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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신앙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이천우
말씀과 기도
사도행전 6장 1-7절 / 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일반적인 기도 이해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숨 쉬는 호흡’이라고 정의하였는가 하면, ‘하나님과 갖는 대화’라고도 하고, ‘하나님과 갖는 사귐(교제)’라고 하는 등으로 정의하며,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으며(눅 6:12),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시기도 하셨고(눅 9:28),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눅 18:1),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을 것을(눅 21:36) 말씀하셨다는 등 등을 들어서, 그리고 사도 바울이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였는가 하면(골 4:2),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권면했다는 것을 들어서(살전 5:17) 항상 기도에 힘쓸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기도는 과연 숨 쉬며 호흡하듯이 언제나 기도에 있어야 하는 것이며, 항상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요. 그리고 기도에 있으면 무엇을 구함에 있는 것인지요. 이는 기도에 있었던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하여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기도
하나님께서 구함에 있게 하신 것에 있은 기도 : 성경에 기도가 있었던 기록은 워낙 많아서 실예로는 한 곳만 들어보겠습니다.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의 기록을 최초로 보는 것은 아브라함에게서 입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창 20:7, 17). 이처럼 보게 되는 아브라함의 기도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를 이을 후사를 주시는 것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과 그 일을 해 나가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주가 되실 것이며, 그럼으로써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게 하실 것을 언약하시고 이를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따름에 있게 해 주시는 것에서였습니다. 그에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실 언약을 신실히 이루어 가시는 것에서 그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게 해 주시는 데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게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이 100세에 아들을 보게 하실 것을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은 그에게 아들을 주실 때까지 세월이 하염없이 흐르자 여러 방법을 궁리하였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거듭 알려주었습니다. 조카 롯으로 자신의 기업을 이을 것을 염두에 두었을 때도, 다메섹 사람으로 날 때부터 아브라함의 종으로 일한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까지 할 때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권유로 사라의 몸종 하갈을 첩으로 맞아들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가나안 남부 지방으로 이주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 그랄에 가서 살 때 전에 기근으로 애굽으로 내려가 머물러 있을 때 겪었던 사건과 유사한일을 다시 한 번 겪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아름다운 여인이므로 그곳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고 아내 사라를 빼앗을 것을 염려하여 사라와 의논하기를 남매 지간으로 하기로 하여 사라를 누이라고 하였으나 그럼에도 사라의 아룸다움은 소문으로 퍼지고, 신하로부터 사라의 아름다움을 들은 아비멜렉 왕이 사라를 왕궁으로 불러들이는 사건이 있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에 그의 믿음을 강화하여 굳건히 해 나가시는 일로 있는 하나님의 섭리로 준비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아비멜렉 왕에게 빼앗길 위기 속에서 아비멜렉 왕에게 나타나셔서 사라를 지켜 아브라함에게로 돌려보내게 하시며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일러주면서 그를 위해 아브라함이 기도할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동안 아비멜렉의 모든 여인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태를 닫으신 때문이었던 것을 이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그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려 다시 태를 열어 주시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아비멜렉의 아내와 그의 여인들의 태를 다시 열어주심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자신을 그랄 지방에 있게 해 주셨는지, 그리고 왜 아비멜렉 왕의 여인들이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태를 닫아 놓으셨다가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다시 태를 열어주시는 일을 하셨는지를 깨닫습니다. 지금 자신의 아내인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태를 닫으신 때문이며, 약속하신 자손을 주시기 위하여 또한 태를 여실 것을 말입니다. 하여, 그동안 있어왔던 모든 일을 비롯해서 이번의 아비멜렉 왕과의 사건을 통해서 이 모두가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과 맺으신 언약의 성취를 이루실 것에서 사라에게 아들을 주실 것임을 믿음으로 바라봄에 있게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구함에 있은 많은 기도는 사건에 따라서 그 내용에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해 나가실 일을 알게 하시고 그 일을 하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르게 하시는 것에 있었습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보게 되면서 이를 찬양하며 하나님을 드높이고 감사하며 기쁨으로 깊은 신앙고백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기도에 있어온 그리스도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이해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주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을 알려주시고 있으니 생명 얻는 구원이 죄 사함에 의해서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구속주로서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신 기도에 있으셨으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감에 있는 기도에 있으셨으며, 그렇게 해 나가시는 것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실 것에 온전히 희생제물이 될 기도에 있으셨습니다.
