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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미드웨이 해전(The Battle of Midway, 1942년)
"敵機直上、急降下!"
"적기가 바로 위! 급강하!"
'운명의 5분'의 순간, 일본 제국 해군 카가(항공모함)의 견시원이 급강하 폭격을 시도하는 미 해군 항공대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를 목격하고 전파한 보고
1942년 6월 4일부터 6월 7일까지 미드웨이 제도 주변에서 벌어진 일본 해군과 미 해군의 해전이다. 악조건 속에서 미국이 승리했으며, 미국은 귀중한 전력인 항공모함을 1척 손실했으나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을 손실했다. 이 해전은 진주만 공습을 당해 미해군이 수세에 몰렸던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결정적인 전투로 여겨진다.
미군의 사정 -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흔히 전쟁 말기의 미국의 압도적인 유리함만을 생각하고 태평양 전쟁이 시종일관 미국의 우세로 치뤄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론 절대 그렇지 않았다. 미드웨이 해전 이전만 하더라도 미국의 태평양 전선 전력은 일본에 비해 결코 우위에 있지 않았다.
태평양 전선 개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 참여한 연합군 세력은 미국(American), 영국(British), 네덜란드(Dutch),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n)로, 줄여서 ABDA 연합군이었는데 이들 사정은 썩 좋지 않았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전쟁준비를 다 마치지 못했고, 영국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 이어 북아프리카 전역과 지중해 전역이 열리면서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었으며 1942년 초, 심지어 네덜란드는 이미 본토를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연합군은 중일전쟁으로 경험을 많이 쌓은 일본군을 상대로 전선을 유지하기는커녕 계속 뒤로 밀려나는 실정이었다.
ABDA 연합군은 필리핀과 자바 해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며 사실상 와해됐다. 인도차이나의 영국군은 일본군에 항복했고, 필리핀 바탄 반도에 고립된 미군과 필리핀군 역시 일본군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영국군은 인도까지, 미국-오스트레일리아 연합군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있는 멜라네시아 지역까지 방어선을 후퇴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수적으로 가장 적었고 달리 오갈 데가 없었던 네덜란드군은 자바 해전에서 연합군 해군의 아시아 함대가 박살나고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격파되자 사실상 연합군에서 이탈했고, 잔존 네덜란드 군인들은 연합군 내에서 지분과 자체 지휘권을 상실하고 곳곳으로 흩어져서 영국군, 오스트레일리아 군이나 미군 소속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이것도 모자라서 인도양에서 벌어진 실론 해전으로 인해 잔존 영국 해군력이 한동안 동아프리카 뭄바사 항으로 도망을 치고 인도양 동부의 제해권이 일시적으로 일본군에게 떨어지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또한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해체되었고 사령관인 토마스 찰스 하트 대장은 본국으로 귀환해야 했다. 심지어 자바 해전에서 연합군 해군을 지휘했던 카렐 도어만 제독까지 전사한 상태였다. 이렇게 태평양에서 일본에 대항할 존재는 사실상 미국만 남았지만 미국 조차 사정이 녹록치 않았다.
진주만 공습에서 신나게 털린 태평양 함대는 전력의 중핵이었던 전함을 대부분 상실했다. 침몰한 전함들을 다시 건져 올려 진주만 도크에서 수리 중이었지만, 전함은 그렇게 빨리 수리되는 물건이 아닌지라 8척 중 완전 침몰한 2척을 제외한 6척은 1943년 ~ 1944년 즈음에야 다시 전선에 배치되었고, 그나마 피해가 덜했던 콜로라도급 메릴랜드는 6월쯤에 복귀했으며, 진주만에 없었던 콜로라도는 오버홀의 막바지, 막 취역한 노스캐롤라이나는 미 동해안에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우방국이면서 당시 중립국이었던 칠레에 특사단을 보내, 칠레 해군에서 유일한 전함이며 14인치 포 10문을 장착한 알미란테 라토레(Almirante Latorre)를 구매 혹은 대여하고 싶다고 제안했으나, 칠레는 자국에서 유일하고 금쪽같은 전함을 내주길 거부했다.
물론, 전후 통계자료에서 알 수 있다시피 미국의 생산력은 일본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나, 전쟁 초기에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그것을 실전에 투입하여 유의미한 전력으로 활용하는데에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장 '주간항모'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생산량을 보여줬던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이 미드웨이 해전 이후 반년 정도 지나서야 생산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정규항모인 에식스급 항공모함도 1943년에서부터야 실전 투입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용 가능한 자원이 많아도 함선을 뽑는데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인고로, 이 당시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력은 정말 위기였던 것이다.
