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불쑥 찾아온 손님 인터넷과 IT기술의 발전으로 언제 어디서나 서로 소통할 수 있고, 커다란 지식과 정보 창고에 접속해서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 그전에는 그곳에 가야 하고, 그 사람을 직접 만나야 했지만 오늘날은 지금 여기서 내가 원하면 소통할 수 있고 접속할 수 있다. 예수님이 훌륭한 위인이었다면 그분은 위인전의 한 부분에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분은 부활하신 구세주 그리스도로서 언제 어디서나 내가 원하면 그분과 소통하고 접속할 수 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하늘로 귀환하지 않으셨다면 성령님도 우리에게 오실 수 없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다고 고백하고 선포한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여 주셔서 우리는 지금 성령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됐다. 집안 가장 중심 자리에 십자고상이 있고, 그 앞에서 깊게 절하며 흠숭과 감사를 표현하는 이유다. 이렇게 예수님 덕분에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과 소통하고 접속할 수 있게 됐는데, 문제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가이다. 나는 늘 하느님과 소통하고 접속하고 싶은가? 하느님은 늘 준비하고 계시는데 내가 그분을 부르지 않고 다가가지 않고 말을 듣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를 듣는다. 한 사람이 한밤중에 빵집을 하는 친구를 찾아가 빵 세 개만 꾸어달라고 가게 문을 두드렸다. 그 친구는 가게 문을 닫고 이미 잠자리에 들어서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 문을 두드려 그를 귀찮게 하며 결국 깨워 빵을 얻어냈다, 그것도 외상으로. 끊임없이 간청하라는 예수님 말씀이다. 하느님이 주무시거나 안 들어주셔서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찾지 않고, 하느님이 알려주고 인도해 주셔서도 내가 말을 잘 안 들으며, 한다고 해도 잘 못하고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속 청하라는 뜻이다.
그 사람이 한밤중에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한 이유는 자기가 배고파서가 아니라 예고 없이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손님 접대를 하느님 모시는 것처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예수님 말씀하신 그 친구처럼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없는 빵을 가져오고, 잠자리를 마련해주게 된다. 그 손님,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보물이다. 하느님이다. 하느님 없는 교회는 없다. 가난한 이들이 없는 교회는 친목 단체와 다르지 않게 된다. 바오로는 이방인에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유다인에게 갔어도 그 둘의 공통 분모는 가난한 이들이었다.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갈라 2,10).” 하느님은 가장 작은 이들로 나에게 오신다. 그들은 정해진 때에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어느 날 불쑥 내 앞에 나타나고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길거리에서,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대화 중에서도 그들을 마주한다. 싫지만 거부할 수 없고, 잘해주고 싶지만 어떻게 하는지 몰라 허둥거린다. 처음엔 다 그렇지만 자꾸 하다 보면 누구나 다 잘하게 된다.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 익숙해진다.
예수님, 주님은 저를 자꾸 귀찮게 하십니다. 사랑은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에게 잘해주는 겁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밤중에도 일어나 빵을 그것도 꾸러 가게 합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셔서가 아니라 제가 바꾸어서 제 안에서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그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아차리셨으니 제 삶의 기쁨이 사라지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