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과연 어떤 관리가 믿을만할 것인가? 절대적인 권위의 상징인 자금성에 있는 황제, 그리고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실제적인 의미로도, 명나라와 청나라의 황제들은 일부 몇몇을 제외하고는 중국 역사상 가장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절대황권의 군주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공할 권위를 지녀 하늘과 땅을 가를만한 권세를 지닌 군주라 하더라도, 그 눈과 귀가 막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명나라 시기 재상 엄숭은 내각을 20년 넘게 좌지우지하며 대단한 권세를 누렸지만, 황제에게 간언하는 간관들은 엄숭의 아성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엄숭의 양아들, 조문화가 조정 내에서 통사직에 머물며, 먼저 정보를 입수하여 반대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가정제의 눈과 귀를 막았습니다.
옹정이 아무리 세상 경험이 많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어도 그 역시 황실의 사람일 뿐입니다. 만인의 위에 군림하는 천자가 민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방 정치의 실체가 어떠한지 제대로 파악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이리하여, 옹정은 밀절(密折) 제도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이른바 '밀절'은 비밀 상소를 말합니다. 상소문에 황제만이 알 수 있도록 기밀을 끼워 넣는 것으로, 대부분 탐관오리의 불법 행위, 민간의 동향에 관한 정보가 주류를 이룹니다. 이는 관리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드는 역할도 있었고, 이에 대해 신하들은 당연히 부정적인 인식을 내었지만, 옹정은 공개적으로 자신이 통치를 잘 하려면 이것이 필요하다고 공헌했습니다.
밀절이란 제도의 본 모습이 옹정 시대부터 이어진것은 아닙니다. 그전에도 비슷한것은 있었고, 강희제 통치 시기에는 중요한 도구로 떠올랐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밀절은 강희 32년인 1693년 7월, 소주의 강우 상태, 양곡의 가격등을 보고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제도로서 최적의 기능을 하게 된것은 옹정 시대였습니다.
강희 시대, 밀절을 올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제한적이었고, 대부분의 내용은 지방 관리들의 동태를 알리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옹정은 즉위 2년 부터 대학사들에게 교지를 내려, 지방의 최고 관리인 독무들에게 밀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그 범위를 점차 제독, 통병관, 포정사, 안찰사 등으로 확대했습니다. 게다가, 원칙적으로는 밀절을 올릴 수 없는 낮은 직위의 관리들도 특수 관계를 이용해 밀절을 올렸습니다.
밀절이 제도화되기 이전에 독무가 정무에 관해 올리는 상소는 제본 형식을 갖추어야 했고,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관계로 내용이 상세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신하들의 고총, 내부적인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 어려웠으나, 밀절은 다루는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고 군사와 정사 등 중대한 문제부터 신변잡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무엇보다 형식상의 제약도 없었습니다.
"바쁠 때에는 비밀스러운 중요 안건이 아닌 한, 짐의 허락 아래에서 타인에게 대필시켜도 무방하다. 공식 문서가 아니니 행서체, 초서체를 섞어도 개의치 않는다. 요컨대 보고 이해할 수만 있으면 족하다. 여기서는 겉치레 예의범절 따위는 필요없다."
옹정은 신하들이 '매일' 보고하도록 권했습니다. 정책 재정과 집행 및 관리의 인사이동의 큰 틀을 보려면 많은 정보가 필요했고, 흐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을 해야 했습니다. 밀절은 황제와 보내는 자 사이에서 절대적인 비밀을 필요로 했고, 만일 이를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밀절을 할 수 있는 권한 자체를 박탈당했습니다. 지방관의 입장에서도 밀절을 통하면 일을 매우 빨리 처리할 수 있었기에, 이 권한을 잃어버리는것은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밀절을 보관하는 함은 궁전에서 특수 제작하고, 오직 두 개의 열쇠만 준비하여 황제와 상소의 당사자가 한 개씩 소지합니다. 제삼자는 절대로 열 수도 없고, 열어서도 안됩니다. 밀절은 끊임없이 올려야 하므로 한 사람당 네개의 밀절함을 보유했는데, 만일 이를 잃어버리면 사적으로 만들어선 안됩니다. 밀절을 접수한 태감은 왕공대신에게 이를 전달하고, 그 사람들은 이친왕 윤상, 상서 악이태, 대학사 장정옥 등으로 옹정의 최측근들입니다. 그들 조차도 감히 밀절을 보지는 못하고, 옹정에게 전달을 하기만 했습니다.