또한 외형적인 전력손실과 더불어 태평양 함대의 전반적인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스스로 최강이라 자부하다가 자신들이 한 수 아래라고 얕보던 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절름발이가 되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태평양 함대 소속 고위장교들은 이제 남은 건 퇴역이나 한직으로 밀려나기뿐이라며 낙담하였고, 지휘부의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레 아래로 번지게 마련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전한 사람은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한 미합중국 해군대장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었다. 니미츠는 태평양 함대 소속 장교들을 문책하지 않고 전원 유임시켰다. 당시에도 미 태평양 함대는 미 해군 내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그들을 대신할 인재들을 다시 모으기는 쉽지 않았고, 진주만 공습의 경우 태평양 함대에게 책임을 물을 사안이 아니라고 니미츠는 판단하였다.
한편, 니미츠 제독은 당시 미 해군 항공모함 기동 부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여차하면 물량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전에도 일본 해군 항모 기동부대를 격멸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과는 별개로 당장의 전력차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전장의 주도권은 일본이 쥐었으므로 일본이 알아서 나서주지 않는 이상, 니미츠가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를 잡을 기회는 없었다. 미국은 남은 가용전력 탈탈 털어 도박을 걸 수밖에 없었고 거기서 태평양함대가 전멸했으면 그 다음 일본의 목표는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였다.
미 해군이 할 수 있는 대응은 일단 보유한 항모 기동부대로 이제는 일본군 손에 넘어간 마셜 제도, 웨이크 섬, 마르커스 섬에 공습을 가하는 정도였다. 이 일련의 공습작전은 실전경험 축적 및 앞으로 있을 일본군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대비하여 사기와 공격의지를 끌어올리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의 전략적인 효과는 미미했기에 태평양 함대 내에서도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분석하였고, 일본군 수뇌부 역시 미군의 공격 자체를 사소한 발악 정도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패배주의에 빠져서 곧 회담장으로 기어나올 것처럼 보이던 미국이 자꾸 일본 영토에 짤짤이를 가하자 찝찝함이 남아있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미드웨이 해전을 계획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미군 입장에서는 당장의 전력차를 뒤집고 패배감에 빠져있는 당시 상황을 반전할 무언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2.2. 일본군의 사정 - 칼 끝을 어디로 돌릴 것인가?
남방작전이 예상 외로 큰 성공을 거두자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이후의 진로를 두고 혼란이 빚어진다.
애시당초 태평양 전쟁은 미국에 기습적으로 큰 타격을 입히면 협상 테이블에 나올 거라 여기고 시작한 전쟁이었으나, 정작 미국을 협상에 이끌어 내는 방법을 두고 일본군 육군, 일본군 해군, 그리고 연합함대 수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생각이 완전히 달랐다.
중국 전선을 최우선으로 두던 육군은 남방 전선을 비롯한 태평양 방면에 더 이상 발을 걸치고 싶지 않았으므로 점령지의 방어를 강화하고 미군의 공격을 계속 막아내면 미국이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라는 수세적 전략을 주장했다. 반대로 일본 해군은 자신들이 확보한 전략적 우위를 바탕으로 공세에 나서면 미군이 확실한 타격을 입을 것이란 계산을 하고 있었으며 그 일환으로 호주 침공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호주 침공은 보급과 전력 동원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육군에게 손쉽게 반박당했고, 이에 해군에서는 뉴칼레도니아-피지-사모아를 점령하여 호주와 미국 간의 연락선만 끊어 놓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진주만 공습이 끝난 직후의 회의에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들이 모두 건재하기 때문에 이들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후 전술된 미 항모에 의한 일련의 도서 지역 공격은 이러한 야마모토의 생각을 더욱 굳게 하였다. 이에 야마모토는 남방작전이 종료되는 즉시 중부 태평양 방면에서 미 해군에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항공모함을 끌어낸 다음 이들을 격멸한다는 작전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야마모토 제독의 계획을 두고 일본군의 어느 누구도 그 계획에 동의하거나 지지를 표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야마모토의 원래 구상은 호주나 미드웨이가 아니라, 지상병력까지 동원해 미 해군의 본거지인 하와이를 공격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야마모토의 구상은 육군과 해군 모두에게 외면받기 딱 좋았다. 야마모토의 의중에 말려들지 않으려던 대본영 내 해군과 육군 수뇌부는, 1942년 1월 10일 열린 회의에서 하와이 공격 대신 피지/사모아 공격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야마모토 혼자 이 결론을 뒤집을 수는 없었으므로 일단 연합함대는 피지/사모아 공격계획 입안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야마모토의 의중은 계속 하와이 공격에 있었다. 그러나 2월 20일, 윌슨 브라운 제독 지휘하의 미 항모 렉싱턴에서 발진한 미군기가 남동 솔로몬 제도의 일본군 주요거점이었던 라바울을 공습, 주둔 일본군 항공세력이 큰 타격을 입는 일이 발생했고 3월 10일, 뉴기니아 북부의 라에와 살라마와에 상륙하던 일본군을 다시 렉싱턴과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미군기가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4함대 장관으로 해당지역 일본해군을 지휘하고 있던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은 해당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함대증파를 요청했고 이노우에의 요청과 해군 수뇌부의 의도를 종합, 호주와 미국 간 연락선을 차단하는 내용의 MO작전과 FS작전을 합의하기에 이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야마모토는 한 발 물러나서 미드웨이를 공격하는 방안으로 선회했고, 진주만 공습으로 얻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이용하여 이 계획을 어떻게든 밀어붙였다. 