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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실학사상학술대회를 반계의 묘소가 있는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면사무소에서 용인문화원주최로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청중 120명정도 채웠고, 고등학교 학생들이 30명이 참여해 끝까지 경청했고, 2시부터 5시 30분까지 발표및 종합토론이 있었는데 100여명이 자리를 뜨지 않고 참여해주어 참으로 기분 좋은 학술대회를 마쳤습니다. 제가 맡고 있는 반계유형원실학사상 연구소에서 주관하였으며, 백암농민이 조직한 백암반계숭모회에서 후원을 했습니다. 제1주제는 정구복 반계유형원의 실학정신과 그 교훈이었고, 제주제는 정성희박사(실학박물관 책임연구원의 '반계유형원과 근기실학'이었고, 제3주제는 전주역사박물관 관장이동희 박사의 '부안지역의 반계 유형원 유적과 선양사업'으로 발표해주셨고, 토론회 좌장은 청운대교수 김경수교수가 맡았으며, 토론에는 용인문화원 용인학연구소 위원이고 용인시민신문 대표인 우상표씨였고, 용인문화원의 연구위원인 김태근 박사와 김정혜님이었습니다. 그 발표문 전체를 올립니다.
일부 자료는 원본과 약간 다릅니다. 이점 양해를 부탁합니다.
반계 유형원 실학사상 학술대회
발표 논문집
· 일시 : 2017년 11월 24일 오후 2시 ~ 5시 30분
· 장소 :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면사무소 대회의실
· 주최 : 용인문화원 부설 용인학연구소
· 주관 : 반계유형원 실학사상연구소, 백암반계숭모회
· 후원 : 용인시
반계 유형원 실학사상 학술대회
사 회: 김장환(용인문화원 사무국장)
개회사: 용인문화원 원장
축 사: 용인시장
환영사: 백암반계숭모회 회장
· 발표주제
1. 반계 유형원의 실학정신과 그 교훈 13
(정구복 반계유형원실학사상연구소 소장)
토론 : 우상표(용인시민신문사대표)
2. 반계 유형원과 근기 실학 31
(정성희 실학박물관 책임연구사)
토론 : 김태근(용인학연구소 부소장)
3. 부안지역의 유형원 유적 보존과 선양활동 57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
토론 : 김지혜(용인문화원 연구위원)
· 종합토론 (4시10분 ~ 5시 30분)
좌장 : 김경수(청운대학교 교수)
지정토론자 전원 및 참석자
· 부록
1. 반계 유형원의 연보 81
2. 유성민의 토지매매 문서 86
인 사 말 씀
조 길 생(용인문화원장)
시나브로 한해가 저물어 가는 11월의 끝자락에서 조선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 선생 학술대회를 갖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특히 반계 선생이 영면해 계신 처인구 백암 땅에서 선생의 삶과 학문을 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해 오신 용인학연구소, 반계유형원실학사상연구소, 백암반계숭모회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반계 유형원 선생은 유교를 금과옥조로 여기던 시대에 태어나 유교적 전통을 중히 여기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출생과 성장 환경을 보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당대 사회 권력의 핵심에 오를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보장된 관직이나 출세의 길을 모두 거부하고 전라도 부안 땅 초야에 묻혀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1만여 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학문을 연구하고 글을 쓰면서 모든 시간과 정열을 바쳤습니다. 당대 사회를 지배하는 규범이자 사상이었던 주자학의 원리를 신봉하면서도 정작 제도권 안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유형원 선생은 왜 관직 생활을 거부하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구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구조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를 어떻게 개혁하고 변화시켜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불후의 명작,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저술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문벌 있는 집안의 선비였음에도 스스로 초야에 묻혀 학자의 길을 걸었던 반계 유형원 선생의 개혁사상은 조선 후기에 와서 커다란 맥을 이루어 이익, 이중환, 정약용, 박제가, 안정복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침으로써 조선후기 실학의 여명(黎明)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진행되는 반계 유형원 선생의 학술대회를 통해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바르게 규명되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밝은 미래의 좌표를 제시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축 사
정 찬 민(용인시장)
안녕하십니까? 용인시장 정찬민입니다.
먼저, 100만 용인시의 실학 전통성을 확립하고 시민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제1회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용인시는 조선시대 500여년 동안의 유교 문화의 전통을 유지해 온 유서 깊은 고장으로, 선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는 많은 문화적 유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반계수록』의 저자이며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반계 유형원 선생님의 묘소도 이번 학술세미나가 개최되는 백암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반계 유형원 선생님은 5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벼슬도 하지 않고 독서와 집필로 생을 보내셨으며 주저인 『반계수록』 26권 외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반계 유형원 선생님은 살아 생전 빛을 보지 못하고 세상에 묻혀 있다가, 100년 뒤에 와서야 그분의 성품과 학식, 그리고 『반계수록』의 내용이 알려지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반계수록』에 수록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개혁사상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백성을 위해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고민했던 그분의 개혁정신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1회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 학술대회」를 통해 반계 유형원 선생님의 실학사상을 재조명함으로 그분의 사상과 정신을 현대적 문화 콘텐츠로 발전시키고 나아가 우리 시의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도 유학의 정신문화유산을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용인지역 고유문화 및 역사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더욱 힘쓸 것을 약속드리며, 반계 유형원 실학사상이 학술적 가치와 위상을 높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언제나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학술대회를 추진하신 조길생 용인문화원장님과 공동주관하신 반계유형원 실학사상 연구소, 백암반계숭모회 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용인의 소중한 전통문화 발전을 위해 앞으로도 더욱 노력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환 영 사
황 규 열(백암반계숭모회장)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 선생이 영면하신 백암에서 선생의 실학에 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백암주민을 대신하여 행사를 주관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백암에 오신 여러 내빈을 충심으로 환영합니다.
농업 농촌문화 창달을 목표로 설립한 백암반계숭모회는 반계의 실학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여 부농의 꿈을 실현하고 농민문화를 승화, 발전시키려 하는 농민단체입니다. 백암을 사랑하고 농촌공동체의 발전방향과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반계의 실학사상이 저희 단체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여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 농민들은 협동과 상생의 틀 안에서 자연과 더불어 땀 흘려 먹거리 생산에 주력하고 가공 판매로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일, 상생과 배려의 덕목을 실천하는 일이 반계의 실학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이 학술대회가 백암면민이 반계의 실학정신을 받들어 자기 변화와 지역 발전의 토대로 삼고 나아가 용인시민과 전 국민에게 확산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제1주제
반계 유형원의 실학정신과 그 교훈
사진
반계 유형원 묘소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석천리 산 28-1에 경기도 지방기념물3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반계 유형원의 실학정신과 그 교훈
정구복 (반계실학사상연구소 소장)
1. 머리말
오늘 磻溪 柳馨遠(1622~1673)이 영면하고 있는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에서 실학을 일으킨 그 분의 정신을 처음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즉 그가 어떤 사상을 가졌던가에 대한 조명이 아니라 그의 저술에 관통하는 정신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이를 현재의 우리들의 삶에 어떤 점을 계승하여야 할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실학의 현대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2년 전 반계숭모회의 회원 여러분을 만났을 때부터 반계의 어떤 점을 우리는 계승하여야할 것인가가 앞으로 제가 연구해야할 과제라고 생각해 왔다. 그의 정신을 계승할 때 우리는 수백년을 건너 뛰어 넘어 그 제자가 될 수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오늘날의 시대 차이가 너무나 크므로 그의 모든 것을 계승할 수는 없다. 본고에서는 우리가 계승하여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일생 동안 쓴 책은 그의 연보나 행장 족보 등에는 70여 종의 책이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 전하고 있는 책은 단 두 가지뿐이다. 그가 35세 때에 쓴 동국여지지라는 인문지리서(9권)과 31세부터 쓰기 시작하여 20년 만에 완성한 반계수록 26권이다. 그의 문집조차 현전하지 않는다 그의 문집이 6권이었다고 성호문집에 쓰고 있으며, 순암 안정복이 정리한 「반계연보」에는 여러 곳에서 遺集이 인용되고 있다. 그 복원과 번역 주석작업이 임형택의 반계일고, 반계잡고등으로 출간하였고, 이를 반계유고로 완간하는 것을 기념하는 제2차 국제학술회가 실학학회 주관으로 2017년 10월에 개최된 바 있고, 한학자 김동주는 여러문헌을 정밀하게 수집 정리하여 3권의 반계유집을 편집 번역하였다.
. 그의 학문성향을 경세치용학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이라는 뜻에서 경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경세학은 성호와 다산에 의하여 계승 발전하였다. 그의 제자인 성호 이익(1681~1763)의 학문과 사상을 ‘성호학’이라고 칭하여 그가 살았고 묘소가 있는 안산에서 성호학회가 조직되고 성호학회지가 45권이 나온 바 있다. 또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경우 ‘다산학’이라는 명칭을 공공연하게 사용하고 있고 『다산학백과사전』이란 엄청난 편찬물을 내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는 이런 학자마다의 학문을 학파로 칭하는 성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학을 이처럼 쪼갤 경우 너무나 분파적일 것이라는 형식논리만이 아니라 적어도 학파라고 하면 인간적 계승관계보다는 학문방법의 차이가 엄정하게 구분되어야 할 것이고 그를 현창하려는 점에서 지역과 문중이 결합한 학문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오늘 토론회에서 심도 있게 토론해주기 바란다.
2. 반계 유형원은 어떤 사람인가?
2.1 시대배경
조선시대는 많은 국민이 궁핍하여 생활을 유지함에 두 가지의 큰 어려움을 당하였다, 하나는 자연재해로 가뭄이 장기화되거나 전염병이 유행함으로 당하는 재난이었다. 흉년이 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식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유행했듯이 식생활을 해결함이 최우선 순위에 들었다. 농업기술이 점진적으로 발전해왔으나 장기의 가뭄을 견뎌낼 방도를 찾지 못했다. 다른 하나의 어려움은 법제의 잘못으로 인하여 당하는 것이었다. 개인이 내야할 군포를 못 내고 도망을 치면 이를 친척과 이웃사람에게 부과하여 마을 전체의 사람이 도망을 가는 사례가 생기는가 하면, 향리와 서리에게는 일정한 보수가 책정되지 않아 조세행정 등에 엄청난 부정과 부패가 만연되었다. 일반 백성은 교육과 관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노비신분은 혈연에 의하여 대대로 신분이 세습되는 신분제 사회였다. 이 시대를 우리가 중세라고 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반계수록은 후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책을 제시한 법제적 개혁안이었다. 그가 살았던 17세기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전국의 토지의 3분의 2가 황폐화되고 국가의 재정이 대단히 어려웠으며 국민의 생활의 궁핍은 참혹했다. 더구나 대륙에서는 명청이 교체되는 국제정세의 변화가 조선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실학은 대체로 이처럼 국내문제와 국제문제가 엉킨 상황에서 일어난 새로운 학문이었다.
2.2 그의 일생
유형원은 전 국토와 전 국민이 미증유의 심각한 전쟁피해를 당한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후 20여년이 지난 1622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15살 때에는 청나라 10만 기마병이 순식간에 서울 점령하자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40여일간 항쟁하였으나 버틸 수 없어 마침내 왕이 삼전도에 가서 항복한 병자호란을 겪었다. 이어서 동양문화의 종주국이었고,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를 구원해준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되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래서는 그는 명나라 중흥에 도움이 될 만한 무사 200명을 훈련시키고 명나라를 중흥시킬 방책을 글로 쓴 바 있다.
국내적으로는 만신창이가 된 전후 사회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와 허약한 나라의 국가체제를 어떻게 강화 안정화할 것인가 즉 국가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가 그의 학문적 주제였다. 이를 당시 경세학(經世學)이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 유흠(1596~1623)은 문과에 좋은 성적으로 급제하여 인조 초에 모든 관리가 탐내는 예문관 검열이라는 사관직에 임용되고 이어서 세자 시강원 설서라는 중직을 맡아 장래가 촉망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북인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이 광해군 복위운동을 꾀한다고 하는 무고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자살했으니 반계의 나이 두 살 때의 일이었다.
이후 그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5살 때에 외숙인 태호 이원진(1594~1665)과 고모부 동명 김세렴(1593~1646)에게서 공부를 했다. 두 분은 모두 당시 학문적으로 유명한 학자였고, 고위 관직을 지냈다. 이원진은 탐라부사를 지냈고, 김세렴은 일본통신사, 함경도 관찰사, 이조판서를 지냈다. 두 분이 유형원에게 글을 가르쳐주면 즉석에서 외우고 이해함이 깊어 앞으로 큰 학자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10살 때 쯤 유가의 4서3경, 중국의 역사서, 제자백가의 학문을 두루 읽혀 혼자 공부할 수 있는 한문 습득 능력을 갖추었다. 그의 학문의 본령은 유학이었다.
그가 현실구제책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야겠다고 뜻을 세운 것은 그의 나이 30세 때가 아니라 15세 때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생질 梁暹(양섬)이 최초로 작성한 행장에 의하면 13~4세 때에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시험의 준비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磻溪隨錄 1974. 경인문화사간 영인본 부록자료 및 정구복 해제 참조.
그는 할아버지를 따라 부안 우반동에 내려가 부안김씨에게 개간한 농장을 팔 때 그는 장손으로서 증인란에 서명하고 있다. 이 때 그는 매매문기의 초고를 작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토지매매문기는 부안김씨 우반동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간, 1983, 177쪽에 탈초본이 실려 있고, 한국정신문화원간 고문서집성 2책. 1998. 683~684쪽에 원문이 사진판으로 실려 있다. 이 문서는 현전하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토지매매문기 5만여건 중 가장 특이한 것으로 우반동의 경승이 소상히 써져 있다. 이 문기는 1636년 3월 17일에 30여 結을 부안김씨 담양부사 김홍원에게 목면 10동을 받고 매매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에서 그의 아명이 德彰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 땅은 할아버지의 6대조 하정공 유관이 개국원종공신을 책봉되었을 때에 받은 사패지지였는데 할아버지가 1612년 내려와 벌목을 하고 진전을 개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매매문기의 붓글씨는 유성민의 외손인 조송년이었는데 그는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손자였고 유형원이 형이라고 칭했다.
부안의 왕래는 그가 관료로 나가 치국하는 길을 포기하고 학문을 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부안에 내려갈 때에 그 넓은 만경 평야, 김제평야를 보면서 그 넒은 땅을 몇 사람이 차지하여 일반백성은 땅을 전혀 소유하지 못한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에게 충격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아침 일찍 새벽에 일어나 가묘에 가서 조상님께 인사하고 밤늦게까지 열심히 책을 읽고 좋은 내용은 메모해두고 한 밤중에도 좋은 생각이 나면 벌떡 일어나 기록해 두었다. 우리나라 법제를 새롭게 구상한 혁명적 대개혁안인 반계수록을 30세에 저술하기 시작하여 20년간 다듬고 수정하여 불후의 명저를 썼다. 그는 31세 때에 일찍이 가보았던 부안으로 내려가 연구에 전념했다. 그가 내려가게 된 배경에는 23세 때에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2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으며, 30세 때에 할아버지 상을 당하여 3년 상을 치렀다. 이에 그의 주위에는 어른이 모두 돌아가셔 부인과 함께 32살 때에 부안으로 내려갔다. 그가 이거한 곳은 부안현 입석면 하리 우반동이었다. 이에 자신의 호를 그 마을의 가운데를 흐르는 내 이름을 따서 반계(磻溪)라 칭하였다. 위 토지매매문기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유형원이 쓴 동국여지지 부안현 산천조 우반동 항에 시내 이름을 반계라고 쓴 고모부 김세렴의 시를 인용해 쓰고 있다. 전경목, 우반동 마을이란 책에서 중국 현인의 호에서 따왔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반계는 중국 섬서성에 있는 시내 이름으로 강태공의 낚시터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천자문에도 ‘刻 銘 磻 溪’로 나오고 있어 이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잘못이 분명하다. 우반동은 후일 우동리(牛東里)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가 부안으로 이사간 것은 관료로 나가 치국하는 길을 완전히 포기하고 안정된 국민의 생활과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제도의 연구에 전념하려는 뜻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전국의 지리를 정확이 알기 위하여 서울에서 부안으로 오르내릴 때에도 다른 길을 택하였고, 일생동안 전국의 각처를 여행하면서 지리적 지식을 넓혔다. 그는 고대의 중국문헌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사회경제적인 측면의 자료를 열심히 탐독하는 학자였고, 현실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방책을 연구함에 일생의 노력을 바쳤다.
