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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오진숙의 비명에 갯바위벼랑에서 잠자던 갈매기가 꾸드득하고 놀라 날아올랐다.
좀 호들갑스럽긴 하지만 오진숙이 이렇게 큰소리로 비명을 지른 적은 없었다. 이감독은 오진숙이 들고 있는 봉투속의 내용물에서 랜턴불빛을 받침대에 걸어둔 낚싯대로 옮겼다. 무한흘림채비는 이상 없었다. 입질이 없었다는 말이다.
이감독이 낚시채비로 랜턴불빛을 돌린 것은 의도적이었다.
오진숙이 봉투 속에서 꺼낸 내용물, 즉 야시시한 여자 그림이 인쇄된 카드가 상품권이란 것을 부담 없이 확인하라는 배려였다.
카드에 인쇄된 야시시한 여자의 팔짱에 걸려 있는 가방에 눈길이 멈춘 순간 오진숙은 발작하듯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 경련이었다. 숨이 멎는듯했다.
이걸 이감독이 자신에게 선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뛰고 심장이 멎는 듯했지만, 극히 짧은 순간 의구심이 들었다. 이유 없이 자신에게 선물할 이감독이 아니다. 이감독이 어떤 사람이냐? 그래서 확실한 눈앞의 현실을 부정했다.
처음엔 너무 기쁘고 흥감해서 비명을 질렀지만 상황을 짐작하고 자신의 사고를 정리한 오진숙은 공연히 심통이 났다.
이감독에게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게 뭐에요?”
“보면 몰라?”
오진숙은 야시시한 여자그림카드가 G명품의 토드백상품권이란 것을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다. 고가의 상품권임을 확인하자 구두쇠, 수전노, 짠돌이, 노랭이 이감독이 설마 자신에게 선물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꼭 그때처럼 안면 있던 뻘쭉한 놈의 마네킹이 된 기분이었다. 그때의 어처구니없었던 일들도 지나서 생각해보면 참 웃기는 해프닝이었으나 언제나 입맛은 썼다.
며칠씩 사정사정 한번만 동행해달라는 청을 거절하지 못해 마음약한 오진숙이 따라나섰는데. 이놈이 백화점으로 데리고 가서 거의 두 시간이나 여자들 란제리숍으로 끌고 다니며 이거저것 몸에 대보고 느낌이 괜찮냐? 사이즈가 맞냐? 편하냐? 어떻냐? 별 지랄을 다 떨기에 모두 자기에게 선물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극정성으로 대답했는데. 이 미친놈이 남친이 되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쇼핑한 쇼핑백을 달랑 들고 애인 만나러 간다며 휙 가버리는 통에 뿔났던 그때를 또 한 번 떠올렸다.
그때 그놈처럼, 이감독도 다른 여자한테 줄 선물로 자신을 반응 테스트해 보거나. 아예 기죽이려는 수작일거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오진숙은 분통이 터졌다.
오진숙은 목소리에 가시가 돋았다.
“이걸 어쩌란 건데요?”
오진숙은 상기한 얼굴로 이감독을 째려보며 물었다.
“어쩌긴?”
“왜 저한테 이걸 보여 주냐 이 말이에요.”
“좀 보여주면 안 되냐? 우리가 남이냐?”
“그럼 애인이에요?”
“애인은 머리털나면서 정해 놓나? 만들면 애인이지.”
“그럼 감독님이 재벌이세요?”
“건 또 무슨 말이냐?”
“이렇게 비싼 걸 아무애인한테나 막 퍼주고 그러는 사람은 재벌 밖에 더 있어요? 감독님 처지엔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나 다름없잖아요?”
“야! 미스오 나도 그 정도는 된다.”
“뭐가요? 아무애인요?”
“아무애인이 뭐야?”
“재벌이 애인 한둘이겠어요? 돈 있겠다 아무나 만나면 애인이지. 그럼 뭐가 그 정도 된다는 거죠?”
“선물 말이다.”