결국 진주만 공습 때처럼 자신의 직위를 걸고 나서야 마지못해 승인을 얻었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해군 수뇌부가 구상한 MO작전을 위해 제5항공전대를 제공해야 했고, 육군의 요구에 따라 알류샨 열도 공격도 같이 진행해야 했다. 이렇게 MI작전으로 불리는 미드웨이 공격이 결정되었으나, 야마모토의 연합함대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작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연합함대장관의 의견에 대해서는 매우 반론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나가노) 총장이 야마모토가 그렇게 말한다면 한번 시켜보자라고 말했다. 그렇게 (미드웨이 작전을) 결정하게 되었다. 진주만 작전이 성공했으니까. 그러냐, 그럼 야마모토한테 맡겨볼까 해서 (작전을) 결정한 것이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래서 울어버렸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미드웨이 작전을 하면 큰일난다 라고 말하면서 울어버렸다.
미요 카즈나리, 해군반성회 도중
양군 수뇌부를 확실하게 끌어들일 더 이상의 뾰족한 수가 없던 야마모토 입장에서는 그저 답답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미국의 결정적인 행동이 상황을 반전시킨다.
둘리틀 특공대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군과 국민들의 사기 고양을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상징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이에 적극적으로 도쿄 폭격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군 수뇌부는 틈만 나면 불려가 빨리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다면서 루스벨트에게 갈굼을 당하고 있었는데, 항공모함에서 육상 폭격기를 발진시키면 도쿄 공습이 가능하다는 계획이 나왔고 이 안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제임스 둘리틀 중령을 중심으로 한 둘리틀 특공대가 결성되었으며 마침내 결국 그들은 성공했다.
사실 중형 쌍발 폭격기 16대로 수행했던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이 대단한 물리적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에게는 진주만 공습의 울분을 갚아주는 카운터 펀치가 되었으며, 일본은 그야말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을 얻어맞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이는 폭격 그 자체보다는 벌건 대낮에 미군의 폭격기에게 일본 본토, 그것도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가 대놓고 공격당했다는 상징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특히 이것이 진주만 공습 때와 마찬가지로 항공모함을 동원한 공습이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일본 해군은 이 지경이 되도록 뭐하고 있었냐는 온갖 비난에 시달리며 해군에 대한 기대가 심해 밑바닥까지 추락한다.
해군이 비난당한 것은 해상 경계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는데, 사실 해군은 둘리틀 특공대를 발견했었다. 국적불명의 쌍발기 발견이라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PBY 카탈리나 수상기가 아니며 미 해군은 쌍발기를 운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했던 것이다. 즉, 소극적으로 대응한 점은 비판받을만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본이 가진 미 해군에 대한 정보에 일치하지 않았기에 무시했던 것. 그 당시 가진 정보를 바탕으로 보자면 나름 합당한 판단을 내린 것이었고 항공모함에서 육상폭격기를 띄운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엔 보편적인 발상이 아니었다. 항공모함을 위시로 한 항공기 해상전 개념 자체가 이 태평양 전쟁에서 정립되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때만 하더라도 지상포격은 전함에서 담당하고 폭격기라면 근처 비행장에서 날아오는 것이 정석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도쿄 해안선에 전함이 출몰한 것도, 근처 섬이 점령당한 것도 아닌데 본토에 폭격이 날아오니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일본 입장에서는 '덴노가 거주하는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가 대놓고 폭격당했다'는 점이 컸다. 본토에 폭격이 일어났다는 건 '인계의 신'인 덴노의 옥체가 폭탄에 상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거기다 일본 군부는 해군과 육군이 완전히 분리되어 육군이 해군의 작전을 해군에 심어둔 스파이를 통해 알아낼 정도로 막장이었으니, 이는 육군이 해군을 물어뜯을 최상의 떡밥으로 작용했다. 즉 해군은 이 사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시 덴노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은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만약 미국이 똑같은 방법으로 일본 본토를 다시 공격한다면, 해군은 육군을 주축으로 한 반대파에게 그야말로 샌드백마냥 두드려 맞을 판국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해군 수뇌부는 야마모토 제독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야마모토 제독은 '항공모함은 큰 골칫거리다'는 판단하에 미드웨이 공격을 제안한 것이었으나, 이전까지는 아무도 항공모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되었던 것이다. 허나 '항공모함'에 '육상 폭격기'를 싣자 일본 본토까지 폭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항공모함에 대한 평가는 180도 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혜안을 가지고 미드웨이 공격 안건을 제시한 셈이 되었고 수뇌부는 그 선견지명을 무시한 까닭에 이 험한 꼴을 당했다는 여론이 세워졌다. 결국 체면 문제가 걸려 있던 해군에서는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대본영에서도 큰 저항없이 이 작전을 채택했다.