사도들의 기도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수행하여 주께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주님의 교회를 세워나갈 것에 성령의 의존과 인도를 따름에 있는 기도에 있었습니다. 또한 세워진 교회에 신자들의 믿음이 복음의 진리의 이해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람에 있게 하는 말씀의 증거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6장 1-7절에서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선출에 있는 이유를 내세운 것이 이것입니다.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세우신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 제자가 많아짐으로 유대 땅 본토 출생인 히브리파 유대인과 이방 지역에서 출생한 헬라파 유대인 모두를 한 몸에 안고 보살핌에 허점이 생기므로 원망이 생겼는데, 이는 곧 사도들이 그들 모두를 살피는데 일이 과중해져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 보니 사도들은 설교에 집중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하는 것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를 인식하고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서 그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게 하고 그들에게 성도들을 살피는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여 사도들은 설교하고 가르치는 말씀 전하는 본연의 자리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또한 기도에 있을 것을 말하였습니다. 온 무리는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으며,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여 교회 직분자로 삼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들의 기도는 교회 안에서 다른 복음이 말해지는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므로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에 이해를 바르게 가지고 주께 믿음을 굳건히 가져나감에 있는 기도에 있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에게서 보는 기도는 그들이 맡은 직무인 복음 전파와 이 복음의 설교와 가르침을 힘써 수행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였으며, 또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의 믿음의 장성과 강화, 그리고 교회가 해 나가야 할 선한 사업에 온 성도가 힘써 참여하여 결실에 있을 수 있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에 있는 기도에 있었으니 이는 곧 온 교회가 갖는 기도였습니다.
말씀과 함께 하는 기도에 있은 초대교회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는 기도에는 무엇을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가 명확합니다.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하여’ 구하는 기도에 있지 않았습니다. 목사는 자신이 맡은 바인 설교하고 가르침에 힘써야 하며 또한 그럴 수 있기 위해서, 이것이 자기의 힘과 의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지식의 은혜를 힘입어서 할 수 있기 위하여 또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하여 말씀과 함께 기도가 따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까닭이 말씀에 전념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와 함께 하는 직분자들은 어떤 태도에 있어야 하겠는지요. 각각 자신들이 선출되어 맡은 바인 장로와 집사의 직무를 충성되이 수행하는 일을 함에 있어야 할 것이며, 그 일을 자기의 힘과 의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음에 의해서 할 수 있기 위하여 또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원망과 불평 없이 사랑에 하나 되어 존속해 나가야 하며, 다른 복음을 말함에 있는 사이비를 비롯한 이단으로부터 진리와 성도들의 믿음을 보호하고 지킴으로써 의롭고 거룩함으로 교회가 존속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 따라서 목사와 교회 직분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성도들도 ‘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어 그 내용을 잘 이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뜻을 잘 깨달음으로 믿음을 잘 가져나갈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구함에 있는 기도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없이 말씀과 함께 할 수 있겠는지요. 기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고, 기도 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기도 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고 그 뜻을 깨달을 수 있는가요. 기도 없이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알아 들음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고 그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기적은 기도가 함께 하는 것에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오직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에서 하늘로부터 주어진 말씀은 그 뜻을 지닌 문을 엽니다.
혹자는 자신의 믿음이 예전만 못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하여, 자신의 믿음이 예전만큼 있지 않다고 여기는데, 그리고 실상 주께로부터 마음이 멀어져 있기도 하고, 마치 주님에게서 떠난 자인양의 모습에 있기도 하는데, 어떤 모양의 상태이든지 간에 그 원인은 첫째는 말씀과 함께 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말씀과 함께 있어나가고자 기도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서 이유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찾을 수 있는가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 성도의 공적인 삶 – 교회생활 –에서 기도 없이 살게 되는가?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2:1-4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할 것을 권면하면서, 그 실예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기도에 있게 하신 것은 위정자들로 하나님의 자비가 행하여질 것을 구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함에 조용하고 평화로울 수 있기를 하나님께 구함에 있는 것으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선한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와 삶에서 있는 기도
성도의 기도는 교회로 회집하여 예배에 참여함에서 주께 한 믿음으로 있는 온 형제와 자매가 같은 마음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함의 기도에 있습니다. 이에 예배에 임박하여 옴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마음이 아무런 준비 없이 예배에 임함으로 예배에 임하는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은 어지럽고 혼잡한 상태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지는 은혜를 온전히 받기가 쉽지 않은 상태에 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예배에 임하기 전에 오시는 분들은 예배가 시작되기까지 예배를 통해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구함에 있는 기도에 있음으로써 마음의 준비에 있어야 할 것이지 그러하지 않고 부산한 상태에 있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성도는 예배에 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추도록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와서는 예배 참여에 있는 준비에 있도록 해야 할 것이며, 와서는 묵상하며 기도에 있어 예배에 경건히 임하는 자세에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예배의 참여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드는 것에 있기에 감사하는 마음에 있으며, 예배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는 영광에 있게 되는 것이기에 큰 기쁨을 가지고서 소홀히 하지 않고 한 말씀 한 말씀을 귀담아 듣고 마음에 새기며 여기에 담아 주신 뜻을 잘 헤아려 깨닫고 이를 따를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기도에 있게 됩니다. 성도는 이렇게 예배로의 부름을 받음에 있음에서 기도의 자세에 있어야 할 것이면서 이렇게 예배에서의 기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에게서 기도는 자신이 주께 믿음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하게 됩니다. 바울이 권면한 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에 있는 성도에게서 기도 또한 함께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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