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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文選 제36권
표전(表箋)
1.사관(使館)을 떠남에 즈음하여 사례하는 표[謝離館表]
2.전송관(錢送官)을 파견하심을 사례하는 표[謝差送伴表]
3.동경에서 전송연을 주심을 사례하는 표[謝東京賜錢宴表]
4.국학을 창립한 뒤 학관으로 사례하여 올리는 표[刱立國學後學官謝上表]
5.제생이 국학에 취학함을 사례하는 표[諸生謝就養表]
6.대학에 행행하시와 강경(講經)을 명하심에 제생들이 질문을 허하심을 사례하는 표[幸學命講經諸生謝許難疑表]
7.동궁이 가례 후에 교서를 내리심을 사례하는 표[東宮嘉禮後謝降敎書表]
8.대학의 재(齋)를 순시하심을 제생이 사례하는 표[諸生謝巡齋表]
9.또 태학에 거둥하심을 사례하는 표[又謝幸學表]
10.도망하여 배반하였던 사람들을 돌려주심을 사례하는 표[謝回付逃背人表]
11.대 김인존 사 문하시중 표(代金仁存謝門下侍中表)
12.대 문공미 사 예부상서 표(代文公美謝禮部尙書表)
13.군사를 파견하여 글안 적병을 섬멸했음을 사례하는 표[謝遣兵滅丹賊兵起居表]
14.사표(謝表)
15.물장(物狀)
16.금간의 사 동지공거 표(琴諫議謝同知貢擧表)
17.조좨주 충사 삼자 표(趙祭酒冲謝三字表)
18.삼중선사(三重禪師) 돈유가 수좌를 사은(謝恩)하는 표[敦裕三重謝首座表]
19.사 지공거 표(謝知貢擧表)
20.사 지공거 표(謝知貢擧表)
21.사 동지공거 표(謝同知貢擧表)
22.사 감시 시원 표(謝監試試員表)
23.사 제 좌간의대부 표(謝除左諫議大夫表)
24.사 제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 대학사 표(謝除知門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大學士表)
25.사 제 추밀원부사 좌산기상시 보문각학사 표(謝除樞密院副使左散騎常侍寶文閣學士表)
26.모정 잔치에 어가가 행행하여 이제시를 하사하심을 진강후가 사례하는 표[晋康侯謝駕幸茅亭曲宴次賜御製表]
27.임평장 사 어전부곡연 표(任平章謝御殿赴曲宴表)
28.금 내문유 육관 사 선사 표(禁內文儒六官謝宣賜表)
29.석곡환을 하사하심을 유공이 사례하는 표[柳公謝賜石斛丸表]
30.재제사 차공 약송 사사 연서경 공관 표(齋祭使車公若松謝賜宴西京公館表)
31.사제 조의대부 국자좨주 한림시강학사 표(謝除朝議大夫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表)
32.임상공유 사 제 추밀부사 이부상서 표(任相公濡謝除樞密副使吏部尙書表)
33.임평장 사 수태사 상주국 표(任平章謝守太師上柱國表)
34.금비감 사 제 한림시독학사 표(琴秘監謝除翰林侍讀學士表)
35.사 우정언 지제고 표(謝右正言知制誥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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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전(表箋)
1.사관(使館)을 떠남에 즈음하여 사례하는 표[謝離館表]
김극기(金克己)
황제의 은택은 치우침이 없어 비록 소원(疎遠)한 곳도 어김이 없사오나 사신(使臣)의 길이 제한이 있어 오래 머무르기 어려워, 문득 연곡(輦轂)을 하직하고 길을 떠나려 하오니 궁궐을 돌아보오며 그리움을 더하옵나이다. 중사(中謝)
배신(陪臣)이 마침 새해를 당하여 와서 경전(慶典)에 참가하였다가 장차 본국에 복명(復命)하고자 감히 뜰 아래에 하직을 하였더니, 황송하옵게도 하늘의 뜻이 물정(物情)을 굽어 살피시어 윤허(允許)하시는 윤음(綸音)을 내리셔서 수레를 돌려 귀환하게 하옵시니, 진(秦)나라 임금의 꿈은 이미 균천(鈞天)에서 깨었사오나 공자(公子)의 마음은 맹세코 길이 위궐(魏闕)에 있사오리이다.
2.전송관(錢送官)을 파견하심을 사례하는 표[謝差送伴表]
김극기(金克己)
황제의 궁궐에 나와서 조회를 마치고 돌아가려 할 때, 왕인(王人 천자(天子)가 보낸 사람)을 보내어 작반(作伴)하게 하시어 멀리 전송하여 주시니, 끝내 권우(眷遇)하오심에 그지없는 영광을 느끼옵나이다. 중사(中謝)
배신(陪臣)이 빙례(聘禮)를 마치고 바야흐로 행장을 차리는데, 뜻밖에도 황제께옵서 〈귀환하는 일행을〉 거듭 편안히 하시려고 특별히 사신을 시켜 나와 전송하여 주시오니, 천리 기봉(箕封)에 길 잃을 걱정이 없겠사오며 구중(九重) 한궐(漢闕)에 멀리 하늘처럼 오래도록 축수(祝壽)를 올리옵나이다.
[주-D001] 천리 기봉(箕封) :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말이다.
3.동경에서 전송연을 주심을 사례하는 표[謝東京賜錢宴表]
김극기(金克己)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왕정(王程 왕명(王命)으로 가는 여정(旅程))을 원습(原隰 사신의 행로)으로 출발하옵던 차, 예악(禮樂)을 보내시어 동경(東京)에서 전송연을 차려 주시오니, 영행(榮幸)이 비상하온지라, 감격하고 놀람이 그지없도소이다. 중사(中謝)
배신이 표(表)를 받들어 빙례(聘禮)를 닦고서 사명을 이루고 돌아갈 때, 해역(海域)으로 빨리 오니 비록 첩역(鰈域 한국)으로 깃발을 돌리오나 천정(天庭)이 못내 그리워 마음이 아직 이폐(螭陛) 앞에 있사온대, 뜻밖에도 황제께옵서 덕은 미천(微賤)한 자를 빠뜨리지 않으시고 인(仁)은 가는 자를 후히 하시는 데 먼저 하시어 북궐(北闕)에서는 윤음(綸音)을 내리시고 동도(東都)에서는 화려한 잔치를 차려 주시오니, 하인들까지 빛이 더 나오며 연로(沿路)의 사람들이 모두 구경하옵나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돌봐 주시는 성인(聖人)의 은혜에 깊이 감격하오며, 기한이 없고 끝이 없는 군자(君子)의 수(壽)를 우러러 비옵나이다.
4.국학을 창립한 뒤 학관으로 사례하여 올리는 표[刱立國學後學官謝上表]
은순신(殷純臣)
신 모(某) 등은 아뢰옵나이다.
성상께서 유사에게 칙명을 내리시어 국학을 세워 선비를 기르게 하사, 신 등으로써 박사(博士) 등 벼슬의 수를 채우시므로 이미 제생(諸生)들을 뽑아 입학하게 하였나이다.
주상(主上)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많은 인재를 기르기를 즐기시고, 신들은 학교의 직위를 맡아 왕화(王化)의 성취에 참여해 보게 되오니, 저희들의 조우(遭遇)가 그 어찌 영행(榮幸)이라 아니 이르오리까. 중사(中謝)
그으기 생각하옵건대, 삼대(三代 요(堯)ㆍ순(舜)ㆍ우(禹))의 학은 인륜(人倫)의 떳떳한 길을 밝히는 바요, 육례(六禮)의 글은 천하의 심오(深奧)한 이치를 더듬는 바인지라, 국가가 일어난 지 2백 년 만에 현군(賢君)ㆍ성군(聖君)ㆍ십사군(十四君)이 나셨습니다. 누가 국학을 회복하여 유교(儒敎)를 넓히시어 경사(京師)로부터 수선(首善)하기를 바라지 아니하였사오리마는, 오랑캐 나라들이 아직 모두 순복(順服)하지 않고 조정이 말끔히 청한(淸閑)하지 못하여, 비록 그 성의만은 있었사오나 어느 겨를에 그 일을 의론하였사오리까. 학관(學官)은 빈 이름 뿐으로 아무런 실적을 나타내지 못하였고, 스승은 예(例)에 따른 직위가 되어 아무도 그를 높이지 아니하니 국학의 문과 담에 풀이 우거지고 책상과 자리에 먼지가 쌓여 있사옵니다. 문묘(文廟)가 퇴각하였으니 보잘 것이 있겠사오며, 경술(經術)이 쓸쓸하게 쇠퇴하여 어떤 데는 거의 없어지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도(道)는 끝내 없어지지는 않고 때가 이르면 다시 흥하옵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옵서 성(誠)으로부터 명(明)하심에, 오직 슬기로워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을 들어[擧] 사업에 행하시어 집과 나라를 다스리시고 빛나는 문장이 있어 환히 일월(日月)을 달아 놓은 것 같나이다. 인재를 얻음을 급선무(急先務)로 삼으시는데, 하물며 학(學)을 권함이 곧 태평을 이룩하는 기초이리까. 진신(搢紳)과 꾀하시고 이 국학을 열으시어 굽어 각 지방의 선비들을 맞아들이고, 위로 조종(祖宗)의 영(靈)을 위로하옵나이다.
한 호령이 성실(誠實)함으로 사방이 모두 교훈으로 삼게 되어, 예(禮)로써 길러 대축(大畜)의 “집에서 먹지 않음을” 본뜨고, 때 맞추어 가르쳐 소자(小子)들을 성취시키고자 하니, 청아(菁莪)가 저 중지(中沚)에 있고 봉황이 조양(朝陽)에 우나이다. 명세(命世)의 큰 재목이 이 길로 말미암아 나옴을 미구에 볼 것이오며, 만방(萬方)의 공헌(貢獻)이 찬란히 옴을 이제 기대하리로소이다.
돌아보옵건대 이 훈적(訓迪 교육)의 벼슬은 인재를 작성하는 기초로서, 군자의 행실로써 그들을 가르치고, 성인(聖人)의 경(經)을 그들에게 전하여, 말[馬]을 길들이듯이 하여 딴 길로 가지 않게 하고, 질그릇 만드는 흙을 다루듯이 하여 각기 제 그릇을 만들어야 하오리니, 그 직책에 거하는 자가 또 어렵지 않사오리이까. 그러하온대, 신들은 원래 초모(草茅)의 한미(寒微)한 서생들이요, 형설(螢雪)의 말학(末學)들로서, 뜻이 실용(實用)에 맞지 않아, 하는 것은 다만 어린애의 조충소기(彫虫小技)일 뿐이오, 업은 오직 글읽기 뿐으로 지키는 바가 옛 사람의 조박(糟粕 찌꺼기)이라서 아직 자기도 성취하지 못하였사온데 어찌 감히 남을 가르치리이까. 마치 깊은 연못에 다다른 듯, 높은 나무에 앉은 듯하오이다. 하물며 지금은 사람들이 각기 뜻을 얻고 선비들이 모두 충성을 바치어 시험에 합격하여 줄을 지어 나오는 자가 수두룩하고, 자리의 보배를 가지고 초빙을 기다리는 이가 실로 허다하게 무리를 이루었사온데, 대관절 저희들이 무엇 때문에 이 못난 자격으로 비상한 발탁(拔擢)에 처음으로 들어 자리를 더럽히오리이까.
이는 대개 성상께옵서 예(禮)로써 사람을 대우하시고 인(仁)으로써 신하를 거느리시어 높고높은 공(功)을 이루심이 비록 혼자의 덕(德)이라 이르오나, “단단(斷斷)하고 다른 재주 없음”을 혹 씀직하다 생각하시어 드디어 이 육영(育英)의 큰 사업에 여러 사람이 함께 봉직하게 되었사오니, 삼가 마땅히 못 미치는 것을 힘쓰고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하겠사오며, 백수(白首)토록 경(經)을 전공하와 다만 연애(涓埃)만큼이라도 도움이 있고자 원할 뿐만 아니라 적심(赤心)을 나라에 바치어 또한 금석(金石)같이 변치 않을 뜻을 굳게 하겠나이다.
[주-D001] 수선(首善) :
수선은 선(善)을 처음 시작하여 일반에게 모범을 보인다는 뜻인데, 태학(太學)을 칭하기도 하고 서울을 칭하기도 한다.
[주-D002] 성(誠) …… 하심에 :
《중용(中庸)》에, “성(誠)으로부터 명(明)한 것[自誠明]을 성(性)이라 이르고 명으로부터 성하는 것을 교(敎)라 이른다.” 한 말이 있는데 주자(朱子)가 주석하기를, “전자(前者)는 성인(聖人)이요. 후자(後者)는 현인(賢人)이다.” 하였다.
[주-D003] 슬기로워 …… 것은 :
《서경(書經)》에 “생각함을 슬기롭다 이르고[思曰睿], 슬기로운 이가 성인이 된다[睿作聖].”한 말이 있다.
[주-D004] 집과 …… 빛나는 :
공자가 요(堯)를 칭하여, “빛나는 문장이 있다.” 하였다. 문장은 예악(禮樂) 법도(法度)를 말한 것이다.
[주-D005] 대축(大畜)의 …… 않음을 :
《주역》대축괘(大畜卦)에, “집에서 먹지 않으면 길하다.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하고 옛사람의 말과 행실을 많이 알아서 덕을 기른다.” 하였다.
[주-D006] 청아(菁莪)가 …… 있고 :
《시경》에, “무성한 다북쑥이 저 물가에 있도다[菁菁者莪 在彼中沚].” 하였는데, 그것은 인재를 교육하여 무성한 다북쑥을 기름과 같이 한다는 뜻이다.
[주-D007] 봉황이 …… 우나이다 :
“오동(梧桐)이 저 조양(朝陽 산의 동쪽)에 난다. 봉황의 울음이여, 저 높은 산등성에 서로다.” 하였다. 《詩經》
[주-D008] 옛 사람의 조박(糟粕) :
제 환공(齊桓公)과 수레바퀴 만드는 목수가 서로 문답한 고사인데 앞에 주석되었다.
[주-D009] 시험에 …… 자가 :
당 태종(唐太宗)이 과거에 합격한 선비들이 줄을 지어 나오는 것을 보고,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나의 구중(彀中 화살 맞을 거리(距離))에 들었구나.” 하였다.
[주-D010] 자리의 …… 이가 :
《예기(禮記)》에, “유자(儒者)는 석상의 보배가 있어 초빙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옛적 요ㆍ순의 도를 자리처럼 펴서 베풀어서 불러 묻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주-D011] 단단(斷斷)하고 …… 없음 :
《서경(書經)》에, “만일 한 사람이 단단(斷斷 성일(誠一))하여 다른 재주 없어도 마음에 질투함이 없으면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주-D012] 연애(涓埃)만큼이라도 …… 있고자 :
한 방울의 물로 바다에 보태고, 한 티끌로 태산에 보탠다는 뜻이다.