더불어 육군에서도 정예 연대를 편성하여 상륙 부대로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거기에 더해서 해군이 요구한다면 항공모함의 기지인 하와이 그 자체를 점령하는 작전에도 동의하였고 이에 따라 2사단과 7사단, 53사단이 하와이 침공을 위한 훈련에 들어갈 정도로 일본군은 이 공습에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육군이 이렇게 해군의 작전에 협조적으로 나온 이유는 육군도 도쿄 공습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쿄 공습의 책임은 당연히 해상경계에 실패하고 미 항모기동전단의 접근을 허용한 해군에게 있지만, 도쿄 상공에서의 방공전을 실패한 책임은 육군에게도 일정 부분 있었던 것이다.
한편 미군은 일본군의 다음 공세를 대비하면서 일본군을 기만하고 정보를 캐내기 위해 두 번의 무전 낚시를 시도했는데 일본군이 매번 낚여주는 바람에 대박이 터진다.
미군의 암호 해독 탐지
1942년 5월 20일 야마모토 제독이 발신한 통신문이 태평양 함대에서도 감청되었다. 일본 해군은 모든 통신문을 암호화하여 전달하고 있었고, 설령 감청당하더라도 해독하지 못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IBM에서 개발한 장치를 이용하여 암호문을 해독하고 있었고, 그 결과 일본군의 다음 공격 목표가 'AF'란 사실을 입수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AF가 어디냐는 점이었다. 일본군은 미군이 장악한 지역을 A로 시작하는 두단어의 약자로 표시하였는데 진주만의 경우 AH였으며 AF의 경우 진주만의 북쪽에 있으며 비행장이 있다는 것만 알수 있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과 참모부는 3월에 2식 대정이 프렌치 프리게이트 솔에서 급유를 받고 진주만을 공습했을때 AF에서 떠오른 정찰기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감청하여 AF가 미드웨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이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본토의 높으신 분들 중에서는 하와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남태평양의 어느 섬 또는 알류샨 열도를 지목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육군에서는 샌프란시스코라고 주장하면서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었다.
이때 로슈포르 해군 중령의 태평양함대 암호 해독반이 계책을 냈다. 당시 미드웨이 섬에는 도청의 우려가 없는 해저 케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해저 케이블만을 사용하여 통신하면 일본이 통신이 하나도 없는 것을 의심하고 케이블의 존재를 눈치챌까 봐, 일부러 도청을 당할 것이 뻔한 무선을 통하여 알려져도 위험하지 않은 내용을 정기적으로 교신했다. 이 정기 무선 통신을 이용하여 미드웨이 기지에 약속된 통신을 보내도록 하고, 일본군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감청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미드웨이의 급수 시설이 멀쩡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드웨이 방어군에게 '해수 담수화 장치가 고장나서 식수가 부족하다'란 내용의 거짓 교신을 무선 '평문'으로 보내도록 해저 케이블을 통해 지시하였고, 그런 줄도 모르고 이 떡밥을 덥썩 물어 버린 일본군은 이틀 뒤에 'AF에 식수가 부족함, 추후 해수 담수화 장치가 필요할 것'이란 무전을 날렸다. 이 무전은 성공적으로 감청됐고 다음 공격 목표가 미드웨이란 사실이 판명됐다. 이 사례는 무선국 통신보안교육책자에도 나올만큼 유명한(?) 사례다. 어찌나 성공적인 낚시였냐 하면 일본군은 상륙함에 엄청나게 많은 식수와 해수 담수화 장치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것은 의외의 피해를 주었는데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장비를 채운 만큼 다른 군수 물자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드웨이는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최전방 요충지였다. 특히 동태평양에는 이렇다 할 섬이 없기 때문에 미드웨이가 무너지면 그 다음은 바로 하와이였고, 하와이가 무너지면 바로 미국 서해안이었다. 이에 그 이전부터 요새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미드웨이가 공격지로 판명된 이상 더 많은 물자를 쏟아부어 방어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니미츠 제독은 미드웨이 섬에 주둔한 해군과 해병대 지휘관에게 필요 물자 요청 목록을 보내도록 지시하고는 그보다 훨씬 많은 물자를 보내고, 거기에 당시 중령이던 방어 지휘관들에게 격려 차원에서 대령 계급장을 보냈다. 여기에 버팔로, 와일드캣, 빈디케이터, B-17 등의 항공기도 있는 대로 보냈다. 