그는 부모, 조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를 보여주는 예로서 그의 좌우명 중 하나가 부모를 모실 때에 얼굴빛을 부드럽게 할 것으로 했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약을 지으려 한의사를 찾아 갔을 때 그의 얼굴 모습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평소 거만했던 한의사가 공손하게 대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가 부모가 돌아가신 후 맛있는 음식을 얻게 되면 항상 부모님, 조부모님을 생각하곤 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전한다.
그는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이나 모르는 사람에 대하여도 따뜻한 배려를 했다. 34세 때 서울에 왔다 돌아가는 길에 충남 아산 신창에서 사람과 말을 가득 태운 배가 전복하였음을 보았다. 이에 그는 상류에서 배 두 척을 끌어내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게 하였는데 5-6인은 이미 죽었고, 가슴에 온기가 있는 사람을 자기들의 옷을 벗어 입히고, 죽을 끓여 먹이는 응급조처를 하여 다음날 살아난 사람이 9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흉년이 들면 곡식을 풀어 이웃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원금과 이자를 받지 않았으며, 자기 집 아이들로 하여금 나이 많은 노비에게 공손하게 대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웃에 대한 이런 따뜻한 마음은 그가 부안에서 죽어 가매장했다가 용인의 아버지 묘소 아래로 이장을 하는 날 사슴 100마리가 슬피 울었다는 일화가 우회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그는 52세에 죽을 때까지 열심히 책을 읽었고, 자기가 한 말을 반드시 지켰으며, 좋은 일을 찾아서 행했다. 그의 좌우명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공부하기, 의관을 정제하고 높은 곳을 똑바로 바라보기, 부모 섬김에 부드러운 얼굴 갖기, 부인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기 등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가묘에 가서 선조들에게 아침 인사를 드리고 나서 하루 종일 책을 읽었고, 하루가 가면 오늘도 허송했구나 탄식할 정도로 시간을 아껴 썼다.
자신의 묘소는 부모님의 묘소 아래인 용인의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 28-1에 모셔졌고, 영조 29년(1753년) 그에게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세자시강원 진선이라는 직을 추증하고 이해 묘비는 당해 지방관인 죽산부사와 인근 선비들이 돈을 모아 마련하였고 비문은 일찍이 왕명에 의해 그의 전기를 지은 홍계희(1703~1771)가 지었다. 현재 그의 묘소에 세워진 묘비는 전면에는 「有明朝鮮國 進士 贈執義兼進善磻溪柳先生馨遠之墓 淑人 豊山沈氏祔左」이라는 비문이, 뒷면에는 홍계희가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有明은 大明이라는 뜻이고 진사는 그가 33세 때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 집의는 사헌부의 종3품 관직이며 진선은 세자시강원의 정4품 직이다, 숙인은 정3품 당하관과 종4품직의 관료부인에게 내려준 官階이다. 부좌는 시신의 왼쪽에 부인이 안장되었다는 뜻이다. 이 비석은 영조 44년(1768) 무자년에 세워졌다.
또한 그가 살았던 부안지방의 선비들이 생전에 그를 큰 스승이라고 칭했고, 사후에 그의 인품과 학문을 숭모하여 동림서원을 세워 제사를 올렸다.
2.3 그의 저술 두 가지
그는 35세 때에 우리나라 전국의 지리지를 종합한 동국여지지 9권을 집필하였다. 이는 전국의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이 성종 대에 편찬되고 중종대에 보완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간행되었으나 이 책이 지방의 현실을 올바르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 책은 필사본으로 서울대 규장각에 원본이 전하고 있고 현재는 영인본으로 간행되어 지방사 연구에 널리 이용되고 있는 책이다. 이 지리책에는 서술원칙을 기록한 상세한 범례가 실려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가 우리나라 국토와 전국을 사랑했다는 점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국토를 사랑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의 국토에 대한 깊은 애정은 각 군현의 지리적 사정과 역사를 함께 파악하게 하였다. 후일 동국여지지를 널리 알린 전라도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1712~1781)이 우리나라 산맥과 강의 줄거리를 파악하는 산수고를 집필하고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문화를 깊이 연구함에 큰 계기가 되었다 이런 우리국토에 대한 인식의 고조는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이란 새로운 학문경향을 낳게 되었다.
. 그리고 이 동국여지지의 각 군현 조에는 그 군현의 토지의 총면적을 기록하는 란을 공란으로 두었다. 당시 토지 단위는 수확량 기준의 조세부과 기준인 결부제에서 반계수록에서 반드시 개혁되어야한다고 강조한 절대면적 단위인 경무법의 실현 결부제는 벼의 수확량이 20석 나는 토지를 1결로 그 100분의 1이 1부로 파악하는 토지면적의 단위이다. 이는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면적이 달라져 1등전 1결과 6등전 1결 사이에는 4배의 차이가 났다. 유형원은 이 토지단위제는 조세를 걷기에 편하고 문서상의 면적이어서 실제의 면적을 알 수 없는 것으로 이에는 각종 부조리와 협잡이 따를 수 밖에 없는 제도라고 논하면서 이를 절대면적 단위의 경무법으로 개혁되어야 한다고 반계수록 권1 전제 조에서 크게 강조했다.
그가 31세에 쓰기 시작하여 49세에 완성한 반계수록은 26권이다. 사회개혁안이 13권이고 이에 관한 이론적 근거로 들은 고설(攷說)이 13권이다. 이 개혁안은 경제, 행정, 교육, 인선, 재정, 군사, 정부조직 등 국가 운영의 기본 틀을 모두 마련하였다.
이 개혁안은 고금의 지혜와 제도를 모두 관통하고, 토지 분급의 대상을 전국의 전 국민으로 한 점에서 가위 혁명적 개혁안이었다. 기득권층의 토지소유, 인재육성, 관료 선발제도 등을 과감히 혁파하여 모든 국민이 각자 자기의 노력과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여 그 결실을 먹을 수 있는 즉 “만인무불득기소(萬人無不得其所)하는 사회를 이루려는 개혁안이었다.
그 핵심은 당시 유일한 소득원이었던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이에 대한 세금과 군역으로 국가재정을 충당하며 군사제도를 운영하자는 공전제도(公田制度)였다. 또한 한 번의 시험으로 인재를 발탁해 관료로 충원하던 과거 제도를 개혁하여 교육과 인선제도를 일치시켜 초급학교, 중등학교, 대학에서 교육되고 상급학교로 추천된 사람을 관료로 선발해 쓰자는 공거제도(貢擧制度)였다. 이 두 가지가 가장 핵심적인 그의 개혁안이었다.
3. 반계의 실학정신
3,1 전 국토와 전 국민을 사랑함
그는 전국을 여러 차례 여행하며 지리를 익혔고 또한 금강산 등 유명한 산을 유람했다. 이는 자연 전국의 국토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가졌다. 각 군현이 너무 작게 쪼개지고 경계가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군현의 경계를 넘어 설정된 군현도 있었다. 이를 그는 군현제 개혁안으로 썼고, 전국의 각 군현의 인문지리적 현상과 문화를 동국여지지에 담았다. 이에는 당시 사림들이 새롭게 편찬한 지방읍지의 내용을 많이 참고하여 수록하였다.
또한 반계수록의 전제 조에서 토지의 분급을 왕실과 관료, 서리 향리, 일반 농민, 상공업자, 노비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종래 고려조의 전시과나 조선조의 과전법이 관료와 왕실의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한 것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의 관심이 전 국민의 생활안정을 배려한 것이다. 이는 전 국민을 사랑한 결과라고 해석해야할 것이다.
3.2 천리의 구현
그는 모든 인간은 하늘의 이치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보는 성리학의 신봉자였다. 하늘의 이치는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내려주고 악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는 화를 내린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만물에 공평무사(公平無私)하다고 생각했다. 이 공평무사는 땅의 이치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의 성품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하늘은 모든 사람을 덮어주고, 땅은 아무리 무거운 물건도 모두 자신의 몸 위에 실어주고 있다. 하늘은 해와 달이 매일 같이 정기적으로 운행함을 살피고 네 계절의 순행과 기후를 변화를 맡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이치는 거짓과 속임이 없다고 했다. 인간도 천리 즉 그러한 어김없는 자연의 질서, 그 원리를 타고 나서 불쌍한 사람을 돌보며, 남에게 덕을 베풀며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며 예를 지킬 줄 아는 착한 성품을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졌다고 믿었다. 인간에게는 사욕(私慾) 개인적 욕심이 있어 불완전하다. 사욕을 억제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당시 일반 사람들의 삶과 국가의 운영은 그처럼 착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서 굶어 죽어갔으며, 국가의 각종 세금과 부역의 징수에 시달리다 못해 고향을 버리고 정처 없이 떠났으며, 많은 사람이 출생하면서부터 교육과 출세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그는 이런 현실적 문제는 천리가 구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현실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인간의 통치제도의 모순점을 개혁하는 길을 찾고자 했다. 이는 후대의 법제가 지배층의 사욕으로 제정되어 이를 근본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양반들의 수족이었고, 경제적 부의 재산이었던 노비의 신분세습제를 천하의 악법이라고 했다. 당시 조선 사회의 기본법인 경국대전도 폐법으로 규정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폐법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왔다고 했다. 이런 현실적 부조리는 천리에 어긋난 것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천리가 구현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3 본말(本末)-체용(體用)론
현실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는 사건 하나하나를 해결하는 방식보다 근본적인 것을 찾아서 개혁하면 작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면 그 말단의 문제는 자연히 쉽게 해결된다는 논리이다. 이는 당시의 철학인 성리학에서 기본원리인 본체와 그를 작용으로 생긴 현상을 ‘용(用)’이라고 본 것과 일치한다. 우주와 인간의 본체는 ‘이(理)’와 ‘기(氣)’이며, ‘용’은 모든 현상, 개별적 사물 등으로 파악했다. 모든 존재는 기로 이루어졌으나 그를 존재하게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을 ‘이(理)’라고 했다.
또한 당시 부를 창출하는 근본은 토지에 있다고 보았다. 농업이 천하의 대본이라고 하듯이 토지를 경작할 수 권한을 모든 국민에게 고루 고루 나누어주고 이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여 그 세금으로 국가의 예산을 집행하며, 그 토지에 군역차출을 매기면 군인의 일정한 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토지를 실제 면적단위로 파악하는 경무법으로의 개혁을 강조했다. 근본에서부터 캐되 끝까지 수미일관된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반계수록은 시종과 수미가 일관된 개혁안이라는 점에서 위대한 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4, 강목(綱目)론
그물을 당길 때 사용하는 벼리의 큰 줄을 강이라고 하고 그물의 눈을 목이라고 한다, 여기서 강목은 그의 개혁안에서 조목 조목 상세히 규정한 것을 들어서 말한 것이다. 그는 비유하기를 천평과 같은 저울이 그 눈금이 정확히 매겨지지 않으면 저울 구실을 할 수 없고, 자가 눈금이 정확하지 않으면 자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당시 선비들은 지방 수령이나 행정관으로서 직책을 맡으면 그 구체적 내용을 모르고 이를 향리나 서리에게 맡겨버림으로써 행정이 문란해짐을 들고 있다. 법이나 개혁안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원리만 선언적으로 강조하면 이는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계수록에는 구체적인 조항을 세밀하게 설정하였다. 이는 당시 선비들이 대체만을 논하고 세세한 규정을 등한시하며 오직 음풍영월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3.4. 시공(時空) 초월론
그는 왕도(王道)와 정치의 근본은 고금에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백성을 위한 공평무사의 정치는 상고에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유가에서 흔히 말하는 선왕의 정치, 요순의 정치를 이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현실개혁론을 주장하면서 그의 원리적 고찰은 역사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았다, 옛 것에서 많은 지혜와 정보를 얻었다. 그가 역사의 시간을 초월한 것은 기본 원리를 논한 것일 뿐 당시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당시 성년 남자 1인에게 40여두락(1경)의 토지 경작권을 준다고 할 때 전국의 인구수, 전국의 토지면적의 총량, 그리고 당시 한 가정의 가족이 꾸려가야 할 소득량, 그리고 한 사람이 경작 가능한 토지면적 등 다양한 현실적 파악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는 원리는 중국의 상고 주대의 정전법에서 찾아낸 것이다. 또한 공간적으로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구분을 넘어서 이론을 이용하고 있으며 국내적으로는 전국의 각도별 파악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정보는 동서양을 구분할 필요가 없으며 세계적인 모든 정보를 활용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자학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4. 실학정신을 계승하는 길
백암면은 용인시 처인구로 아직 개발의 물결이 닥치지 않은 농촌지역이고 이 지역의 주산업은 농업이다. 백암면은 한국 농촌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문제점을 함께 모두 가지고 있다. 용인시는 현재 100만명이 넘는 거점도시가 되었다. 용인시의 수지구와 기흥구는 산업사회의 여러 현상이 밀려와 전통마을은 거의 사라지고 난개발의 도시가 되었으며, 원주민은 밀려나거나 그 발언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처인구는 용인시의 80%의 면적을 가지고 있으나 인구는 24만명으로 세 개의 구에서 아직 파괴되지 않은 지역이다. 오늘날 농촌은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었고 연영별 인구에서 백암면은 유아 및 청소년이 매년 급감하고 있고, 농촌에 살면 결혼이 어려워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고 있는 현상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반계가 오늘의 농촌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직접 가르쳐 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백암면 사람들이 깨어날 수 있는 정신력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반계는 生居扶安하고 死居龍仁하여 용인에서 영원히 쉬고 있다. 3년 전에 반계숭모회 이사 34명이 반계의 제자임을 선언한 바 있고 매년 벌초를 해주고 백암의 행사가 있으면 무사히 끝내게 해달라고 묘소에 가서 고유제를 지내며 백암의 발전의 길을 찾고 있다. 반계가 일생동안 전체 국민의 생활을 위한 방책연구에 일생을 바친 공로를 이곳 주민들이 높이 사고 있다. 반계의 이런 정신은 백암의 발전을 위해 성실한 농민을 뭉치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 백암을 사랑하고 이 곳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희생적 삶에 큰 귀감이 되고 있다.
반계는 백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고장을 사랑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일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백암 사람들에게 주체의식, 주인의식을 가지고 마을을 아름답게 꾸미고, 인정이 넘치는 지역공동체를 만들 것을 격려해주고 있다.
반계숭모회 사람들은 농업을 6차산업으로 발전시키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생산과 가공 판매 과정을 합리화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 방법과 길은 세계적인 모든 정보를 모아 선택할 것을 반계는 말해주고 있다. 세계의 모범 농촌개발 경험을 우리의 경험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반계가 고금회통, 시공을 초월한 연구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리고 농협과 축협을 농민이 중심이 되어 농민을 위한 기관으로 만들어 농민의 경제력을 확충하려는 노력도 경주하고 있다. 백암 농민들은 기부를 기꺼히 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런 기부행위는 학교 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이는 백암의 훌륭한 전통으로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백암면의 농촌에는 어린 아리의 울름소리가 그친지 오래된 듯하다. 소, 돼지의 울음소리만이 아니라 어린이 울음소리가 마을에서 들리도록 하는 방안을 다각도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농업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자연과 함께 하는 농업은 공무원이나 기계를 다루는 직업보다 더 의의 있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앞으로 이곳 농지에 가장 적절한 농작물은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이곳에서 어떤 나무를 길러내야 좋은지 임업에 대한 연구도 해야 한다. 이런 연구소들을 아우를 수 있는 전문대학을 유치해도 좋을 것이다. 지방의 개혁운동은 이곳 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굳이 명문 대학의 학위는 이제 그 가치가 크게 소멸하고 있다. 학교는 단순히 청소년의 중고등학교가 아니라 평생교육을 위한 농민교육기관이 되어 지역사회 개혁의 중심 기능을 가져야 한다.
여러분의 손자손녀들이 이곳에 와서 살고 싶어 하게 마을에 사사사철 꽃이 피고 시와 노래와 춤이 넘쳐 나오고 울창한 산림을 가꾸어 삼림욕을 할 수 있는 아름답고 정답고 즐거운 ‘희망의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백암에는 한택식물원이라는 엄청난 보고, 대장금 촬영장 등 중요한 박물관이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즉 ‘싸운드 업 뮤직’과 같은 영화가 이 고장의 역사와 문화 진한 인간의 정을 담아 노래와 춤, 시 그림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이곳 젊은이들 중 이런 고향을 만들고 발전시켜 우리나라 수천년의 농업 전통을 살리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겠다는 뜻을 세움(立志)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계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지금 세계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백암이 지리적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곳에서 건실한 뜻을 세우고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면 이곳에서 반드시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백암의 정미천에서 장래 한국을 이끌어갈 용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5. 결론
현재 농촌으로 귀농하는 기업농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농업은 5000년전 단군조선으로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역사에서 중심적 기간산업이었다. 그래서 “농업은 온 天下의 가장 큰 근본이라고 여겨왔다(農者 天下之大本). 한국민의 식새활은 물론 주택과 의복 등 생활품 일체를 생산해냈다. 국가의 중공업화 정책으로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우리는 매년 되풀이 되는 식량 기근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으며, 수십년 전부터 쌀이 남아도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한국의 농촌은 제자리 걸음을 하였고, 많은 농민이 도시로 나가 도시의 비대화를 낳았다. 농촌에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친지 30여년이 되고 있다. 한국민족이 지구상에서 없어질 위기에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다. 또한 도농간의 경제적 부가 심각한 격차를 낳게 하였다.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는 것은 문화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현재 농촌을 어떻게 발전시켜야할 것인가는 비단 이곳 백암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전국토의 균형 발전이 이 시대의 최대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 것인가가 본주제의 요지이다.