5.제생이 국학에 취학함을 사례하는 표[諸生謝就養表]
장자(張仔)
문과(文科)가 새로 변하여 다만 세상에 이름난 현인(賢人)을 구하옵는데, 속학(俗學)이 외람되이 용납 받아 겨우 영재(英才)를 기르는 지위에 나아오니, 명연(茫然)히 어리둥절할 뿐 부족한 신이 무엇을 하오리까. 중사(中謝)
그으기 생각하옵건대, 예악(禮樂)은 백 년 만에야 흥하나 천하에 폐할 수 없는 것이요, 학교는 삼대(三代)에 공통된 바로 모두 인륜(人倫)을 밝히는 것으로써, 덕에서 본다면 지(智)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요, 행실을 가르친다면 효(孝)ㆍ우(友)ㆍ목(睦)ㆍ연(婣)ㆍ임(任)ㆍ휼(恤)이온데, 처음은 현자(賢者)와 유능자(有能者)를 향당(鄕堂)에서 일으키고 이어서는 망(望)에 올리고 등용하여 조정에 쓰옵나이다. 혹시 선(善)을 잊어버리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오물(五物)로써 물어보고, 가르침을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팔형(八刑)으로써 위엄을 보임에 요사(妖邪)로운 무리들이 모두 물리쳐지고 호걸(豪傑)들이 죽 늘어서서, 둥실둥실 버드나무 배에 뜨는 물건이나 잠기는 물건이나 모두 다 실리고 더북더북한 숲에서 섶[薪]이 될 만한 나무를 □□ 수 있으니, 어찌 그리도 위대한가. 과연 구비했다고 할 만하겠습니다. 이 선왕(先王)의 성전(盛典)을 들어 천 년의 성대(聖代)에 소속시키고 널리 삼사(三舍)의 규모를 높혀서 사방의 선비들을 불러다가 경술(經術)로 가르치며 토전(土田)을 하사하시니, 연실(練實)ㆍ예천(醴泉)은 원래 봉황의 새끼가 모이기를 기다리는 바요, 소악(韶樂)과 뇌선(牢饍)은 원거(爰居)가 오는 데에 향응(饗應)함이 마땅치 않사온지라 분수에 혹시 넘침이 있으면 사리(事理)에 스스로 처리하기 어렵나이다.
하물며 유림(儒林)의 수석(首席) 선석(選席)을 주장하는 이가 법을 씀이 근엄하고 사람을 택함이 정밀하여, 한단(邯鄲) 사람 옆에서 걸음을 배우다가 옛 걸음까지 잃어버린 자가 있고, 구포(瞿圃)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다가 가는 자가 절반이오니, 어찌 조그만 말기(末技) 따위를 가지고 이 큰 향연(饗宴)에 참석하오리까.
신들과 같은 자는 조행이 아직 높지 못하고 천품이 아주 하등으로서 옛 사람의 학(學)을 모른 채 유속(流俗)의 천근(淺近)에 빠지고 장부(壯夫)의 뜻이 없이 동자(童子)의 조충(彫虫)에 가려져 있었는데 저번에 따뜻한 조서(詔書)가 반포되었을 때를 당하여 망령되이 유사의 시험에 나아갔었습니다. 그런데 진실로 뜻밖에도 이 무장(無狀)한 몸들이 문득 거두어져 선발되었습니다. 우물 속의 개구리가 동해(東海)의 큼을 바라보고 놀란 것 같고, 울타리의 조그만 새가 남명(南溟)에 노닒을 말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은 모두 영광이라 하였사오나 신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였나이다.
이는 대개 성상께옵서 신천(神天) 본종(本宗)의 묘(妙)로 태어나시고 제왕(帝王)이 흥기(興起)하는 시기(時期)에 응하사, 높디높고 가엾은 요(堯)ㆍ순(舜)의 공(功)을 가지시고, 깊디깊고[渾渾] 드넓은 상(商)ㆍ주(周)의 문장(文章)을 회복함이로소이다. 그러나 제도(制度)를 시행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중용(中庸)을 취하므로 인물을 취함에 구비(具備)한 자만을 구하지 않으시어 저희들 소자(小子)의 광간(狂簡)으로써도 입선(入選)의 품제(品題)에 참가하게 되었사오니, 저희들이 감히 듣지 못한 바를 힘써 책임을 극진히 다하지 않사오리까.
때맞추어 비를 내리심에 비록 본받아 적시어 주시고 물을 대어 주시는 수고로움이 있사오나 봄 나무의 성함이여 맹세코 손을 잡아당기는 즐거움을 잊지 않겠사오며, 마침내는 기필코 성립(成立)함이 있어 적이 생성(生成)의 은혜를 보답하겠삽나이다.
[주-D001] 예악(禮樂)은 …… 흥하나 :
한(漢)나라가 처음 통일하자 예의(禮儀)를 제정하려고, 선비들을 불러 모으는데, 노(魯)나라 두 선비는 응하지 않으며, “예악(禮樂)은 적덕(積德)한 지 백 년이 되어야만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2] 덕에서 …… 이온데 :
“대사도(大司徒)가 만민(萬民)을 가르치되 지(智)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가 육덕(六德)이요,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婣)ㆍ임(任)ㆍ휼(恤)은 육행(六行)이다.” 하였다. 《周禮》
[주-D003] 팔형(八刑) :
“팔형으로써 만민을 규찰[糾]하니 불효(不孝)ㆍ불목(不睦)ㆍ불인(不婣)ㆍ부제(不弟)ㆍ불임(不任)ㆍ불휼(不恤)ㆍ조언(造言)ㆍ난민(亂民) 등의 형벌이다.” 하였다. 《周禮》
[주-D004] 둥실둥실 …… 실리고 :
《시경》 〈청아(菁莪)편〉에 있는 문구인데 인재를 양성함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5] 삼사(三舍) :
송나라의 태학(太學)에 상사(上舍)ㆍ내사(內舍)ㆍ외사(外舍)의 구별이 있었다.
[주-D006] 연실(練實) …… 바요 :
봉황은 연실을 먹고 예천을 마신다.
[주-D007] 원거(爰居)가 …… 지라 :
춘추 시대에 노(魯)나라 동문 밖에 원거(爰居)라는 크기가 망아지만한 해조(海鳥)가 있어 3일 동안 머물렀는데, 장문중(藏文仲)이 이상한 새라 하여 그 앞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주-D008] 한단(邯鄲) …… 있고 :
수릉여자(壽陵餘子)가 한단(邯鄲)에 가서 한단 사람의 멋진 걸음걸이를 배우다가 도리어 본래의 걸음걸이를 잊었다 하였다. 《莊子》
[주-D009] 구포(瞿圃)에서 …… 절반이오니 :
공자(孔子)가 구상(瞿相)의 포(圃)에서 활을 쏘는데 구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공자가, 자로(子路)를 시켜, “패군(敗軍)한 장수와 나라 망친 대부(大夫)는 여기에 들어오지 말라.” 하니 가는 자가 반이요 들어오는 자가 반이었다. 또 공망지구(公罔之裘)를 시켜, “젊을 때에 효도하며 공경하고 늙어서 예를 좋아하는 자가 있는가.” 하니 공망지구가 돌아와서 “가는 자가 반이요 있는 자가 반이었다.” 하였다.
[주-D010] 장부(壯夫)의 …… 가려져 :
양자(楊子)의 《법언(法言)》에, “사부(辭賦) 짓는 것을 말하되 동자(童子)의 조충전각(雕虫篆刻)을 장부(壯夫)는 하지 않는다.” 하였다.
[주-D011] 조그만 …… 어려워서 :
《장자》에 “대붕(大鵬) 새가 북해(北海)에 날아서 남명(南溟)으로 놀러 가는데, 울타리 밑에 뱁새[斥鸚]가 웃으면서 ‘나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다니면서도 만족한데, 무엇하러 구만 리(九萬里)나 날아서 남으로 가는고.’하였다.” 한다.
[주-D012] 광간(狂簡)으로써도 …… 되었사오니 :
공자가 진(陳)에 있다가 말하기를, “돌아가리로다. 우리 고장의 소자(小子)들이 광간(狂簡)하여 빛나는 문채는 이루었으나 재단할 줄 모른다.” 하였다. 광간은 뜻은 크나 행실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6.대학에 행행하시와 강경(講經)을 명하심에 제생들이 질문을 허하심을 사례하는 표[幸學命講經諸生謝許難疑表]
성상전(成上田)
법가(法駕)가 친히 임어(臨御)하사 사석(師席)에 예(禮)를 행하옵시니, 분포(粉袍)들이 모두 모여 황공하옵게도 천안(天顔)을 대하였습니다. 더구나 지엄하신 교명(敎命)을 받들어 외람되이 질의(質疑)하는 열(列)에 참가하오니, 이 특수한 은혜를 받자옴에 제 몸을 어루만지며 부끄러움을 알겠삽나이다. 중사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성상(聖上)께옵서 요(堯)ㆍ순(舜) 같으신 문명(文明)과 우(禹)ㆍ탕(湯) 같으신 근검(勤儉)으로, 대학은 예의(禮義)의 근본이므로 삼대(三代 하(夏)ㆍ상(商)ㆍ주(周))가 함께 높았고, 중니(仲尼)는 제왕의 스승이므로 백세(百世)에 다같이 공경할 바라 생각하시고 드디어 선대(先代)에서 이미 시행했던 전례(典禮)에 의하여 성인(聖人)의 독창적인 총명을 발휘하시어 유사에게 신칙(申勅)해서 새로 예도(禮度)를 닦으셨나이다. 덕을 높이시고 도(道)를 즐기사 지존(至尊)하신 몸으로 태학에 임어하시고, 선비들을 모아 경(經)을 강(講)하여 성인의 깊은 근원을 찾으시되 아래로는 미신(微臣)들에게 이르기까지 문득 질문의 말씀을 진술하게 하옵시니, 마치 풀대[莚]로 종을 치는 것 같아 진실로 큰 성운(聲韻)을 내기 어렵사오며, 조개 껍질로 바다를 측량하는 것 같으니 어찌 그 넓고 깊음을 다하오리이까. 다만 해와 달의 조림(照臨)을 친히 뵈옵고 문득 가슴속의 의혹을 모두 풀게 되오니, 물러와 돌이켜 살펴봄에 분수에 넘치는 성은(聖恩)에 실로 감격하옵나이다.
이는 대개 성상께옵서 하늘이 내신 재능과 날마다 새로우신 덕으로, 비록 하루에 만기(萬機)를 다스리시는 번잡한 사무에 계시면서도 먼저 삼사(三舍)의 큰 규모를 숭상하시어 사방을 고무(鼓舞)시키고 하늘이 돌고 땅이 열림을 본받으시어 많은 선비를 성취시켜서 모두, “물고기가 뛰고 솔개가 날” 듯하게 하여 경문(經文)을 토론하고 도리(道理)를 해명(解明)하게 하고 계신데 신 등이 감히 평소에 못 미쳤던 바를 힘쓰고, 미처 못 들었던 바를 강(講)하지 않사오리이까. 성은(聖恩)의 바다에 헤엄치고 있사오니 기어이 생성(生成)의 은덕을 갚겠사오며, 학예(學藝)의 동산에 훨훨 날고 있사온데 어찌 교육하신 성은(聖恩)을 잊사오리까.
[주-D001] “물고기가 …… 하게 :
《중용》에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 했는데 이는 모두 천지의 조화 속에서 즐겨 논다는 뜻이다.
7.동궁이 가례 후에 교서를 내리심을 사례하는 표[東宮嘉禮後謝降敎書表]
최윤개(崔允愷)
북신(北辰)에서 권념(眷念)을 베푸사 아습(鴉濕)의 새 교서를 내리시어 동궁에 상서를 맞아 봉황이 우는 길조(吉兆)에 맞추오니, 공경히 총명(寵命)을 받자옴에 우러러 깊은 자애(慈愛)를 느끼옵나이다. 그으기 생각하옵건대 부부는 인륜(人倫)의 대사요, 혼인은 예법의 상전(常典)이오니, 예로부터 소중히 여기는 바이온데 지금인들 어찌 가볍게 하오리이까.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다행히 왕실에 태어나서 외람되이 태자의 위에 있는 이 몸이 문안(問安)과 시선(視膳)에 비록 주사(周嗣)의 부지런함을 본받고자 하였사오나, 나라를 대신 돌보고 군사를 어루만짐에 아직도 한저(漢儲)의 덕이 없음을 부끄러워 하옵더니, 이제 황공하옵게도 군부(君父)께서 규방(閨房)에까지 생각을 미치시어 이 좋은 날을 택해서 현숙한 배우자를 골라 주시니, 이는 대개 운운.
일은 반드시 옛 법을 따르시어 자식에게의 도리를 다하십니다. 저번에 높이 봉(封)하는 예(禮)를 거행하여 정식으로 소양(小陽)의 위(位)에 오르게 하시고, 이제 요조(窈窕)한 숙녀를 구하여 이 잔질(孱窒)의 배필로 삼아 주시오니, 신이 삼가 마땅히 공경하고 반드시 경계하며, 오직 효도하고 오직 충성을 다하여 예법대로 어김없이 어버이를 편안하게 하는 도리를 공경히 받들고, 기쁨을 위로 돌려 드려서 은덕을 갚아 더욱 만수무강을 축수하는 정성을 다하오리다.
[주-D001] 아습(鴉濕)의 새 교서 :
까마귀 빛깔 같은 검은 먹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새로 쓴 교서란 말이다.
[주-D002] 문안(問安)과 …… 부지런함을 :
주 문왕(周文王)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아버지 왕계(王季)에게 날마다 세 번 문안하고 음식을 보살폈다.
