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JSA)’ 개봉. 5일 만에 90만명 동원해 사상최대 동원기록 경신
← 영화 ‘공동경비구역(JSA)’ 포스터
분단 현실 속 남북 화해의 가능성을 물은 한국영화 ‘공동경비구역(JSA)’이 추석날 개봉하여 사상 최대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 이 영화는 개봉한 9월 9일부터 13일까지 연휴 5일 동안 서울 41만명, 저국 90만명을 기록, 국산-외화를 통틀어 개봉 5일간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5일간 서울 관객 41만명은 지금까지 최고기록인 ‘미션 임파셔블2’의 6일간 40만명을 앞지르는 수치였다. 개봉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던 ‘쉬리’는 1999년 설 연휴 5일간 서울 관객 22만명을 기록했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발생한 의문의 총격 사건 뒤에 숨겨진 진실을 휴머니즘 짙은 드라마로 풀어낸 이 영화는 작품 완성도와 재미가 뒤어난 데다, 송강호 이영애 이병헌 등 스타 파워도 가세했다./조선
[1981년]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사망
←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학의 획기적 전환을 이룬 자크 라캉이 1981년 9월 9일 향년 80세로 사망했다. 거의 20세기 전 기간을 살면서 미궁에 빠진 정신분석학을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혁신한 라캉은 현대 철학, 문화 예술이론, 여성이론, 심리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1901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라캉은 1936년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거울 단계` 논문을 발표, 정신분석가로 개원했다. 1938년 파리정신분석학회 정회원과 회장(1953년)을 역임했다. 정신분석가와 사상가로서 라캉의 업적은 ‘프로이트의 복귀’ 혹은 `제2의 정신분석학 혁명`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크문트 프로이트를 단순한 현실 적응 기술(치료 심리학)로 변질시키려는 자칭 ‘프로이트의 적자’들에 의해 ‘이단아’로 비난받았고, 심지어는 국제정신분석학 회의에서 축출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로 돌아가라’는 라캉의 구호에서 잘 드러나듯이 라캉은 프로이트가 오해 왜곡, 혹은 망각되고 있다며 프로이트의 본래 의도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는 정신분석학의 치료 목적은 순응이나 적응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그 욕망을 포기한 상태가 정신병이라 했다. 이같은 라캉의 ‘주체와 욕망 이론’은 루이 알튀세르와 자크 데리다, 짐 들뢰즈,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 후대의 많은 철학자들과 크리스티앙 메츠 등 영화이론가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다.
[1976년] 중국 초대 국가주석 마오쩌둥[毛澤東, 1893.12.26~1976] 사망
중공 당주석 모택동이 1976년 9월 9일 오전 0시 10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향년 83세였다. 사망 소식은 오후 4시 장송곡이 방송에 일제히 울려 퍼지며 알려졌다. 방송 직후 천안문 앞 국기 게양대에 걸려 있던 오성 홍기는 반기가 되었다. 방송이 끝나고 국제 공산당의 노래 ‘인터내셔널가’가 흘러 나오자 사람들은 오열했다. 중화 인민 공화국의 상징이었던 카리스마의 죽음은 전 세계에 충격과 감회를 안겨 주었다. 중국 내에서는 특히 그 충격이 컸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휑하게 뚫린 큰 공백에 망연자실했다.
모택동의 생애는 ‘혁명’이라는 두 글자에 점철되어 있다. 모택동의 일생은 곧 20세기 중국의 역사였다. 정강산 유격투쟁, 강서소비에트 임시정부, 대장정, 국공합작과 항일전,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근현대 한가운데엔 늘 모택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혁명의 주체를 농민으로 설정한 모택동의 이론은 분명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는 판이하게 구별되는 ‘모택동 사상’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체계화되었다. 유격전술, 대중조직방법, 토지개혁 정책, 민족통일전선론, 신민주주의론, 실천론, 모순론 어느 것 하나도 혁명의 역정을 통해 가다듬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이론은 반외세와 반파쇼, 그리고 반봉건을 동시에 밀고 나가야 했던 제3세계의 혁명가들에게만이 아니라, 서유럽의 좌파 이론가들에게까지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
[1968년]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개막
'내일의 번영'을 테마로 하는 종합무역박람회가 현재의 구로동 공업단지 대지에서 1968년 9월 9일 열렸다.
