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속에 불렀던 노래
김 선 구
우리의 삶속에는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실상을 예측해보려는 선입견이 낳은 선물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착각도 생활에 수반되는 덕목의 하나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위안을 견지해 본다.
팔공산 수태골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다. 산골짝이지만 길이 평탄하여 걷기에 좋고, 맑은 시냇물과 울창한 숲, 청량한 공기 속에서 오묘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개울 따라 그냥 걸어보고 싶은 산책객들이나 산의 정기를 즐기고 싶어 하는 등산객들에게 친숙한 곳이다.
내가 멋모르고 그 곳을 찾았을 때였다. 왠지 수태골이라는 어휘가 마음에 의혹을 불러 왔다. 혹시 골짜기가 수태(受胎)한 여인네의 형상이라도 닮았다는 것일까. 아니면 애를 갖지 못한 여인이 기도하여 수태 된 영험이라도 있는 곳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섣부른 호기심 때문에 생긴 착각이었다. 실상은 팔공산에서 흘러온 물이 이 곳을 지날 때 유난히 맑고 깨끗하여 붙여진 지명이었다. 수태골(水台谷)이라 불리는 사연이었다. 말이 풍기는 뉘앙스를 쫓다보니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중학시절에 배웠던 ‘매기의 추억‘이라는 노래도 소년기 나의 상상력을 엉뚱한 곳으로 인도했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같이 앉아서 놀던 곳...’ 장미꽃이 만발한 금잔디 동산에 앉아 메기라는 물고기와 노닐고 있는 한 소년을 떠올렸다.
그 시절 나에게는 집 주변에 있는 바닷가가 친근한 놀이터였다. 바닷가 언덕위에 앉아 한가로이 떠있는 고깃배들을 응시하노라면 그 주변을 자유롭게 떠돌고 있을 물고기 모습도 함께 떠 올렸다. 내가 노닐던 무대 바닷가 언덕이 금잔디 동산으로 대치되면서 어딘지 알 수 없는 이국의 정취에 깊이 매료 되곤 했다.
내가 메기를 처음 본 것은 책에 나온 그림을 통해서였다. 그림 속에 나온 메기는 긴 수염을 양옆으로 길게 늘어뜨린 멋진 물고기였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작은 도랑못 속에서 한가로이 유영하는 메기의 모습을 상상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매기가 물고기가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을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매기는 캐나다 국경근처 한 카페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버터필드라는 미국 청년과 사랑을 나누었던 캐나다 처녀 매기클라크였다. 두 사람이 오랜 설래 임 끝에 사랑을 이루었지만 신혼의 단꿈이 다 영글기도 전에 메기가 죽게 된다. 실의에 빠졌던 청년이 매기의 시신을 고향에 묻어주고 돌아와 이 노래를 작곡했다. 애달픈 사랑얘기가 전해지면서 카페를 찾는 손님들이 그녀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저녁마다 매기의 추억을 함께 불러주었다.
노래가 탄생한 배경도 모른 채 제멋대로 해석하고 흥얼거렸으니 계면쩍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리듬이 주는 흥은 나름대로 좋았다. 작가의 의도와 일치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상상했던 장면이 더 좋을 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메기의 추억을 부를 때면 개울가 도랑속의 메기를 떠올리게 된다. 처음에 이입된 영상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식작용인지도 모른다.
몇 해 전 어느 가을날이었다. 대구의 한 시민대학에서 진행하는 강좌에 참석하였다가 프로그램에 따라 ‘루소의 숲 체험’이라는 캠프에 참가하였다. 루소의 숲은 도시민들의 심신의 수련을 위한 캠프였다. 루소의 숲 원장인 K박사는 루소철학을 전공한 분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가르침을 실천코자 대구근교 야산 속에 이만여 평의 산지에 캠프를 설치하였다. 현대생활에 찌든 도시민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잃어버린 정서를 되찾아 주기 위해서였다. 수련장 한편에는 음악회든 전시회든 단체행사를 할 수 있도록 넓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었고, 주변 산속으로 여러 갈래의 오솔길이 나 있어서 산길을 걸으면서 잃어버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꾸며져 있었다.
우리는 잔디밭에 앉아 따스한 가을햇살을 벗하여 클라리넷 연주를 감상하였고, 수북이 쌓인 낙엽 위에 누어서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신선한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였다. 이윽고 줄을 이어산길을 걸으며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가던 중 잎이 노랗게 물든 작은 나무 한그루를 발견하였다. 앞서가던 K원장이 각자 나뭇잎을 따서 손으로 비비고 그 냄새를 맡아 보라고 하였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은은한 향기가 기분 좋게 전해졌다. 그 나무가 바로 ‘비목’이라 했다. 이름은 익숙했지만 일찍이 접해보지 못한 나무였다.
잠시 후 일행 중에 한 여성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갑자기 분위기가 상큼 달아올랐다. 참여했던 사람들 모두가 노래 속으로 빨려들었다. 합창이 이어지고 노래 소리가 가을바람을 타고 산골짜기로 울려 퍼졌다. 모진 비바람 이겨내고 초연하게 서있는 한 그루 비목나무가 고상한 선녀처럼 내게로 다가왔다. 나도 함께 노래를 부르며 감흥에 젖어들었다. 그 여운이 오래 동안 나의 마음을 휘감고 있었다.
이듬해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했다. 한 지인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거기에 ‘비목’이라는 노래가 동영상으로 떠올랐다. 마치 작열하는 태양과 푸르고 싱싱한 초목이 에너지를 발산 하는 것 같은 감흥이 도사리고 있었다. 노래 속의 비목(碑木)은 한국전쟁에 희생된 병사들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나무 십자가를 의미했다. 내가 상상하던 모습과는 번지수가 영 달랐다. 그동안 착각 속에 비목을 노래하여온 샘이었다.
나는 비목이란 노래를 정식으로 배운 일이 없다. 그저 방송을 타고 들려오는 곡조가 좋아서 흥얼거리다가 가사를 기억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가을 안개비 이겨내고 초연하게 서 있는 비목나무를 찬양한 노래로 알고 있었다. 황당한 심정을 절친한 친구에게 글로 띄웠더니 답장이 왔다. “착각 속에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착각은 바로잡으면 되는 것이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착각 그 자체로도 좋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어쩌면 착각도 덕목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착각 속에 불렀던 노래도 그런 데로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이 가을에도 그 때의 마음으로 노래를 다시 불러보자고 다짐했다.
첫댓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매기의 추억'은 저의 착각에 생긴 추억과 꼭 같아요^^
동병상련의 친구가 있어 반갑습니다. 착각이나 실수를 하나의 해악으로 소화할 기지와 여유가 필요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