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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 달이 되어갑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산 사람은 계속 이 땅에서의 삶을 이어가야 합니다. 서로 껴안아주며 보듬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우리는 주어진 시간들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아픈 만큼 딛고 일어설 용기와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슬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서로 노력하며 현실의 방안들을 다져나가야 합니다. 잊으라고 강요해서도 안 되고 덮으라고 윽박질러서는 더욱 안 됩니다. 정신적 심리적 안정을 찾도록 긴 시간 참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까지 이웃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오랜만에 거리응원을 봅니다. 여름날의 뜨거움은 없어도 하나 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들을 주워 모아 서로 꿰매주며 하나로 모읍니다. 아직 승리의 나팔은 없어도 기대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성도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의 아픔 슬픔을 날려버릴 한 방을 기대하며 주말을 보냅니다. 우리 모두 마음도 몸도 건강하게 주말을 보내고 이 한 달을 보내기 바랍니다. 멋진 성탄절 선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승리의 나팔소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헌 달을 보내고 새 달을 맞는 한 주간이 될 것입니다. 모두 행복하기를 빕니다. ㅎㅎ --- *)*
2022년 11월 26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도 말찌니라” (신명기 5 : 20)
<자백>
‘고통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하기는 우리가 무엇인가 좋은 것을 얻으려면 그만한 수고가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고생하지 않고 얻은 것은 그만큼 쉽게 자신의 손에서 벗어납니다. 내가 수고해서 번 것과 그냥 얻은 것과는 소비하는 데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영어 속담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Easy come, easy go.' 쉽게 들어오면 쉽게 나간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지는 아리송합니다. 유망한 IT기업의 대표 ’유민호‘에게 유능한 변호사 ’양신애‘가 해준 말입니다. 유민호는 기혼자입니다. 그럼에도 ’세희‘라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몰래 함께 지냅니다. 출장을 핑계로 따로 자기들만의 시간을 만들어 외도를 즐기는 것입니다.
사건과 이야기 구성을 위해 외도라는 도구가 들어온 것뿐입니다. 돈이 있고 그만한 자리를 가지고 있으면 소위 바람피우는 일이 쉬울까요? 왜 다른 상대를 찾을까요? 결혼할 때 사랑은 없이 정략적으로 해서 다른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죄입니다. 물론 진정으로 사랑해서 본처와 이혼을 강제하고 결국 새롭게 맺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깨집니다. 아마도 도덕적 약점을 가지고 진행되는 사랑이기에 성취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무튼 숨어서 연애하다가 사고를 맞습니다. 그리고 그 사고 때문에 외도가 들통 날 것을 두려워하여 숨기려하다가 난관에 봉착합니다.
사고의 목격자가 나타납니다. 도무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분명 사고 당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승용차와 운전자를 함께 은닉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목격자라는 사람이 연락을 해온 것입니다. 돈 10억을 요구하면서 말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일단 돈을 주고라도 입을 막아야 하고 나아가 그가 누구인지 확인을 해두어야 합니다. 협박은 민호와 세희 두 사람에게 똑같이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지정한 호텔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민호가 돈 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호텔 밖에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립니다. 뭔가 일이 잘못되었나 싶어 민호가 문을 열고 나섭니다. 그런데 뭔가에 떠밀려 쓰러집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세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습니다. 가지고 온 돈이 그 위로 흩어져 있습니다. 그 때 경찰이 들이닥칩니다. 어김없이 살인범으로 현장에서 체포됩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습니다. 방안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시신으로 한 사람은 살아서 시신을 안고 울부짖습니다. 창문도 잠겨 있고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민호는 자기가 살해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누가 어떻게? 조사 과정에서 일단 풀려나기는 했지만 재판은 계속 진행 중입니다. 민호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합니다. 유죄도 무죄로 만들었다는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합니다. 그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날 별장에서 두 사람이 밀회를 마치고 나옵니다. 승용차를 몰고 한적한 2차로를 달리고 있는데 도로 중앙에 사슴이 서 있습니다. 갑자기 손잡이를 틉니다. 반대 차선으로 들어서는데 그 차선으로 다른 승용차가 달려듭니다. 역시 반대 차선의 승용차가 갑자기 틀면서 저 앞으로 달리더니 길가 나무를 들이받습니다. 연기를 피우며 정차합니다.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고의가 아닌 비록 사고이지만 상태를 보아야 하고 운전자가 어떠한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려서 사고 차량으로 갑니다. 운전자를 들여다보니 머리에 상처를 입은 듯합니다. 문을 열고 그를 흔들어봅니다. 아직 젊어 보이는 운전자는 이미 죽은 듯합니다. 당황할 수밖에 없지요.