40일간의 회기로 발전의 비젼을 표현할 6만평 대지에의 이 박람회는 디스플래이의 개념과 기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경험이기도 하였다. 당초 졸속한 기획은 공사가 착수되면서 계획과 실제가 틀리고, 계획 자체의 수정이 공사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등 미숙한 전개를 보였다.
그러나 옥외극장, 안내센터, 심볼 탑의 디자인은 당시 부족한 재료와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도들이 주목되었다. OB관, 럭키관 등의 民間企業館과 農漁村開發公社館, 韓國電力館 등의 公共館, 獨逸館 등의 外國館이 설치되었었다. 디스플레이에서 한국관과 외국관의 격차가 드러났으나, 우리의 장치계로서는 그 후의 博覽會 建築을 위한 주요한 체험이 된 것도 사실이다.
韓國綜合技術開發公社의 종합계획과 총괄작업에 의해 이루어지고, 金圓錫와 李汶祖(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劉康烈와 韓道龍(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학과 교수), 趙聖烈, 孫동규 등이 디자인의 실무를 맡았다. /www.kia.or.kr /Google
[1962년] 제1회 '귀의 날' 행사
귀의 날은 1958년 11월 이달호가 발의하고 정기섭이 '구'와 '귀'가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9월 9일을 '귀의 날'로 제정하였으며, 1961년 의약관계 신문잡지에 귀에 관한 특집을 마련하여 '귀의 날'을 홍보하였다. 백만기가 특집을 기획하였으며, 연제는 이병현의 중이염, 신홍수의 농아, 백만기의 난청을 가져오는 질환, 신규식의 귀의 청각생리, 김홍기의 난청의 치료 등이었다. 1961년 9월 18일 의사시보 제 325호에 '귀를 보호하자' 라는 제목으로 대한이비인후과학회학회에서 '귀의 날'을 제정한 취지와 연혁을 소개함으로써 국민행사로 발전시키고 국민보건향상에 이바지하였다.
1962년 8월 18일 임원회에서 필히 '귀의 날' 행사를 갖기로 하였고, '귀의 날' 설정요지를 작성하여 당국의 승인을 얻고 후원을 건의하며, 사업으로 무료상담과 진료, 강연회 개최와 보도기관을 동원하여 선전하자는 사항을 의결하여 보건사회부의 승인을 얻었다. 귀병에 대한 무료상담과 진료는 9월 9일이 공휴일이었으므로 9월 10일에 실시하였고, 의학관계 신문, 잡지에는 '귀의 날' 특집 프로그램을 게재하여 획기적인 대민홍보 업적을 성취하였다.
제1회 귀의 날 강연회(1962년 9월 9일 오후 7시, 서울시민회관 소강당). (대한이비인후과학회) /www.korl.or.kr/about /Google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해 열창
← ‘에드 설리반 쇼’의 리허설을 하는 프레슬리.
1956년 9월 9일 미국의 록가수인 엘비스 프레슬리가 열광적으로 전신을 뒤흔들며 무대에서 열창하는 모습이 수백만명의 TV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주로 10대들을 상대로 한 TV프로 ‘에드 설리반’에 출연한 21세의 프레슬리는 ‘하운드 도그(hound dog)’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 등 두곡을 불러 청중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출신의 시골청년으로 2년 전까지만 해도 테네시 주의 트럭운전사였던 그는 선 레코드 사장 필립스의 눈에 띄어 세계의 우상으로 급부상했다. 굵고 부드러운 바리톤, 냉소적으로 입을 비트는 표정, 허리를 꼬는 제스처는 그를 남성미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흑인음악의 중심가였던 멤피스 출신답게 컨트리&웨스턴 스타일의 백인음악에 흑인음악 리듬&블루스를 결합해 새로운 록을 미국과 세계에 알렸다. 그로부터 ‘엘비스’는 그 이름만으로 신화가 되었고 부르면 부르는 대로 빌 보드 톱 랭킹을 독차지했다.
