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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과 목 : 서양중세철학
담당교수 : 김요한 교수님
제 출 자 : 영어영문학과 2학년 한동윤
1. p.119 로마가 패망한 유일한 원인이 패망하고 말 신들을 수호자로 받든 탓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인간과 흡사하지만 단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숭배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은 이성과 인간의 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로마의 신들과 하느님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로마 신들과 하느님이 다르다고 한 이유는 하느님은 절대 선을 추구하였고, 로마 신들은 인간의 ‘물질’이 섞인 절대 악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마인들은 로마 신을 섬겼는데, 만약 로마 신들이 하느님과 같은 존재였다면 어째서 그들은 로마가 패망하도록 내버려두었을까? 이 점을 생각하면 로마인들은 능력 없는 신을 믿었거나 존재하지 않는 신들을 우상숭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도출이 나올 수밖에 없다.
2. p.119 그리스도에게 봉헌된 장소에서는 무서워서 혀를 삼가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았고 그리스도 덕분에 적병들에게 상해입지 않고 살아남은 까닭이, 마치 그곳에서 나오기만 하면 그리스도에게 적의에 찬 악담을 마구 퍼붓겠다고 살아남은 셈이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교회와 성당에서 로마인들이 공격을 받을 때 그들을 자신들이 섬기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나중에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로마가 패망한 이유로 삼았다. 그러면서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이게 가당한 일인가? 그들이 교회에서 겪은 그 은혜를 알고 자신들이 섬기던 신들을 원망하거나 그리스도를 따르기는커녕 자신들을 지켜주지도 못한 신들을 다시 숭배하고 있으니 정말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생각 된다.
3. p123 굴복하는 자들은 용서하고 오만한 자들은 징벌한다.
-바로 뒷문장에 로마인들은 불의를 당할지라도 복수하는 것보다 용서하기를 더 좋아했노라 했는데,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그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죽인 사람들은 모두가 오만하다는 것인가? 굴복하는 자는 살려주고 저항하는 자들을 죽인다는 말 자체가 얼마나 주관적인 해석인가. 굴복하는 자들도 언젠가는 저항하는 자가 될 수 있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신들은 대체적으로 불의를 당했거나 속임수를 당했을 때 용서하기 보다는 인간이나 요정이나 다른 신들을 벌하는데 바빴다. 그런 신들을 섬기는 로마인들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일 수밖에 없다. 불의를 당하고도 용서를 해준 사람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일 것이다.
4. p125 그(마르켈루스)가 적의 도성을 두고 표한 애도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패자들의 수치심을 존중해 주라는 군령에 대해서도 기록이 남아있다면 그가 만일 신전에 피신한 사람을 살려두라는 조처를 내렸을 경우 절대로 간과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켈루스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도시의 자유민을 해치지 말라고 했을 뿐, 신전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으니 완전한 군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분명히 사령관인 그는 신전을 들렀을 텐데, 그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신전의 어떤 값진 것들을 보고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에 마르켈루스가 그 때 신전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는 말이 달라진다. 그렇게 되면 그는 죄가 없지만,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시대에 전쟁이 나면 신전을 침공하는 것이 가장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그 때 그가 부하들에게 신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5. p125 다만 새로운 양상으로 일어난 일 한 가지를 든다면 야만적 소행이 참으로 완화되어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로마가 침공을 받았을 때 신전은 쳐들어가고 대성당에는 쳐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로마인들도 살기 위해 대성당으로 몰렸을 테고 그 덕에 산 꼴이 되는데, 나중에 그들은 자기들을 지켜주지도 못한 신을 다시 섬기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역겨운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룰 것은 신전은 침공하고 대성당은 침공하지 않은 것이 과연 야만적인 소행이 완화된 행실인지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철저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대성당에 있는 사람들을 침범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야만적인 소행이 완화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대성당을 침범했다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소행을 야만적으로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는 신국론에 나타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의견이 다소 주관적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6. p129 그 대신 잠시적 선과 잠시적 악은 양자에게 공통으로 있기를 바랐으니 이것은 악인들도 누리고 있음을 보고서 선인들이 잠시적 선을 너무 욕심스럽게 탐하지 않기 위함이고, 또 선인들도 흔히 겪고 있는 것임을 보고서 그 잠시적 악을 비굴하게까지 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악이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이다. 신이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빛을 주신 것은 악인으로 하여금 그 빛을 통해 신에게 회귀하려는 목적이 있으며 선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믿음을 지속시키려 함이며, 악이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주어진 이유는 선인으로 하여금 인내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높이 쌓고 악인으로 하여금은 그 악이 혐오스러운 것임을 느끼게 해주려 함이기 때문이다. 만약 선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만이 돌아가고 악한 자에게는 악한 것만이 돌아간다면 선인에게 악이 침범했을 때 그 선인은 악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7. p131 만일 지금 모든 죄를 드러난 벌로 처벌한다면 최후심판에서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나올 법하며, 또 만일 신성이 지금 아무 죄도 공공연히 징벌하지 않고 둔다면 신적 섭리라는 것은 도무지 없다고 믿을 만한 까닭이다.
