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야심경>을 다시 쓴다면
<반야심경>에서 마음을 말하면서 ‘마음에는 이런 게 없다’라고 한 것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예요. 그 다음에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더 이상 죽음도 없고 더러워지지도 깨끗해지지도 않고 보탬도 없고 줄임도 없다! 이것밖에 없었어요.
사회적으로 그 정도만으로 ‘이거 없는 게 마음이야’라고 설명하기에 그 몇 가지면 충분했던 거예요.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분야의 특성들이 이제 마음에 갖다 붙였어요. 밝음이나 청결도는 있지만 무거운 경중은 없었잖아요. 마음은 가볍지도 아니하며 무겁지도 아니하며 이런 말, 없었잖아요. 이런 게 생겼어요. 마음은 굳지도 여리지도 아니하며 하는 게 생겼어요.
요즘 같으면 <반야심경>을 다시 쓴다고 하면 뭐가 없고 뭐도 없다라는 표현을 이만큼 늘어놓아야 흠잡을 수 없는 텍스트가 돼요. 마음이 풀리기도 해요. 역시 반야심경에 안 나오는 대목이에요. 마음이 꼬이기도 해요. 그 사람의 감각과 생각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서 긍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 이걸 꼬였다고 하는 거죠. 그것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얘기를 아무리 나누면 나눌수록 여전히 그런 모습이 드러나면 어떻게 하죠? 빌빌 꼬였다고 또는 베베 꼬였다고 하죠.
마음이 풀렸다! 심지어 마음은 녹기도 해요. 녹으면 어떻게 사라지고 없어요. 물이 되어서 흩어지죠.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보시죠. 세상 천지에 왜 물은 위에서 밑으로 내릴까요?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는 줄 아세요? 일단 액체로서 물의 속성은 어떠하니까 그 중력 지구의 무슨 값 무슨 값 대비했을 때 이거 흘러내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얘기해요.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쉽게 생각해요. 상대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마음이 아니라 판단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판단에 해당되는 상대성까지 마음으로 갖다 붙이니까 이제는 오히려 뭔가 진리를 찾는다 그러면 거꾸로 절대적으로 연구를 하려고 그래요. 물 자체를 팔려고 그래요. 세상에 물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흘러내리고 할 수 있는 지반이 있으니까 있는 거죠.
살아있는 온갖 것들이 자꾸 위로 끌어올리니까 내려가는 거죠. 살아있는 온갖 것들이 물을 자꾸 끌어 올리고 있죠. 나무도 쭉쭉 끌어올리고 사람도 자꾸 피를 막 끌어올리고, 피도 물이잖아요. 살아있는 것들이 자꾸 끌어올리니까, 불안하게 자꾸 끌어올리니까 끌어올리면 다 내려갈 수밖에 없는 거죠.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마음을 진짜 절대적인 요소로 보고, 상대적인 모든 요소를 마음을 이해하는 데서 지워버리면, 이게 이해가 되고 정답일 수 있어요. 우리는 상대적으로 볼 것을 절대적으로 연구하려고 하고, 절대적으로 봐야 될 것을 상대성으로 놓고 풀어버리는 사회와 생활 습성의 분위기에서 살고 있는 거죠.
아무튼 마음은 그렇게 막 풀리고 꼬이고 해요. 마음이 풀리는 것은 설득을 했더니 그걸 받아들인다! 또는 저 사람이 기분이 나빠서 언짢나 했는데 차츰차츰 그 기분을 풀더라! 이렇게 표현하면 되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그 사람한테는 약점으로 보일 수 있거든요. 나중에 ‘얼레리 꼴레리’의 대상이 될 수 있거든요. 기분이 몹시 나빠 있다가 시간이 차츰 지나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음식을 먹으면서 헤헤 웃고 있는 거예요.
