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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과 그림자
단기 3956년(1623) 여름 극동
초기 정착민들에게는 콜도라도 강이라고 알려진 강 주변에서 금이 대량으로 채굴되면서 금강으로
불리게 된 이후로 극동부는 비약적인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누구나 쉽게 금을 채굴할 수 있다는
소문이 대한제국 전체에 퍼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극동항은 몇 년동안 이주민을 실어 나르느라 매일 서너척의 여객선이 들어왔다.
단기 3951년(1618)에 처음으로 탐사대가 극동을 출발하여 리오 그란데강을 따라 대서양까지 갔다가
돌아온 이래 많은 이민자들이 서쪽으로 움직였다.
“이번에 사령관이 바뀐다는데 자네는 누군지 아나 ?”
은하이는 서울 유학 親舊들과 함께 앞으로 은하이 부족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말머리를 돌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계급이 대장이랍니다.”
은하이의 親舊이며 서울에서 유학한 누트아나가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새로운 소식을 전해왔다.
유독 군대에 관심이 많던 누트아나는 서울에서 중학교를 나오면서 그쪽 방면의 책을 많이 읽었고
군쪽 인사들과 친해지려고 부던히 노력을 해왔다.
“임동표 사령관은 참 좋은 분이셨는데, 이번에 오시는 분은 어떨지 모르겠군 ?”
누투아나는 은하이는 대장이란 계급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자, 보충 설명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대장은 대한제국에서 최고위층을 의미했으며 그만큼 극동에 대한 관심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족장님. 대장이란 계급은 이전 임동표 사령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지금 대한제국의 군대는
크게 한반도와 일본부를 함쳐 조선부에 1군사령부가 있고, 몽고부에 2군, 대명부에 3군, 러시아부에
4군이 있습니다. 모두 대장급 사령관이 지휘하고 있습니다.
극동에 대장급 사령관이 부임한다면 그에 걸맞게 대한제국군도 늘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신시에 있는 군대를 빼면 겨우 이만 오천명이지만,
최소 이십만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은하이는 이십만이라는 숫자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이십만이라면 은하이족 전체 인구와 맞먹는 숫자였다.
지금도 밀려드는 이민자들로 인해 작은 충돌들이 빈번해지고 있는데
거기에 이십만의 군대라면 은하이족은 순식간에 대한제국에 흡수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나 많이 온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점차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문제군. 우리는 완전히 밀려나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 ?”
“겉으론 평온한 것 같지만 아주 위험한 상황입니다.
지금은 우리는 우리대로 움직이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대한제국의 정책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한제국을 선량한 도둑이라 칭하시면서 더불어 사는 방법을 찾아보라 하시더군.
지금 당장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
은하이의 말은 모두가 동감하고 있었다. 쇠붙이 하나 만드는 것도 힘겨운 그들로서는 대한제국은
싸울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단 백명의 훈련된 병력만으로도 자신의 부족은 전멸할 수도 있었다.
“일단은 우리끼리 뭉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대한제국에게서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문물을 이용해서 우리의 독립을 유지할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일단은 말입니다.”
“좋은 말이긴 한데…. 음음”
은하이는 무엇보다도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부족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야만 했다.
그리고 강력한 추진력을 발생시킬 수 있는 단체가 필요했지만,
오랜 세월 흩어져 지낸 생활이 몸에 벤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 지 걱정이었다.
“일단은 자네들이 주변의 부족장들을 만나게 그리고 부족간 통합체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모아오도록 하게. 너무 티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알겠습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그걸 가만히 놔 두겠습니까 ?”
“아직은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럴 명분도 없지 않는가 ?”
은하이와 그의 親舊들은 대한제국과 협약을 맺은 부족들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조용히 움직였다.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는 구만, 어디나 젊은 사람들은 혈기가 왕성해서 탈이야.”
임동표 중장은 후임자인 김경환대장에게 할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은하이의 움직임을 보고를 받고
피식 웃으면서 말을 했다.
“그런 거 만들면 우리야 편하지. 창구가 하나로 통합되면 서로 편하니까 그냥 지켜만 보게.
도와주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그나 저나 이번 일로 분열이나 되지 않았으면 좋겠군.
동부쪽 현지인들이 아파치족을 노린다는 정보를 흘려줘 그러면 통합에 한결 쉬워질 수도 있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괜히 키워서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닙니까 ?”
“김경환 사령관님께서 잘 하시겠지. 난 서울에 가기 싫은데 왜 굳이 들어오라는 지 모르겠네.
정도 듬뿍 들었는데. 또 배타고 고생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구만.”
“이번 인사 이동은 유래가 없는 대규모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천인단쪽 사람들도 엄청 움직인다는
소식입니다. 이년 마다 움직이는 거라 천인단 쪽에서는 별 움직임이 없지만,
군대는 사병까지 포함된 인사라서 제국 전체가 술렁거립니다.”
군 사령관급 인사에 따른 파급 인사는 예상이 되었지만,
그와는 상관 없는 사병에서 장성급까지 광범위하게 인사가 진행 되었다.
“뭔가 일어나긴 나나보다. 대충 흐름을 보면 각 지역 사람들이 뒤섞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
이곳으로 러시아 신병들까지 온다니 말해서 무엇하나 ? 복잡해. 이제 그만 쉬고 싶은데.”
임동표 중장은 올 여름에 인사이동이 발표되자 군복을 벗고 싶었지만 천군부에서 사표를 받아주지
않았다. 후임 사령관이 부임하는 곳에 전임 사령관이 전역을 하고 자리를 잡는 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일년 서울생활 좀 하다가 다시 올 테니, 그동안 잘 있게나 ?
언제쯤 김경환 사령관님께서는 도착하신다 던가 ?”
“칠일 후면 도착하실 겁니다. 부산을 떠난지가 열흘 전이니 하루 이틀 정도는 더 빨리
도착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극동함대에서 멀리까지 마중을 나간다고 법석을 떨던데요.”
“그렇겠지. 그분이 오시면 당분간은 파마나까지 관장하시게 될 거니까 ?
은하이 친구가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 같단 말야.”
다른 장군이나 장교들은 천군부에서 근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있었지만,
특이하게도 임동표중장은 서울에 들어가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작부터 군복을 벗고 싶었던 그로서는 또다시 일년이나 더 군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단기 3956년(1623) 가을 폴란드 바르샤바 궁전
500년동안 폴란드의 수도였던 크라쿠프가 스웨덴 기병대에 약탈당하고 바벨성이 전소되자,
지그문트 3세가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기고 궁전을 건설한지 14년이 지난 지금 바르샤바는
북유럽 최대의 무역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희생으로 이뤄낸
바르샤바의 번영은 발틱해에 대한제국의 함대가 진출하면서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제국 특사가 뭘 요구한다고 ?”
지그문트의 성난 외침에 방금 대한제국 특사를 만나고 온 스체르바츠끼가 고개를 들었다.
“우크라이나와 스몰렌스크 반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 ? 우크라이나는 우리 땅이야. 거기가 모스크바 공국땅이었나 ?
아니지. 오래전부터 그곳은 폴란드 공국 땅이었잖아 잠시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을 뿐이지.”
“맞는 말씀이십니다만, 대한제국이 최후통첩을 해왔습니다.
올해 안에 우크라이나에서 완전 철수 하라…”
“미친놈들. 군대를 끌어모아. 차라리 내가 직접 모스크바로 달려가겠다.”
지그문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느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단맛을 빨아먹었는데
흠뻑 빠진 그가 순순히 내놓을리 없었다.
더군다나 그 일로 인해 지방영주 회의가 군소리 없이 자신을 따르고 있었다.
“고정하십시오. 영주회에서 반대하지 않겠습니까 ?”
“그놈들도 좋아하겠지. 영주들에게 대한제국이 우크라이나를 노린다고 알려.
영주들도 우크라이나 때문에 톡톡히 득을 보고 있으니 싶게 흥분할 거다.”
폴란드.
평지의 땅이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은 여타 유럽나라보다도 왕권이 약했다.
슈라흐타라고 불리는 지방영주들의 연합체가 협의하에 다음 왕을 선출했다. 지방 영주들은
명문 귀족가문이나 유럽의 선제후 가문중에서 우둔하고 다르기 쉬운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곤
했기 때문에 폴란드왕은 슈라흐타를 견제하거나 장악할 힘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지그문트 1세와 2세때 폴란드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왕권도 자연스럽게 신장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폴란드 왕은 여전히 움직이는데 제약이 많았다.
“대한제국과 싸워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또다시 반란이라도 난다면,
대한제국과 맞서기도 힘들어 질 겁니다. 스웨덴이 왜 대한제국에게 영토를 반환했는지
생각해 주십시오. 그래서 말입니다만, 조카에게 도움을….”
스체르바츠끼는 다음 말을 잊지 못했다. 지그문트가 또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그만, 내 형 자식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
그놈이 날 스웨덴에서 쫒아내고 이곳까지 쳐들어와서는 바벨성을 불태운 것을 잊어먹었단 말이냐 ?
그놈에게 도움을 청하느니 차라리 대한제국에 항복하겠다.”
“그럼 선제후에게라도 ?”
“누구 ?”
“작…”
“작센! 그분은 자기 앞가름도 못하는 사람이잖아.
구스타프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누굴 도와준다는 거야 ?
우리 힘으로 충분히 대한제국 같은 놈들은 이길 수 있어. 당장 영주회의를 소집해”
지그문트는 말을 그렇게 하긴 걱정이 안될 수가 없었다.
대한제국의 힘을 직접 느껴본 적은 없었지만 러시아, 모스크바 공국을 흡수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전율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비옥한 농토가 풍부한 우크라이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영주회의는 회의이고, 대한제국에서 대가를 지불한다고 하던가 ?”
지그문트는 스웨덴에게 최소한 오만루블에 가까운 황금이 지불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최소한 두배가
넘는 금액을 제시했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재상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있었나 ? 없었나 ?”
“없었습니다. 영토반환과 함께 배상금 지불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 배상금을 요구해. 그놈들이 날강도가 아니고서야.
스웨덴에게는 지불하고 우리에게는 돈을 받겠다. 우리 폴란드를 뭘로 아는 건가 ?”