1948년에 대한민국의 헌법이 제정된 이후 여러 차례 헌법개정이 있었으나 이에는 ‘농업이 기간산업으로 국가에서 육성보호되어야 한다’는 조문은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다. 이제 내년의 헌법 개정에는 반드시 이런 규정을 넣는 운동을 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 개혁안을 낸 반계정신을 구현하는 하나의 길이다.
이번 백암에서의 실학에 대한 학술행사는 전국에 퍼지는 농민운동의 횃불을 올린 것으로 생각한다. 이 농촌운동이 성공하려면 부녀자, 행정가, 교육가, 전주민이 힘을 합쳐야 한다. 이는 상호간의 신뢰를 가지고 사랑하며 항상 상호의견 교환을 하여 좋은 의견을 따르는 협동심이 필요하다.
백암의 농업혁명, 농촌혁명이 성공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가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반계가 자신과 가족보다는 국가와 전 국민을 위해 헌신한 정신은 농촌만이 아니라 도시인에게도 귀중한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17. 11.20)
(daum cafe‘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 의 문지기)
제2주제
반계 유형원과 근기실학
실학박물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6,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 옆에 경기도청에서 세웠다.
반계 유형원과 근기실학
정성희(실학박물관 책임학예사)
1. 머리말
근기학파 형성에 영향을 끼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1622년에서 1673년까지 살았던 조선후기 실학의 비조(鼻祖)로, 그가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이 발발하고 조선 건국 이래 누적되어 오던 여러 가지 모순이 극대화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게다가 삼정(三政)의 문란은 농민들을 파괴하여 노비나 도적으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유형원은 이러한 조선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 폐단을 바로 잡고자 노력한 개혁가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 국가개혁안의 교과서라 평가받는 반계수록(磻溪隧錄)으로 대표되는 그의 개혁사상은 이미 영조 대에 인정을 받아 국정 개혁의 지표가 되기도 했으며, 조선후기 유학자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반계 유형원을 가리켜 “천하의 재상감”이라 칭송하기도 했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가 조선후기 실학의 계보를 “반계가 일조(一祖)요, 성호가 二祖요, 다산이 三祖이다”라고 정리하면서 반계-성호-다산은 조선후기 실학 계보의 주축으로 인정되어왔다. 鄭寅普, 「茶山 선생의 生涯와 業績」, 薝園國學散藁(문교사, 1955), 71쪽.
반계 유형원은 실학의 개창한 인물이고, 성호 이익은 실학을 체계화했으며, 다산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세 사람은 정치적으로 모두 남인 출신이었으며, 근기 지역과도 연고가 있는 인물이다. 반계 유형원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에 있으며, 후손들은 부안 외에도 묘소에서 멀지않은 경기도 과천에 살았다(梁得中, 德村集 권2 “臣伏聞其人旣死 而其子孫 方在湖南之扶安 京畿之果川云” ; 박석무, 「근기실학의 연원탐색과 그 현대적 의의」(다산학 2호, 다산학술문화재단, 2001) 재인용).
때문에 조선후기 실학을 근기 남인 학인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으로 이해되어, 근기 남인 학인을 중심으로 성립한 근기실학이 조선후기 실학을 대표하기도 하였다.
근기실학은 근기 지역을 중심으로 성호학파가 주축을 이뤄 성립된 새로운 학문경향이다. 근기실학은 근기지역 남인계열 즉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한 실학파를 지칭한다. 만약 근기를 경기지역 전체를 가리키게 되면 파주를 세거지로 한 소론계열의 달성서씨 서명응·서호수·서유구나 의정부 지역에 근거한 박세당도 포함되게 된다(윤재환, 「近畿南人 學統의 展開와 星湖學의 形成」 온지논총 36집, 온지학회, 2008 참조).
성호학파를 개창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퇴계학을 계승한 성리학자이지만,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년~1682)과 반계 유형원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아 새로운 학문체계를 이루었다. 허목이 퇴계 이황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학문을 이어 근기지역 학술의 발판을 개척했다면, 허목의 영향을 받아 실학이라는 학문의 토대를 마련했던 학자는 반계 유형원이었다. 다시 말해 허목과 연결되어 있던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이 성호 이익을 통해 이어졌고, 그것이 다시 성호 제자들을 통해 경기도 일대에 퍼져 근기학파를 형성한 것이다. 박석무, 앞의 논문 162쪽.
따라서 근기실학과 반계 유형원은 조선후기 실학의 성립사를 살펴보는데 배우 중요한 키워드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본 발표에서는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의 영향을 관계를 바탕으로 근기실학이 성립되는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근기 남인의 학통과 성호 이익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철학과 통치이념으로 삼았지만, 17세기 이후 성리학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면서 정치적 입장에 따라 학맥이 분화되었다. 당시 학계는 퇴계학파(退溪學派)와 남명학파(南冥學派), 율곡학파(栗谷學派)로 나뉘었는데 이 세 학파는 지역적 기반과 당파적 성향에 따라 구별이 뚜렷했다. 퇴계학파는 영남남인의 사상적 기반이었고, 남명학파는 경상우도를 기반으로 한 북인계(北人系), 율곡학파는 기호지방을 기반으로 한 서인계(西人系)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임형택, 「退溪學의 계승양상과 실학」(퇴계학과 근기실학, 경인문화사, 2014), 187쪽 참조.
서인들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윤증(尹拯, 1629~1714)의 학설 차이에서 발단하여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나뉘었는데, 이들이 숙종과 경종 연간에 중앙정계를 장악하였다. 남인들은 인조 연간에 정권에 참여하기 시작하다가 숙종 초기에 유력한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숙종 대에 성립된 남인계열은 서인세력과의 대립 구도 속에서 권력의 향방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다가 경신대출척(1680년)과 기사환국(1689년)을 거친 뒤 갑술환국(1694년)을 계기로 정권에서 멀어졌으며, 이 시기에 영남남인과 근기 남인이 분리되었다. 이후 영남 남인들은 주로 향촌에 머물러 중앙정계와는 거리를 두었지만, 근기남인들은 영·정조대에 중앙정계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다.
영남 남인을 기반으로 한 퇴계학파는 일찍이 채제공(蔡濟恭, 1720 ~1799)에 의해 영남의 한강 정구(1543~1620)와 기호의 미수 허목(1595~1682)이 사승관계로 연결되면서 근기지방 남인학맥에 접목되었다. 채제공은 성호 이익의 묘갈명을 지으면서 “퇴계 이황의 도통이 한강 정구에게 전해졌고, 한강은 그 도를 미수 허목에게 전했고, 성호는 미수를 사숙한 분이다.”라고 하여 근기 남인의 최고학자인 성호 이익을 퇴계의 학맥과 연결시켰다. 星湖先生文集 附錄卷之一, 「墓碣銘」 “但念吾道自有統緖 退溪我東夫子也 以其道而傳寒岡 寒岡以其道而傳眉叟 先生私淑於眉叟者.” 한편, 근기남인의 학통을 세우면서 채제공은 남인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여 고의적으로 윤휴를 누락시켰다.
채제공의 근기 남인 학통설은 이후 정설처럼 굳어졌는데, 성호 이익 또한 생전에 본인 스스로 퇴계 학맥과 연결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익은 반계 유형원의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을 계승했지만, 학문적으로는 퇴계학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다. 조카인 이병휴(李秉休, 1710~1776)가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오직 성호뿐이요, 퇴계를 공자에 비유한다면 성호는 주자에 비유할만하다”라고 언급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여주 이씨 가문은 이익 세대에 와서 퇴계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퇴계학의 수용은 비단 여주 이씨 가문에 한정되지 않고 성호학파로까지 이어졌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스승보다 더 적극적으로 퇴계학을 계승했는데, 학맥상 근기 남인 계열로 분류되는 성호학파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을 진정으로 존경하였고, 그를 사숙했음을 자부하였다. 김형찬, 「근기실학의 학문 연원과 퇴계학의 학문 정신 – 이익과 정약용의 퇴계학 계승을 중심으로 ; 조성을, 「근기학의 퇴계학 수용과 실학」(퇴계학과 근기실학, 경인문화사, 2014).
이익이 퇴계 학통의 계승자임을 자처한 것은 학문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선대부터 내려온 정치적 경향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익의 가문은 정권에 밀착되어 있는 근기 학인에 소속되어 있었다. 15세기 사환(仕宦) 생활을 기반으로 서울과 경기 지방에 터전을 마련한 여주 이씨 성호가계는 서울과 개성을 중심으로 한 화담학파(花潭學派)의 영향을 받았으며, 화담학파는 남명학파와 함께 광해군대 북인정권의 핵심이었다. 성호 이익의 가계에 대해서는 이성무, 「星湖 李瀷의 가계와 학통」(한국실학연구 2, 한국실학학회, 2000)와 이근호, 「少,陵 李尙毅의 학문과 경세론」(성호학보 6호, 성호학회, 2009) 연구를 참조하였다.
북인에 속하던 성호 이익의 선조들이 남인으로 전향하기 시작한 것은 증조부인 소릉(少陵) 이상의(李尙毅, 1560~1624)때 와서였다. 소북(小北) 계열인 이상의는 중앙 정치의 핵심인물이었는데, 인조반정으로 북인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정치에 참여하면서 당색을 초월한 인재등용으로 서인과 남인에게 모두 인정을 받았다. 이근호, 앞의 논문 21쪽.
이상의를 기점으로 남인계열로 전향하기 시작한 이익의 가문은 부친인 이하진(李夏鎭, 1628~1682)대에 와서 허적(許積, 1610~1680) · 권대운(權大運, 1612~1699) · 윤휴(尹鑴, 1617년~1680) · 허목(許穆, 1595~1682) · 오정창(吳挺昌, 1634~1680) 등과 함께 남인의 핵심으로 부상하였다.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갈렸을 때 이하진은 청남의 편을 들었다. 친하게 지냈던 윤휴와 허목이 청남에 속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사정으로 북인의 학통 대신 남인의 학통을 세울 필요가 있었던 이익은 퇴계를 사숙하고 스스로 퇴계학의 계승자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대해 성호 이익이 윤휴를 배제하고 허목을 내세우려 했다는 의견도 있다. 조성을은 숙종 대 남인이 몰리게 되는 상황에서 성호는 결국 정치적 선택을 해야 했고 이것은 결국 윤휴와 허적을 탁남으로 배제하면서 청남의 의리를 주장하는 방식이 되고 이런 이익의 입장이 오광운을 거쳐 채제공까지 연결되었다고 하고, 다산은 표면적으로 이익을 계승하였지만, 실제로는 윤후-권철신으로 이어지는 성호좌파의 흐름에 더 경도되었다고 하였다(조성을, 「근기학인의 퇴계학 수용과 실학, 앞의 책 78~79쪽). 그러나 윤휴는 허목과 함께 탁남이 아닌 청남이고, 윤휴를 계승하지 않은 것은 그가 사문난적으로 몰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황을 존숭한 이익이 이자수어(李子粹語)를 비롯하여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을 펴낸 것도 이 때문이다. 퇴계 이황을 마치 주자처럼 여긴 이익은 유집(遺集)을 토대로 문인들 기록에 드러난 이황의 언행을 모은 이자수어를 편찬했고, 예(禮)를 논한 서찰을 뽑아내어 이선생예설을 펴내 후학이 암송하여 본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나는 뒤에 태어나서 퇴계의 제자가 될 수 없었고 다만 그분의 책을 읽고 기뻐할 뿐이었다. 스스로 그분의 유훈(遺訓)을 해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크게 부끄럽게 여겨, 그 요점을 뽑아 기록하고 제목을 도동편(道東編)이라 하였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나도록 미처 교정(校正)을 보지 못하였는데, 나의 벗 안백순 정복(安百順鼎福)이 다시 첨삭을 하고자 하여 한결같이 주자의 근사록을 따라 범례를 정하고 벗들과 함께 작업하였다. 이 일은 나의 바람이었지만, 정신이 소진되어 스스로 할 힘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백순에게 부탁하여 윤유장 동규(尹幼章東奎)와 심사숙고해서 함께 일을 추진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책이 완성되자 그 제목을 바꾸어 이자수어(李子粹語)라고 하였다.” 李瀷, 「李子粹語序」, 星湖先生文集 卷之五十.
퇴계학을 계승한 이익이지만, 그의 학문적 성향은 부친이자 스승인 이하진의 영향을 받아 주자학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가졌던 윤휴와 자득(自得)과 실천(實踐)을 중시한 화담학파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윤휴는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주자학 지상주의를 비판하다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으며, 화담학파는 율곡이나 퇴계학파와 달리 주자 성리학에만 집착하지 않고 도교나 양명학 등 이단에 대해서도 관대하였으며 박학적이고도 백과전서적인 지식을 중시하였다. 고영진,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서울 枕流臺學士의 활동과 그 의의」, 서울학연구3, 서울학연구소, 1994 참조.
이하진의 실리적인 학풍은 이미 증조부인 이상의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상의는 북인 계열에 영향을 준 화담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서경덕의 학풍인 자득지학(自得之學)과 유사한 ‘자득(自得)’의 학문자세와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하는 소학(小學)의 정신이 가학의 전통으로 이어지면서 이하진을 거쳐 성호 이익으로까지 계승되었다. 이근호, 앞의 논문 21-25쪽.
성호 이익이 퇴계학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고 경세론을 펼친 것은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익은 윤휴처럼 주자학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보다 경전을 뜻을 강구하여 자득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한편으로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서학(西學)을 가미하고 반계 유형원의 경세론을 적극 수용하여 성호학을 완성시켰다. 이성무, 앞의 논문 21쪽.
성호 이익이 반계 유형원과 연결고리를 맺게 된 것은 정치적으로 남인계였다는 공통점 외에도 혈연 및 학문적으로도 유대가 깊은 사이였다. 유형원의 스승이자 외숙인 이원진(李元鎭)은 이익의 부친인 이하진과 4촌사이였으며, 유형원은 이황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지지하는 등 퇴계학의 영향을 받았다. 결국 유형원 이후 성호 이익이 퇴계학을 수용하면서 근기 남인의 학문 경향은 실학적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이는 다산 정약용까지 연결되었다. 조성을, 앞의 논문 96~97쪽 참조.
3. 근기 남인과 반계수록의 간행
조선후기의 모순된 지배체제를 극복하고자 저술된 반계수록(磻溪隧錄)은 반계 유형원 사후에 곧바로 간행되지 못하고 사장되어 있다가 근기 남인 출신의 실학자들이 활약했던 18세기에 와서야 어렵사리 간행될 수 있었다. 미수 허목을 비롯하여 덕촌(德村) 양득중(梁得中, 1665~1742), 그리고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 순암 안정복에 의해 비로소 세간에 널리 알려지고 칭송받은 것이다.
‘왕을 보좌할 만한 재주이다.’라고 칭찬한 이는 고 상신 허목(許穆)이고, ‘하·은·주 삼대 이후 나라의 대계를 경영할 제일인자이다.’라는 말은 고 판서 권적이 상소에서 한 말이고, 소장을 들고 대궐 문 앞에서 표창하여 추증해 줄 것을 여러 번 청한 이는 고 진사 노사효 등이고, 반계수록을 읽고 ‘옛날 성현의 유법이다.’라고 한 이는 고 상신 윤증(尹拯)이고, 반계수록 서문을 쓰고 ‘천하 만세에 전해질 책이다.’라고 한 이는 고 참판 오광운(吳光運)이고, 상소하여 반계수록 간행을 청하고 심지어 ‘영구히 전하는 책이 되기를 하늘에 기원합니다’라고 말한 이는 고 승지 양득중이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라고 칭찬한 이는 고 자의 이간(李柬)이고, 그의 학술이 높고 넓으며 공정하다고 연석에서 아뢴 이는 고 상신 조현명이고, 순정하고 완비된 행실과 명나라를 정통 왕조로 섬기는 의리를 장계로 보고한 이는 고 판서 이성중이고, ‘우리나라에서 시무(時務)를 안 군자는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뿐이다.’라는 말은 고 징사(徵士) 이익이 기록한 것이고, ‘도덕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도덕이 그 안에 있다.’라는 말은 고 감역 김지행(金砥行)이 반계수록을 읽고 기록한 시이고, ‘학문은 공자와 안연을 본보기로 삼고 재주는 이윤(伊尹)과 여상(呂尙)과 나란하다.’ 등의 말로 만사(輓詞)를 지어 그를 애도한 이는 고 지평 이지렴(李之濂)입니다.“ 正祖實錄, 정조 18년(1794) 12월 29일(임오).
