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이선수가 한일전에서 1:0결승골을 넣은게 생각나네여
어린아이의 눈으로도 잘한다소리를 연발하게했던선수...
: 퍼왔는데요...
: 90년대 초반..천재라 불리던..
: 윤정환이 가장 존경한다는 천재..
: 보세요..
:
: 아하, 김병수-윤정환-고종수 였군요?
: 천재 플레이메이커 빅쓰리란.
: 그렇죠?
:
: 정말 신기하네요.
:
: 윤정환이 제일 존경하는 선수 -> 김병수
: 고종수가 제일 존경하는 선수 -> 윤정환
:
: 저는 나우누리를 쓰고 있는데,
: 안그래도 요즘 스게에 윤정환에 대한 얘기가 많아서,
: 김병수-윤정환-고종수에 대한 글을 쓰고 있거든요.
:
: 아래는 web2soccer의 고용국님이 쓰신 글인데,
: 이 글보다 더 잘쓰시려면 아마 고생좀 하셔야 할듯.. ^^*
: -----------------------------------------------------------
:
: 그것만이 내 세상 (1)
:
:
: 대통령금배 고교축구대회 예선전이 벌어지고 있는 효창운동장. 그라운드에서는 포철
: 공고와 남강고 선수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뛰고 있었다. 눈
: 에 띄는 선수가 있어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데 관중석 한쪽에서 40대로 보이는 아저
: 씨의 난데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 "축구 천재 김병수 화이팅~!"
: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번엔 주변의 학부모들까지 합세해
: 서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
: "미동 초등학교 전국 최우수 축구선수 김병수 화이팅!"
:
: 목청이 큰 아저씨가 구령을 부치듯 크게 외치면 옆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박수를 치
: 면서 "와~!" 하고 합창을 하는 것이었다. 한 두번으로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게
: 아니었다. 경기 중간 중간 잊을만하면 한번씩 되풀이 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재미
: 있을 수가 없었다.
:
: 웃음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다시 경기장을 바라봤다. 물론 그라운드에서 뛰고
: 있는 선수 중엔 미동 초등학교를 나온 김병수는 없었다. 그저 멋적은 듯 머리를 긁
: 적거리는 한 사내의 뒷모습만 있을 뿐이었다.
:
: "챙피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저도 모르는 분이었는데 밖에서 기다리시더라구요. 초
: 등학교 때 내가 뛰던 경기 심판을 보셨데요. 그 때부터 기억하신다고..."
:
: 。
:
: 대구에서 벌어진 2000년도 문화관광부 장관기 고교축구대회 우승은 포철공고에게 돌
: 아갔다. 이동국을 배출한 포철 재단의 축구 명문인 포철공고가 전국 대회 우승을 한
: 번 더 했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뉴스는 물론 아니다. 그런데, 개인상 수상자 명단을
: 확인하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
: "이 김병수가 그 김병수 맞는거야?"
:
: 포철공고 감독은 국가대표를 지낸 턱수염의 사나이 김경호 감독. 그런데, 지도상 수
: 상자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할 그의 이름 대신 김병수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
: 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너무나 의외였다. 귀국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가 이렇게
: 등장할 줄은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
: 김병수.
:
: 요즘도 올림픽 축구 한일전이 벌어질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의 이름. 92년 1월
: 27일 말레이지아 콸라룸푸르에서 벌어진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 예선, 일본과의 경
: 기에서 종료 직전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리고 트랙을 달리며 포효하던 그의 모습을
: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
: '전방으로 찔러 넣는 정확한 패싱과 천부적인 득점감각' '문전 앞 직접 프리킥은 90
: %이상 골로 연결시키는 정교한 스핀킥' '게임 리더이자 찬스 메이커이며 스트라이커
: 이기도 한 축구천재' 그리고 90년대 '한국 축구의 희망'
:
: 이상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대략 4년간 그를 따라다녔던 수사다. 과장
: 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장담하긴 어렵다. 특히 직접 프리킥을
: 90% 이상 차서 넣었는지 못넣었는지는 세어본 적이 없으니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재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 너무나 빨리 시들어버린 그의 축구 인생에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다.
:
: 일간스포츠 축구팀 박재영 부장은 그를 두고 이렇게 단언한다.