대한제국은 폴란드와는 협상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북유럽을 전부 차지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지고 있는 데 굳이 우크라이나만 얻고 싶지는 않았다.
대명부 내란 중에도 꾸준히 4군에 병력을 증강배치한 속셈도 거기에 있었다.
모스크바 4군 사령부
김상태 사령관은 예하 주요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4군 현황에 대한 보고를 일시에 받았다.
그는 대략적인 보고가 끝나면 모든 예하 사령부를 직접 둘러보고
훈련이나 기강상태를 시찰할 생각이었다.
“4군의 관할 구역은 동쪽 우랄산맥에서 시작하여 서쪽 발틱해까지이며 남쪽 카스피해에서
돈강 하류지방까지 그리고 현재 스몰렌스크 북부 지방까지입니다.
4군 예하에는 기본전력인 4개 군단이 있습니다.
1군단은 신항주변과 스웨덴 국경지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2군단은 모스크바에 3군단은 볼그라드에서 카스피해/흑해와 아스트라한을 담당합니다.
폴란드와 스몰렌스크, 우크라이나 국경에는 4군단이 분산 배치되어 있습니다.
추가로 5군단과 6군단이 편성에 들어가 있습니다.
각 군단은 예하에 한 개의 기병사단과 두개의 보병사단, 포병여단, 특수여단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4군 사령부 직할부대로 특수여단 과 전차여단 그리고 여단급 봉황이 있습니다.
총 병력은 이십오만명이며 5군단과 6군단이 완편되면 대략 사십만정도가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현재까지 병력의 반 정도에 개인화기가 지급되어 있습니다."
4군 관내를 투영하는 지도에는 작전참모의 설명에 따라 각군단의 위치와 부대들의 마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40만이면 엄청난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광범위해서 인지
부대간 간격이 최소 100에서 200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다음으로는 4군 지원부대 배치 현황입니다. 먼저 해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흑해로 진출하는 길목인 코카서스와 아조프해가 터키제국으로 인해 막혀 있기는 하지만
흑해 통항로를 확보한 이상 지중해 함대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직접적인 지원은 주로 발틱함대에서 이루워지며 백해함대는 후방을 지원하게 됩니다.
해군력은 스웨덴을 의식하여 더 이상 증원이 되지 않고 있지만
유사시 극동함대나 일본함대의 직접개입이 가능합니다.”
“공군은 현재 4군에 배치된 병력이 없습니다만, 이번 신속대응군이 모스크바에 신설되면
그에 상응하는 천붕이 배치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대략 수송기 50에서 80여기와 지원기 20여기가
배치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이 4군이 보유하거나 4군을 직간접으로 지원할 수 있는
병력과 화력의 개관입니다.”
“짝짝짝”
김상태 대장은 설명이 끝나자 박수를 쳤다.
“휼륭합니다. 이런 휼륭한 부대를 지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참모진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대충 이곳을 파악한 후에 예하부대를 방문할 생각입니다.
모두들 잘 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그래도 사병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군요.
그리고 신임 천군부 장관께서는 자신의 임기안에 가능하면 4군을 움직이고 싶어 하십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멀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모두들 부하들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모여있는 장령들이 한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저녁 만찬 때 만납시다. 모두들 그만 나가 보시고, 이곳 민정과 정보부서장만 남으세요.
따로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모두들 회의실을 나가고 사령관과 민정참모, 정보참모 그리고 모스크바 치안을 맡고 있는 치안감이
자리를 뜨지 않고 남았다. 김상태는 러시아로 오기 전 천군부와 천인단에서 각각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줄 것을 의뢰 받았다.
“다들 아시겠지만 대한제국이 러시아에 진출한지 올해로 꼭 10년이 됩니다.
천군부와 천인단에서는 러시아부를 대명부와 같은 구조로 개편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 첫단계로 올해부터 징집이 실시됩니다. 그리고 아직 발표가 나지않은 일급 비밀입니다.
보안에 신경써 주십시오. 지금과는 다른 군정이 실시될 것입니다.
현 행정관인 안드레이 고드노프는 올해부로 실각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제4군의 유럽진출이 러시아에서
멈춰진 이유는 물론 해군기지의 활성화가 되지 않은데 있었지만, 러시아에 대한 확실한 통제에
자신감이 없었던 이유도 한 몫하고 있었다. 모든 군수물자의 이동로가 러시아각지를 통과해야 하는
마당에 확실한 통제는 필수적인 항목이었다.
“현 행정 책임자들의 반발이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민정참모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대부분의 행정을 러시아인에게 맡겨놓아 그들의 잠재적인 능력이
걱정이 되었다. 특히 고드노프가 심어놓은 지방관들이 문제였다.
대한제국의 묵인하에 진행된 고드노프의 세력화는 지난 10년간 꾸준히 지속되어와서
명실공히 러시아부의 제2인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올 겨울동안 고드노프에 대한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십시오.
유럽진출의 선결과제 입니다. 내년 봄에는 순식간에 모든 것이 바뀔 겁니다.
그때 허둥대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고드노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제 그만 물러날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 역시 일급비밀입니다. 예상보다 유럽의 혼란이 빨리 종결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천군부에서는 작전명 “그림자”를 일찍 발동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어쩌면 올해 안에 작전 개시 명령이 하달될 지도 모릅니다.”
작전명 그림자를 처음 듣는 민정참모와 치안감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 두 눈만 멀뚱멀뚱 거리며
사령관을 응시했지만, 정보참모는 “그림자”작전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사령관의 보충 설명을
기대하던 민정참모는 사령관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정참에게 고개를 돌렸다.
치안감과 정참의 시선을 의식한 정참이 사령관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말씀드리지요. 어차피 아실건데”
사령관의 허락이 떨어지자 정참이 헛기침을 한번 했다.
“허험. 두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림자”라는 작전이 유럽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작전에 투입된 사람들도 자신이 그림자 작전에 투입된 줄 모르고 있습니다.
천군부 핵심 인물과 정보관련 업무의 책임자만이 열람이 승인된 작전입니다. 이 작전이 노출되면
자칫 유럽이 하나로 뭉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각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정참의 입을 통해 나온 작전 개요는 민참과 치안감을 한없이 놀라게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4군의 수뇌부에게조차 비밀로 해온 10년 작전이 서서히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단기 3956년(1623) 가을 뤼베크
한때는 한자 동맹의 맹주를 차지하며 발틱해의 강자로 떠올랐던 뤼베크 도시는 동방원정에서
대한제국에게 기독교도를 팔아먹었다는 오명을 쓰고, 유럽 제국들에게 무릎을 꿇은 후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덴마크의 크리스찬 4세를 도왔다는 이유로 가해진 페르디난트 2세의 집요한
공격에 이제는 허명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도시에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의 군대가 들어오면서 뤼베크는 다시금 활력을 되찼고 있었다.
구스타프는 신성로마제국에서 행해지는 신교도들의 억압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한제국에서 받은 보상금을 바탕으로 키운 군대를 뤼베크에 상륙시켰다.
“어서오십시오. 황제폐하”
뤼베크는 도시로 들어서는 구스타프를 황제라 칭하고 있었다. 그를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인정하고 페르디난트를 물리쳐주길 희망하는 간절한 마음와 구스타프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고맙소. 뤼베크경. 이렇듯 환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신의 가호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스웨덴왕국은 덴마크왕국에서 분리된 이후에도 여전히 유럽의 야만인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비옥한 경작지를 보유하지 못한 스웨덴은 전통적으로 바다로 진출하여 많은 약탈을
자행해서 유럽의 사람들에게는 인식이 좋지 못했다. 언제나 유럽의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던
구스타프는 자신의 오랜 숙원인 유럽 속으로의 진출을 시작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떠 있었다.
“뤼베크경. 우리 스웨덴군의 총병은 천하무적입니다.
틸리가 이끄는 오합지졸과는 상대가 되지 않지요.
조만간 베를린을 해방시키고 라이프치히와 프라하를 구교도놈들에게서 구해낼 것입니다.”
구스타프는 자신만만했다. 그동안 대한제국의 소총을 복제하기위해 무던히 애를 썼던 그는
결국 후장식 자동소총 만들길 포기하고, 기존의 머스켓을 개량한 소총을 개발해 냈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돌프라 이름부친 이 소총은 비록 전장식 소총이지만
부싯돌 격발장치와 철제 장전봉을 가지고 있었다.
구스타프의 총병과 기병 이만이 뤼베크에 상륙했다는 소식은 발빠른 소식통에 의해
유럽각지로 퍼졌나가 페르디난트에게도 알려졌다.
“웃기는 놈들이군”
그동안의 전쟁에서 승리해온 페르디난트는 이제 누가 쳐들어 온다 해도 자신이 있었다.
크리스챤이 이끄는 신교 연합군을 바이델브란트에서 무찌르고 그 여세를 몰아
덴마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어제일 같았다.
“틸리 장군. 이번에도 잘 싸워주리라 믿네. 구스타프가 베를린으로 움직인다하니,
장군이 손님대접을 확실히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야.”
틸리는 옆에 있는 발렌슈타인을 바라보며 은근히 자신에 대한 황제의 신임을 과시했다.
줄곧 전투에서 승리한 틸리는 신성로마제국의 구교도사이에서는 영웅대접을 받고 있었다.
반면 발렌슈타인은 그가 맡은 임무에 걸맞게 무자비한 신교도 학살자로 비춰졌다.
하지만 그는 실리를 확실히 챙겼다. 보헤미아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탈취했고,
보헤미아의 총독과 함께 그 지방 땅을 공식가격의 절반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사들였다.
그렇게 영지를 넓힌 그는 마침내 공작이라는 지휘에 올라 이자벨레 카타리나와 결혼까지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폐하. 틸리 장군이 지금껏 진 적이 있었습니까 ?
그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전쟁에서 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발렌슈타인의 장인이며 황제의 고문단 수장을 맡고 있는 칼 폰 하라흐가 뼈가 있는 말을 던졌다.
발렌슈타인은 하라흐의 말에 상한 마음이 조금은 위안을 받는 듯 했다.
틸리가 황제군을 장악하고 있지만 자신 역시 용병만 이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지요. 하하하. 폐하 이제 그만 출병할까 하옵니다.