-이 생각에 동의한다. 신이 인간이 죄를 짓는 즉시즉시 처벌을 한다면 천국에 가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현세가 곧 지옥 또는 천국이 될 것이며 그러면 최후의 심판은 전혀 필요가 없게 된다. 반면에 지금 지은 죄를 징벌하지 않고 둔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 뻔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을 같은 비율로 나누어주시어 인간이 불행을 통해 선과 인내를 배우고 행복을 통해 하느님의 너그러움을 배우도록 한 것이다.
8. p 131 당하는 수난이 비슷하다지만 당하는 수난자의 차이는 여전히 남느니, 동일한 환난 밑에서도 덕성과 악덕은 동일하지 않은 까닭이다.
-같은 불이라도 그 불에 어떤 물질이 닿는지에 따라 불이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다르다. 기름이 불에 닿으면 불은 더욱 솟구치지만 물이 닿으면 불은 사그라든다. 이렇게 보면 덕성과 악덕이 같은 수난에 처한다고 해도 그들이 환난에 반응한 결과가 다르기 때문에,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한다.
9. p131 그러니까 무엇을 겪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누가 어떤 인간으로서 겪느냐가 무척 중요하다.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수난과 환난을 겪더라도 긍정적인 사람은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반면 악인은 신을 욕하기에 바쁘다. 세상을 살다보면 환난과 수난이라고 해도 인간이 보기에는 사람마다 불평등한 환난이 주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와 나의 친구가 빚으로 인해 각자의 집을 잃었는데 친구는 로또에 당첨되어 다시 빚을 갚고 다시 집을 되찾을 때 나는 겨우 월세 살이를 하고 있을 때 신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신이 사람의 인내심과 태도를 시험하시고 강화시키려 하는 것일 뿐, 인간이 계속 현세적으로 생각하는 한 그 인간이 내세에서 겪을 고통은 커질 뿐이다. 그러한 불공평함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10. p133 우리는 자주 그들(잘못을 저지르는 이들)을 가르치고 충고하고 때로는 그들을 꾸짖고 욕해야 할 터인데도 비겁하게도 이를 못 본 체한다.
- 인간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은 부족한 면이 있기 마련이고 자신에 대해 부족한 면을 느끼기 마련이다. 예수가 말했듯이 “너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구절에서는 “내 몸”이 우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몸이라는 말은 육체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행실까지도 아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자신도 제대로 행실을 하지 못하고 챙기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 어떻게 다른 사람을 훈계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가르치고 충고하고 꾸짖을 권한과 권위는 예수와 같이 충분히 자기 수련이 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물론 일반인의 입장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훈계를 할 수 있어야한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 자신에게 자신이 없다면 그러한 훈계는 하나마나이다. 훈계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받게 될 비난과 불이익은 뒤로 친다고 하여도, 자신에게 자신이 없다면 더 이상 훈계를 할 용기조차 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11. p133 현세생활의 감미로움을 사랑하다가 범죄하는 사람들에게 선인들이 쓰라린 충고자가 되었어야 하는데도 쓰라린 인간이 되기를 싫어했던 탓이다.