:
: "비교가 안된다. 잘하는 선수는 많아도 그처럼 '축구 천재' 소리를 들을만한 선수는
: 흔치 않다. 앞으로도 어렵다."
:
: 5월 말이었다. 대통령 금배에 포철공고가 출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 "만날꺼에요?"
:
: 후배 기자가 묻는데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만나긴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
: 다. 그런데, 만날 것인지 말 것인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 아니라, 그가 과연 내 기억 속에 살아있는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날 것인지, 아니면
: 세상에 찌든 남루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전자라면 너무나 좋겠지만 만에 하나 그가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내가 간직하고 있
: 던 환상이 참담하게 깨질 것이다.'
:
: 솔직히 그게 걱정스러웠다. 참으로 약삭 빠른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슨 이산가
: 족 상봉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초조한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제발 망가지지
: 만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기다리고 있는데, 문 밖에서 인
: 기척이 났다.
:
: "안녕하세요. 제가 김병수입니다."
:
:
: 김병수는 강원도 홍천초등학교에서 처음 축구화를 신었다. 20년전 일이다. 축구를
: 잘한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돌았다. 미동 초등학교 천명길 코치가 강원도까지 찾아가
: 그를 스카우트해 왔다. 일단 서울로 오자 '신동 났다'는 소문이 더 빨리 퍼졌다. 포
: 항제철 감독이었던 한홍기 선생은 이 '신동'을 대선수로 키워보겠다고 아예 포철축
: 구단 숙소로 데려갔다. 어린 아이 혼자서 외로움을 탄다고 어머니에게 선수단 식단
: 까지 맡기면서 말이다.
:
: 어린 꼬마는 포철 연습장에서 포철 선수들과 연습을 했다. 그의 연습상대는 김철수,
: 박창선, 최순호, 조태천 같은 당시 쟁쟁한 스타 선수들. 어린 아이가 축구를 조금하
: 니까 그저 귀여워만 했던게 아니었다. 훈련 중에 아저씨들 앞에 나가서 개인기 시범
: 을 보이기도 했다. 때론 연습 경기에 투입(?)되어 아저씨들을 제치고 골을 넣기도
: 했다.
:
: 포항제철 관계자와 한홍기 감독은 이 어린 천재를 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요즘
: 유행하고 있는 브라질 유학이 이미 그 시절에 추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교부 (
: 현 교육부) 방침이 걸림돌이었다. 브라질 축구학교에서 축구 공부를 한 기간은 국내
: 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학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꿈을 접어
: 야만 했다.
:
: 그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8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당시 한국일보
: 전상돈 기자(현 스포츠투데이 부국장)는 '한국 축구에 김병수 시대가 오고 있다'며
: '한국 축구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미드필더의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
: 경신중학교를 거쳐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이미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축구
: 를 잘 알고 하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지고 있던 경기도 그가 들어가면 어영부영하
: 다 스코어가 뒤집히기 일수였다. '김병수는 자신의 리듬에 게임의 흐름을 일치시키
: 는 선수'라는 말처럼 게임을 조율하는 능력에 관한한 그보다 나은 선수는 없었다.
:
: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부상을 당했다. 체계적인 선수관
: 리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을리 만무였다. 찜질 몇 번
: 에 주사 한 두대 맞고 중요(?)한 경기랍시고 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발 다
: 쳤으면 왼발로만 차라.'는 소리가 그를 그라운드로 떠밀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로
: 뛰는 날보다는 서 있는 날이, 서 있는 날보다는 앉아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의
: 불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축구의 불운이기도 했다.
:
:
:
:
: 그것만이 내 세상(2)
:
: 대학 재학 중 그가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는 단 네 경기. 그 가운데 세번이
: 연세대와의 정기전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정기전용 선수였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 지었다. 어찌보면 그는 방치되어 있었다. 아버님이라도 생존해 계셨다면 축구 선수
: 의 두 다리가 그 지경이 되도록 지켜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님은 너무 일찍 돌
: 아가셨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들에겐 그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기
: 때문이다.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
: "한 달 이상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
: 그냥 쉬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그러다 경기가 있으면 불려나가 사나흘 연
: 습하고 뛰었다. 91년에는 왼쪽 발목에다 어깨까지 다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섰다. 압
: 박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뒤뚱거리며 뛰었지만 어시스트도 하고 결승골도 넣었다. 당
: 시 사람들은 그런 그의 플레이를 두고 '대단한 투혼'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이제
: 와 생각하니 그 무책임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
:
: "제가 바보 같아서 그런거지요.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나요."