이번에는 아예 뤼베크를 완전히 접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폐하의 넓으신 아량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는 끝까지 버티는 이단자들을 제국땅에서
모조리 몰아내겠습니다.”
타고난 무관인 틸리는 발렌슈타인이나 하라흐의 말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신께서 자신의 군대를 보살펴 주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그로서는 결코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토와 재물에 눈이 어두워 날뛰는 발렌슈타인, 프리틀란트 공작이
끝내는 신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제나 시원시원 해서 좋구만. 발렌슈타인 공작은 틸리장군의 뒤를 잘 봐주길 바라네”
“당연한 말씀이옵니다. 폐하”
유럽에서 유일하게 황제군을 가지고 있는 페르디단트는 사실 여기 모인 세사람의 힘이 없으면
속 빈 강정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군의 힘이 점점 커지자 지역 제후들이 경계하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라 안팎으로 시끄러워 조용히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제후들은 스페인 왕이
아라곤의 왕권을 몰수하는 전쟁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상비군 제도가 신성로마제국에도
만들어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폴란드의 제2의 도시가 된 크라코프에서 동남쪽으로 10여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금광산에서 광산 광부들을 모아놓고 한 사람이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었다.
“광부 여러분. 오늘도 얼마나 힘들었습니다. 이제 그만 어께에 들쳐 맨 것을 내려놓으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여러분의 짐을 가볍게 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어디에도 자신의 독생자를 내려보내 여러분의 죄를 사하여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가졌던 원죄.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지게 될
하나님에 대한 죄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쫒겨남으로서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실 그런 가혹한 분이 아니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르십니다.
그토록 사랑하시는데 어떻게 여러분에게 원죄를 물으시겠습니다.
이는 다 하나님의 양자에 불과한 지저스를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또 자신을 그 양자의 제자라고
지칭하면서 자신들만이 오직 면죄부를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로마 교황청의 속임수 입니다.”
부정기적으로 광산에 나타나 떠들고 있는 소치니의 말은 처음에는 광부들에게 전혀 먹혀들지가 않았다. 원죄설을 부정하고 독생자는 약자였다는 괴이한 설교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소치니의 설교가 쉽게
먹혀들리 없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듣던 광부들은 점차적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시며,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빗대어 만들 인간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고통에 몸부림치게 할 이유가 없다는
소치니의 사상은 광부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여러분은 하루종일 소금을 캐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집에는 소금이 얼마나 있습니까 ?
행여 매일 캐는 소금을 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사서 먹지는 않으십니까 ? 에덴동산에는
귀족도 천민도 없었습니다. 저희 교회로 나오십시오. 여러분에게 평안과 안식을 드립니다.”
이탈리아의 무슨 대공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알려진 소치니는 크라코프 근교에 작은 교회를 만들고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헌금을 받지 않고 오히려 한끼의 양식을 나눠주는 등 획기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운영하던 소치니는 신도수가 초기보다 많이 늘어났음에도 여전히 거리를 떠돌며
설교를 멈추지 않았다.
“신부님. 신부님의 말씀이 다 옳다고 칩시다. 그러면 왜 지저스가 보여주신 이적은 다 무엇입니까?”
처음으로 질문을 받게 된 소치니는 자신에게 질문을 한 광부를 바라보았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맑은 광부는 다른 사람에 비해 젊어 보였다.
“우선 전 신부가 아닙니다. 저를 신부라 부르지 마십시오. 전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한 인간일 뿐입니다. 지저스가 행한 이적이 여러분의 식탁을 풍성하게 합니까 ?
성경에 기록된 지저스의 오병이오의 기적이 여러분의 가정에 일어난 적이 있습니까 ?
왜 그렇습니까 ? 여러분의 믿음이 부족해서 일까요 ?”
어느새 몰려든 광부들을 주욱 둘려보던 소치니가 말을 이었다.
“그렇치 않습니다. 지저스는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 세례를 받던중 성스러운 하나님의 권능으로
임무를 부여 받고 그 시대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지저스는 그때 죽음으로서 그의 임무를 완수한 것이지만 그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이적도
행하지 못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지저스가 필요한 때가 아닙니까 ?
저희 교회에 나오셔서 지저스와 같은 분을 내려보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시다.”
귀족들과 왕족들에게 착취당하고 교회의 감시속에서 살아오던 폴란드 농민과 하층민들의 솔귓하게
만드는 소치니의 설교는 폴란드에 널리 퍼져있는 유니테리언들 속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템즈강변
“확실히 오늘 사냥을 나가긴 나가는 거야 ?”
새벽녘에 템즈강을 거슬러 올라온 대한제국 특수 임무 대원들의 마음이 바빠졌다.
오늘 버킹엄공과 사냥을 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제임스 영국왕을 저격하기 위해
나타난 그림자 부대원들이 윈저성을 정문과 후문을 주시했다.
“이러다 해가 지겠다. 그나저나 성 하나는 멋지게 만들어 놨구만”
전체적으로 오층건물인 윈저성은 템즈강변에 위치하면서 전통적으로 영국왕들이 생활하는 성이었다.
중앙의 대원탑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펼쳐진 윈저성은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섵불리 성안으로
들어갔다간 하루종일 헤매도 제임스 국왕을 못 만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사냥이 취소된 듯 합니다. 철수를 생각하시는게 ?”
“오늘 밤에 한번 들어가 볼까 ?”
팀장이 농담섞인 말을 걸었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적지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죽기 밖에 할 일이 없었다.
“일단 왔으니 뭐라도 건져가야지. 내일까지만 기다려 보고 철수한다.”
대원들이 팀장의 결정에 동의를 표시했다. 신항에서 템즈강까지 꼬뱍 6일을 바다속을 헤엄쳐 왔는데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을 아무도 바라지 않았다.
“컹컹컹”
대충 가래떡으로 점심을 때우고 두 사람씩 돌아가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멀리서
개짓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복조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라면 어린아이와 개가 아닐 수 없었다.
“나온다.”
망원경을 바라보던 팀장이 정문을 통해 위풍당당하게 나오는 기마대를 바라보며 조그맣게 외쳤다.
대략 15기정도가 개 몇마리를 앞세우고 윈저성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젠장. 포인터잖아. 어라”
후각이 예민하고 매우 영리한 잉그리시 포인터는 주인의 지시에 복종하고 속력과 지구력에서
최고의 사냥개였다. 포인터는 사냥감을 발견하면 오른쪽 앞발을 쳐들어 올리고 빤히 바라보는
특성이 있어서 붙쳐진 이름이다. 그런데 팀장은 이 사냥개보다도 더 놀랄만한 것을 본 것이다.
“탁중사. 지금 저격가능하냐 ?”
“가능은 합니다만, 장담은 못 합니다.”
대략 2킬로정도 떨어져 있었다. 저격이 용이한 거리는 아니였다.
거기다 제임스왕으로 보이는 자는 기병대에 둘러쌓여 있어서 완벽하게 노출되지 않았다.
“그래. 그럼 그만 철수 한다. 후문에 있는 팀에게도 조용히 철수 하라고 해”
“가자”
팀장은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시간에도 사냥을 떠나는 제임스 일행들이 조금씩 다가왔다.
개들이 묶여 있어서 다행이었다. 팀원들이 팀장의 행동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각자 짐을 챙겨서
자리를 떴다. 짐이라봐야 저격총 한자루에 비상식량이 든 가방하나가 전부였다.
“컹컹컹컹”’
개짓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특임대 대원들은 템즈강 강변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다
보트를 숨겨둔 장소에서 잡아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왜 그러십니까 ?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보내시다니 ?”
탁중사는 아직도 팀장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빈손으로 기지로 귀환해야 했고,
기지에서 기다리는 동료들에게 해줄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탁중사는 못 봤나 ?”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 사냥개요 ?”
“호위병들이 들고 있는 거 ?”
탁중사는 언뜻 호위병들이 뭔가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온통 제임스 머리통에 총알을 날려줄 생각으로 어깨 아래로는 눈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격총에 달려있는 망원경은 넓은 부분을 선명하게 포착할 수 없었다.
“보지 못 했는데요 ?”
모두들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팀장을 제외한 일곱명의 눈동자가 팀장이 다음 말을 하길 기다렸지만
팀장은 끝내 다음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못 봤으면 말고. 해가 지면 서둘러 철수한다.”
해가 서쪽으로 완전히 넘어가자. 고무보트를 강변에 띄우고 하류로 내려갔다.
템즈강 하류는 양안의 거리가 한강 하류만큼 넓어졌다.
잔잔하던 물결이 바닷물과 합쳐지면서 수면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팀장은 왼쪽가슴에 달려있는 전등을 꺼내 들고 바다를 향해 불빛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한참만에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바다에서 응답이 왔다.
“아이고 힘들다. 엔진 켜라. 빨리 좀 가자.”
템즈강 하류를 내려올 때는 가동하지 않았던 엔진을 가동하자 보트가 불빛이 반짝이는 곳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경쾌한 엔진음이 주변에서 찰싹거리는 파도소리에 묻혀갔다.
특임대 팀원들을 실은 425번 잠수함이 어둠을 이용하여 조용히 신항 잠수함기지로 들어왔다.
실상 신항을 기항지로 하는 발틱함대의 주력은 잠수함 전대로 구성되었다.
수상함은 천톤급 포함을 합쳐 겨우 5척이 배속되어 있었고 그나마 항구를 벗어나지도 않았다.
문창성 팀장은 잠수함이 해저에 마련된 기지에서 부상하기만을 기다렸다.
“부상완료. 상부 개방”
문창성이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오자, 팀원들이 외부로 통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기지내에는 1군단 사령부에서 보내온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8명의 대원들이 트럭에 올라타자
트럭이 기지를 빠져나와 군단 사령부로 움직였다.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이 뒤덮혀 고요하기만 했다.
“수고 많았네. 임무는 그렇다 치고 ?”
이번 작전은 1군단 소속 4161 특수여단이 아니라 4군 직속 4600 특수여단에서 총괄하고 있었다.
문창성을 맞이한 4600 특수 여단 작전참모는 전문으로 임무 실패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아주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작전 수행 보고서로 올리겠습니다만,
제임스 호위병들이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지만 대한제국 자동소총을 구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
“그렇습니다. 제가 아무렴 그런 것도 몰라보겠습니까 ?”