반계수록은 유형원이 우반동으로 가기 1년 전인 31세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무려 19년의 세월이 걸려 1670년에 완성된 거질의 책이다. 반계수록 26권은 유형원의 사상과 국가 개조안이 담긴 거작이었으나, 급진적인 내용으로 서인들이 집권하고 있던 그의 생존 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반계수록이 처음 세간에 관심을 끈 것은 사후 5년이 지난 1678년에 유형원의 벗인 배상유(裵尙瑜, 1610~1686)가 숙종에게 추천하면서부터이다. 배상유는 1677년(숙종3)에 사직서참봉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고는 반계수록을 탐독하고 그 취지에 의거하여 임금의 도리, 정치의 규모, 전제(田制)에 관한 소신을 상소하는 등 반계수록 알리기에 열의를 보인 인물이다.
배상유는 숙종뿐만 아니라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에게도 반계수록을 권유하였다. 이현일은 퇴계의 학풍을 주리설(主理說)을 중심으로 확립한 남인계 학자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던 영남사림을 퇴계학맥 위주로 재건한 영남학파의 중흥조이다. 정만조, 「조선후기 政局動向과 葛庵 李玄逸의 정치적 位相」, 퇴계학 20, 안동대학교퇴계학연구소, 2011, 3쪽.
이현일은 생전에 만난 일은 없었지만, 배상유과 돈독하게 지내면서 유형원을 알게 되었고, 배상유는 이현일에게 초서로 된 반계수록 일부를 보여주었다. 이후 이현일은 배상유가 반계수록 전체를 정사(淨寫)하여 다시 보내주자 이를 모두 읽은 뒤 “세상에 다시 이런 사람이 있겠는가. 이 사람은 없으나 이 책은 있으니 그래도 혹 그 뜻한 바를 조금이나마 볼 수 있구나.”라며 반계수록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유장(柳丈)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전에 도성에 있을 때 보여 주셨지만 객지 생활에 바빠 그 시종을 연구해 볼 잠시의 짬도 없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온 뒤에 늘 잊히지 않아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뜻하지 않게 봉함하여 이 먼 곳까지 보내 주시니 지극하신 뜻에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책은 규모가 매우 크고 증거가 지극히 넓어 언뜻 보면 눈이 어지러워 쉽게 엿볼 수 없으나, 그 세상을 경륜하고 사물을 다스리는 의론을 보면 실로 옛날을 끌어다가 오늘날에 적용시키는 사의(事宜)에 합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개연히 삼대(三代)를 회복하고 싶은 뜻을 두게 하니 매우 성대합니다. 이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올라 정치를 하였다면 그 사업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을 주상께서 보아서 주상의 마음에 맞게 된다면 도움되는 바가 어찌 적겠습니까. 그런데 애석하게도 원대한 경륜을 품고서도 때를 만나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끝내 죽을 때까지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여 志士들에게 무궁한 한을 남겼으니 참으로 슬프고 한탄스럽습니다.” 李玄逸, 葛庵集, 卷之十, 「答裴公瑾」.
이현일은 배상유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반계수록 13책을 절반도 읽지 못하여 나도 모르게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세상에 이런 위대한 인물이 있었음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애석하게도 초야에 묻혀 끝내 죽을 때까지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슬프고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이현일은 반계수록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책은 학교를 세워 사람을 가르치는 법부터 전지(田地) 소유를 고르게 하여 부세(賦稅)를 바르게 하는 것, 화폐를 제조하여 재화를 유통시키는 것, 관직을 설치하여 직분을 나누는 것, 무비(武備)와 군대를 정비하는 것의 요체에 이르기까지 고금을 통해 고증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실제로 시행할 만하였으니, 그 규모가 넓고 심원하며 조리가 치밀하였다.” 李玄逸, 葛庵集 附錄 卷之一, 「年譜」.
배상유는 정사한 반계수록를 이현일에게 보낸 뒤 책의 서문을 부탁하였지만, 이현일은 이를 겸허히 사양하였다. 이후 이현일은 17세 연상의 배상유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유형원의 아들인 유하(柳昰)가 다시 서문을 부탁하자 사양하지 않고 반계수록의 서문을 작성하였다. 李玄逸, 葛庵集 卷之二十, 「遁庵柳公隨錄序」.
반계 유형원과 동시대를 살았던 소론계의 학자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 또한 반계수록을 극찬한 인물이다. 유형원 보다 7세 연하인 윤증은 유형원이 타계하고 38년 지난 1711년, 그의 나이 83세에 반계수록을 읽고 크게 감동받았으며 반계의 사촌 동생인 유재원(柳載遠)의 부탁으로 반계수록의 발문을 썼다. 윤증은 발문에서 “반계수록은 고 처사 유형원의 저술로 세무(世務)에 뜻을 세운 사람이 그것을 실행한다면 끝내 저술한 공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고 하여 유형원의 공적을 높이 표창하였다. 尹拯, 明齋遺稿 卷之三十二, 「跋隨錄」.
윤증은 이현일과 마찬가지로 동시대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지만, 유형원을 만난 적은 없었다. 공허한 학문세계를 비판하고 실심(實心)과 궁경의 실학을 추구했던 윤증에게 반계수록은 국가를 개조할 수 있는 실효서(實效書)였다. 때문에 당대에 조금이라도 인정을 받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유형원이 자취를 숨기고 살다가 일생을 끝마쳐 결국 뜻을 품은 채 땅속에 묻혔음을 안타까워했다.
“진실로 선(善)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정신적인 교유를 나눌 수 있는 법인데, 더구나 우리는 사는 곳이 가까웠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바로 이런 점이 나도 모르게 책을 덮으며 탄식하게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죽었어도 그의 책은 아직 남아 있다. 세상일에 뜻이 있는 자가 혹여 거기에서 취하여 행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군의 저술이 끼친 공이 이로 인해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니, 어찌 끝내 사라질 리야 있겠는가.” 尹拯, 明齋遺稿 卷之三十二, 「跋隨錄」 “苟有好善之誠 雖千里之遠 猶可以神交 況所居又壤地相比者耶 令人不覺掩卷而歎也 然其人雖歿 其書猶存 有意於世務者 或能取而行之 則君之著述之功 於是乎著矣 豈有終至泯滅之理哉.”
남인계 학자들 사이에 크게 입소문이 나고 있던 반계수록은 결국 18세기에 와서 영조 대에 공간(公刊)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스승 윤증으로부터 유형원의 책을 빌려 읽은 양득중이 1741년(영조 17) 영조에게 간행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계기였다. 양득중은 토지제도의 정리는 맹자·왕통·장재를 거쳐서 유형원에서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에게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근세에 호남의 유사 유형원이 법제를 잘 강구하였으니, 처음으로 전제에서부터 설교(說敎), 선거 및 관직, 병록(兵祿)의 제도 등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론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그것을 수록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무릇 13권이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것을 신의 죽은 스승 윤증의 집에서 보았습니다. 지금 그 사람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자손이 바야흐로 호남의 부안과 경기의 과천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그 고을의 수령에게 명하여 그 책을 가져다 바치게 하여 을람(乙覽)에 대비하도록 하시고, 곧 중외에 나누어 반포해서 차례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英祖實錄 영조17년(1741) 2월 23일(무오).
윤증에게서 반계수록을 빌려본 양득중은 영조에게 상소하여 책의 간행을 권하였다. 전제로부터 시작하여 교육문제, 관리등용문제, 관직·봉급·군사제도에 이르기까지의 세세한 것 모두 털끝 하나인들 빠뜨리지 않은 반계수록의 가치를 나열하며 나라를 건질 계책으로 활용하기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윤증과 양득중의 표창에도 불구하고 반계수록은 곧바로 간행되지 못하고 28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양득중의 상소가 있은 후로 10년이 지난 1750년(영조 26)에 좌참찬 권적이 “유형원이 지은 반계수록은 삼대 이후에 제일가는 경국책(經國策)이다”라 평가하며 또 다시 간행을 요청하였지만 무산된 것이다. 결국 반계수록은 반계가 서거하고 96년이 지난 뒤인 1769년에 영조의 지시로 간행될 수 있었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간행하되, 단지 3건만 인쇄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1건은 곧 남한산성에 보내어 판본을 새기게 하고, 다섯 군데 사고(史庫)에 간직할 것도 또한 남한산성에서 인쇄해 가지고 오게 하였다.” 英祖實錄 영조 45년(1769) 11월 11일(기축).
영조실록에 의하면, 반계수록은 당초 1669년에 남한산성에서 인쇄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669년 남한산성에서 인쇄되지 않고 1770년 대구에 있는 경상감영에서 간행되었다. 반계수록 서문을 보면, 영조가 반계수록의 간행을 경상도 관찰사인 이미(李瀰)에게 맡겼다고 되어 있고, 이미의 간행사는 1770년 경인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순암 안정복이 증손 유발(柳發, 1683~1775)의 행장에 “반계수록을 경인년에 영남 감영에서 간행하도록 하였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실록의 기록과 달리 반계수록은 1770년 영남 감영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安鼎福, 順菴先生文集 卷之二十五, 「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秀村柳公行狀」.
반계수록은 남인계 학인들 외에 노론계 학인들에게도 높이 평가받는 경세서였다. 노론 낙론계의 홍계희(洪啓禧, 1730~1771)는 유형원의 사상을 존숭하여 영조에게 반계수록의 간행을 건의해 실현하였고, 영조의 명으로 「반계전(磻溪傳)」을 지어 올렸다. 또한 그가 주도한 균역법도 유형원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홍계희는 젊은 시절에 반계수록을 읽고 베껴서 연구하였으며, 증손인 유발로부터 반계의 유고를 모두 얻어 열독하였다. 반계수록에 대해 당시 모든 학인들이 극찬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를 다스리는 방안은 대체만을 논해야 할 것인데 반계수록은 사소한 절목까지 꼼꼼하게 논하여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는 세속의 평가도 있었다. 이에 대해 홍계희는 “논점이 크기 때문에 속된 의견들이 반계수록을 오활하다고 평가한다.”고 반박하였다. 磻溪隧錄 附錄 傳, “或謂"治國之道 當論大體 何必屑屑於▩細節目之間?"臣以爲不然也 唯其所論者大宜乎俗見之以爲迂矣.”
반계수록은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서울 실학자들에게도 널리 읽어야 될 경제서(經濟書)로 추천되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이서구(李書九, 1754~1825)에게 쓴 편지에서 요즘 세상이 오로지 사한(詞翰)만을 숭상하며 경제를 멸시한다고 전제하고, “반계수록은 경제서로 모든 유자가 읽어야만 할 책이다“라고 하였다.” 李德懋, 雅亭遺稿 卷之六, 「與李洛瑞書九書」
홍대용(洪大容, 1731~1783)도 평소 성학집요(聖學輯要)와 반계수록을 경세유용(經世有用)의 학(學)으로 삼은 인물이었다. 洪大容, 湛軒書 外集附錄, 「從兄湛軒先生遺事」
영조보다 더 적극적으로 유형원의 개혁안을 읽은 군주는 정조였다. 정조는 수원성 조성과 관련하여 “유형원의 반계수록보유(磻溪隨錄補遺)에 수원의 읍치를 북평(北坪)으로 옮기고 성지(城池)를 건축해야 한다는 논설이 있는데 1백 년 전에 마치 오늘의 이 역사를 본 것처럼 미리 이런 논설을 쓴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正朝實錄 정조 17년(1793) 12월 8일(정묘)
수원성을 축성할 때 다산 정약용이 유형원의 축성 이론을 적용한 것은 유명하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은 경세서를 쓰면서 반계수록을 항상 참조하고 비교 검토하였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塞說)에서 “반계가 각 고을에 와국(瓦局)을 설치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주민이 기와 만드는 계를 만들면 십 수년 만에 한 마을이 다 기와집이 될 것이다. 만약 토목이 편리하고 가까운 곳에 와국을 설치하여 기와를 구워 내고 백성에게 무역하게 한다면, 원대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또한 백성을 거느리는 방법은 함부로 이사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 빨리 시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李瀷, 「星湖塞說 卷之十, 「人事門」 <瓦屋>.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일찍이 유형원이 언급한 가뭄대책이 탁견이었다고 하였다.
“반계 유형원이 말하기를, ‘김제의 벽골제, 고부의 눌제, 익산과 전주 사이의 황등제(黄登堤) 등은 다 저수지로서 큰 것이어서 한 지방에 큰 이익을 주는 것이다. 옛날에 온 나라의 힘을 다하여 축조한 것인데 이제 다 폐결(廢決)되었다. 그러나 폐결된 것은 두어 길에 불과하니, 그것을 수축하는 공력을 계산한다면 1000명의 10일 동안의 노역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축조할 때의 공력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못 되건만 아무도 건의하는 이가 없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만약 이 세 저수지로 하여금 1000경의 물을 저축할 수 있는 저수지가 되게 한다면 노령(蘆嶺) 이상은 영원히 흉년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丁若鏞, 牧民心書, 「工典」 6조 <川澤>, 柳磻溪馨遠曰 金堤之碧骨堤 古阜之訥堤 益山全州之間黃登堤 此是陂堤之巨者 有大利於一方 前古 極一國之力成築 今皆廢決 所決者不過數丈 計其功 不過千人一旬之役 比之初築 不啻萬分之一 無人建議 深可歎惜 若使此三堤 貯爲千頃之陂 則蘆嶺以上 永無凶年矣.”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반계 유형원의 경세관은 성호 이익을 거쳐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 등 근기 남인계 학인들이 실학사상을 정립할 때 토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실학의 비조로 평가되는 것도 이러한 학문적 영향관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4. 근기실학의 성립과 반계 유형원의 영향
실학은 주지하다시피 18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근기(近畿) 지방에서 등장한 한국유학의 새로운 학풍을 말한다. 물론, 조선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학풍을 굳이 통시대적인 개념인 실학으로 지칭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제기는 있지만, 한우근, 「명재 윤증의 실학관」, 務實과 實心의 유학자 명재 윤증,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01.
실학은 이미 역사용어로서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본다. 조선후기 실학 개념의 논쟁은 우리 역사에서 정말 실학이 존재하였는가의 회의론이 아니라, 통시대적 개념을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탈시대적 개념을 사용해야 하는지의 문제이다.
조선후기 실학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되던 어려움 속에서도 농업생산력이 점차 회복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상업이 발달하여 변화된 시대 상황에 맞는 새로운 이념으로서 등장하였다. 조선초기부터 사상적 토대를 이루던 성리학이 사장학(詞章學)이나 예학(禮學)으로 흘러 변화하는 시대 요구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학문 세계는 백성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경향이 강하였고 이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실용(實用)을 중시하는 실학적 학풍이 일어났다.
17세기에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실학적 학풍은 18세기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학문적 혹은 지역에 따라 그 특징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18세기 전반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경세치용(經世致用) 중심의 실학자와, 18세기 후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중심으로 한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 학문 경향의 실학자, 19세기 전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중심으로 하는 고증학적 성향의 실학자들로 크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우성, 「실학연구서설」, 문화비평 7·8, 1970.
이 가운데서도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한 남인(南人) 출신의 학자들은 서울에서 가까운 근기지역에서 생활하여 서울 출신 실학자들에 비해 농민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농민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 신분 제도, 관리 선발과 임용, 중앙과 지방의 행정 체계 등에 대한 개혁론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경세치용적 실학사상을 대표하는 성호 이익의 학문은 정상기(鄭尙驥, 1678~1752), 이중환(李重煥, 1690~1752), 윤동규(尹東奎, 1695~1773), 신후담(愼後聃, 1701~1761), 이병휴(李秉休, 1711~1776),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이맹휴(李孟休, 1713~1751),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우하영(禹夏永, 1741~1812), 이가환(李家煥, 1742~1801),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정약용(丁若鏞, 1761~1836) 등에게 이어져 근기지역을 중심으로 한 성호학파를 성립시켰다.