:
: 그 몸을 해가지고 경기엔 왜 나갔냐고 물었더니, 씩 웃으며 자기 탓이란다. 이야기
: 를 하면 할수록 미련하도록 착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는 절
: 대로 못할...
:
: 청소년 대표를 거쳐 그가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대통령배(현 코리아컵) 대회를
: 앞둔 89년 6월. 그런데, 당시 대표팀 이회택 감독은 그의 경기 모습을 본적이 없다
: 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내내 놀다가 고연전에나 나오는 선수의 경기장면을 어
: 떻게 보았겠는가. '하도 옆에서 김병수 김병수 해가지고 하는 수 없이 뽑았다'는 것
: 이 주변의 전언이다.
:
: 그러나, 그의 플레이를 본 이회택 감독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8월 소련과
: 미국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너는 무조건 이태리에 데려갈테니 이 길로 병원
: 에 가서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차일피일 미룰뿐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 고연전에 출전했다.
:
: "운동하면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딱 한번만이라도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
: 게임을 해보는 거였어요."
:
: 하지만, 그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그의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오
: 른쪽 발목 인대가 1인치, 왼쪽 발목 인대는 0.9인치가 늘어난 상태였다. 90년 1월에
: 가서야 경찰병원에서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적 포철 축구단 숙소
: 에서 만났던 최순호 선배가 수술비 일체를 부담해 주었다. 6월엔 학교측의 주선으로
: 일본으로 건너가 스쿠바 대학에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만에 일어
: 났다.
:
: 그의 복귀 경기는 다시 고연전. 1년만에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 살아 있었다. 그는 이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대 2로 고대가 승리. 다음날
: 스포츠 신문엔 '고대 황금발 김병수 - 비극은 끝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 고질적인 부상이 그리 쉽게 고쳐질리 없었다. 부상이 재발한 것이다. 한참을 쉬다가
: 91년 1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
: "나중엔 다쳐도 감각이 없었어요. 0.6인치가 늘어나면 아주 많이 다친건데 나는 1인
: 치가 늘어났거든요. 삐어도 삔 것 같지 않았어요."
:
: 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
: 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세번
: 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
: 크라머 감독은 처음에 그의 선발을 반대했다. '보지도 못한 선수를 말만 듣고 뽑을
: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U-17 대표팀부터 그를 지켜본 김삼락 감독의
: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세계적인 축구 이론가 디트마르 크라
: 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구인생 50년만에 처음 만난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
: 고 싶다.'
:
: 그리고, 운명의 콸라룸푸르. 쿠웨이트와의 첫경기를 어렵게 비긴 한국팀은 2차전에
: 서 바레인에게 1대 0으로 승리를 거두며 28년만의 올림픽 자력 진출길을 여는듯 했
: 다. 그러나, 3차전에서 복병 카타르에게 일격을 당하며 예선탈락의 위기에 몰리고
: 만다. 4차전 상대는 숙적 일본. 약체로 평가받았던 일본은 3차전에서 바레인에게 대
: 승을 거두며 느닷없이 중간 순위에서 한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반드시 이겨야만
: 하는 경기였다. 비기는 경우에도 골득실차 때문에 본선 진출이 좌절될 판이었다. 일
: 본과 바레인 사이에 커넥션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
: 파상공세를 퍼부었지만 골문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지루한 공방전 끝에 어느새 전
: 광판의 시간은 다 지나갔다. 2년 동안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 때 왼쪽 사이드에서 낮은 센터링이 일본 문전으로 날아 들었다. 그리고, 골문 앞에
: 서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김병수였다. 빈자리를 보고 쏜살같이 뛰어들며 자세를 낮
: 추고 왼발을 갖다 댔다. 골이었다. 극적인 결승골이었다.