8.대학의 재(齋)를 순시하심을 제생이 사례하는 표[諸生謝巡齋表]
곽동순(郭東珣)
경연(經筵)이 막 끝나자 시종(侍從)들을 잠깐 쉬도록 하시고, 보련(寶輦)으로 천천히 거둥하사 재(齋)의 거처를 더럽다하지 않으시고 두루 살펴보시니, 저희들은 진실로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뛰면서 기쁨을 가누지 못하오니 실로 마음속에 감동됨이 말씀에 나타나옵나이다. 중사
그으기 생각하옵건대, 제왕은 함이 없이[無爲] 공을 이루므로 문덕(文德)을 경위(經緯)라 일컬었고, 성현은 가르침으로써 법을 세웠으므로 간편(簡編)에 그 미묘한 말[微言]을 적었사오니, 진실로 인재를 양육함에 청아(菁莪)를 폐하지 않으면, 성인의 설(說)을 전함에 금구(金口)의 가설(駕說)을 알릴 수 있사오리이다. 저 주(周)ㆍ진(秦)의 선비들도 워낙 스스로 멋대로 하여 스스로 구속되었음이 아니라, 하(夏)ㆍ상(商) 때부터 진작 교(校)가 있고 서(序)가 있었나이다. 도(道)의 흥폐(興廢)는 까닭이 있고 세상의 치란(治亂)이 같지 않아, 흰 망아지[白駒]가 정원의 곡식싹을 먹지 않음을 탄식하고, 푸른 옷깃[靑衿]이 항상 성궐(城闕)에 있음을 풍자하였으며, 여러 사람들의 말이 어지러이 뒤섞여서 비록 변론(辯論)을 좋아하되,이단(異端)을 그치게 할 길이 없더니, 적막한 천 년 동안에 참다운 지해(知解)는 실로 한 번 만나기가 어려웠었나이다.
이제 성상께옵서 요(堯)를 이으시고 문왕(文王)의 성(聲)을 넓히시어 순연(醇然)한 상철(上哲)의 소질로 다문(多聞)의 의덕(懿德)을 겸하시오니, 정성스러우면 곧 밝은 법이라서 이미 넓고 큼을 이룩하고도 더할 나위 없이 정미(精微)하시고, 신(神)으로 화(化)하심에 진실로 장차 도덕을 통일하고 풍속을 같이 하시려 합니다. 성인(聖人)과의 거리가 먼 이때를 당하여 땅에 떨어진 교학을 진흥(振興)코자 성스러운 생각으로 혼자 결단하시고 성황의 뜻을 크게 이으사, 지나는 곳마다 반드시 감화되게 하려면 몸으로 솔선 수범함만 같지 못하다 이르시어, 처음 교문(校門)에 이르시자 경필(警蹕)을 모두 물리시고 이에 사실(師室)에 올라 친히 헌작(獻酌)하신 후에 이어 홍유(鴻儒)들에게 명하여 대훈(大訓)을 진술하게 하시고, 넓은 좌석을 마련하여 한박사(漢博士)의 관원들을 인견(引見)하시고 어주(御酒)를 하사하시어 노제생(魯諸生)들을 두루 마시게 하셨나이다. 그런 뒤 다시 옥보(玉步)를 옮겨 굽어 황당(黌堂 글방)을 돌아보시니, 넓은 때와 큰 옷을 입은 선비들이 친히 취화(翠華 임금의 일산)의 아래에서 뵈옵고 초가의 첨하와 갈대로 엮은 발[簾]에 오래 천일(天日 임금의 얼굴)의 빛을 머물러 계셨으니 유림(儒林)에 그지없는 광채요, 사책(史冊)에 길이 전할 영광이옵나이다. 옛날에 황제(黃帝)는 굽혀 광성자(廣成子)를 찾아 도(道)를 물었고, 촉주(蜀主)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초려(草廬)를 세 번이나 찾아 갔사오나, 한갓 빈 고사(故事)일 뿐, 아무런 실효(實效)도 없었으니 어찌 오늘의 높은 거둥이 백왕(百王)의 아름다운 사적보다 훨씬 뛰어나신 것만 하오리까. 신 등은 오래도록 큰 대우만 받자옵고 우러러 갚음이 없었사온데, 이제 만세(萬世)의 대행(大幸)한 제회(際會)를 만나 한 분의 크신 덕을 대하오니 하늘이 시키심인 듯, 몸 둘 바를 모르겠삽나이다. 문장으로 나라를 빛냄도 역시 소신(小臣)들의 단단(斷斷)한 재주이오나, 충의(忠義)로 임금을 도와 맹세코 왕의 신하다운 건건(蹇蹇)한 절개를 세우고자 하옵나이다.
[주-D001] 문덕(文德)을 …… 일컬었고 :
시호(諡號)를 짓는 법에, “하늘을 날[經]로 하고 땅을 씨[緯]로 하는 것을 문(文)이라 칭한다.” 하였다.
[주-D002] 금구(金口)의 …… 있사오리다 :
《법언(法言)》에, “하늘의 도가 공자에게 있으니 공자는 말을 전하는[駕說] 자이다. 만일 모든 선비로 하여금 다시 그 말을 전하게 한다면 목탁처럼 금구목설(金口木舌)이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주-D003] 흰 망아지[白駒]가 …… 탄식하고 :
《시경》 〈백구편〉에 “흰 망아지 나의 정원의 풀싹[場苗]을 먹는다. 그 망아지를 붙들어 매어서 오늘 저녁 쉬게 하리라.” 하였다. 그것은 어진 선비가 흰 망아지를 타고 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가는 것을 만류하자는 뜻이다.
[주-D004] 푸른 옷깃[靑衿]이 :
《시경》에, “푸르른 그대의 옷깃이로다. 경박하게 날뛰며 성궐 〈도시(都市)〉에 있도다.” 하였는데, 그것은 선비들이 공부하지 않음을 풍자한 것이다. 그러므로 후세에 선비들을 청금(靑衿)이라 한다.
[주-D005] 변론(辯論)을 좋아하되 :
어느 사람이 맹자를 보고 “왜 변론을 좋아[好辯]하는가.” 하니, “내가 변론을 좋아하랴마는 양묵(揚墨) 이단(異端)을 배척하기 위해 부득이(不得已)하다.” 하였다.
[주-D006] 한박사(漢博士)의 관원 :
한대(漢代)에 처음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었다.
[주-D007] 어주(御酒)를 …… 마시게 :
공자가 살던 노(魯)나라에 유학(儒學)하는 선비가 많으므로 천자가 노(魯)를 지낼 때에는 공자의 사당에 참배하고 모든 선비들을 불러 보았다.
[주-D008] 황제는 …… 물었고 :
“황제가 공동산(崆峒山)에 가서 신선 광성자에게 도를 물었다.” 《莊子》
[주-D009] 건건(蹇蹇)한 절개 :
건건은 신하가 나라만 위하고 몸을 돌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周易》
9.또 태학에 거둥하심을 사례하는 표[又謝幸學表]
곽동순(郭東珣)
필(蹕)을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오사 행단(香壇)의 대낮에 머무르시고, 자리를 맞대고 경전(經典)을 담론하여 궐리(闕里 공자가 살던 곳)의 청금(靑衿 선비)들을 모으시오니, 수선(首善)이 경사(京師)에서 시작되옴에 환심(歡心)은 온 누리에 가득하소이다. 중사
그으기 생각하옵건대, 천하 사람이 성(性)은 같사오나 성은 교화가 아니면 밝아지지 않고, 왕도(王道)는 반드시 학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학은 경술(經術)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오니, 어찌 하루인들 이것을 폐하오리까. 삼대(三代)로부터 공통된 것이었나이다. 회고하옵건대, 선대(先代)의 우문(右文)이 백왕(百王)의 계고(稽古)보다 훨씬 뛰어나시어 분연(奮然)히 영단(英斷)을 내려 이 태학을 열으셨나이다. 육경(六經)을 전공하게 하여 조충전각(彫虫篆刻)의 잔재주를 천시(賤視)하시고, 박사(博士)를 두어 월시(月試) 계고(季考)의 법을 엄격히 시행토록 하시니, 단단(斷斷)하고 다른 재주가 없는 이들이 누구인들 도야(陶冶)를 입어 성취하지 않으리까. 많은 우수한 인재로 하여금 모두 국가의 쓰임이 되기를 원하게 하셨나이다. 그러하오나 선단(仙丹)이 흰 구름의 수레를 재촉하였으니 아홉 길 산을 쌓음에 있어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람이 있었나이다. 비상한 임금에는 오히려 여러 사람들의 시비(是非)의 설(說)이 있는 법이고, 장차 흥하는 것은 명(命)에 있사오나 오로지 폐하께서 선왕(先王)을 계술(繼述)하는 공(功)에 달렸사옵기에, 감히 부월(斧鉞)의 주륙(誅戮)을 받을 것을 잊고 문득 봉장(封章)으로 아뢰옵나이다. 천문(天門)이 바다에 막혀 신충(宸衷)을 움직이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사오나, 성학(聖學)이 날로 새로우시니 어찌 전열(前烈 선왕(先王)의 공(功))을 잊음이 있사오리까. 고개를 쳐들고 기다린 지가 몇 해나 되었사온데 이제 성상(聖上)께옵서 신명(神明)에 통하시는 효제(孝悌)와 천성에서 나옵신 유아(儒雅)로 도(道)를 몸에서부터 시작하여 무궁한 사업을 수행하시고, 옛 것을 가지고 지금을 다스리며 성명(性命)을 순종하여 각기 바르게 하시려고 예고(睿考 예종(睿宗))께서 이미 이루신 헌장(憲章)을 참고하시며 노(魯)나라의 아직 쇠하지 않은 문교(文敎)를 일으키시어 어가(御駕)를 태학에 굽혀 소왕(素王 공자)께 배알(拜謁)하시고, 친히 경연(經筵)에 임하시어 선비들을 접견하시며 〈무일편(無逸篇)〉을 강하시어 삼종(三宗)을 들어 감계(鑒戒)하시고 벽옹제(辟雍制)를 복구하시어 일대의 전장(典章)을 정하셨나이다.
신 등이 이제 아침저녁으로 천재(千載)의 조우(遭遇)를 만나 진신(搢紳) 선생과 더불어 자리를 같이하여, 지척에서 어안(御顔)을 우러러 뵈오니 조간자(趙簡子)의 꿈속과 다름이 없고, 어전(御前)에 말씀을 오리오니 바퀴 깎는 대목의 마루 아래와 같사옴으로 오직 서로 돌아보며 경탄(警嘆)할 뿐, 혹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삽나이다.
신 등이 오직 봉황의 날개에 붙고 용의 비늘을 붙잡아 마침내 성역(聖域)과 실가(室家)의 아름다움을 보겠사오며, 하늘을 우러르며 구렁에서 솟구쳐 명당(明堂 왕이 신하의 조회를 받는 곳)의 동량(棟梁)이 될 재목 이루기를 기약할 뿐이오니, 이것이 신 등이 보답할 계제(階稊)이므로 암중(暗中)에 귀신의 명이 있을 것이옵나이다.
[주-D001] 선대(先代)의 우문(右文) :
옛적에는 좌(左)ㆍ우(右)를 높였으므로 여기서는 문(文)을 높인다는 뜻이다.
[주-D002] 선단(仙丹)이 …… 재촉하였으니 :
황제(黃帝)가 정호(鼎湖)에서 선단(仙丹)을 만들어 이루어지자 곧 하늘로 올라갔다 하는데, 여기서는 선왕(先王)의 죽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3] 〈무일편(無逸篇)〉 …… 감계 :
《서경》에 〈무일편〉이 있는데,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임금은 안일(安逸)하여서는 안 된다는 뜻을 지어 바친 것이다. 삼종(三宗)은 〈무일편〉에 나오는 은(殷)나라 중종(中宗)과 고종(高宗)ㆍ조갑(祖甲) 세 임금이며, 그들은 모두 안일하지 않고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왕위에 오래 있었다 한다.
[주-D004] 아침저녁으로 …… 조우(遭遇) :
《장자(莊子)》에서 인용한 말인데, 천 년 만에 성인이 하나씩 나도 아침저녁에 만난 것 같다는 뜻이다.
[주-D005] 조간자(趙簡子)의 꿈속 :
춘추 시대에 진(晋)나라 조간자가 꿈에 하늘에 올라가서 천제(天帝)를 꾀었다 한다.
[주-D006] 바퀴 깎는 …… 마루 아래 :
《장자(莊子)》에 제환공(齊桓公)이 당상(堂上)에서 글을 읽는데, 당하(堂下)에서 수레바퀴를 만들던 편(扁)이란 사람이 우러러 보고 글 읽는데 관한 문답을 한 이야기가 있다.
10.도망하여 배반하였던 사람들을 돌려주심을 사례하는 표[謝回付逃背人表]
곽동순(郭東珣)
신(臣) 휘(諱)는 아뢰옵나이다.
천권(天眷) 2년 12월 동로병마부서사(東路兵馬部署司)의 첩(牒)에 의하옵건대, “상서병부부승도성(尙書兵部符承都省)의 차자(箚子)를 받든 갈린로(曷隣路) 도통(都統)의 통고에, ‘고려 도배인(逃背人) 회감(回憨)이란 자가 자칭 본적이 서경(西京) 백성인데 도당 7명과 공모(共謀)하여 와서 보고하오니, 살펴 조사해 주시기 바라옵나이다.’ 하였기에 상서성(尙書省)에서 모여 조사한 결과, ‘고려는 본조(本朝)에 신속(臣屬)한 이래로 삼가 신례(信禮)를 지키는 터이므로 필시 이 자들이 죄를 피하여 명명한 것으로 사뢰옵기에 신 등이 상의하여 본국으로 송환시켜야 하겠나이다.’고 상주(上奏)하자 ‘아뢴 대로 시행하라.’는 성지(聖旨)를 받잡고 명령을 내원성(來遠城)에 내리어 고려국 영덕성(寧德城)에 하첩(下牒)하여 첩이 이르는 대로 갈린로 대경(對境) 주군(州郡)에 이문(移文)하게 하고, 한편 첩을 보내어 그 자들을 잡아 인도ㆍ인수를 끝내도록 하였나이다. 이 사이에 빠진 문구가 있는가 말이 완전치 못함 곧 서경 사람이 아니요, 실은 동로(東路) 선덕진(宣德鎭) 사람 한준신(韓俊臣)이란 자이온데, 필시 간인(奸人)으로 망명하여 죄를 피하고자 이름을 바꾸고 말썽을 일으키려 함이었사온데, 성자(聖慈)께서 특히 지휘를 내리시어 병마사(兵馬司)로 하여금 인도를 허락하옵기에, 이제 이미 죄를 청하여 처단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불량한 놈이 국경을 넘어 들어갔으면 법에 의해 마땅히 죽일 것이온데 지엄(至嚴)한 이명을 내리시어 방환(放還)을 허가하셨나이다. 중사(中謝)
생각하옵건대, 이 해방(海邦)이 상국(上國)에 접해 있어 작은 생선을 삶음에 방법이 부족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였고, 국경선에 날뛰어 경비(警備)의 허점(虛點)을 노리고, 신사(神社)에 구멍을 뚫은 쥐와 같이 잡힘을 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이에 나라를 망신주고 간악을 자행(恣行)한 놈이온대 이름을 고치고 성(性)을 바꾸는 일쯤이겠나이까. 이런 일로 감히 당국에 번거롭게 하여 자세한 경과를 통고하기를 기다렸사오나 우러러 생각하건대 성상(聖上)이 조림(照臨)하시어 소인(小人)의 정위(情僞 진실과 거짓)를 자세히 살피시고 경외(境外)로 추방하여 국내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신 것은 이는 대개 황제께옵서 탕(湯) 임금 같이 너그러우신 덕과 순(舜) 임금 같이 크신 인(仁)으로 신(臣)의 고지식한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신의 사대(事大)의 충성을 살피시어 필부(匹夫)의 도망을 막아주시고 하국(下國)의 기대를 보전해 주시고자 하심이로소이다.