성호학파는 지역적으로 근기지방에 연고를 두어 근기학파라 불리기도 하고, 학문 성향과 관련하여 근기실학이라는 개념으로 불리기도 한다. 근기실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그 개념 범위는 매우 넓어진다. 근기라는 용어만 놓고 보면, 기내(畿內) 즉 서울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이내의 땅을 의미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유형원을 비롯하여 근기 지역을 활동무대로 삼았던 박세당(朴世堂)·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최한기(崔漢綺)까지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재 서울과 경기지역이 모두 포함되어 근기=경기라는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등 기술 혁신을 통해 조선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한 박지원과 박제가 등 북학파들은 지역적으로 서울이라는 도시적 분위기에서 살았기 때문에 조선의 뒤떨어진 경제사정을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개발을 통해 일신하고자 했다. 서울 출신의 실학자들은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허위의식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허위의식은 신분차별과 소중화의식이었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서울 실학자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중심으로 한 조선사회의 신분적 차별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사행단에 속하여 청나라를 다녀온 뒤로는 중국과 서양으로부터 선진문화를 수입하여 조선의 문화를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이들은 ‘북학파(北學派)’라고도 지칭되는데, 중국으로부터 선진적인 문화를 흡수하고자 하는 열망이 잘 표현된 명칭이다.
북학파로 분류되는 홍대용과 박지원, 박제가 등은 성호학파와 달리 수도 서울에 거주하면서 중국 연행(燕行)을 통해 이용후생적 학문 경향을 보인 인물들로 성호학파를 중심으로 한 근기실학파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따라서 근기실학에서 근기는 사전적 의미의 광범위한 개념이 아닌 근기지역 남인계열, 특히 18세기 성호학파를 중심으로 근기남인 출신의 학자들을 주 대상으로 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근기실학을 근기남인실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인데, 최근에는 근기라는 표현대신 경기실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박석무, 앞의 논문, 물론, 지역적 특색만을 따져 경기실학, 서울실학, 호남실학 등으로 지칭한다면, 편협적인 사고로 이해한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기실학의 종주인 성호 이익은 퇴계 이황을 사숙하며 퇴계학의 계승자임을 자임하였으나, 실학적 학풍은 혈연과 학문적 배경이 긴밀했던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유형원은 외숙부 이원진의 집에서 태어나 고모부인 김세렴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이원진은 이익의 백부였다. 따라서 유형원과 이익은 내외종간 사이였다. 김세렴도 남인계 학자로 이익에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이다.
이익은 여주 이씨 가문의 외손계인 유형원을 일생동안 사모하고 존경하여 “국조 이래로 시무를 알았던 분을 손꼽아 봐도 오직 이율곡과 유반계 두 분이 있을 뿐이다. 율곡의 주장은 태반이 시행할 만하고, 반계의 주장은 그 근원을 궁구하고 일체를 새롭게 하여 왕정의 시초를 삼으려 했으니, 그 뜻은 진실로 컸다.”고 하여 반계 유형원의 시무론을 높이 평가하였다. 나아가 “반계 선생은 호걸의 선비로 학문은 천인을 꿰뚫고 도(道)는 온 인류를 포용하고 있다.”라고 칭송하였다.” 李瀷, 「磻溪隧錄序」, 星湖先生文集 卷之三十二.
“다행스러운 것은 저술한 수록 한 책이 먼지가 쌓이고 좀이 슬며 썩어서 부스러지는 가운데에도 없어지지 않고 점점 세상에 나와서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따금 감탄하며 책을 덮고는 너나없이 시무(時務)를 아는 요결(要訣)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바삐 전록(傳錄)해다가 일일이 보관해 두었다. 또한 조정에 바치고서 반드시 시행될 수 있다고 하였으니, 그 높이고 숭상하는 것이 거의 지극하다고 하겠다.” 李瀷. 「磻溪隧錄序」, 星湖先生文集 卷之三十二.
일찍이 조선최고의 시무자로 율곡과 반계를 꼽은 이익은 유형원과 관련하여 「반계수록서(磻溪隧錄序)」, 「반계유선생유집서(磻溪柳先生遺集序)」, 「반계선생전」(磻溪先生傳)」이라는 세 편의 글을 남겼다. 이익은 「반계유선생유집서」에서 유형원의 시문집인 반계집(磻溪集) 6권을 소개하고 “몸을 다스리고 집을 다스리는 것으로부터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을 사랑하는 데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다룬 것이 반계집이다.”라고 하였다. 반계수록과 반계집은 양 날개가 되어 서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 李瀷, 「磻溪柳先生遺集序」, 星湖先生全集 卷之五十.
또한 반계유선생전」에서는 “세상의 학자들이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한갓 암송만 하고 훈고(訓詁)하는 것만을 숭상하여 결국에는 큰소리만 치고 실질이 없는 데로 돌아가 백성들이 그 화를 입는데 반계 선생이 선왕의 법을 가져다가 책 한 권을 지어 수록이라 명명하였으니, 요컨대 오늘날 행할 만한 것이다.” 星湖先生文集 卷之三十二, 「磻溪隧錄序」.
라고 하여 반계수록을 최고의 경세지서(經世之書)로 인식했다.
“옛날의 어진 임금들의 법을 취해다가 고찰하여 개혁의 틀을 잡고 나라의 법을 참고하여 하나의 저서를 엮었으니 규모가 웅장하고 절목이 자상하였다. 인정(人情)에서 증험해보고 천리(天理)에서 헤아렸으니 힘줄과 맥이 서로 연결되고 기혈이 유통하였다. (중략) 책은 당시의 시대에 행해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요체였다.” 星湖先生文集 卷之三十二, 「磻溪隧錄序」.
성호 이익이 기록한 반계 유형원 자료에는 반계수록 이외에도 이기총론(理氣總論) 1권, 논학물리(論學物理)』 2권, 경설(經說)』 1권, 시문(詩文)』 1권, 잡저(雜著)』 1권, 문답서(問答書)』 1권, 속강목의보(續綱目疑補)』 1권, 군현제(郡縣制)』 1권, 동사조례(東史條例)』 1권, 정음지남(正音指南)』 1권, 기행일록(紀行日錄)』 1권 등의 저술이 있었고, 편집한 책으로 주자찬요(朱子纂要)』 15권, 동국문(東國文)』 11권, 기효절요(紀效節要)』 1권, 서설(書說)』ㆍ서법(書法)』 각 1권, 둔옹고(遁翁稿)』 3권, 여지지(輿地志)』 13권 둥이 있었으며. 병서, 음양율려, 성문, 지리·의약·복서·산수·역어 등 온갖 분야에 정통한 학자였다고 평하였다.
반계 유형원의 시무론이 세상에 하나도 시행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 이익은 그 을 이어받아 시무서인 곽우록(藿憂錄)을 지었다.
“선생은 비록 초야에 있었지만 또한 세상을 과감히 잊은 적이 없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아조에는 오직 이율곡과 유반계가 시무(時務)를 가장 잘 알았는데 억눌린 채 시행하지 못하였거나 감추어 둔 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이에 곽우록을 지었으니, 18조목이다.” 星湖先生文集 附錄, 「諡狀」 “嘗曰我朝惟李栗谷 柳磻溪爲識務之最 而或抑而不施 或蘊而未顯 是爲可恨 於是作藿憂錄 其目十八”
유형원은 “나쁜 제도가 나쁘게 된 것은 그 원인이 몇 천 년 전에 생기고 쌓인 것으로서 착오에 착오를 거듭하여 낡은 규정이 되었으며 그것이 서로 엉켜서 마치 흐트러진 실과도 같게 되었다. 그 원인을 구명하여 혼란하게 된 것을 제거하지 않고는 그것을 바로잡을 수가 없다.” 柳馨遠, 磻溪隧錄 「書隧錄後」 “顧弊之爲弊也 其積漸數百千年 以謬襲謬 仍成舊規樛錯相因 有如亂絲 不究其本而祛其棼 無以救正”.
고 하여 제도개혁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한 바 있다. 이익은 곽우록에서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있으면 고치게 됨은 자연 형세이다.”라고 하여 유형원의 제도개혁론을 이어받았다.
이익은 반계수록이 간행된 것은 다행이나, 여전히 겉으로만 칭찬할 뿐 마음 속으로는 비판하며, 말로는 장려하면서 실제에는 적용하지 않는 현실을 비판했다.
“근세에 반계 유 선생이 지은 수록 1편은 우리나라의 시무를 아는 데에 가장 좋은 책인데, 또한 감히 당시에 쓰이지 못하고 책장 속에 사장된 채로 있다가 뒤에 점차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국가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좋아하는 체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칭찬하지 않고, 말로는 장려하면서도 일에는 적용하지 않았으니, 어찌 일찍이 한 발짝이라도 실천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또한 길을 달리는 사람이 길가의 허물어진 집을 얼핏 보고서 다시 고쳐 짓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경우로, 애당초 진심이 아니니, 앞에서 말한, 집을 빌려 사는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李瀷, 「磻溪柳先生遺集序」, 星湖先生全集 卷之五十, “近世磻溪柳先生有隨錄一編 爲東方識務之最 亦不敢售于時 私藏巾笥 後稍稍爲人識 至有達諸國家 然色好而心不賞 語奬而事不錯 何曾一步向實踐去乎 此又猶夫走脚人 瞥見路旁敗屋 謂合改作 而初非眞情 與向所謂僦居何別.”
반계 유형원을 경세치용학의 선구자로 바라보는 성호의 인식은 제자인 순암 안정복에게로 이어졌다. 순암 안정복은 “내가 어려서 호남에 있으면서 유반계 선생이 대덕군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때는 아는 것이 없어 상세한 내용을 들을 수가 없었으므로 장성한 뒤에 생각하고는 늘 깊이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겼다.” 安鼎福, 「磻溪年譜跋」, 順菴先生文集 卷之十八.
고 고백하며 존경심을 표하였다. 안정복은 64세가 되던 1774년에 가서야 반계의 증손인 유발(柳發)을 서울의 도저동(桃楮洞)에서 만나 반계수록을 비롯한 여러 저술들을 빌려서 읽게 되었고 이후, “반계 학문의 정밀함과 도량의 원대함은 후세의 말 잘하는 선비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고 평하였다. 안정복은 이듬해인 1775년에 유발과의 인연으로 「반계연보발(磻溪年譜跋)」을 썼고, 유발의 행장도 지었다.
한편, 경세서에서 반계수록을 많이 인용한 다산 정약용은 유형원을 칭송하는 시를 지어 그의 업적을 기렸다.
세상을 다스릴 진지한 뜻을 / 拳拳經世志
유일하게 반계옹에게서 발견했네 / 獨見磻溪翁
은거하여 이윤 관중 흠모했지만 / 深居慕伊管
그 명성 왕궁과 너무 멀었네 / 名聞遠王宮
큰 강령은 균전법에 있고 / 大綱在均田
천만 개의 그물눈 서로 통했네 / 萬目森相通
정밀한 생각 틈새를 기워가면서 / 精思補罅漏
개조하고 가늠하며 각고의 노력 / 爐錘累苦工
찬란한 군왕 보좌 재목으로서 / 燁燁王佐才
산림 속에 묻히어 늙어 죽으니 / 老死山林中
남기신 글 세상에 가득하건만 / 遺書雖滿世
백성 은택 끼친 공 있지 않네 / 未有澤民功 與猶堂全書 1집, 2권, 詩古25, 「詩二十四首」
다산 정약용은 성호 이익의 유저(遺著)를 모두 탐독하였고 유저를 발간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면서 학문의 계승자로 자임하였다. 이익의 실학사상을 계승한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유형원에 대한 언급을 하였고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여가가 있을 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반계수록』과 『성호사설』을 거명하였다. 丁若鏞, 茶山詩文集 卷之二十一, 「書」 <寄淵兒>, “零瑣詩律 雖或得名 不足有用 須自今冬 以至來春 讀尙書左傳 雖佶屈聱牙 艱險淵深 旣有注解 潛心玩究 可以讀之 以其餘力 觀高麗史磻溪隨錄 西厓集懲毖錄 星湖僿說 文獻通考等書 鈔其要用 不可已也.”
5. 맺음말
반계 유형원은 서울에서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비록 호남 부안에서 살았지만, 성호 이익를 비롯한 근기학파와 매우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정치적으로 남인계였으며, 묘소 또한 부안이 아닌 경기도의 용인에 있고, 후손도 부안을 비롯하여 선영이 있는 경기도의 과천에 거주했다. 때문에 위당 정인보가 거론한 반계-성호-다산으로 이어지는 조선 실학의 계보는 근기실학파의 계보로서 직접적인 사승관계는 아니었으나 학문적 전승을 통해 실학의 중심적인 학통을 형성하였다. 박석무, 앞의 논문.
※ 참고자료
李德懋, 雅亭遺稿
洪大容, 湛軒書
柳馨遠, 磻溪隧錄
安鼎福, 順菴先生文集
梁得中, 德村集
尹拯, 明齋遺稿
李瀷, 星湖先生文集
李瀷, 「星湖塞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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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鏞, 牧民心書,
丁若鏞, 與猶堂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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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학파를 개창한 성호 이익은 생전에 퇴계학의 계승자로 자처하였지만, 그의 경세론은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북인계였던 여주 이씨 성호집안은 부친인 이하진대에 와서 남인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였고, 이후 이익은 북인의 학통 대신 남인의 학통을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은 부친 이하진의 영향으로 북인계열의 영향을 준 화담학파의 영향을 받아 실학적 학문 경향을 띠었다. 성호 이익이 퇴계학을 계승하면서도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고 경세론을 펼친 것은 이러한 가풍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울러 혈연 및 학문적으로 유대가 깊었던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까지 더해지면서 근기실학의 토대가 되는 ‘성호학’을 탄생시켰다.
유형원의 경세관이 실려 있는 반계수록은 18세기 근기 남인 출신의 실학자들에 의해서 널리 알려졌으며 칭송받았다. 성호 이익은 조선최고의 시무자로 율곡과 더불어 반계를 꼽았으며, 유형원과 관련하여 반계수록서」·「반계유선생유집」·「반계선생전」을 짓기도 했다. 또한 성호 이익의 대표적 경세서인 곽우록은 반계수록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었다. 반계 유형원의 경세치용학은 성호 이익을 거쳐 순암 안정복과 다산 정약용 등 성호의 제자그룹으로 이어져 근기실학파들은 반계 사상을 진정으로 계승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주제
부안지역의 반계 유형원 유적과 선양활동
사진
반계의 독서당
전라북도지방기념물 22호로 1974년에 지정, 복원되었다. 이곳에서 유형원은 20여년간 『반계수록』, 『동국여지지』 등을 편찬하였다.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 128-7번지 소재
부안지역의 반계 유형원 유적과 선양활동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
[목차]
1. 반계 유형원과 부안 우반동
2. 우반동의 반계 유형원 유적
3. 부안지역의 반계 유형원 선양사업
1. 반계 유형원과 부안 우반동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은 17세기에 조선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론을 주창한 실학의 비조이다. 그는 32세 되던 1653년(효종 4) 한양에서 부안 우반동(扶安 愚磻洞)으로 이거하여, 1670년(현종 11) 49세 때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완성하였으며, 3년 후인 1673년(현종 14) 부안에서 5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은 그가 한양에서 내려와 20여년을 살면서, 토지제도 개혁을 비롯하여 자신의 현실개혁론을 집대성한 『반계수록』을 지은 곳이다. 부안 우반동과 반계 유형원이 연계성에 대한 논고로 이동희, 「반계 유형원의 생애와 부안 우반동」 (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과 그 계승방안』, 전북사학회, 2013)이 있다..
문화유씨 반계 유형원 가문과 전라북도 부안 우반동의 인연에 대해 일반적으로 그의 9대조 유관(柳寬)이 받았다는 우반동 사패지를 든다. 유관이 조선건국 후 개국원종공신으로 책봉되어 부안 우반동 일원의 땅을 사패지로 받았다는 것이다. 사패지 이야기는 1636년(인조 14) 그의 조부 유성민이 부안김씨 김홍원에게 우반동 땅 30결을 팔면서 작성한 매매문기에 나온다. 『扶安金氏愚磻古文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176~177쪽, 토지문기 16.
유관은 태종대 전라감사를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유관은 태종 5년(1405) 7월부터 6년 2월까지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처음 이름자는 ‘觀’이며, 뒤에 ‘寬’으로 바꾸었다
또 반계의 직계 선조는 아니지만 유관의 후예들이 전라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전라도 나주 모산(현 영암군 신북면)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유상운(柳尙運)이 그 후예이다. 유상운의 아들이 소론 4대신의 하나로 노론 처단에 강경파였던 좌의정 유봉휘(柳鳳輝)이다. 유관에게는 유맹문(柳孟聞)ㆍ유중문(柳仲聞)ㆍ유계문(柳季聞) 세 아들이 있었고, 이 중 장자 유맹문의 후예들이 전라도에 살았다. 반계는 유계문의 후예이다. 『만성대동보』, 문화유씨.