:
: 그는 환호했다. 아니 미친 사람처럼 두팔을 벌리고 트랙을 따라 달리며 무슨 소리인
: 지 모를 소리를 질러댔다. 그도 그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한국 올릭
: 픽팀은 마지막 경기에서 중국을 3 대 1로 꺽으며 본선 진출권을 따냈고 그해 3월 북
: 미 전지훈련을 떠난다. 하지만, 원정 명단에 김병수의 이름은 없었다. 다시 부상이
: 었다.
:
: 본격적인 J리그 출범을 앞두고 일본의 JFL(일본 실업축구 리그) 소속 구단들은 한국
: 의 유망 선수 영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쓰다 자동차도 그런 구단 가운데
: 하나였다. 물밑 작업이 한창이던 91년 그들은 김병수를 점찍고 가계약을 맺었다. 올
: 림픽 최종예선이 끝나고 정식 계약을 체결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92년 2월
: 스카우트할 의사가 없음을 공식 통보한다. 재기 가능성이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 마쓰다는 93년 '산푸레체 히로시마'라는 이름으로 J리그에 참가했고 고려대 1년 후
: 배인 노정윤이 그를 대신해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
: 다. 이제 그의 이름은 그렇게 조금씩 잊혀져 갔다.
:
: "그냥 걸었어요. 하루종일 술에 취해서 걸었어요. 원래 술을 못마셨는데 그땐 취하
: 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어요. 떠나고 싶었어요. 그냥 아무 곳이나... 그래서 자꾸만
: 걸었어요."
:
: 강원도 산골 천재 소년의 꿈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시절 이야기를 무표정한 얼
: 굴로 담담하게 이어가는 모습에서 그가 느꼈을 환멸과 절망의 깊이를 어림짐작으로
: 읽을 수 있었다. 아니, 거짓말이다. 읽어보려고 애썼을 뿐이다. 당사자가 아니고서
: 야 어떻게 그 아픔을 느낄 수 있겠는가. 마땅히 갈 곳도 없었고 할 일도 없었다. 비
: 디오 대여점을 하는 큰 누나 집에서 가게를 봐주며 아무런 낙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
: 냈다.
:
: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끼는 못속이는 것인지 조그만한 고무공을 들고 가게 앞으로
: 나갔다. 그리고 리프팅을 시작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애들 가지고 노는 공으로
: '묘기'를 부리자 하나 둘 구경꾼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동네 꼬마들이 주된
: 관객(?)이었다. 공을 빼앗아 보겠다고 달려드는 꼬마들 틈에서 신들린 사람처럼 요
: 리 조리 피하며 리프팅을 이어갔다. 그러자 이제는 지나가던 어른들까지 관중석(?)
: 에 합세했다. 심지어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멈춰서서 이 희한한 남자의 재주를 지켜
: 봤다. 때 아닌 교통 체증이 일어났다.
:
: "동네에 헬스클럽이 있었는데 심심할 때마다 운동하러 갔거든요. 그런데, 거기 관장
: 님이 제가 마음에 드셨나봐요. 어느날 갑자기 괜찮은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는 거예
: 요."
:
: 그의 어두움을 걷어낼 한줄기 빛같은 여인을 만났다. 다름 아니라 바로 그 헬스클럽
: 관장님의 딸이었다. 그런데, 나이차가 적지 않게 났다. 김병수를 만났을 때 부인 허
: 은영씨는 고등학생이었다. 어린 딸을 믿고 맡긴 장인도 대단한 분이지만 겁(?)도 없
: 이 시커먼 아저씨를 따라 나선 은영씨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
: "학교 앞에서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집에 바래다 줬어요. 밝고 착하고 건강
: 했어요. 그래서 끌렸나봐요."
:
: 그렇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복덩이를 만난 것일까. 암울하기만 하던 그의 진로
: 가 마침내 열렸다. 일본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JFL의 코스모 석유에서 입단 제의가
: 들어왔다. 적지않은 연봉에다 부상 부위의 재수술과 재활 훈련까지 보장한다는 파격
: 적인 조건이었다.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일단 수술부터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92
: 년 초여름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구름 사이로 멀리 한국 땅이 보였다. 아픈
: 기억과 상처만 안겨준...