그걸 이렇게 표현을 해보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화가 나 있더니 갑자기 물 찾더니 옆에 있는 음료수 찾더니 빵 한 조각 들고 헤헤거리면서 먹고 있대! 그렇게 소리 듣는 것보다는, ‘저분 마음이 풀리셨네요!’라고 하죠. 자기 자신이라도, 조금 전까지 화내고 성질 내놓고 나서는 이거 희희거리고 이게 뭔 짓이냐! 하는 것보다는 ‘내 마음이 풀렸어요!’ 그러죠. 이렇게 자신을 상대적으로 표현해서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을 절대적인 마음을 갖다 놓고 거기에 의탁을 시켜버리는 거예요.
요즘 정신의학과라고 안 부르고 심리학과로 부르는데 거기 가면 마음은 또 전부 외적인 요소와의 상관관계로서 얘기해요. 마음 자체를 절대적으로 놓고 연구하지는 않아요. 물리학과 같은 곳을 가도 상대적인데 그 물질 자체를 파고들기도 해요. 특히 화학이나 이런 데로 가면 그래요. 그렇다고 상대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요.
어쨌든 마음은 이제 문도 있어요. 개폐가 돼요. 마음을 열어요. 마음이 열리고 마음을 열고 하죠. 심지어 마음을 닫고 마음이 닫히고 그러는데, 저 사람 마음이 닫혔어! 이것은 뭔 지 아세요? 저 사람이 어떤 얘기를 얘기해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거예요. 느낌이 없는 거예요. 그럴 때 저 사람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정당화시키죠. 마음이 닫혔어! 내가 더 노력을 해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정당화시키는 거예요.
저 사람은 마음이 열렸어! 마음이 열렸다 하는 것은 어쩌면 돈을 잔뜩 주고나서 생각에 동의해 온 것에 대해 마음이 열렸다고 한 것이라면 마음을 연 게 아니라 돈을 줘서 구워 삶은 것일 수도 있죠. 압박에 의해서 고문을 해놓고 마침내 술술 부니까 마음이 열렸다고 할 수도 있죠.
그렇게 다양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열었다는 것, 마음이 닫혔다는 것은 그런 것을 그냥 정당화시키는 거예요. 내 뇌물이 정당화되는 것의 표현일 수도 있어요. 한 두어 번 소통 잘 안 한다고 하는 사람이 가서 두어 번 찔러보고 와서는 마음이 꽉 닫혔는데요. 저 보고 더 설득하지 마세요. 그렇게 하기 싫어요! 하는 표현이죠.
어쨌든 마음 그것이 열리고 닫혀요. 심지어 마음은 휘어 있을 수도 있고 직선일 수도 있어요. 곡직도 있어요. ‘마음이 곧다’라는 표현도 있어요. 마음이 어떻게 곧아요? 마음이 삐뚤다는 표현도 해요. 현실적으로는마음이 삐뚤다는 꼬였다는 거하고 비슷하게 쓰일 수도 있는데요.
곧다는 뭐죠? ‘곧다’의 뜻도 여러 가지가 돼요. 처음에는 저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정직하다! 솔직하다! 저 사람은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쓰일 수도 있죠. 때리니까 부는 것도 곧은 것일 수도 있어요. 반대의 상황도 오는 거죠. 때리는 데도 갑은 갑이라 하고 을은 을이라 해도 곧은 것이고, 어느 순간에 가면 때리면 때린 것에 딱 반응하는 것이 마음이 곧은 것도 될 수 있어요.
우리 사회는 그렇게 넘어오고 있어요. 그리고 뇌물을 줬으면 뇌물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곧은 것일 수 있어요. 뇌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도 곧은 것일 수 있어요.
더 이상 어느 뜻으로 쓰일 수도 없는 불확실한 뜻이 돼요. 마음이 곧다! 그럴 때 옛날 같으면 저 사람은 정직한 분이고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들은 그대로 말씀하는 분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세대가 우리 세대까지예요.
