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육체에 가시 때문에
(고린도후서 12 : 1-10)
우리가 잘아는 헬렌 켈러는 소경이요, 귀머거리며, 벙어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병약자였던 화니 제인 크로스로 불리는 아이작 왓츠 박사는 9천 편 이상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 할 만큼 많은 병을 가지고 있었던 칼빈은 16세기의 대표적인 종교개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경이 된 죤 밀턴은 「실락원」을 썼습니다.
옥중에 갇힌 죤 번연은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또한 성경 본문의 사도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지닌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약한 중에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욱 크게 쓰임받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남이 경험하지 못한 주의 환상과 계시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상과 계시를 보면서 너무 자고하지 않으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었습니다. 주의 환상과 계시를 보는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받았는데 내 육체의 가시가 있으니 스스로 자랑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무슨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을까요?
사도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는 간질병, 지독한 두통, 심한 안질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안질로 인해 일생동안 괴롭혔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를 사단의 사자가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육체의 가시는 질병, 양심의 가책, 핍박 어느 것이든간에 이들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생의 즐거움을 빼앗으며, 온전한 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도바울에 이런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을까요?
* 이 육체의 가시는 교만하지 못하고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7절)
사도바울이 남이 경험하지 못하는 주의 환상과 계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사도바울의 몸안에서 일어났는지 몸밖에서 일어나는지 모르고 하나님만 아시고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알게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도바이 계시와 환상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환상 경험을 자랑하면서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하면 거짓입니다.
스스로 자랑하는 교만은 패방의 선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패망치 않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3번의 간구에도 불구하고 그 가시가 제거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거운 짐도 주십니다.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두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큰 경험이 이 지상에서 그의 사역이 파멸시킬 수도 있는데
교만하지 않기 위해 사단으로 하여금 사도바울을 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씨가 뿌려진 대상은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는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습니다. 이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를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다짐하지만 세상살이의 염려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세상 속에서 물질을 얻으려는 욕심이 곧 말씀을 멀리하게 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느 청년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어 목공소에 취직을 했습니다. 목공소의 일은 어려운 일들이었지만 꼭 해내리라는 굳은 각오를 가지고 청년은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무의 재질이 워낙에 거친지라 청년은 여러 번 나무 가시에 손을 찔리곤 했습니다. 장갑을 끼고 일을 했지만 여전히 가시는 그의 손을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주인에게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인은 맨 손으로 나무를 만지는데도 가시에 찔리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가시에 찔리지 않는 것일까? 가시도 제 주인을 알아보는 것일까? 나중에 주인에게 물어보았을 때 청년은 그 손이 가시가 피해가는 손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오랫동안 열심히 일을 해 온 주인의 손바닥에는 가시가 박힐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손바닥 곳곳에 굳은 살이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징벌과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죄는 인간을 종으로 만듭니다. 죄는 마치 사악한 고리대금업자와 같습니다.
돈을 빌려주고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죄는 인간의 자유를 박탈합니다.
죄의 종이 되면 죄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죄는 저주를 가져옵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의 뿌리는 죄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 때문에 온 인류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죄는 저주를 불러오고.. 재앙을 불러 옵니다.
죄는 불행을 불러오고.. 가난을 불러옵니다.
죄는 질병을 불러오고..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옵니다.
우리 몸의 질병은 과로나 스트레스.. 음식이나 환경오염..
유전적인 요소 등 많은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죄에 뿌리가 있습니다.
죄는 결국 사망을 가져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마귀의 종노릇하게 만듭니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죄 때문에 신음하고.. 멸망 받게 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손에 가시가 박히면 괴로워합니다. 아파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에 어떤 것이 박혔는지 생각해 본다면 가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커다란 대못에 손이 박히신 채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던 것입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삶 속에 괴로움을 발견했을 때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를 보도록 하라. 내가 당하는 가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NO 라고 응답하여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합니다.(9절)
육체의 가시에 대한 사도바울의 방법은 기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가시의 제거를 위하여 세 번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세 번 기도했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아픔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 기도가 간절하기에 곧 응답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넫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NO 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자신에게 고통이 되는 가시를 제거 해 달라는 사도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너의 약함 가운데서 온전해 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NO라고 하였을 때 사도바울은 자신의 고통과 고난들이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고통과 고난들을 하나님의 족한 은혜를 통해 견딜수 있게 되고 더 나가 그 가운데서 기뻐할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진심으로 간절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더라도 응답이 내생각 하는 것과 다르게 응답이 올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ㄴ니다.
내 응답이 다르게 나온다고 하여도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는 것이 영적문제 육체적 문제 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제, 가정 문제, 사회 생활의 문제 등 자신의 전 실존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되 응답해 주시는 대로 그 뜻에 기쁘게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내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하나님앞에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됨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헤를 받고 그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게 된 것입니다.
*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10절)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에 선교를 가서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원주민이 큰 돌을 선교사 가슴에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큰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같이 강을 건너는데 선교사는 ‘이 사람들이 왜 나에게 무거운 돌을 안겨주는지 모르지만 시키는대로 하자’ 생각하고 강 중간쯤까지 따라가보니 물살이 굉장히 쎄서 돌을 안지 안으면 그대로 떠내려가 버릴 상황이었습니다. 돌을 안고 있으니까 물살이 쎄도 건너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는 것은 그 짐을 짊어져야 그 시련을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에 짐을 걸머지게 되는 것입니다. 짐이 있으므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있으면 어려움을 이기고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깨어 영적으로 살게 하는 것이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인 것입니다.
불안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있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는데 감사하는 말을 하게 되면 우리가 시인한 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 끌어들이는 전기코드와 같은 것입니다. 감사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임하시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마귀를 끌어들이는 길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면 마귀가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할 수 있는 통로를 여는 것이고 감사와 찬양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면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가시 때문에 내가 약할 때 곧 하나님이 능력으로 강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시의 의미를 모를 때 원망하고 탄식하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를 통하여 우리를 돌보심을 알게 되면 안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고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가시된 남편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 하십시오.
가시된 아내를 인하여 춤추며 감사하고 그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가시가 있는 자식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형제가 이웃이 가시가 되거든 여러분이 신령한 사람이 되고 자기를 비워 버리고 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고 약할 때 강하게 될 수 있다는 좋은 기회가 온 것을 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우리는 가시를 자꾸 물리치려고 하고 가시와 대적하여 싸우다가 더욱 피투성이가 되고 가시는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 가시를 하나님의 뜻으로 품에 품어 들이십시오. 한껏 찔리십시오. 그러면서 비명 소리를 내고 깨어지고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허약하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여러분은 놀랍게 강해지고 능력이 있어지고 은혜가 충만해 지고 신령해 지고 권세 있는 사람이 됨과 동시에 가시는 무력해 지고 사라져 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약할 때 그때 곧 강함이니라.” 내가 환난을 당해서 능욕을 당하고 궁핍을 당하고 핍박과 곤란을 당해서 꺾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므로 그때는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