:
:
:
: 그것만이 내 세상 (3)
:
:
: - 현대 축구의 미래에 대하여 -
:
: 현대 축구는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최전방과 최후방
: 의 거리를 30m 이내로 축소하여 시간적, 공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
: 대부분의 팀이 상대편의 볼을 가장 빠르게 빼앗아서 가장 빠르게 공격하겠다는 공격
: 지향적인 축구를 선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확성에 대한 개념에 속도라는 개념이
: 추가되어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
: 이는 전술적인 면보다는 개인 기술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패스
: 의 질, 킥의 질, 원터치 볼 컨트롤의 질, 움직임의 질 등이 그것이다.
:
: 축구의 미래는 개인 기술, 개인 전술, 그룹 전술이 기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완성
: 되면 11명의 특성을 살려 시스템을 완성시키고, 시합 도중 시스템에 급한 변화를 주
: 어도 무리없이 소화해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
: 98 프랑스 월드컵 대회에서 활약한 세계의 톱 클래스 선수들이 화려하고 특별한 기
: 술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라기보다는 기본이 완벽한 선수들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격은 공격만, 수비는 수비만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현대
: 축구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메인이 되었다.
:
: 현대 축구의 공격 시발점은 어느 팀이든 최후방의 수비 라인이 되고 있다. 이는 예
: 전처럼 중반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기
: 도 하다. 갈수록 급박한 긴장감에 의해 현대 축구는 변모할 것이다.
:
: 앞으로는 더욱 더 빨라질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
: 던 마라톤 기록이 깨어지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축구가 전개될지도 모르
: 는 일이다.
:
: 결론적으로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개인기술의 향상을 위해 최
: 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후) 김병수의 노트 중에서...
:
:
: 。
:
: "아 그러니까..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미디어에서는 별로 관심을 안보이는
: 그런 분들을 모시고 인터뷰를...."
:
: "제가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은데..."
:
: 처음 전화를 걸어 간단하게 취지를 설명하고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그는 매우 당
: 혹스러워 했다. 시간이 꽤 지나기는 했지만 한 때 이 나라 축구의 희망으로 불리울
: 만큼 유명세를 치렀던 사람답지 않게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고 있었던 것이다.
:
: 아직도 축구천재 김병수를 만나고 싶어하는 팬들이 많다는 말에도 그는 무덤덤했다.
:
:
: "그럴리가 있나요. 제가 뭘 했다고..."
:
: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던 자신감 넘치던 모습 그대로일까. 아니면, 두 다리에 남은 깊
: 은 수술 자욱처럼 쓸쓸한 모습일까. 그를 만나는 순간까지도 머리 속은 온통 그의
: 현재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차 있었다. 결국 인터뷰 대신 그냥 저녁이나 같이 하자
: 는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
: "97년 초에 팀이 해체됐어요. 귀국해서 한일 생명에 입단 계약을 했는데..."
:
:
: 92년 7월. 그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이번엔 발목이 아니라 무릎이
: 었다. 수술 이후 약해진 발목 탓에 양쪽 무릎까지 부담이 갔던 것이다. 그리고, 93
: 년부터 코스모 석유에서 뛰기 시작했다.
:
: "조건이 좋았어요. 환경도 좋았고..."
:
: J리그도 아니고 일본실업리그 소속팀, 그 것도 만년 하위권으로 처지는 팀이었지만
: 그는 특급 대우를 받았다. 당시 그의 연봉은 국내 최고액 연봉 선수 못지않은 금액
: 이었다. 4년간 그가 출장한 경기는 대략 100여 게임.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70
: 골 이상 넣은 것 같다고 했다.
:
: "파격적이었죠. 감독님도 저를 믿어줬고... 팀 훈련은 거의 못했어요. 하루 두시간
: 정도 훈련 하다가 집에 가서 쉬고, 그러다 시합 있으면 나가고..."
:
: 비슷한 시기 J리그에 데뷔한 후배 노정윤이 산푸레체 히로시마와 대표팀을 오가며
: 주목 받았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일본 생활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
: 있다면 일본 축구 주간지 '사커 다이제스트'가 2회에 걸쳐 연재한 '김병수 특집'이
: 국내 모잡지사에 게재된 정도. 그 기사의 표제는 '새벽을 기다리며 인내한다'였다.