“수량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호위병 전원이 대한제국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음을 가정하면
상당한 양이 되지 않을 까 우려됩니다.”
“알았네. 사진기를 들고 갈걸 그랬군… 대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 ?”
“다들 보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 이만 쉬도록 하게. 내일 오전까지 보고서 작성해서 올리게.
내일 아침에 사령관님을 만나뵙고 직접 보고를 올려야겠어”
“알겠습니다. 충성”
문창성의 경례에 4600 여단 작전참모가 가볍게 답례를 했다.
근 이십일만에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있던 문창성은
어떻게 영국에 자동소총이 들어갔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러가지의 가능성이 있었다.
첫째는 누군가 물자를 몰래 빼돌린 것이고,
둘째는 대명부 내란때 발생한 미회수 소총이 흘러 들어갈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럴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대한제국의 소총을 복제할 수도 있었다.
어느 것이 정답이든 영국이 자동소총을 가지고 있다면 앞으로의 전쟁양상도
달라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영국이 가지고 있다면 다른 나라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단기 3956년(1623) 겨울 파리 몽블랑
브르타뉴 촌구석에서 파리에 놀러 온 로리앙백작의 아들인 에드몽은 소문을 듣고 몽블랑 샬롱에
출입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유혹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 몰래 가져온 돈은 오래 전에
탕진해 버렸고, 오늘 벌어진 도박판에 끼기 위해 또 돈을 빌리고 있었다.
“더 이상 나리에게 돈을 빌려줄 수 없습니다. 로링앙 백작께서 지급보증을 해주신다면 또 모르지만
단지 그분의 아들이라는 신분만으로는 더 이상 곤란합니다. 벌써 백파운드가 넘지 않았습니까 ?
한달 이자만 해도 10파운드라는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몽블랑에 기생하며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는 듯한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던
에드몽이 다시 한번 살살 빌었다.
“여보게 세귀르. 나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고 기력이 약해 조만간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실 걸세.
그러면 로리앙지역은 다 나의 영지가 된단 말씀이야. 기껏 100파운드가 문제가 된단 말인가 ?”
세귀르는 에드몽의 말에 반신 반의 하는 듯 하였지만 역시나 믿지 못 하겠는지
고개를 옆으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래도 안되겠습니다요 나리. 그럼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세귀르. 뭘 원하나 ? 자네가 원하는게 뭐야 ?”
뒤에서 고함치는 에드몽을 쳐다 보지도 않고 몽마르뜨 언덕을 내려오던 세귀르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다시 언덕을 올라왔다.
“정 그러시다면, 몽블랑 주인에게 지급보증을 해달라 해주십시오. 그분이라면 믿을 수 있겠습니다.”
에드몽은 세귀르의 말을 듣고 얼굴이 환해졌다. 서둘러 세귀를를 앞세우고 몽블랑으로 들어선
에드몽은 스퀴데리를 찾았다. 몽블랑은 토론하는 사람들, 자신의 시를 읊는 사람들,
술을 마시며 도박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으로 가득찼다.
“오. 나의 사랑하는 스퀴델리양 어디있소 ?”
“누구 스퀴델리양을 보신 분 안 계십니까 ?”
에드몽을 졸졸 따라다니던 세귀르가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느끼하게 스퀴델리를 찾고 있었지만
1층에는 없는 듯 보였다. 2층으로 올라가던 에드몽은 마침 계단을 내려오던 스퀴델리와 마주쳤다.
“오늘도 밤하늘의 빛나는 별빛만큼이나 아름답게 빛나는 눈을 간직하고 계시는 군요.
그대의 얼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조각상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에드몽님께서 오늘 따라 왜 그러실까 ?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신가요 ?”
“제 親舊입니다. 親舊에게 돈을 좀 부탁했더니 스퀴델리양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더군요.
이처럼 아름다운 분께서 가련한 이 몸의 부탁을 거절하지신 않으시겠지요 ?”
“글쎄요?”
스퀴델리는 세귀르를 곁눈질로 힐끝 보고는 에드몽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그녀의 행동은 자연스럽기만 했다.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
“많치도 않습니다. 한 100파운드 정도면 충분합니다.”
“에게 그정도 가지고 되겠어요. 아마도 천파운드는 필요할 것 같은데”
천파운드라는 말에 에드몽은 눈을 크게 떴다. 100파운드만 해도 황금으로 45킬로그램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천파운드면 로리앙 지역을 다 판다 해도 감당 못 할 돈이었다.
그런 돈에 이 귀여운 아가씨가 지급보증을 서줄리 만무했다.
“그렇게나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물론 많으면 좋겠지만....”
여운을 남기는 에드몽의 말에 스퀴델리는 뜻모를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능은 합니다. 확실한 담보만 있다면은 문제 없습니다.
에드몽님은 그럴 만한 담보가 있스십니까 ?”
“담보요 ? 로리앙 영지를 내놓으면 안될까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몇 년안에 제가 상속을 받을 텐데.”
“호호호. 무서운 말씀을 재미있게도 하시네요. 안될 겁니다. 로리앙 백작님이 돌아가시지 않는 한”
스퀴델리는 몸을 옆으로 비틀어 에드몽을 피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
에드몽은 스퀴델리를 붙잡고 다시 한번 사정을 하야만 했다.
스퀴델리는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 생기자 가야금을 치고 있는 마리를 쳐다보았다.
마리는 스퀴델리에게 허락의 의미로 눈을 깜박거렸다.
“좋습니다. 그럼 오백파운드에 기한내에 돈을 갚지 않으면
영지를 넘기는 증서에 서명하시겠습니까 ?”
“오백이면 공시가보다 싼 것 아닙니까 ? 지금 당장 처분해도 칠백파운드는….”
“에드몽님. 그 영지는 에드몽님 소유가 아니지 않습니까 ?
나중에 로리앙 백작님께서 로리앙 영지를 에드몽님에게 상속시키지 않거나
에드몽님 생각처럼 조만간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사신다면 누가 책임지시겠습니까 ?
오백파운드도 너무 위험부담이 큽니다.”
곰곰히 생각하던 에드몽은 스퀴델리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도 오백파운드나 되는 든든한 자본이면 도박판에서 결코 돈을 잃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꼭 판돈이 모잘라 큰 판에 끼지를 못했는데 이제 그럴 염려는 없었다.
“좋습니다. 일단 서명을 하고 돈은 잠시 맡겨놓겠습니다. 제가 필요하다고 할 때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편하실대로 하십시오”
에드몽은 차용증서에 서명을 한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올 거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물론 이 일의 일선에 서있는 스퀴델리 역시 알지 못 하고 있었다.
차용증서가 마리의 손을 거쳐 모쳐로 이동되면 에드몽의 아버지는 수주내로 원인 모를 원인으로
죽음을 맞이할 지도 몰랐다.
“자 여기에 서명하세요”
에드몽은 스퀴델리가 내민 종이 위에 서명을 하기 위해 검정 잉크가 묻어있는 펜촉을 들었다.
악마와 계약하는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4군 4군단 4432보병사단 동계 훈련지
모스크바 남서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이격되어 있는 4432보병사단은 정기 동계 훈련에 돌입했다.
매년 겨울이면 실시되는 혹한기 동계훈련은 최악의 조건에서 각 중대별 생존 능력을 배양하고
전투력 유지에 목적을 두고 실시되었지만 올해는 특별히 스몰렌스크에 있는 폴란드군을 의식한 방어와 공격전술 습득 목적이 추가되었다.
“정지. 라이트 꺼. 운전병 하차”
“암호”
김상태 사령관은 불시에 예하부대 주둔지나 훈련지를 방문하기로 유명했다.
오늘도 김상태는 저녁을 먹고 사령부로 들어가다가 돌연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4432사단 4연대 훈련지를 방문했다. 가깝다고는 하지만 족히 한시간이상이 걸리는 거리였다.
추운 야간 임에도 사병들의 경계 근무가 철저했다.
김상태는 운전병이 내려 경계병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흐믓하게 바라보았다.
잠시후 사병이 운전병과 같이 다가왔다.
“충성.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뭐야 ? 이분이 누군 줄 알고 그러는거야”
옆에 타고 있는 한 참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사병은 노란 별들이 반짝 반짝거리는 실내에 바라보면서 전혀 기죽지 않고 피식 웃었다.
그가 지금까지 지금과 비슷한 경우를 당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였다.
훈련 중에는 별의 별일들이 다 발생했다. 한번은 사단장이라고 속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난리를 친 적이 있었다. 김상태는 아무말 없이 안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금색 봉황이 장식된 장군 신분증을 처음 본 사병이 신기하다는 듯 계속 처다 보았다
.
“적천수 병장. 뭐하나 ? 내 신분증 돌려주게”
명찰을 확인한 김상태가 적척수를 불렀다. 퍼뜻 정신이 든 적천수는 깜짝 놀라며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생전 처음 보는 장군 신분증도 그렇고 별 4개짜리를 지척에서 보기도 처음인 적천수는 잔뜩 긴장하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죄송했습니다. 사령관님.”
“연대장실이 어딘가 ?”
“네 안쪽으로 들어가시다 오른쪽으로 가시면 건물하나가 보입니다. 그곳이 본부 건물입니다.”
“수고하게”
“충성. 계속 근무하겠음”
멀어져가는 승용차 불빛을 응시하던 적천수는 서둘러 본부와 연결되는 전화기를 돌려댔다.
적천수병장의 연락을 받은 당직사관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본부로 들어오는 자동차 불빛을 바라보며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일났네. 야 통신병. 연대장님 어디계신지 당장 알아보고 바로 본부로 돌아오시라고 해
그리고 오분 대기조 출동시켜서 본부 건물을 1급으로 경계한다.”
“무슨 일입니까 ?”
통신병이 소리쳤지만 당직사관은 이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통신병 5분 대기조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예하 모든 부대를 호출해서 연대장을 찾았다.
마음이 급해진 통신병이 고함치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김상태 사령관이 연대본부로 들어왔다.
“참새 나와라. 참새 나와라”
“부대 차렷”
참새를 외치던 통신병은 갑자기 들려온 당직사관의 외침에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와 함께 훈련 상황실을 지키던 장교와 사병들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별모양이 선명한 모자를 쓴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충성”
“충성. 수고가 많다. 연대장은 어디 있나 ?”