그 이후 젊은 친구들의 ‘마음이 곧다’란 뜻은 달라요. 있는 그대로 반응이 정확하다! 물리학적 법칙에 더 어울린다! 이게 오히려 마음이 곧은 것일 수도 있어요.
마음은 생멸을 하기도 해요. <반야심경>에 나오는 부분이죠.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마음이 생기기도 해요. 마음이 매일매일 새 마음이 생길 수도 있어요. 뭐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 아니 먹고 싶은 식욕이 발동했죠. 나도 짐승인듯 식욕이 발동해서 먹어야 하겠어! 그런데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하죠.
먹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 대요. 안 생긴다고 하면 그나마 생긴다는 것에 반대이죠. 먹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어! 옆에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밥을 먹고 있어요. 그 사람을 보기가 싫어서 신체 감각의 대표적인 기능의 하나인 먹고 싶은 식욕마저 사라졌는데, 그걸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 라고 해요.
그 순간 모든 것은 외부적 환경에 의해서 내 마음이라는 것이 규정되고 있다는 거예요. 진짜 마음을 점점 분해시키고,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만 있겠습니까?
마음은 심지어, 얼마나 넓은가 하는 것도 있어요. 마음이 넓어요. 마음이 좁기도 해요. 마음이 너그럽기도 해요. 마음이 심지어 좁쌀만 하기도 해요. 마음이 좁쌀만큼이라도 클까요? 원래 물질적으로 마음이 좁쌀만 했으면 살아온 고민이 100분의 1로는 줄었겠습니다. 좁쌀이면 고맙겠습니다. 아무튼 쓰이는 용도는 그게 아니잖아요.
마음이 넓다는 것을 중국어로 하오하오(好好)! 이것을 많이 해주는 거죠. 자기 판단을 유보하고 모든 것을 좋다고 해주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은 정말 (어디 굳어지지 않는 성격이 참 조금 더 애매하지만) ‘성격 좋은 분이다!’ 할 수 있겠죠.
심지어 일제시대 때 ‘나는 대한의 독립을 이루겠습니다’ 하고 끝까지 외쳐요. 때려도 외치고 총을 쏴도 외쳐요. 그 시대에는 마음이 굳은 사람인데요. 지금은 마음이 좁은 사람일 수 있어요. 이 시대에 같이 어울려 살지 못하는, 마음이 이만한 좁쌀 같은 사람일 수 있어요. 지금 현재의 ‘마음이 좁다’라는 표현을 가지고 요즘 초등학생에게 묻는다면, 다음 중 마음이 좁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하면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마음이 굳은 사람은 다음 중 누구일까요?아버지가 죽어도 돈 벌러 나가고 어머니가 죽어도 돈 벌러 나가고 친구가 죽어도 돈 벌러 나가는 사람, 많이 굳은 사람이에요. ‘마음’이란 말에 의해서 그렇게 이미 삐뚤어지고 있어요.
이런 시대까지 오니까 외부적인 판단에 의해서 동일한 판단이 안 내려지죠. 그러니까 ‘뭐 뭐 한 것 같아요’라는 말을 쓰는 젊은 세대를 탓할 수가 없어요. 마음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순간부터 이건 예고됐던 거예요. 뭐 뭐 한 것 같아요! 저는 그 친구들을 욕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게 안 썼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이 들어요.
우리 세대에 대해서 그 젊은 세대가 이유 없이 반항하는 것! 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기성세대들이 ‘맞다!’ 다른 편에 ‘틀리다!’ 쓰고 있는데요. ‘맞다’의 반대편은 ‘다르다’인 데요. 이거 맞아요? 저거는 그러면? 틀려요! 저건 다른 거죠. 이렇게 된 사람들에게 ‘이게 틀리다’라고 말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각도 그런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전교조의 구호 중 하나가 창의였죠.
