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101신]어느 교장선생님의 학부모께 드리는 편지
사랑하는 아들과 새아가에게.
금쪽같은 손자와 너희를 생각하면 흐뭇하다가도
일상을 너무 바쁘게 사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육아育兒’가 마치 전쟁같은지라, 아이를 좋아하는 너희가
둘째를 갖지 못하는 현실도 그렇고.
윤슬이가 여섯 살이니 이제 곧 학부모가 될 테지.
아직은 아니어도 금세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교,
대학 진학을 앞둘 날도 멀지 않았다.
하나 뿐이므로 더욱 더 아이의 교육敎育에 대해 신경을 쓰겠지.
오늘 너희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편지가 있구나.
너희 결혼식 주례를 선 선생님이 올해 3월 당신의 모교 교장선생님이 되신 것은 알고 있지.
최근 그 선생님이 학기 말이 되어 학부모들에게 보낸 편지가 많은 학부모들의 고맙다는 댓글과 함께
교육계에 큰 화제가 되고 있단다.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사랑하는 진정이 고스란히 담긴 때문일 거다.
긴 전문을 옮기는 것은, 머지 않은 훗날,
너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맞아”를 하게 될 것이므로
어디 저장이라도 해놓고 나중에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눈이 미끄러지듯 줄줄줄 끝까지 금세 읽을 수 있게 잘 쓰셨다.
아부지가 늘 말하는, 글은 바로 그 사람이고(서여기인書如其人),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표본같아서 읽어보기를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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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고 학부모님께 드립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제가 부임한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학기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낯설고 힘이 들 때는 세월이 더디 가는 것같은데, 지나보면 세월은 저만치 가 있습니다.
지난 학기 동안 학부모님께서 노심초사하신 일이 한두 가지였겠습니까?
아마 ‘자식이 웬수’라는 자조적인 말씀을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끝도 모를 코로나 상황이 계속 이어지니 더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 집이나 그렇지 않은 집이나 모두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어느 집이고 남에게 말못할 이야기가 책 한 권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집 부모님은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부러워하시는 부모님이 게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집은 없습니다.
크든 작든, 심각하든 아니든 고민거리는 다 있습니다.
지난달 분당 서현고 학생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면서 학부모님께서도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철렁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마음이 아려오고 ‘학교’와 ‘교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이 어린 나이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심적 고통으로 괴로워했겠습니까?
우리나라 교육현실도 개탄스럽지만, 도대체 ‘학교’는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을 보면 참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집에서 24시간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성화와 따가운 시선에 억눌려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는 것을 보면 아무리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지만 아직은 어린 학생들에게 가혹한 것같습니다.
저는 학교만이라도 수업 이외의 시간에 아이들에게 ‘정신적인 여유’와 ‘심리적인 안정’을 갖게 하여
답답한 숨통을 잠시라도 트이게 해주고 싶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내 아이가 공불르 못하는 것이 부끄러우신 적이 있으셨는지요?
왜 그런 생각이 드셨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혹 내 체면이 손상되는 것같아 그러신 것은 아닌가요?
친구는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내 앞에서 신나게 자랑을 하는데 나는 뭔가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있으신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왜 주눅이 들어야 하는지요?
한 인간에 대한 평가의 척도가 공부 밖에 없습니까?
그것 말고도 얼마든지 크고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내 아이가 정직하고 배려 잘하고 따뜻한 공감능력을 지녔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요?
이런 아이는 언제고 제 몫을 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먼 장래 누가 무엇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인간사에 장담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못한다고 계속 못난 길로 가겠습니까?
학부모님의 학창 시절 동기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시면 사실 거기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누군가 변해야 합니다. 아이든 부모님이든... 그런데 저는 부모님께서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몸만 컸지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한 어린 아이입니다. 말은 안해도 아이들도 부모님만큼 힘이 들 겁니다.
그런데 힘이 들어도 기댈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부모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등도 토닥거려 주시고 따뜻한 말씀과 환한 얼굴로 맞아 주시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의 따뜻한 말씀 한마디가 큰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집은 아이가 게임에 빠져 공부도 게을리하고 놀 궁리나 하니 답답하실 것입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야단을 친다고 바뀌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평생 그리 사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직 미숙한 데다가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못해 그러는 겁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따뜻한 말로 소통을 시작하면서 아이의 고민이 무엇인지
그리고 아이의 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들어주시면 좋을 것같습니다.
그 꿈이 무엇이든 칭찬해 주시고요. 아이들은 의외로 작은 칭찬헤 감동합니다.
<1학년 학부모님께서 아들에게 주는 편지>행사에서
무뚝뚝한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꾹꾹 눌러쓰신 4장의 손편지를 받아보고
눈물을 흘린 학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가정은 서로의 속마음을 확인했으니 모든 일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통해 잘 풀어가겠지요.
부모님께서 먼저 다가가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 아이 흉을 보면 기분이 나쁘시죠? 그건 내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대해 보시면 어떠시겠습니까?
힘은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옵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시지요.
내 아이인데. 믿어보시지요.
내 아이인데.
남이 뭐라 해도 내 아이인데.
소통이 활발한 가정에서 긍정적이고 건강한 아이가 자랍니다. 길게 보고 차근차근 가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아이가 제게 “공부를 못해서 부모님께 죄를 지은 것같다”고 하더군요.
제가 화가 나서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되물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반성해야 할 일이지 지은 죄는 없습니다.
학부모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아이들은 이런 심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덴마크 부모들은 자식의 연봉이나 직장의 안정성을 걱정하기 않고
아이가 열정을 가지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까를 걱정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이런 세상이 오겠지요.
얼마 전 버스에서 3학년 학생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모님께 짜증내지 마라. 부모님은 너희보더 더 힘드시다”고 했더니 빙긋이 웃더군요.
자식들도 자신이 한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다 알고 있습니다.
힘내시기 바랍니다. 옛말하며 지내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제가 문화일보 칼럼에도 썼지만 ‘부모된 죄’라 생각하시고,
지금 첩첩산중에서 한 고개 한 고개 잘 넘고 있다고 학부모님 자신을 칭찬해 주시기 바랍니다.
칭찬받으실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치십니다.
올해는 특히 더 덥다고 합니다.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20201. 7.15.
교장 이명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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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이 편지를 다 읽을지는 모르나,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
‘크게 깨우쳤다’‘눈물을 많이 흘렸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교장쌤이 너무 고맙다’
‘처음으로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는 등의 댓글을 보는 것만 보아도,
이런 잔잔한 편지 한 통이 학부모들에게 감동을 주는 까닭은
진실로 학생들을 사랑하는 교장선생님의 진정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은 너희도 아이를 교육시키면서 항상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습관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얘기이다.
아부지와 엄마도 너희 둘을 키우면서 그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행착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으로 맺어진 끈끈한 가족이므로,
어려울 때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고비 한 고비를 넘기며
여지껏 평범하지만 단란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켜온 것이리라.
자식은 오직 사랑으로 함께해야 하고,
부모는 언제까지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거늘.
나는 우리 손자가 따뜻하고 남을 배려하며, 무엇이든 공감능력을 가진 아이로 크면 좋겠다.
다음주 목요일엔 휴가를 와 세 밤이나 자고간다고?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이 할래비가 손자에게 보여줄 게 얼마나 많다고.
쫑알쫑알, 온종일 신이 나 할래비 손을 잡고 따라다닐 윤슬이를 생각하면 행복하다.
조심히 잘 내려와라. 그때 반갑게 만나자.
줄인다.
7월 21일
고향에서 너희를 오롯이 사랑하는 아부지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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