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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난 중에 부르는 노래
42: 1-11
우리가 방금 읽은 시편 42편은 바로 고난과 낙심 중에 드려지는 찬양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하나님을 찾는 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가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1. 이 시에 나타난 고통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가. 사랑 받아야 할 사람이 사랑해 주어야 할 사람에게 미움을 당하고 쫓겨다니는 것입니다.
(시42: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42:10)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나. 그런 가운데 간절히 찾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는 것입니다.
(시42: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다.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음
(시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 도다
이런 연고로 시인은 너무 괴로워 그 괴로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시42: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닷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2.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시 속에서 사람이 침체와 절망에 빠지는 이유를 말합니다.
①.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시편 42편에는 인칭 대명사가 51개가 등장합니다. 시인은 여기서 “나”라는 말을 주격으로 14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이라는 목적격으로 일인칭 대명사를 16번 사용하고 있고 “나의”라는 소유격으로 21번 사용하고 있어서 이렇게 도합 나라는 말을 51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말은 20번, 그리고 여호와라는 말은 1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 길지 않는 본문에서 나라는 인칭 대명사가 51번이나 사용되고 있음을 보는데 이것은 좀 지나치게 많은 숫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시인이 강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았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이 시인은 몹시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지향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그가 1절에 애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을 두고 있었지만 중반에서 와서는 차차 그 용기가 사라지고 자기 자신만 바라보게 됨을 봅니다.
이처럼 한 인격에서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모함과 자기 자신의 연약을 바라보고 침체에 빠지는 나약한 심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보면 매우 재미있습니다. 결국 잘하다가도 금방 침체에 빠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요?
여러분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언제나 실수가 많고 욕심이 많으며 터부니 없는 망상과 자기 연민과 자기 과신으로 남을 이용하고 하나님까지도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하는 아집 덩어리입니다. 자기를 삶의 중심에 두고 충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실수로 넘어지게 됩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아의식이 강한 사람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리보다는 자신의 감정이나 자기의 주장으로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더 나아가서는 선악의 판별 마져 자기 자신을 척도로 삼습니다. 자기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선인이고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악인이다. 이런 터부니 없고 어처구니없는 주관적인 의식이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시인도 자기 자신의 연민에 사로잡혀 침체에 빠지는 과정을 우리가 엿보게 됩니다. 그는 해마다 절기를 지켜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던 일을 기억하며 이번에는 가지 못함을 슬퍼하였습니다. 그의 감정은 그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여 편안하지 못했다가 보다는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지 못한 자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평안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음식 대신 “눈물을 먹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②. 대적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사랑하는 사람이며 다윗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장인인 사울이 였으며 아들인 압살롬이 였고 다윗을 도와 건국을 했던 사촌들이 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네 인생살이에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아픔이 더 크고 절망적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원수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3. 그러나 시인은 그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런 고통 속에서만 머물러 있었다면 어찌 우리가 존경하는 다윗일 수가 있을 것입니까? 다윗이 다윗다운 점은 그가 당한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잘 감당했느냐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에는 공통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해결하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다윗의 고통의 해결점과 공통 분모가 되도록 맞추어야 합니다.
가. 사모하는 마음
“(시42:1-2; 5)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울꼬,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1 절의 말씀을 현대어로 옮겨 번역해 놓은 현대어 성경에서는 “암사슴이 시원한 시냇물을 애달아 찾듯, 하나님! 이 몸 주님 그리워하기를 그리합니다. 그렇게 애달아 주님을 찾습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목이 말라서 애끊게 시냇물을 찾고 있는 한 마리의 사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막을 배회하는 한 마리의 사슴이 연상됩니다. 그 사슴은 배가 꼽아 먹을 것을 찾는 사슴이 아닙니다. 물을 마시지 못해서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을 정도로 갈급해진 사슴입니다.
이것은 물을 먹지 못하면 금방 죽음을 당해야 하는 극도의 고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괴로움과 참담함이 엄습해 오는 죽음의 공포가 아른거리는 고통입니다. 죽어 가는 사슴은 생명을 간신히 유지하느라 호흡하지만 그것은 호흡한다기보다는 헐떡이는 모습입니다. 앙상히 드러난 갈비 사이로 들썩이는 뱃가죽만이 호흡은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죽지 않기 위한 발악입니다. 그러나 사슴은 물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합니다.