창의! 맞다 틀리다가 아닌, 맞다 다르다가 나와야 창의가 되는 거죠. 적어도 창의의 기초는 만들어지는 거죠. 하지만 그것만 하면서 ‘맞다’ ‘틀리다’로 남아 있어야 되는 것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마저 창의라는 이름으로 ‘다르다’로 만들었죠. 그러니까 장단은 다 있습니다. 허물없는 행위가 어디 있으며 또한 공로만 있는 행위는 어디 있겠어요. 아무튼 그렇게 넓고 좁기도 해요.
그 다음에 좀 복잡한 것으로, 이동 변동에 대한 용법이 굉장히 많은데요. 이건 좀 뺄 게요.그 다음에 색도도 있어요. 색깔! 마음이 검다고 해요. 마음이 검은 거는 뭐죠? 사람은 굉장히 이중적인데 이기적이야! 할 때 쓰는 거죠. 사람이 본인을 잘 드러내지 않고 그러면서 자기 욕심을 뒤에서 표나지 않게 챙기면, ‘마음이 검다’고 그러죠.요즘 젊은 친구들은 그걸 이해 못할 겁니다. 마음이 검다니! 그건 사라지고 있는 86~97 세대에 의해서 사라지고 가고 있는 용법이에요.
마음이 검다! 희다! 이러한 마음의 색깔은 지금 빠지고 있어요. 이건 언제 가장 유행했느냐? 일제시대 말기 문화 통치라고 하는 것을 당하면서 사람들이 속 생각을 풀어놓지 않는 상황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앞에서는 예예 하면서 딴 주머니를 차거나 딴 계산하는 사람들을 마음이 검다, 앞에서 예 하면 그게 다인 사람을 마음이 희다! 했죠.
그때 사람들에게 마음의 색깔이라는 것이 유행하는 하나의 관용구가 되니까 노래를 지어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잎으로~”
그런 것도 있어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이 정도까지 가면 심지어 문학으로 생성돼요. 내 마음의 주단은 어떻게 해주는 거죠?공단도 아니고 왜 주단이라 그랬을까? 아까 말한 명도하고 좀 다른 마음이 푸르다는 것도 있어요.
마음이 시커멓다는 말도 있어요.검다 하고 비슷하고 강조어죠. 저 사람은 속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챙기는 사람이다! 할 때 ‘속이 검다’라고 썼는데, 마음이 검다가 된 거죠. 그러다가 좀 더 가면 이제 문학과 유머가 돼요.마음이 굴뚝 같다가 아니고 마음이 굴뚝이야! 이렇게 되죠.
온도도 있습니다. 마음이 차요! 마음이 따뜻해요! 마음이 뜨거워요! 마음이 식어요! 마음이 달아올라요!
여기서 마음이 달아오르는 건 뭐죠? 저 물건을 내가 가지고 싶거나 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거나 무언가를 내 육체와 행위로 하고 싶어요. 근데 갈수록 못 참겠어요.점점 내 욕망을 내가 통제하지 못하다! 하는 표현을 ‘자꾸 마음이 달아올라!’라고 하죠. 그것이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죠. 우리 사회적 기준으로 말하면 중독되는 거죠. 마음이 달아오르는 거는 좋은 것이든 나쁜 놈이든 하여간에 빠져들고 있는 거죠.
그 다음에, 마음이 식다! 갑자기 변덕스럽다는 표현을 자기에게 할 수가 없잖아요. 마음이 식었어! 그러면 상대방도 말을 붙이지 못해요. 옆에서 아주 친하면 내가 불 한번 떼 줄까? 그러죠. 이건 친구 사이에 있는 관용적인 처세죠.
이제 별로 안 친한 친구일 수도 있는데 계획서를 가져와서 이걸 하자 그러는데 마음이 식어 있어요. 표현을 하면은 달아오르지 않아요. 그럼 뭐라 그러죠? 계획서를 갖고 왔으니까 거기다 마음을 팝니다. 이 계획 동의하지 않아! 수정해야 돼! 이렇게 말하면 잘못하면 찍히죠. 찍혀서 다시는 대화 상대로 잘 안 부를 수 있죠. 그래서 “마음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마음으로는 충분히 저도 제 마음도 같습니다만” 그리고서 “이 부분은 좀 생각을 고쳤으면 해요.”앞에 괜히 붙인 거죠.
