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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4. 묵상글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 사랑의 십자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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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의 십자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쳐다봐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실천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주어질 구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하고 고백했습니다. 성녀 줄리 빌리아르는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십자가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하면서 십자가를 가까이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못 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하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에‘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이,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언어의 습관이,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심판보다는 구원을 앞세우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삶에 있어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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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2021>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야지만 진짜 죽음이다.
이것은 실패란 실패로 끝날 때 진짜 실패인 것과 같다.
뒤집어 얘기하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실패를 바탕으로 성공을 거두면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실패를 바탕삼아 재기하면 처음 실패는 작은 실패지만
재기를 포기하면 그것이 큰 실패이고 진짜 실패다.
사랑도 실패한다면 사랑을 포기할 때 진짜 실패이기에
내 사랑이 상대에게 거부되는 실패는 작은 실패이고,
내가 사랑을 포기한 그 실패가 진짜 실패요 큰 실패이며,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사랑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축일의 감사가는 이렇게 노래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 나무에서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은
생명이 이 죽음에서 솟아나고 패배에서 승리하기 위함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십자가는 참혹한 사형의 틀이었고 그래서
예수님 전의 죄수들은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죄로 인생을 끝내지 않도록,
그리고 죽음으로 삶이 끝나지 않도록
죽음에서 생명이 솟아나는 이 구원의 신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므로 십자가의 신비는 구원의 신비이고 사랑의 신비입니다.
구원을 위한 사랑의 형틀이 아니라면 십자가는 사형틀일 뿐이고
그래서 저주받을 것이지 현양받을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구원과 사랑의 신비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으니
이제 우리가 주님과 세상에게 보여야 할 것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며 그리고 매일 미사 때마다
이 신앙의 신비를 기념하고 이 신앙을 고백하는데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하면 우리는 세 가지로 답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받으소서.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영광드리기 위해서,
주님의 죽음을 전하고 부활을 선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이 이 신앙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실현이고, 재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신앙의 신비의 실현이고, 재현입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늘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하시는데
믿는 사람이 주님 구원이 내게 들어오도록 문을 개방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믿을 때 주님 구원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이 신앙의 신비가 실현이 되고 재현되며,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를 통해서 증거가 되고 중계가 되지요.
죽음에서 참삶이 시작된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오늘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진정 기쁘고 의미있게 지낼 수 있음을
다시금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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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어느 날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한 천사를 불러, 산골에 살고 있는 어느 여인의 영혼을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 천사는 혼자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너 혼자서 돌아왔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그 여인은 너무나 불쌍해서 도저히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인의 남편은 어제 나무에 깔려 죽었고, 이제 막 쌍둥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를 데려오면 그 갓난아이들은 누가 키우겠습니까? 그래서 차마 그 여인을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질책하며 다시 천사에게 명령했습니다. “너는 속히 가서 그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하늘나라에 되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할 수 없이 산골로 내려가 여인의 영혼을 빼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천사의 날개가 떨어지고, 천사는 그만 땅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천사는 지상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한 부인이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신발을 사러 구둣가게에 왔습니다. 천사는 두 아이를 한참 들여다 본 후에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어머니입니까?” 그러자 부인은 “아니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6년 전의 일이었지요. 이 애들의 아버지가 숲 속에서 나무에 깔려 죽고, 어머니까지 느닷없이 죽고 말았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 젖먹이 아이를 기르고 있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 갓난아이들을 나에게 부탁했지요. 그런데 그 다음 해 그만 내가 낳은 아이가 죽게 되었고, 결국 그래서 이 아이들이 나의 아이들이 되어 버렸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천사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흘러나왔습니다. “오!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면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로구나! 그래, 맞아. 사람은 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는 거야” 바로 그 때 천사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곧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천사는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그야말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16).