다윗은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푸라기의 은혜와 마지막 남은 아주 작은 은혜라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의식의 수준이 나니라 본능의 수준이며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을 너무나 사모하여 그분의 은혜를 목마른 사슴처럼 울부짖으면서 찾은 적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하는 질문은 스스로에게 한번쯤 던져 볼만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면 그들은 한결 같이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간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그들은 몹시도 간절하고도 애끓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사모하면서 세상을 살다가 갔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은혜를 받고 누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바로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성도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애끊게 찾고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그 이유를 말하라면 이렇습니다.
①. 발달된 과학 문명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전에 문제를 하나님 앞에 들고 가던 것을 이제는 과학 앞으로 가져갑니다. 과학 만능 주의는 어느새 하나님을 밀어내고 과학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신하게 합니다.
②. 물질의 풍요함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 역시 하나님을 의지하던 일을 버리고 이재 재물의 힘을 빌어 만사를 순조롭게 해보려는 불신 풍조의 하나인 것입니다.
③. 과거 지향적인 신앙 형태 때문입니다.
내가 옛날에 얼마나 엄청나게 기도했고 과거에 얼마나 엄청나게 전도했으며 옛날에 내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사모했는가를 무슨 무용담처럼 신나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잠언 8장 17절은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이여 나는 목마른 사슴입니다. 당신을 애끓게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되 지금 무엇에 목말라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①. 어떤 이는 물질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간구를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물질에 목말라 있다는 증거입니다.
②. 어떤 사람은 은사를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은사를 구하는 마음의 배경에는 명예심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③. 어떤 이들은 병을 고치는 기도에 매달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시인은 목마른 사슴이 되어 오로지 하나님 자신을 찾고 있습니다.
“(시42:1-2:5)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울꼬;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그는 모든 인간의 생사 화복이 주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의식합니다. 사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오는 것이지만 원초적으로는 하나님 사랑의 결핍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시인은 원수들로부터 압제와 멸시를 받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원수들의 압제를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헤어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생의 문제 자체보다는 하나님 자신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있게 하다가도 없게 하시며 없게 하다가도 있게 하시며 하루아침에 나를 높이 두시다 가도 낮이 두시며, 기쁨을 주시다 가도 슬픔을 주시며, 절망을 주시다 가도 희망을 주십니다. 모든 열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모든 생의 문제의 해답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원하고 하나님을 알기를 소망하시고 하나님과 만나는 그 순간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이런 하나님 사모하는 마음의 발전은 우선
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시42: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다윗은 이곳에서 극도의 절망을 당합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진실로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절망적 현실이 아니라 희망적인 하나님을 찾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적과 기적은 절망적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나. 기도했습니다.
“(시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이 말씀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했던 것과 같은 극대화된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심각하고 절망적인 일은 절망적인 좌절이나 상황이 아니라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삼손은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매여 있었어도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할 수 없게 입을 짓이겨 놓으면 생각하므로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 절망에 빠져들어 가는 자기 영혼에 힘을 주는 기도입니다.
