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날씨도 뜨거운데 본의 아니게 시장순례를 하게 되었다.
교통이 발달하여 고속버스, 기차. 택시, KTX고속열차, 전철까지 다양한 교통수단을
골고루 갈아 타면서 일요일마다 지방의 시장을 다녀 보았다. 앞으로는 또 어디 시장을 가게 될 지 모르지만 처음 들어 보는
시장들을 검색하여 다녀 오면서 머리 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지난 번 5일장으로 전곡을 다녀 왔어도 그 시장이 딱히 특별한 상품을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그중에서 80세 넘은 아주머니로 부터 사 가지고 온 보송보송한 오디는 복분자와 함께 설탕넣고 졸여서 맛있게 식빵과 함께 먹었다. 혀바닥이 새까맣게 되면서..
어느 날 친구가 우연히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 얘기를 하는데 그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가 어떻게 살아 오셨는가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친구의 어머니나 나의 어머니나 자식들이 나이를 먹으면 어머니들은 자식들 가슴 속에 커다란 산이 되어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살아 계시게 된다.
그 친구에게 다시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니 다음과 같이 회상을 해 준다.
"우리 엄마 얘길 갑자기 하게 됐네.
엄마는 기차 패스증이 있어서 주로 먼 지방을 기차로 다니셨대. 대전에서 약초, 대구에서 한산 모시, 부산에서 건어물등을
서울역으로 부치고 짐꾼 사서 남대문 시장에
공급, 서울서 떠날 때는 대전, 대구, 부산 등지에서 주문 받은 것 부쳐 주고, 남대문에
내 가게가 있는 것이 아니니 자주 다니신 것 같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북한에서 빈 손으로 내려 와 물 불 안 가리고 열명의 식구를 살리신 맹활약의 이야기이구나.."
그 짐꾼은 등에 지개를 지고 짐을 날라 주었다. 때론 소나 말이 끄는 우마차도 서울역전이나 남대문 시장앞에 모여 있어서
짐을 서로 맡아서 싣는 것도 치열한 경쟁이다. 차차 짐 싣는 자전거가 등장하더니 지금은 택배 오토바이가 성업을 이룬다.
내가 잘 몰랐던 사실은 그 당시 대전에 약령 시장이 있었단 것이다. 그 친구가 중3 전국체전에 농구 선수로 대전에 갔을 때만 해도 약령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1964년 무렵에만 해도 대전으로 약초들이 모여드는 집산지 였었나보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여덟 남매중에서 그 친구의 제일 큰 오빠가 서울의 명문대 상대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하여 월급을 타오게 되고, 그 아래 언니 오빠들도 차츰 커서 자리를 잡으면서 전국을 망라하는
거래처의 일을 접으셨다고 한다. 이북에서 내려 오시기 전에는 황해도 에서 인삼을
취급하셨다는 이야기도 언뜻 들은 기억이 난다.
나의 어머니도 알뜰하게 살림을 하시고 계를 부어 목돈을 만들면 나의 학비 뿐만 아니라 소소하게 근사한 것에 투자도 하셨던 기억이 있다. 60년대엔 시내 버스가 개인이 소유주가 되어 운영 되던 시절이 있었는데 우연히 지금은 알만한 시내 버스노선의 버스 한 대를 구입하기도 했지만 낡은 버스 수리비만 대느라고 고생하신 기억이 남아 있다..
회사체제로 시내버스조합이 바뀌기 전 아득한 시절 이야기이다..
모두 6.25 이후 60년대 어머니들의 모습은 근면함과 헌신.. 그러면서도 지혜로우시고 자녀들도 열심이고 사회전체가 부단히 진지하고 성실하였다.
가난해도 마음 속에 희망을 살리며 노력하였다.
(박수근 선생의 그림)
청주의 북부 시장, 천안 근처 성환의 이화시장, 울산의 반구 시장..지난 일요일마다 다녀 본 시장이 세군데나 된다.
시장 세 곳이 각각 뚜렷하게 다른 모습이어서 감회가 남 다르다.
시장을 다니면서 우리들의 어머니를 떠올림은 시장에서 열심히 살아 가는 분들이 모두 누구인가의 어머니요 아버지들이기 때문이다..이제는 내자신이 할매가 되어 버렸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지난 봄 덕수궁 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변월용 화가의
"어머니" 그림이 자꾸 생각이 난다.
변월용 이라는 분은 1916년 연해주에서 태어난 고려인으로 어려서 부터 뛰어난 그의 재주를 아끼는 어른들의 도움으로 러시아 상트페떼르부르그의 일리야 레핀 레닌그라드 회화 건축 조각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교수생활, 1953년에서 1954년까지는 러시아와 북한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평양에 미술대학학장겸 고문으로 추대 되어 15개월 체류하면서 북한 미술교육에 기여하기도 하신 분이다. 그 곳에 귀화하기를 권유 받았으나 거절하고 급성 이질로 고생하다 러시아로 귀국하여 1990년까지 러시아에서 활동하였다. 많은 작품을 남기고 러시아인에게는 뻰 봐를렌 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알려졌으나 그 해 1990년 5월 25일 뇌졸증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항상 그의 작업실에 걸려 있었다는 그의 어머니 그림은 지금까지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청주 북부 시장에서 만난 어느 어머니는 지금은 증손자의 작은 자동차를 밀어 주시지만 머리에 꽂은 은비녀가 이제는 귀한 모습으로 나의 시선에 잡힌다
청주 북부 시장 떡집에서 만난 두 분의 아주머니.