:
: "솔직히 말하면 98년까진... 뭐랄까 원망 같은게 있었어요. 왜 나만..."
:
: 홍명보 서정원 노정윤 이임생 김봉수... 동년배의 고대 출신 선수들이 팬들의 뜨거
: 운 사랑을 받으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을 이국 땅에서 쓸쓸히 지켜봐야하는 그의
: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
: "이젠 그런거 없어요. 내가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
: 부인 은영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년을 못채우
: 고 김병수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너무 보고 싶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단다. 그
: 리고, 아들 '다훈'과 딸 '사이'가 태어났다.
:
: "생긴건 날 닮았는데 축구보다는 예능 쪽에 재능이 있는거 같아요. 재주는 엄마를
: 닮았는지..."
:
: 훈련 부담이 적다보니 가족과 함께 지낼 시간이 늘어났다. 그의 일본 생활은 다행스
: 럽게도 평화로운 것이었다.
:
: "포지션이 없었죠. 그냥 공격이었어요. 천황배에 나갔을 때 나고야 그램퍼스랑 붙었
: 어요. 스토이코비치도 그 때 나왔는데 우리가 이겨버렸어요."
:
: J 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경기에서 김병수는 선취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렸다. 한
: 골 넣고 전원 수비를 했다고 한다. 코스모에서 뛰면서 구단주를 가장 기쁘게한 날이
: 었다.
:
: "93년에 국내 복귀설이 나왔던건 사실이랑 달라요. 당시엔 한국프로축구에 별 매력
: 을 못느꼈어요."
:
: 93년 여름 그가 국내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뉴스를 탄 적이 있다. 물론 불발로 그
: 쳤지만. 이미 발목에 이어 양쪽 무릎에 칼을 댄 상태였다. 다행이 후유증은 나타나
: 지 않았지만 내가 김병수 입장이라도 그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
: 다.
:
: 필름으로 보관된 그의 경기 장면은 많지 않다. 다행이 아들 다훈이에게 보여주려고
: 그가 몇 장면 녹화한 것이 있었다.
:
: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선수들과의 경기였지만 그는 여전히 유연한 몸놀림과 정확
: 한 킥솜씨를 과시하고 있었다. 필름을 보며 지금이라도 몸을 만들면 프로리그에서
: 하프 게임 정도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다는 욕심이 생겼지만, 역시 그건 나의 욕
: 심일 뿐이었다.
:
: "한 게임 한 게임 진통제 맞고 나가서 뛴 거에요."
:
: 97년 초 코스모가 해체되고 김병수가 귀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시 아시안컵
: 대패 이후 불안한 상태에 있었던 대표팀에 그가 기용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한 적
: 이 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박경화 씨의 주선
: 으로 오이타 팀에 입단한 것이다.
:
: "이상하게 거긴 적응이 어려웠어요. 한국 선수들도 많았는데..."
:
: 갈등 끝에 은퇴를 결심하고 짐을 꾸린 것은 98년 봄. 조용히 귀국한 그는 모교인 경
: 신고에 잠시 머무르다 고대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게 됐다.
:
: 당시 고대는 94년 이후 계속된 스카우트 실패로 라이벌 연대는 물론 아주대 한양대
: 등에 밀려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남대식 감독이 퇴진하고 김성
: 남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고 있던 상황.
:
: "좋은 후배들을 만났죠. 후배들도 저를 따랐구요."
:
: 그때 만난 선수들이 지금 올림픽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진섭 최철우 조세권 박동혁
: 과 부천의 이성재, 부산의 박민서 등. 하지만 장대일 서동원 이동욱 성한수 등 프로
: 1순위 선수들을 줄줄이 배출하고 정상남 정재곤 서기복 이승엽 같은 기라성 같은 선
: 수들이 버티고 있던 연대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전력이었다. 결국 그해 정기전은
: 2 대 0으로 연대의 승리.
:
: 하지만, 경기 내용은 고대의 압도적 우세였다. 페널티킥 두개를 실축하는 바람에 패
: 전의 멍에를 썼지만, 스타 플레이어에게 의존하는 선이 굵은 전통적인 팀 컬러 대신
: 개인 전술과 아기자기한 조직 플레이를 중요시하는 섬세하고 효과적인 축구를 펼쳤
: 다는 평가를 받았다.