백성이 항산(恒産 생활을 확보할 만한 재산)이 없음은 다 부역(賦役)이 많은 때문이오나 나라엔 일정한 형법이 있사온대 어찌 명분을 바로 하여 죄를 정하지 않사오리까. 맹세코 노둔한 힘을 다하여 길이 큰 은혜에 보답코자 하옵나이다.
[주-D001] 작은 생선을 삶음 :
《노자(老子)》에, “큰 나라를 다스리기를 작은 생선을 삶는 것 같이 하라.” 는 말이 있다. 그것은 요동시키지 말고 다루라는 뜻이다.
[주-D002] 신사(神社)에 …… 생각하여 :
쥐가 사직단(社稷壇)에 구멍을 뚫고 살면, 사람이 사직단을 파지도 못하고 구멍에 불을 피워 연기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쥐가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11.대 김인존 사 문하시중 표(代金仁存謝門下侍中表)
곽동순(郭東珣)
고지식한 정성으로 황송하옵게도 세 번이나 상소(上疏)를 올렸사오나, 정녕하신 훈계로 끝내 필부(匹夫)의 뜻을 빼앗았습니다. 돌아보옵건대 은혜가 두텁고 어명이 지중하옵기에 정이 군색하고 말씀이 궁하온대 감히 어명대로 받들지 않사오리까. 오직 영광이 더할 뿐이로소이다. 중사(中謝)
신이 듣자옵건대, 벼슬은 임금이 어진 이를 부리는 연장이요, 공명(功名)은 신하가 위에 보답하는 자료라 하옵나이다. 진실로 세상을 경륜하는 공을 세우고 백성을 보호하는 사업을 이루지 않고서 만종(萬鍾)의 녹(祿)을 누리고 삼공(三公)의 윗자리에 처한다면, 아래는 헛되이 받는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위에서도 또한 사람을 잘못 쓴 실수가 있을 것이옵나이다. 그러므로 밝으신 임금은 반드시 사람을 기국(器局)에 맞춰 쓰고 지혜로운 자는 반드시 제 힘을 헤아려 행하는 것이온데, 신은 늙어 무용한 자질(資質)로 희한한 만나기 어려운 때를 만나서 비록 질병(疾病) 중에 있사오나 성상(聖上)의 권우(眷遇)를 입사와 하사품(下賜品)이 이미 집안을 윤택하게 할 만하고, 문안(問安)의 사자(使者)가 뒤를 이어 문(門)에 이르러, 신으로 하여금 남은 목숨을 다시 잇고, 말라진 뼈에 다시 살이 붙게 하오니, 은혜가 실로 천지 부모보다 더하온지라, 신의 한 두 마디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없나이다. 하물며 다시 시중(侍中)의 벼슬을 주시고 태부(太傅)의 위(位)를 더하여 나라의 삼례(三禮)를 주관하게 하시고, 국사(國史)의 편찬을 감수(監修)하게 하시오니, 이는 다 인신(人臣)의 막대한 영광이요 노졸(老拙)한 자가 감당할 만한 책임이 아니옵나이다. 그러므로 죄책 받을 것을 무릅쓰고 여러 번 소를 올려 분수를 지켜 현로(賢路)를 열기 원하였사온대 폐하께옵서 완인(剜印)으로 경계를 삼으시고 일단 내리신 윤음(綸音)을 번복하기 어렵다 하시면서 두 번이나 지극하신 생각을 하유(下諭)하시고 그대로 일을 보라 하므로 신이 엎드려 조서를 읽사옵고 생각을 고치게 되었나이다. 신은 생각하기를 군신(君臣)의 사이는 부자의 의(義)와 다름이 없사온데, 아버지가 아들을 명령함은 동으로 가라든 서로 가라든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신하가 임금을 섬김은 반드시 시종이 여일(如一)해야 할 것이옵나이다. 하물며 폐하께옵서 천 년의 왕통(王統)을 이으신 뒤로부터 신이 하루 동안의 조그만 공로도 없었사온데, 만일 조그만 염치만을 고집한다면 그것도 또한 평소의 뜻이 아니옵나이다.
그러나 생각하옵건대, 신의 이번 일이 실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랄 바이오니, 다만 바라옵건대, 폐하께옵서 엄하고 공손하고 두려워하시는 마음으로써 다시 조종(朝宗)의 돈박(敦朴)ㆍ순일(純一)하셨던 정사를 행하시어 쌓인 폐단을 일소하고, 쇠진한 백성들을 휴양케 하시어, 많은 선비들이 조정에서 화목하고 만물이 야(野)에서 생을 즐기게 하옵시면, 신이 아침에 벼슬을 받고 저녁에 개유(盖帷)를 받은들 그것은 영광이 될 뿐, 다시 무엇을 후회하리이까.
봉지(鳳池 중서성(中書省))의 온실(溫室) 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의연(依然)하오나, 센 머리 붉은 마음은 몸이 이미 늙었음을 한(恨)하옵나이다. 이는 대개 성상께옵서 옛날을 상고함으로써 성인(聖人)의 포부를 발휘하시어 벼슬을 베풀어 천하의 재능(才能)을 부르심이니, 3천 명의 신하들이 모두 주 무왕(周武王)과 덕을 같이하고, 20의 큰 공이 순(舜) 임금의 사람을 알아본 것보다 더하옵나이다. 오히려 노신(老臣)의 말씀을 존중하시어 함께 호번(浩繁)한 사무를 처리하게 하시며, 여러 번 조명(詔命)을 내리시어 매양 은근한 주의를 나타내시고, 군신(群臣)의 맨 윗자리에 올려 놓고도 어진 이의 진로를 막은 죄는 책하지 않으시니, 그칠 줄을 아는 □□에 부끄럽사오며 거듭 내리시는 지성을 저버리옵나이다. 작은 힘으로 무엇을 하오리이까. 다만 하늘이 내신 상지(上智)를 우러러 믿을 뿐이오며, 외곬의 충성은 아직 있사오니 다시 추운 때에 맨 끝에 시드는 절개를 맹세하옵나이다.
[주-D001] 필부(匹夫)의 …… 빼앗았습니다 :
《논어》에 “삼군(三軍)의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어도 필부에게서 그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 하였다.
[주-D002] 삼례(三禮) :
천(天)ㆍ지(地)ㆍ인(人)의 신을 섬기는 세 가지 제사를 말한 것이다.
[주-D003] 현로(賢路)를 …… 원하였사온대 :
벼슬을 사양하는 것을, “어진 사람을 위하여 길을 비켜 준다.” 한다.
[주-D004] 완인(剜印) :
항우(項羽)가 공 있는 사람에 봉작(封爵)을 줄 때에 아까워하여 인(印)이 닳도록 손에 가지고 내놓지 못하였다 한다.
[주-D005] 개유(盖帷) :
공자가 말하기를, “헌 일산[敝蓋]를 버리지 않음은 죽은 개를 묻어 주기 위함이요, 헌 장막[敝帷]를 버리지 않음은 죽은 말[馬]을 묻어 주기 위함이다.” 하였다.
[주-D006] 주 무왕(周武王)과 …… 같이하고 :
주 무왕(周武王)이, “주(紂)는 신하 억만 명이 있었으나 억만 마음이요, 나는 신하 3천이 있는데 한 마음이다.” 하였다. 《書經》
[주-D007] 그칠 줄을 아는 :
《노자》에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는 말이 있는데, 벼슬도 끝까지 하지 말고 그칠 때가 되거든 그치라는 뜻이다.
[주-D008] 추운 때에 …… 절개 :
《논어》에, “겨울이 된 연후에야 송백(松柏)이 뒤에 시드는 것을 안다.” 하였으니, 이것은 어려운 일을 당하여야 변하지 않는 절개를 안다는 뜻이다.
12.대 문공미 사 예부상서 표(代文公美謝禮部尙書表)
곽동순(郭東珣)
하늘은 밝은 도(道)가 있어서 첫째로 구슬을 품은 허물을 벗겨 주시고, “너를 질종(秩宗)으로 삼노라.” 하시는 윤명(綸命)을 내려 주시오니, 이치에 굳이 사양할 수 없어 숫제 이 자리에 감히 나아가옵나이다. 중사(中謝)
신(臣)은 원래 장구(章句)의 썩은 선비요 두초(斗筲)의 얕은 그릇으로, 선왕(先王)의 잠저(潛邸) 때로부터 국사(國士)로 알아주심을 받아, 매양 무릎을 맞대고 하시는 말씀을 드렸사온대 드디어 등극(登極)하는 날에 이르렀나이다. 20여 년을 근로하여 진로(塵露)만한 작은 공이라도 펴고자 해서, 꾸준한 일념(一念)으로 오래 추기(樞機)의 중임(重任)을 맡아 오면서 위로는 임금을 속여 반목하는 계략(計畧)이 없었고, 아래로는 어진 이를 시기하여 방해하는 태도가 없었나이다. 그 뒤 문득 선왕께서 승하(昇遐)하시자 삼량(三良)의 순사(殉死)를 본받지 못하옵고, 높은 벼슬과 후한 녹으로 비록 작은 그릇이 가득 참[盈]을 부끄러워하였사오나, 가신 이를 보내고 계신 이를 섬김에 있어 양조(兩朝)의 권우(眷遇)를 보답하기만 생각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일에 다다라 선견(先見)의 능(能)이 없고, 운명은 원래 수의 기구함이 있사온데, 한때에 있어 명철보신(明哲保身)의 도리에 어두워서 마침내 당적(黨籍)에 빠져 원지(遠地)로 귀양갔었사오니, 산에 올라 부모 계신 곳을 바라봄에 설움이 골수에 사무쳤고, 문을 닫고 오는 손을 사절하였는데 누구와 더불어 말하였사오리이까. 그러하오나 밝으신 천일(天日)의 조림(照臨)이 있고, 안 보이는 곳엔 귀신의 화복(禍福)이 있어, 길 가는 사람들도 그 무죄한 줄을 알았사오니, 비태(否泰 길흉(吉凶))가 때가 있는지라 신은 운명으로 알고 태연히 하였나이다.
바로 전에 성상께서 영단(英斷)을 내리시고 조정의 간신들을 물리치시어 일대의 전장(典章)을 새롭게 하고 해묵은 억울한 일을 설원(雪寃)하게 하셨기에 신은 갑자기 비상한 은택에 목욕하여 무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나이다. 이에 신은 오직 전원에서 격양(擊壤)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족하온대 어찌 대궐문에 나아가 다시 성상(聖上)의 옷자락을 끌기를 바랐사오리이까. 천지의 겸하여 용납해 주시는 은혜로 구신(舊臣)을 버리지 않고 거두시어 윤음(綸音)을 발하여 전형(銓衡)을 위임하시니, 성주(聖主)의 은혜는 비록 우악(優渥)하오나 유사(有司)의 의논을 좇지 않을 수 없어, 드디어 벼슬을 예부(禮部)로 고치시고 다시 대언(代言)의 직에 영광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창안백발(蒼顔白髮)의 늙은 나이로 금고(今古)의 무상함을 느껴 눈물을 흘리고, 자수금장(紫緩金章)의 귀함으로 진신(縉紳)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였사오니, 이는 대개 성상께서 하늘이 주신 지용(智勇)과, 날마다 진보하는 총명으로 금슬(琴瑟)을 경장(更張)하시어 오늘날에 태평을 회복하시고 풍뢰(風雷)를 고무하시어 군생(群生)들에게 미더운 호령을 펴심에 자손에게 영광을 내려 지하(地下)의 충혼(忠魂)을 위로하고, 벼슬을 회복하여 조정의 여론을 존중하심이온데, 신과 같은 천졸(賤拙)한 몸이 이러한 특수한 대우를 입사오니, 입은 은혜는 이미 태산보다 무겁사오나 보답한 것은 척촌(尺寸)도 되지 못합니다. 오직 죽는 날까지 원망을 하지 않고 자책(自責)하는 마음으로 새로이 분발하여, 말로의 풍파가 어떻든 소신(所信)대로만 행할 것이오며 충성은 일월(日月)을 두고 맹세하여 결초보은(結草報恩)할 것을 기약하옵나이다.
[주-D001] 구슬을 …… 주시고 :
《좌전(左傳)》에, “필부(匹夫)가 죄가 없으나 보배 옥을 가진 것[懷璧]이 죄이다.”란 말이 있는데, 그것은 보배를 지녔기 때문에 도적의 해침을 받는다는 뜻이다.
[주-D002] 장구(章句)의 썩은 선비 :
경전(經典)의 깊은 뜻은 연구하지 못하고, 장(章)이나 나누고 구절이나 따진다는 말이다.
[주-D003] 삼량(三良)의 순사(殉死) :
진 목공(秦穆公)이 죽어서 장사할 때에 자거씨(子車氏)의 아들 세 어진 사람[三良]이 같이 무덤에 묻혔다. 《詩序》
[주-D004] 유사(有司)의 의논 :
신하들이 반대하는 의논이다.
13.군사를 파견하여 글안 적병을 섬멸했음을 사례하는 표[謝遣兵滅丹賊兵起居表]
이인로(李仁老)
동해 끝에 있는 이 나라를 어루만져 주시니, 먼 길 천리 밖에서 북신(北宸)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만년을 축수하옵나이다.
14.사표(謝表)
이인로(李仁老)
안에서 조명(詔命)을 발하시어 밖으로 위령(威靈)을 선포하옵시니, 은혜가 실로 비상하옵신지라, 감격된 눈물을 금할 수 없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외람되게도 조그만 자질로써 먼 구석에 끼어 살면서, 일찍 기봉(箕封)을 계승하여 외람되이 가업(家業)을 이어 지켜왔사온대, 갑자기 글안의 오랑캐가 방자히 서울에 들어와 침노함을 만났습니다. 그의 잔혹함이 극심하여 기어이 전제(剪除)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는데, 뜻밖에도 운운. 중소(中宵 밤중)의 진념(軫念)을 특별히 베푸시고 굽어 하국(下國)의 재난을 불쌍히 여기시어 얼른 관군(官軍)을 보내어 금방 적진(賊陣)을 격멸하여 군흉(群兇)을 모조리 주륙(誅戮)하게 하시오니, 만 백성이 모두 기뻐하옵나이다.
신이 감히 위로 향하는 충성을 다하여 보답하지 않사오리이까. 우러러 가없는 은혜를 갚고자 길이 잊지 않기를 맹세하옵나이다.
