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이 아닌 인성을 강조하는 책.
기독교 사상이라는 온실 속 화초로 길러진 나는 동양의 철학과 사상보다는 서양의 철학과 사상이 익숙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사는 땅은 동양의 한반도이기에 알게 모르게 어떨 때에는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바로 동양 사상일 것이다.
그런 동양 사상의 대표인 유교사상의 책 논어는 나에게 있어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아는 것은 ‘공자왈’이라는 3글자일 뿐, 어려운 한문으로 꽉꽉 채워진 동양 사상의 글은 익숙하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다. 또 전에 논어를 읽었을 때도 별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들지 못하고 그저 ‘시시하고 밍밍한 물맛 책’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었다. 지나가는 말로 ‘논어 속 공자의 사상이 성경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말로 그 당시 예수와 공자를 비교하며 에세이를 썼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결론은 논어에게 있어서 부정적이었다.
“공자의 총총 걸음과 예수의 죽음은 적용의 차이가 있다.”
그렇게 핀 논어는 당연하게도 내가 전에 읽었던 논어였다. 시시하고 밍밍한 물맛 책이었다. 학이편의 시작은 놀랍도록 논어의 대한 나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배움, 벗, 즐거움, 군자. 그 다음 1.2에서는 인, 효도의 등장이 있고 잇따라 나라와 조상에 대한 마음이 나온다.
배움을 즐거워하며, 윗사람을 범하기(하극상)를 좋아하지 말고, 벗을 잘 사귀고, 효도하고, 반성하고, 조상을 올곧은 마음, 진실되고 충심 있는 마음으로 추모하는 자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인(仁)하며, 예(禮)하고 이것은 군자의 길로 가는 첫걸음이다.
물론 전에 읽었던 논어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새롭게 막 읽기 시작한 시점이지만 내가 본 논어는 사람들에게 군자의 길을 걷는 법과 소인이 되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것 같다. 사람의 이상향을 군자라는 단어로 기록하고 그 이상으로 발전하는 법을 말한다. 그러면서 논어는 은연중에 사람의 이상형을 군자로 인식하게 하고 동시에 사람은 군자 곧 이상이 될 수 있다 말한다. 이런 부분에서 나는 논어가 계몽주의와 비슷하다 생각하였다. 계몽주의는 사람의 이성이 계속된 발전을 통해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논어는 사람의 인성의 계속된 발전으로 군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이상의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는 부분에서 겹쳐 보였다. 하지만 이 둘이 분명히 다른 부분은 이성과 덕성의 차이이다. 논어는 인간 자신의 힘으로 이상의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성경과 다르고 계몽주의와 흡사하다. 하지만 이성이 아닌 인성을 강조한다는 부분에서 계몽주의와 다르고 성경과 흡사하다. 그리고 덕성을 강조한다는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논어를 찾는다.
논어는 그 처음 등장부터 이성의 발전을 강조한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하지만 그 뒤에는 감정의 영역을 소개한다.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 이성의 발전을 강조하는 이유는 감정과 연결된다. 이성의 발전이 우리를 이상으로 이끌기 때문이 아닌, 기쁘기 때문에 배우고 익힌다. 그 다음은 벗을 소개한다.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하지만 벗을 강조하는 이유 또한 즐거움에서 온다. 논어에서 처음 말하는 배움과 벗의 이유는 “나의 감정”이다. 나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 아닌가?” 이런 감정의 조절 혹은 어떤 상황에서 감정을 느끼고 느끼지 않는 것이 논어가 말하는 이상 군자로 이어진다. 논어는 이성을 강조하지만 그 이유는 감정이고 그 감정은 개인의 감정이다.
여기서 싱거운 물의 맛이 변한다. 논어는 효도, 조상의 대한 예의, 웃어른에 대한 공경으로 기본적으로 유교사상을 떠오르면 나오는 윗사람을 위한 책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내가 이 삶에서 좋은 즐거운 감정을 느끼고 군자로 거듭나기 위한 개인적인 책인 것이다.
하지만 논어가 감정을 군자의 길로 연결 짓지 않는다. 책 바로 뒷부분 1.2에서 이성, 이성으로 얻는 감정이 아닌 군자로 거듭나기 위해 우리가 가꾸어야 할 부분을 언급한다. “군자는 근본에 힘쓰며 근본이 서면 도가 생겨난다. 효도와 우애란 아마도 인을 행하는 근본일 것인저!” 군자는 감정이 아닌 근본에 힘을 쓴다. 그후 유자(공자의 제자)는 효도와 우애를 근본이라 말한다. 역시 논어다. 감정 뒤에 논어가 소개하는 것은 효도와 우애다. 바로 인간의 덕성, 바로 인(人)성이다. 논어는 개인적인 감정과 인(人)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절재하고 인(人)성을 가꾼 사람은 군자로 거듭난다.
여기서 밍밍한 물의 맛이 변한다. 효도와 우애는 무엇에 근본인가? “인(仁)”의 근본이다. 군자가 힘쓰는 근본. 그 근본은 어디로 가는가? 바로 인(仁)이다. 효도, 우애, 이성으로 얻는 감정, 조상을 추모하는 것. 이것들은 근본이다. 군자로 거듭나기 위해 갖추어야할 근본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로 군자로 거듭나지는 못한다. 인(人)성과 감정의 절제는 인(仁)을 가꾸기 위한 기반이다. 논어, 공자는 군자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감정의 절제도 인(人)성도 아닌 인(仁)성이라 말한다. 이 인(仁)성은 무엇인가? 학이 주석 10번에 나온다. “공자는 이 개념을 ‘사람을 사랑하는 것’ 혹은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대하는 것’ 이라는 뜻으로 썼다. 사람은 인(人)성이 아닌 인(仁)성으로 군자가 된다.
자 이제 싱겁고 밍밍한 물의 맛은 깊이 우러난 육수의 맛으로 변한다. 이제는 이 육수가 무엇으로 우러나는지가 궁금해진다. 돼지 뼈일까? 소의 뼈일까? 인(仁)은 정확히 무엇이며, 논어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이 인(仁)으로 과연 인간은 군자가 될 수 있을까? 천천히 마셔보자 이 깊은 육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