반계가 부안 우반동으로 이거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조부 유성민(柳成民)과 관련되어 있다. 조부 유성민은 1612년(광해군 4)에 오랫동안 묵혀져 있던 우반동에 처음 들어와 논밭을 일구고, 한양과 부안을 오가며 살다가 1636년 병자호란 후에는 아예 우반동에 머물면서 생활하였다. 이런 사실이 우반동 토지매매문기에서 확인된다. 『扶安金氏愚磻古文書』, 176~177쪽, 토지문기 16.
토지문기에 의하면 우반동이 한양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방치해둔 지가 수백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 매매문기에 증인 유형원의 서명이 있다. 증인 학생 덕창(學生 德彰)으로 되어 있는데, 덕창은 유형원의 아명(兒名)이다.
우반동의 주역으로 흔히 부안김씨를 생각하지만, 우반동에 들어와 처음 마을을 일군 것은 반계 집안이며, 부안김씨들이 우반동에 들어온 것은 반계 사후이다. 반계 사후에 반계 후예들은 우반동을 떠났지만, 부안김씨들은 우반동에 3백년간을 세거하면서 유력가문이 되어 우반동김씨로 불렸다. 유형원의 가문이 북인, 남인계인 반면, 김석필, 김홍원, 김명열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우반동김씨들은 서인 노론계이다. 띠풀이 우거지고 잡목이 무성한 우반동 골짜기를 일구어 전답을 만들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게 만든 첫 주인은 반계의 조부 유성민이었다.
반계가 우반동을 방문한 것은, 우반동으로 이거한 32세 때가 처음이 아니다. 「반계선생연보」에 보면 반계는 16세 때 이미 조부 유성민을 뵙기 위해 우반동을 찾고 있다. 반계는 우반동으로 이거하기 전에 이미 우반동을 다녀가 이 땅을 잘 알고 있었다.
반계가 우반동에 들어간 것은 조부의 3년상을 마친 32세 때이다. 반계는 조부 유성민의 상(喪)을 마친 32세 되던 1653년(효종 4) 겨울에, 가솔들을 이끌고 전라도 부안현 우반동(지금의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으로 이거하였다. 반계는 우반동으로 내려와 조부가 일구어 놓은 전답을 경작하면서 현실개혁론을 집대성한 『반계수록』을 49세 때 완성하였다. 3년 후 52세 되던 1673년 3월에 생을 마감하여 서당 옆에 임시 안장하였다가 5월에 용인 정배산 선영아래에 모셨다.
2. 우반동의 반계 유형원 유적
반계는 부안 우반동에 20여년을 살았다. 우반동은 삼면이 높은 산자락으로 둘러쳐져 있고 그 안으로 탁 트인 너른 들녘이 있으며, 앞은 바다이다. 우반동은 4개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마을을 관통하는 장천(長川)을 기준으로 서편마을과 동편마을(동변리)로 나뉘고. 그 뒤 산자락 쪽으로 감불(甘佛)마을이며, 앞 바닷가 쪽이 만화동(萬花洞)이다. 서편마을이 지금의 우신(牛新)마을이고, 동편마을 동변리가 지금의 우동(牛東)마을이다. 이 중 우신마을이 반계가 살았던 곳이고, 우동마을이 숙종대 초 부안김씨들이 들어와 살았던 곳이다. 우반동 앞쪽은 바닷물이 만화동 위에서 반계 집터 쪽으로 100m정도까지 들어온 포구였다고 한다.
우신마을을 가로질러 산자락으로 오르는 길 좌편 산중턱은 반계가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학동들을 가르쳤던 서당이 자리했던 곳이다. 우신마을 주차장에서 산으로 난 길 반계로를 따라 450m정도 오르면 복원된 서당터가 나온다(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 128-5). 반계가 우반동으로 들어온 이듬해인 1654년에 서당을 건립하였으며, 지금의 서당건물은 1981년에 20평 정도로 복원된 것이다. 홍성덕ㆍ임숙정, 「반계 유형원 유적의 보존과 활용」 (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과 그 계승방안』, 전북사학회, 2013), 194쪽.
건물 안과 밖에 각각 우물이 있다. 이 우물들도 반계가 판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서당 아래 ‘반계정’정자는 근래에 세운 것이다.
서당에서 왼쪽으로 몇십미터 올라가면 반계를 초빈한 자리가 나온다. 1673년 3월에 운명하여 여기에 임시로 안장하여 장사를 지내고, 5월에 반계의 유명에 따라 죽산 용천(현 용인시 백암면 석천리 황석마을) 정배산 선영 아래로 옮겨 모셨다. 근래에 가묘를 만들고 안내문을 세웠다.
반계 집터는 주차장에서 우신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안쪽으로 200m 정도 더 들어가면 길가 우편에 있다. 집터로 들어가는 길가에 반계가 1666년에 팠다는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을 지나면 반계 집터라고 하여 반계공원부지가 조성되어 있다. 공원부지 가운데에는 ‘반계 유형원 선생 유적비’가 서 있다. 1974년에 만화동 마을 입구에 세웠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본래의 집자리는 지금 비가 서있는 곳이 아니라 그 앞 논자락이다.
반계집터에 관해 부안의 향토사학자 고 유종남씨는, ‘1991년까지만 해도 집터의 담장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1992년 경지정리사업으로 논이 되었으며 후원의 대나무밭도 개간되어 지금은 100여평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 유종남편, 『실사구시의 횃불 -반계 유형원의 실학과 인생』 (고글, 1999), 46쪽.
한학자 김종규씨(우반동 거주, 2013년 구술 당시 81세, 부안김씨)도 반계가 살던 집은 허물어지고 밭으로 변했다가 경지정리를 하면서 논이 되었다고 하였고, 경지정리 전만해도 집터 주변으로 무너진 담장들이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담장은 흙을 쓰지 않고 돌로 쌓았으며, 규모가 마치 성같이 커서, 담장 안이 한마지기 반, 300평 정도는 되었고 아름드리나무들이 많았다고 하였다. 집의 방향은 담장으로 보아 정남이 아니라 동남간방쯤 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동희, 앞의 논문, 152쪽.
반계 유적지를 지나 길가 오른편 논 가운데 돌기둥이 있다. 반계가 군사훈련을 시킬 때 쓰던 여러 개의 돌기둥 중의 하나라고 한다. 돌기둥 중 하나는 우신마을 정자나무 옆에 있다가 해방되던 해에 태풍으로 나무가 부러지면서 함께 넘어졌다고도 한다. 현재 지표면 위로 나온 돌기둥의 높이는 2m 정도 된다.
부안 보안면 우동리 반계유적지에서 직선거리로 8㎞ 정도 떨어져 상서면 가오리 동림마을 원촌에 반계를 배향한 동림서원(東林書院)이 있다. 동림서원은 1693년(숙종 19)에 건립되었고,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지금은 유허비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이 서원의 본래 명칭은 반계사(磻溪祠)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계의 제자 김서경의 문집 『담계유고』에 영조 4년 호조판서를 지낸 권이진(權以鎭)이 이 서원에 올린 제문이 실려 있는데 「배향반계사제문(配享磻溪祠祭文)」으로 되어 있다. 또 김서경이 1730년 이 서원에 배향될 때도 연보에 ‘반계사’라고 하였다. 김서경저ㆍ박완식역, 『국역 담계유고』, 289쪽 및 282쪽
『연려실기술』에는 파산서원(巴山書院)으로 나오고 계유년(숙종 19년, 1693)에 세웠는데 지금의 이름은 동림서원(東林書院)이고 반계와 김서경, 유문원이 배향되어 있다고 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4, 祀典典故, 서원, 전라도, 부안.
동림서원에 3인이 배향되었음은 김서경의 문집 『담계유고』, 「반계유선생에게 올리는 고유문」에서도 확인된다. 김서경저ㆍ박완식역, 『국역 담계유고』, 291쪽
후에 부안김씨 초당 김회신(草堂 金懷愼)이 동림서원의 주벽으로 들어가 배향인물이 4인이 되었다. 동림서원이 건립된 숙종 19년은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고 있던 때이다. 서원이 서있는 동림마을은 반계의 제자로 같이 배향된 김서경의 출신지이다. 현재 담계 묘소와 재실도 거기에 있다.
이런 반계유적 활성화와 관련해 또 주목할 것은 우반동 주변의 문화유적들이다. 부안은 들과 산, 바다를 끼고 있어 자연경관이 빼어날 뿐 아니라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수려한 내변산이 있고, 바다로 둘러져 있다. 가까이 고려청자 양대 생산지인 유천리 도요지가 있고, 곰소만과 염전, 내소사가 있으며 새만금이 있다. 이러한 자원을 연계시키는 것도 반계유적을 활성화 하는데 빠질 수 없는 방안이다.
3. 부안지역의 반계 유형원 선양사업
부안 우반동은 반계사후 그 후예들이 떠나가고 부안김씨들이 들어와 새 주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반계의 후예들이 모두 우반동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영조 때 승지 양득중이 올린 소에 반계의 후예들이 부안과 과천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반계행장을 지은 부안김씨 김서경도 반계의 제자이자 사돈간이었다. 반계 사후 우반동을 떠난 후예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우반동에 거주한 후예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반계 사후 우반동에 본래의 주인인 반계의 후예들도 살고, 새로 들어온 부안김씨들도 세거지를 달리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반동은 현재 우신마을, 우동마을, 감불마을, 만화동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신마을이 반계가 살았던 곳이고, 우동마을이 부안김씨들이 들어와 세거했던 마을이다. 그러다가 반계의 후예 문화유씨들은 점차 힘을 잃고 흩어졌던 것 같고, 부안김씨들이 향촌주도권을 장악하여 갔던 것으로 보인다.
우반동에 거주하는 한학자 김종규씨의 구술에 의하면 반계후손들은 100여 년쯤만 해도 두 가호정도 살았으며, 유씨 무덤이 몇 장 있어 반계의 후손이라고 하는 유희열씨가 벌초를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우반동에는 반계의 후예들이 한집도 살지 않는다. 이동희, 앞의 논문, 154쪽.
그렇게 되면서 반계가 임시 안장되었던 초장터도 관리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당 옆에 고총이 있었는데 묵어서 보이지도 않았다는 것은 그런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다가 지역민들이 가매장했던 묘역을 돌보고 매년 제를 지내오기 시작하였다. 유종남편, 앞의 책, 154쪽.
고총은 근래에 새롭게 단장되고 안내문도 세워졌다.
반계를 기리기 위한 부안지역의 첫 번째 선양사업은 1974년 9월 27일 부안군과 군민들이 ‘반계 유형원 선생 유적비’를 우반동 입구 만화동에 건립한 것이다. 현재 이 유적비는 우반동 안쪽으로 더 들어와 반계의 집터 뒤 반계공원부지로 이건되어 있다. 이어 9월 27일에 산 중턱에 있는 반계서당 일원을 전라북도 기념물 22호로 지정하였다. 1981년 12월 26일에는 석축만 남아 있던 반계서당을 전면 4칸 측면 3칸(약 20평) 기와 건물로 복원하였다.
이후 반계서당만을 중심으로 유적을 관리해 오다가 2000년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반계 선양과 자원화를 위해 『반계 유형원 유적지 정비공사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서 2003년에 반계서당 초입에 주차장을 건립하고 화장실을 신축하였다. 2004년에는 반계 집터자리를 매입하여 발굴하였다고 하는데, 반계집터 위 반계공원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2009년에는 반계서당에 오르는 탐방로 일부를 박석으로 포장하였다.
반계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번 크게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2012년 이후이다. 전라북도 주관하에 2012년 7월 11일, 9월 4일 1, 2차 전북문화자원활용을 위한 TF팀 회의를 거쳐서, 9월 20일에 전라북도의 적극적인 관심과 부안군의 협력하에 부안군청에서 반계유형원 선양사업 추진위원회를 개최하여 추진위원(13인)과 포럼개최를 확정하였다.
추진위원회는 이후 2013년 1월 24일에 2차 회의를 부안군청에서 가졌고, 2013년 5월 8일 전라북도에서 주관한 선양사업 간담회를 거쳐서, 6월 26일 3차 추진위원회를 부안군에서 개최하였다. 이후 선양사업 추진위원회를 반계선생기념사업회로 확대 개편이 논의되다가 추진위는 유야무야 되어 지금은 운영되지 않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부안출신의 김종수 전도의원을 중심으로 반계 유형원 선생 기념사업회(가칭) 정관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얻어진 것들이 있다. 반계학술대회와 호남실학원 건립 추진이다. 반계 학술대회는 2012년부터 올해까지 6차에 걸쳐서 매년 전북도청과 부안군 주최하에 열리고 있다.
2012년 첫 번째 학술대회 “반계 유형원 선양사업 포럼”을 반계유형원선양사업추진위원회 주관하에 10월 9일 전북도청에서 개최하였다. 2차 학술대회는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과 그 계승방안”이라는 주제로 전북사학회 주관하에 2013년 10월 25일에 부안군청에서 열렸다. 이 학술대회발표문은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과 그 계승방안』(전북사학회, 2013)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2014년에는 3차 학술대회 “반계 유형원의 저술을 통한 계승방안”을 부안문화원ㆍ전북대이재연구소 주관하에 12월 5일 전북도청에서 개최하였다. 2015년 11월 13일에는 4차 학술대회를 “반계 유형원과 호남실학 –교류와 전승”을 주제로 부안문화원ㆍ전북대이재연구소 주관하에 부안읍사무소에서 열었다. 2014년에는 반계자료조사도 병행하여 결과물을 보고서 형태로 발간하였다.
5차 학술대회부터는 국제학술대회로 확대 개최하였다. 2016년 11월 25일 5차 학술대회는 “국제적 시각에서 본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을 주제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열렸다. 전라북도ㆍ부안군에서 주최하였고, 한국실학학회ㆍ전북대이재연구소가 주관하였고,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6차 학술대회는 2017년 10월 13일부터 14일까지 이틀간 『반계유고』 출간기념으로 한국실학학회가 주관하였다. 국제학술대회로 “반계 유형원과 동아시아 초기실학”이라는 주제하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대강당에서 열렸다. 전라북도ㆍ부안군ㆍ실학박물관이 주최하였고, 한국연구재단이 후원하였다.
호남실학원 건립추진은 첫 번째 학술대회에서 제기되었다. 정구복은 기조발제에서 호남실학수련원 건립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하우봉은 호남실학박물관 건립 추진을 개진하였다. 이런 의견을 토대로 가칭 호남실학수련원 건립 검토가 이루어져 2013년 5월 8일 전북도청 주관하의 간담회에서 명칭을 호남실학원으로 하여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 간담회에서 반계선양사업회를 반계기념사업회로 확대 개편하는 것도 검토되었다.
이를 토대로 2013년 3차 반계선양추진위원회에서 전북도청에서 마련한 호남실학원건립안이 보고되었다. 이에 의하면 “(국가적 필요성) 사회변혁사상인 실학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함으로써 문화융성과 이를 통한 정신문화적 국민행복 실현”이라는 필요성하에 보안면 우동리에 소재한 무형문화재전주교육관 부지 내에 호남실학원을 건립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호남실학원 건립은 2015년 4차 반계학술대회에서 이동희가 ‘지역학연구와 호남실학원’이라는 주제를 발표하여 그 건립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거듭 제기하였다. 전북은 변혁적, 실학적 성향이 강하고, 반계와 다산이 호남에서 실학을 집대성하였으므로 이런 역사성을 토대로 부안에 호남실학원을 설치하여 한국실학사와 호남실학을 연구하고, 이와 함께 전북의 정체성과 정신사를 연구해 나갈 것을 주장하였다.
호남실학원 건립은 전북도 주관하에 부안군과 공동으로 추진되었는데 부안군이 예산부담 등으로 난색을 표명하면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이 논의는 거의 정지되어 있는 상태이다. 전북도와 부안군의 전향적인 자세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반계 학술대회만이 그대로 이어져 올해까지도 개최되고 있으며, 현재 반계서당 진입로 보완 공사가 진행 중이다. 반계를 선양하고 그 정신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반계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이 사업회를 중심으로 전북도와 부안군의 지원하에 호남실학원 건립 등을 적극 추진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더불어 『반계수록』을 편찬한 부안과, 반계묘역이 있는 용인이 연계하여 반계선양사업을 펼쳐나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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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론 문
제1주제 토론문
반계 유형원의 실학정신과 그 교훈
우상표(용인문화원 부설 용인학연구소 연구위원)
이번 학술세미나의 목적이 반계 유형원 선생의 개혁정신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지역 유림들의 문화상징화와 역사인물 콘텐츠 개발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 용인 실학전통의 맥을 재정립해보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바와 같이 반계 유형원 선생은 학문을 실생활에 접목시키고 삶의 질 향상에 학문이 기여해야 한다는 ‘실사구시’적 접근을 주창한 실학의 태두(泰斗)입니다.
