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때문에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적어도 마스터스 중에서는 말이다. 건강 때문이거나, 혹은 남다른 성취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즐기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다. 그런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언제부터인가 내가 ‘기록의 노예’가 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기록 경신을 위해 부상을 참아가며 훈련을 하거나, 체중을 줄이기 위해 밥을 굶으며 훈련에 몰두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왕 즐기기 위해 시작한 일, 한번 마음껏 즐겨보자. 즐겨야 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면 지금부터 소개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자. 나름대로 자신만의 펀런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나도 즐겁고, 남도 즐겁다
달림이들 사이에서 ‘금풍도사’로 불리는 나금풍(51)씨. 나씨는 ‘펀런(Fun Run)’의 원조 격으로 꼽힌다. 아시아나항공에 근무하는 덕에 해외 대회 출전 경험이 많고, 직접 외국에 거주한 경험도 있다보니 해외의 달리기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해외 마라톤대회에 나가보면 축제 분위기에서 모두 즐겁게 달립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회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심각하게 달리는 것 같아요.”
나씨는 언제부터인가 기록 단축보다 즐겁게 달리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새로운 즐거움을 찾기 위해 특이한 복장을 입고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맨 출근길 직장인 모습이나 중절모에 선글라스를 낀 보디가드 컨셉트로 대회에 나선 적도 있다. 호루라기나 나팔 등을 요란하게 불며 흥을 돋우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특별한 트레이드마크가 있지 않지만 언제나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고 기록 욕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펀런 못지않게 기록도 마라톤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 나씨의 생각이다. 나씨는 풀코스와 하프코스, 10km 대회를 포함해 연간 20여 개의 크고 작은 대회에 출전하고 있는데 이 중 한두 차례는 기록 도전을 위해 달리고 있다. 나씨는 “즐기면서 달릴 것인지, 목표 기록을 달성한 후 기록으로부터 해방되어 달릴 것인지 하는 고민은 많은 달림이들이 평생 풀어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본지에 근육학 관련 원고를 연재하고 있는 최상권(38)씨는 주로에서는 ‘달리는 슈퍼맨’으로 더 유명하다. 파란색 스펀지 몸통에 빨간 망토를 휘날리며 주로를 날아다닌다. 최씨는 2004년부터 슈퍼맨 복장을 하고 달리기 시작, 이미 이 복장으로 10여 회 풀코스를 완주했다. 이 복장 덕분에 방송에도 출연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처음엔 그냥 응원 나오는 가족들을 재미있게 하려고 시작했죠. 반응이 좋아서 계속하게 됐습니다.”
최씨는 가족들과 백화점 쇼핑을 나갔다가 캐릭터 숍에 있는 슈퍼맨 복장을 보고 구입, 대회 때마다 착용하고 있다. 최씨 역시 매년 한두 차례 정도는 기록 경신을 위해 슈퍼맨 복장을 벗고 ‘클라크’의 본모습으로 돌아간다. 평소 무거운 슈퍼맨 옷을 입고 달린 덕에 체력 단련이 됐는지, 지난 중앙 마라톤에서 3시간26분의 개인 최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목표 상실, 펀런으로 극복
스펀지로 만든 캐릭터 복장을 입고 달리는 것이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보는 사람에겐 즐겁지만 본인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다. 최씨는 “슈퍼맨 복장을 입었을 때는 후반에 힘들어도 걷지 못한다”며 “쉬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쉬게 된다”고 말했다.
더운 날씨에는 땀 범벅이 된다. 여기에 비라도 내리면 빗물에 젖은 스펀지 몸뚱어리는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즐겁기 때문에 힘든 줄 모른다.
러너스클럽 무교점을 운영하고 있는 정민호(37)씨는 2005 춘천 마라톤부터 스파이더맨으로 변신,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슈퍼맨과 달리 얼굴에 마스크까지 뒤집어쓴 완벽한 변신이었다. 정씨는 모든 마스터스들의 꿈인 서브3 주자이기도 해 그의 변신이 더욱 궁금해졌다.
“서브3를 연거푸 세 차례 달성했습니다. 목표를 이루고 나니 좀 허탈해지기도 했고, 뚜렷한 목표 의식이 없으니까 운동에 대한 재미도 덜하더군요.”
정씨는 “조금 노력하면 2시간30분대 진입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라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힘겨웠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기록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마라톤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정씨의 꿈은 슈퍼맨이든, 배트맨이든 이색 복장을 한 사람들만 출전하는 대회가 열리면 거기에 참가해서 1등을 하는 것이다.
