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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 '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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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아프다. 해마다 봄이 되면 마음이 아프다. 특히 바라보기만 해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라는 김소월의 시가 떠오르는 연분홍빛 진달래가 마구 피어나는 이맘 때면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서 뚝뚝 떨어지던 그 유리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자꾸만 눈에 밟혀 마음이 더욱 아프다.
왜 그랬던가. 그땐 너무나 철이 없었던가. 그래. 살아 생전 내 어머니께서는 늘 우리 형제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신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면 나중에 두고 두고 후회한다고. 아니, 그 사람의 눈물이 마침내 자신의 가슴에 피멍으로 박히게 된다고.
하긴 그때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벌로 들었다. 근데 나이 사십대 중반을 훌쩍 넘기고 보니, 그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그래. 해마다 이맘 때 마음이 자꾸만 저려오는 것은 한때 나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그 사람의 까만 눈동자에 이슬 방울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든 그 탓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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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 입구에 세워진 팻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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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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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 연지 속에는 모두 5개의 섬이 나뭇잎배처럼 떠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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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이처럼 마음이 자꾸만 저려오는 날은 모든 걸 훌훌 팽개치고 창녕 영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자. 그리고 보리가 시퍼렇게 자라는 들판을 바라보며 지난 시절의 아름답고도 슬픈 추억을 더듬다가 문득 그 사람의 얼굴이 못 견디게 보고 싶으면 눈물 방울 한 점 툭 떨구어 보자. 그때 떨구는 눈물빛은 어떤 색깔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가만가만 헤아려 보자.
지난 4월 초, 내 어머니의 고향 창녕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 친 "연지"는 그때 그녀가 말없이 돌아서던 내 등을 바라보며 뚝뚝 떨구던 유리구슬 같은 눈물빛이었다. 아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진달래가 피어나는 때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앓이를 하면서 속으로 흘린 내 눈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첫 눈에 바라보아도 시골내음이 풀풀 풍겨나는 영산시외버스터미널. 그래. 어쩌면 지금 나 자신의 모습도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는 저 남루한 터미널처럼 초라하고 쓸쓸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초라한 터미널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정이 철철 넘치는 눈빛을 주고 받으며 어디론가 바삐 오가고 있다.
아름답다. 그래, 바로 저런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그동안 나는 나의 참모습을 꼭꼭 숨긴 채 살아왔다. 나의 참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 보이기가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늘 나가 아닌 다른 나가 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또 주변 사람들은 가식의 나를 참 나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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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 위에 떠 있는 섬들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신선이 따로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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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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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그림자, 섬 그림자 그리고 나의 그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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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저어기 아저씨!" "절 부르셨습니까?" "그래예." "아니 왜요?" "이거 좀 사 가이소. 금방 우리집 하우스에서 따 낸 싱싱한 딸기라예." "???" "한 소쿠리에 3천원입니더. 공짜나 마찬가지지예." "나중에…."
인심이 좋아 보이는 딸기 아주머니의 간절한 눈빛을 뒤로 하고 빠른 걸음으로 "연지"로 향했다. 근데 "나중에" 라니? 연지를 보고 난 뒤에 돌아와 저 아주머니가 팔고 있는 딸기를 사기라도 하겠다는 그 말인가. 그래. 어쩌면 저 아주머니는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을 믿고 진종일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조심을 해야 한다. 그동안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던가. 누군가 그랬다. 말이란 것은 내가 무심코 풀숲에 던지는 작은 돌멩이 하나와 같은 거라고. 그리고 그 돌멩이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까닭도 없이 맞아 죽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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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의 수양버들도 파릇한 잎사귀를 내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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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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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이 아름다운 연못을 사람이 만들었다고 믿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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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그렇게 스스로 채찍질하며 영산로터리 근처에 도착하자 로터리 옆에 제법 널찍한 연못 하나가 잔주름을 굴리고 있다. 그래. 이 연못이 바로 영산의 화산맥을 막아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인공으로 만들었다는 '연지'다. 그러니까 불(火)의 상극인 물(水)을 이곳에 가둠으로써 불의 거센 기운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자그마한 섬 5개가 물방개처럼 떠돌고 있는 연지에는 풍수지리학에 따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당시 이 고장 사람들은 영취산의 정기를 받은 불의 상징인 남산을 좌청룡이라 여기고, 남산의 정기(불)가 낙동강 쪽으로 흘러들게 하기 위해 이 연못을 팠다고 한다. 그리고 못 속에는 용의 알을 닮은 5개의 섬을 만들어 청룡의 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리게 했단다.
그래. 그래서 수면 면적 25.848㎡ 인 자그마한 이 연못에 공룡알처럼 생긴 섬 5개가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배'처럼 떠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근데 왜 하필이면 섬이 5개일까. 아마도 이 5개의 섬은 주역의 오행, 다시 말해 목(木, 봄), 화(火, 여름), 토(土, 환절기), 금(金, 가을), 수(水, 겨울)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연지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섬에는 '항미정'이라는 정자가 오도카니 서 있다. 마치 이 호수의 북쪽을 든든하게 지키는 태음신(太陰神) 현무처럼 말이다. 항미정은 요즈음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 고장에서 힘깨나 쓰던 양반네들이 이곳에 앉아 술잔을 꽤나 주고 받았음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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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 섬에 오두마니 서 있는 항미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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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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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아픈 날에는 연지에 서서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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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마악 초록물이 든 버드나무 가지가 휘영청 드리워진 연지. 연지는 조선시대 때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 영산 현감 신관조가 이 연못을 대폭 중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전해진다.
5개의 섬, 아니 잔잔한 연못 위에 오래 묵은 추억처럼 비친 섬 그림자까지 합치면 연지에는 모두 10개의 섬이 떠돌고 있다. 만약 항미정에 앉아 사랑하는 그대의 깊숙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진달래꽃으로 담근 연분홍빛 술잔이라도 주고 받을 수 있다면 연지에 빠진 10개의 섬은 모두 30개가 되어 출렁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