-현세를 사랑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옆에서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이 꼭 자신을 향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불쾌함을 느끼면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훈계하지 않는 것은 자기에게 불이익이 다시 찾아올까 두려워서이다. 자신의 기분을 상하지 않기 하기 위해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렇게 살다보면 항상 기분이 상할 거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신과 상관없는 범죄라도 언젠가는 자신과 관련이 될 수 있기에 현재 조금 쓰라린 사람이 되어 나중에 쓰라림을 느끼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12. p135 악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질책하고 꾸짖는 일을 삼가기는 하지만 그 동기가 사정상 더 적적한 시기를 요구하기 때문이거나 그 사람들이 그 일로 되레 더 나빠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하자.~그처럼 조심스런 행동은 탐욕의 기회가 되었다기보다는 사랑에서 우러나는 현명함이라고 하겠다.
- 언제나 기회에도 때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상황과 시기에 따라서 삼가야할 때가 있고 행해야할 때가 있는 법이다. 악인들을 질책하고 꾸짖음이 동기가 되어 그들이 악을 행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면 그 때는 아무리 말을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신은 우리에게 이러한 시험을 주시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타인을 위한 행실인 것인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13. p135 정말 탓할 만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자신은 비록 악인들과는 다르게 살고 악인들의 행실을 혐오한다고 하더라도, 훈계하고 질책해야할 남의 죄악을 묵과한 경우이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다. 행실이 바른 사람들은 행실이 바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끼리 어울리기 좋아하는 법이다. 하지만 좀 더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보다 낮은 단계의 사람들을 한 단계 높은 단계로 이끌 권위가 있다. 양반이 백정을 혐오하고 그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닌 것처럼 보여도, 성경에서 말했듯이 무관심은 최대의 죄악이다. 그러므로 남을 무시하고 신경 쓰지 않았음은 자신들 이외의 그러한 부류의 인간들을 죽었거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생각한 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도출이 나올 수 있다. 남들의 행실을 바로잡아주지 않은 행위 또한 무관심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으니 그것 또한 죄악일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시기적절한 때를 위해 묵과한 것은 허용이 된다고 믿는다.
14. p137 함께 매를 맞는데 둘다 악한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니고 둘다 현세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 즉, 일반인들과 악인들은 자주 같은 대접을 받을 때가 많고, 그 때 피해의식을 더 많이 느끼는 쪽은 대체로 일반인 측이다. 일반인들은 악인들과 다르게 그들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고 자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반인들도 죄를 저지른다. 흔히 악인이라고 말할 때는 중범죄 생각하는데, 일반인들이 저지르는 죄는 중범죄는 아니고 경범죄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모두 죄를 짓긴 지었는데, 죄라는 것은 현세, 즉 인간의 도성에 탐닉하여 하느님의 도성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단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현세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이 말했듯이 ‘물질’이 섞인 이성체는 절대악으로 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일반이이나 악인이나 ‘현세를 사랑했다는 죄’를 지었기에 매를 맞는 것이다.
15. p139 사실 자족할 줄 아는 경건은 큰 이득입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자족할 줄 모르고 산다. 얻으면 얻을수록 불만족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현세적 심리이다. 다이아몬드가 적기 때문에 희소성 가치를 가지듯이, 만약 자족할 줄 모르는 자들 가운데에서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다른 것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사실 고등생물을 제외한 동물들을 보면 거의 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필요한 것을 찾고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었을 때는 아무리 앞에 값진 것이 있어도 탐내지 않는다. 인간도 근본적으로 동물이다. 우리도 동물과 같은 생활태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남과의 비교의식을 통한 우월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사는 것보다는 남의 상태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처지에 자족하며 사는 것, 그리고 필요할 때 얻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욕심 부리지 않는 자세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16. p139 세상을 이용하되 마치 이용하지 않는 것처럼 해왔다면, 혹심한 유혹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았던 저 욥의 말을 자기도 되뇔 수 있을 것이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갈지라.~”
-세상을 이용하되 마치 이용하지 않은 것처럼 해왔다는 말은 자신의 최소한의 필요를 위해 살아왔되, 자신의 욕심을 위해 세상을 부리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마치 호수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되 그 물이 줄어든 것이 보이지 않듯이, 혹심한 유혹을 받아오면서도 그는 절제를 통해 하느님의 정신을 잘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절제 행위는 하느님 도성에 있어서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일 것이기에, 인간들도 절제를 통한 삶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본다.