15.물장(物狀)
이인로(李仁老)
〈황제께서〉 하늘이 열어 준 운(運)을 받으시어 교화가 편방(編方)에까지 미치오니, 토산(土産)을 바치는 예(禮)에 감히 공물(貢物)을 결(缺)하오리이까. 오른쪽 목록에 있는 물건들은 박토[瘠地]의 산물이라 품질이 정기(精奇)한 것이 아니오나, 애오라지 미나리와 햇볕 쬠을 바치는 정성을 본받아 올리오니, 사초풀[菅蒯]과 솔새와 같다 하여 버리지 마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주-D001] 미나리와 햇볕 쬠 :
한 농부는 미나리를 먹고는 맛이 좋아 임금에게 바치려 하였고, 또 한 사람은 추위에 떨다가 등에 햇빛을 쬐어 보고는 그 따뜻한 방법을 임금에게 아뢰려 하였다. 그것은 모두 임금에게는 소용이 없으나 그들의 정성은 가상하다는 뜻이다.
16.금간의 사 동지공거 표(琴諫議謝同知貢擧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과장(科場)의 고시관(考試官)은 박대(博大)한 선비를 들어 씀이 마땅하온데, 성은(聖恩)이 넓고 넓어 잘못 용렬한 몸에 미치시어 사양할 도리가 없사옴에 한갓 감격한 마음만 지극히 합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식견(識見)은 얼룩쥐를 분별할 능력이 없고, 재주는 봉(鳳)을 토함에 부끄럽사오나, 요행히 풍운(風雲)의 가회(嘉會)를 만나, 일월(日月)의 말광(末光)에 의지할 수 있었사온데, 갑자기 총우(寵遇)를 입어 자주 고관을 역임(歷任)하였나이다. 옥당(玉堂)에 자리를 채워 황송하게도 내상(內相 한림(翰林))의 이름을 더럽혔고, 약성(藥省 중서성(中書省))의 높은 위로 외람되이 간관(諫官)의 일원(一員)이 되어, 우악(優渥)한 포장(襃獎)을 받았사오나, 우활하고 엉성한 식견과 국량을 부끄러워 했나이다. 힘써 노둔한 말[馬]을 채찍질하였사오나, 만(萬)에 하나도 도움이 없었고, 학문도 거의 황폐하여 열에 아홉을 잊게 되어, 책을 펴면 소상하지만 책을 덮으면 곧 잊어버려 매번 문장의 관직을 맡게 되면 우러러보나 굽어보나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뜻밖에도 지극한 인(仁)으로 구물(舊物)을 굽혀 거두시어 문득 신극(宸極)에서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과장(科場)의 기고(旗鼓)를 맡게 하시니, 내리신 어명을 돌이킬 수 없사옴에 뻔뻔한 얼굴로 스스로 취임하나이다. 고시를 맡는 것은 본디 서생의 원하는 바이므로 임명을 받음은 저희들의 영관(榮觀)이오니, 이는 대개, 우리 성상폐하께옵서 단점을 덮고 장점을 취하시며, 티를 가리고 흠을 숨겨 노진(露塵)만큼이라도 보효(報效)가 있을까 하여 전형석(銓衡石)의 권(權)을 위임하심인 줄 아옵나이다.
신은 마땅히 일월같이 밝으신 통촉과 넓게 비치시는 밝음에 의지하여, 미련한 천성을 숫돌에 갈아, 저의 도끼와 자귀를 날카롭게 해서 혹시 좋은 재목을 얻으면 기둥과 서까래 감을 만들어, 큰 집을 지음에 도움이 될까 하옵나이다. 운운.
[주-D001] 얼룩쥐를 …… 없고 :
정(鼮)은 표범무늬를 가진 얼룩 쥐. 한(漢)나라 세조(世祖)가 영대(靈臺)에서 얻은 얼룩쥐를 군신(群臣)은 모두 무슨 쥐인지 몰랐는데, 낭관(郎官) 두유(竇攸)가 그것이 《이아(爾雅)》에 있는 정이라 했다.
[주-D002] 과장(科場)의 …… 하시니 :
전장(戰場)에서는 기(旗)와 고(鼓 북)로 지휘하는 것인데, 과장(科場)도 문예(文藝)로 싸우는 것이므로 고시(考試)를 맡는 것을 기고(旗鼓)를 맡는다 하였다.
17.조좨주 충사 삼자 표(趙祭酒冲謝三字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대언(代言)의 책임이 중하옴에 본디 해박한 학문을 요하는 곳인데 은혜로 용납하시어 그 자리에 보충하여 용렬한 자질을 지나치게 추장(推獎)하오니, 자기를 반성함에 스스로 송구하여 얼굴이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나이다. 중사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사한(詞翰)의 직책 중에도 조고(詔誥) 짓기가 어렵사오니, 화려하여 알맹이가 적으면 성모(聖謨 임금의 뜻)를 멀리 창달(暢達)할 수 없고, 질박하여 문채가 없으면 또한 임금의 뜻을 한껏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옵나이다. 오직 그 글 솜씨가 칼날을 휑하니 놀리는 묘함이 있어야 비로소 손가락에 피만 내는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온데, 신과 같은 자는 글을 읽은 것이 아직 순유(醇儒)에 이르지 못하고, 전각(篆刻)함이 겨우 동자(童子) 같사오며, 동궁(東宮)의 시강(侍講)으로 일찍 청광(淸光)을 모셨으므로, 등극(登極)하신 뒤에도 그대로 오히려 지엄(至嚴)한 뜰 앞을 떠나지 않았사오나, 특기(特記)할 만한 공로가 없고 직책을 완전히 수행하지 못하자 과연 군의(群議)가 비등(沸騰)하더니 이윽고 유사(有司)의 탄핵을 입게 되어 범골(凡骨)이 천제(天帝)의 처소에 머무를 수 없으니 훌쩍 꿈을 깬 듯 하오나 단심(丹心)만은 오히려 임금 계신 데를 그리워하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리옵니다. 하온대 뜻밖에도 성상의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오히려 이 잠리(簪履)의 미신(微臣)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 마음으로 결단하사 석 자(字)를 따로이 가(加)하여 주시고 내정(內廷)의 밀시(密侍)에서 물러나자 다시 근시(近侍)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옵시니, 영광됨의 지대함이 전에 비해 어찌 덜하오리까.
이는 대개 성상폐하께서 지극한 어지심으로 더러운 것을 포용하시고, 큰 도량으로 거칠은 것을 감싸 주시어 쫓겨났던 몸을 거두어 문득 청화(淸華)한 벼슬 자리에 발탁해 주신 것인데 신이 어찌 평소의 뜻을 더욱 격려하여 옛 글을 애써 연찬(硏讚)하지 않사오리까. 그리하여 쉬지 않고 필묵(筆墨)을 힘써 적으나마 우문(右文)의 교화를 돕겠사오며, 분골쇄신(粉骨碎身)으로 맹세하여 더욱 위에 보답하는 마음을 굳히겠삽나이다. 운운.
[주-D001] 천제(天帝)의 …… 꿈을 깬 듯 :
조간자(趙簡子)가 꿈에 천제(天帝)의 처소에 가서 놀다가 깨어난 고사이다.
[주-D002] 잠리(簪履) :
한 부인이 시초(蓍草)를 캐어 광주리에 담아 놓고 우는 것을 보고 공자가 연유를 물으니 그는, “시초잠(蓍草簪)을 머리에 꽂고 나왔다가 잊어버렸습니다.” 하자, “광주리에 담긴 시초를 가지고 새로 잠(簪)을 만들면 되지 않소.” 하니, “새 잠을 만들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초소왕(楚昭王)이 오병(吳兵)에게 쫓기어서 도망갔다가 수복된 뒤에 돌아가면서 신을 잃고 기어이 찾으라 하며 말하기를, “새 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헌 신으로 도망 왔다가 그것을 차마 버릴 수 없다.” 하였다.
18.삼중선사(三重禪師) 돈유가 수좌를 사은(謝恩)하는 표[敦裕三重謝首座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윤음(綸音)의 새 명(命)이 하늘 위의 우악(優渥)한 은혜를 내리어 녹원(鹿苑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한 곳)의 늙은 중이 법석(法席)의 높은 데를 더럽히게 되오니, 분수에 넘침을 반성하옴에 한편 기쁘고 한편 송구하옵나이다. 중사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본래 천품(天稟)이 혼우(昏愚)하여 어려서 체도(剃度)를 받았사오니, 이미 승복(僧服)을 입은 바에 진실로 마땅히 산중에 숨어서 살 것이오나, 세상의 인연에 핍박되어 부득이 아직도 서울에서 배회하고 있사옵나이다. 일찍 이름이 비필(批筆 임금의 교지(敎旨)를 내리는 것)에 올라 있고, 또 일찍이 명찰(名刹)에서 밥을 축내었사오나, 다만 곧은 성품의 고집으로 인하여 총문(叢門 승문(僧門))의 추천해 줌을 얻지 못하여, 오랫동안 1급(級)에 머무르면서 몇 해를 보내었나이다. 후배들이 먼저 채찍질해 달려 다투어 머리 위에서 짓밟아도, 묵은 사람은 소매를 여미고 항상 꼬리에 앉아 어정거려야 했사온대 뜻밖에도 우악(優渥)한 성지(聖旨)로써 승문(僧門)의 최고 직품으로 발탁해 주시오니, 물러와 영행(榮幸)을 생각하옴에 한갓 감명(感銘)만 깊도소이다.
이는 대개 운운. 두터운 덕으로 거칠은 것을 포용하시고 깊은 인(仁)으로 단점을 덮어 주시어 비록 노쇠(老衰)한 물건이라도 흐뭇한 은택을 입게 함이오니, 신이 어찌 삼천 위의(威儀)를 갖추어 더욱 범행(梵行)을 닦고 억만세를 가리켜 황령(皇齡)을 배(倍)나 축수하지 않사오리이까. 운운.
[주-D001] 체도(剃度) :
머리를 깎고 도첩(度牒)을 받아 중이 되는 것이다.
19.사 지공거 표(謝知貢擧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조그만 일을 처리함에도 두 번 하면 혹시 어긋나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 인재를 골라 뽑는 책임은 한 번 맡는 것도 오히려 옳은 것인지 모를 일이온데, 하물며 신은 지극히 어두운 안목으로 고시(考試)를 관장함이 너무 여러 번이어서 힘에 견디기 어려운 것이겠습니까. 사양함이 결코 망령된 허식(虛飾)이 아니온대 재가(裁可)의 성지(聖旨)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극진히 타이르시는 윤음(綸音)을 받자왔나이다. 중사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부족한 재질과 기문(記問)의 학(學)으로서, 재상의 자리는 본래 바란 바가 아니었사온데, 연줄을 타 이 높은 벼슬에 이르게 되었고 사부(詞賦)는 비록 자기의 소업(所業)이오나 허박(虛薄)하여 순유(醇儒)가 되지 못하였사온데 잘못 성상의 알아주심을 입어 여러 번 시관(試官)의 자리를 맡았나이다. 방(榜)이 발표된 뒤에 여러 사람들이 불평을 하여 흰 땀이 마르지도 않았사온데, 또 이 책임을 맡으오니 붉은 얼굴이 다시 두꺼워지오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엎드려 절해 받음에 낭패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이는 대개 운운. 사람의 단점을 덮어 주고 미약한 것을 용납해 주시어 식견이 부족한 자에게까지 이 재능을 뽑는 자리를 주심이오니, 신이 삼가 마땅히 글을 헤치어 바탕을 알아봄으로 나라를 위해 인재를 구하되 혹시라도 산해(山海)에 빠뜨려진 보배가 있는가 찾아 얻어서 조금이나마 조정의 이용에 도움이 되게 할까 하옵나이다.
[주-D001] 기문(記問)의 학(學) :
《예기》에 “기억이나 하고 물어보는 학문은 남의 스승이 될 수 없다.” 하였다.
20.사 지공거 표(謝知貢擧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과거를 보아 인재를 뽑는 권한은 실로 큰 솜씨를 요하옵는 법인데, 어명(御命)이 신 같은 조그만 몸에 잘못 미치오니, 물러와 은영(恩榮)을 생각하옴에 기쁘고 송구함이 아울러 깊사옵나이다. 중사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한낱 썩은 선비로 천성이 우매(愚昧)하여 약관(弱冠)에 과거를 보았사오나 부끄럽게도 금방(金榜)에 이름을 쓰지 못하였고, 중년에야 벼슬하여 요행 옥당(玉堂)의 자리를 더럽혔습니다. 그러나 위로는 학사(學士)의 반열(班列)보다 낮았사오며 아래로는 공봉(供奉)의 자리만도 못하여 머리털이 학(鶴)처럼 희도록 허리에 서대(犀帶)를 감지 못하였었는데 성상께서 즉위하신 뒤에야 비로소 청운의 걸음을 펴서 오래 제고(制誥)의 직에 있었으나 성모(聖謨)를 아름답게 윤색(潤色)하지 못하였고, 두 번 고시관(考試官)에 임명되었으나 영준(英俊)을 망라(網羅)하지 못하였사오니, 감히 성상의 넓으신 도량이라 하여 종전(從前)의 허물을 책망하지 않으시기를 바랐사오리이까. 바야흐로 재부(宰府)의 벼슬을 제수(除授)하시고 이에 과장(科場)의 고시(考試)를 맡기시오니, 이런 막중한 관직은 세상에서 허여하는 유장(儒匠)으로도 한 번도 지내지 못한 이가 있사온대, 신이 홀로 무슨 기특한 재주를 가졌길래 무릇 세 번이나 외람되게 임명되었단 말입니까.
이는 대개 운운. 정치는 준재(俊才)를 부름을 먼저하고, 덕은 문(文)을 닦음을 숭상하여 우신(愚臣)이 독서에 자못 힘쓴다 생각하시고 오늘 시사(試士)에 임(臨)하게 하심이오니, 신이 삼가 마땅히 고예(考藝)에 온갖 정력을 바쳐 박옥(璞玉)을 안은 숨은 인재를 거두어, 알뜰히 장식(裝飾)해서 조정에 들여보내어 수의(垂衣)의 교화를 돕고자 하옵나이다.
