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의 한증막 (汗蒸幕) 소재지: 고구리
♨ 보수 전 옛 한증막 모습
조선시대에 한증막은 소나무를 한증막 안에 불을 지펴 밀폐된 가열시켰다.
내부에 일정한 온도가 되면 물을 뿌려 불을 끄고 이때 발생하는 수증기로 공기가 가습이 되며.
입욕자는 헝겁이나 가마니를 두르고 들어가 땀을 내는 방법으로 탕욕을 즐겼다 전해진다.
교동의 옛 한증막은 고구리, 봉소리, 서한리 등 3곳에 흩어져 있었다.
고구리에 있는 한증막은 원형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지름 4.5m, 둘레 15m, 높이 3m 크기로 어른 10여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규모다.
원래는 황토와 돌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황토가 비바람에 씻겨내려가 지금은 돌만 남아 있는 상태다.
서한리 한증막은 조선(造船·배를 만들던 곳)골에 있었으며 크기는 고구리에 비해 작은 편이다.
봉소리 한증막은 은합산이 시작하는 아래 부분에 위치해 있으며 크기는 서한리 한증막과 비슷하다.
한증막 3곳은 모두 산에서 맑은 물이 내려오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교동에는 조선시대 안평대군, 연산군, 광해군, 임해군 등 왕족이 유배를 왔고 특히 안평대군과 연산군은 이 곳에서 생을 마감해 한증막이 이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고려 인조 때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등 3개도를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어사’가 교동에 있어 상당수의 군사들이 주둔했다는 점을 들어 한증막이 이 때 부터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한증막은 2008년 10월 내부를 보존한 상태에서 외부 복원공사를 하였다.
[인천일보 : 2004.12.07일자 2판 17면 게재 ]
교동도 조선시대 한증막 터
인천의 맥을 찾아서 -
현대의 찜질방을 조선시대 선조들도 즐겼다. 과거의 목욕탕과 찜질방 문화는 어떠 했을까?
당연히 돌과 황토, 나무을 이용한 자연 목욕, 찜질 문화였다.
이런 찜질문화를 알려주는 귀중한 찜질방 터가 강화 교동도에 남아있다.
교동도 화개산을 올라가다보면 이상하게 생긴 돌무덤이 하나 있다. 입구는 작지만 10여명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는 돌무덤이다.
이곳은 바로 조선시대 ‘한증막’으로 쓰였던 곳. 이 한증막은 조선시대 부유층의 전용 피로회복 목욕탕으로 알려져 있다. 소나무 가지 등을 이용해 불을 지펴 올라오는 열기로 찜질 효과를 누리던 공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한증막은 둘레 15m, 직경 4.5m , 높이 3m로 현재 전국적으로 밝혀진 조선시대 한증막중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한증막 터는 전혀 보존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방치돼 있다. 한증막 내부는 현재 야생동물들의 배설물과 발자국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형편이다. 사람들의 손때로 한증막 여기저기가 망가진 상태로 방치되고 있고 있는 실정이다.
한증막 터 주변에 작은 푯말이 세워져 이 곳이 예전 선조들이 피로회복을 위해 목욕을 즐겼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사정이 이렇지만 강화군에서 조차 향토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얘기가 전혀 흘러나오지 않고 있다.
인근 지역의 한 주민은 “교동도를 한눈에 알 수 있는 화개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조선시대 귀중한 유물인 한증막이 자리 잡고 있지만 아무도 신경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역사 유물로 등록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2008년 10월 보수된 한증막
-입구에서 바라본 한증막의 모습
-보수된 한증막
-원형 그대로인 내부의 모습
-무너져 내린 샘물터와 찜질후 휴식공간을 정비한 모습
-불을 지핀후의 재를 보관하던 장소와 한증막 아래로 흐르는 계곡의 물을 모아 자연스레 흐르도록 배수로를 설치한 모습
-축대와 함께 무너져 내리던 한증막의 뒷면을 보수한 모습.
이 내용은 조선시대 한증막과 관련된 세종실록에 거론된 내용을 간추려 소개합니다.
[1422년 세종실록]
예조에서 계하기를,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과 서울 안의 한증소(汗蒸所)에서 승인(僧人)이 병의 증상(證狀)은 묻지 않고 모두 땀을 내게 하여,
왕왕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하니, 이제 한증소를 문밖[門外]에 한 곳과 서울 안에 한 곳을 두고,
전의감(典醫監)·혜민국(惠民局)·제생원(濟生院)의 의원을 한 곳에 두 사람씩 차정(差定)하여, 그 병의 증세를 진찰시켜 땀을 낼 만한 사람에게는 땀을 내게 하되, 그들이 상세히 살피지 않고 사람을 상해시킨 자는 의원과 승인(僧人)을 모두 논죄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좇고, 동서활인원과 서울 안의 한증소는 그전대로 두기로 명하였다.
