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 28절).
유대인은 자신들의 도덕성을 자랑하고 이방인의 관능적인 행위를 가증하게 여겼다. 로마 제국의 통치로 팔레스틴에 들어오게 된 로마 장교들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실족케 하는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이방인들과 함께 이교의 습관과 음란과 방탕의 홍수가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가버나움에서, 로마 군의 장교들은 정부(情婦)와 함께 유원지에 나타나 산보하였으며, 그들의 유람선들이 잔잔한 물위를 미끄러져 갈 때 자주 환락의 소리가 호수의 적막을 깨뜨렸다.
60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엄중히 책망하는 말씀을 듣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 자신의 마음에 있는 악을 폭로하시는 말씀을 들었으니, 그 놀람이 어떠했겠는가!
예수께서는 아무리 은밀한 중에라도 즐겨 악한 생각을 품을 때는 죄가 아직도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의 심령은 여전히 심한 증오와 죄악의 속박 가운데 놓여 있다.
불순한 장면을 상상함으로 쾌감을 느끼는 사람, 악한 생각을 품고 호색적인 표정을 짓는 사람은 드러난 죄 속에서 그것으로 인한 수치와 마음을 찢는 슬픔의 고통을 느끼며 그가 영혼 골방에 감추어 둔 악의 참 특성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이 유혹에 빠져 가증한 죄를 짓게 되는 때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악을 새로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숨겨 놓았거나 잠재해 있는 것을 나타내거나 명백히 하는 것에 불과하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잠언 4장 23절; 23장 7절)하다.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내 버리라”(마태복음 5장 30절).
병이 몸에 퍼져 생명을 빼앗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은 자신의 오른팔이라도 잘라내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61 영적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타락하여 사단에게 사로잡힌 영혼들은 복음을 통하여 구속(救贖)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려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죄의 필연적 결과인 고통에서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타락하여 훼손된 영혼은 순결해지고 변화되어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시편 90편 17절) 옷 입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로마서 8장 29절)아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린도전서 2장 9절). 오직 영원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 맞이할 영광스러운 운명을 드러낼 수 있다.
이 높은 이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혼을 넘어지게 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죄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의지를 통해서이다.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을 눈을 빼 버리거나 손을 베어 버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평생을 병신이나 절뚝발이로 보내기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자주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병신이 되고, 상처를 입고, 절뚝발이가 되더라도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좋다고 말씀하신다. 그대가 재난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최고의 유익에 이르는 길이 된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교통함으로써만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면, 목숨은 잠시 부지할지 모르나 생명은 소유할 수 없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디모데전서 5장 6절).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만 그분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62 예수께서는 자아의 굴복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받아들일 때에만 당신께서 지적해 주시는 숨은 죄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죄는 마음속에 감추고 사람의 눈에서 숨길 수 있다. 그러나 그러고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만일, 자아에 매달려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거절한다면, 사망을 택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죄가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하나님은 그것에 대하여 사르는 불이 되신다. 그러므로 죄를 택하고 죄에서 분리되기를 거절하면 그대는 죄를 사르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함께 불살라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은 희생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고상한 것을 위하여 저속한 것을, 신령한 것을 위하여 세속적인 것을, 영원한 것을 위하여 사라져 없어질 것을 버리는 희생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우리가 의지의 활용을 통해서만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를 순결하고 깨끗하게 된 상태로 다시 돌려받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또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과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실 수 있도록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것을 그분과 연결시켜 놓아야 한다. 강퍅하고 고집 센 자들에게는 이 같은 굴복이 참으로 쓰라리고 고통스러울지 모르나 “너희에게는 유익하니라.”
야곱은 절름발이가 되어 언약의 천사의 품에 속절없이 안기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정복케 하는 믿음의 승리를 알았으며 하나님의 왕자의 칭호를 얻었다. 에서의 무장한 군대가 그의 앞에서 조용해지고, 왕의 혈통으로 난 교만한 후계자인 바로가 그의 축복을 받기 위해 허리를 굽힌 때는 그가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창세기 32장 31절) 때였다.
우리의 구원의 주께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히브리서 2장 10절) 되신 것처럼, 믿음의 자녀들도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히브리서 11장 34절)였다.
63 마찬가지로,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이사야 33장 23절),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스가랴 12장 8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태복음 19장 3절).
유대인들은 지극히 사소한 허물을 가지고도 아내를 버릴 수 있었으며, 버려진 여자는 그때부터 재혼의 자유를 허용 받았다. 이러한 풍습은 큰 불행과 죄를 초래하였다.
예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결혼 서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혼인 관계가 깨어질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분께서는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 바리새인들이 이혼의 합법성에 관하여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창조 시에 제정된 결혼 제도를 상기시키셨다. 그분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9장 8절)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시고 심히 좋다고 선언하신 에덴의 복된 날들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결혼과 안식일은 그때에 시작되었고, 이 두 제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창조주께서는 거룩한 부부의 손을 혼인으로 연합시키실 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장 24절)는 말씀을 주심으로써, 아담의 모든 자손을 위한 결혼의 법칙이 마지막 때까지 유효함을 선언하셨다. 64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친히 좋다고 선포하신 것은 인류를 위한 최상의 축복과 향상의 법칙이었다.
인류에게 지키도록 위탁된 하나님의 좋은 선물들 중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결혼 제도도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었다. 그러나 그 제도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결혼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곧 그분께서 갈바리의 희생으로 구속한 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우호적이고 거룩한 연합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분께서는 “두려워 말라…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이사야 54장 4, 5절),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예레미야 3장 14절)고 말씀하신다. “아가서”에서 우리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가 2장 16절)라고 말하는 신부(新婦)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신부에게 있어서 “만 사람에 뛰어난”(아가 5장 10절) 그분께서는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아가 4장 7절)라고 당신의 택하신 자에게 말씀하신다.
그 후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와 신령한 몸의 구주가 되시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삼으심으로써 그를 아내의 보호자와 또 가족을 함께 묶는 가정의 띠가 되게 하셨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홈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니”(에베소서 5장 24~28절)라.
65 그리스도의 은혜, 오직 이것만이 이 제도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인류의 축복과 향상을 위한 제도가 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가정들은 연합과 화평과 사랑을 통해 하늘의 가정을 대표할 수 있다.
그리스도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사회의 형편을 보면 이 거룩한 관계에 대한 하늘의 이상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정과 기쁨을 바라던 곳에서 고통과 실망을 발견한 자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위로를 준다.
그분의 영께서 나누어 주실 수 있는 인내와 온유는 비참한 운명을 호전시켜 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거하는 마음은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남의 동정과 배려를 바라는 욕망이 사라질 것이다. 또, 하나님께 마음을 굴복시킴으로써 인간의 지혜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지혜가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통하여, 한때 냉랭하고 벌어졌던 마음들이 세상의 줄보다 더 튼튼하고 오래 견디는 줄, 곧 고난의 시험을 견디어 낼 사랑의 황금줄로 연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