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가 몽땅 까발리는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옛날 이야기지만 참으로 그때는 괴로운 시절이 있었기에
이제는 지나간 이야기이니까 써보려고 한다.
기억에 ... 나는 영주에서 김천 근교의 개령초등학교로 아버지가 전근을 하시게 되어 학교를 옮겼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내가 들었던 그때의 이야기는 울 아버지를 잘 보아주시던 경찰서장이 한분이
계셨다. 권 영섭 서장이라고 정말 내가 초등학교 다닐때 기억으로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 하여 주신분이셨다.
아마 울 아버지가 좋아서 였기에 나도 무척이나 귀여워 하여 주신 높은분이셨다. 경찰서장이셨으니까 말이다.
그 당시 나의 외삼촌이 경남 도경국장을 지나시고 있을때인데 이분은 나의 외삼촌과 같은 마을에서 자랐고
그런 인연으로 이 아저씨는 나의 아버지를 늘 가깝게 두고서 가족같이 지났다.
이렇게 아버지를 잘 돌봐주시던 분이 현직을 그만두시고 떠나면서 후임으로 오신분은 이런저런 연유로
나의 아버지가 꽤나 싫었던지 멀리 김천 근교의 개령면 소재지에 지서장으로 발령을 내어서 우리는 부득히 그곳
면 소재지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때가 영주 초등학교 4 학년 1학기 였을때다.
나는 그곳 개령에서 4 학년 1학기을 마치기는 하였지만 실제 그곳에서 학교 생활은 불과 3 개월도 안되었다
나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서 이사를 점촌으로 오게 되었고 호서남 초등학교에 4 학년 2 학기가 시작이 되면서
전학을 왔었다.
물론 낯선곳에 전학을 와서 적응하기가 다소 부담이 되기는 하였을지 모르나 이 정우라고 하시는 아주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나서 2 학기의 학교 생활을 잘 보내게 되었고 5 학년 1 학기를 마치고 나는 다시 신기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경찰 공무원이 셨던 아버지가 보직을 옮기게 되면서 이사가 잦게되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이 어려웠지만
성격탓이여서 그런데로 잘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당시에 신기 초등학교는 문경 시멘트 공장이 있어서인지 많은 학부모가 서울을
연고로 하여 이사온 가족이 많았고 생활 수준이 아마 지금의 점촌시 관활에 있던 학교중에서는 가장 교육열도
높았고 전체의 분위기가 시골 같지는 않았다는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에 문경군 교육청에서는 매년 시행하던 각 초등학교 대항 학예회가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연극을 비릇하여 많은 경연에 참석하였고 신기 초등학교는 타에 추종을 불허할 만큼 모든 학예 발표에서
1 등을 하였고 종합 우승을 한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아마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인지는 모르나 내가 다시 신기 초등에서 호서남으로 6 학년 2학기에 전학을 오면서
나의 학교 생활은 친구들로 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요즘말로 왕따가 되었다.
여기에 가장 나를 괴롭게 하는 주범 (?) 이라고 할수가 있는 친구중에 최종식이란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그때만 해도 키가 보통인 우리보다는 컸으며 아주 잘 생겼다. 공부도 잘했지만 가정도 부유하고
그런 저런 이유로 학교에서는 제일 대장짓을 하였다.
지금 여기서는 굳이 이름을 밝히지 못하지만 그 당시 종식이란 친구는 방과후 집으로 돌아오는 나에게
다른 친구를 불러서 꼭 싸움을 시켜서 나와 싸움을 한 친구가 참 많았다.
그 중에서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는 최 성덕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방과후에는 매번 싸움을 걸어와서 기차길 옆
논뚝에서 매번 싸움이 있었다., 물론 내가 이겨 본적은 없다.
내가 이길것 같으면 종식이란 이 친구는 어김없이 성덕이 친구의 편을 들어서 나로서는 어쩔수 없도록 한 기억이
오래 남아 있다.
이러니 학교 생활에서는 늘 내편이 없었고 외톨이가 되었지만 그 당시 나는 이런것이 왕따라는것을 몰랐다.
아마 종식이 친구는 학예 경연때 우리가 잘한것이 마치 나때문인가 싶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심심하면
그것을 이유로 괴롭히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그렇게 대장처럼 늘 행동하던 종식이 친구에게도 때가 왔다.
오래된 옛날이라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 학교에 새로 전학온 친구 노 태호가 있었다.
아마 대전인가 어디서 학교을 다니다 누님을 따라서 문경으로 이사를 왔는데 태호 친구가 종식이 맞수가
되었다. 제데로 만난것이다. 한번은 태호 친구와 종식이 친구가 싸움이 시작이 되었는데 태호가 칼을 들고
종식이와 붙은것이다.