“(시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 하나님만 바라는 기도입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 도우심을 확신하는 기도입니다.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바라보는 것은 위험합니다. 내 자신의 연약함, 내 가정 환경의 불우함,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데서 오는 상대적인 빈곤, 자기 무능력에 대한 지나친 집착, 이런 것들은 바로 신앙의 침체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자기의 연약과 약점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연약도 무능력도 다 하나님께 맡기시고 그분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너무 슬프게 해서도 안되고 자기를 비하하여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의 기도를 들어보면 “주여 저는 벌레이오며 구더기같이 천하여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옵니다. 하나님도 나에 대하여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까 봐 두렵습니다만 사실 나는 무능력한 사람입니다. 오 주여 나는 지렁이 같이 약하고 먼지와 같은 존재 오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런 식의 기도로 일관합니다. 이런 기도는 참 답답합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 올 때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기를 비하하여 말하기를 “(눅15:21-24)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하셨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줄 아십니까? “야, 내가 구더기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보냈고 지렁이를 위해서 십자가에 나의 아들을 못박이게 하였느냐?” 내가 구더기의 아비이냐? 라고 화를 내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확신컨대 성도는 슬퍼하나 계속 슬퍼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고 가슴 아파하나 자기 가슴을 칼로 찔러서는 안되며 자기 무능력을 고백하되 비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지만 이제는 용서받은 죄인이고 하나님 전능하신 왕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연민과 스스로의 한탄에 빠지셨다면 지금 그 늪에서 나오시길 바랍니다. 자기라는 감옥에서 은혜의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밝은 소망의 햇빛을 비춰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던 주님의 기도에는 처절한 고통과 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곧 이어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또 ‘다 이루었다’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의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완전한 소망을 가진 주님께서 하신 기도요 그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이 마땅히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통해 더 아름답고 복된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찬양합니다
11절에서 다시 이 구절이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앞에 말씀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이지만 내용은 다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찾는 목마른 사람의 말이고 이 말씀은 목마름이 해갈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현재에 구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도 자기 연민과 슬픔의 자아에 빠지시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자기 영혼에 스스로 타이르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용기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찬송이 좋은 날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드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힘주심으로 여러분이 고난속에서 부르는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
(2)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하여 하느냐?
[ 시 42:11, 눅 18:1 ~ 5 ]
아프가니스탄에 발생한 한국 청년들의 탈레반에 의한 피랍 소식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끝나지 않은 피랍자들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얼굴을 향하시고 속히 모든 피랍자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인솔자이었던 배형규 목사님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잊었습니다. 웃으면서 떠난 남편, 아버지, 아들을 죽음으로 맞는 가족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청년들을 이끌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프고 시달린 그들에게 봉사하러 간 청년들에게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세간의 비난이 더욱 아프게 느껴집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갔는데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배목사님과 팀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은 땅 끝입니다. 가장 가기 힘든 곳이 땅 끝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누구도 가기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땅 끝에 간 것입니다. 땅 끝까지 가라고 하셨는데 땅 끝에서 이런 변을 당했습니다. 선교에 힘쓰다 낙심이 될까 두렵습니다.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님과 한민족복지재단 김형석 회장에게 다 전화로 위로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의외로 차분하고 힘을 잃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잘 견디고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배형규 목사님은 제주 영락교회 출신의 젊은 목회자 입니다. 사랑과 열정이 넘치는 목사님이었다고 합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출신으로 얼굴이 익은 것으로 봐서 저의 강의도 들은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주 영락교회의 김정서 목사님도 이메일로 위로와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아버지가 그 교회의 장로님이시며, 어머니가 권사님인 좋은 신앙의 가정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가까이는 이런 일이 없는 줄 알고 살아갑니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낙심과 불안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마수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낙심할만한 때, 불안할만한 때에 낙심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런 당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인간의 낙심과 불안이란 이런 것들입니다. 작은 멸치가 바닷물이 말라 헤엄치지 못할까봐 쩔쩔 맵니다. 작은 고추잠자리가 하늘이 좁아 날 곳이 없을까봐 당황합니다. 작은 개미가 땅이 좁아 집을 지을 장소가 모자랄까봐 안절부절합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의 불안입니다.
인간의 염려와 걱정을 잘 보세요. 인간의 걱정 40%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걱정 가운데 30%는 과거의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염려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12%는 건강과 관련된 불필요한 것들입니다. 10%는 중요치 않은 사소한 것입니다. 8%만이 실제의 일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8% 중 절반만이 변화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96%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염려란 무의미하고 불경스런 것입니다. 인간의 낙심과 불안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낙심, 염려, 걱정 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다윗이 음악가의 가문이 된 고라 자손을 시켜 부른 노래입니다. 5절과 11절과 43:5을 보세요. 똑같이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라고 합니다. 같은 말의 반복은 인간의 낙심과 불안은 마치 인간의 삶의 일부분처럼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보훈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인간은 늘 염려하기에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생존의 필수내용들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염려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빛 가운데 네게 일러주신 말씀을 어두움 속에서 의심하지 말라”(Never doubt in the dark what God told you in the light)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낙심, 불안, 염려, 걱정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밀려오는 낙심과 불안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찬송하는 이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낙심하며 불안한 이유는 하나님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42:11 상반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소망이 없기에 낙심하며 불안합니다. 하나님만이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만이 낙심과 불안을 없이 하십니다.