옹정은 모든 밀절을 손수 개봉해서 보았고, 본 뒤에는 붉은 색 붓으로 자신의 의견을 씀으로서 즉시 답변을 주었습니다. 각 성의 문무 관원들이 올리는 상소는 하루에 평균적으로 30여건. 많으면 60여건에 달했습니다. 옹정은 이를 모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매일매일 혼자서 처리했습니다.
옹정 시대 동안 밀절의 권한을 가졌던 사람들은 무려 1천여명. 그들은 전국 도처에서 황제의 눈과 귀가 되고,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며 옹정이라는 권력을 다루는 달인의 꼭두각시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옹정은 신하들의 생각을 바로 읽어내었고, 그 자리에서 즉시 붉은색 먹으로 따끔한 충고를 했습니다.
옹정의 밀절은 과연 어느정도나 관리들을 장악했는가?
청나라 조익이 쓴 첨폭잡기(簷曝雜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옹정 중기에 장원급제한 왕운금은 정월 초하루, 조정의 회의를 마치고 귀가하여 친구들과 마작을 하며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패 한개가 업어지자 놀이를 중단하고 술을 마셨고, 얼마 후 옹정이 그에게 정월 초하루에 무엇을 했느냐고 묻자,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왕운금은 사실대로 고했습니다. 옹정은 왕운금이 진실을 말했다고 칭찬하며, 소매에서 그가 잃어버렸던 마작패를 건네주었습니다.
소장잡록(嘯亭雜錄)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 한 관리가 북경에 들어왔을 때, 모자를 하나 샀다. 그는 지인을 만나 모자를 산 이유를 말해 주었다. 다음날 황제를 알현하러 들어갔을 때 예의상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있자, 옹정이 껄껄 웃으며 "새 모자가 더러워지지 않게 조심하라." 라고 하였다. 그가 모자를 산 것을 본 누군가가 옹정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던 것이다.
왕사준이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 그가 북경을 떠나 다른 곳으로 부임하여 가려고 할 때 대학사 장정옥이 시종을 한명 소개해 주었다. 후에 왕사준이 황제를 알현하러 북경으로 가려고 하자 시종이 사직하고 돌아가겠다는 인사를 했다. 왕사준이 이유를 묻자 시종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동안 몇 년을 모시면서 별다른 과오를 저지르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먼저 황제를 뵙고 이곳 상황을 보고 드려야 합니다."
밀절, 그리고 첩자. 이 두 가지 수단을 이용해 옹정은 관리들을 손바닥에 올려놓았지만, 첩자들은 사실을 호도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기민한 옹정은 이를 다 믿지 않았습니다.
"지방 정치가 잘 운영되고 있는지, 관리가 근면한지, 태만한지, 윗사람은 공평한지, 불공평한지, 아랫사람 중에 누가 뛰어난지, 누가 모자란지, 군대의 규율은 어떠한지, 모든것, 특이한 일이 귀에 들어오면 달리 증거가 없더라도 빠뜨리지 말고 모두 보고하라. 확실한 증거가 있는것과, 우연히 풍문으로 들은것만 구별하라. 짐이 다른 방법으로 확인해 볼 것이다."
이러한 밀절을 게을리 할 경우, 또는 당연히 보고해야 할 사실을 감추고 있었다면 이때는 옹정이 이를 알아내고 신하들을 비난했습니다.
"짐은 이 일을 전부터 확실히 알고 있었다. 너는 이제 와서 무슨 낯으로 보고하는 것이냐! 만약 이 일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면, 너는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목석이다."
"이렇게 하찮은것만 보고 하는것, 가만히 보니 반드시 보고해야 할 중대한 사안을 감추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너희들이 정치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어떻게 하는지 짐이 모르고 대충 넘어 갈 것 같은가? 짐이 정무를 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점, 바로 이런것을 확실히 파악하는 능력이다."
옹정은 신하들에게 직접 욕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의견, 잘도 내어놓는구나. 그나마 서간 문으로 왔기에 망정이지, 만약 정부를 통해 공문으로 제출된것이라면 너는 큰 벌을 받았을 것이다."
"바보는 고칠 수가 없다더니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금수라도 너보다는 나을 것이다!"
"양심을 뭉개 버리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 소인배가 아닌가!"
"목석처럼 무감각해서 인간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녀석이구나."
"무학, 무능하며 욕심만 많아 헛다리만 짚는구나."