장날 전 날 파마머리 감고 보자기를 둘러쓰고 집으로 볼 일 보러 가는 뒷 모습, 성환 장터 입구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모습이 정답다.
청주 북부 시장 떡집에서는 팥을 둔 찰밥을 팔고 있었다. 아침 일찍 집에서 떠나 온터라
이 찰밥을 사고 시장 반찬가게에서 열무 김치와 새우 볶음, 김구이 한팩을 사서 맛있게 점심겸 아침겸..지금 표현으로 브런치 식사를 하는데 시장 가운데 쉬어 가는 걸상이 아주 안성맞춤이다.
5일장을 돌아가며 살아가는 장꾼이라면 이효석 의 "모밀꽃 필 무렵"에 표현 된 허생원의 모습이 단연 으뜸이다. 울산 반구시장을 찾아간 날은
한여름 7월 17일 일요일이자 제헌절 공휴일이다.
뜨거운 여름 휴일날의 시장거리 풍경은
거의 가게문을 내리고 그 앞에 차들이 세워져 있다.
이효석은 그 여름날 봉평장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여름장이란 애시당초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 놓은 천 휘장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이런 정경은 아닐지라도 벌려 놓은 주방식기들 옆에 자리펴고 앉은 노점 아저씨의
표정이 한 여름 일요일 장날의 모습이다. 울산 반구시장에서는 요즘도 알미늄 쟁반에 다리 달린 상을 층층이 쌓아 놓고 팔고 있었다.
'석윳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 어물장수도 땜쟁이도 엿장수도 생강장수도 꼴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진부나 대화에 장이 선다. 축들은 그 어느쪽으로든지 밤을 새워 육칠십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된다.
장판은 잔치 뒷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주정꾼 욕지거리에 섞여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가 찢어졌다. 장날 저녁은 정해 놓고 계집의 고함 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왁자지껄한 장터 풍경을 이효석 선생의 단편 소설에서나 만나 볼 수 밖에 없을까?
천안 시외버스터미널은 어마어마하게 붐비고 화려하다. 터미널에 그렇게 큰 꽃집이 있고 꽃밭이 풍성할 수가 없다.
천안 역에서 성환에 있는 이화시장을 찾아간다. 어려서는 성환 참외라고 하여 껍질이 초록색에 속이 주황색인 개구리 참외가 유명했었다. 지금은 성환외곽 왕지봉에는 배꽃단지가 형성되어 성환이 배 수출단지로 유명한 곳이 되었고 시장이름도 이화시장이다. 성환이화시장을 찾아간 우리의 마음은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시장 분위기에서 그 곳 주민들의 배꽃향기같은 짙은 애향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왁자지껄한 장터에서 국밥 한 그릇 말아 먹고 막걸리 사발이나 쭈욱 들이켜면 서민들의 시장 나들이는 거기서 더한 행복이 없다. 장터국밥에 모이는 푸스러기돈을 잘 관리하면 제법 돈을 모을 수 있다. 박경리선생의 토지에도 월선 아지매는 착실히 돈을 모아 홍이에게도 주고 거기서 일하던 홍이 생모 임이네는 월선이 눈을 속여 제법 많은 돈을 훔치개질 했으나 그 돈을 베개속에 감추었다가 그대로 재가 되 버린 얘기도 있듯이 우리네 장터의 국밥집은
절로 구수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하다. 성환 이화시장은 1일 6일에 서는 5일장인데 장날 전날 국밥집에 손님이 더 많다고 한다.
충남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西로는 아산, 北으로는 평택과 접경하여 예로 부터 한양 오르내리는 교통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장날에 찾아 오는 상인과 손님 모두가 예의를 갖춘장이라 하여 양반장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1914년경부터 마을 아낙들이 손수지은 저고리, 밭에서 기른 채소 , 떡들을 팔면서 5일장이 형성되고 1973년 7월1일 성환읍으로 승격되어 상설 시장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통과 현대를 살려 문화관광형 예술 시장으로 더욱
발전시킨다는 계획으로 고향을 가꾸는 마음들이 곳곳에 보인다. 교통의 요충지인지라 소시장으로도 유명하던 곳이라고 한다. 주변에 성환 전철역이 있어 마을 발전에 한 몫을 하였고 인근 직산이라는 곳은 청일전쟁 당시 청군과 일본군의 접전지였다고도 한다.
미용실조차도 예술을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운 이화시장은 우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드팀전 장돌이를 시작한지 이십년이 되어도 허생원은 봉평장을 빼는 적은 드물었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 간 일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반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있는 마을에 거지반 가까왔을 때, 거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 --더구나 그것이
저녁녘이어서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때면 늘 당하는 것이건만 허생원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뛰놀았다."