고의성이 없는 사고일 뿐입니다. 바로 신고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합니다. 현장을 조사해도 어렵지 않게 밝혀질 것입니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사회적 명예와 관계가 있는 일이고 특히 민호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밝혀져서는 안 됩니다. 조금 후에 한 차량이 다가옵니다. 중년의 한 사람이 다가와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뭔 일인지 물어봅니다. 사고가 있었음을 말하고 보험회사와 연락 중이라고 대답하여 탈 없이 그냥 지나가도록 합니다. 이상이 민호가 양신애 변호사에게 숨겨진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입니다. 진실을 알아야 도울 수 있다는 말에 꺼낸 이야기입니다. 경찰에게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겠지요.
이야기의 핵심은 민호와 양신애 변호사의 주고받는 사고 사실의 구성입니다. 어떻게든 무죄를 입증하고 싶어 하는 민호와 진실을 찾아내려는 변호사의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입니다. 변호사의 추리가 다 진행되는 듯하더니 마지막에 이르러 이야기를 뒤집어 생각해봅니다. 바로 이 부분이 묘미입니다. 그리고 과연 진실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있는 자의 힘을 다시 확인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민호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세상은 평등하나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에게 기울어져 있고 없는 자에게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외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자백’(Confession)을 보았습니다.
예언의 목적
사람이 살아가며 가장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의 미래입니다. 그러나 가장 알기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역시 자기 미래입니다.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사회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들의 미래는 모릅니다. 그러나 알고 싶습니다. 알고는 싶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저러한 방법을 동원하여 예측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대비를 합니다. 우리 개인들이 미래를 대비하여 행동을 취하는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보험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기대를 많이 합니까, 불안을 많이 느낍니까? 그러면 질문을 바꾸어 봅니다. 보험을 왜 들지요? 기대와 소망이 있어서 보험에 가입하는 것인가요, 불안해서 가입하는 것인가요? 만약을 위한 대비, 그것이 보험입니다. 그것은 기대보다는 불안 때문에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궁금하지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내년 입시에 합격할는지 못할는지, 졸업 후 취업이 곧 될는지 안 될는지, 내년 진급 대상에 들기는 하였는데 과연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내년에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는지 아니면 사고라도 당할는지 등등 생각하면 불안합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경우 그 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잘 극복하기 위하여 보험에 가입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사람의 약점을 빌미로 장사하는 무리도 있습니다. 점쟁이들이지요. 요즘도 때가 되면 이름 난 집에는 북새통을 이룬다고 듣습니다. 선거 때, 이번에 출마하면 가능할까요? 한번 출마할 때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갑니까? 그러니 감히 나서기가 두렵습니다. 자칫 집안 거덜내는 일이니까요. 그렇다고 야망을 꺾을 수도 없고 해서 미래를 점쳐 보고 싶은 것입니다. 입시 또한 얼마나 고달픈 일입니까? 한번 낙방하면 다시 1년을 재수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또 가능성과 방향을 점쳐 보고 싶지요. 이 장사는 반반입니다. 되든가 안 되든가. 때로는 교회를 다닌다 하는 사람들도 궁합을 본다 하지요. 그것뿐입니까? 이사할 때는 손이 있다 없다 따지고 있습니다. 뭐라고 참견하면, ‘좋은 게 좋지 뭘 그래?’ 그럽니다. 그게 좋은 겁니까? 하나님이 뭐라 하셨는데요? 신 18 : 10 - 12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을 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쫒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이유 중 하나가 그들 가나안 족속이 바로 그런 짓거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14절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아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예언이라면 환장해서 따라다니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예수 점쟁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예수 팔아 돈 버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의 미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래 살고 잘 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 6 :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라고요?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거지 나사로가 부잣집 대문에서 빌어먹는 것도 그냥 두십니다. 마음 같아서는 자리를 바꾸어주고 싶지 않으시겠습니까? 세상에서 악한 자는 배 두드리며 호의호식하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은 배 주리며 얻어먹기 힘들게 산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 그겁니다. 그게 하나님 하시는 일인가요? 하고 대들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불행하였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생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불안해합니다.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더욱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미래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성경에는 예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하나님이 그 때만 예언하셨느냐? 지금도 하신답니다. 그래서 환상을 봤다는 둥, 말씀을 들었다는 둥, 기도하면 보여주신다는 둥 말합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흔들립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바로 그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벌써 오래 되었군요. 