연대장을 찾는 김상태의 질문에 당직사관이 통신병을 바라보았지만 통신병역시 꿀먹은 벙어리였다.
긴장된 시간이 흘러갔다.
“당직사관 ?”
“소령. 박진호”
“연대장은 어디 있나 ?”
“그게. 확인이 안되고 있습니다.”
“자네는 당직 수칙을 모르나 ? 그리고 지금은 훈련 중이라고 알고 있는데 ?”
“한시간 전에 3대대장과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전해 왔습니다만,
그 이후로는 소재가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헉”
김상태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지휘봉을 휘들렀다.
박진호 소령의 허벅지를 강타한 지휘봉이 경쾌한 음을 내며 되돌아 왔다.
“연대장과 통신이 한시간이나 두절되었는데 그러고도 자네가 당직사관인가 ?
당직 수칙 3조에 뭐라 되어있나 ?”
“네. 작전시 당직사관은 매 10분마다 부대장의 소재를 파악한다.
20분동안 소재파악이 되지 않을시 전 부대에 비상을 걸고 상급부대의 명령을 받는다.”
다시 한번 지휘봉이 춤을 추었다.
“잘 알고 있는 놈이 이 모양이야 ? 당장 비상을 걸도록”
“네. 알겠습니다.”
통신병이 서둘러 예하부대 전체와 연결된 비상 통신망을 열어 비상을 걸었다.
영내가 환화게 밝혀지고 본부중대 병력들이 휴식을 취하다 완전군장을 꾸려서 밖으로 내달렸다.
본부 중대장이 본부 중대원들의 집합 완료를 보고하기 위해 당직실에 들렀다가
김상태 사령관이 당직실에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충성. 본부 중대원 도합 삼백칠십이명 준비완료 되었습니다.”
“모두 경계초소에 투입시키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박진호 소령은 중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 연대에 비상이 걸리고 나서야, 연대본부와 연대장간의 통신이 연결되었다.
“박진호. 뭐야 ? 무슨 일이 난거야 ?”
“아닙니다. 연대장님과 연결이 안되서 말입니다.”
“뭐야 ? 그런 일로 연대 전체에 비상을 걸었단 말야 ? 너 죽을래 ?”
연대장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모든 것을 묵묵히 듣고 있던 김상태 사령관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박진호 소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해 했다.
사령관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어디십니까 ? 빨리 본부로 들어오십시오 ?
“알았다. 바로 들어갈 테니까. 애들 다시 복귀시키고 비상경계 해재시켜”
“알겠습니다.”
김상태 사령관은 연대장이 들어오자 연대장을 조용히 연대장실로 불렀다.
연대장정도 되는 사람을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혼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령관과 독대를 하고 나온 연대장은 풀이 죽어 있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줄을 알겠지만, 하필 이럴 때 사령관이 부대를 방문했다는 것에 재주없게
걸렸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저녁먹고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두어시간이 흘러버린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김상태 사령관은 훈련을 잠시 중지 시키고 연대장 이하 모든 장교들을 불러모았다.
“여러분 고생이 많습니다. 제가 누차 말씀드렸듯이, 무능한 장교는 자신의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부하들을 고생시킵니다. 지금 이곳은 최전방이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장교가 판단을 잘못 하거나 엉성한 행동을 하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스런 젊은이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명심하십시오. 무능한 사령관은 적보다 무섭다는 것을”
사령관은 연일 계속되는 훈련에 지쳐있는 장교들을 더 이상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
“연대장과 어제 당직사관은 보직을 해임하고 군 사령부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분간 4연대는 선임 대대장이 지휘하게 되겠습니다. 남은 훈련은 예정대로 계속됩니다. 이상”
연대장과 박소령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한 순간의 실수로 장교 군기교육대에 입소하게 되어 버렸다.
군대생활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걸 생각하던 한달간의 정신교육을 받게 된 두 사람은
똥씹은 표정이 되어 갔다.
연병장에 몰려있는 장교들이 길다란 훈시를 받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적천수 병장이 내무반에
들어가가 사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모두들 어제밤 사령관을 검문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어제의 무용담을 듣기위해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적병장은 좋겠다. 휴가가게 생겼네”
한창 무용담이 끝나갈 무렵 조하사가 부러운 눈으로 적병장을 바라보았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
“사령관님께서 적병장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며 ?”
“물론 그랬죠”
“바로 그거야. 사령관에게 이름 불리면 바로 휴가야. 아무나 이름 안 부르거든. 자네 몰랐나 ?
그래서 4군 장병중에는 옛날 이름을 가지고 있던 병사들이 조선식 이름으로 많이 바꿨다고 하더군.
부르기 편하라고”
“그럼 휴가기간은 얼마나 될까요 ?”
“글쎄. 아무리 짧아도 한달은 되지 않겠나 ?”
장병들의 정기 휴가는 한달이 보통이었다.
좀 거리가 멀면 두달도 주어졌지만, 그러면 복무기간 중에 더 이상의 휴가는 없었다.
“한달이나요 ? 그럼 바로 제대할 수도 있겠네요.”
정기 휴가도 아닌 특별휴가는 보통 2-3일이고, 길어야 5일이었다.
전역이 꼭 40일 남은 적병장으로서는 한달의 휴가는 꿈만 같았다.
휴가에서 돌아와서는 곧바로 제대할 수도 있었다.
뜻하지 않은 행운을 잡은 적병장은 주변을 둘러보며 한마디 던지고는 모포를 뒤집어 썼다.
“다들 원칙을 지키라구. 그러면 된다.”
“난 그만 잔다. 깨우지 마라”
적병장은 언젠가 똑 같은 상황에서 검문을 하지 않았다고 군기교육대로 직행한 것을 생각하고는
키득키득 웃어댔다.
단기 3957년(1624) 봄 베를린 부근
엘베강과 오드리강 사이에 있는 평원을 가로질러 베를린으로 향하는 스웨덴 대군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기병 일만에 보병 일만으로 이루어진 대부대를 이끄는 구스타프에게
틸리군의 이동이 보고되었다.
“폐하. 틸리군이 베를린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틸리는 얼마나 된다고 하더냐 ?”
“보병 이만에 기병 일만이라 하옵니다.”
구스타프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것이 없었다.
평원에서 전투를 벌인다면 자신에게 훨씬 유리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번 전투는 우리가 이겼다. 중앙에 보병을 세우고 양 옆으로 기병을 분산 배치한다.
보병 전방에 총병을 8열로 배치하고 중간중간에 장창병과 석궁병을 배치하도록”
구스타프는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이번에 새롭게 편성된 총병 일천명의 활약을 보고 싶었다.
그들을 최일선에 내세워 적 선봉을 깨버리고 좌우익에서 기병을 움직여 적을 섬멸하고자 했다.
중앙이 돌파 당했을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진영이었지만 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빨강색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군마 위에서 구스타프와 일전을 생각하던 틸리는 구스타프 진영에 대한
보고를 받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 진영은 너무도 평범해서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기병으로
중앙을 공격하고 보병으로 뚫어버리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
평범한 진영이었기에 틸리는 고민하고 있었다.
“쉽게 생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 구스타프는 보병으로 우리의 기병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나 봅니다만, 어리석은 생각이지 않습니까 ?”
틸리는 요하네스를 바라보았다. 전혀 생각이라곤 없어보이는 그의 얼굴은 태평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밝아 보였다.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이라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싸움만은 확실히 했다.
“장군은 그렇게 생각하나 ? 편해서 좋군”
“그렇지 않습니까 ? 정 걱정되시면 일단 탐색 전을 펼쳐 보시던가요 ?”
“그거 좋지. 자네가 한번 건들어 보고 오도록 하지. 대충 들어갔다가 나오라고”
“알겠습니다. 도끼자루나 던지는 놈들이 저에게 상대나 되겠습니까 ? 하하하”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진군하던 병사들이 요하네스를 바라보았다.
요하네스의 자신감은 주변으로 확산되어 틸리군 전체로 퍼져나갔다.
요하네스는 손짓으로 부하들에게 신호를 하고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 뒤를 대략 일천기가 따라가자 말발굽소리가 요란했다.
요하네스의 기병대는 중장갑을 두르지 않아서 기동성이 뛰어났다.
멀리서 일천기가 먼지를 일으키며 구스타프 진영으로 다가오자
구스타프는 다급히 전령을 불러 후속명령을 내렸다.
“소수 병력이군. 전방의 총병을 적에게 노출시키지 마라”
그의 명령에 진영 최전방에 섰던 총병들의 자리를 전통 보병들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틸리군 보병진영과는 다르게 유기적인 진영을 만들어낸 구스타프군대는 진영 변환이 자유로웠다.
긴 쇠사슬 끝에 가시나 강철봉이 달린 플레일을 들고 있는 병사부터 시작해서 도끼, 장창, 칼,
터크라고 불리 우는 장갑기병 찌르기 용 검 등 다양한 무기를 소지하고 있던 보병들이 빠르게
달려오는 기병들 앞에서 전진을 멈췄다. 구스타프의 명령만을 기다리던 기병은 언제든지
박차고 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궁 준비”
적 기병이 점차 다가오자 누군가가 외쳤다. 커다란 활이 그려져 있는 깃발을 든 기수가 깃대를
치켜세우자, 대궁을 든 사수 100여명이 일렬로 늘어서 활을 재었다.
화살이 날아올 것을 예견한 요하네스는 안장 왼쪽에 걸려져 있는 방패를 들어오렸다.
오래지 않아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쉬쉬쉬”
재수없게 방패를 늦게 들어 올리거나 화살이 말머리를 맞아 버린 병사들이 말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다시 한번 적의 화살이 날아와 박혔지만 이내 거리를 좁힌 요하네스는 장전된 석궁을 들어 올렸다.
“석궁 준비”
전면을 치고 들어갈 생각이 없던 요하네스는 부대를 적 보병 측면으로 몰았다.
석궁사거리에 들어온 스웨덴 장창병을 겨누던 요하네스가 화살을 날렸다.
