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센터 비행기 충돌지점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LG증권 뉴욕지사 이동훈(35.사진) 과장이 12일 생생한 탈출기를 중앙일보에 보내왔다.
상쾌한 하늘에 바람이 살랑이는 기분좋은 아침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전 7시50분쯤 세계무역센터 북측 타워 84층 사무실(8463호) 로 출근했다.
이미 이동영 과장과 현지 채용인인 제니퍼 최가 출근해 일을 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서울에서 온 e-메일을 확인한 뒤 블룸버그통신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8시45분쯤 엄청난 굉음이 들리면서 천장 한쪽이 내려앉았다. 엉겁결에 "책상 밑으로 피해" 라고 소리쳤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 건너편을 보니 86층 서쪽 방향에 비행기 파편이 박혀 있고 사무실은 거의 흔적없이 사라진 채 철골만 남아 있었다.
복도를 타고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가 우리 사무실이 있는 동쪽으로 몰려왔다. 일단 문을 닫고 수건에 물을 적셔 문틈을 막았다.
911에 전화를 걸어 "여기는 세계무역센터다. 제발 빨리 구조대원 좀 보내달라" 고 외쳤다.
깜짝 놀란 상대방이 뭐라고 얘기하는 듯 했지만 정신이 멍해져 그대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실내는 검은 연기로 가득 차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까지 대피방송이나 경고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마스크를 찾아보라" 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창문을 깨려고 창가로 가는 순간 건물이 휘청거렸다. 유리창은 이미 충돌의 충격으로 상당 부분 깨져 있었다. 이러다간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로 나가 바로 사무실 옆에 있는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아직 연기가 차지 않은 것 같았다. 비상계단이 사무실 바로 옆에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李과장과 제니퍼의 손을 끌고 무조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4개층을 내려가 80층에 도착하니 이미 비상계단에 불이 붙어 있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81층으로 올라가 소화전을 갖고 와 불을 끄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땀은 비오듯 했지만 손등으로 땀을 닦을 겨를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온 사람은 불과 40여명에 불과했다. 연신 '오 마이 갓(하느님) ' 을 외치는 사람,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뒤섞이면서 수라장이 됐다.
30층 정도를 지날 때쯤 대피하라는 경보가 울렸다. 비상계단을 통해 대피하는 인원이 2백여명으로 늘어났다. 1시간 정도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와 드디어 1층에 도착했다. 쇼핑몰로 연결돼 있는 문을 여니 소방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9시59분.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엄청난 폭음이 남쪽 타워에서 들려오면서 뭔가 '훅' 하는 느낌이 들었다. 구조대원 누군가가 "엎드려" 하고 소리쳤다.
남측 타워가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1층 쇼핑몰은 남.북 타워가 연결돼 있어 남측 타워의 잔해와 분진이 북측으로 무섭게 몰려 온 것이다.
마치 무슨 영화를 보는 듯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머리 위로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수십여명이 공중으로 날아 벽에 부닥치고 유리창 밖으로 퉁겨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그렇게 5분 정도가 흐르고 건물은 정전이 돼 암흑으로 변했다. 나는 먼저 머리를 만졌다. 팔과 다리를 만져 보았다. 별 이상이 없었다. 구두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바로 옆 동료 직원을 보니 무사했다. 동료들을 일으켜 세우고 구조대원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구조대원이 랜턴을 비췄지만 1m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출구는 불과 1백m 앞에 있었지만 거기까지 가는데 무려 10여분이 걸렸다.
내가 살아온 35년 삶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시간이 10시24분.
제니퍼 최의 발 부상을 치료하고 있는데 구조대원들이 "건물이 무너질지 모르니 대피하라" 고 소리쳤다. 李과장.제니퍼 최와 함께 무조건 앞을 보고 맨발로 뛰었다. 그리고 4분 뒤 머리 뒤로 북측 타워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