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미디어와 핫미디어
매클루언은 뉴미디어가 등장하기 이전의 대표적인 미디어를 인쇄매체로 보았으며, 원시부족 사회의 해체 이후 서양의 문화와 소통 체계에서는 줄곧 이러한 인쇄매체의 성격이 강화되는 것으로 보았다. 인쇄매체는 활자 인쇄술이라는 구체적인 미디어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알파벳 문자를 지칭하는 은유의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매클루언이 주목하는 인쇄매체 혹은 알파벳 문자가 지닌 가장 근본적인 특성은 선형성(linearity)이다. 선형성이란 엄격하게 짜여진 공간적 혹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짜여진 체계를 의미한다.
체코 출신의 철학자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 1920~1991)는 알파벳 문자의 소통 체계를 그림의 소통 체계와 비교하여 그 특성을 설명하였다. 플루서에 따르면 알파벳 문자는 전적으로 선형성에 기초한다. 우리는 문장을 읽을 때 왼쪽 혹은 오른쪽, 또는 위에서 아래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읽어나가야 한다. 순서의 배열이 바뀌면 의미가 바뀌거나 혹은 의미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다. 가령 영어의 경우, 주어와 동사의 위치가 바뀌면 평서문이 의문문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단어 혹은 정보를 이루는 단위들을 시간 혹은 공간적 순서에 따라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바로 선형성에 기초한 알파벳 문자의 소통 체계인 것이다.
이에 반해서 알파벳 문자 이전에는 그림이 문자를 대신하였다. 그런데 그림은 그 특성상 선형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지 못하다. 그림에는 화면의 요소들, 즉 세부적인 이미지를 반드시 특정한 순서에 따라서 배열해야 한다는 규칙이 정해져 있지 않다. 말하자면 알파벳 문자로 이루어진 문장처럼 선형적인 배열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각각 임의대로 그림의 각 부분들을 결합하여 의미를 만들어낸다. 플루서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의미의 탄생을 마법에 비유한다.
이러한 마법과도 같은 소통 체계가 문자 체계이다. 이는 알파벳 문자의 경우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어들을 엄격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지 않고 임의대로 배열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말이 되든지 혹은 미치광이의 말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오히려 소통은 사라진다.
매클루언이 인쇄매체에 대해서 지닌 생각은 바로 이것이다. 선형적인 알파벳이라는 문자에 바탕을 둔 소통 체계는 매우 기계적이며 일사분란하다. 마치 기계가 그러하듯 동력을 전달하는 어떤 한 부분이 고장 날 경우 전체가 마비되어 작동을 멈춘다. 기계는 미리 짜인 설계에 따라 정확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를 정보의 전달 과정에 대입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발신자는 정보를 정확하게 선형적인 규칙에 따라서 기계처럼 정확하게 텍스트에 담는다. 그리고 수신자는 동일한 규칙에 따라 기계처럼 짜인 텍스트의 정보들을 정확하게 읽어낸다.
이것이 바로 인쇄매체의 의사소통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소통의 과정은 소통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직접적이고 정서적인 만남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인코딩(기호화하는 과정)과 디코딩(기호를 읽어내는 과정)을 하는 과정일 뿐이다.
매클루언은 인쇄매체 혹은 알파벳 문자가 가진 이러한 선형적 체계의 특성을 기계적인 미디어 혹은 ‘외파(explosion)’라는 말과 관련지었다. 기계적이라는 말은 이미 설명한 대로 선형성을 뜻한다. 그런데 외파라는 말도 이러한 선형성과 관련이 있다. 외파란 폭발의 진원지로부터 점차 확산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가령 연못에 돌을 던질 경우 돌이 물 표면에 떨어진 최초의 지점은 폭발의 진원지일 것이며 이 진원지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파문은 점차 커지지만 엷어질 것이다.
인쇄매체에서 정보는 정보의 발신자라는 최초의 진원지로부터 점차적으로 확장된다. 따라서 정보의 진원지는 분명하며 정보의 의미는 발신자로 나온다.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그 진원지인 발신자가 발화한 의미를 정확하게 간파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독해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책이 확고부동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으며 그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책을 쓴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클루언은 뉴미디어가 인쇄매체의 이러한 외파적인 특성을 붕괴시켰다고 본다. 그 이유는 뉴미디어가 지닌 쿨미디어(cool media)라는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매클루언은 미디어를 크게 핫미디어(hot media)와 쿨미디어로 분류하고 대표적인 핫미디어로 인쇄매체를 들고 있다. 핫미디어의 가장 큰 특성은 하나의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로 압축하여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인쇄매체야말로 이러한 특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문자를 통하는 인쇄매체는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때문이다. 인쇄매체 시대에 좋은 책의 기준은 글을 쓴 저자의 생각이 곧 독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가령 아름다운 여인 샤로테에 대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완벽한 묘사를 제대로만 읽어낸다면 독자는 괴테가 머릿속에 떠올린 샤로테의 모습을 똑같이 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쇄매체 시대의 작가는 세세한 이미지, 소리, 색감, 분위기 등을 객관화하여 문자로 담아내려고 했다. 인쇄매체 시대의 문자는 이렇게 말 그대로 과열된 임무를 지고 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쿨미디어와 핫미디어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