그가 출현하자 당시 청소년이었던 비틀스의 존 레넌은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고, 폴 매카트니는 “구세주가 나타났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엘비스는 대중의 시대 20세기가 만든 우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조선
[1948] 북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1948년 9월 9일을 정권수립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해방직후부터 북한지역에서는 소련군의 점령하에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계획이 서둘러 진행되고 있었다. 그 첫 작업은 1945년 8월 27일 조직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비롯한 각 지방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같은 해 10월 8일에는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주재로 평양에서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소집되고, 이어 10월 28일에는 「북조선 5도 행정국」이 정식 발족되었다.
이듬해인 1946년 2월 8일, 평양에서 개최된 「북조선 민주주의 각 정당·사회단체, 각 행정국 인민위원회 대표 확대협의회」에서는 북한주둔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창설을 결정하였다 .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북한지역의 중앙행정기관이었으나 소련군 사령부에 법령과 결정의 초안을 사전에 제출하여 소련군 사령부의 포고나 법령에 배치되지 않는 범위내에서만 권한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독자성이 없었다.
1946년 11월 3일에는 북한 전역에 걸쳐 도, 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여 3,459명의 인민위원을 선출하였는데 북한은 당시 총유권자 4,516,120명의 99.6%가 투표에 참가하였다고 발표하였다.1947년 2월 17일~19일까지 3일간에 걸쳐 각 도, 시·군 인민위원회 및 각 정당·단체 대표 1,157명이 참석한 가운데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가 개최되어 여기에서 선출된 대의원 237명으로 「북조선 인민회의」를 구성하였다 .
북조선 인민회의는 2월 21~22일 이틀간 제1차 회의를 열고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조직을 결성하였다.이 인민위원회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여 모두 22명으로 구성되었다.그 정당별 구성은 북조선로동당이 16명, 조선민주당이 2명,천도교청우당 이 2명, 무소속이 2명이었다.오늘날 북한에서는 당시의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최초의 프롤레타리아독재 정권 탄생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인민위원회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유엔총회가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위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설치를 결의하자 인민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서두르게 되었다.1947년 11월 18~19일에는 북조선 인민회의 3차 회의가 개최되어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어 12월 20일에는 헌법 초안을 확정하였다.
이듬해 1948년 2월 6일부터 개최된 북조선 인민회의 4차회의에서는 헌법 초안을 인민토의에 회부하고, 또한 이를 심의하기 위한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를 다시 소집키로 결정하였다.이에 따라 같은 해 4월 28일에는 인민회의 특별회의가 소집되었고, 이 회의에서는 이른바 2개월간에 걸친 인민토의의 결과로 나온 헌법 수정 초안을 축조·심의하여 「인민공화국헌법」 초안으로 정식 채택하였다 .
이어 7월 9~10일에는 북조선 인민회의 5차회의가 소집되어 인민공화국헌법의 실시를 결정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실시문제를 북조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 위임하였다.1948년 8월 25일 북한 최초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총 212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당시 북한은 등록된 유권자의 99.97%가 투표에 참가하여 이중 98.49%의 찬성률을 보였다고 발표하였다.또한 소위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360명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하여 보냈다고 조작 발표하였다.
곧이어 9월 2일~10일까지 9일간 평양에서는 572명이 참가한 가운데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를 개최하였다.여기에서 인민공화국헌법을 심의 채택한데 이어, 9월 9일에 김일성 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공화국」 정부를 출범시켰다.
[1945년] 독립운동가 차리석 사망
← 차리석 선생의 회갑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이 기념 촬영했다. 앞줄 가운데가 김구 선생, 뒷줄 가운데가 차리석 선생.
일명 서입환(徐立煥). 호는 동암(東巖). 아버지는 재헌(在軒)이다.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했다. 졸업 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대성학교(大成學校)를 경영하며 인재양성과 애국사상고취에 힘썼다. 1910년 12월의 105인사건으로 1911년 1월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신문사에서 언론활동을 통해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으로 임시정부 육성·발전에 노력했다. 1928년 3월 이동녕(李東寧)·안창호·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간부에 선임되어 기관지 〈한보 韓報〉·〈한성 韓聲〉을 발행하는 등 당의 기본강령 전파에 노력했다.