:
: 설욕 무대는 그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대학 선수권 대회. 1회전에서 연대와 맞붙어
: 접전 끝에 3 대 3 무승부를 기록한 다음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주대와
: 대구대를 연파하며 결승에 오른 고대는 양현정이 이끌던 단국대를 4 대 3으로 꺽고
: 우승컵을 안았다.
:
: "아이들 가르치는게 재미있어요. 체질인가봐. 하하하..."
:
: 고대에서 코치 발령을 기다리다 포항으로 내려간 것은 98년 11월. 당시 고대 축구부
: 는 지도 체제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결국 김성남 감독도 99년 6월 뚜렷한 사유없
: 이 해임되고 만다.
:
: "순호 형이 추천을 했어요. 처음엔 못믿어워 하셨죠. 감독님도 안계시니까. 지난번
: 대구 대회에서 우승을 하니까 이젠 학부모님들도 신뢰를 하세요. 감독님도 이제 안
: 심하시고..."
:
: 올해 초 프로축구 포항은 포철공고 김경호 감독의 인솔 하에 연고 고교팀의 유망 선
: 수들을 브라질에 연수를 보내는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코치 신분으로 팀을 이끌게
: 된 김병수는 첫 출전한 문광부 장관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지도자로서의 첫
: 걸음을 상큼하게 내디딘 셈이다.
:
: "페어 플레이죠. 절대로 거친 반칙 못하게 해요. 스포츠맨쉽이 제일 중요한거에요."
:
:
: 포철공고의 포메이션은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팀과 유사한 형태의 3-5-2. 중
: 앙 수비수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세우고 다시 그 앞에 공격형 미드필더를
: 두는 다이아몬드형 시스템이다.
:
: 그런데, 한가지 독특한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에서 보기 힘든 컴팩트 사커를
: 구사한다는 것. 전후방은 물론 좌우 측면의 간격도 극단적으로 좁히는 압박 전술이
: 다.
:
: 스리백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더블 블란치로 세우고 때때로 4-4-2 나 3-4-
: 3으로 급격한 전술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 선수들의 기량이 무르익 지 않
: 아 어설픈 면도 있지만 시도 자체가 신선한 것이었다.
:
: "때리긴 왜 때려요. 이해를 시켜야죠. 능력이 부족해서 노력해도 안되면 할 수 없는
: 거에요. 본인은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
: 혹시 선수들이 못하면 때리기도 하느냐는 질문에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페어 플레
: 이와 스포츠맨쉽이 그의 교육방침 1호였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했다.
:
: "선수들도 공부를 시켰으면 좋겠어요. 가르쳐보니까 알겠어요. 이론이 중요해요. 한
: 번 칠판에 그려가며 설명을 하고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금방 이해해요. 한글도 잘 못
: 쓰는 선수들이 많다는 걸 알고 충격 받았어요."
:
: 98년 귀국한 이후 후배들을 가르치며 깨달은 것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귀가 번쩍
: 뜨였다. 그리고, 한없이 고마웠다. 능력은 나중 문제고 적어도 기본적인 마음 자세
: 만큼은 제대로 된 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을 갖춘 셈이다. 천재답게 한국 축구의 가
: 장 큰 맹점을 그는 감각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
: "요즘 살이 찌나봐요. 몸이 불어서 무릎에 조금씩 부담이 와요. 그래서, 시범을 못
: 보여주는게 아이들한테 미안하죠. 이거 이렇게 많이 먹으면 안되는데...하하하."
:
: 지도자가 선수들을 장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미련한 방법
: 이 폭력으로 겁을 줘서 쥐어잡는 것이고 가장 현명한 것이 실력과 품성으로 이해시
: 키는 것이다.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코치 김병수는 전자의 경우는 아니었다.
:
: "공부하고 싶죠. 기회가 주어지면 유학을 갔으면 해요. 나는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 현실에서 막힐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정말 이론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죠."
:
: 그의 기본적인 축구 철학은 이 글 서두에 소개한 '현대 축구의 미래에 대하여'라는
: 노트에 가감없이 적혀 있다. 때마침 개막한 유로 2000에 나타난 플레이 경향은 공교
: 롭게도 그의 견해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이었다. 우연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 러나, 우연이 결코 아니다.