앞으로도 안 잘리기 위해서, 친소 관계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 그룹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그 사회에서 별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쓰는 처세 용법으로 마음이 쓰이는 거죠. 심지어 그 정도면 사회적 생활을 부드럽게 하는 사람의 용법이에요. 그럴 때 다른 표현을 갖다 붙이죠.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만!’ 이미 동의 안 하면서도 그래요.
마음은 단순 복잡하면서도 나누어지기도 해요. 마음이 복잡하고, 외곬이고, 천 갈래 만 갈래 막 그래요.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라는 것은 내 속에서 자주적으로 나는 이것을 이것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 못 하겠어! 또 어느 것이라고 내 자신을 현재 판단하기가 어려워! 그럴 때 천 갈래 만 갈래로 해버리는 거예요.
자기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해결이 안 된 상태에 대한 고백이죠.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하는 것은 일의 가닥이 천 갈래 만 갈래이겠죠. 그래서 그 가닥을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될지에 대한 판단이 안 되고 있는 것이지 무슨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이겠어요?
그래도 그 정도는 괜찮아요. 마음은 붙고 떨어지기도 해요.이것은 달아오른다 하고 비슷하게 쓰이는 경우도 있어요.마음은 짓누르기도 해요. 이 상황을 내가 견뎌내기 어렵다! 외부에서부터 나에 대한 압박이 여러모로 크다! 그런데 이것을 마음을 짓누른다고 해요. 성적이 마음을 짓누른다고 하는데, 성적이 마음을 짓 누르겠어요? 성적이 안 올라서 나도 힘이 든데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까지 나를 압박을 할 때 그런 거죠.
사람들이 그렇게 쓰고 있는데요. 우리가 ‘반갑습니다’를 ‘방가 방가’라고 이렇게 쓰는 것은 굉장히 멋지고 간단하고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축약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마음을 이용하는 순간, 이런 축약은 지금까지 어떤 집적 프로그램도 도저히 해낼 수 없었던 압축을 시켜버리는 거죠. 심지어 변질까지 시키는 거죠. 우리가 그렇게 쓰는 걸 많이 하고 있죠.
마음을 다 잡기도 해요. 마음을 긁기도 해요. 마음을 달래기도 해요.기분 풀어준다는 것 아닌가요? 누가 내 마음을 달래 주고 갔어! 저분은 그래서 멋있는 분이야! 나를 달래 주고 해서 나도 뭐 생각을 풀었지! 이렇게 말할 때가 맞잖아요. 저 사람이 나를 달래 주려고 하네! 내 기분 풀어주려고 하고 내가 힘들어하니까 위로해주고 그러고 가네! 그런데 “저 사람이 와서 내 마음을 달래 주고 갔지!” 듣는 사람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되죠. 압축이 됐는데 압축 해제를 다르게 할 수 있죠.
그 사람이 와서 말로 달래 주고 갔는지, 행동으로 달래 주고 갔는지, 맛있는 밥을 사주고 갔는지, 용돈을 주고 갔는지, 그냥 막 농담을 막 열심히 해주고 갔는지, 마음을 풀어준 것이나 마음을 달래 준 것을 아무도 몰라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때부터는 마음을 달래 주고 가서 상대방도 이제 생각 안 해요. 그게 뭔가 막연한 느낌이 와버리는 게 하도 쓰다 보니까 ‘아! 그래! 좋은 사람이네! 좋은 친구야!’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보이스피싱으로 뺏은 돈으로 그 친구 맛있는 음식 먹으라고 주고 간 거였어요. 그러면서 ‘마음을 달래줬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 경우 제가 쓰는 용례들은 지극히 제한된 사례들이죠. 훨씬 더 심한 것이 이 사회는 있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상황까지 와버렸어요.
