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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거짓 우상과 타락한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항상 영적 도전에 직면합니다. 우리는 헛된 풍요와 거짓 평안을 약속하는 영적 전투를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세상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엘리야는 당당히 영적 전쟁을 선포합니다.
아합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 신을 숭배한 것에 대한 징벌로 이스라엘에는 비가 오지 않아 심판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아합은 여기저기 물을 찾기 위해 돌아다닙니다. 이때 엘리야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오바댜 앞에 나타나 아합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라고 합니다. 엘리야와 아합이 만나면서 이제 본격적인 여호와와 바알 사이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전쟁은 말의 전쟁으로 시작하여 불의 전쟁으로 마칩니다.
엘리야의 아합의 논쟁(16-18)
영적 전투는 성도에게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매일 접하는 삶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투하는 군사, 전투하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만큼이나 세상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려는 노력을 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고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16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18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16-18)
엘리야의 명령을 받은 오바댜는 가서 아합을 만났고, 그에게 엘리야의 말을 전달해줍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자마자 ‘이스라엘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라고 부릅니다.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엘리야의 선언 이후에 가뭄과 기근이 왔기 때문에 엘리야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아합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간 아합은 재앙의 원인을 엘리야에게 돌리고 백성들의 원망을 잠재우기 위해 엘리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 죄가 재앙의 원인임을 분명하게 밝혀준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반박에 아합은 대답을 못하였고, 둘의 논쟁은 엘리야의 승리로 끝납니다.
자신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사이의 대결을 제안(19-20)
성도는 하나님을 거절하며 헛된 신을 섬기는 세상과의 영적 전투 가운데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고 노력을 하는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규칙적인 말씀 묵상과 일정한 기도 생활은 우리가 지녀야 할 필수적인 영적 무기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힘으로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 거짓된 가치관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19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20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19-20)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여호와의 선지자인 자신의 대결을 제안합니다. 아합에게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아달라고 요청합니다. 갈멜 산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자신이 대결을 하여 누가 참 신인지 백성들 앞에서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란 표현은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후견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제거하고 많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로 대체하여 우상의 나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방의 왕비 이세벨이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나라로 만든 이런 모습은 솔로몬 시대 수많은 이방 왕비들이 솔로몬에게 이방신들을 섬기게 한 것의 확장판입니다. 엘리야의 요구에 아합은 사람을 보내어 모든 이스라엘 자손과 선지자들을 갈멜 산에 모았습니다.
갈멜 산에 대결을 준비함(21-24)
세상 사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숭배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 영광을 함께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영광도 얻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도 얻으려는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고 변화되어 가정과 공동체도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길 수 있도록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21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2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20-24)
엘리야는 갈멜 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언제까지 절뚝거리며 걷는 것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며 양쪽 신을 섬길 것이냐고 질타합니다.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왔다갔다 갈피를 못 잡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질책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와 바알 중에 참신이라고 생각하는 쪽을 따르라고 요구합니다.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을 내 앞에 두지 말라고 하셨고 여호와만이 온 세상의 참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셨기에 여호와와 바알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말에 백성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엘리야의 주장은 이세벨이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들여오기 전에는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분열된 것도 우상숭배 때문이고, 북이스라엘에 반역이 끊이지 않는 것도 왕들이 여로보암의 우상숭배 죄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선지자의 입을 통해 지적받고 경고를 들어왔기에 엘리야가 한 신만 선택하라고 요구할 때 아무 말도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반응은 여기까지였고, 여전히 둘 사이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이제부터 누가 참 신인지 알아보는 제사를 드리자고 제안합니다.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 450명이 각기 송아지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않은 상태로 둔 후, 각 선지자가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른 후 불을 내려 응답하는 신을 참 신으로 인정하자고 제안합니다. 살아있는 참 신이라면 자기 선지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불을 내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제안에 백성들은 모두 좋다고 찬성합니다. 그들도 참 하나님의 권능과 기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알 제사장들의 실패(25-29)
성도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당당함은 자신의 됨도미이나 재산이나 실력이나 인격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확신만으로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자랑하며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세속주의와 혼합주의가 팽배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5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25-29)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그쪽이 인원수가 많으니 송아지를 택한 다음 먼저 제사 준비를 하고 그들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절대 불은 붙이지 말라고 합니다. 엘리야의 말을 따라 바알 선지자들은 송아지를 가져다 잡고, 아침부터 한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바알은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바알의 선지자들은 제단 주위를 절뚝거리며 뛰기 시작합니다.
‘뛰놀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절뚝거리다’, ‘다리를 절다’라는 뜻으로, 21절의 ‘머뭇거리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백성들이 둘 사이에서 절뚝거리는 모습이 바알 선지자의 모습을 닮은 것임을 보여줍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제단 주위를 돌면서 소리 지르고 춤을 추고 격렬한 행동을 하는데, 이는 자기 신의 관심을 일으키기 위한 행동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춤을 추며 부르는데도 정오가 될 때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더 큰소리로 신을 부르라고 조롱합니다. 엘리야는 아무 응답이 없는 것에 대해 신이 묵상하고 있든지, 아니면 잠깐 신전에서 외출을 했든지, 다른 곳을 다니고 있는 중이라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혹 잠이 들었으면 깨워야 한다고 조롱합니다. 외출이나 여행 중이라 듣지 못한다는 것은 바알 신은 공간적으로 제약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며,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과 대조됩니다. 잠들었으니 깨워야 한다는 것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과 대조됩니다.
이런 엘리야의 조롱은 바알 신이 장소적 제약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귀가 어두워 깊은 생각에 빠지면 백성들의 소리를 못 듣고, 신체적으로 연약하여 잠을 자야 하는 제한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바알 신화에 따르면 바알은 삶과 죽음을 반복합니다. 봄에는 살아나서 세상을 풍요롭게 하지만, 모트의 공격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면 지하 세계에서 일정 기간을 보내야 하는데, 이때가 겨울입니다. 그러다 다시 살아나서 세상으로 오면, 다시 봄이 시작되는 순환적 신이기 때문에, 바알은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무 응답을 못하는 바알이 참 신이 아님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조롱에 자극을 받은 바알의 선지자들은 더 큰소리로 바알을 부르며 규례를 따라 피를 흘리기 위해 몸에 상처를 내었습니다.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는 의식은 고대 근동 종교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며, 신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소리 지르고 춤추고 몸에서 피까지 내면서 저녁 소제 드리는 시간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떠들었지만, 바알 신은 아무 응답도 없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의 이름을 불렀고, 모든 수단을 간구하며 광란의 시간을 보냈지만, 바알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그토록 애타게 부른 바알은 응답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신은 가짜 신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아침부터 지켜본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바알이 가짜 신이라는 것을 목도하였습니다.
참 하나님인지 거짓 우상인지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의 음성에 응답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작은 소리에도 응답하시고 부르짖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알과 같은 우상과 달리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나 자신이 바라는 무언가를 예배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예배 대상이 누구인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는 세상에서의 영적 전쟁 중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헛된 유혹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당당히 세상과 맞서는 믿음의 기개를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