용인지역사회에서 그간 수많은 학술행사가 마련됐지만 이처럼 반계 유형원 선생을 집중 조명하는 경우는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따라서 반계선생의 실학정신과 철학을 깊고도 폭넓게 이해하고 나아가 용인에서의 선양사업과 역사인물로서의 문화콘텐츠 개발에 관한 현실적 과제를 논하는 학술세미나가 열렸다는 점에서 반갑고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의 주제를 발표해 주신 정구복(반계 유형원 실학사상연구소 소장) 교수님은 한국 사학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이시며 반계 선생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처음 본격화 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기꺼이 반계 선생의 용인묘역 가까이 오셔서 이런 학술행사를 준비하신 특별한 의미에 대해 용인시민으로서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한편 반계선생이 잠들어 계신 백암지역을 중심으로 <백암반계숭모회>를 결성해 지역으로부터, 작은 것으로부터, 실천을 통해 정신계승 사업을 전개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향토사연구의 말석이나마 지키고 있는 입장에서 황규열 회장님을 비롯한 송병의, 황금주, 이신기, 김석봉, 박한광 선생님 등 여러분께도 이 자리를 빌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반계 선생에 관해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제가 감히 해당분야 최고의 권위자이신 정구복 교수님의 발제에 대해 논할 위치는 아니나 부여된 역할 상 몇 가지 말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평소 궁금했던 점에 대해 정구복 교수님께 여쭙겠습니다.
첫째, 흔히 ‘실학의 비조’라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 선생의 실사구시적 접근법은 오늘날에 와서 격한(?)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경기도만 해도 실학박물관을 건립하는 등 광역지자체가 재빠르게 나서 인물과 학맥 그리고 발자취를 중심으로 도시 이미지화에 활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생각해보면 조선시대를 관통한 신분제 질서와 궁핍한 삶의 질 개선이란 근본적 개혁방안을 주창하는 그의 저술들은 당시대 변화에 가장 강력한 이론적·사상적 무기가 되었을 것이며 또한 그 때 가장 절실한 내용들이었을 것입니다.
용인의 인물이기도 한 조광조 등 조선시대의 많은 개혁적 선비들은 학문적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벼슬에 나가 정치를 통해 이를 구현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반면 반계 선생은 재야에 머물며 연구에 몰두했을 뿐 이를 당대에 제도화하고 바꾸려는 실천적 모색을 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문한 탓으로 어설픈 질문 드립니다. 반계 유형원 선생은 개혁적 실천가(혁명가)였습니까, 아니면 단지 이론가(또는 연구자)였습니까? 어느 쪽이든 당대 또는 후대에 어떠한 실천적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둘째, 반계선생이 각 군현의 인문지리 파악을 위해 1656년(35세)에 제작한 <동국여지지> 죽산현 편에 ‘맹동지(孟洞池)’란 기록이 있습니다. 제가 원삼면 맹리 마을기록을 찾다가 본 것인데 유교 경전과 벼슬보다는 물산과 나라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그답게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담수지까지 표기해 놓은 것으로 이해하고 놀랍게 생각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발제문 결론 부분에서 “부를 창출하는 근본은 토지에 있고 토지 소유권을 관료와 왕실의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한 것에서 분급을 일반농민과 노비에게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계선생의 중농사상 계승을 강조했습니다. 구체적으로 헌법개정시 기간산업으로서의 농업을 국가가 보호 육성해야 한다는 조문을 넣는 것이 반계사상의 현대적 계승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농협을 비롯한 농업계에서 크게 공감을 얻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시대를 넘어 농업의 전략적이고 근본적 가치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저 역시 찬성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라는 현재관점에서 보면 ‘부를 창출하는 근본은 자본’에 있습니다. 따라서 반계선생이 오늘날의 사회상을 보셨다면 자본소유의 편중 또는 부의 집중을 질타하고 개선책을 논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이 재해석과 현대적 계승 아닐까요?
셋째, 반계 선생과 용인과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지난 10월, <반계 유형원과 동아시아 초기실학>이란 주제의 국제학술대회가 열릴 정도로 반계 선생에 대한 연구는 세계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가 영면하고 있는 용인에선 반계선생의 학문적 성과를 기리고 정신을 계승하는 선양사업이 매우 제한적인 실정입니다. 그나마도 같은 조선시대, 더욱 좁혀 실학관련 역사인물들에 비해서도 비중이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를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포은 정몽주선생, 저헌 이석형선생, 음애 이자선생, 십청헌 김세필 선생 등 용인의 역사인물들의 경우는 후손들이 주변에 세거하며 다각도로 문중 주도의 현창사업을 진행하여 왔습니다. 반면 반계선생의 경우 직계손이 단절되어 한동안 묘역마저 멸실된 것으로 판단해 왔습니다. 정구복 교수님으로부터 1971년에야 우연한 기회에 이성무 교수에 의해 비문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고 들었습니다. 용인과의 연고성은 향후 반계선생을 용인의 인물로 선양함에 있어 지역민들로부터 정서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좋은 기재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여 여쭙니다. 반계선생의 선대 묘소가 용인에 조성된 연유는 무엇인지요? 반계선생이 1663년(42세)에 여러 선영을 돌아보는 도중 용인을 들렀다는 기록 외에 반계선생과 용인과의 인연을 확인하는 다른 자료가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넷째, 용인에서의 향후 선양사업에 관해 여쭙니다. 반계선생이 오래 머물며 역작 <반계수록>을 편찬했던 전북과 부안에선 TF팀까지 꾸려 문화자원 활용을 위해 적극 나서고 있는 중으로 알려졌습니다. 반면 용인에선 일부 민간영역 외엔 행정기관은 물론 유관단체, 언론 등도 반계선생 선양사업에 소홀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짧은 생각이나마 앞으로 △숭모회의 용인 전지역 대상화와 각계각층 참여 폭 확대 △학술대회 또는 문화제 형식의 연구와 선양사업의 지속적 추진 △실학 관련 인물과 유적 연계프로그램 개설 등 인물자원 문화콘텐츠 개발 △전북·부안과의 교류 확대 △진입로 개설 등 단계적 유적지 정비와 발굴 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판단과 더불어 선양사업 방안에 대한 고견 부탁드립니다.
제3주제 토론문
부안지역의 반계 유형원 유적과 선양활동
김지혜(용인문화원 연구위원)
‘오늘도 헛되이 하루를 보내었구나. 의리는 무궁하고 세월은 유한한 것인데, 옛 사람들은 무슨 정력으로 저와 같이 크게 성취할 수 있었는가’
부안으로 이거한 이후 밤낮으로 학문에 전념하다 문득 한 밤중에 일어나 기록하였다하는 반계의 짧은 글입니다.
물위를 유유히 흐르는 백조의 우아한 자태는 물밑에서 부단히 움직이는 두 다리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을 알기에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의 발제문은 반계선생과 같은 곳에서의 같은 가슴앓이 흔적처럼 보입니다. 조부의 3년 상을 마친 32세 때에 가솔을 이끌고 전라도 부안현 우반동으로 이거하여 52세에 생을 마감하여 용인시 정배산 선영 아래로 모셔 올 때 까지, 그의 후예는 모두 떠나 빈터가 되어버린 곳에서 그의 행적을 찾고 복원하려 애쓰는 모습 인상 깊었습니다. 또한 그의 사상과 학문을 갈구하며 6차에 걸친 학술대회와 선양사업 등을 펼치는 부안의 모습이 훗날 백조의 우아한 결과물을 내어 놓으리라는 예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문외한의 입장에서 감히 <토론>에 나서는 것이 외람될뿐더러 일련의 노력에 한 치에 보탬도 되지 못한 게으른 자의 입을 열자니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반계선생을 통해 실학의 현대적 계승을 고민하고자 마련한 자리이므로 앞으로의 세상을 이끌어갈 이들을 접하고 있는 입장에서 <부안지역의 반계 유형원유적과 선양활동>에 대한 발표 자료에 대해 몇 가지 논하고자 합니다.
우선 발제를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내용들은 이렇습니다.
첫째, 부안지역의 반계 선양활동의 구체성과 지속성입니다.
발표문은 반계가 20여년 살았던 장소를 찾아 복원하는 유형물의 활동과 그가 20여년에 걸쳐 완성한 <반계수록>과 실학사상을 통해 현대적 관점에서의 적용을 고민하는 무형물의 학술활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반계의 스토리가 있는 집터,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학동을 가르치던 서당, 반계가 팠다는 우물, 반계를 초빈한 가묘 등 유형의 결과물들은 추후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부안을 찾는 관광객에게 문화 향수의 욕구를 충족하게 할 것이며 지역 이미지 제고와 반계의 선양에도 큰 영향을 미치리라 기대합니다. 또한 2012년 무형의 선양활동인 첫 번째 학술대회에서 용인사람 정구복 반계실학사상연구소 소장의 제언에 따라 호남 실학원 건립을 계획하고 2013년 반계 선양추진위원회에서 전북도청에 그 건립 안을 보고하였으며, 2015년 4차 반계학술대회에서 ‘지역학연구와 호남 실학원(이동희)’이라는 주제 발표로 그 건립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거듭 제기하였으나 현재는 예산부담으로 정지 상태에 있다는 건립에 관한 일련의 과정은 진전이 더디고 지난하지만 그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더불어 “(국가적 필요성) 사회변혁사상인 실학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함으로써 문화융성과 이를 통한 정신문화적 국민행복 실현”이 건립과 함께 꼭 성취되어 그 뜻을 이루길 희망합니다.
두 번째는 학술대회 주제의 다양성입니다.
2012년부터 올해까지 6차에 걸쳐서 매년 전북도청과 부안군 주최 하에 열리고 있는 반계 학술대회의 주제 중 반계의 계승방안을 고민하는 주제와 국제적 시각에서 그의 실학사상을 다룬 주제가 인상 깊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명언을 통해 우리는 역사 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하지만 미래로 나아갈 아이들에게 정작 역사는 지나간 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지나간 사실과 경험을 배워야한다.’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 가를 고민해 봅니다. ‘젊은이는 항상 미래를 내다보고, 노인은 미래가 없기 때문에 항상 과거를 되돌아보기 마련이다. 라는 인도의 작가 요조 라즈니쉬의 말을 통해 역사 교육의 방향성, 선양의 방향성을 보기에 미래지향적학술대회에 박수를 보냅니다.
세 번째로 현대 계승에 대한 고민에 동감합니다.
실학의 비조인 반계 유형원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며 학술대회를 지속하고 그의 정신을 이어나가기 위해 반계기념사업회를 구성하여 선양을 계획하며 현대 계승에 대해 각고하고 있음에 동지를 만난듯하고 반가웠습니다. 아울러 생거부안 사거용인을 존중하여 용인과의 연계 필요성을 부언하심에 감사를 전합니다.
다음으로 몇 가지의 궁금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워낙 관련 주제에 대한 지식과 식견이 미흡하여 질문의 수준이 염려되나 우문을 하더라도 현답으로 깨우쳐 주리라 기대하며 입을 엽니다.
첫째, 반계의 선양 목표에 대한 질문입니다.
전략수립에 있어 목표설정은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부안은 선양사업의 목적과 목표 집단의 구체적 선정을 어디에 두고 진행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선양에 목표를 두고 진행하는 초기 단계이기에 현재 부안의 선양활동은 전국구 적이기 보다는 지역구 적인 활동이 주가 되고 있는 듯합니다. 내부주민이 주 타깃이 되는 지역 정체성 중심의 선양인지, 문화산업 중심의 선양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미래의 주인이 될 젊은이를 위한 선양 활동에 대해 여쭙니다
둘째, 학술대회의 결과에 대한 질문입니다.
학술대회를 통해 문제발견, 발전 방향성 등 도출된 의견과 그로 인한 변화가 궁금합니다. 본 무형의 활동들은 더 나은 학문 추구와 다르게 생각하는 필요사항에 대한 수렴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기획하였을 것이나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께서 발제문에서 언급하신 주제들은 제목으로만 유추할 뿐 내용과 결과는 짐작키가 어려워 여쭙습니다. 지면의 협소함으로 자세히 소개하기 어려웠음을 알기에 여쭙습니다.
셋째, 부안과 용인의 어떠한 파트너 쉽이 선양의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지역연구자와 문화정책 관계자들은 실증적 역사고찰을 넘어 콘텐츠의 활용 측면에서의 방향성을 찾고 싶어 합니다. 발제자께서 생각하시는 반계선양에 도움이 될 만한 부안과 용인의 파트너 쉽에 대한 제언과 아이디어를 청합니다.
용인지역의 반계 선양활동에 대한 소개가 향후 파트너 쉽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반계 숭모회: 2015년 7월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에서 백암면을 사랑하고 반계를 추모하는 농사꾼 8명이 조직한 반계 숭모회는(회장 황규열) 현재 3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계층 또한 다양하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농민이 잘 살아야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반계의 사상이 그가 잠든 곳에서 시나브로 실천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백중 문화제, 면민 체육대회 등의 행사시 반계선생 묘에 가서 고유제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하고 2016년 농민상을 제정하여 백암의 이름을 빛낸 농민에게 상장 및 상금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백암을 위해 재미있는 일, 사람스러운 일을 고민하며 월례회를 하며 반계의 사상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고, 향후 진입로의 도로 포장과 위토에 유적전시관 건립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포은 문화제: 경상북도 영천군 동우항리에서 출생하여 용인에 잠드신 충절의 상징이고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앙되는 포은(圃隱) 정몽주의 묘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매년 5월이면 3만 5천 명이 찾는 포은제가 열립니다. 포은제에서는 여러 부대 행사와 함께 용인의 역사적 인물을 조명하는 부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반계 유형원의 부스도 설치되어 이곳을 찾는 지역 주민과 관광객에게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백조의 우아한 자태는 물밑에서 부단히 움직이는 두 다리의 노력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과 같이 부안과 용인이 반계의 선양에 있어 시너지효과를 내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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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록
부록 1
반계 유형원의 연보
반계의 전기로는 여러 가지 자료가 전한다. 그 중 상세한 것은 그에게서 오랜 동안 교육을 받았고 곁에서 그의 언행을 오랜 동안 지켜보았던 반계 누님의 아들인 양섬(梁暹)이 반계의 아들 하(昰)로부터 받은 자료를 근거로 쓴 「반계선생행장」과 1711년 그의 재종제인 유재원(柳載遠)이 쓴 반계선생언행록을 들 수 있다. 이 두 자료는 유형원에 대한 생생한 자료이다. 또 안정복이 작성한 연보는 그의 일생을 연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안정복이 작성한 연보를 기초로 새로운 사실을 덧붙이고 잘못된 것을 수정하여 그의 연보를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1622년(광해군14) 임술 정월 21일(양력 3월 2일) 축시(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한성 서부 소정릉동의 큰외숙인 참의공 태호(太湖) 이원진(李元鎭)의 집에서 태어남. 본관은 문화유씨 이름은 형원(馨遠) 자는 덕부(德夫), 아명은 덕창(德彰)
1623년(인조원년)(2세) 아버지 한림공 흠이 옥사함.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에 안장됨
1626년(5세) 글을 배우기 시작함. 태호공 이원진과 고모부 동명 김세렴에게서 글을 배움. 이 해에 산수를 배움.
1628년(7세) 서경을 배움.
1629년(8세) 경전과 역사서를 읽음. 대의를 이해함으로 큰 기대를 받음.
1630년(9세) 주역의 계사를 배움
1631년(10세) 유교 경전 외에 제자백가의 책을 읽음. 스승인 이공과 김공이 이런 인재가 과거에 있었는가라고 말하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함
1634년(13세)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시험 준비에는 뜻을 두지 않음(안정복의 연보에는 성현을 사모하는 뜻을 가지어 위기지학을 열심히 했다고 표현되었다)
1636년(15세) 3월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있는 토지를 보안면 줄포리에 살던 담양부사 김홍원에게 팔기 위해 할아버지를 따라 부안에 다녀옴( 그가 매매문기의 초안을 작성했고, 그의 내사촌형 조송년이 그 글씨를 썼다. 부록 2 참조)
12월 병자호란을 당하여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두 분의 고모님을 모시고 원주로 피난을 감, 중도에서 강도를 만나자 그가 앞에 나가 “우리 부모님을 놀라게 하지만 말라! 모든 짐은 다 가지고 가도 좋다”고 하자 도둑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그냥 물러났다고 함
1637년(16세) 난리가 끝난 후 여러 곳의 선영을 찾아가 봄
1639년(18세) 풍산심씨에게 장가를 감. 부인은 철산부사 심항(沈閌)의 딸이고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의 증손녀였다.
