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쉬운 성경 전도서 2장 1 - 11절
1 나는 스스로 말하였다. '이제 내가 시험적으로 마음껏 즐기리니 쾌락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그러나 그것 역시 허무한 일일 뿐이었다.
2 내가 웃음을 생각해 보니 그것도 미친 짓이었다. 즐기는 것에서 무슨 보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3 이번에는, 내 마음으로는 여전히 지혜를 찾으면서 술을 잔뜩 마셔 보기로 했다. 나는 사람이 하늘 아래서 잠시 사는 동안 무엇이 정말 보람된 일인지를 알아보기 원했던 것이다.
4 나는 큰 사업들을 이루었다. 대궐들을 건축하고, 포도원도 만들었다.
5 나를 위해 동산과 공원을 만들고, 그 안에 온갖 과일나무를 심었으며,
6 심은 나무들이 푸른 숲을 이루도록 연못을 파서 물을 대었다.
7 남종과 여종을 샀고, 집에서 태어난 종들도 있었다. 소 떼와 양 떼도 예루살렘에 살았던 그 누구보다도 많았다.
8 금은보화, 왕의 보물들, 그리고 여러 지방의 진귀한 물건들을 대량으로 모아들였다. 남, 여 가수들은 물론 남자들이 좋아하는 첩도 많이 두었다.
9 나는 전에 있던 예루살렘의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게 되었고 지혜도 늘 나와 함께 있었다.
10 나는 내 눈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절하지 않았다. 그 어떤 쾌락도 사양하지 않았다. 나는 이 모든 일들로 인하여 기쁨을 누렸고, 이것은 내 모든 수고의 보상이었다.
11 그런데 내 손이 한 일과 노력한 수고를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허무했다. 해 아래서 도대체 무슨 보람을 얻겠는가?
<묵 상>
본문은 해 아래에서 꿈꾸는 쾌락과 즐거움, 노력한 성공이 허무하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1. 해 아래의 인생 - 즐거움도 헛되다(1-11절)
"나는 스스로 말하였다. '이제 내가 시험적으로 마음껏 즐기리니 쾌락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그러나 그것 역시 허무한 일일 뿐이었다."(1절) 여기서 '스스로 말하였다'는 것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말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마음에 결정한 것을 지금 행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 자신이 자신을 시험 삼아 마음껏 즐겨보자는 것입니다. 즉 설교자가 스스로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결정하여 시험적으로 쾌락이 무엇인지 즐겨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역시 헛된 한숨뿐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늘 아래서 하나님 없이 잠시 사는 동안 세속적 가치관과 세속적 쾌락을 추구해 보았지만, 그것 역시 허무한 일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인생의 해갈은 없고, 갈증만 더 해질 뿐입니다.
"내가 웃음을 생각해 보니 그것도 미친 짓이었다. 즐기는 것에서 무슨 보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2절) 사람이 쾌락을 즐기며 아주 잠시 박장대소하며 웃을지라도, 그 웃음은 미친 사람이 웃는 것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인생의 허무한 부정적 감정을 좀 숨겨서 표현한다면 1절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2절은 ‘웃어도 웃는 게 아니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내 마음으로는 여전히 지혜를 찾으면서 술을 잔뜩 마셔 보기로 했다. 나는 사람이 하늘 아래서 잠시 사는 동안 무엇이 정말 보람된 일인지를 알아보기 원했던 것이다."(3절) 설교자는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은 여전히 지혜를 향한 마음을 원하면서도, 술로 자신의 육신을 즐겁게 하고, 쾌락을 즐겨보자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임에도 보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머리는 이성을 따라서 살고, 몸은 감정을 따라서 사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는 참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한숨을 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신과 몸이 ‘따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으면 몸이 아픕니다. 또한 몸이 아프면 정신적으로도 쇠약해집니다. 몸과 정신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몸과 땅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의미의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몸과 정신이 따로가 아닌 하나로서 ‘신정불이(身精不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큰 사업들을 이루었다. 대궐들을 건축하고, 포도원도 만들었다. 나를 위해 동산과 공원을 만들고, 그 안에 온갖 과일나무를 심었으며, 심은 나무들이 푸른 숲을 이루도록 연못을 파서 물을 대었다. 남종과 여종을 샀고, 집에서 태어난 종들도 있었다. 소 떼와 양 떼도 예루살렘에 살았던 그 누구보다도 많았다. 금은보화, 왕의 보물들, 그리고 여러 지방의 진귀한 물건들을 대량으로 모아들였다. 남, 여 가수들은 물론 남자들이 좋아하는 첩도 많이 두었다."(4-8절) 사람들은 남보다 능력이 있고,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끊임없이 해 아래의 것들로 자신을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든 천하보다 귀한 나는 나로서 소중합니다. 세상이 나에게 부여한 숫자, 성공, 성과, 사업, 업적 등으로 명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냥 나라는 존재 자체로 소중히 여기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설교자도 하나님 없이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을 크게 해 보고, 대궐 같은 집도 짓고, 농사도 크게 확장하고, 과수원도 일구며, 많은 사람들을 거느렸습니다. 남녀 노비를 사서 그들로 하여금 자녀를 낳게 하여 더 많은 종들을 거느렸습니다. 소와 양 떼를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목축했습니다. 집안의 창고에는 온갖 진귀한 보석과 명품들로 채웠습니다. 심지어 더 많은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처첩들도 많이 두었습니다. 이처럼 설교자는 인생을 쾌락과 세속적 가치관으로 대변되는 모든 것들에 빠져 살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살았지만, '역시나'였습니다. 해 아래에 것들로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허무함 그 자체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손이 한 일과 노력한 수고를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허무했다. 해 아래서 도대체 무슨 보람을 얻겠는가?"(11절) 여기서 '무슨 보람을 얻겠는가?'는 '무익하다'는 의미입니다. 해 아래서 이득이 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수고하고 노력한 모든 활동의 결론을 ‘헛되다’와 ‘무익하다’로 표현합니다. 인생의 '헛됨과 무익함’을 표현할 때 그것을 실패자가 느끼게 되면, 그것은 성공을 향한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자의 '헛됨과 무익함'은 실패자의 '헛됨과 무익함'보다 더 깊이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때 '헛됨과 무익함'은 자신의 삶을 타락과 방탕함으로 이끄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을 떠나, 해 아래의 삶에는 참된 만족도, 참된 보람도, 참된 의미도, 참된 가치도 있을 수 없음을 설교자는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아버지 하나님! 나의 힘으로 내 자신을 위하여 집도 짓고, 경제생활도 하고, 온갖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바람을 잡는 것과 같고, 참된 만족도, 아무런 보람도,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세상이 나에게 부여한 숫자에 매여 살지 않게 하옵소서. 나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을 나의 존재 목적으로 삼고 살게 하옵소서. 하늘 아래에서의 삶이 전부이고, 하늘 위의 삶이 없다면,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고, 무익하며, 살만한 의미와 가치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언제나 소망이 넘침은 하늘 위의 삶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해 아래에서의 삶에 힘쓰는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옵소서. 주님과 함께 높은 산이나, 거친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살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다스림 가운데 하나님 한 분만 기쁘게 해 드리는 청지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