한창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종말론자들의 예수 재림 사건을 기억하리라 생각합니다. 년 월일 시까지 정하여 재림 예수 맞이한다고 모두 소복 차림으로 자정을 기다렸던 그 때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반 걱정 반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가 벌써 2십 년도 넘었습니다. 저도 당시 가까운 한 사람을 그 미혹에서 돌이키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막무가내였지요. 자기도 보았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답니다. 그런데 어찌 믿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 때 그들이 내세운 성경 구절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바로 암 3 : 7절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은 바로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그 종 선지자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 재림이 일어나기 전에 자기네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글쎄 무슨 환상을 보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중에는 직접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을 보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뜻대로 풀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마귀 편에 서는 꼴이 됩니다. 특히 예언의 말씀은 주의해야 합니다. 벧후 1 : 20 - 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구약 아모스가 예언서라는 것은 다 압니다. 그러므로 암 3 : 7절 말씀도 역시 조심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자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분명 “경의 모든 예언은 ---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언’이란 말 자체도 ‘미리 예, 말씀 언’입니다. 즉 미리 말씀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다시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에게 먼저 보이신다는 것이지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알려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그 다음 그것을 행하신다는 말씀이지요. 바로 그 먼저 보이신 것을 기록한 것이 예언서입니다. 성경의 예언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가장 잘 아는 예언의 말씀을 봅니다. 사 7 :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는 예수님 오시기 약 700년 전의 선지자입니다. 당시 하나님은 그 종 선지자에게 보여주십니다.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을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가 살던 시대에 일어날 사건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다만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먼저 보고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이 놀라운 사건을 하나님은 아무도 모르게 얼렁뚱땅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미리 당신의 종 선지자 이사야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입니다. 그래서 예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것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것이 예언서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종을 택하여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하여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그것을 보고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예언서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종말론자들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이해가 되지요? 그들은 하나님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자기네 입장에서 보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하고는 전혀 딴판으로 간 것입니다. 예언 때문에 환상을 따라다니다가는 마귀가 주는 환상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앞으로의 일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주님 재림에 대해서도 당연히 예언하셨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제자들이 기록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신약성경에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무엇을 보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넘어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주셨는데 무엇을 더 만들려고 합니까? 그것은 월권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을 더 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씀하셨나, 그것을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왜 성경을 주셨습니까? 표현을 좀 다르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봅니까? 성경을 읽는 이유 또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재미있습니까? 심심해서 읽습니까? 물론 옥중에서 다른 읽을거리는 없고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간증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이지요. 이렇게 자유로운 생활 속에서 일부러 성경을 손에 쥔다는 것은 무엇인가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재미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성경이 흥미로운 부분들도 있지만 웬만해서는 그렇게 쉽게 읽을 만한 책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힘들게 성경을 읽는가 하는 것이지요. 분명 목적이 있겠지요. 옛날 유대인들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오늘처럼 성경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읽은 사람으로부터 많이 들었겠지요. 이렇든 저렇든 성경을 가까이 하려고 애썼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대신 말씀해주십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에서 무엇을 얻으려 성경을 본다고요? 영생을. 그렇지요? 성경 즉 하나님 말씀 속에 영생의 길이 제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성경을 주셨습니까? 영생을 얻으라고. 맞습니까?