1930년 임시의정원 부의장이 되었으며 1933년에는 상하이에서 항저우[杭州]로 옮겨온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의열단(義烈團)·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의 통합에 의해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되어 김원봉(金元鳳) 등 의열단계가 임시정부의 폐쇄를 주장하고, 국무위원 중에서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등 5명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하는 등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송병조(宋秉祚)와 함께 임시정부를 고수했으며, 임시정부의 재건을 위해 의정원비상회의를 개최하여 이동녕·조완구·김구를 국무위원에 보선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를 개최, 주석에 이동녕을 선출하고 비서장(秘書長)이 되었다. 이후 국무위원·비서장으로 조국광복에 힘쓰다가 8·15해방을 맞아 임시정부 환국 준비에 몰두하던 중 병을 얻어 충칭[重慶]에서 죽었다. 1947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가 서울 효창공원에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44년] 프랑스, 드골 임시정부 수립
← 드골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기갑사단장 ·국방차관으로 있었고,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대독항전을 주장, 자유프랑스위원회를 조직하여 페탱이 이끄는 비시(Vichy) 정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43년 알제리에서 결성된 국민해방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대독(對獨)항쟁을 계속하였다.
1944년 파리에 귀환,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1945∼1946년 총리 ·국방장관, 1947년 프랑스국민연합(RPF)을 조직, 1951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나, 1953년 RPF를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1958년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제4공화정이 붕괴될 위기에 몰리자 다시 정계에 복귀할 뜻을 밝혔다. 그 해 6월 총리가 되었고, 9월 28일 헌법개정 국민투표에 의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의회의 권한을 약화시킨 제5공화정을 발족시켰고, 10월 그를 지지하는 신공화국연합(UNR)을 결성, 11월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고, 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naver
[1919년] 보스턴 경찰 파업
1919년 9월 9일 보스턴 경찰이 노동조합 결성을 거부당하자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보스턴 경찰은 제1차 세계대전 뒤 미국 노동총연맹(AFL) 가입을 추진했으나 시(市) 경찰위원회로부터 노동조합 결성권을 거부당했다. 이에 항의해 보스턴 경찰의 80%가량이 파업에 동참했다. 경찰이 파업에 들어가자 시 전체는 폭도들의 약탈과 횡포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앤드루 J. 피터스 시장은 보스턴 민병대를 소집해 파업을 진압했다. 당시 주지사로 있던 캘빈 쿨리지는 이 사건을 이용해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기도 했다. 쿨리지는 처음에는 파업을 막기 위한 조치에 반대했지만 파업이 수습국면에 들어서자 뒤늦게 매사추세츠 주 전역의 민병대를 소집해 파업 진압에 나섰다. 그는 "언제, 어디서, 어느 누구에게도 공공안녕을 저해하는 파업을 할 권리는 없다"고 천명하고 법과 질서의 확고한 지지자로서 국민의 인기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때의 활약에 크게 힘입어 192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부통령후보에 지명되었고, 1923년 워런 G. 하딩 대통령이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브리태니커
[1919년] 실업가 이종근(李鍾根) 출생
1919. 9. 9 충남 당진~1993. 2 서울.
종근당그룹의 창업자이다. 호는 고촌(高村).
1936년 경성직업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궁본(宮本)약방을 개업했고 1956년 (주)종근당을 창립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1971년 안성유리공업(주), 1973년 고촌장학회, 1979년 종근당산업(주), 1980년 한국롱프랑로라제약(주), 1983년 (주)한국로슈, 1984년 (주)한국르락소 등의 회사를 설립했다. 1976년부터 제약협회장을 지냈고, 1979~93년 (주)종근당 회장, 1981~93년 한국능률협회 부회장, 1984~93년 경영자총협회 부회장, 1988~93년 보건장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은탑산업훈장, 한국의 경영자상, 국민훈장 목련장, 대통령표창 등을 받았다.
[1917년] 오페라 가수 김자경(金慈璟) 출생
1917. 9. 9 개성~1999. 11. 9 서울.