비행장 크기가 섬의 1/4을 차지하는 작은 섬에 항공기 124대가 북적거렸고, 대공포에다 지뢰까지 떡칠해 버렸던 탓에 설사 미 함대가 전멸한다 해도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기는 힘들 것이란 예상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준비상황이 100%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당장 위에도 나왔다시피 미 육군은 미국 서부 해안이 위험하다며 대부분의 폭격기들을 손에 꼭 틀어쥔 채 미 해군이 요구했던 수량에 미치지 못하는 숫자만 미드웨이로 보냈으며, 조종사들은 태반이 풋내기들이었고, 버팔로는 이미 열세임이 증명되었고 와일드캣 정도나 간신히 싸울 수 있었다. 빈디케이터는 조종사들에게 '바이브레이터'라고 놀림받을 정도로 기체의 노후화가 심해서 날개에 비닐 테이프를 붙여야 할 정도였다. 그나마 6기의 최신형 뇌격기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 역시 조종사들은 대부분 신참들이었다.
일본군을 기만하라
한편 태평양 함대의 항모 기동부대는 남태평양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산호해 해전이 끝난 틈을 타 니미츠 제독은 일본군을 기만하기 위해 두 번째 떡밥을 던졌다. 당시 보급 문제로 진주만을 경유하느라 산호해 해전에 참여하지 못한 윌리엄 홀시 제독에게 모든 항공모함을 이끌고 일본군의 툴라기 기지로 진출하여 전력을 노출시키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 의미를 이해한 홀시 제독은 충실히 그 명령을 수행했고, 일부러 정찰기가 있는 데까지 가서 대놓고 모든 병력을 보여 줬다. 그 결과 일본군은 태평양 함대의 모든 항공모함이 남태평양 지역에서 작전 중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더불어 남태평양에서 작전을 마친 기동부대가 도착하자마자, 니미츠 제독은 3일만에 보급과 정비를 마치도록 한 후에 바로 미드웨이로 출격시키고 일본군의 주요 정찰 거점에 구축함을 파견하여 일본의 비행정을 통한 정찰을 방해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비행정을 이용하여 미군의 동향을 정찰하고 있었고, 이들이 중간에 잠수함을 만나 급유를 받는 장소들이 있었는데 여기에 구축함이 버티고 있으니 정찰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일본군은 전장에서 미국 항공모함을 발견할 때까지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작전 준비를 마치고 미드웨이에 파견된 미국 함대는 정규 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9척, 경순양함 4척, 구축함 32척, 잠수함 19척이었다. 이 전력은 태평양 함대가 최대로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게다가 알류샨 열도 지역에도 병력을 배치해야 했고 테오볼드 소장이 지휘하는 제8기동부대에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13척을 할애해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 미드웨이에 투입된 병력은 훨씬 더 적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항모는 3척 뿐이었다. 개전 시점에서 미 해군이 가진 정규 항공모함은 총 7척이었는데 이중 호넷,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를 제외하면 렉싱턴은 산호해 해전에서 격침, 와스프는 지중해의 몰타에 있었고 새러토가는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서 브레마톤에서 수리 겸 개장을 받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레인저는 대서양 함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일본군과 비교하면 명백한 전력 열세였기 때문에 니미츠 제독은 영국의 태평양 방면 항공모함 3척 중에서 1척을 빌려오려고 접촉을 했는데, 막상 영국은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인도양 부근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기에 "항공모함 빌려줘서 인도양을 상실하면 댁들이 책임져 줄 거요?"란 반응이 돌아와 못 빌렸다. 렌드리스에 의지 중이던 영국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실론 해전의 패배 등으로 인해 인도 상실에 대한 영국의 공포가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평양 지역 식민지들에 대한 지배력을 잃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돈줄인 인도까지 잃게 된다면 나치 독일과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경제상황은 그야말로 파멸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개전 이래 항공모함 작전을 지휘해 오던 홀시 제독이 피부병의 악화로 병원에 후송되는 바람에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총 지휘를 맡게 되었고, 홀시 제독이 지휘하던 기동 부대는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하게 됐다.