다시 질문해 봅니다. 만약 최초의 하나님이 부르셨던 사람,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동산 중앙에 두 나무가 있다.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는다. 그러면 반대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내내 살겠지요. 죽지 않고 살겠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아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구태여 그런 주의를 주실 필요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먹거나 말거나 죽거나 말거나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이 죽지 않고 영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의를 주신 것이지요. 만약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고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어 그렇게 계속 살았다면 성경이 필요했을까요? 필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미 영생을 이루고 있는데 뭐하려 성경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등졌고 범죄함으로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구원하여 그를 통해 당신의 피조세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가 바로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담이 범죄하지 않고 계속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었다면 죽지 않고 영생을 살았겠지요. 그렇다면 천국은 어디였습니까? 다시 질문합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이 어디입니까? 예를 듭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하려면 어떤 조건이 성립되어야 합니까? 국민, 주권,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니 영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 24 : 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아멘! 그러면 오직 하나 주권이 문제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시 139 : 7 - 8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보이는 곳이든 보이지 않는 곳이든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하나님 나라요 천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눅 17 : 21절에서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 바로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임무를 마치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본래의 영계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마 약속하셨습니다. 예언이지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종 선지자를 통해서 먼저 보여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록하였지요. 예언서입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것도 당연히 먼저 보여주셨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먼저 보았고 그것을 성경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무나 또는 아무 때나 푸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봅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장래의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그대로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단 12 ;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 하십니다. 다니엘 입장에서는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8절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삽나이까”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이 이룰 때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9절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잔소리 말고 너는 가기나 하라 그 말씀이지요.
예언은 언제 풀립니까? 때가 되어야 풀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전에는 보고 기록한 자도 모릅니다. 사도 요한이 미리 보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2천 년이 흘렀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 예언을 믿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예언의 말씀을 언제 믿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언대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오고 보니 당신의 백성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요 1 : 10 - 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실제로 그랬지요. 그러므로 무엇이 참 믿음입니까? 예언이 이루어졌을 때 그 이루어진 실상을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13 : 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일이 이루기 전에 말씀하신 것이니 예언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언제 믿게 하려 한다는 말씀입니까? ‘일이 이룰 때에“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믿음은 예언이 성취될 때 성취된 사건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란 뜻입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이 하실 일을 그 종 선지자에게 미리 보여주고 그것을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구약에도 예언이 있고 신약에도 예언이 있습니다. 그 예언은 기록 당시 기록한 사람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때가 되어야 이루어지고 그 제서야 밝혀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언 받았다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예언은 이미 하나님께서 다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때가 되어 그 예언이 이루어질 때 이루어진 실상 그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 선택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 하는 말에 미혹당하지 않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 하실 일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예언이 지금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아는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의 믿음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 예언을 믿는 것이 그 하나요, 다음에는 그 약속이 이루어져 나타난 실상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 즉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가 오시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에게 메시야의 오실 곳을 가르쳐주면서도 자기들은 꼼짝하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언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뱀이요 독사요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요 8 : 44).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네 생각일 뿐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우리는 어떤가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덧 2천 년이 지났습니다. 혹시 오셨는데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나요(마 24 : 30)?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 소리를 기다리고 있나요(살전 4 : 16)? 그러면 살전 5 : 2 - 3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4 : 42 - 4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면 오셨는지 안 오셨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 초림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신 것을 몰랐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소수의 제자가 믿고 따랐습니다. 오늘날은 어떨까요? 예수님이 미리 걱정하셨지요. 눅 18 : 8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시니라” 과연 그 때, 정작 믿음이 필요한 그 때, 믿음을 가진 자가 몇 명이나 되겠느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재림 때도 초림 때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을 경고하신 말씀이지요.
영생, 천국에 대하여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예언하셨고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비유의 말씀으로 감추어 두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다고요? 원수 마귀가 천국에 들어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마 13 : 11). 우리 집 현관을 여는 비밀번호를 아무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식구, 우리 자식들에게만 가르쳐줍니다. 우리 집에 아무나 들어와서는 안 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에 하나님 백성, 하나님의 자녀만 들어가야지 마귀 자식들이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비밀번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만 허락하셨습니다. 만약 그 번호를 모른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그 비밀에 대하여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고 가신 내용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사도와 제자들을 통하여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서신서에도 일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시’가 무슨 뜻입니까? ‘펼쳐서 보여준다’하는 뜻입니다. 계시 중에서 특히 요한계시록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계 1 :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누구의 계시라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주님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 다시 오실 때의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모르겠다고 나자빠지면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열쇠인데 포기해야 되겠습니까? 알아야 영생인데 아는 것이 교만이라고요? 무슨 어불성설입니까? 문제는 이것이 예언이고 비밀이기 때문에 비유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풀어야 하겠지요. 여태 보아 왔지만 열쇠는 성경 속에 이미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들어가야지 엉뚱한 상상을 하면 그것은 사람의 계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성령의 도우심을 입고 이 즐거운 여행을 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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