목사의 외동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찬송가를 부르며 음악적 소양을 길렀다. 1935년 이화여전 음악과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전공하면서 당시 이화여전 교수였던 채선엽으로부터 성악을 배웠다. 1940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화여고 음악교사로 부임했다. 1948년 당시 한국에서 처음으로 막을 올린 오페라 〈춘희 La Traviata〉에서 주인공 비올레타 역을 맡았고 그해 미국으로 유학하여 줄리어드대학에서 마사 그레이엄의 지도로 오페라 공부를 했다. 1950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가진 바 있다. 1958년 귀국하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성악을 가르쳤다. 1968년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 시민회관에서 〈춘희〉를 초연한 이래 22년간 41회 정기공연과 수십 회 소극장 공연 등을 가졌다. 김자경오페라단 단장으로 있으면서 이규도·송광선·이인숙 등의 성악가들을 길러냈으며 고령의 나이에 한양대학교 국악과 대학원에 입학하기도 했다. 김자경오페라단의 주요공연으로 〈세비야의 이발사 Il Barbiere diTraviata, La Siviglia〉(1973)·〈리골레토 Rigoletto〉(1975)·〈춘향전〉(1978)·〈심청전〉(1978)·〈메리 위도우 Merry widow〉(1989) 등이 있다.
[1906년] 소설가 엄흥섭(嚴興燮) 출생
← 1925 엄흥섭 시
1906. 9. 9 충남 논산군 채운면 양촌리~?
소학교 5학년 때 진주로 이사가 1926년 경남도립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신시단〉, 〈학우문예〉 등의 동인지 활동을 하면서 사회주의사상에 경도되었다. 17세인 1923년에는 〈동아일보〉에 투고해 시 1편이 뽑힌 적도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3년간 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1929년 교원생활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한성도서주식회사에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고, 1929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했으나 당시 기관지격인 〈군기 群旗〉에 KAPF를 비난하는 내용을 실어 1930년 제명당했다. 그러나 KAPF와 계속 교류를 가지면서 활동했으며, 해방 직후 KAPF 소설부 위원, 조선문학가동맹 소설부 위원 등을 지냈고, 6·25전쟁 때 월북한 뒤로 생사를 알 수 없다. KAPF 작가로 출발하여 전향, 훼절했다가 다시 사회주의 작가로 변전한 모습 때문에 한국근대문학사의 축소판을 온몸으로 구현한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29년 〈조선문예〉 5월호에 시 〈세 거리로〉를 발표한 뒤, 소설 〈흘러간 마을〉(조선지광, 1930. 1)·〈온정주의자 溫情主義者〉(비판, 1932. 3~5)·〈번견탈출기 番犬脫出記〉(예술, 1935. 7)·〈아버지 소식〉(여성, 1938. 1~2)·〈여명〉(문장, 1939. 7) 등을 발표했다. 카프 맹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작품경향은 식민지 자본주의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고 계급의식을 불어넣는 프롤레타리아 문학(프로문학)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흘러간 마을〉에서는 부호의 별장 앞 호수 때문에 홍수 피해를 입은 마을 사람들의 분노를 다루었고, 〈방울 속의 참소식〉(문학창조, 1934. 6)에서는 행방불명된 남편의 소식을 기다리는 아내의 방황을 그렸다. 또한 〈여명〉에서는 "굶어가면서도 문학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이 시대, 이 사회의 예술가로서의 도"라고 생각하는 남편과 그런 남편이 대우받지 못하는 사회를 원망하는 아내를 통해 당시 예술가들의 고민을 잘 나타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정열기〉는 한 젊은 교사의 교육적 의지와 열정이 식민지 제도교육의 굴레 속에서 좌절당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8·15해방 이후 〈청동화로〉(예술, 1946. 2~?)·〈소도적〉(신세대, 1946. 5)·〈쫓겨온 사나이〉(신문학, 1946. 8)·〈자존심〉(백민, 1947. 11) 등을 발표했다. 소설집으로 〈길〉(1938)·〈세기의 애인〉(1939)·〈파경〉(1939)·〈행복〉(1941)·〈인생사막〉(1949) 등이 있다. 북한의 기술학교·중고등학교용 교과서인 〈마음의 노래〉(1960)를 출간하기도 했다.
[1899년] 헝가리 태생 프랑스의 사진가 브라사이(Brassai, 1899~1984.7.8) 출생
← 브로샤이가 찍은 사진 Steps Montmartre
(프)Jules Halasz. 본명은 Gyula Halász.