21.사 동지공거 표(謝同知貢擧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과장(科場)에서 재능을 시험함은 본디 저울과 같은 감식(鑑識)을 요하는데, 위에서 내리신 명이 담장에 얼굴을 대고 있는[墻面] 듯한 저에게 잘못 가(加)하오니, 고요히 무능한 자신을 반성하옴에 송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깊사옵니다. 중사
그으기 생각하옵건대, 사람을 알기 쉽지 않음은 에로부터요 지금뿐이 아니오니, 곱고 추하고 길고 짧음은 보아서 알 수 있으나, 굽고 곧고 어질고 어리석음은 뜻으로 헤아리기 어려운데 이는 대개 재주는 얼굴에 감추어져 있고, 지혜는 마음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 아니오리이까. 그러므로 사율(詞律)의 과(科)를 벌여 흉중(胸中)에 쌓인 것을 시험하고자 함이오니, 문(文)은 그럴듯하면서 바탕이 그른 자가 있고, 혹 재주는 부족하고도 행실이 바른 자가 있어, 시권(試券)을 읽을 때 종일 되풀이하여도 분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방(榜)이 발표된 뒤에도 사람들의 평론[毁譽]이 어떠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신과 같은 자는 조정의 반열(班列)에 덧붙어서 문원(文苑)에 길을 찾는 자로서, 학문에 근거가 없이 부허(浮虛)하여 실(實)하지 못하온데, 운명이 때와 함께 와서 솟고 뛰어 앞으로만 나가, 매양 자계(資階)를 뛰어넘어 청요(淸要)를 역임해서 제고학사(制誥學士)의 중임(重任)을 어깨에 짊어졌고, 과거 시관(試官)의 높은 권한도 대강 손에 쥐었나이다. 그러하오나 그때에 선비를 잃었다는 비난이 없지 않아, 신이 몸 둘 바를 알지 못했던 일이 바로 어제와 같사온데, 어찌 뜻밖에 성명(聖明)께옵서 흠점을 다 씻으시고 다시 고선(考選)을 관장(管掌)하는 권한을 내려 주시어 다시 현사(賢士)를 놓친다는 비난을 더욱 무겁게 하옵시니, 사양하여도 재가(裁可)되지 않고 물러와 마음에 편안하지 못하옵나이다.
이는 대개 운운. 정사는 우문(右文)을 숭상하시고 인(仁)으로 단점을 덮어 주시어 이 노쇠한 물건으로 하여금 분에 넘치는 영광을 더럽히게 함이오니, 신이 어찌 감히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쓰지 않겠습니까마는 마음은 잠시도 놓이지 않사옵니다. 산에 들어가 많은 나무 속에서 좋은 재목을 고름은 큰 대목이 아니면 분변하기 어렵사오나, 저자를 지나다가 기특한 보배를 보면 보통 사람도 그것을 사랑하고 기뻐할 줄을 아는 법이오니, 진실로 볼 만한 작자(作者)가 있다면 어찌 끝내 눈이 어두오리이까. 한 영재(英材)라도 얻어서 적이 성대(盛代)에 이익되게 할까 하옵나이다. 운운.
[주-D001] 담장에 …… 대고 있는 :
《서경》에 “학문하지 않은 자는 낯을 담에 대고 선 것과 같다.” 하였다.
22.사 감시 시원 표(謝監試試員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인재를 뽑는 소임이 중하옴에 권한을 맡길 만한 사람이 어렵사온데, 순순(諄諄)한 명이 하늘(임금)로부터 신에게 내려와 손을 빌리시니, 자신을 반성함에 송구하여 얼굴을 들 수 없사옵나이다. 중사(中謝)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천성이 우활(迂闊)하고 위인이 느리고 둔하여 일찍부터 학(學)을 즐겨 형안(螢案)을 대하여 피곤함을 잊었삽고, 말년에는 벼슬에 끌려 두편(蠹編 낡은 책)을 덮고 읽기를 게을리하였나이다. 그 뒤 승지(承旨)의 직을 맡음에 미쳐, 다시 높은 시렁에 묶어 두었던 글을 뒤져내어, 그 경술(經術)을 공부하는 부지런함이 마치 전일에 과거에 급제하기를 위함 같았사오나, 워낙 노쇠한 탓으로 대부분 유망(遺忘)이 많습니다. 이제 뜻밖에도 옛것을 상고하시는 준철(濬哲)하신 성심(聖心)으로 오히려 신의 독서에 근고(勤苦)함을 기억하시어 특히 총훈(寵訓)을 내려 과장(科場)의 시관(試官)을 명하시오니, 돌아보건대, 가죽 속의 춘추가 없이 어찌 눈앞의 주(朱)와 자(紫)를 분변하오리이까. 사양하여도 위의 뜻을 돌이킬 수 없겠삽기에 처음에는 마음에 송구하였사오나, 정이 이미 알아주심에 감격되어 문득 눈물이 흐르오며, 남에게 부러움을 받을 만큼 이 몸이 더욱 영광된 줄을 알겠나이다. 이는 대개 성상폐하께옵서 천하의 많은 인재를 망라하고자 하시어 먼저 근시(近侍) 반열의 말단 선비를 영광스럽게 하심이오니, 이미 후한 녹(祿)으로 길러 주시는 터에 또 인재를 판정하는 권한까지 주옵시니, 우러러 이 은혜를 생각하옴에 무엇으로 보답하오리이까.
재주를 고사하여 사람을 앎은 비록 신의 부족한 점이오나, 어진 이를 얻어 나라를 도움은 지금이 바로 그때이오니, 다만 마땅히 있는 힘을 다하여 둔한 것을 갈아 날카롭게 하고 티끌을 모아 산을 이룸으로써 천 길의 높이를 북돋고자 하오며, 모래를 뒤적여 금을 골라냄으로써 혹 쌍남(雙南)의 보배를 얻을까 하옵나이다. 운운.
[주-D001] 형안(螢案) :
진(晋)나라 차윤(車胤)은 밤에 글을 읽는데 촛불이 없어 반딧불을 많이 모아 엷은 비단 주머니에 넣어 촛불을 대신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말.
[주-D002] 가죽 속의 춘추 :
진(晋)나라 저계야(褚季野)는, “입으로 말하지 아니하여도 가죽 속의 춘추[皮裡春秋]가 사시(四時)의 기운을 다 갖추었다.” 하였다. 그것은 마음속에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주-D003] 쌍남(雙南)의 보배 :
한(漢)나라 장형(張衡)의 사수시(四愁詩)에, “무엇을 주랴, 쌍남금이다.” 하였다. 쌍남금은 남방에서 나는 품질 좋은 금이다.
23.사 제 좌간의대부 표(謝除左諫議大夫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간서(諫署)의 높은 자리는 진실로 한직(閑職)이 아니온데, 성의(聖意)로 발탁하시어 사양함을 용납하지 않사오니, 분수를 살피옴에 마땅하지 않사오니 부끄러운 낯을 어디 두오리이까. 중사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젊어서 졸눌(拙訥)하고 늙어서는 더욱 우소(迂疏)하여,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다행히 천 년 만의 제회(際會)를 얻어 시종(侍從)에 발탁되어, 제고(制誥)를 10년 동안 관장(管掌)하였으므로 바야흐로 제량(鵜梁)의 풍자(諷刺)를 두려워하는 터이온데 다시 봉소(鳳沼 중서성(中書省))의 놀이에 참여하게 되오니, 신이 대관절 무슨 재주가 있기에 여러 번 이 자리에 드옵나이까. 돌아보건대, 한 말씀 보좌해 드린 것 없이 무릇 세 번이나 들어가 영광을 더럽힘에 관반(官班)이 그때보다 훨씬 높고 녹봉(祿俸)이 오늘에 지나치게 풍부하오니, 정이 속에서 감격되어 눈물이 밖으로 떨어지옵나이다.
이는 대개 운운. 성상께옵서 선비를 얻으심이 주(周)나라보다도 많고, 어진 이를 예우(禮遇)하심이 외(隗)로부터 시작하사, 용렬한 인품으로 하여금 또한 후한 은혜를 입게 함이오니, 신이 어찌 노둔한 자질을 채찍질하고, 둔한 그릇을 갈고 갈지 않으오리이까. 평소의 포부를 다 기울여 진실로 위에서 알아주심을 보답할 수 있다면, 어찌 작은 몸을 아껴 공론(公論)을 상달(上達)하지 않사오리이까.
운운.
[주-D001] 제량(鵜梁)의 풍자(諷刺) :
《시경》 조풍(曹風)에 있는 구절인데, 그 관직에 있지 못할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직책을 다하지 못함을 풍자한 시이다.
[주-D002] 주(周) …… 많고 :
주(周)나라 문왕 초년에 인재를 잘 길러서 선비가 많이 나왔다 한다.
[주-D003] 외(隗)로부터 시작 :
연 소왕(燕昭王)이 곽외에게, “어찌하면 인재를 모을 수 있을까.” 하고 물으니, “옛날에 어느 임금이 천리마(千里馬)를 사오라고 천금(千金)을 주어 보냈더니, 천리마가 마침 죽었으므로 그 사람은 죽은 천리마의 머리를 오백 금을 주고 사 가지고 와서, ‘죽은 천리마의 뼈를 오백 금이나 주고 샀다는 소문이 퍼지면 장차 천리마를 가진 자가 모두 우리에게로 몰고 올 것입니다.’ 하더니, 과연 1년도 못 되어 천리마가 세 필이나 왔다 합니다. 왕께서도 천하의 인재를 구하시려거든, 이 외(隗)에게서 예우하기를 비롯하십시오. 그러면 외(隗)보다 나은 인재들이 소문을 듣고 곧 모여들 것입니다.” 하였더니, 과연 그대로 되었다.
24.사 제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 대학사 표(謝除知門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大學士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그릇이 차면 기울어지는 것이므로 논사(論思 집현전(集賢殿))의 자리를 피하기를 빌었더니, 한 번 내리신 윤음(綸音)을 돌이키지 않으시고 도리어 위자(慰藉)의 말씀을 더하옵시니, 공경히 훈서(訓書)를 읽사오매 오직 감격됨을 아옵나이다. 중사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천성이 편협하고 사무에 우활하고 엉성하여 전업(前業)은 문장이로되 오히려 조룡(雕龍 훌륭한 솜씨)의 솜씨를 드날리지 못하였사온대 하물며 군무(軍務)엔 생소한지라 일찍이 무슨 한마(汗馬)의 공이 있었사오리이까. 한 몸을 돌아보매 숫제 조그만 공로도 없어, 방원(方圓)의 쓰임에 적당하지 못한 몸이 또 진퇴(進退)의 기미를 짐작하지 못하여 늘그막에 말료(末寮)에 묻혀 분수에 만족하였는데 뜻밖에 노쇠한 물건이 명성(明聖)한 조정을 만나, 여러 번 벼슬이 승진하고 자급(資級)이 뛰어올라, 그 때문에 곧 요로(要路)에 오르고 고위(高位)에 이르렀나이다. 바야흐로 은장(銀章)을 차고 추부(樞府)의 영직(榮職)을 제수받자, 문득 금인(金印)을 허리에 띠고 일약 봉각(鳳閣)의 놀이에 참예하여 앉은 자리가 따스하기도 전에 직함(職銜)이 문득 고쳐졌나이다. 하물며 대학사(大學士)의 칭호는 본래 서생(書生)의 가장 높이는 자리이온데, 돌아보건대 신이 무슨 재능이 있어 이런 발탁을 받사오리이까.
이는 대개 운운. 성상께옵서 선(善)을 구하심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시고, 사람을 씀에 장점만을 취하시어 노쇠한 몸까지도 특수한 은명(恩命)에 목욕하게 하심이오니, 신이 어찌 주야로 부지런히 일하고 이험(夷險 평탄한 곳과 험한 곳)에 변함이 없지 않사오리이까. 조그만 재목이 비록 기둥과 들보는 되지 못할망정, 확고한 뜻만은 금석과 같이 변하지 않으리이다.
운운.
[주-D001] 방원(方圓)의 쓰임 :
모날 데는 모나고 둥글 때는 둥글어서 적당하게 변통한다는 뜻이다.
25.사 제 추밀원부사 좌산기상시 보문각학사 표(謝除樞密院副使左散騎常侍寶文閣學士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중추(中樞)는 지밀(至密)한 자리요 서성(西省)은 화려한 벼슬이라, 아득히 구름 위와 같아 일생에 이르기 어려우리라 생각하였사온데, 조그만 못난 자질로 오늘에 이에 오르게 되오니, 물러나 과람함을 살피오매 꿈결인가 의심되옵나이다. 중사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우매하여 일을 알지 못하고 곧아서 모남을 떠나기 어렵사오며, 문(文)은 졸속(拙速)하여 도무지 좋은 구절이 없되 사람들이 혹 망령됨을 허하였으니, 글을 범연히 보아 정밀한 데 이르지 못한 것을 세상이 어찌 다 알리이까. 이러므로 허명(虛名)을 얻었사오니, 대개 무엇으로 위에 들릴 만하였사오리이까. 그러하오나 벼슬에 들어온 지 몇 해가 안 되어 경력(經歷)한 지위가 이미 열경(列卿)을 넘었사오니, 1천 년의 조우(遭遇)가 글자대로 가회(嘉會)요, 19년의 제고(制誥) 맡음이 가히 영화로운 놀음이었나이다. 세 번이나 간관(諫官)으로 임명되고 두 번이나 학사를 배(拜)하여, 그 동안 열력한 사림(詞林)의 청선(淸選)만으로도 오히려 족히 남자의 소원을 성취하였사온데 하물며 이 추밀의 벼슬은 본래 범용의 바랄 바가 아니겠습니까? 뜻밖에 우악한 특은이 갑자기 이 조그만 몸에 미쳐, 두 귀 밑에 흩날리는 서리는 비록 형용은 말랐다 하오나, 쌍으로 인도하는 금의(金衣)가 문득 길거리의 광채가 되오니, 신이 여기에 이르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바로소이다.
이는 대개 운운. 성상께옵서 예지(睿知)를 발휘하옵시고, 영웅을 부리어 어진 이의 진출할 길을 활짝 열어놓으시고, 아울러 보잘것없는 용재까지도 채용하심이오니, 신이 어찌 평소의 조행을 더욱 연마하고 다시금 어두운 식견을 씻어버리지 않사오리이까. 임금께 바칠 것은 오직 세한(歲寒)의 절개가 있사오며, 진실로 이 뜻을 더럽히오리까. 하늘이 내려다보는 데서 맹세하옵나이다.
[주-D001] 쌍으로 인도하는 금의(金衣) :
출입할 때에 누른 옷 입은 하인이 앞에서 인도한다는 뜻이다.
[주-D002] 세한(歲寒)의 절개 :
겨울이 된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松柏]의 절개를 안다는 말을 인용한 것으로 변치 않는 충절을 말한다.
26.모정 잔치에 어가가 행행하여 이제시를 하사하심을 진강후가 사례하는 표[晋康侯謝駕幸茅亭曲宴次賜御製表]
이규보(李奎報)
신(臣) 모(某)는 아뢰옵나이다.
어제 성자(聖慈)께옵서 신이 지은 모정(茅亭)에 납시어, 곡연(曲宴) 석상에서 어제시(御製詩)를 선시(宣示)하셨나이다.
