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에 살으리랏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능 교과의 교육이 매우 부실했던 것 같다. 전쟁 중의 혼란기여서 그랬던지 음악, 미술과의 교과서는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었고, 또한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준 선생님도 없었다. 미술 시간에는 그저 나가서 마음대로 그려 보라는 것이 거의 전부였고, 음악 수업은 거의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선생님의 오르간 연주 실력이 부족하여, 배우는 쪽이 오히려 짜증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5학년을 담임해 주셨던 박 선생님은 좀 달랐다.
우리들의 수준에 맞지는 않았지만,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가곡을 들려주시기도 하고, 때때로 노래의 가사를 칠판에 적어 주시고는, 능숙한 오르간 솜씨로 친절히 우리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기도 하셨다. 음악에 목말라하던 우리들의 목을 흠뻑 적셔 주신 것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사우(思友)’, ‘금강에 살으리랏다’ 등은 그때 배웠던 대표적인 노래들이다. 지금도 이 노래들을 들으면 박 선생님이 생각나고,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그때 배운 노래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노래는 ‘금강에 살으리랏다’이다.
금강에 살으리랏다. 금강에 살으리랏다.
운무 데리고 금강에 살으리랏다
홍진에 썩은 명리야 아는 체나 하리오.
선생님의 반주에 맞추어 목이 터져라 신나게 불렀다.
4분음 4박자의 우쭐거리는 맛에 흥겨워하면서, 모두들 그 가락에 흠뻑 젖었었다.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그날 배운 ‘금강에 살으리랏다’를 복습도 할 양으로 힘차게 불러 보았다. 왠지 그날은 같이 오가던 친구도 없이, 혼자서 귀가했던 터라 심심하기도 하여, 더한층 목청을 돋우어 불렀던 것 같다. 학교 길은 고개도 넘고 물도 건너야 하는 십여 리의 먼 길이었다.
혼자서 계속 같은 노래를 불렀던 탓으로 싫증이 났던지, 갑자기 노랫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첫 마디 ‘금강’부터 새겨 보았다. 이것은 간단히 해결되었다.
4학년 때 이미 우리나라의 강 이름과 그 유역의 평야 이름을 익히 배웠기 때문이었다. 만경강 유역의 호남평야, 낙동강 유역의 김해평야 등과 같이, 강과 그 유역의 평야 이름을 함께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금강’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를 이루면서 흐르는 강이란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노랫말의 ‘금강’은 강 이름 금강(錦江)이 아니라, 금강산의 줄어진 말 금강(金剛)인 줄을 시골 소년이 그때 어찌 알았겠는가?
어쨌든, 그때의 실력으로 노래의 첫 구 ‘금강’은 쉽게 해결되었고, ‘살으리랏다’를 이어서 ‘금강가에서 살리라’ 정도로 나름대로 해석을 갖다 붙이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이 ‘금강’은 쉽게 해석되었는데 그다음의 ‘운무’가 문제였다. 쉽게 그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운무, 운무……’를 몇 번이나 거듭한 끝에 드디어 묘안이 머리에 떠올랐다.
냇가에서 소를 먹이면서 지내는 시골 소년만이 밝혀낼 수 있는, 기발한 의미가 떠오른 것이었다. ‘운무’는 소의 울음소리를 나타낸 말, 즉, ‘움무’일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큰 소의 울음소리를 우리는 ‘움무’라는 의성어로 표현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연상한 것이다. 개를 ‘멍멍’이라 하고 닭을 ‘꼬기요’라 하는 것과 비슷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에게 풀을 뜯기게 하느라고 들과 산을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던 소년이, 어찌 ‘운무’가 ‘구름과 안개’를 뜻하는 그 어려운 한자어 ‘운무(雲霧)’임을 알 수 있었겠는가?
어떻든, 이제 둘째 구절의 의미도 알아낸바 ‘움무’하고 우는 소를 더불고 먹이면서 금강가에 살리라.’ 하는 문맥을 기워내고는 그 발명에 기뻐하였다.