주로 파리의 밤풍경을 극적으로 나타낸 사진들로 알려져 있다. 예명인 브라사이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난 도시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899년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옛도시 브라소(Basso)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와 베를린의 미술학교에서 그림공부를 하였고, 1923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기자생활을 하였다. 이후 계속 파리에서 살았다.
그림도 잘 그렸고 글도 잘 썼으며 여러 방면으로 두루 조예가 깊었는데, 그 당시 예술계를 이끌던 피카소, 브라크, 헨리 밀러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30년 보도사진가들과 함께 취재활동을 하면서 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파리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찍어나갔다.
1931년 자신의 사진과 시인 폴 모랑의 글을 함께 수록한 사진집 《밤의 파리 Paris de Nuit》를 펴냈고 이 책으로 유명해졌다. 이 사진집은 1932년 영국의 권위 있는 사진문화상인 에머슨상을 받았다. 1932년부터 1938년까지는 파리 뒷골목 벽의 낙서 등을 찍다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사진에서 손을 떼고 그림과 판화 작업을 하였다. 전쟁 후 1945년부터 1965년까지는 주로 《하퍼스 바자》지의 사진을 찍었다.
1956년 10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벽의 낙서》 전시회를 하였고, 1968년에는 특별기획 회고전을 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밑바닥 인생들의 삶의 애환과 파리가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이것들을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대표적인 사진으로는 파리의 밤풍경과 뒷골목 담벼락에 쓰여진 《밤의 파리》, 《벽의 낙서》등이 있다. /naver
[1873년] 무대의 마술사, 독일의 연출가 라인하르트 출생
무대의 마술사, 최고의 연출가, 창조적 대예술가 등으로 불리는 독일의 연출가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1873.9.9~1943.10.31).
그는 연극이론을 설파하거나 작품에 대한 심오한 토론을 즐기기를 좋아하는 여느 연출가들과는 다르게 어찌 보면 무능력해 보일만치 말수가 적은 매우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 숨어있는 타고난 감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무미건조한 연극무대를 환상적으로 바꿔버린 동시대 최고의 연출가였다.
라인하르트 이전에는 연출가의 분야가 단순히 연극의 한 부분으로서만 인식되는 시대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 성공은 연출가가 독립적인 창조적 예술가라는 인식을 싹트게 하였고 이후 공연예술분야에서의 연출가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그 영역을 넓히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930년대 상징주의, 인상주의적인 새로운 경향의 희곡작품을 연출하였던 그는 당시까지의 문학성만을 따지는 연극연출 기법에 반하여 무대 위의 모든 표현적인 요소들을 감각적으로 활용하여 시각적, 청각적으로 상상력 풍부한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 배우 중심의 조화로운 조형에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주었던 최대의 연출가로서 칭송되었다.
[1870년] 한말의 의병장 우동선(禹東鮮) 출생
← 국립묘지에 있는 우동선의 묘
1870. 9. 9~1908. 10.
아버지는 용상(鏞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격분하여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신천·장연·송화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윤봉(趙允奉)·강만석(姜萬石)·장동찬(張東燦)·고익균(高益均) 등의 추대로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이 되었다. 그는 조윤봉·장동찬 등과 의병부대를 지휘해 황해도의 서부지역에서 일본군의 군사시설 파괴 및 일본군을 습격했다. 일본은 의병에 대해 무력과 선유(宣諭)의 양면책을 사용해 그에게도 서상륜(徐相崙)이 황제의 선유 조서와 함께 선유위원의 효유문 및 면죄문빙(免罪文憑)을 가져와 의병을 해산하라고 권고했으나, 이에 불복하고 끝까지 항전했다. 교전중 다리에 총탄을 맞아 체포 구금되어 있다가 밤에 일본군의 총을 빼앗아 일본군 8명을 사살했으나, 격투를 전개하다 총탄에 맞아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28년]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 (Tolstoy, Lev Nikolayevich, 1828~1910.11.20) 출생
