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무장독립투쟁 역사에는 수많은 위인들과 전투가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과 함께 1920년대 가장 널리 알려진 전투인 봉오동전투는 바로 홍범도 장군이 이끌던 부대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낸 성과인데요. 오는 10월 25일 홍범도 장군의 69주기 추모식을 맞이하여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유명했던 봉오동전투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홍범도 장군은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사망하고,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습니다. 이후 작은 아버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내다가 어느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하였습니다.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게 되었고, 3년여 간의 병영생활은 그에게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체험한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군교들의 부정과 비리를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인데요. 결국 날로 심해가는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군교 중 한 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출하였습니다.농사일을 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던 홍범도 장군은 주변 지인들을 통해 스스로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고, 을미사변을 계기로 소규모의 의병조직을 꾸려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수차례의 전투과정에서 동지들을 잃고 혼자 남게 된 장군은 단독 의병활동을 하고, 주변 포수들을 선동하여 항일의병활동을 다시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체계적인 한계로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러시아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열기가 높아질 때, 장군은 간도로 가서 그곳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부대를 확대한 뒤 국내로 진공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의 일부를 인솔하고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부대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습니다.봉오동전투는 역사에 오래 기록될 만큼 대단하고 큰 성과를 올린 전투였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독립군의 국내 진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 및 경찰력을 대폭 강화했음에도 기습을 받게 된 일제는 대대적으로 독립군을 추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추격군은 매복해 있던 최동진의 군무도독부 소속 독립군에게 재차 격퇴 당하였습니다. 독립군에 의해 연달아 참패를 당한 일제는 이번에는 약 250명의 병력으로 1920년 6월 7일 봉오동(鳳梧洞)으로 진군해 왔습니다. 이곳에는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대한북로독군부군, 대한신민단이 일본군 침입자들을 맞아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하여 격파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요인은 독립군의 드높은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지리적 요지를 선용한 뛰어난 작전계획이었습니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의 하나입니다.또 우리민족에게 자신감을 안겨준 승리입니다.후에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시로 강제 이주되어서 극장 수위와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1943년 76세로 사망한 뒤, 1982년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기자들과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크즐오르다 중앙공동묘역으로 이장하였으며, 흉상과 3개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또 말년에 거주하던 집은 크즐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되었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10월 25일 홍범도 장군 69주기 추모식이 오후 2시 우당기념관에서 열립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했던 홍범도 장군을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존경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