나는 당시 '휴우가'함장이었는데, 도상연습이 있어서, 미국통이라는 이유로 적색군(적군)의 총지휘관역이 됐어. 도상연습에서는 미군은 상당히 항속거리가 긴 비행기(육상기)로 색적(정찰)하지. 일본군은 함상기뿐. 미군은 일본군의 행동을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알 수 있었으니 하고 싶은 걸 얼마든지 할 수 있지. 그런데 내가 도상연습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것을 그대로 판정하면 사기에 악영향이라는 이유로 극도로 경미한 피해로 처리되어 작전 성공이라고 판정되었어.
상기 워게임의 적군 지휘관이었던 마츠다 치아키(당시 이세급 전함 휴가 함장)의 증언.
특히 작전 수립 단계에서 미드웨이 공격 계획 작성 전에 실행한 모의전에서 그 문제가 나타났다. 5월 1일 첫번째 모의 전투에서 미해군 역할을 하는 홍군측이 실제 미해군과 같이 일함대를 기습하여 실제 미드웨이 초반처럼 일본측 3척의 항공모함이 격침되었다. 그러자 참모장 우가키가 "미국이 그런 전술을 사용할 수 있을리가 없다."고 하여 격침된 함대를 원상복구 시켜 버렸다. 거기다가 이것을 지켜보던 야마모토는 자신들의 작전이 딱 알맞도록 홍군의 함대를 물려서 등장하게 하였다.
그 다음날 모의 전투에서 홍군은 미드웨이 기지의 모든 전력을 발진하여 아카기와 카가가 집중공격을 받고 격침되어 버린다. 그러자 '배 한 척이 어뢰를 이렇게 한꺼번에 얻어맞을 리가 없잖아'라며무사시:???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의 주장으로 결과를 3발 명중, 소파로 고치고 카가가 격침으로 되어 계속해서 모의전을 진행했다. 여기서 설상가상은 이후 벌어진 뉴 칼레도니아 해전 모의전에선 우가키 본인이 격침 시켰던 카가를 부활시켜 작전에 참여 시켰다.
미드웨이 기지의 항공기들은 일본 해군 함대에 전혀 피해를 입히지 못했으므로 이런 발로 굴린 시뮬레이션도 결과적으로 맞기는 했다. 다만 실제 전투에서 문제가 된 것은 미드웨이 기지에 이어 공격을 개시한 미 해군의 항모였고, 이 모의전도 결국 미드웨이의 공략 자체는 성공했으나, 몇몇 함이 연료 부족으로 좌초되는 등 상당히 볼썽사납게 끝이 난 모양. 근데 '실전에서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하자' 한 마디로 끝냈다고 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앞선 모의전 결과들이 진짜로 똑같이 일어난 것을 감안하면 일본군 측에서 지나치게 자신들을 과신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무리한 모의전을 진행했는지는 불명이나, 당시 미드웨이 공략을 좀 더 뒤로 미뤄야 한다는 반대파들이 있는 상황에서 미드웨이의 조기 공략으로 전쟁을 빠르게 끝내야 한다는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을 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겠냐는 추측이 있다.
일단은 아카기의 피격탄을 바꾼 후에 당연히 실제로 9발을 맞으면 어쩔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일본으로써는 그런 식으로 항공모함을 잃는다면 이길 도리가 없으니 이 워게임은 의미가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일단 워게임의 명중은 주사위로 결정하니 어뢰가 맞을지는 랜덤이고, 다시 하면 결과는 바뀐다.) 어쨌건 간에 위의 만화처럼 어이없게 바꾸지는 않았고 아래에서도 반발이 꽤나 있었다는 것이 현재 정설이니 저 장면은 만화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9발을 맞아 항공모함이 침몰해 작전수행이 불가능하면 거기에 맞는 후속작전도 생각해야하는게 군지휘관으로서 기본자세인데 그런 상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항공모함 한 척의 손실도 감당하지 못할 국력으로 미국과 맞선 것이 가장 큰 패인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게다가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 때와 같은 철통보안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를 보안의식 결여의 극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출항을 앞둔 군함의 승조원들은 "우리 미드웨이 레이드 갑니다"를 떠들고 다녀 스파이들이 어렵지 않게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수준이었고, 승조원들이 배치되는 과정에서 야마모토 제독은 아예 무선으로 모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군함들끼리도 무선 통신을 통해 미드웨이를 떠들고 다녔으며 그 중 압권은 어떤 군함에서 이번 작전이 끝난 이후 승조원들의 편지 주소를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묻자 다른 군함에서 미드웨이라고 답변한 것이었다. 이랬으니 미군은 통신을 가로채기만 해도 손쉽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 어이없는 사태는 앞선 낚시를 통해 일찍이 미드웨이 공격을 알아낸 태평양 함대 사령부를 오히려 헷갈리게 만들었으며 워싱턴이나 영국군도 "비열한 쪽발이들이 페이크를 치고 있다."면서 니미츠 제독을 압박했다.