톨스토이는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 Voyna i mir>(1865~69)와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5~77), <부활 Voskreseniye>(1899)을 남긴 러시아의 작가이자, 개혁가이며, 도덕사상가이다. <전쟁과 평화>는 7년에 걸쳐 쓴 대서사시로서 세계문학사에서 손꼽히는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805~14년을 무대로 러시아의 5개 귀족가문의 역사를 다룬 이 작품에서 톨스토이는 사실적이고 정교한 세부묘사와 다양한 심리분석으로 여러 인생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연했다. <안나 카레니나>는 서술기법과 문체가 <전쟁과 평화>와 비슷하지만 예술적인 통일성에서 훨씬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삶의 의미에 대한 작가 자신의 고뇌, 자살 충동 등 당시 톨스토이가 겪고 있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안나 카레니나>를 탈고할 무렵 톨스토이의 정신적 고통은 극에 달했고, 그는 그 돌파구를 그리스도교에서 찾았다. 만년에 그는 종교·사회·도덕·예술 등 여러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저술로 남기는 데 시간을 바쳤다. 이 시기의 저술로 <교조신학 비판 Kritika dogmaticheskogo bogoslaviya>·<나의 신앙 V chyom moya vera>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778년] 독일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브렌타노(Brentano, Clemens, 1778~1842.7.28) 출생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출생. 어머니는 괴테와 교유가 있었고, 아버지는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할레대학 ·예나대학을 다녔고 여기에서 헤르더, 괴테, 슐레겔 형제, 피히테, 티크 등과 사귀었다.
괴팅겐에서 알게 된 아르님 및 괴레스와 하이델베르크 낭만파를 수립하였고, 그후 베를린에서는 클라이스트, 아이헨도르프와 사귀었다. 천성이 자유 분방한 사람이었으며, 보헤미아·빈 등을 방랑하고 다닌 끝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일생을 마쳤다.
특필할 만한 공적이라면 아르님과 함께 편집한 가요집 《소년의 마적》(1805∼1808)이다. 헤르더의 《노래 속의 민족의 소리》가 국제적인 수집인 데 비하여, 이것은 독일민족 사이의 노래 소리에 국한되어 있으며, 그 점에 낭만파 전 ·후기의 차이가 있다. 이 가요집은 사라질 뻔했던 민간 전승문학을 구해냈을 뿐 아니라, 민속학 건설에 기여한 점에서 지금도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또 창작동화(메르헨)도 집필했는데, 특히 《고켈이야기(고켈과 힝켈) Gockel und Hinkel》(1838)는 괴테의 《라이네케 여우》와 맞먹는 뛰어난 동물 기담(奇談)이다. /naver
[1747년] 영국의 감리교 성직자 쿡(Coke, Thomas, 1747~1814. 5. 3) 출생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친구였으며, 웨슬리는 그를 가리켜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했다. 1772년 영국국교회 사제로 임명되었으며, 1772~76년 서머싯의 사우스페더턴에서 보좌신부로 일했다. 웨슬리를 만난 뒤 그의 권유대로 야외와 농가에서 예배를 인도하다가 쫓겨났다. 1777년 정식으로 감리교에 가입했으며, 1782년 아일랜드 감리교 협의회 초대 의장이 되었고, 2년 뒤 웨슬리에 의해 북아메리카의 새로운 선교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미국을 모두 9회 방문했고, 1787년의 방문 때 웨슬리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독'이라는 직위를 얻었다. 1797, 1805년에 열린 영국 감리교 협의회에서 의장을 맡았으며, 영국 감리교에 감독이라는 직위를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되자 총리 리버풀 경(卿)에게 인도 성공회의 주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 요청마저 거절당하자 독자적인 감리교 선교를 위해 기금을 모아 인도로 가는 도중 배 안에서 죽었다. 그는 많은 글을 남겼고, 그중에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주석 Commentary on the Old and New Testaments〉(5권, 1801~03), 〈서인도제도의 역사 A History of the West Indies〉(1808~11), 여러 권의 설교집, 〈존 웨슬리의 생애 Life of John Wesley〉(헨리 무어와 공저, 1792)가 있다. 노예제도를 열렬히 반대했으며, 성직자로서 감리교와 성공회 사이의 불화를 치유하려고 노력했다./브리태니커
[384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393-423) 호노리우스(Honorius, Flavius) 출생
← 호노리우스가 새겨진 로마의 화폐
384. 9. 9 ~ 423. 8. 15.