이 큰일을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형벌’은 손과 발이 못박인 채 철저히 무력해진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비참함의 끝이요, 노예 죄수에게나 행해지는 참으로 냉혹하기 짝이 없는 철저하게 버림받음이요, 그야말로 완전한 패배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갈라 3,13)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치욕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스캔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되었습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하여 죽음으로써 진정 사셨습니다.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동시에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이셨습니다. 하여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셨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승리셨습니다. 하여, 지면서도 쳐부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역사의 역전이요 혁명이며,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요, 완전한 승리의 표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요, 현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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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 멀리 서쪽 인도에서 달마스님이 왔습니다. 달마 조사는 527년 남인도에서 당나라 낙양에 도착하여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 수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님께서 동쪽으로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때 달마는 ‘뜰 앞의 잣나무’고 했습니다. 이는 ‘한 꽃에 다섯 잎이 피어서 결과는 저절로 이루어지리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뜻을 전하고자 왔으며, 부처님의 뜻으로 중생이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시작한 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서 유럽으로 전해진 그리스도교가 서구 문화의 원류가 되었던 것처럼 동아시아 문화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삶의 고뇌와 번민을 끊어버리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며, 모든 중생들이 걸어야 할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땅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으로 가기 전에 정화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정화의 시간이 ‘광야’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에 다시금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난 이유를 망각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구리뱀을 만들었습니다. 구리뱀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난 이유를 깨달았고, 다시금 약속의 땅을 향해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냈고, 외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외아들인 예수님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외아들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모세가 높이 들었던 구리뱀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난 이유를 알게 하였듯이,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느님나라로 인도하기 위한 표징입니다.
오늘 교회는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냅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형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십자가는 구원과 부활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미사의 정점인 성찬의 전례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교우들은 사제의 선포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영원히 경배 받으소서.” 십자가의 길 기도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점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씨 뿌리지 않고 열매 맺으려는 욕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사막의 신기루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형벌의 도구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십자가의 수직면은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수평면은 사람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사람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현양축일을 지내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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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의 한 심리학 실험실에서 노인을 대상으로 이런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집단은 하루 일정을 일원화해서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앴고, 다른 집단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일정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두 집단의 극명한 차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통제 집단보다 스스로 일정을 선택하는 집단이 훨씬 더 건강했고, 더 오래 사셨습니다.
제아무리 안락하고 편하다 해도 주어진 대로만 누리려는 수동적 태도는 삶에서 생기를 빼앗아 갑니다.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 모두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고통과 시련을 주신다면서 불합리한 하느님이라고 불평불만을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좁니다. 즉, 하느님께서 고통과 시련 없이 알아서 좋은 것만 주셔야 한다는 논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더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생기를 잃어가면서 살도록 무엇이든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 진짜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사랑하기에 고통과 시련을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배반하는 자들을 살리는 희생으로 극치를 이룹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하느님을 배반해 벌을 받아 모두 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측은히 여겨 모세가 구리 뱀을 만들어 높이 들게 하고 누구든지 그것을 쳐다보면 죽음에서 모면토록 하셨습니다(민수 21,4-9).
이제 하느님께 보내신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그때의 구리 뱀처럼 죄인들의 구원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이런 당신을 보는 사람이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아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과거 이스라엘 사람도 구리 뱀을 봐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알아서 해 달라는 기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주체적인 마음을 세워서 직접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오늘, 우리는 얼마나 주체적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자유의지를 주체적으로 내세워 사는 사람만이 지금의 삶에서 생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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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인정하면 그 다음에는 상대를 인정하기 쉬워진다(네모토 히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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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성 십자가
-선택, 기억, 사랑, 바라봄, 따름-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시 14처마다 시작하면서 바치는 위 기도문이 복음 환호송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감사송에서도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승리를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나무에서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승리하게 하셨나이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며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 십자가의 주님과 일치의 사랑을 표현하는지요!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는데, 영적승리의 삶에 수시로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도대체 몸과 마음이 주님과 하나되어 바칠 수 있는 짧고 좋은 기도로 십자 성호경 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가 세상 어디 있겠는지요! 새삼 저절로 성 십자가를 예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축일의 유래에 대해 잠시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펴 봅니다.
전승에 의하면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합니다. 정확히 335년 9월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위에 기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그 다음날인 바로 오늘 9월14일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 십자가’를 무덤 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한데서 유래된 축일입니다.