[1427년 세종실록]
예조에서 계하기를,
"한증(汗蒸)하는 승려로 대선사(大禪師) 천우(天祐)·을유(乙乳) 등이 말하기를, '한증으로 병자를 치료하는 것은 인애하는 정치의 한가지가 될 만한 일입니다. 지난 계묘년에 대사승(大師僧) 명호(明昊)가 탕욕(湯浴)하는 장소를 만들어서 병 있는 백성을 구제하려고 성상께 말씀을 올렸던 바, 성상께서 가상하게 여기시어 바로 집을 마련해 주시고, 욕실(浴室)을 만들라고 명하셨었는데, 일이 미처 착수되기도 전에 명호가 죽었습니다.
저희들은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널리 시주를 받아들이어 연전에 욕실(浴室)을 증설한 바,
한증으로 병을 고친 자가 계속하여 끊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병자는 땔나무를 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죽을 쑤어 먹기와 소금·간장 따위도 마련하기가 쉽지 아니하므로, 저희가 비록 안타깝고 민망하오나 공급할 길이 없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아시게 되어 쌀 50섬과 무명 50필만 주시면 그것으로 밑천 삼아 이식만을 가지고 쓰면서 본 밑천은 도로 나라에 반납하고서 영구히 보(寶)를 세워 가지고, (무릇 쌀이나 베를 가지고 본전 삼아 두고서 이식만 따서 영구 비용을 마련함을 보(寶)라고 한다.)그것으로써 병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소승들의 지극한 소원이옵니다.'
하오니, 그 소원에 따라서 쌀과 베를 주고, 또 의원 한 사람을 정하여 그로 하여금 똑같은 마음으로 치료해 주게 하고,
1년이 되면 교대시키는 것으로 일정한 법을 삼기를 청하옵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1429년 세종실록, 통신사 보고서 중에서...]
일본인의 풍속이 노소없이 목욕하고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큰 집에는 각기 욕실(浴室)을 설치하고, 여염(閭閻)마다 또한 여러 군데 욕탕을 설치하고있는데, 그 욕실의 제도가 매우 잘 되어 있어 편리합니다.
탕(湯)을 끓이는 자가 각(角)을 불면,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다투어 돈을 내고 목욕을 합니다.
비옵건대, 제생원(濟生院)·혜민국(惠民局)·왜관 한증(倭館汗蒸)·광통교(廣通橋) 등지와 외방의 의원(醫院) 등, 사람들이 많은 곳에 모두 욕실을 설치하여 돈을 사용하는 법을 돕도록 하소서.
[1445년 세종실록]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에 의거하여 상신(上申)하기를,"지금 묵사(墨寺)의 중[僧]이 병자(病者)의 한증(汗蒸)하고
목욕하는 기구를 수리할 것을 청하였으나,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이 이미 설치되어 질병(疾病)을 다스리고,
묵사(墨寺)는 여염(閭閻)에 끼어 있어 중들이 살기에 적당하지 아니하고, 또 한증과 목욕이 본래 특이한 효험이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묵사를 헐어 버리고 한증과 목욕하는 기구 및 입보(立寶)한 미포(米布)는 동서 활인원의 노비에게 나누어 주고,
형조(刑曹)로 하여금 재목과 기와를 조처하여 왜관(倭館)을 수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482년 성종실록]
삼대비(三大妃)가 경복궁(景福宮)으로 이어(移御)하였는데, 이는 한증(汗蒸)을 하기 위해서였다.
위의 내용을 토대로 요약하면
활인원 및 기타 장소에 한증막이 설치되어 치료 목적으로 이용되었으며 한증막 치료의 진단-처방 과정을 정비하였고 통신사를 통하여 일본 목욕 풍습의 장점을 파악하였으며 공중 목욕탕 설치 확대를 건의하고 있음. 특이할 사항은 경복궁에 한증막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한 1901년 8월 27일자 황성신문에...
"무교 취향관에서 음 칠월 십칠일붓터 목욕탕을 정결이 수리하고서 한증막을 설시(設始)하왓스니 첨군자는 래임(來臨)하심을 망(望)홈. 취향관 고백"
이 내용으로 보아 한증 목욕탕에 관한 안내 광고가 아니였던가 짐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