문형중(51)씨는 지난번 춘천 마라톤 때 배트맨으로 변신, 정씨와 콤비를 이루어 달렸다. 문씨는 몇 년 전 몸이 아파 국립의료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병원에 걸린 장기 기증에 대한 내용을 보고 그 자리에서 서약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욕심에 배트맨으로 변신했다. 배트맨 날개에는 장기 기증에 대한 안내가 적혀있다.
이색 복장 때문에 겪는 불편함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혼자서 화장실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복장이 원피스 형태인데다, 지퍼가 등 뒤쪽에 달려있어 누군가 도와줘야 옷을 벗을 수 있다는 것. 정민호씨는 대회 중 주유소 직원들에게 도움을 요청, 볼일을 마친 일도 있었다고.
달리기를 하면서 본업인 사업도 잘된다면 금상첨화. 직원들이 단체로 출전, 회사의 신상품을 홍보하거나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를 홍보하는 일도 요즘은 흔한 일이 됐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마포에서 ‘소문난 쭈꾸미’집을 운영하는 문정복(50)씨. 문씨는 서울 압구정동에서 횟집을 운영할 때 주방장 복장으로 출전했는데 반응이 좋아 계속하게 됐다. 주꾸미집으로 업종을 바꾼 후에는 50만원을 주고 주꾸미 모자와 수제비 항아리 모형을 맞춤 제작, 지금까지 애용하고 있다.
문씨는 달리면서 명함을 나누어 주거나 항아리 옆에 명함을 붙여놓는 방식으로 적극적인 업소 홍보를 하고 있다. 그 덕분인지 달림이들 중에서 소문을 듣고 이 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수제비를 한 그릇 무료로 주기도 하는 등 서비스를 아끼지 않는다.
“일찍부터 해외 마라톤대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중국은 물론 뉴욕이나 런던 등 해외 유명 마라톤대회에 많이 나가봤죠. 해외 대회에 나가보니 대회에 출전해서 자신을 홍보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나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운 날 대회에 나가면 주꾸미 모자에서 열이나 죽을 맛이지만 추울 때는 오히려 따뜻해서 달릴 만하다. 어쨌든 달리기도 하고 가게 홍보도 되니, 즐거움은 두 배다. 문씨는 풀코스를 76회나 완주했고, 최고기록이 3시간6분대인 베테랑 주자다.
나만의 이벤트 만끽
색다른 복장을 하지 않아도 즐길 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경상대 전차수(47) 교수는 춘천 마라톤에서 4년째 ‘사진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사진 자원봉사란 달리면서 대회 모습을 찍어 주최 측에 제공하는 일이다.
“대회 신청을 못 했는데 달리고 싶은 거예요. 그냥 뛸 수 있는 길이 없나 알아봤더니 페이스메이커와 사진 봉사가 있더군요. 페이스메이커는 힘들 것 같아서 사진 봉사를 택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연례 행사가 됐다. 대회 후 춘천 마라톤 화보에 자신이 찍은 사진이 가득한 것을 보면 또 한번 쾌감을 느낄 수 있다. 4년을 봉사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캐논 익서스 V2라는 콤팩트형 카메라를 들고 찍었는데, 지금은 니콘 D70이라는 전문가용 모델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매년 똑같은 사진을 찍다보니 참가자들의 변화, 주변 풍경의 변화, 응원하는 사람들의 변화 등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최근 예전에 찍은 사진을 정리하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벤치에 앉아 응원하는 할머니들을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2002년과 2005년 사진의 등장인물이 같았던 것. 심지어 한 할머니는 3년 전에 신었던 신발까지 똑같아서 전 교수를 놀라게 했다. 그들에게도 춘천 마라톤은 연례 행사였던 모양이다. 이 사진은 전 교수의 개인 블로그(blog.naver.com/chunchasoo)에서 볼 수 있다.
전 교수는 한번 대회에 나가면 1천7백여 컷 정도의 사진을 찍는다며 전시회는 아니더라도 나중에 어떤 형태로든 찍은 사진을 정리하는 기회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좋은 일을 하는 것에서 재미를 찾는 러너들도 있다. ‘송파세상’이란 애칭으로 잘 알려진 김현우(47)씨는 매년 ‘결식 아동을 위한 사랑의 달리기’ 이벤트를 열고 있다. 자선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1만원씩 내고 자신의 예상 기록을 공개한 후 대회에 출전하는 것.
자신의 예측 기록보다 늦거나 빠를 경우 기록에 따라 벌금이나 축하 기금 등의 형식으로 추가 성금을 내도록 하는 행사다. 2004년의 경우 1백여명의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참여, 총 4백여만원을 모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했으며 올해는 1월 말부터 동아 마라톤 직후까지 실시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