17. p141 사도가 “부자가 되고 싶은 자들은 유혹에 떨어집니다”라고 말했을 적에는 재산에 대한 탐욕을 질책한 것이며 소유 자체를 탓한 것은 아니니 다른 데서는 이렇게 명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 칼도 요리에 쓰느냐, 살인에 쓰느냐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듯이, ‘도구’의 존재가 악하거나 선한 것은 아니다. 재산도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지만 그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탐욕은 자신의 몸을 망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까지도 망친다. 그러니 ‘수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의지’를 탓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고 본다.
18. p141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 교만해지지 말라고 권고하시오. 불안전한 부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어 즐기게 하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하시오. 또 선을 행하고 선행으로 부요해지며 기꺼이 베풀고 나누어 주라고 하시오. 앞날을 위해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시오.
-내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욥이 한 말처럼 벌거벗고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것을 지금 가지고 있어도 그것들은 언젠가는 전혀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가 죽어서 다음 세대에 유산을 남겨준들, 그것이 죽은 이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제일로 중요한 존재는 ‘나’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는 ‘나’를 기준으로 선택해야한다. 만약 부자들이 자신들의 욕심에만 탐닉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선을 베풀면 그 만큼 선이 다음 세계에 쌓일 것이다. 어처구니없이 잃은 경우에도 통곡을 할 것이 아니라 그 만큼의 선이 내세에 쌓일 것이라 생각하고, 기왕 잃을 바에 차라리 흔쾌히 내주는 것이 더욱 많은 선을 쌓는 일일 것이다.
19. p143 선량한 그리스도인들도 고문을 당하고 하는 수 없이 자기 재산을 적병에게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을 선한 사람으로 만드는 그 선은 내줄 수도 없고 빼앗길 수도 없었다.
- 고문을 당하고서야 재산을 적병에게 내주는 것은 당연하며 억울한 일이다. 하지만 만약 고문을 당하기 전에 흔쾌히 내어준다면 그 선은 하늘에 배로 쌓일 것이다. 선량한 그리스도인들도 고문을 당하고서야 자기 재산을 적병에게 내주었다고 했는데, 그들이 만약 고문을 당하지 않기 전에 기꺼이 내주었다면 그것이 더 선량한 행실이 아닐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도 그다지 재물에 있어서는 선량하지 않은 것 같다. 만약 그들이 선했고 재물을 기꺼이 내주었다면 그것은 칭찬할만하다. 그만큼 선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신이 정해주신 보물이고, 적병이 그들을 죽여서도 그 선함만큼은 가져가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적병들이 그들의 선함을 빼앗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20. p145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넘겨줄 것이 없으면서도 믿기지 않기 때문에 고문을 당했다.
-넘겨줄 것이 없는 사람은 단 두 가지 종류이다.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 거룩한 뜻으로 선을 과히 베풀어 더 이상 나눠 줄 것이 없는 사람이거나, 거룩한 뜻 없이 단지 속세를 살아가기 위해 재물을 바라는 사람이다. 이들은 위에서와 말했듯이 현세를 사랑한 죄로 고통 받게 되어있으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위해 내어주는 자들은 적들도 그들의 덕을 높이 받들어 칭하기 마련이다.
21. p147 생명이 끝난 그 사람이 다시는 죽음에 끌려가지 않을 텐데, 저 생명이 끝나는 마당에 어떤 유형의 죽음으로 마쳤다는 사실이 왜 그다지도 중요한가?