물론 일본군도 완전 바보가 아니기에 이런 통신들은 대부분 암호문으로 보내고 있었으나, 당시 미군은 정보 분야에 투자를 엄청나게 한 결과 일본군의 암호(전략암호 D)를 상당히 해독하고 있었으며 미군 지휘부는 적어도 일본 해군 참가 함정만큼의 작전 개요는 파악하고 있었다. 미드웨이 작전 직전에 일본군이 암호를 바꾸기는 했지만, 미군의 정보국은 일본군의 암호 교신 패턴을 거의 파악하고 있어서 미드웨이 해전 중 일본 해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MI작전에 참가하는 전력을 4개의 부대로 나눠서 해군 중장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지휘하는 제1항공함대(각각 정규 항공모함 2척씩으로 구성된 제1, 제2항공전대를 묶어서 구성), 알류샨 열도 방면을 공격할 북방함대, 미드웨이 상륙을 위한 침공부대, 야마모토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본대로 편성했다. 일본 함대의 규모는 정규항공모함 5척, 경항공모함 3척, 전함 11척,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9척, 구축함 65척의 거대한 세력으로, 여기에 잠수함 22척과 수상기모함, 소해정 및 기타 보조 함정들을 합치면 거의 200척에 가까운 대함대였다. 특히 본대에는 당대 최강의 전함인 야마토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제는 각 부대들의 배치였다. 목표 지역의 거리가 있는 북방 함대를 제외하더라도 부대를 굉장히 넓은 간격으로 배치했는데, 이 때문에 이후 전투에서 어느 한쪽이 공격받고 있어도 나머지 전력이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실제로 항공모함들이 당한 이후에 전함으로 야간 공격을 시행하려고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미 해군을 따라잡지 못했다. 연합함대 수뇌부 및 야마모토 사령장관을 태운 야마토는 항공함대로부터 500km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항공전이 예상되는 해역에 야마토를 이렇게 이끌고 나온 것은 전혀 쓸모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 200척에 달하는 함정 중 실제로 전투에 투입된 함정은 아무리 많이 쳐줘야 그 1/10 정도였다.
일본 해군이 이렇게까지 느슨한 자세로 싸움에 임한 것은 진주만 기습 이후로 계속된 일방적인 전투를 거치면서 미군이 잔뜩 쫄아 있을 거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야마모토는 미드웨이가 점령되고 나서야 미 해군이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일견 어이없어 보이는 부대 배치 또한 이를 감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를 비롯한 일본군의 그 누구도 미군이 쫄기는 커녕 악에 받혀서 '진주만을 기억하라! 12월 7일을 기억하라!(Remember Pearl Harbor! Remember December 7th!)'는 구호 아래 복수심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는 걸 몰랐으며, 그래서 현재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승리병이라고 일컫는다. 당시 일본군의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자만심에 대한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안일함의 또다른 예로, 진주만 공습 당시 제1, 제2항공전대와 함께 제1항공함대를 구성했던 제5항공전대(쇼카쿠, 즈이카쿠)가 이 작전에서 빠진 것을 들 수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들 역시 제1항공함대 소속으로 MI작전에 참가했어야 하나, 작전 입안 중 MO작전에 2척의 항공모함을 지원하기로 함에 따라 둘만 먼저 전장에 나가게 된 것이다. MO작전은 산호해 해전으로 이어졌고, 이 전투에서 항모들이 저마다 피해를 입고 전열에서 이탈하게 되면서 결국 미드웨이 침공 불참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즈이카쿠의 경우 쇼카쿠와 달리 배 자체의 피해가 경미해, 함의 수리를 서두르고 큰 피해를 입은 기존 항공대 대신 다른 항공대를 배속시키면 충분히 작전 투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과 그에 배속된 항공대를 쇼군과 다이묘, 전함과 주포마냥 일체화된 존재로 취급했기 때문에 항공대가 항공모함을 옮겨다니며 작전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이러한 경직된 사상 덕에 여차하면 투입이 가능했던, 일본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항공모함 1척이 가장 중요한 전투의 순간에 발이 묶여 있었다. 설령 이러한 사상이나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야마모토 제독을 비롯한 군 상층부에서 전력을 최대한 끌어모으려는 생각이 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즈이카쿠를 완편 상태로 참가시켰을 것이지만, 야마모토 제독을 비롯한 군 상층부는 즈이카쿠를 미드웨이 침공에 참가시키려는 그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심각한 피해를 입고 빈사 상태로 돌아온 요크타운을 긴급 수리해서 억지로 참전시켰던 미 해군의 행보와 매우 대조되는 장면이다. 