일시에 수백개의 석궁 화살이 보병사이로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아악”
요하네스가 날린 화살에 눈이 정확히 가격 당한 병사가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연이어 화살을 날리려던 적 기병을 향해 쇠사슬이 날아왔다. 쇠가시가 달린 쇠사슬이 말 머리를
휘감았다. 빨간 피가 주르르 흘려 내리며 아픔을 참지 못한 말이 앞발을 들었다 쓰러지자
보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장창으로 찔러댔다.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며 기병과 보병이
부딪치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소리들을 평원 가득 채웠다.
보병진영의 옆구리를 공략하던 요하네스는 물러났다 공격하기를 서너 차례 더 했지만 적 진영은
전혀 흩트려지지 않고 굳건하게 싸움에 응했다. 지금까지 요하네스가 상대했던 신교군들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나고 있었다.
“철수”
마침내 요하네스가 말머리를 돌리자 부하들도 전투지를 벗어나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대략 100여기의 희생을 낸 작은 탐색 전은 그렇게 끝나는 듯 했다.
“쉬이이이익”
적 기병대가 등을 보이며 후퇴하자, 힘 좋게 생긴 우람한 체격의 나무꾼이 들고 있던 도끼를 날렸다.
체중을 실어 던진 2킬로그램의 도끼가 회전하며 막 속도를 올리려던 기병의 등에 정확히 박혔다.
“헉”
단발 마를 지르며 떨어진 병사는 한차례 들썩이더니 축 늘어졌다.
요하네스는 뒤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을 뒤로하고 서둘러 본대로 되돌아갔다.
틸리는 요하네스가 돌아오자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래 적 보병들은 무슨 무기를 들고 있던가 ? 대포를 끌고 왔던가 ?”
“화약 냄새는 구경도 못했습니다. 도끼 몇 자루에 화살 몇 개 입니다만, 훈련은 잘 되어 있는
듯 합니다. 농민군으로 구성되었던 과거 신교도 군과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지. 적에게 화포가 없다니 다행이긴 한데”
대한제국과 협약을 맺고 교류를 하고 있는 스웨덴이 화포를 가지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구스타프도 화포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모스크바 4군 사령부
김상태 사령관은 스웨덴군의 전투개시가 임박했다는 소식과 천군부의 명령서를 양손에 들고
절묘한 시간 맞추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종의 합의가 있었나 ? 옛 땅을 되찾겠다는 데 누가 뭐라 할 수는 없겠지”
천군부에서는 폴란드 군이 점령하고 있는 스몰렌스크 일대를 확보하고 폴란드 국경 도시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4군에 내렸다. 스웨덴과 숙적인 폴란드가 구스타프가 스웨덴을 비운 사이 스웨덴을 공격하거나
신성로마제국과 협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천인단에서는 4군중 일부로 하여금 국경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폴란드 군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스몰렌스크는 모스크바에서 대략 500킬로 미터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곳을 점령하는데 4군 전체를
움직일 필요는 없었지만, 폴란드가 위협을 느낄 정도는 군사 작전이 필요할 듯 보였다.
“비서관. 두시간 안으로 참모진 소집해”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상태는 중요한 회의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겨울에 끝났어야 할 일이 아직까지도 매듭을 짖지 못하고 있었다. 두섬 두섬 책상 위를 정리한
김상태는 조금은 바쁜 걸음으로 크레믈린궁 2층에 마련된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민정참모와 천인단에서 파견된 관리들 10여명이 자리를 잡고 고드노프 일행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김상태가 회의실에 들어오고 몇분 후에 고드노프를 선두로 비서관과
주요 행정관료들이 들어와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모두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지난 10년 동안 이원적으로 운영 돼오던 러시아부의
행정을 일원화 시키고 체계적인 지역 개발을 위한 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고드노프 행정관께서 물심양면으로 고생을 많이 하셔서 러시아가 빠르게 안정화
된 것에 대해서는 금강천황폐하를 비롯한 대한제국민을 대표해서 감사 드립니다.
하지만 행정의 이원화로 인해서 러시아부가 거의 개발이 되지 않았다는 점은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이점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해온 대한제국 천인단에서는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러시아부를 위한
사업을 진행시키기 위해 대폭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천인단 행정부 러시아담당 차관인 사마대한의 말이 끝나자 고드노프 일행이 술렁거렸다.
연초에 있는 일상적인 모임으로만 알고 참석했던 러시아 관료들에게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그 첫 단계로 그 동안 행정관님에게 일임 되었던 인사권이 4군 민정담당관에게 위임됩니다.
민정담당관은 러시아부 총리를 겸직하게 됩니다. 아울러 행정단위가 대한제국과 똑 같은 형태로
바뀌게 됩니다. 그간 실사작업을 통해 천인단에서는 러시아부를 크게 10개 “성” 으로 나누고
50개 “도”와 480개의 “시”구역으로 나눕니다.
러시아부에 주둔하고 있는 4군의 인력을 지원 받아 전 러시아부에서 군정을 실시하게 됩니다.
향후 4년안에 군 행정인력은 천인단에서 파견된 인물로 교체하게 되며 향후 15년 안에 시 단위별
자치를 시행할 예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반경 100킬로미터 이내를
교육과 상업도시의 중심으로 개발할 예정입니다. 잠시 그림을 보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마대한은 미리 준비한 그림이 회의실 벽에 걸리자, 세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세르기예프, 블라디미르, 페레슬라블-잘레스키, 야로슬라블 등 볼가강 유역의 대부분의 도시들이
커다란 원으로 이어져 있었다. 걸려있는 그림 맨 꼭대기에는 “황금의 고리 계발 계획도”라고
큼지막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고드노프는 앞으로 닥칠 일이 걱정이 되어 사마대한의 말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서둘러 집무실에서 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회의는 끝날 줄 몰랐다.
자신의 부하들 역시 좌불안석인지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유독 야로뽈끄만이 무언가 열심히 적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윤곽을 확인 하셨으리라 봅니다. 고드노프 행정관님을 비롯한 여기 모이신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내일부로 자리에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체면을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상태는 참모진 회의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오늘 회의를 약간 서둘러 진행시켰다.
그의 직설적인 발언에 고드노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발끈하고 나섰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 우리는 그 동안 대한제국을 위해 온몸을 받쳐 일해 왔습니다.
그 점을 부인하시지는 못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쫓아낼 수 있는 것입니까 ?”
“죄송합니다. 그래 행정관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
“저는 아직도 대한 제국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여기 있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불시에 그만 두라 하심은 너무 하시는 처사 아닙니까 ?”
“그럼 지난 10년처럼 겉으로는 대한제국을 위해서 일하시면서 안으로는 자신의 친척들을 지방관으로
임명하고 권력을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행정관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
아니면 차기 행정관을 지명하겠다는 말씀입니까 ?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 합니다만, 천인단에서 물러나라 하면 물러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행정관의 자리에 있으실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 모르셨습니까 ?
대한제국의 모든 공무원은 임기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
김상태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았다. 고드노프는 권력을 이용해 부를 축적했다는 말에
가슴이 뜨끔해졌다. 이것은 고분 고분하게 물러나지 않으면 그 동안 묵인했던 일을 들쳐내서
몰수할 수도 있다는 협박에 가까웠다.
“다 좋은게 좋은 것 입니다. 고생하셨으니 이제 좀 편히 쉬십시오.
그러면 초대 행정관으로서의 명예도 지키면서 물러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화려하게 물러날 수 있을 때 물러나는 것이 보기에 좋습니다. 안그렇습니까 ? 고드노프 행정관님 ?”
클레믈린에서 한창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 일단의 군병력이 고드노프 저택과 집무실 그리고
고드노프의 정부가 살고 있는 집을 철저히 수색하기 시작했다.
지난 10년 동안 최고 행정관으로 일하면서 저질러놓은 온갖 부정부패들의 증거품을 수집하기 위해
시작된 수색은 그의 일가 전체에 대해서 행해졌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하지만 한가지만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꼭 들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상태는 고드노프가 무슨 부탁을 할 지 짐작이 갔다.
“저희는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만, 물러난 후에 신분을 보장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한제국 특별법에 따라 신분은 보장 될 것입니다. 아울러 지난 10년 동안의 행적은
불문에 붙이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저로서도 어쩔 수 없음을 알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노파심에서 말씀드립니다만, 조용히 일이 매듭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제 말뜻을 아시겠죠 ? 대한제국이 여러분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만간 희망자에게는 다른 일이 주어질 것입니다.”
김상태는 군정이양에 관한 회의를 서둘러 마치고 참모진들이 모여 있는 회의실로 바로 향했다.
조금 쉬고 싶었지만 회의가 길어져서 참모진들이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회의실 의자에 한 숨을 쉬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골치 아프구만. 군인이 할 짓이 아니야 !”
김상태는 앞에 놓여져 있는 포도주 한잔을 마셨다. 포도주를 즐겨 마시는 김상태는
언제나 회의석상에 물이나 과일즙 대신 포도주를 내오게 했다.
발효시킨 지 얼마 되지 않은 달착지근한 포도주를 좋아하는 그는 입안에 단내와 시큼한 맛이 감돌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폴란드 국경지대에 배치된 병력을 걸어봐”
사령관의 말이 떨어지자 4군 영내도가 내려지고 전방에 폴란드 국경지대만 나타난 지도가 걸렸다.
4군단 전체병력의 배치도가 옆에 같이 걸렸다.
“천군부에서 스몰렌스크를 되찾아라는 명령이 내려왔네. 아울러 폴란드 군대를 국경지대에 묶어두라는
명령과 함께. 내 생각으로는 일단 4군단 보병사단과 포병여단을 스몰렌스크로 움직이고 1군단과
3군단에서 기병사단으로 하여금 국경을 공격하도록 하고 싶은데 어떤가 ?”
“4432 보병 사단은 무장이 빈약해서 자칫 피해만 날 수 있지 않을 까 합니다. 그리고 보병사단이
빠지면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대한 전술방어막이 약화됩니다.”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처음으로 있는 전투여서 신경이 제법 쓰였다. 그런 만큼 심사숙고해서
만들어낸 자신의 생각을 정면으로 치고 나오는 작전참모를 바라보았다.
“그럼. 작참 생각은 ?”