-어차피 한 번 죽을 인생, 어떻게 죽었는지가 왜 그리도 중요한가? 많은 사람들이 현세적인 기준으로 죽음을 판단한다. 참수형이나 교수형 등 어떤 ‘형벌’로써 죽는 것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죽음으로 판단하고, 교통사고나 재난 등으로 잃은 목숨을 가리켜 불쌍하고 가엾은 죽음으로 일컫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듯이,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불쌍하고 수치스럽게 죽은 이들에게 더 많은 연민을 느껴 축복해주시리라 믿는다.
22. p149 "당신 종들의 주검을 하늘의 새들에게 먹이로 내주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살을 들짐승에게 주었나이다. 그들의 피를 물처럼 예루살렘 주변에 쏟아부었건만 묻어줄 사람 아무도 없나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저런 짓을 당한 사람들의 불행을 드러내는 것보다도 저런 짓을 저지른 사람들의 잔학상을 심히 과장하는데 의도가 있었다.
-이 구절을 언뜻 읽으면 한 때 실컷 부려먹다가 무덤도 마련해주지 않는 신이 원망스럽고 인간의 일에는 무관심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신의 무관심과 배신(?)을 통한 인간들의 불행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이 그러한 존재라면 믿을 필요가 없다. 신은 그렇게 소박한 대접조차 받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더욱 아끼신다. 그러면서 신이 아끼시던 사람들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얼마나 횡포하고 포악한지를 드러내려 그대로 내버려 두신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그렇게 신이 사랑하는 종들을 죽인 사람들의 잔학성을 드러내서 무엇을 하려한 것일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러한 무관심한 행위는 인간에게 더한 슬픔과 고통을 줄 뿐이다. 신께서 인간에게 무관심이 큰 죄악이라고 하셨는데 그 신이 무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된 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안목은 인간의 도성에 머무르는 수준이다. 성도들의 죽음은 주님께 귀중하며 그런 장례절차가 죽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는 단지 산 사람들을 위한 위안일 뿐이다. 그러니 신께 있어서 장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23. p151 그러니 묻히지 못한 육신들을 두고 그리스도인들을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는 본인의 육체와 모든 지체들의 재형성이 이루어지는데, 정확한 때가 오면 단지 흙으로부터만 아니고 부패한 시체가 돌아간, 다른 원소들의 비밀스런 처소로부터 육체가 복원되고 회복되리라는 언약이 있는 까닭이다.
-그 시대의 대개의 철학자들과 하느님의 나라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장례절차를 중요치 않게 생각하였으니, 그 이유는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은 어떻게 죽든지 하느님의 도성으로 들어갈 것이고, 고린토서에 쓰여 있듯이 그들이 육적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언약한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한 개체의 존재는 유일무이하며 사라진 육체는 다시 회복되지 않음을 생각하면 그 유일한 개체는 다시 생성되지 않으니 부활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생각하면 신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 이상 이 구절은 단지 인간들을 위안하려는 수작에 불과한 것이 된 것이라 생각한다.