결론은 칼을 빼어든 태호가 당연히 이겼고 그때부터 노 태호가 학교에서는 또 다른 대장이 된것이다.
아무도 노 태호 친구를 건드리지 않는다. 제대로 적수를 만났던 종식이 친구는 그후에 조용하였고 나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던것으로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서 지금 노 태호 친구를 만나면 옛날 그런 모습은 얼굴 어디에서도 찾아볼수가 없다.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이고 따뜻한 친구로 기억이 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창회에 자주 나오던 이 친구가 요즈음은 연락도 없고 무얼 하고 지나는지
모르겠다. 궁금하다.
그저 옛날 초등학교 시절을 떠 올리다 보면 그때가 그리워져 질때도 있다. 지나면 모든것이 아무일도
아닌데 왜 그리 그 친구는 나를 괴롭혔을까 ? 하는 그 생각을 의문으로 남기면서 ....
태호 친구가 생각이 나서 ... 이렇게 추억을 생각 해 보았다.
첫댓글 전철 속에서 읽다,
내려서 다 읽고 ...
태호 어른 다 됐지!
지금은....!!
기억이 나는구나
나도 예천서부국민학교 다니다가 선친께서 문경군청으로 발령이 나서 촌놈이 어리버리하고 지금도 그렇지만 어리숙하니
학교선택을 하려니 호서남과 점촌초등학교가 있는데 고종누나가 둘이나 호서남에 근무하니 이정우누나가 담임하던
반에 들어가 집에서는 누나 학교에서는 선생님 하던 기억이 나네 (누나가 매를 들면 선생님에서 누나라고 호칭이변경되네
나도 전학께나 다녔는데...한수위네~ㅎㅎ
4학년때 문경중학교로 전근오신 아버지 따라 호서남 초등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고
문경중에 입학 1학기하고 경주로 전학하여 중학교 졸업하고 다시 대구공고 입학,졸업
대학 졸업때까지 평균 3년 주기로 옮겨 다닌것 같네....
30년 전으로 거슬러, 일림이 친구가 재경 회장을 하고 있을 때, 노태호 그 친구가 나서서 동창회 활성화에 참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은데...나도 그 친구 보고싶네...한 번 보자카지 뭐~~
영식아~~전화 한 번 해봐라이~~
그 시절. 이 정우 선생님은 참으로 미인이 셨다는 기억이 있었어요.
몇년전에 식사을 하는 자리를 갖고 만났는데 연로하신 연세에도 여전히 고우시더라고....
용갑이 누님과 언제 같이 식사라도 하도록 자리 만들어봐요.
옛날 얘기하면서 담소가 될 그런 자리 만들어주세요.
고일림 회장님 서울을 떠나올때 인사도 못하고 내려와 미안합니다.
오늘 처음으로 인터넷을 개통하고 첫글을 씁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인터넷 문증 13회 사이트에 자주 방문 못했답니다.
솔직 담백한 글을 보고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느꼈답니다.
27여년간 서울 생활을 하면서 여러 동기님들 덕분에 무사히 귀향했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이곳을 지나실 때 들리시면 옛날 이야기 나누면서 막걸리 한 잔 합시다.
감사합니다.
노태호.
나 와도 남다른 사연이 많은데
그 친구 보고 싶다.
언젠가 병삼이 있을때
청량리 가면 조카가 식당 하던데...
보고 싶다. 그 친구 의리판데..
햐 ~~ !!! 이거 몰랐던 옛 인생 다 나오네 ㅎㅎㅎ 잼있네
초딩 시절 교장실 불러가 벌서고 꿀밤 맞은 사람 나오라고 해
대보름 쥐불놀이에 미처 역전 논에서 옆사람 불이 엄첨크서 어떵게 했나 하니 기차 바퀴중심에 솜이 있단다
가보니 기름 묻은 솜은 다 가저갔고 기름만 있어 손으로 퍼서 쥐불에 집중해서 넣고 있는데
역무원에게 잡혀서 역에서 벌서고
학교에 통보되어 전교생이 모인 아침 조회에 교장왈 우리학교학생중에 기차바퀴를 빼서 가저 갈려는 학생있다고 하네
얼굴을 들수가 없었지 4 학년 말 성적표 받아보니 모든 사항이 최저로 나왔네
그런일이 아니면 서울대 갈수 있었지 ~~~ ???ㅎㅎㅎ
심 회장
세월이 더 흘러가기전에 자주 만나야 합니다.
항상 자기의 의견을 분명하게 하시던 옛날의 그런 모습으로 오셔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나눗는
시간을 많이 가집시다.
막걸리 준비하시고 연락 한번 주시요
종태야.. 참 재밋는 호서남 학교 생활이 기억나면 퍼날라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