“어찌하여 낙심하며”란 말은 “마흐 티슈토하히”라는 히브리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어찌하여 네가 숙이느냐”라는 뜻입니다. 슬픔의 무게 때문에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심히 우울하고 슬픈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풀이 죽은 상태입니다. “고개 숙인 남자”란 말이 있습니다. 마치 “고개 숙인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불안하여”란 말의 뜻은 소리를 내며 솟아오르거나 가라앉는 바다의 파도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시편 46:3에는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불안이란 말의 뜻입니다.
원문에서 보면 “낙심”이 왜 나쁩니까? 고개를 숙이지 말고 고개 들어 주를 바라보아야 하는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마치 죄 지은 자 같습니다. 죄 지은 자들을 보면 한 결 같이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리고, 어깨가 쳐져 있습니다. 승리자를 보세요. 칭찬받을 자를 보세요.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습니다.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있습니다.
“불안”이 왜 죄가 됩니까? 바닷물이 뛰놀고, 산이 흔들려 불안합니까? 예수님께서 “잔잔하라” 한 마디에 잔잔하게 되는데 불안합니까? 산이 흔들립니까, 내 마음이 흔들립니까?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라고 찬송하면서도 흔들립니까? 낙심도 불안도 다 부질없는 죄의 생각입니다.
안전(security)이라는 말은 ‘걱정 없는’이란 의미의 라틴어 ‘세쿠루스(securus)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걱정이 없어야 안전한 것입니다. 아무리 위태하더라도 걱정이 없으면 안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안전해도 걱정이 태산이면 안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독일어의 ‘근심’이란 단어는 ‘질식시키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로는 ‘마음을 분리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심은 목에 매인 올가미와 같습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심이나 불안은 두 가지 모두가 기쁨과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소망과 전혀 배치되는 말입니다.
“근심이란 하나님께서 마침표를 찍은 곳에 또 다시 물음표를 찍는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근심은 불안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근심이란 습관이 한번 자리를 잡으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게 됩니다. 사단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앗아가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근심입니다.
현대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남편이 돈을 갚아야 할 날이 다가오자 안절부절 하면서 잠을 못자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참 멍청하네요. 내일 당신이 돈을 못 갚으면 걱정스러워 잠을 못 잘 사람은 바로 돈을 받아야 할 사람이잖아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마음 가라앉히고 잠을 잤다고 합니다. 여러분,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빚진 돈이 있어도 갚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갚기는 하되 너무 걱정하여 잠을 못자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을 보세요. 쫓겨 다니는 다윗이 아니라 쫓아다니는 사울이 더 불안해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합니다. 정말 “내 마음 평안해”입니다. 우리 찬송에도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예수님께 소망을 두면 낙심도 불안도 없어집니다. 소망은 진통제입니다. 진정제입니다. 낙심과 불안이 사라집니다. 우리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세상엣의 모든 낙심과 불안을 날려버리고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42:11 하반절입니다.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도우심 의지하세요. 낙심과 불안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변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도 의지할 만한 합니다.
하나님은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21:1-2에는 말씀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낙심하여 고개를 숙이지 말고 눈을 드세요. 우리의 도움이 여호와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거기에 도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도우미이십니다. 변치 않는 돕는 배필이십니다. 성경은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란 ‘파라클레토스’란 단어인데 이 말은 여러 뜻이 있지만 가장 강한 뜻은 도우시는 이(helper)입니다. 우리 곁에 도우미가 빽빽하게 몰려 있습니다. 천군천사가 우리의 도우미입니다. 불 칼, 화염검을 가지고 둘러서 있습니다. 그런데도 낙심하렵니까? 이런 도우미가 있는데 낙심한다면 대단히 약한 것이 아니라 대단한 강심장입니다.
낙심이 뭔가를 잘 보세요.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지할 때에 낙심이 됩니다. 자신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낙심할 수가 없습니다. 프랑소와 페넬롱은 “낙담은 겸손의 열매가 아니라 교만의 열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절대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대 낙심하지 못합니다.