24. p153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효성스런 본분이 하느님 마음에 든다는 것과, 부활에 대한 신앙을 한층 강화하는 의미에서 죽은 이들의 몸도 하느님의 섭리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과 기독교에서 장례절차를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음에도 장사를 지내는 행위는 예수를 장사지낸 것과 같이 남의 존재를 중요시 여길 줄 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25. p161 육신은 성스러운 의지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성스러워진다는 입장을 확고히 해야겠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육신은 현세의 물질로 혼탁해진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가 육신과 정신의 혼합체로서 정신이 육신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이미 이성이 물질을 어느 정도 지배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플라톤이 말했듯이 성스러운 존재이므로 그 정신적인 의지에 따라 육신을 사용하는 것은 성스러운 행위이며 성스러운 육체라고 말해야한다. 반면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신과 정신을 똑같이 중시하였으며, 우리의 자유의지를 하느님의 도성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것은 정신과 육신이 함께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26. p165 육신이 거룩한 것은 그 지체들이 온전하기 때문이거나 아무런 접촉도 겪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육신은 누군가의 영향이 닿으면 거룩함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다. 하지만 처녀의 경우에 많은 일과 운동을 하면서 처녀막이 터지는 경우도 있으며 어떤 자의 고의적이지 않은 실수로도 처녀를 잃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고의적인 행동으로 육적인 처녀성을 잃게 된다하더라도 그것은 영적인 처녀성을 잃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로 순수함을 잃는 경우가 아니라면 육적인 처녀성 상실은 단지 부족한 인간들이 인간의 도성에서만 중시하는 순수함을 잃는 것이며, 이는 결코 하느님의 도성에서 중시하는 순수함은 고이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이성과 물질을 똑같이 중시하였으며 인간에겐 이성과 물질이 같이 혼재해 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육적인 처녀성의 상실이 영적 처녀성 상실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신국론에서 육적인 거룩함을 잃는 것은 정신적 거룩함을 잃는 것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영혼의 거룩함으로 육신도 거룩함이 이루어진다는 그의 말의 반대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육신이 거룩함을 잃는다면 죄책감을 가질 테고 그것이 곧 영적 거룩함을 흔들어 놓는다는 생각을 하면 육신은 항상 거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하고 나서 성관계를 맺음을 통한 처녀성 상실은 거룩한 것이다. 이는 비록 자신의 의지에 의해 처녀성을 상실한 것이지만 자신의 종족을 온누리에 퍼지게 하라는 신의 뜻을 따른 것이므로 합당하다.
27. p175 “죽이지 못한다”는 말씀은 사람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는 일만 남았다. 타인도 죽이지 못하고 그대 자신도 죽이지 못한다. 자신을 죽이는 자는 사람을 죽이는 자 외에 다름아니다.
-군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졸병은 장군이나 지휘관의 지시를 따라야한다. 졸병이 제멋대로 행동을 하면 그것은 군대의 내부에 차질을 야기 시킬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군대이다. 하느님께서 명령하시지 않는 이상 우리는 함부로 자결해서는 안 된다. 자결하는 사람은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오만한 졸병과도 같기 때문이다.
28. p189 명령받지 않고서 행한 것이면 벌을 받는 그만큼, 명령받고서 행하지 않으면 또한 벌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살인죄로 인정하지 않는 살인으로서 그 분께서 분부하신 살인을 꼽으셨다. 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머릿수가 하나라도 더 필요한 때에 제멋대로 탈영을 하거나 자결을 하는 자는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명령을 받고서도 행하지 않아 그 조직 내에 불이익을 가져다주거나 신의 권위를 훼손시킨다면 이 또한 용서받지 못할 행위이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에, 신은 독재자가 될 소지가 있다. 당신 뜻대로 하지 않았다고 하여 벌을 내린다는 것은 독재의 행위이다. 그렇지만 다시 내세를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선을 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필요하며, 분명히 하느님 당신이 그렇게 벌하셨음에도 편치는 않으실 것이다. 그 분은 당신 도성 내의 군대의 기강을 철저하게 바로잡아 악에 대항하기 위해 그러한 희생을 감수하신다는 것이다.
29. p191 자기 죽음을 초래한 죄인들은 사후에 더 나은 생명이 거두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따라 죽었다지만 그들은 나약했기에 죽은 것이다. 나약한 사람은 아무도 받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나약한 자들은 부활한다고 해도 나약할 것이기 때문에, 사후에도 더 나은 생명이 그들을 거두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약하더라도 끝까지 참아내는 것이 더욱 강해보이기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30. p199 정결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덕목임을 의심치 않아야 한다.
-절제를 통해 그들의 정결을 지킨 자들은 절대선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기에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에 정결하지 않는 사람들은 절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들은 이미 현세의 악에 빠져 인간의 도성에서 헤매는 존재이므로 하느님께서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도성에 도달하고 싶은 자들은 절제를 통한 수도를 거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