서로마 제국의 황제(393~423 재위).
그의 치세에 제국 전역이 이민족에게 유린당했으며, 로마는 서고트족에게 함락되어 약탈당했다.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 재위)와 아일리아 플라킬라 사이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에 의해 황제(augustus)의 자리에 올랐으며(393. 1. 13), 10세 때 아버지가 죽자(395. 1. 17) 서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형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통치 전반기에는 군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권력을 행사했다. 398년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의 딸 마리아와 결혼했으며 마리아가 죽자 그녀의 여동생 테르만티아와 재혼했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408년 8월 반역혐의로 처형당했다.
통치 초기에는 반달족·알라니족·수에비족이 갈리아 지방을 약탈한 뒤(406) 스페인(히스파니아)까지 진출했다. 제국의 방위태세는 와해되어 결국 409년에 호노리우스는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증원군을 보낼 수 없다고 브리튼(브리타니아)의 여러 도시에 통보할 정도였다. 410년 8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로마를 점령했으며 호노리우스는 라벤나로 도망갔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장군들이 프리스쿠스 아탈루스, 막시무스, 요비누스를 비롯한 제위 찬탈자와 반란 도당을 진압하는 동안 라벤나에서 사태를 지켜보았다. 411년 제위 경쟁자인 브리튼과 갈리아의 콘스탄티누스가 호노리우스의 군사령관인 콘스탄티우스에게 격파당했다. 콘스탄티우스는 호노리우스에 의해 공동황제로 선포되었으나 몇 개월 후인 421년말에 죽었고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호노리우스의 뒤를 이어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호노리우스는 로마의 역대 황제 가운데 가장 나약한 군주였다. 그는 정치는 대체로 실패했다. 만약 그가 410년 이전에 알라리크가 제시한 조건을 완강히 거절하지만 않았더라도 로마는 고트족에게 점령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브리태니커
그밖에
2004 삼성전자 세계최초 90나노미터 D램 양산
2000 서태지 4년7개월 만에 컴백 공연
1996 초고속 ‘정보통신용 교환기(ATM-MSS)’ 국내 최초 개발
1993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 위원장에 조선일보사 방상훈 사장 선임
1991 하이텔(hitel) 서비스 개시
1990 65년 만의 폭우로 한강 범람
1987 여배우 강수연, 베니스영화제서 여우주연상 수상
1985 영국 버밍햄서 폭동
1982 아랍국 지도자들 폐즈헌장 발표
1982 케야르 유엔사무총장 소련 방문
1982 국산 초음속 제트전투기 F5F 타이거2의 시험비행성공(마하1.6)
1981 레이건-베긴 정상회담
1981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사망
1981 프랑스 내각 주요산업 및 은행 등 국유화법 의결
1980 이란-이라크 서부 중앙 국경지대에서 무력충돌
1979 비동맹국 수뇌회의 아바나선언 채택
1978 미국 워너브러더스 영화사를 설립한 워너 사망
1976 미국 NBC방송 뉴욕서 설립
1972 문공부,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 국내 배포 금지
1972 ‘8·3 명령’ 긴급재정명령 국회에서 승인
1968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개막
1966 북한, 한국문제해결 위한 참전국회의 제안(10일 정부 거부)
1965 티베트, 자치구 성립을 선언
1962 일요신문 창간
1957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흑인 투표권 보장 위한 민권법에 서명, 흑인의 투표권이 처음으로 보장됨
1957 유엔안보리 한국가입 소련대표가 거부
1956 서독서 통독촉구각서를 4개국에 전달
1955 한국, 국제도서관협회에 가입
1954 북알제리아에 지진 약1,500여명 사망
1945 그레이스 호퍼 박사, 컴퓨터 오작동(버그) 첫 발견
1945 조선총독부, 미군에 항복문서 조인
1926 미국 NBC 설립
1921 천주교 지학순 주교 출생
1901 프랑스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사망
1901 독일의 식물학자 심퍼 사망 - 최초로 대륙을 식물지리구로 나누는 데 성공
1896 3대 삼림자원 채벌권을 러시아인에게 허가
1883 미국 북태평양 철도 완성
1867 런던조약 조인
1867 룩셈부르크, 런던조약으로 영세중립국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