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당신은 잊었나요
마음만 설레 이던 지난날 그 사랑을
첫사랑에 당신은 울었나요
가슴만 메어지던 지난날 그 사랑에
굳은 맹세 푸른 꿈은 사라지고
아련한 추억에 조각들만 남았을 때
쓸쓸한 길에서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마주서면
무슨 말을 하나요 세월이 흐른 뒤에
(장은숙, 당신의 첫사랑 1절)
가수 장은숙이 부른 ‘당신의 첫사랑’(1978)은 특별한 비유나 상징도 없이 그냥 직설적으로 지난날 첫사랑을 회고하는 다소 단조로운 노래다. 하지만 누구나 경험한 적 있는 첫사랑을 잔잔한 멜로디에 허스키한 목소리로 녹여내 대중의 호감을 샀던 걸로 기억한다.
첫사랑의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뜨겁고 열정적인 사랑이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그다지 많을 것 같지 않다. 대체로 노래 가사처럼 ‘마음만 설레고 가슴만 미어지던’ 날들을 지나고, ‘굳은 맹세의 푸른 꿈’은 저 멀리 사라지면서, ‘아련한 추억의 조각들’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개 첫사랑은 10대 사춘기 시절에 시작되거나 성인기 초기에 시작된다. 이 시기는 아직 자신의 개인적인 정체성이나 사회적인 포지션이 구체적으로 정해지기 전이어서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시작한 첫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상대방의 집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버린다든지, 대학진학을 위해 서로 다른 지방으로 떠나버리면서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사춘기 때는 물론이고 성인기 초기에 접어들었다 치더라도, 아직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진출과 관련된 비전도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커플들의 자유 의지에 따라서 그 로맨틱한 사랑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은 사춘기 시절의 첫사랑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처럼 초등학교 때 동기동창으로 만나 오랜 연애 시절을 거쳐 마침내 결혼에까지 골인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드문 경우일 것이다. 우리 부부가 경남의 작은 소도시 동향 출신이라 사춘기를 지나서 연애하고 티격태격하거나 잠시 헤어졌을 때도, 친구나 친척들을 통해 서로의 소식을 알 수 있었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최백호가 부른 ‘낭만에 대하여’(1995)는 가히 국민가요 수준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최백호는 이 노래가 첫사랑 소녀가 생각나서 짓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년의 문턱을 넘어선 언젠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아내를 바라보다가, 문득 첫사랑 소녀가 생각이 나더라는 것이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리 들어보렴” 실제로 노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물론 이 노래는 첫사랑 소녀가 생각난 것을 계기로,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아쉬운 마음으로 관조하면서 지나온 인생을 뒤돌아보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엄청난 회한(悔恨)을 노래하는 울적한 분위기는 아니어서 그냥 조용히 듣기에도, 아니면 노래방에서 함께 불러도 좋은 노래다.
궂은 비 내리는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올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전문)
1절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옛날식 다방에서 도라지 위스키를 한잔 시켜 놓고, 다방 마담과 이런저런 농담을 하다가 애절한 색소폰 연주를 듣다가 하던 중, 문득 옛날 첫사랑과 헤어진 실연(失戀)의 애상에 젖는다.
2절은 밤이 깊어가는 항구의 부둣가의 한 술집에서, 역시 술잔을 앞에 두고, 첫사랑 그 소녀를 회억하면서 ‘청춘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애써 자위하면서 가버린 세월을 아쉬워하는 노래이다.
1절은 옛날식 다방, 도라지 위스키, 다방 마담, 색소폰 연주 등 60~70년대의 분위기를 상기시키는 소품들이 등장하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공간적 배경이 된다. 2절은 지금은 사람을 나르는 교통편으로는 역할이 미미해진 배가 정박하는 항구에 밤이 깊어간다. 선창가 술집을 배경으로 술을 한잔 하는데 뱃고동 소리가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옛날 열차나 항구가 주요 교통편이던 시절에는 대합실이 수많은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던 추억의 장소였다. 물론 사랑하는 연인들이 눈물로 헤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각설하고 사람들에게 ‘첫사랑’의 경험은 왜 이리 강렬한 것일까. 왜 첫사랑은 이렇게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세월이 흘러도 아련한 추억으로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일까? 심리학자들은 대개 초두효과와 제이가르니크 효과를 들먹인다.