1640년(19세) 어머니의 병환으로 국의(國醫) 유후성(柳後誠)을 찾아가 약을 지어옴. 후성은 자신의 재주를 믿어 교만하여 양반을 깔보았는데 선생을 보고 지극한 예를 다하고 뜰 아래에 내려와 송별인사를 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유 아무개의 얼굴빛에 부모의 병환으로 그 성의가 얼굴에 간절해 보였으니 내가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고 한다.
1641년(20세) 선생의 명성이 소문으로 크게 났다, 그 때 광해군의 사위 전창도위(全昌都尉) 유정량(柳廷亮)이 선생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 사람을 통해 전하기를 우리 집에 중국책이 서가에 가득 차 있으니 한 번 와서 봄이 어떤가?“ 하였으나 선생은 끝내 가지 않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권세 있는 집안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1642년(21세) 네가지 조목의 잠계(箴戒)를 지음.
첫째,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잘것
둘째, 의관을 바르게 하고 표정을 존엄하게 할 것.
셋째, 부모님을 섬길 때 얼굴색을 부드럽게 할 것
넷째, 부인에게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할 것.
증조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지평헌(현재 양평군 지제면) 화곡리 아래로 이사를 감.
겨울 아들 하(昰)를 낳음.
1643년(22세) 여주 백양동(능서면 백석리아 내양리 부근: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귀백리 297-27)으로 이사를 감. 겨울에 함경도 감사로 가 있던 고모부 김세렴을 찾아뵈러 함흥에 다녀 옴.
1644년(23세) 할머니의 상을 당함. 이 해에 명나라가 멸망함.
1645년(25세) 고모부 김세렴이 죽음.
1646년(26세) 선대 묘소의 비문을 지음.
1647년(27세) 봄에 내사촌형 조송년이 금산군수로 가 있어 그를 찾아보고 그 길에 영남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옴. 4월 어머니 상을 당함.
1649년(29세) 효종 원년 할아버지의 명에 따라 성균관 시험에 응시함. 한강이남 호서지방을 유람하고 원주 지평을 들러 돌아옴.
1650년(30세) 봄에 금강산을 다녀옴. 성균관시험에 응시함. 어전시험에서 격식에 어긋나 불합격됨. 5월 할아버지 참판공의 상을 당함.
1651년(31세) 정음지남을 지음. 隨錄을 쓰기 시작함.
1653년(32세) 봄 과천 삼현리로 이사함. 겨울 귀거래사를 쓰고 부안 우반동(현재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로 이사를 감.
1654년(33세)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진사시험에 응시하여 8등으로 합격함
1655년(34세) 서울에 다녀 옴. 오다가 아산 신창진에서 조난당한 9명을 살려냄.
1656년(35세) 동국여지지 13권을 편찬함.(현재 9권이 규장각에 전함)
1657년(36세) 봄에 서울에 다녀옴. 가을에 전남지방을 유람하여 해안가에까지 갔다옴.
1658년(37세) 남방 추월산에 갔다옴. 정동직에게 이기 인심도심설에 대한 서신을 보냄. 12월 정동직의 묘소에 가서 곡함.
1659년(38세) 9월에 호남 여러 지방을 유람함.
1660년(39세)현종 원년 장녀를 정동직의 아들에게 시집보냄.
1661년(40세) 1월에 영남지방에 갔다가 영호남의 산천을 구경하고 돌아옴.
1662년(41세) 11월 서울에 가서 외갓집에 유숙함. 중흥위략이란 책을 쓰기 시작함.
1663년(42세) 과천, 지평, 여주, 죽산(용인)의 선영을 돌아보고 옴. 호남 담양지방을 여행함.
1664년(43세) 우리나라 사람의 글을 편집함.
1665년(44세) 「동사강목조례」를 편찬함. 「동사괴설변」을 지음. 「동국역사가고」를 편집함.
전라감사 민유중에게 답장을 보내 제언의 수축을 건의함. 9월 외숙 이원진의 상을 당함. 연천에 가서 미수 허목을 방문하고 고모부의 동명선생문집 서문을 부탁함.
1666년(45세) 1월 부안에 돌아옴. 3월 고모의 상을 당하여 서울에 다녀옴.
1667년(46세) 11월 서울에 감. 주자찬요를 완성함. 「동명선생 행장」을 지음.
1668년(47세) 동명선생의 묘소를 참배. 연천의 미수 허목을 방문 동명의 비문을 청함. 허목이 그를 왕좌지재라고 칭찬함.
1669년(48세) 도연명의 글을 편집함. 배상유에게 이기 인심도심설을 편지로 질의함.
1670년(49세) 서울에 다녀옴. 반계수록을 완성함.
1671년(50세) 수록에 대해 질의한 정백우(정동익)에게 답서를 보냄. 「향음주례절목」을 편정함. 이해에 큰 흉년이 듬.
1672년(51세) 백호 윤휴에게 경계하는 글을 보냄.
1673년(52세) 3월 19일(양력 5월 5일) 졸함. 10월 27일 계해 죽산 용천(현재의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석천리) 아버지 묘소 아래에 묻힘.(안정복이 연보에는 5월 이장했다고 하나 이는 생질 양섬이 쓴 행적에 따라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1남 6녀를 둠(사위: 鄭光疇, 朴森, 白光著, 宋儒英, 尹惟一 ,申泰濟, 아늘 昰(하) 며느리 裵尙瑜의 딸
1678년(숙종4년) 참봉 배상유에 의하여 반계수록이 정부에 소개됨.
1693년(숙종 19년) 호남 사림들이 부안현 동림리에 서원을 창건하여 배향함. 동림서원지에는 생질 양섬(梁暹)이 지은 「반계유선생행적」이 실려 있다.
1711년(숙종 27년) 재종동생 유재원이 「반계유선생언행록」을 지음( 1995. 유달영 해제한 번역인쇄본이 문화하정공파 안숙공화수회에서 출간되었다, 안숙공은 반계의 8대조 유계문이 시호이다.)
1741년(영조 17년) 전 승리 양득중이 상소하여 경연에서 주자어록를 강의하고 반계수록을 읽을 것을 주장하고 간행을 건의함.
1746년(영조 22년) 영조가 홍계희에게 선생에 관한 전기를 짓게 하다.
1750년(영조 26년) 좌참찬 권적이 상소하여 반계수록은 삼대 이후 나라를 다스리는 대책의 제1의 책이라고 하고 그 간행을 건의함.
1751년(영조 27년) 병조판서 홍계희가 균역절목의 개혁을 건의하는 글에서 반계수록에 붙인 선생의 군현제의 개혁안이 상세하고 적절한 안임을 건의함.
1753년(영조 29년)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겸 세자 시강원 전선을 증직함.
1768년(영조 30년) 여름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가 선생의 덕의를 흠모하여 제사를 올리고 비석을 세움에 여러 선비들의 도왔다. 그 비문을 홍계희에게 청해 지어 새겼다.(현재의 묘비로 전한다)
1769년(영조 45년) 왕이 명하여 반계수록을 3부를 인쇄하여 바치도록 명하였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한 듯함. 동년 선생의 증손 유발(柳發)의 나이가 80세가 되었을 때 오위장 벼슬을 내림.
1770년(영조 46년) 반계수록을 경상도 감영에서 목판으로 인쇄하여 5처의 사고에 보관하도록 함. 이 해에 선생에게 호조참의 겸 세자시강원 찬선을 증직함.
1775년(영조 51년) 겨울 증손 柳發 초록한 자료를 동궁좌익찬 안정복이 연보로 편집함
1778년(정조 2년) 정조가 반계수록을 읽음.
1783년(정조 7년) 경상도 감영에서 반계수록 보유편인 「군현제」를 목판으로 인쇄함.
1788년(정조 12년) 정조가 수원 읍치를 옮김에 선생의 군현설이 100년전 탁설임을 감탄하고 마치 아침저녁에 만나는 사람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 선생에게 이조참판 성균관 좨주라는 명예직을 더 증직하였다. 그리고 그 후손을 찾아 보고하도록 하였다.
1798년(정조 22년) 호조판서 이화진이 반계수록을 읽음.
1974년 9월 27일 부안군과 부안군민이 반계유형원 선생 유적비를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만화동 입구에 세움, 현재 유택이 있는 우신마을 반계유적 공원으로 옮겼음 이날로 독서당 일대를 전북지방 기념물 22호 지정함
1981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에 독서당을 정면 4칸, 측면 3탄으로 복원함 반계유형원선생 선양추진위원회가 전라북도와 부안군에서 조직됨
1981년 이성무(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가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 28-1번지에 있는 선생의 묘소를 발견함으로서 학계에 알려졌다.
2000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우신마을 반계유택지를 발굴함
2015년 7월 용인 백암면 농부들이 백암반계숭모회를 조직 활동함
**오광운 찬의 「반계공 형원 행장」이 반계선생언행록 1985. 에 실려 있다, 새로운 내용은 없으나 행적이 요령있게 정리된 글이다.
부록 2
1636년 유성민이 부안김씨에게 전답을 판 문서
(원문탈초본, 해제, 번역문)
유형원의 조부 유성민이 작성하고 유형원이 증인으로 참여한 1636년의 토지매매문서
崇禎九年丙子三月十七日 通政大夫前行潭陽府使金弘遠前明文
右明文事段 要用所致以 扶安立石面下里愚磻伏 田畓亦 六代祖右議
政文簡公太祖朝開國功臣賜牌以 去京甚遠 收拾不得叱分不喩 窮
谷之中 人民或聚或散 田畓段置亦 爲猪鹿所害 廢棄數百年爲有如乎
去壬子秋 始爲下來 誅茅伐木 作田作畓 辛苦重設 今至二十餘年
耕食爲在果 大槩 此地四山圍抱 前面開豁 潮生滿浦 印案出沒
奇巖恠石 列在左右 如拱如揖 或進或退 狀非其一 朝雲暮靄亦自
呈態 眞羽衣棲息之所 非俗客來遊之處 中有長川 向南自
別東西之區 此亦奇絶之一助 自川以西仍存舊業 自川以東家
舍田畓全數放賣 而其中不得自擅者 家奴三忠之金允祥處買得
畓六斗落只十五卜 其家前代田二十六卜三束 元居人奴弼伊田十七
卜畓七斗落只十六卜又畓三斗落只十卜段 金司諫處利租全六
石壬申年三月受食 其年七月爲厥上典之所捉 洪州上去 他無償
債之物 右田畓成文進呈 自前年之所出乙 司諫家輸送爲有齊 其
餘田畓段 全數放賣 畓之時起落種者全八石落只 時陳未起者全
四石落只 幷五結田則或起或陳 結卜未能詳知 而計其元數則不下三
十餘結 新造瓦家二十間 家後亭子代 黃竹田及奴三忠家後竹田
幷以 價折木綿拾同交易 捧上爲遣 永永放賣爲乎矣 本文記段
他田畓幷付乙仍于 許與不得爲去乎 後次 吾子孫中 或有雜談
則此文記 告官辨正者
財主通訓大夫前行工曹正郞柳成民[着名]
證 長 孫 學 生 德彰[着名]
筆執外孫朝散大夫前別坐趙松年[着名]
해제
본 고문서는 1936년에 반계 유형원의 할아버지 유성민이 부안김씨 통정대부 담양부사인 김홍원에게 전답을 판 토지매매문서이다. 문서의 작성자는 토지 주인인 문화유씨 유성민(1569~1651)이고 그 매매의 증인으로 장손 덕창(유형원의 아명이 이 문서로 알게 됨)이고, 이 문서의 글씨는 외손자 조송년(조광조의 손자)가 썼고 세 사람의 싸인(수결)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문서로 문화유씨 하정공파 세보등 현재까지의 족보에 유성민의 직함을 형조정랑으로 된 것은 잘못이고 공조정랑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서는 일괄 보물로 지정되어 현재 부안의 우동리에 있는 부안김씨 고 김종덕씨 종택 문헌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토지매매문서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5만여 건의 문서 중 아주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주변의 경치를 멋지게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서의 초안은 반계 유형원이 쓴 작품으로 추정한다. 이 문서를 통해서 이 땅은 재주의 6세조(실은 7세조의 잘못임이 족보를 통해 확인된다.)인 우의정 문간공 유관(1346~1433)이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면서 받은 토지였으나 그 동안 묵혀져 진전이 되었다. 우동리의 시내 동쪽 편에 있는 총 30결의 토지를 팔았다. 이 토지 중 일부는 20여년 전인 임자년(1612)에 재주가 내려와 나무와 풀을 베어 개간하였다고 한다. 전답과 집터 가옥을 포함하여 목면 10동(600필)을 받고 팔았다. 이 문서는 당시 매매명문의 관례대로 이두문으로 작성되었고 매매문서의 격식을 따르고 있다.
번역문 (괄호안의 내용은 번역자가 써 넣은 것이다.)
숭정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 9년(1636) 병자 3월 17일 통정대부 전 행담양부사 김홍원에게 쓰는 매매 명문(증명서)
상기 명문을 작성하는 것은 생활에 쓸 자금이 필요해서 부안현 입석면 하리 우반에 있는 전답을 팔매, 이땅은 나의 6대조(7대조라고해야 옳음) 우의정 문간공께서 태조조에 개국공신의 사패로 받았는데 서울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관리(수습)을 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깊은 골자기에 있어 사람들이 때로 모여 살다가 때로 흩어지기도 하며, 전답도 멧돼지와 사슴의 피해를 입어 폐기한지 수백년이 되었는바, 지난 임자년(1612) 가을에 비로소 내가 내려와서 띄를 뽑고, 나무를 베어 밭을 일구고 논을 만듦에 가진 고생을 하며 지금 20여년이 되도록 경작해왔는바, 대개 이 땅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였고, 앞면만 확트여 있는데 조수가 들어와 포구를 가득 채우면 인어가 출몰한다. 기암괴석이 좌우에 줄지어 있어 마치 팔을 여민 것 같기도 하고 읍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때로는 앞으로 나왔다가 때로는 뒤로 물러나는 것 같기도하다, 그 모습이 한결같지 않다. 아침에 구름끼고 저녁에 노을이 들어 스스로 멋을 부리고 있으니 참으로 신선이 살 곳이지 속인이 오서 노닐 곳이 아니다. 마을 가운데에 긴 내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마을을 동서의 구역으로 나누니 이 또한 기이하고 절묘한 일이다. 내의 서쪽은 전대로 삶을 그대로 이어가게 하고 내의 동쪽의 집과 전답을 모두 팔되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우리집 노 삼충이 김윤상에게서 산 논 6마지기 즉 15복(부라고도 한다), 그 집앞 텃밭 26복 3속과 원래 이곳에 살고 있는 노 필이의 밭 17복, 논 7마지기 즉 16복과 또 논3마지기 즉 10복은 사간 김씨에게 이자조로 벼 6석을 임신년(1632) 3월에 받아 먹었다. 그해 7월에 그의 상전에게 잡혀 홍주(충청도 홍성)로 갔으니 달리 갚을 길이 없어 이 전답을 문서를 꾸며 바친 것이다. 작년부터 그 소출을 사간댁에 보냈다. 이 전답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전답을 모두 판다. 논으로 현재 경작하여 볍씨를 뿌릴 수 있는 것이 모두 8섬지기이고 현재 묵혀서 경작할 수 없는 것이 모두 4섬지기이고 아울러 5결의 밭은때론 경작도 하고 때론 묵히기도 하는데 결복(결부 당시 국가에서 파악하는 면적)은 상세히 알수 없으나 그 원래의 총면적은 총 30여결 이상이 될 것이다. 새로 지은 기와집 20칸과 집 뒤의 정자 터와 황죽전 및 노 삼충의 집 뒤 대나무밭 모두 통털어 값을 쳐 목면 10동(600필)을 바꾸어 받고 영영 판다. 본 문기(구문기)는 다른 전답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넘겨줄 수 없다. 이후 나의 자손 중에 혹 문제를 삼거든 이 문기로 관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
재주 통루대부 전 행공조좌랑 유성민 (수결)
증인 장손 학생 덕창(수결)
필집 외손 조산대부 전 별좌 조송년(수결)
(해제 및 번역자 정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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