도 중학교에 가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그 1년 사이 내가 택한 직업(?)은 마침 군산공설운동장에 머물던 예비군 집합소였던
어느 부대의 중대장 님의 전령이었습니다. 이유는 그 잠시 쉬는 사이 삼시 세끼 식사라도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 때는 6.25전쟁 중이었고 누구나 굶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길이 있으면 택해서 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자리도 마침 사촌 형님께서 그 부대의 주보(매점)에 계셨기 때문에 얻은
자리였지요.
그 군인의 이름은 김 달 수 대위로 중대장 님이셨고 그 분의 전령이 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대위 님의 심부름으로 대위 님의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모님은 나에게 점심 식사를 해 주었습니다.
중대장 님은 일부러 점심 시간을 맞추어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셨고 사모님께 좋은 점심을
해 주라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내가 접한 밥상은 지금까지 내가 접하지 못한 산해진미의 밥상이었습니다.
중대장 님의 사전 당부 말씀이 없었으면 그런 좋은 음식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 엄청나게 준비한 식사를 하면서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처음 먹어 보는 고급 식사였기에 부모님이 생각나서였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허락만 되면 나는 거기에서 중학교에 갈 때까지 계속 있으면서 굶주린 배를 달래려 했습니다.
6.25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정말 하루하루 사는 것이 너무 힘든 때였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그 부대가 이동하였고, 나도 내년에 중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서는 그 맛있었던 밥상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무엇인가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솔방울 따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날이 밝으면 산에 가서 솔방울을 땄습니다. 그 솔방울을 짊어지고 20리가 넘는
길을 가서 대야라는 장에 가서 팔았습니다. 중학교에 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중학교 시험을 볼 때가 되었습니다.
시험도 끝나고 나는 좋은 성적도 얻었습니다. 이제 바라던 중학교에 가겠구나 하면서
마음이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나를 불렀습니다.
"얘야, 집안 형편도 그러니 너 임피 중학교에 가거라."
임피 중학교는 집에서 10리 밖에 되지 안했지만 시골 학교였습니다.
"아니에요, 아버지. 저 군산중학교에 갈 거 에요. " 나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아니, 그 먼 곳까지 어떻게 다니니? 우리 형편에 하숙도 시킬 수 없는데..."
아버지는 내가 40리 밖에 있는 학교에 간다는 소리에 걱정이 앞섰습니다.
곁에서 부자(父子)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어머님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께 약속했습니다.
"아버지, 저 군산중학교에 가되 걸어 다니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니 군산중학교에 가도록 허락만 해주세요. 그래서 큰 사람이 되겠습니다."
군산중학교는 일제 시대에 일본인을 위해 설립한 학교라 좋은 학교였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 하지 못하면 꿈도 못꾸던 학교였습니다.
"아 글쎄. 그 먼 곳을 어떻게 다녀? 가까운 임피 중학교에 가라니까."
아버지는 아주 걱정을 하시며 나의 생각을 접도록 하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결의에 찬 모습을 보고 부모님께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느끼시고
묵묵부답으로 허락하시고 말았습니다.
나는 아버지께 그처럼 두 가지 약속을 하고 40리가 넘는 군산중학교로 갔고,
학교는 집에서 출발하여 1시간 가량 창감재라는 산을 넘어야 행길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러고도 1시간 30분 이상을 더 가야 학교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별을 보고 떠나서
달을 보고 넘어오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3년을 지각, 조퇴, 결석 한 번 않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나는 부모님과의 한 가지 약속은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 3년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겪은 마음고생은 내가 겪은 고통보다도 훨씬 컸습니다.
나는 지금 팔순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 고생하셨던 부모님은 지금 이 세상에 안 계십니다.
그 때 부모님께 약속한 두 가지 약속 중 하나, '걸어다니겠다는 약속은 지켰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40리가 되는 그 먼 길을 3년 간 지각, 조퇴, 결석을 한 번도 하지 않고 다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켰습니다. 하지만 '중학교에 가서 큰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삶이란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나처럼 환경이 어려운 사람은 삶 그 자체가 도전이 아니고서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삶은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전하였지만 나의 삶은 성공이라는
삶을 부모님께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 부모님들을 생각하며 울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아버지 산소를 고향 선산에서 집 가까이 있는 어머니를 모신 추모 원으로 함께 모셨습니다.
명절이나 부모님 생일 그리고 기일이나 어버이 날이면 찾아뵙지만 부모님께 약속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에 항상 가슴을 도리는 아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아픔은 세월이 나를 데리고 사는 동안 더욱 깊어질 것 같습니다.
<추신>
보고 싶고 그리운 김 달수 대위 님, 그리고 사모님!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지금쯤 하늘 나라에 계실 당신들
그때 주신 은혜 너무 감사하고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벌써 7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신들이 주신 감사가 바로 눈앞의 일처럼 생생합니다.
지금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뵈올 수 있을까요.
아니 지금 하늘나라에 계시겠지요. 삼가 명복을 빕니다.
제 여생에서 가족이라도 뵈올 수 있다면 하늘이 저에게 준 기회라 여기며
꼭 찾고 싶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