"속임수를 일삼는 거짓말쟁이, 눈가림만 하는 사기꾼!"
"은혜도 모르고, 의리도 모른다. 잘못 둔감한 늙은 너구리. 국가의 법규를 무너뜨리는것만이 네가 한 일이다."
그나마 욕설을 하는편이 차라리 지방관들에게는 나았습니다. 그 다음 처리를 잘하면, 옹정은 태도를 바꾸면서 기뻐했지만 정말로 화가 나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공식적인 수단을 사용해 면직을 시켜버렸습니다. 옹정의 거실은 이렇게 해서 지방관이 올린 글에 황제가 답장한 주비유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뒤에 황제는 이 중에서 정치에 참고가 될 만한것들만 뽑아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옹정주비유지(雍正硃批諭旨)로, 모두 112책이나 되는 분량이지만 이는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인의 생활습관은 대체로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지만 옹정은 항상 새벽 4시 이전에 기상했고, 매일 아침 전대의 역사 기록인 실록 등을 읽었습니다. 궁궐의 문이 4시에 열리며 관리들이 6시에 출근하면, 황제는 7시까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대신들을 만나 정치를 논의했습니다. 특별히 알현을 청하는 사람들을 접견하면 오후까지 이어졌고, 틈이 나도 노는것이 아니라 학자를 불러 경서와 역사 강의를 들었씁니다. 아침이 빠르면 밤도 빠른 편이라 8시만 되어도 모두들 꿈나라로 떠날 준비를 했지만 옹정은 바로 이 시간에 지방관들의 밀절을 꺼내서 보고 답장을 썻습니다.
"짐은 뜻을 세움에 있어, 몸소 근면하게 천하를 이끌어 나가겠다고 결심하였다. 보통 대소 신하가 보내온 하나 하나 직접 답장을 쓴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느냐고 의심하는 자들도 있는 듯하나 낮에는 대신과 만나거나 정무를 지휘하느라 몹시 바쁘고 마음도 안정이 안되므로 밤 시간을 여기에 할해하고 있다. 밤이 되면 주위가 조용해져 정신 집중이 잘 되기 때문에 지방에서 온 주접의 십중팔구는 밤에 읽고 답장을 쓴다. 이 편지로 지금 등불 아래서 쓰고 있다. 웬일인지 짐은 어릴 적부터 습관적으로 밤이 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경의 보고는 꽤 길기는 하지만 변명할 필요는 업다. 아무리 길어도 이처럼 유익한 보고라면 읽는 것이 즐거워서 피로를 잊어버린다. 수천 자의 긴 보고문이라도 길다고 해서 끝까지 읽지 않은 적이 없다. 군신간에 이런 식으로 마음을 쓸 필요는 없다."
"짐은 스스로 특별히 탁월한 군주라고는 생각지 않다만 그렇다고 해서 열등하고 우매한 군주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이 편지는 등불 아래서 쓰는 것이라 글자 모양이 엉망인데 비웃지는 말아 달라."
"어쩐지 주저하는 듯한 글귀가 있기에 이 답장을 쓴다. 시각은 벌써 자정을 지나고 있다."
옹정은 여유가 없었습니다. 강희가 강남 등 여러 곳을 활보한 것과는 달리, 옹정은 정 나가고 싶으면 베이징 근교에 있는 서산의 별장으로 가끔씩 가는 정도였을뿐 그 이상은 한 발자국도 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일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를 쉬면 하루분이 더 밀렸고, 그때문에 별 일없이 천자를 알현하고 싶다는 관리들의 청원은 거절하고, 자신을 만나러 올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빨리 임지로 움직이라고 말했습니다.
"천하의 재물은 만민을 위한 것이다. 천자 한 사람의 욕망을 위하여 쓰는것은 불경스러운 짓이다."
옹정은 궁전에 방 한칸도 더 늘리지 않았고, 지방관이 하례장을 올리면서 비단을 사용하면 왜 낭비를 하느냐면서 종이를 쓰게 했습니다.
옹정제는 권력의 화신이었으며, 권력을 가장 사랑했고, 자신에 대적하게 된 모든 자들에 대해 악랄할 정도의 방법을 취해 파멸로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늘이 중국 천자에게 내린다는 천명이라는것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천명이라는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것인지 관념적인 것인지를 따지기 전에, 그는 의미를 믿었고, 따라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수고롭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그에게 부여한 너무나 당연스러운 의미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