10년 전만 하더라도 “기후 환경에 우리가 생존할 수 있을까?”를 물었을 때 사람들은 막연 했어요. 그래서 부인하기도 했어요. 굉장히 논리적으로 과학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한국사회에서도, 유명한 어느 과학자는 기후 위기에 대해 정치적으로 오도된 얘기라고도 했어요. 뭐든지 이제 다 삐뚤어져 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부인할 수 없는 상황까지 와버렸죠. 그분은 지금 그런 얘기 못해요. 올해를 보시죠! 내년에는 올해로 말미암아 식량이 부족할지 안 할지 걱정해야 되는 상황이에요. 지표 온도가 70도 올라갔다는 얘기는 농사가 안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온도가 50도라고 하면 식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어요. 그러나 지표 온도가 70도를 넘어갔다는 것은 어떤 작물도 그 땅에서 자랄 수가 없다는 이야기예요.
그럼 식량이 없죠. 지표 온도가 올라가 사막화가 되는 거죠.아무리 뜨거워도 밀림은 물을 충분히 품고 있고 식물의 잎을 자라게 하고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죠. 그 숲에 의해서 지표 온도가 또 안 올라가죠. 아무리 뜨거워도 안에 들어가서 사람은 허덕거리고 죽고 원숭이도 허덕거리고 죽어도 식물은 자라죠.식량은 자라죠. 지표 온도가 70도 올라가서모래를 꽃갈처럼 쌓아놓고 달걀을 층층이 둘러놓으면, 달걀이익는다고 하던 대요. 그게 식량이 되겠어요?
어쨌든 기후 위기를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상황까지 왔잖아요. 그래도 여전히 부인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 정도 해가지고 인류가 멸망하거나 그러지 않는다고. 근데 식량이 없어졌다 그러면 그때는 어쩔 수가 없겠죠.
마음을 추스르기도 해요. 추스르는데 뭐 때문에 추스르느냐? 자기가 심리적으로 풀었기 때문이에요. 이것저것 해서 흔들린 것이 마음이겠어요. 생각이나 상황이겠죠.상황과 생각이 여러모로 어수선한데 살기 위해서는 이것을 좀 정리를 해야겠죠.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삶의 희망을 봐야겠죠. 그 희망이 어떤 것이든 간에 살인을 통해서 내가 살겠다는 희망이든, 이타적으로 누구를 도와서 내가 살겠다는 희망이든 간에 희망을 봐야겠죠. 그래서 그 희망을 갖고 생각과 상황을 정리하는 것을 마음을 추스른다고 그래요.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요? 여러분들 중에 마음이 이미 없는 분도 있을 수 있어요. 마음을 줘버렸어요. 마음을 주기도 할 정도로 마음이 몇 개 있는 분도 있을 거예요. 여러분 중에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마음을 받아 가진 분들도 있을 거예요. 마음은 그렇게 주고받는 대상도 되죠.
마음을 주는 건 뭐죠? 좀 더 옛날식으로 얘기하면 함께 하겠다는 얘기죠. 그것이 어려운 일이든 쉬운 일이든 함께하겠다! 운명을 같이 하겠다! 그런 의미인데 네가 받아들이는 건 나도 받아들이고, 네가 거부하는 건 나도 거부할 게! 이걸 ‘마음을 준다’고 하는 거죠. 요즘은 그렇게 안 해요. 요즘 마음을 준다는 건 뭐냐? 난 저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지 뭘 생각하는 사람인지 모르지만은 쟤가 좋아! 그냥 마음을 그냥 주고 싶어! 혼 없는 인간이 되고 마음 없는 인간이 되고 싶어! 이렇게 되는 거죠. 주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을 주고받았다고 해요.