옫색(玉色 임금의 안색)이 인자(仁慈)함을 보이사 연회까지 참여하여 주시고, 운장(雲章 임금의 글이나 글씨)의 빛나는 글을 지으사 특별히 전아(典雅)하고 고운 시(詩)를 선시(宣示)하시니, 감격하게 봉대(奉戴)하옴에 정신이 아찔하나이다. 중사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본래 원대한 식견이 없이 요행히 성대(盛大)를 만나, 오등(五等)의 봉작(封爵)을 더럽혀 오랫동안 모기가 산을 진 듯한 중책(重責)을 맡았었고, 일구(一區)의 정자를 지어 개구리가 우물에서 뛰기를 기약하였나이다. 이 조그만 정자는 조망(眺望)이 꽤 좋아 만경(萬景)이 안계(眼界)에서 도망할 수 없고, 사방을 손바닥 위에 어루만질 만하옴에 따뜻한 햇볕을 쬐여보고 지존(至尊)께 드리려 하였으니, 생각이 어림도 없었사오나 물에 발계(祓稧)하는 가절(嘉節)을 당하여 어찌 이 좋은 기회를 저버리이까. 그러므로 외람하다는 꾸짖음을 잊고 감히 유관(游觀)을 청하였사온대 성상께서 들어 주시어 거둥을 허락하셨나이다.
묘한 춤, 맑은 노래를 모두 국색(國色)에서 불러오고, 종친(宗親)과 근신(近臣)들만이 빈연(賓筵)에 모시어, 순악(舜樂)을 바야흐로 연주하자 고종[堯鍾]을 자주 기울이는 자리에서 성정(聖情)을 시로 읊으시어 어필(御筆)로 친히 쓰시오니, 봉(鳳)을 수놓은 듯한 문장과 난새가 춤추는 듯한 필법(筆法)이 둘러서서 배관(拜觀)하기에 영광스럽사온데 어찌 감히 화답할 생각을 하오리이까. 황금으로 새겨서 화각(華閣)에 걸어 놓으니, 28자는 바로 열수(列宿)가 빛을 내는 듯, 백천만 년인들 어찌 영주(靈珠)가 광채를 감추오리이까. 진적(眞蹟)을 간수하여 자손들에게 전시(傳示)하려 하옵나이다. 운운.
[주-D001] 진강후(晋康侯) :
최충헌(崔忠獻).
[주-D002] 오등(五等)의 봉작(封爵) :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 5등의 곽작을 말한다.
[주-D003] 물에 …… 가절(嘉節) :
옛 풍속에 3월 상사(上巳 지금은 초 3일로 함)에 물가에 가서 재앙을 씻어 버리고 술을 마셨는데 그것을 불계(祓禊)라 하였다.
[주-D004] 고종[堯鍾] :
요(堯)가 술을 천 종(千鍾)이나 마시었다 한다.
[주-D005] 28자는 바로 열수(列宿) :
하늘의 별에 각(角)ㆍ항(亢)ㆍ저(氐)ㆍ방(房) 등 28수(宿)가 있으므로, 칠언시(七言詩) 사구(四句) 28자를 거기에 비한 것이다.
27.임평장 사 어전부곡연 표(任平章謝御殿赴曲宴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천전(天殿)에 자리를 펴사 따로이 어연(御宴)을 배설(排設)하셨는데, 정사(鼎司 삼공(三公))에 자리를 더럽혔음에 영광스럽게도 부름을 받자오니, 물러와 영행(榮幸)을 생각하니 다만 송구할 뿐이로소이다. 중사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성상폐하께옵서 하늘의 무위(無爲)를 본받으시고, 고요함을 숭상하는 도(道)를 법(法)하시어 만기(萬機) 중에도 한가한 겨를을 타 하루의 놀이를 허하시고 오후(五侯)의 종친(宗親)을 초청하니, 오직 근척(近戚)뿐이요 양부(兩府)의 중신(重臣)들을 부르셨으나 워낙 몇 분이 안 되옵니다. 신과 같은 자는 두초(斗筲)와 같이 얕은 그릇으로 균축(鈞軸 정승)의 높은 자리에 참여하였사오나 “술을 빚음에는 오직 누룩이라.”는 은(殷)나라의 어진 정승이 아님을 부끄럽게 여기고, 들의 쑥[野苹]을 먹으면서 외람되이 주(周)나라 손님들의 열(列)에 참가하였나이다.
기쁜 정이 바야흐로 흡족하여 어사(御賜)하시는 술이 더욱 많으니 떨어지는 이슬에 흠씬 젖고 균천(鈞天)의 음악을 꿈에 들었나이다. 은혜에 감격하여 곧 취해서 길에 부축하여 돌아왔사오니, 이 비상한 기우(奇遇)를 생각하옴에 목숨이 다하도록 어찌 그 은혜를 갚사오리이까. 운운.
[주-D001] 오후(五侯) :
한(漢)나라 성제(成帝)가 외척(外戚) 다섯 사람을 한 날에 후(侯)로 봉하였으므로 오후라 불렀다.
[주-D002] 술을 …… 누룩이라 :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임명하면서, “만일 술을 만드는 데 비유한다면 너는 누룩이 되라.” 하였다.
[주-D003] 주(周)나라 …… 참가하였나이다 :
《시경》의 〈녹명편(鹿鳴篇)〉에 있는 구절인데 조정에서 손을 연회하는 시이다.
[주-D004] 균천(鈞天)의 …… 들었나이다 :
조간자(趙簡子)가 꿈에 천상에 가서 균천(鈞天)의 음악을 들었다 한다.
28.금 내문유 육관 사 선사 표(禁內文儒六官謝宣賜表)
이규보(李奎報)
신 모 등은 아뢰옵나이다.
신 등이 생각하옵건대, 성상폐하께서 진강후(晋康侯)의 모정(茅亭)에 거둥하사 어제(御製)하신 시(詩)를 보옵고, 삼가 그 운(韻)에 의지하여 각각 두 수를 화답하여 뜰 아래에 올렸사온대 폐하께옵서 술과 과일을 하사(下賜)하셨나이다.
질장구를 치는 속음(俗音)으로 우러러 훈풍곡(薰風曲)을 화답하였삽더니, 윤명(綸命)을 내리시어 모두 이슬로 풀을 적셔 주는 듯한 은혜를 입히시오니, 엎드려 배수(拜受)하옴에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성상폐하께옵서 하늘이 내신 문사(文思)와 날마다 새로우신 제작(製作)으로 국가의 한가한 때를 당하여 천지가 청화(淸和)한 철을 즐기시되 자소(紫宵)의 선장(仙仗)을 거느리고 장차 이궁(離宮)에 거둥하시니 옥보(玉步)를 후번(侯藩 진강후의 집)에 머무르사 곡연(曲宴)에 임하여 주셨나이다. 용안(龍顔)이 더욱 기뻐하시고 봉조(鳳藻 임금의 글)가 활짝 꽃 피우니, 육의(六義)의 근원을 잇고 삼신(三辰)의 빛남을 가리울 만하였나이다. 옥자(玉字)를 새겨 이루니 우혈(禹穴)의 글씨와 비교할 만하고, 봉수(鳳簫)에 작곡하여 넣으니 순정(舜庭)의 음악에 배합함직하였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 등은 금서(禁署)에 봉직하는 몸으로 신장(宸章 임금의 글)을 놀라며 뵈옵고, 스스로 부족한 재주를 잊고 감히 빛나는 어제(御製)를 이었삽더니, 해와 달이 떠오른 데에 깜박거리는 작은 빛이 비록 부끄럽사오나, 하늘과 땅이 확 트여 모든 것을 용납하는 큰 도량을 보이시어 특별히 장려(獎勵)를 더하시고 진기한 반사(頒賜)를 내리우시니, 안주는 실로 천하에 드문 풍미(風味)요, 술은 실로 유하(流霞)의 자액(滋液)이옵니다. 신 등이 무슨 요행으로 문득 이러한 영광을 입사옵니까. 이미 실컷 배불리 먹고 이미 취하도록 두루 마심에 은혜에 감격하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북궐(北闕)을 향해 구천(九天)의 먼 곳에서 절하오며, 축수(祝壽)의 정(情)이 깊어 〈무너지지 않는〉 남산을 가리키며 만세를 부르옵나이다. 운운.
[주-D001] 훈풍곡(薰風曲) :
순(舜)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남풍이 훈훈하다[南風之董芳].”는 노래를 부르매 신하들이 화답하였다.
[주-D002] 육의(六義) :
시(詩)에 육의(六義)가 있으니 부(賦)ㆍ비(比)ㆍ흥(興)ㆍ풍(風)ㆍ아(雅)ㆍ송(頌)이다.
[주-D003] 우혈(禹穴) :
회계산(會稽山)에 있는 우(禹)의 유적인 우혈에 전자(篆字)로 새긴 옛 비석이 있다.
29.석곡환을 하사하심을 유공이 사례하는 표[柳公謝賜石斛丸表]
이규보(李奎報)
신 모(某)는 아뢰옵나이다.
운운. 천금의 진귀한 약을 특별히 구병(救病)의 방문으로 하사하시오니, 6척 병구(病軀)가 이미 갱생의 희망은 있사오나, 황송함을 어찌하오리이까. 봉대(奉戴)하여 몸 둘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중사(中謝)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저번에 풍비병(風痹病)에 걸려 분에 넘친 관직을 사면하옵고 몸은 비록 개구리 우물 속에 물러와 휴양하면서 우러러 천은(天恩)을 감사하고 있사오나, 아직도 병상(病床)을 떠나지 못하여 해가 바뀌도록 누워서 백방으로 치료하여도 낫지 않고 오기(五氣)가 서로 어긋났나이다.
이 석곡환이란 명약(名藥)은 실로 금편(金篇 옛 의서(醫書))의 유결(遺訣)로서 정기를 보(補)하고 몸을 이익하게 함이 이미 의서(醫書)에 나타나 있고, 근골(筋骨)을 장하게 하며 몸을 가볍게 함이 또 의원들에게도 주지(周知)되어 있사오나, 내부(內府)의 비장(秘藏)이 아니면 인간에서 쉽게 구하기 어렵삽더니, 뜻밖에 지극히 인자(仁慈)하신 성상께서 굽어 옛 물건을 불쌍히 여기시어 좋은 의원을 명하여 의술을 베풀게 하고 따뜻한 조서(詔書)를 내려 은혜를 적시시니, 미처 받잡기 전에 다시 생각하여 보옵건대, 평소에 양생(養生)하는 법을 몰라 이런 중병(重病)에 걸렸사오니, 제 어찌 나라를 고치는 말씀을 올려 보탬이 있게 하였사오리까. 아무런 공(功)도 없이 하사품을 받자오니 스스로 부끄럽사옵나이다.
부지런히 복용(服用)함으로써 고대 신기한 효험을 보아 장차 한단(邯鄲)의 옛 걸음을 회복하여 안자(晏子)의 절름발이를 면하고자 하옵나이다. 진실로 여생을 보전하면 어찌 뒤의 보답함을 잊으오리이까. 운운.
[주-D001] 오기(五氣)가 서로 어긋났나이다 :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의 오기가 사람의 오장(五臟)에 각각 분배되어 있다 한다.
[주-D002] 나라를 고치는 말씀 :
상등 의원은 나라를 치료하고, 하등 의원은 병을 치료한다는 옛말이 있다.
[주-D003] 안자(晏子)의 절름발이 :
안자(晏子)는 극자(郤子)의 오(誤)가 아닌지 모르겠다. 안자의 절름발이는 상고할 데가 없고, 극자(郤子 영극(郢克))의 절름발이는 《좌전(左傳)》에 있다.
30.재제사 차공 약송 사사 연서경 공관 표(齋祭使車公若松謝賜宴西京公館表)
이규보(李奎報)
신 모는 아뢰옵나이다.
운운. 영광스럽게 기도(綺都)를 밟아 바야흐로 별처럼 달리는 역마(驛馬)를 멈추고 외람되이 빛나는 회에 참가하여 문득 이슬에 젖는 듯한 성은(聖恩)을 입사오니, 엎드려 아름다운 명령에 절하고 감격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중사(中謝)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마음은 평소에 공사(公事)에만 바치기로 기약하였사오나 재주가 사자(使者)로서 부족한 몸이지만 평양구(平壤區)에 이르러 빛나게 한가(漢家)의 절(節)을 가지고 대동강 물을 건너며 박망후(博望侯)의 선사(仙槎)를 타는 양하였삽더니, 뜻밖에 성상폐하께옵서 굽어 사신(使臣)의 노고(勞苦)를 긍휼히 여기시고 멀리 자애(慈愛)를 보이시는 예(禮)를 주시어 옥도마[玉俎]의 팔진미(八珍味)가 비단 무늬처럼 섞여 있고, 운뢰(雲罍)의 구온(九醞)이 별마냥 떴사오니, 신이 어찌 의(義)에 배불리 먹고 인(仁)을 마시며 정(情)을 씻고 걱정을 씻어버리지 않사오리이까. 일을 봄에 오직 공경하여 가엾은 임금의 아름다움을 받들겠사오며, 나라의 위령(威零)에 의지하여 임금의 명(命)을 욕되게 하지 않기를 기약하옵나이다. 운운.
[주-D001] 박망후(博望侯)의 선사(仙槎) :
한 무제(漢武帝)가 박망후 장건(張騫)을 대하국(大夏國)에 사신으로 보내었는데 떼배를 타고 은하수에 올라갔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주-D002] 운뢰(雲罍)의 구온(九醞) :
운뢰는 구름과 용을 무늬 놓은 술항아리며, 구온은 한 무제(漢武帝)가 정월 초하루에 술을 빚어 8월에 익으므로 구온이라 칭하였다.
