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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南館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동문로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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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여수 |
진남관(鎭南館)은 조선시대에 객사로 지은 현존 국내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이며 임진왜란 때는 삼도 수군통제영으로 사용된 조선수군의 중심 기지였다.각주1) 진남관은 1598년(선조 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기지로써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전라좌수영은 남해안 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여수에 자리하고 있던 수군영이다.각주2)
진남관이 위치한 전라좌수영은 설치 당시 성곽의 둘레가 1.7킬로미터였고, 진남관 외에 80여 동의 건물, 민가 2,024호, 우물 9곳, 연못 1곳이 있었다. 남쪽 · 동쪽 · 서쪽에 성문이 있었으며, 남문 밖은 바로 바다와 접해 있었다. 지금은 남문 밖의 바다는 매립되어 시가지로 변해 있다.
전라좌수영은 그 모습을 거의 잃은 채 성곽의 일부와 진남관만 남아 있었으나 현재 부분적으로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이끌고 경상남도 해안에서 일본수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여러 번 승리를 거두었다. 1593년 7월 23일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 수군통제사를 겸직함으로써 그가 있던 전라좌수영이 1601년(선조 34)까지 삼도 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기능했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남해안 남동쪽 바다는 수백 척의 함선과 보급선 등을 보유한 일본수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조선수군은 남서쪽 바다인 여수 일대 해역을 방어하면서 일본수군의 서해안 방면 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진해루(鎭海樓)는 1592년 5월 1일 이순신 장군과 부하 장수들이 작전회의를 열어 출병 여부를 의논한 곳이며, 임진왜란 당시 삼도 수군통제영, 즉 해군사령부 건물로 사용한 건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을 수행하는 데 가장 필요한 군량미와 소금의 주산지인 호남을 점거하지 못했던 일본군은 정유재란(1597) 때는 삼도 수군통제영이 소재한 여수를 먼저 공략했다. 전라좌수영 성 안에 있던 동헌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는데 이때 진해루도 소실되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 지휘소로 삼았던 진해루 터 자리에 세운 수군의 중심 기지가 진남관이다. 임진왜란 종료 이듬해인 1599년, 이순신의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75칸의 대규모 객사를 세우고,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진남관(鎭南館)이라고 이름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716년 화재로 불탄 것을 2년 후인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중창했으며,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된 건물의 규모는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 면적 792제곱미터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각주3)
진남관은 일제강점기 때는 여수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진남관은 2001년 4월 17일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진남관 앞뜰에 석인상(石人像) 1기가 서 있다. 기단석 위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이 상은 관모를 쓰고 단정한 관복에 두 손을 공수하고 있는 문반(文班)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석인상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공세가 심해지자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운 석조물로 알려져 있다. 의인전술의 일환으로 석인 7구를 만들어 세웠다고 하는데 6구는 사라지고 현재 1구만 남아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다양한 유물과 전란 기록이 전시되고 있다. 그중 철쇄 방비시설 모형을 보면 전라좌수영의 동쪽 소포(지금의 종포)에서 건너편 돌산도까지 쇠사슬을 걸쳐 매어 적선의 야간 통행을 막은 시설이라는 설명이 있다. 설치 방법을 보면 먼저 긴 쇠사슬의 중간 중간에 큰 나무를 꿰어 부표 구실을 하게 하고 쇠사슬을 바다에 가로질러 설치한 후 이것이 조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물속에 큰 돌을 달아매어 닻의 구실을 하게 했다.
종고산(鐘鼓山, 해발 220미터)은 진남관 뒤쪽에 있는 산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여수시 동산동 · 군자동 · 충무동에 걸쳐 있다. 옛날부터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산이 울었다 하여 종고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산 정상에는 조선시대에 설치한 북봉연대(北烽煙臺)가 있는데 오동도, 여수해협과 돌산도, 여수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은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봉수로 전라좌수영에 신호를 전하던 기능을 하던 곳이다.각주4)
첫댓글 여수에서는 '진남관'을 '객사'라고도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