속이 미어지는 것을 마음이 미어진다 그래요. 마음이 미어지다! 뮈다, 뮈욤, 뮈욤의 동명사형의 의문 변화형이 몸인데요. 마음이 몸이 돼 버렸네요.
마음은 분해되고 합체되기도 해요. 그런데 분해되나 합체되나 이상하게 뜻이 똑같아요. 마음을 모아요! 마음을 나눠요! 이상하게 뜻이 같아요. 모아도 나눠도 뜻이 똑같아지는 게 마음이었어요. 그러니까 같이 마음을 모읍시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다 함께 마음을 나눕시다! 마음을 나누고도 같은 기도하고, 마음을 모으고도 같은 기도하고! 원래 ‘마음을 모으다’라는 표현은 좀 오래된 표현인데 ‘마음을 나누다’라는 것은 현대적인 표현이예요.
예를 들어 힘든 걸 풀 때 같이 나누자든가, 일손을 나누자, 손을 나누자 이렇게 했죠. 마음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표현이에요. 그래도 지금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마음을 나누다’가 ‘마음을 모으다’와 실질적으로 같다고 말이죠. 내 것을 내려놓고, 내 입장을 고집하지 말고 같이 해결해 봅시다. ‘같이 해결해 봅시다’라는 강한 구호가 ‘마음을 모으다’와 ‘마음을 나누다’예요. 여러 사람들이 이웃돕기 성금을 하면 마음을 모으는 거예요. 그 성금을 어려운 사람한테 이렇게 돌려주면 나누는 거예요.
그렇게 쓰였던 게 일반적인데 지금은 ‘마음을 나누다’ 그러면, 초등학생들은 다른 답을 할지 몰라요. 그런 것 있잖아요. 초등학생들의 이상한 답안지 사자성어 네 글자로, 동네에서 저녁에 술 먹고 노래 부르고 떠들면 뭐라고 하는가? 그러자 ‘아빠인가?’ 하는 답이 있었죠. 그런 사고는 누가 심었느냐? 부정적인 면에서 전교조가 심었어요.
그건 맞다 틀리다 해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 맞다 다르다 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친구들이 생각하는 ‘아빠인가?’의 아빠인가는 인격적으로 덜된 인간이라는 의미는 또 아니에요. 우리 아빠는 이런 사람 정도야! 왜냐하면 그 아빠도 이젠 집에 들어가서 대다수의 경우에 아동학대를 하는 아빠는 아니거든요. 술 먹고 집에 가서 그래도 애기 귀엽다고 하고 맛있는 거 주거든요. 단 밖에서 고성방가를 할 뿐인 거죠. 그래서 초등학생의 답안지를 보고 황당하다고 웃는 게 아니라 생각이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 되죠. 우리가 마음을 이렇게 쓴 이상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마음에 연식도 있어요. 뭐죠? 마음이 한창이다! 마음이 삭았다! “내가 몸이 늙었지 마음은 안 늙었다!” 하죠. 마음은 그렇게 늙기도 해요. 마음은 한창이기도 하고 마음은 삭기도 해요. 마음에 나이가 있네요! 이것은 반대편의 상황이든 인정하는 상황이든 간에 자신의 신체적 상황 탓을 그게 전부라고 인정하는 표현이죠.
‘몸이 늙으면 결국은 늙는 것’이다든가, ‘몸이 늙어도 안 늙겠다’라고 버틴다든가 하는 반대 상황도 있지만, 몸을 반영해서 몸의 기준을 두고 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거죠.
그래서 몸이 늙듯이 마음도 늙을 수 있고, 몸이 삭듯이 (삭은 사람 삭다리라고 그러는데) 마음이 삭을 수도 있고, 몸이 한창이듯이 마음도 한창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몸과 마음이 비례 또는 반비례하는 어쨌든 몸과 상관되지 않는 마음을 이제 놓아버린 거죠.
(2회차 1부 끝, 2부가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