이어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전체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잡아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14일로 고정됩니다. 그러니 놀랍게도 무려 1600년 이상의 전통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것입니다. 마침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성 십자가의 주님께 현재 해외 사도적 여정중에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맡은바 사명을 수행하시는 교황님은 9월13일부터 9월15일까지 제38차 해외 사도적 여행을 위해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카차흐스탄을 방문하고 계십니다. 교황님은 현지에서 ‘팬데믹 이후 인류의 사회-영적 발전에서 세계 종교지도자와 전통 신앙의 역할’을 주제로 개최되는 “제7차 세계 및 전통종교 지도자 대회”에 참석하여 연설과 토론의 일정을 소화하신후, 작은 가톨릭공동체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격려할 예정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과 내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까지 계속될 교황님의 사목여정이 그대로 하느님 섭리의 맥락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문득 생각나는, 꼭 만 33년전 제가 만40세 되던 해, 1989년 7월11일 사제서품식 미사시 성가 445장을 들으며 입장할 때 걷잡을 수 없이 흘렀던 눈물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니 강론 쓰는 지금도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납니다.
“1.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3.이 땅위에 산다 하여도, 이 땅위에 산다 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주님의 성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당신의 수도사제가 되어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른지 만33년, 꼭 예수님 한 생애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구원의 성 십자가의 주님을 한결같이 끝까지 따르는 것이 제 유일의 소원이자 목표입니다. 저절로 자리 잡는 다섯 가지 각오를 나눕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본질적인 수행이겠습니다.
첫째, 구원의 성 십자가를 선택하라!
구원은 선택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구원의 성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 십자가 고상을 바라볼 때나 십자성호를 그을 때 마다 이 구원의 선택을 새롭게 확인하자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중심에 대한 우리의 정체성, 신원에 대한 확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성 십자가의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새삼 믿음의 구원과 심판도 우리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외아드님, 구원의 성 십자가의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심판이 아닌 구원의 선택, 믿음의 선택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삶의 여정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선택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구원의 성 십자가를 기억하라!
선택에 이어 곧장 뒤따르는 성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가 우리에게는 기억에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참 배은망덕한 망각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출애굽의 여정에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까맣게 잊고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다가 주님께 화를 입습니다.
하느님 탓이 아닌 망각으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화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불뱀에 물려 죽어들 가자 기민하게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중재자 모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백성입니다. 참으로 경거망동의 변덕스런 백성들, 그대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의 종, 모세가 기도하자 주님은 즉시 응답하십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민수기의 구리뱀을 생각할 때 마다, 즉시 구리뱀의 구원을 상징하는 주님의 성 십자가를 기억하며 불평의 죄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주님의 성 십자가야 말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리하여 화답송 후렴,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입니다. 새삼 우리 삶의 여정은 끊임없이 성 십자가의 구원을 기억해야 하는 ‘기억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셋째, 구원의 성 십자가를 사랑하라!
선택과 기억에 이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성 십자가의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세상 그 무엇도 성 십자가의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성 십자가를 사랑할 때 주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집착없는 초연한 이탈의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런 아가페 사랑은 지혜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십자가의 사도 바오로의 힘찬 고백에 공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 성 십자가의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바로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분과 일치의 삶을 살게 되니 이보다 더 큰 구원의 복도 없습니다. 구원의 성 십자가의 주님께 대한 사랑 역시 날로 깊어지는 평생 ‘사랑의 여정’ 인생임을 깨닫게 됩니다.
넷째, 구원의 성 십자가를 바라보라!
선택에 이어 기억이요, 기억에 이어 사랑이요, 사랑에 이어 바라봄입니다. 사랑하면 저절로 바라보게 됩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보는 성 십자가의 주님입니다. 성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님의 사랑의 눈길과 우리의 주님 사랑의 눈길이 만납니다.
영원히 바라볼 사랑의 대상인 성 십자가의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우리가 하루하루 날마다 언제나 바라봐야할 분은 구원의 하늘길을 내시고 구원의 하늘문을 활짝 여신 성 십자가의 주님이시며 바로 이점을 요한 사도는 통쾌하게 고백합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영원히 바라 보고 배워야 할 성 십자가의 주님의 사랑이요, 영원한 생명의 열매인 사랑의 성체를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다섯째. 구원의 성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라!
제 십자가를 지고 성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요, 성 십자가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구원의 성 십자가는 선택, 기억, 사랑, 바라봄, 그리고 마지막 따름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참으로 주님의 성 십자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운명의 십자가를, 내 책임의 십자가를 사랑하면서, 온몸에 지고, 한결같이, 평생, 살아 있는 그날까지, 앞서 가시는 성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선택하고 기억하고 사랑하고 바라보며 한결같이 항구히 제 십자가를 지고 성 십자가의 주님을 따를 수 있게 하십니다.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 기도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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