31.사제 조의대부 국자좨주 한림시강학사 표(謝除朝議大夫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높은 계급 맑은 직위(職位)는 대개 불기(不覊)의 선비를 기다리는데, 듣고 본 것이 적은 자로서 갑자기 분수 아닌 영광을 더럽히게 되오니, 사양하여도 면할 길이 없는지라, 한갓 놀라고 부끄러움만 깊도소이다. 중사(中謝)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기능(器能)이 천근(淺近)하고 가세(家世)가 평미(平微)하여, 젊었을 적에는 철을 몰라 망령되이 붕새처럼 치솟을 뜻을 가졌으나, 늦도록 아직도 출세를 하지 못하여 오래 자복(雌伏)의 탄식만을 하다가, 성년(盛年)이 지난 뒤에야 바야흐로 미록(微祿)을 받게 되었사오니, 구학(溝壑)에 쓰러져 떨어지기를 면하였음만도 행(幸)이온대, 어찌 또 풍운(風雲)에 높이 솟아오르기를 기약하였사오리이까. 그러나 성조(聖朝)를 만남에 이르러 고관(高官)에 임명되어, 액원(掖垣)은 국론(國論)을 내는 요지(要地)이거늘 일찍이 7년간이나 자리를 채웠고, 문합(文閤)은 성문(聖問)을 봉답하는 비조(秘曹)인데 무릇 다섯 돌이나 은총을 훔쳤사오니, 바야흐로 직무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기롱이 있을까 근심하는 터에 다시 높은 자리에 올라 앉게 되었습니다. 하오나 공부에 열중하지 않고 빈둥대는 청금(靑衿)들을 감독함에 있어 사범(師範)이 못 된다면 어찌 할 것이며, 붉은 책상[赭案 임금의 책상]을 모셔 토론함에 있어 내세울 만한 재주가 없을 것이오니, 임명장을 열어보자 눈물이 줄줄이 흐르옵나이다.
이는 대개, 운운. 정치를 하심이 정관(貞觀)의 처음 같으시고, 현자(賢者)를 예우(禮遇)하심은 곽외(郭隗)로부터 시작하시어 신(臣) 같은 용품(庸品)을 거두사 성상의 특이한 은혜를 입게 함이오니, 신이 어찌 더욱 첫 마음을 가다듬고 애써 전일의 학업을 생각하기에 힘쓰지 않사오리이까. 진실로 우자(愚者)의 일득(一得)이라도 있으면 적이 큰 은혜에 만분(萬分)의 일이라도 돕겠나이다. 운운.
[주-D001] 자복(雌伏) :
웅비(雄飛)의 상대되는 말인데, 암컷처럼 가만히 엎드려 있다는 말이다.
[주-D002] 정관(貞觀) :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年號). 정관 초년(初年)에 지극한 정치를 이룩했었다.
[주-D003] 우자(愚者)의 일득(一得) :
어리석은 자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 얻는 것이 있다는 옛말이 있다.
32.임상공유 사 제 추밀부사 이부상서 표(任相公濡謝除樞密副使吏部尙書表)
이규보(李奎報)
신 모(某)는 아뢰옵나이다.
천지의 은혜는 처음과 같이 한결같고 부모의 명령은 동이나 서나 분부대로 할 바이오니, 공경히 사랑과 영광을 받잡고 엎드려 기쁘고 송구함을 더하옵나이다. 중사(中謝)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천품(天稟)이 천소(淺小)하고 일을 봄에 우활하고 엉성하여 젊어선 산에 난 싹이 의지할 데가 있듯이 일찍 가문의 은덕을 입었고, 장년(壯年)에야 바다 대추의 열매 없음을 걱정하여 비로소 유서(儒書)를 대강 읽었사오나, 칼날을 놀림[游刀]이 능하지 못함에 여지가 없었고, 다만 담장에 낯을 대고 서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을 뿐이옵나이다. 친척의 인연으로 영관(榮官)을 역임하여 속학(俗學)인 쓸모없는 몸으로써 여러 사람이 의심하기 쉬운 형세에 끼어 매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번번히 계자(階資)의 등급을 뛰어넘었사오니, 막기 어려운 것은 여러 사람들의 입이온데 결단코 공번된 선임(選任)이라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녹봉(祿俸)을 축낸 것이 3년 동안에 천 석(千石)이나 되옵는데, 스스로 공능(功能)을 헤아려 보면 만 분의 하나도 없었사오니, 이에 신의 분수가 너무나 가득차 넘쳐서 항상 넘어지고 자빠질까 두려워하고 있사온대, 감히 우악(優渥)하신 조명(詔命)으로써 추밀(樞密)의 요직에 발탁되기를 기대하였사오리이까. 거듭 이부(吏部)를 겸임하여 인재를 선발하게 하옵시니, 감당할 만한 덕이 없사옴에 사람들로부터 불가하다고 지목받겠사오나, 어명을 어기면 거스림이 되옵는지라 신도 굳이 사양하기 어렵나이다. 단 비[甘雨]처럼 적셔 주시는 성은(聖恩)에 멱감사옴에 얇은 얼음을 밟은 듯 두렵고 떨리오며 감격이 깊어 눈물이 흘러내리고 은혜는 무거운데 몸은 가볍도소이다.
이는 대개 황상폐하께옵서 많은 인재를 총람(總攬)하시고 큰 조화(造化)를 이룩하시어 한제(漢帝)의 정치함을 본받으시니 주(周)나라인들 이에서 더하겠나이까. 어진 이를 예우(禮遇)하던 연왕(燕王)을 본받으시어 외(隈)로부터 시작하심입니다. 그래서 짐짓 졸박(拙薄)을 용납하여 특별히 발탁해 주신 것이온대 신이 어찌 어둠을 떨쳐버리고 밝음을 생각지 않으며 어리석은 힘을 다하여 지혜를 내지 않사오리이까. 진실로 이목(耳目)의 미칠 만한 곳이라면 마땅히 주야로 부지런히 일하여, 멍에를 지고 수레를 끌면서 미력(微力)을 다하고야 말겠사오니, 몸이 죽이 되고 뼈가 가루가 된들 어찌 큰 은혜를 갚을 수 있사오리이까. 신은 진실로 있는 힘을 다하오리다. 운운.
[주-D001] 산에 …… 있듯이 :
고시(古詩)에, “산 위에 난 싹[山上苗]은 푸른 솔에 의지한다.”는 구절이 있다.
[주-D002] 바다 …… 걱정하여 :
해조수(海棗樹)는 5년 만에 한 번 열매가 여는 것이라 한다.
33.임평장 사 수태사 상주국 표(任平章謝守太師上柱國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사랑하면 그를 살리고자 하는 것이므로, 이에 은혜를 내렸사오나 영광이 다만 욕이 될 뿐이니 반드시 넘어지고 자빠짐을 초래(招來)하게 될 것이므로 엎드려 임명을 받사옴에 혼이 나가는 듯하여이다. 중사(中謝)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외척(外戚)의 인연으로 고관을 역임하여 앉아서 풍성한 녹봉(祿俸)을 축내었사오나 다만 배부르고 따스함을 알 뿐이옵고, 오래 논사(論思)의 자리를 채웠사오나 아무런 공능(功能)이 없었사옴에 이 사실이 벌써 여러 사람의 말에 퍼져 있어 오히려 여러 사람의 비방을 만날까 두렵사온대 하물며 작년에 벼슬을 올려 태부(太傅)로 옮기는 임명이 있음이겠습니까. 인신(人臣)으론 그것이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사오나 사양하자니 진실로 항명(抗命)의 꾸지람이 두렵고, 순수(順受)하자니 또한 비난이 있겠기에 망설여 결단하지 못하고 진퇴가 양난(兩難)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죄가 두려워 머뭇거리는 것이 간절히 진정(陳情)함만 하오리까. 그리하여 바야흐로 전번 은명(恩命)의 사면(辭免)을 빌었사오나 아직도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고 있사온데, 갑자기 또 이번의 명을 받자오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사옵고, 더욱 번거롭게 말씀드리기가 어려워 문득 그대로 눌러 있사옵나이다. 원래 팔주(八柱)의 이름은 큰 공이 있은 연후에야 주는 법이옵고, 삼사(三師)의 벼슬은 진실로 적당한 인물이 없으면 충당하지 않는 것이온데, 신이 대관절 무슨 재능이 있길래 또한 이런 발탁에 참여하였나이까. 이는 대개 성상폐하께옵서 누대(累代)의 빛난 왕업(王業)을 이으시고 외가(外家)에 두터운 정을 가지시어 이 하잘 것 없는 몸까지 아울러 거두셔서 갑자기 분위(分位) 아닌 총영(寵榮)으로 빛내어 주심이오니, 신이 어찌 더욱 더 조행을 닦고 노둔함을 채찍질하지 않사오리이까. 초목(草木)과 같은 미물이라서 천지의 육성(育成)을 비록 보답하지 못하오나, 표주박 같은 얕은 그릇으로 혹 하해(河海)의 깊음을 더하고자 하옵나이다. 신은 진실로 성은에 감격하나이다. 운운.
[주-D001] 팔주(八柱) :
초사(楚辭)에, “여덟 기둥[八柱]으로 하늘을 받쳤다는 말이 있다.” 하였다. 여기서는 상주국(上柱國)의 관직을 말한 것이다.
34.금비감 사 제 한림시독학사 표(琴秘監謝除翰林侍讀學士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대궐에서 어명이 내리시어 내상(內相)의 높은 자리에 선임(選任)되오니, 영광이 너무나 뜻밖이라, 기쁨이 정에 넘치옵나이다. 중사(中謝)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그릇이 용허(庸虛)하옵고 천성이 박직(朴直)하여 문장(文章)은 나라를 빛내는 솜씨가 아니요, 마치 동자(童子)의 조전(雕篆)과 같고, 쓰임이 때에 맞지 않아 한갓 옛사람의 조박(糟粕)만 지키옵더니, 우연히 과거에 급제한 덕택으로 일찍 벼슬길에 올라 선왕(先王)께서 재위하실 때로부터 자주 부르심을 입었사옵고, 폐하께서 사위(嗣位)하심에 미쳐서는 더욱 승진(昇進)을 입었사옵니다. 돌아보건대 속학(俗學)의 짧은 재주로써 유림(儒林)의 맑은 직함을 많이 역임하였사온데, 이제 운대(芸臺 비서성(秘書省))에 자리를 채웠음도 이미 왕상(王象)의 재주에 부끄럽고, 사관(史館)의 일원(一員)이 되오니 또 동호(董狐)의 붓에 부끄럽사오며, 또 다시 겸하여 삼자(三字 지제고(知制誥))의 영광을 더럽히오니 이는 모두 일생의 분수에 지나친 것이기에 사람들의 여러 말이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는데 천만 뜻밖에도 은명(恩命)이 다시 옥서(玉署)의 영직(榮職)을 더하여 주시오니, 은혜가 요행으로 더해짐에 감격의 눈물이 떨어지옵나이다. 이는 대개 성상폐하께서 정치에 임하여 다스려짐을 원하시고, 사람을 씀에 장점만을 취하시어 부수(膚受)하는 선비까지 아울러 거두시어 선(選)에는 말학부수(末學膚受)로 되어 있다. 특히 기름같이 적시우는 은혜를 내리심이오니, 신이 어찌 평소의 뜻을 격려하고 때 묻은 옷깃을 말끔히 씻어버리지 않사오리이까. 가시밭처럼 거칠었던 옛 학업을 다시 다스리어 잠시도 그것을 잊지 않고, 화살같이 곧은 충성을 지켜 이험(夷險)에 변함이 없으려 하옵나이다. 신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나이다. 운운.
[주-D001] 왕상(王象)의 재주 :
삼국 시대 위(魏)나라 왕상이 비서감(秘書監)으로서 황람(皇覽)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주-D002] 부수(膚受) :
학문을 마음으로 깊이 하지 못하고 피상(皮相)으로 한다는 뜻인데 장형(張衡)의 글에 말학부수(末學膚受)란 말이 있다.
35.사 우정언 지제고 표(謝右正言知制誥表)
이규보(李奎報)
신 규보(奎報)는 아뢰옵나이다.
어제 제명(制命)을 받자오니 성상께서 신에게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를 제수하심이었나이다.
습유(拾遺)는 요직이요, 지제고(知制誥)는 근신(近臣)이라, 임명을 거듭 받자옴에 몸을 어루만지며 두려움에 떨고 있나이다. 중사(中謝)
그으기 생각하옵건대, 자니(紫泥)의 조서(詔書)를 쓰려면 전아(典雅)하고 화려한 문장이 아니면 성모(聖謨)를 부연할 수 없고, 무늬 있는 돌의 섬돌에 서려면 강정(剛正)한 이가 아니면 국론(國論)을 상달할 수 없사오니, 오직 관통(貫通)한 학식이 있는 자라야 환광(癏曠)한다는 비난을 면할 것이온데, 신과 같은 자는 세계(世系)가 평미(平微)하고 인격이 천소(淺小)하여 어렸을 적부터 오직 문자만 즐기고 잠깐도 시를 읊조리기를 쉬지 않아, 과거에 급제가 발표되었을 때에는 바야흐로 벼슬길이 탁 트였는가 하였더니, 산관(散官)과 한직(閑職)에 던져져 오래 곤궁한 하소연을 발했었나이다. 그러나 천성이 고지식하여 시속에 맞출 줄을 몰라서 남과 더불어 잘 맞지 않고 워낙 소개(紹介)하는 이도 없어, 그 때문에 몸을 사려 퇴축(退縮)하여 죽도록 불우(不遇)함을 달게 여기려 했사온대 다행히 성대(聖代)를 만나 갑자기 홍초(紅綃)의 관서(官署)를 더럽혀서 영광스럽게 궐내에 출입하여 백일(白日)의 신선이 된 듯, 조정에 들어온 지 7년이 되기도 전에 벼슬이 뛰어올라 6품(品)에까지 이르렀사오니. 한 구절이 결(缺)하였음 바야흐로 넘어지고 미끄러질까 근심을 품어 관직이 승진되기를 바라지 못했더니, 어찌 감히 성상께옵서 이 용허(庸虛)한 몸을 기억해 주시기를 기대하였사오리이까.
이제 특히 호령을 내리시어 갑자기 맑은 관직에 발탁하여 임명하시오니, 은영(恩榮)이 불차(不次)로 내리신지라, 사람들이 사다리 없이 하늘에 올랐다고 말하오며, 총록(寵祿)이 별안간 더해지오니 신은 분에 넘치어 엎어질까 걱정하옵니다. 눈물이 감격 때문에 줄줄이 내리고 몸과 목숨이 아울러 가볍습니다.
이는 대개 성상폐하께옵서 지극한 덕으로 포용하여 주시고 깊은 인(仁)으로 덮어 주시어 비록 태양이 비치는 데 모닥불로 광명을 더할 것이 아니오나, 큰 집을 이룩함에는 여러 재목을 모아서 넓은 것을 이룬다 생각하시어 짐짓 이 못난 것을 용납하시어 큰 은혜에 멱감기고자 함이오니, 신이 어찌 둔한 칼을 갈아 날이 서게 하고, 내 둔한 말을 채찍질하여 천리마를 따르도록 하지 않겠나이까. 주야로 게으르지 않아 더욱 나라뿐이라는 마음을 굳히고 이험(夷險)에 변하지 않아 각별히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겠나이다. 운운.
[주-D001] 불차(不次) :
계급의 차서(次序)를 뛰어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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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권 끝.
첫댓글 오늘도 좋은 자료 잘 가져 가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오늘도 수고 하셨습니다 ^^*
좋은 자료와 함께 합니다.
감사합니다.
한 주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