“저는 별도의 사단급 부대를 편성해서 스몰렌스크로 보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병연대 한 개에 포병대대 그리고 자동화기로 무장한 보병연대 2개를 4군에서 척출한다면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크라이나 국경선에도 무리가 가지 않고 효과적으로
스몰렌스크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스몰렌스크에 있는 폴란드군은 얼마나 되나 ? 병력이 너무 적은 것 아닌가 ?
그리고 그 정도 병력이면 굳이 군 사령부에서 작전을 입안할 일도 아닌데 ?”
사단병력을 움직이는 일에 4군 수뇌부가 작전을 입안 한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최소 기병 일만입니다만, 작전이 전개되면 민스크에서 증원이 예상됩니다.”
정보참모가 가장 최근에 들어온 정찰 보고를 토대로 만들어진 보고서를 들췄다.
기병 일만이면 별로 장애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작참은 지금 편성되고 있는 5군단을 보내고 싶은건가 ?”
김상태는 작참의 생각을 정확히 집어 나갔다. 점령지를 압도적 화력으로 점령하고 보병 위주로
편성된 5군단 병력을 스몰렌스크에 집어 넣어서 인의 장막을 치고 폴란드군의 집중을
이끌어내고자 한 듯 보였다.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그렇기 위해서는 1군단과 3군단 병력은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
사령관은 작참의 계획이 맘에 들었다. 신설된 5군단을 강병으로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훈련을 아무리 잘해도 실전만한 훈련은 없었다. 앞으로 유럽 진공군이 될 4군은 누가 뭐래도
최정예가 되어야 했다.
“이견이 없으면 그렇게 하도록 하고, 4군단에 부대편성을 마치는 대로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게,
그리고 작참은 5군단의 이동 계획과 4군단 지원 계획을 오늘부터 일별로 만들어서 올리도록.
적 기병이 일만이라면 게릴라 전술에 대한 방비책이 있어야 할 거야.
그런데 왠지 불안하단 말야. 4600여단 일부를 투입하도록 하게”
김상태는 모든 것이 넘쳐 나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4군은 항상 병력이 모자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5/6군단을 합치면 40만이라는 엄청난 숫자였는데 막상 흩트려 놓고 보니 가용병력이 없었다.
정치가 안정화 되지 않으면 군대는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부족하다는 말이 실감나는 현실이었다.
천인단이 러시아부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유럽진공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단기 3957년(1624) 봄 베를린 부근
메마른 대지위에 잡초들이 대지를 뚫고 나와 봄바람에 살랑이며 봄비를 재촉하며 떠다니는
구름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평원에서 대치중이던 틸리군대과 구스타프군대는 몇 차례의
소규모 탐색전을 마치고 대규모 충돌을 준비했다.
작은 구릉을 확보한 구스타프군대는 구릉 뒤쪽에 대포를 숨겨놓고 적이 돌격해 오기만을 기다렸다.
구릉 밑쪽에 진영을 갖춘 보병부대가 꽂아놓은 깃발이 펄럭이며 팽팽한 긴장감에 쌓여있는 전장을
흔들어 놓았다.
“적 기병이 움직입니다.”
전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에서 전방을 응시하던 구스타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틸리는 정석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기병부대를 앞세워 보병의 진영을 흩트려 놓고 뒤따라오는
보병으로 끝장을 내는 전형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대포 발사 준비”
“총병으로 적 기병을 막는다, 기병대 투입 대기하고 좌측으로 우회할 수 있는 적을 경계하라”
전장 좌측에는 작은 숲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그 동안 개간으로 인해 습지와 숲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아직도 숲이 많았다.
“대포 발사”
구스타프의 명령에 언덕 뒤에 준비중이던 청동제 대포가 철환을 날렸다. 철환은 돌진해 오는
틸리 기병대 앞에 휠씬 못 미쳐 떨어졌다. 기병대를 지휘하는 요하네스는 부대의 돌격속도를
좀더 높였다. 구식 대포지만 맞으면 위험했다.
“속도를 높여라. 단숨에 언덕까지 올라간다.”
틸리는 요하네스 진격로 앞에 포탄이 떨어져 내리자, 숲속에 숨겨놓았던 포대를 사용할 지에 대해
잠시 고민에 쌓였다. 만일을 대비해 후퇴 엄호용으로 쓰려는 포대를 노출시키기는 좀 아까웠다.
틸리가 고민하는 사이 요하네스 기병대가 적 보병대 앞으로 빠르게 쇄도해 들어갔다.
“모든렬 발사 준비”
이십 명씩 8열 종대로 구성된 총병 중대장은 중대 앞으로 달려오는 기병대를 바라보며 거리를
가늠했다. 대략 100피트까지 다가오면 순차적 사격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는 사이 후위에 있는
궁수대에서 활을 쏘는지 화살이 머리위로 지나갔다.
“1열 조준. 발사”
“탕탕탕”
일시에 20발의 총탄이 날아가 달려드는 기병대에게 날아갔다.
주위에서도 일제사격이 일어나는지 주변은 총탄소리로 가득 찼다.
“2열 발사”
순차적으로 발사된 총탄은 3열 일제사격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초탄사격은 거리가 멀어서인지
적 말들을 놀라게 하는 효과밖에 기대할 수 없었지만 3열 사격부터는 명중탄이 나오기 시작했다.
“말머리를 겨냥해라. 4열 발사”
“탕탕탕”
연속사격이 계속되는 동안 요하네스의 기병대는 놀란 말이 앞발을 들어버리거나 피탄 되는 바람에
낙마자가 속출했다. 총병을 보호하기위해 대기중이던 석궁병들이 낙마자를 향해 석궁을 날렸다.
어깨에 총탄을 맞아 떨어져 기병의 머리에 정확히 화살이 날아 들었다.
단 일천명의 총병이 적 기병 일만을 효과적으로 저지시키고 있었다.
8열의 총병이 초탄을 다 소모하고 재장전하는 사이 총병 바로 후미에서 대기중이던 보병들이
앞으로 나와 기병대를 맞아 싸움을 이어나갔다.
요하네스는 강력한 총병에 자신의 기병대가 속절없이 죽어나가자 후퇴를 결심하고 뒤를 바라다 보았다.
뒤에서 따라오던 보병들이 뒷걸음치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후퇴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후퇴”
다행이 구스타프는 기병대를 내보내지 않고 있었지만, 대열이 무너지면 언제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지 몰랐다. 요하네스 기병대는 정예병답게 신속하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우측 숲쪽으로
움직이며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다시금 포탄이 날아왔지만 포탄은 기병대의 후퇴경로를
잘못 예측한 듯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뤼베크는 후퇴하는 적을 추격해서 섬멸해버리고 바로 베를린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구스타프는 돌격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황제폐하. 기병을 내보내심이”
“아직은 적의 대열이 흩트려지지 않아서 곤란하오. 더군다나 저 놈들은 우수한 대포를 보유하고
있을 게 틀림없으니까. 파펜하임이라면 분명히 다시 돌격을 시도할 것이고, 그때 몰아치면 되겠지.
우선 진영을 바꿔야겠어.”
구스타프는 대한제국과 대평원에서 있었던 전투상황을 빌 헬름경에게 전해 듣고는 전장에서의
보병전투술에 변화를 기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보병진영은 기병대와 맞서 싸우기에
가장 적합했다고 판단한 그는 자신의 군대에 맞는 좀더 효과적인 진영을 만들어 냈다.
“화승총병을 전방에, 그 뒤에 머스킷 총병, 그 뒤에 야포를 배치한다.”
유기적인 보병의 요새라고 자칭한 T자형 보병 진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일자형 방어선에
중앙에 길게 예비대를 배치하여 어느쪽이 무너지더라도 바로 진영을 복구할 수 있는 당시에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보병 진영이 만들어졌다.
“내가 왜 처음에 적기병을 상대로 활과 도끼로만 상대했는 지 알겠나 ?”
구스타프는 토르스덴손을 바라보며 질문을 했다. 토르스덴손은 25문의 스웨덴 장인의 역작
“야포”를 책임진 포대장으로 이번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틸리 사령관을 안심시키고, 우리를 얕보게 하기 위해서 였지 않았습니까 ?”
“그래. 그럼 이번에 기병를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의 대포때문이 아닌지….”
“그렇네. 우리는 숫자나 질에서 적에게 부족하지.”
토르스덴손은 구스타프가 불과 2만명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군과 싸운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스타프는 확실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하게 반대하던
토르덴손이 그를 따라 나선 것은 구스타프의 말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자네 말이 맞지. 하지만 황제군은 지킬 도시가 너무 많아. 결국은 단 한번의 결정적인 싸움에서
이기면 되는 거야. 지금은 작센이나 신교 제후들이 황제군이 무서워 우리에게 적극 협력하지 않지만,
한바탕 난리를 치루고 우리가 승리하면 그들도 나서게 될 거야.”
출병전 구스타프가 그에게 한 말이었다.
틸리의 보병은 정방형 집단 진영으로 그 당시에는 전 유럽에서 행해지던 전형적인 보병 진영이었다.
이 진영은 적이 강력한 화포를 가지고 있으면 몇 번의 일제 포격으로 무너져 버리는 취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구스타프는 강력한 대포를 구비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스웨덴 놈들이 신식 총을 다량으로 가지고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제 부하들이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천여명이나 당했습니다.”
요하네스는 요행이 스쳐지나간 총탄에 허벅지에 천을 돌돌 말고 있었다.
아직도 화끈거렸지만 자신의 부하가 당했다는 사실이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군대를 뒤로 물려야 겠다. 지금 여기서 전투를 벌였다간 피해가 막심하겠어”
기병과 보병의 충돌을 멀리서 지켜보던 틸리는 노장답게 이번 싸움은 승산이 없음을 직감했다.
구스타프는 기병대를 움직이지도 않고 순수 보병으로만 요하네스 기병을 막아냈다.
하지만 틸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파펜하임 부사령관은 이곳에서 끝장을 내고 싶어했다.
그는 자신의 보병사단을 투입하다가 뒤로 물린 사령관의 결정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사령관님. 그건 안됩니다. 여기서 물러나면 세상의 웃음거리만 됩니다.
우리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휼륭한 포대가 있습니다.”