또한, 그때까지 일본 해군이 진주만 공습을 비롯한 서전에서 거둔 화려한 전과와 산호해 해전의 결과로 인한 MO작전의 실패가 하나같이 항공전력의 숫적 우세와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행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끝나지 않는데, 제1항공함대를 이끌고 있는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원래 항공전과는 전혀 무관한 수뢰전 전문가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나구모 주이치는 함대파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조약파이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충돌도 잦았다. 쉽게 말해 전문 분야도 아닌데다 상부와 알력을 빚고 있는 사람에게 일선 지휘를 맡겼다. 그나마, 나구모 본인도 항공전에 대한 자신의 식견 부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공전과 관련된 야마모토의 명령에 대체로 순응하고 있었고, 일선에서 이뤄지는 항공작전에 대해서는 참모들의 의견을 거의 그대로 따라갔으므로 연합군이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전쟁 초기에 대전과를 거둘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참모진의 능력이 중요해지지만, 나구모 옆에 있는 참모장 쿠사카 류노스케도 항공작전을 수립하고 진행하는데엔 능력이 모자랐던터라 실질적인 항공작전의 수립과 실행은 항공참모였던 겐다 미노루(당시 중좌)의 몫이었다. 그러나, 겐다는 당시 일개 중좌(중령)에 불과했기에 경험과 전체 전황을 조망할 식견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후대에서는 항공병과에 조예가 깊고 1항공전대를 육성한 경험이 있던 오자와 지사부로나, 야마구치 다몬이 어떤 형태로든 기동함대 전체 지휘를 맡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곤 한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 당시 오자와는 기수가 나구모와 하나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남견함대 사령장관으로 부임한지 수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고, 야마구치 역시 연공서열에서 밀려 있었다. 이들을 중장급 자리인 기동함대 사령관에 앉히는거나 참모장으로 보내는 것은 연공서열을 중시하던 당시 일본 해군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간기부터 대표적인 항공주병론자이자 명목상 실전부대를 총지휘하는 직책인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라면 진주만이나 미드웨이처럼 자신의 목을 걸고 반 공갈로 강하게 추진한 작전에는 자신이 직접 참가해서 나구모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도 있었겠지만, 야마모토는 전쟁 기간 중에는 자신이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전함에 틀어박혀 안전한 후방에서 턱짓으로 지시를 내릴 뿐이었다.
이렇게 일본 해군 안에는 불안 요소가 산재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를 제대로 인식한 사람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 25일부터 각 함대들의 출항이 시작되며 MI작전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5월 말, 6월 초에 이르러 위에서 언급된 미군의 부산하고도 수상한 움직임(비록 항공모함을 직접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이 계속 포착되면서, 미군이 일본군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정보가 야마모토에게 전달되었다. 앞서 가는 나구모 제독 역시 이 정보를 알고 있었으나, 야마모토와 나구모 모두 이 정보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해당 정보를 접수한 본대에서 제1항공함대와 연락하려다가 "나구모 제독도 통신을 들었을 것이니 굳이 본대의 위치를 노출시킬 필요는 없다."는 진언을 받아들여 제1항공함대에 정보를 보내지 않았는데,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나구모 제독은 기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무선 봉쇄 덕분에 이 정보를 듣지 못했으며 결국 이것이 커다란 패착이 됐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 결과로는 나구모 제독도 미군의 움직임을 이미 알았다는 것이 정론이다.
이런 어이없는 행동의 원인은, 미리 짜놓은 계획이 헝클어지는 것을 원치 않은 데다 미드웨이와 하와이 사이에 미리 배치해 둔 잠수함들이 미 항공모함의 접근을 알려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 잠수함들은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게다가 이 잠수함 부대의 지휘관은 미드웨이 공격 작전에 별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가 뒤늦게 잠수함 부대를 전개하는데, 제때 전개했어도 이미 늦었다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전개가 늦었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첫댓글 정보전에서 미국이 앞선던 것이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