시편 84:12에는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의지하지 못하는 것은 복이 없는 것입니다. 의지하지 못하는 자가 낙심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오던은 현대 사회를 ‘불안의 시대’(The Age of Anxiety)라고 일컬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불안한 일이 널려 있습니까? 도무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신경안정제가 엄청난 매상을 올립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언제나 초조합니다. 잠언 3:5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면 불안에 빠집니다.
존 웨슬레와 함께 영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휫필드 목사님이 낙심하고 좌절할 때에 힘을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헌팅턴여사였습니다. 한번은 휫필드목사님이 절망적인 어조로 “저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헌팅턴여사는 “잃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왜 그런 것에 감사해야 합니까?” 그 때 여사는 “주님은 잃은 자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무엇인가를 잃었습니까? 잃은 것 때문에 낙심하지 마세요. 잃은 것을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으려고 31번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32번째 성공하였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하나의 발명품을 만들기 위하여 수 없이 많은 실패를 하였지만 그는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안 되는 방법을 그 만큼 많이 터득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의 성공의 비결입니다.
최근에 최고의 인기 있는 신부감은 학교 교사라고 합니다. 최고의 신부감 1위는 예쁜 교사, 2위는 보통 교사, 3위는 못생긴 교사라고 합니다. 그만큼 교사들이 인기가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고시에는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 등만 있는 줄 알았지요? 요즘에는 장신고시라고 있습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에 입학하려면 보통 3수는 해야 합니다. 제가 입학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입학 자체가 아주 힘이 들어요. 그리고 교사고시가 있습니다. 교사임용고시가 또 그렇게 힘들다고 합니다. 많은 교사들이 7전8기, 4수, 5수 해야 합격한다고 합니다. 낙심하지 않고 성공을 지향해야 고시에 합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25장에는 나발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나발은 완고하고 행실이 악했습니다.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예뻤습니다. 대개 총명한 사람은 예쁘지 않고, 예쁜 사람은 총명하지 않은데 아비가일은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부하를 위해 나발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나발은 거절합니다.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길래?” 후에 다윗이 왕이 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나발이 잔치를 할 때에 포도주를 취하게 마십니다. 그리고 37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나발이 놀라서 낙담했습니다. 낙담은 몸이 돌같이 되게 하는 죽게 하는 병입니다.
줄리아 가타는 조바심, 낙담, 절망을 ‘정오의 악마’(noonday demons)로 표현했습니다. 노련한 여행자도 이 마수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낙담, 낙심, 낙망이라는 악마를 벗어나십시오. 한나절이 지나면 낙심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한나절에 좌절하면 되겠습니까? 좌절하고 넘어질 때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십니까? “넘어질 때마다 뭔가 주워 일어난다면 괜찮습니다”. 무얼 주워야 할까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얻어 일어나십시오. 그러면 넘어지는 것도 은혜이고 낙심은 사라집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네덜란드 자신의 집에 유대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나치 수용소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수용소에 있는 동안 아버지, 언니가 다 세상을 떠나고 여사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여사는 그 후에 지구를 돌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구소련에는 성경을 가지고 입국하다 발각되어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 세상을 보면 우리는 절망할 것이다. 만일 우리 내부를 들여다보면 낙담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안식할 수 있다. 당신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면 차표를 가지고 뛰어내릴 것이 아니라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터널을 통과하게 되고 낙심과 불안은 물러가게 됩니다.
결론
오늘 말씀 가운데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씀을 보세요. 개역성경에는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드러내시고 나타나셔서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숨어서 리모트 콘트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얼굴을 보이시고 도와주십니다.
5절에는 “그 얼굴의 도우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면 우리는 안심합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아기들에게는 엄마 얼굴이 최고입니다. 잘 놀다가도 엄마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울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그렇습니다. 보이면 안심이지만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낙심합니다.
낙심과 불안 가운데서도 힘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힘 있는 아버지가 곁에 있으면 이깁니다. 자기 아들이 맞았다고 깡패를 동원하여 때려주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보다 더 든든한 아버지이십니다.
낙심과 불안이 마음을 덥고 있습니까? 고개를 드세요. 고개를 들면 하나님의 얼굴이 보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는 고통 가운데서 위로 고개를 드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낙심, 불안, 고통, 염려, 걱정은 다 내가 해결하려는 교만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곁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우리 삶의 낙심과 불안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사람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