윌리엄 레베트 신부가 애시다운모리스트에서 철제포를 개발한 이래, 신성로마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철제포를 영국과 프랑스등 다른 나라에 수출해 왔었다.
대포를 만드는 공장을 가진 나라는 신성로마제국과 스웨덴이 전부였다.
신성로마제국의 대포가 스웨덴제보다 더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우크부르그에 있는 베크 공장과 뉘른베르그에 있는 자틀러 공장에서는 한때 철재포의 수출이
금지되면서 제작이 중단되었던 철제포가 지금 대량으로 제작되고 있었다.
포탄을 몇 발 쏘면 포신이나 포가가 금이 가고 깨져버린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청동포보다 몇배는 값이 싸고 만들기 쉬운 철포는 개량을 거듭하면서 점점 발전해 나갔다.
그런 최신식 대포가 틸리군에게는 45문이나 배치되어 있었고, 지금 숲속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화승총가지고 스웨덴이 가지고 있는 신식 총을 상대하겠단 말인가 ?”
“좀더 안으로 끌어들여서 보급로와 통신로를 교란시키면 적은 물러나게 되있어.
그러니 잠시 뒤로 물러나는 게 좋아”
요하네스와 틸리는 진영을 뒤로 무르고 싶어했지만 파펜하임은 자신의 주장을 무르지 않았다.
황제군은 틸리의 명령을 받고 있었지만 그 구성원들은 각기 다른 영주의 용병이나 가병들로 구성된
경우도 많아 파펜하임처럼 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하면 통일적인 명령계통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베를린을 포기하자는 말씀입니까 ? 페르디난트 황제께서도 그걸 용인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사령관님께서 정 물러나시겠다면 저라도 남아서 싸우겠습니다.
적이 신식총이 있다면 우린 신식 야포가 있습니다.”
그가 말한 신식 야포는 모토르라고 불리는 박격포개념의 고각사격이 가능한 포를 말했다.
포이가 있어서 모토르는 포의 상하운동이 가능했다.
파펜하임이 황제이름까지 거명하며 반대하고 나서자 틸리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좋소. 조만간 다시 공격하겠소. 하지만 부사령관은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마시오.
특히 경이 가지고 있는 기병대는 항상 보병 측면에 있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파펜하임은 여차하면 단독행동을 할 생각도 있었다.
황제의 신임이 두터운 틸리였지만 그 역시 세월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너무 늙었어. 단 한번의 전투에서 겁을 먹다니’
파펜하임이 반백의 틸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회의를 마치고 자신의 부대로 돌아가는
파펜하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요하네스가 말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폴란드 바르샤바.
구스타프가 발틱해를 넘어 내륙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에 앙갚음을 해 주고 싶었던 지그문트는
스몰렌스크에서 온 급전으로 인해 스웨덴 침공을 접어야 했다.
“마침내 우려하던 대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체르비츠키의 말에 지그문트가 주먹으로 벽을 탕탕쳤다.
“나쁜 놈들. 우리가 한번 떠보겠다는 건가 ?”
시간상으로 봐서는 지금쯤 대한제국 군대가 스몰렌스크를 공격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적들의 후속 부대가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도 족히 십만이상이 국경지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움직인 부대는 전초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우리의 대응을 봐가면서 추가 투입할 것입니다.”
“민스크영주에게는 스몰렌스크를 구원하라고 하게. 서둘러 가세.”
영주회의를 거치지 않은 그의 명령이 민스크 영주인 시메온에게 먹혀 들지는 지금으로서는 미지수였다.
이미 폴란드의 정예병들이 스웨덴을 치기위해 발틱해 리가항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지방 영주들이
동원할 병력이라고는 농민들 밖에 없었다. 대한제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스웨덴 원정군을
스몰렌스크로 움직여야만 했다.
“이번 기회에 원정군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도록 해야겠는데.
이번에도 내 말이 먹히지 않는 지 두고봐야겠어”
위기속에서 자신의 권한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던 지그문트는
회의실 문 앞에 서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그문트 아우구스트 폴란드 왕이십니다.”
문이 열리자 대한제국의 침략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던 각 지방 영주들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지그문트 3세가 자신의 의자에 않고 옆에 스체르비츠키가 서자 영주들이 자신들의 의자에 앉았다.
“우리의 강력한 거부의사에도 불구하고 야만적이고 살인을 거리낌없이 하는 이교도의 군대가
스몰렌스크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은 다들 들어서 알고 있을 것 입니다. 일단 민스크 시메온 영주에게
병력을 소집해서 스몰렌스크를 구원하라고 하였지만, 이미 베르나르딘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나, 지그문트 아우그수트는 폴란드 왕국을 수호하는 성스러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지금 리가항으로 움직이고 있는 스웨덴 원정군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을 나에게 일임해 주길 바랍니다.”
“대한제국군대 20십만이 국경을 넘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지금과 같은 시국에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영주님들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 구스타프는 크라쿠프를 약탈하고
돌아갔지만 대한제국 군대는 전쟁에서 지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스체르비츠키 재상이 옆에서 지그문트를 거들고 나섰다. 영주들이 사태를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을 지 몰랐지만 충분히 겁을 먹을 만큼은 과장을 해야 했다. 그의 말에 지방영주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자칫 자신의 영지를 빼앗기면 자신들의 가문은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재상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요 ? 내가 영지를 떠나 올 때만 해도 겨우 일만명이
칼루가를 떠났다고 하던데. 그새 이십만으로 불어났단 말입니까 ? 상황을 너무 이상하게
몰고 가는 것 같습니다. 재상.”
“빌뉴스 영주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알기로도 그렇습니다. 이십만이라는 말은 터무니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폴란드의 영토가 위협 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들의
왕께서 요구하는 권한을 승인할 것에 동의 합니다.”
고멜영주가 빌뉴스 영주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지그문트의 요구에는 반대하지 않고 나섰다.
왕권의 강화를 우려한 영주파와 왕당파간의 갑을박론이 바르샤바에서 일어나고 있을 무렵,
윤방식 소장이 이끄는 군대가 스몰렌스크를 공격하기위해 움직였다.
총병력 일만천오백여명으로 구성된 진공군은 4군단에서 기병연대 하나와 보병연대 두개 거기에
천포 50문으로 무장한 포병대대와 4600 4군 특수여단 병력이 봉황대대의 엄호를 받으며
칼루가에서 서진을 시작한지 꼬박 10일만에 스몰렌스크 부근까지 진출하여 도시 공격을 준비했다.
“대한제국군이 30마일까지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
베르나르딘은 대한제국 군대가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자 주변에 흩어져 있던 기병대를
끌어 모아 집결시켜 놓았지만 겨우 기병, 보병을 다 합쳐 팔천이었다. 당초에 이곳에 배치된
일만명중 이천명은 우크라이나에서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나자 지원을 나가 있는 상태였다.
기병대를 이끌고 있는 바르가 나가서 싸울지 말지를 물어왔다.
“진퇴 양난 이구만, 어떻게든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면 될 것 같은데”
대략 한달 정도만 끌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었다. 시기가 적절하게도 폴란드에는 스웨덴 원정군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들이 이곳에 오면 승산을 따져 보면서 모스크바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한달을 자신이 버틸 수 있을 지는 의문이었다.
“자네 기병대를 카틴 숲으로 이동시키게. 적 측면이 노출되면 한번 공격해보고 바로 돌아오게.
일단은 농성전을 펼쳐야겠어. 여길 손쉽게 내 줄 수는 없으니까 ?”
베르나르딘은 대한제국이 가지고 있는 야포의 성능에 대해 귀가 따갑도록 들어와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농성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적의 숫자가 스몰렌스크를 완전히 포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정 버티기 힘들면 그때 병력을 집중해서 포위망을 뚫고 민스크로 물러나면 그만이었다.
“사령관님 하늘에 뭔가가 떠있습니다.”
베르나르딘과 바르가 앞으로 전개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경비병이 뛰어들어왔다.
“북쪽에서 이쪽으로 다가옵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간 베르나르딘은 경비병이 손짓하고 있는 곳으로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커다란 물체 두개가 구름 속으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면서 스몰렌스크로 점점 다가왔다.
“화승총병을 불러라. 왕궁을 준비하라”
소문으로만 들었던 비행선을 목격한 베르나르딘은 서둘러 궁수를 찾았다. 대한제국이 가지고 있다는
비행선에 대응하기 위해 베르나르딘이 가지고 있는 왕궁은 석포개념의 거대한 활이었다.
일마일은 거뜬히 날아가는 창보다 약간 큰 화살에 한방 맞으면 봉황이라고 불리우는 대한 제국의
비행선도 떨어뜨릴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진격로 고공 정찰을 하던 봉황편대가 스몰렌스크에 다다르자 점점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좀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원하는 윤방식 소장의 성화에 봉황편대는 안전고도를 무시한 체
고도 500미터 이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건 뭐야 ? 헉 ”
망원경으로 열심히 아래를 살펴보던 관측장교가 자신을 겨누고 있는 거대한 활을 보고
헛바람 소리를 냈다.
“상승해. 안돼”
관측장교의 외침에 어리둥절하던 조종사가 지금껏 한번도 당하지 않은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뾰족한 창이 외벽를 뚫고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응급 복구. 응급복구.”
이럴 때를 대비해서 비행선 안에는 구멍 난 부분을 임시로 막는 물품들이 있었지만 모두들 우왕좌왕
했다. 그러는 사이에 외피에 난 구멍을 통해 헬륨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빨리 이탈하지 않고 뭐해 ?”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조종사가 후미 엔진을 최고로 가동하고는 스몰렌스크에서 멀어져 갔다.
무색의 가스에 첨가된 노란색 첨가물이 내는 악취가 봉황 내부를 가득 채웠다.
“쏴”
다시 한번 다섯 개의 창화살이 각각의 봉황을 노리고 허공을 갈랐지만 재 장전하는 사이
봉황이 노란 연기를 내면서 사거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아쉽군. 두어 번 더 맞았으면 떨어질 수 있었는데.”
왼쪽에 두개의 창을 꽂은 체 북쪽으로 올라가는 비행선을 바라보며 포대장이 뇌까렸다.
노란 연기를 내뿜으며 떠가던 비행선 왼쪽이 심하게 일그러지면서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모습으로 북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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