어디 허생원의 가슴만 뛰놀것인가?
모르는 곳을 찾아 온 타지인들이 어떤 정경에 가슴이 뛰놀 것인가?
시장안 어느 집 마당을 엿본 나그네는 풍성한 꽃들과 열매를 보고 정녕 고향집 마을에 당도하여 어머니가 반기며 맨발로
뛰어 나오는 감격은 아니라도 웬지 그 집 주인의 마음이 우리네 다정한 어머니 같아서 주변을 다시 또 돌아 보고 기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 고장이 살아 숨쉬고 있음에 생활의 활력을 다시 얻고 도시로 되돌아 간다... 무궁화라는 정다운 이름의 열차를 타고 밤이 늦어도 괜찮다.
집이 거기 있으니까...
충청북도 영동포도가 유난히 달고 맛이 있어서 포도철이면 즐겨 먹었다. 아닌게 아니라 몇 해전에 철도청에서 운영하는
와인열차를 타고 다녀 온 적이 있는데 북청주에 도착하여 북부터미널에 내리고 보니 영동포도 샤토 마니 와인 간판이 커다랗게 청원구청 옆에 보인다. 물론 청주북부 시장은 여기서 길을 건너면 바로 보인다. 기존의 가경터미널은 이곳에서 약
40분 정도 타고 가야 한다. 이 삼복더위가
물러 갈 무렵이면 포도는 익어 가고 우리의
샤토마니 와인도 새콤 쌉싸름한 풍미를 더 할 것이다. 시장을 돌아 나와 어머니품 같은
인정을 가슴에 담고 와인이라도 한 잔 앞에 두고 보면 그 紫色 와인 사이로 慈愛로운
어머님의 향기가 맡아 질 듯도 하다.
첫댓글 점분아~~대단하네~
장날은 우리들의 마음에 항상 푸근한 풍경으로
자리잡고 있지~
장날순례를 하려는 기특한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실천하고 있다니 부럽구나~
그런데 버스타고 혼자서 다니는가?
정겨운 사진들과 너의 감성좋은 글로 달은
글들~넘 좋다.
나도 시장 좋아하는 여행친구와 같이
장날순회를 한번 해볼까?
더운 날 시장 찾아 보기.. 처음에 솔깃했지.. 지방은 차 시간을 잘 만나야 하고 되도록 기차를 찾아 보려고 한단다..
전국 시장, 장날 순례.. 참 좋은 소재네.
아무래도 시골 장날에 아직도 그 곳의 역사와 특질이 남아있곘지? 장터의 풍경을 묘사한 이효석의 문장 하나 하나 단어 하나 하나가 새삼 다시 와 닿네 ...
이효석 선생의 단편들이 과연 명 문장인것이 새삼 알게 되는 거야...새겨 볼 수록 좋은 이유를 알았다네..
55회 시장판이네 ㅎㅎ 반가워요 ... 참으로 기특한 이런 계획을 이 무더위속에 실행중이라니 ㅎㅎ 그런 용기와 끈기 참 멋지다 ㅎㅎ
착하기도 하고 기특하다 하고 싶기도 하지만 점분 후배의 그 저력이 이런것이구나 생각해요 ...
저도 5일 장으로 서는 가평의 반시골 반 도시적인 장터는 맨날 나가봅니다 마는 여기 장터의 깊은 맛에 비하면 덜한듯 하네요 ㅎㅎ
아무려나 저도 장날이면 대개는 장터를 나가보곤 합니다
점분 후배 처럼 멀리는 아예 생각아니하지만 ...가평 읍내 장터도 그날 만은 웅성거리며 사람사는 투박한 냄새를 풍기지요
지난 장날은 ... 게릴라 빗속에 한번 나갔다가 온통 빗속을 헤매다 들어오기도 했어요 ㅎㅎ
맞아요. 가평의 장날도 제법 규모가 크다고 해요. 전국의 시장을 다 돌아 본다는 것은 어렵고 몇몇 가 보지 않은 곳을 찾아서 그 곳의 사람들 성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몇 해전 선배님 댁으로 사랑방 식구들이 청춘열차를 타고 다녀 온 기억이 새롭습니다. 요새처럼 덥고 비도 오고 그랬었죠. 함께 먹었던 국수가 냉면이었는지 막국수였는지 잊었지만 그 분위기를 못 잊어요..
옛날에 할머니 손잡고 천안역에 내림 저런 비슷한 모습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천안역에서
7살 꼬마가 십리를 걸어 들어감 옥수수로 담을 친 마을이 있었어요. 여름방학에 갔으니 항상
집들이 옥수수로 담을 치거나, 호박넝쿨이 올라가 있거나...지금은 다 아파트촌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네요. 여름철 시골에는 옥수수가 키가 훌쩍 크고 호박 넝쿨이 우거져 있죠. 천안 근처 온양온천도 깨끗하게 정비 되어서 새로운 모습이더라구요. 저녁에 온천장에 다녀서 서울 올라 오니 행복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