끝 구절의 첫마디 ‘홍진’은 매우 쉬웠다. 왜냐하면, 홍역(紅疫)을 그 당시 시골 사람들은 ‘홍진’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발진성 전염병인 그 무서운 홍진 때문에 죽어 가는 아이를 여러 번 본 시골 소년이, 어찌 속세를 비유하는 그 어려운 한자어 ‘홍진(紅塵)’을 알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홍진 곧 홍역으로 죽는 아이가 많았다. 아이를 묻는 곳을 ‘애장 터’라 하였는데 봄이 되면 거기에 작은 봉우리가 몇 개씩 새로 생겨났었다. 그 봉우리 위에는 으레 싸리로 만든 소쿠리가 덮여 있었다. 봉을 만들기 위해 흙을 나르던 싸리 소쿠리를 다시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그 위에 꽃다발인 양 그대로 덮어 놓고 가는 것이 하나의 습속이었다.
아이를 묻었던 기구를 도로 가져가서 사용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생각과, 작은 봉우리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자 하는 염려에서 나온 풍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러한 장치에도 불구하고, 여우와 같은 산짐승들이 봉우리를 파헤쳐, 한 어린 영혼의 집을 훼손하는 일이 더러 있어서, 나도 어릴 때 그런 것을 여러 번 본 일이 있다.
이러한 체험은 ‘금강에 살으리랏다’의 맨 마지막 구절의 해석에 큰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홍진에 썩은 명리야 아는 체나 하리오’는 ‘홍역으로 일찍 죽어서 이미 몸뚱이가 썩은 명리라는 아이야 어떻게 알겠는가?’의 뜻으로 풀이한 것이다. 명리를 죽은 아이의 이름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 어려운 ‘명예와 이익’이란 ‘명리(名利)’의 깊은 뜻을 어린 시골 소년은 알 턱이 없었다.
錦江(금강) 가에 살리라. 錦江 가에 살리라.
소를 데리고 먹이면서 錦江에서 살리라.
홍역으로 죽어 이제 썩어 버린 불쌍한 명리야 이것을 어찌
알겠는가? 모를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산모퉁이를 돌아나오려니, 갑자기 겁이 덜컥 나는 것이었다. 애장 터에서 본 그 반쯤 썩은 어린아이의 시신이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노래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렇다.
지금 생각해도 선생님이 원망스럽다. 그 좋은 노랫말의 참뜻을 우리들에게 올바르게 해석해 주어서, 시심(詩心)에 먼저 젖게 했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그 노래에 도취되었겠는가?
안개 낀 금강산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신선이 된 듯한 기분으로 빠져들었을 것인데, 그 길을 안내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얼토당토 않는 살벌한 애장터로 어린 소년을 내몰았던 것이다.
어느 스님이 모 일간지에 투고한 글인데, 산사 옆 개울에 메기가 노니는 것을 보고, 이에 맞추어 ‘메기의 추억’을 함께 불렀다는 구절이 있었다. 물고기 ‘메기’와 노랫말의 ‘메기’를 동일시한 것을 보고, 나 같은 발명가(?)가 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혼자 웃은 일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음악 선생님을 대하면, 항상 노랫말의 뜻을 잘 풀이하여 감상시킨 후에, 가락을 붙여 지도하라고 권한다. 곡도 중요하지만, 그 밑바탕이 되는 것이 가사라고 생각한다. 모르긴 해도, 가사를 읊조리는 것만으로는 그 흥취를 감당할 수 없어, 거기에 곡을 붙인 것이 가곡이라 생각한다. 학생 시절에, 가사는 부르지도 않고 계명창만 가르치는 음악 선생님에게 배운 적이 있다. 음악이 주는 예술적 감흥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동양의 고전 모시(毛詩) 대서(大序)에도, ‘말로써 그 느낌을 다 담을 수 없어 감탄하는 시(가사)를 읊고, 감탄해도 다할 수 없어서 노래가 생겼고, 노래를 불러도 부족하여 춤이 생겨났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