오진숙은 이감독에게 틱틱거리긴 해도 이감독을 무던히 아끼고 존경한다. 젊은 나이에 홀로된 감독의 주위에 여자들은 널렸다. 그러나 그 흔한 성희롱이나 성추행사건은 단 한건도 발생하지 않은 것, 그 자체를 존경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자신에게 줄 선물은 아니지만 이감독에게 충심어린 충고를 하고 싶었다.
“선물요? 이건 아니에요. 너무 크잖아요? 아무리 환심 사고 싶은 여자가 있다 해도 이런 걸로 낭비하시면 나중에 후회하세요. 이런 선물한다고 감독님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개밥에 도토리 아니면 풋사랑이지.”
허지만 이감독은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 정도야 뭐.”
“네에?”
되레 오진숙이 당혹했다.
오진숙은 어떻게 해서든 이감독을 설득하거나 말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눈이 멀어도 보통 먼 게 아니라 생각했다. 그것이 이감독을 지키고 이감독을 위하는 최선책이라 믿었다.
“감독님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혼자사시니까 때론 헤까닥 할 때도 있겠지만 이건 아니에요. 이런 선물 받고 감독님 좋아하는 여자라면 보나마나 뻔해요. 진짜 감독님 좋아하는 여자라면요. 이런 거 받지 않고 마음 주는 여자에요. 알겠어요?”
이감독이 또 빙그레 웃었다.
오진숙은 이감독이 웃자 기분이 언짢았다. 진심으로 이감독을 생각해서 해준 말인데 비웃어? 그런 기분이었다.
“왜 웃어요? 제 말이 틀렸어요?”
“아니!”
“그런데 웃어요? 전 진실로 감독님 생각해서 한말인데. 그러면 인생 망쳐요. 정신 차리세요.”
오진숙의 당돌한 말을 이감독은 흐뭇하게 받아들였다. 당찬여자로 생각했다.
이감독이 고개를 꺼덕였다.
“이제 전류가 흐르나보네요. 됐어요.”
오진숙은 들고 있던 상품권을 다시 봉투에 넣어 이감독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다시는 이런 중세기적 발상하지 마세요. 현실적으로 생각하세요. 중세기엔 마냥 퍼주면 됐지만요, 현대엔요, 확인하고 주고 확인하고 받는 거에요.”
“뭘?”
이감독이 오진숙을 쳐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뭐긴요?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게 진짠가 아닌가 확인하는 거죠. 사랑이란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가야죠. 특히 사랑은요. 더구나 감독님 같은 중년은 더 신중해야죠.”
“왜 그럴까?”
“왜 산짐승이 올무에 걸리는 가 신중하게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깨우치실거에요.”
이감독이 손가락을 피아노 치듯 움직이며 말했다.
“그러면 말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말씀하세요.”
“이거 조건 없이 주려던 건데. 미스오가 싫어하니까 천상 다른 여자한테 줘야겠구나? 누구한테 주나?”
이감독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봉투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감독이 흔드는 봉투를 쳐다보는 오진숙의 눈은 왕눈깔사탕만하게 튀어나왔다.
“네에? 진짜요?”
또 한 번 오진숙이 자지러졌다.
첫댓글 명품 상품권으로 오진숙을 꼬셔보는군요,,
ㅎ
여자들의 로망이라잖아요/ 명품백.....ㅋㅋㅋ
즐거운 주말되세요
선물 주어서 나쁘다고 할사람 하나도 없겠지만 오진숙도 어쩔수 없겠지요.
그러나 중년의 이감독 게다가 혼자산다는것에 마음이 걸릴수 밖에 없겠슴니다.
다른여자 준다는 이감독의 말에 그렇게 하기는 싫은 오진숙
못이긴듯 받아 버리지~~~ㅎㅎㅎ
옳으신 발언입니다...ㅋㅋㅋㅋ
주는 데 안 좋은 놈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뜸들이고 오진숙이 받을지 안 받을지는 시간이 해결사겠지요...ㅎ
고운 금욜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