초두효과(Primacy Effect)란 처음 제시된 정보 또는 인상이 나중에 제시된 정보보다 기억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현상을 말한다. 사람들이 첫인상을 중요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최초의 아메리카대륙 발견, 최초의 달 착륙,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등 사람들은 ‘처음’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하물며 사랑, 그것도 첫사랑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럼 제이가르니크 효과(Zeigarnik effect)는 무엇일까? 제이가르니크 효과는 미완성 효과라고도 불린다. 완성하지 못한 어떤 일에 대해서 지속해서 정신적 압박과 불편함을 느끼고 일을 끝마치려는 효과를 말한다. 나처럼 첫사랑과 결혼한 사람을 제외하고, 첫사랑과 헤어진 대부분의 사람이 여기 해당할 것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소리다.
이것뿐일까? 첫사랑은 일생에 딱 한 번만 생기는 일이다. 그 사랑이 결실을 이루었건 아니건 간에 첫사랑은 운명적이다. 개인사에 있어서 일생일대의 특별한 대사건이다. 그리고 아직은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인 만큼 대개는 어떤 사적인 이익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관계가 순수하다. 말이나 행동에 어떤 꾸밈이 없다. 천진난만하다. 해맑은 청정한 기억에다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기에 첫사랑은 더욱 특별해지는 것이다. 첫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한 어떤 특별한 그 무엇이다. 그렇게 첫사랑은 그 사람의 마음에 영원히 남는 것이다.
또, 첫사랑이 그 사람의 일생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할 수밖에 없다. 첫사랑은 사춘기든 성인기 초기든 어느 정도 철이 들었을 때, 자의에 의해 의미 있게 맺어진 가장 중요한 사회관계이다. 커플은 자신이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특별한 느낌이 들게 된다.
커플들은 이제까지는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한 가치를 가진 대상으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첫사랑을 경험하면서, 자신보다 타인을 더 우선시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물론 눈에 콩깍지가 쓰였을 때까지는 말이다. 그는 타인에 대한 헌신을 경험한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조건 없는 사랑의 마음을 경험하게 된다. 첫사랑의 강렬함, 순수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첫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열광적인 사랑과 성숙한 사랑을 구별하게 해주는 체험을 하기도 한다. 서로 사랑에 빠진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깨어있는 모든 순간에 서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서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상대방을 포용하고 장단점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배우게 된다.
이렇듯 첫사랑의 경험은 독특한 것이며, 유일한 것이며, 반복 불가한 것이며, 대체 불가한 것이다. 첫사랑의 경험은 그 이후 그 사람의 삶과 미래를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바꿔 놓는다. 첫사랑을 닮은 사람을 보면 노년이 되어도 마음이 설렐 것이다. 옛날 한때의 사랑이, 첫사랑이 가져다주었던 매혹, 흥분, 두려움, 스릴이 끊임없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나저나 내 첫사랑 소녀는 이제는 중년의 아주머니가 되어 나하고 같이 늙어 가고 있고, 내 아내의 첫사랑 소년은 백발이 성성한 아저씨가 되어 아들이 장가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은 가수 최백호처럼 다방에서 도라지 위스키를 한잔하다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가, 밤 깊은 선창가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설거지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도 첫사랑 그 소녀가 어디에서 어떻게 늙어 가는지 아련한 추억에 잠길지 궁금하다.
오늘 저녁에는 지금은 사라진 도라지 위스키는 아닐지라도, 내 ‘첫사랑 그 소녀’와 위스키 한잔 마셔볼까? 알코올 성분이 살짝만 들어가도 전신이 빨갛게 물드는 아내는 손사래부터 치겠지.
‘첫사랑이 결혼하여 잘 살면 배가 아프고, 못 살면 가슴이 아프고, 같이 살면 머리가 아프다‘는 데 아내가 이 글을 볼 게 뻔하니, 나는 머리 아프다는 소리도 못 하겠다.
김진국 2021.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