:
: "움직임을 강조하죠. 플라티니나 마라도나를 좋아했어요. 그 땐 그 선수들이 제일
: 잘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스페셜리스트의 시대가 지났어요. 모든 선수가 올라운드
: 플레이어가 되야해요. 기본 기술이 점점 더 강조되는 거에요."
:
: 그 또한 스페셜리스트 가운데 하나였다. 한 번에 상대 수비벽을 무너뜨리는 스루 패
: 스는 김병수의 특기였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스루패스가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
: "결국 공간 싸움이에요. 압박을 하는 이유가 미드필드에서 잘하는 선수를 그냥 둘
: 수 없으니까 미리 전방에서 끊는거에요. 그리고 그 간격이 점점 좁아져요. 그래서
: 공격수들의 지능적인 움직임이 중요해지는 거에요. 공간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필
: 요하다는 거죠."
:
:
: 그는 아주 진지한 자세로, 그리고 성의를 다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 나갔다. 이해
: 하기 쉽도록 상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선수들의 움직임이 어떠해야 하는
: 가를 이야기할 때 나는 그제서야 그가 내 기억 속의 축구천재 김병수가 아님을 깨달
: 았다. 지난 시절의 영욕은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새로운 인생을
: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
: 포철공고와 남강고의 경기가 끝난 후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 샤워를 하고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통인데 포철공고 선수들은 트랙 한
: 켠에 모여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
: "중요해요. 우리나라에선 거의 안하는데 90분을 뛰고 나면 어떤 선수고 근육에 무리
: 가 가게되요. 특히 어린 선수들은..."
:
: 교과서에는 스트레칭 후에 런닝도 해야 한다고 나와 있는데 런닝은 시키지 않는다고
: 했다. 운동장에서 게임 중이라서 그러느냐고 물었다.
:
: "하하하... 그게 아니고. 처음엔 시켰는데 선수들이 힘들어 하더라구요. 그런데 가
: 만히 생각해보니까 나도 싫었어요. 경기 내내 뛰었는데 또 뛰는 게 부담스러운 거예
: 요. 억지로 시킬 수도 있겠지만 선수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할 필요가 없다고 생
: 각했어요. 하고 싶지 않을 것을 하면 효과가 없지요."
:
: 덕분에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고대에서 잠시 후배들을 지도할 때 결승에
: 올랐다고 대학 관계자들이 대거 경기장을 찾은 모양이었다. 우승을 했으니 높은 사
: 람들 앞에 도열하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 아닌 관례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
:
: "인사 받는 것보다 선수들이 더 중요한 거잖아요. 경기 끝나고 다시 운동을 시켰죠.
: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난리가 났죠. 김병
: 수가 대체 누구냐고..."
:
: 그의 일상은 남들과 다름없이 분주하다. 많지는 않지만 졸업반 선수들의 진로도 챙
: 겨야 하고 내년 시즌에 대비해 1, 2 학년 선수들 지도에도 신경 써야 한다. 감독이
: 부재중이라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더 세심하게 살피는 것 같았다.
:
: "좋은 선수들이 많아서 기대할만 해요."
:
: 브라질로 연수를 떠난 선수들이 복귀하는 내년에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 거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포철공고는 이동국이 재학 중이던 97년 전국 대회 3관왕을
: 차지하며 고교 무대 최강으로 군림했지만 최근엔 부평고에게 밀리고 있다. 하지만,
: 승리를 위한 축구를 강요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
: "언제나 목표는 우승이죠. 하지만 우승은 하늘이 도와야 할 수 있는 거예요. 경기장
: 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죠."
:
: 공식 대회는 아니지만 지방마다 도지사배 대회 같은 지역 대회가 종종 열린다. 어쩔
: 수 없이 출전해야 하는 경우가 새기는데 문제는 상대 선수들이란다. 정식으로 축구
: 를 하는 선수들이 아닌 경우 실력에서 밀리면 과감한(?) 반칙을 해오는데 대책이 없
: 다는 것이다.
:
: "솔직히 그렇게 시키는 선생들이 더 문제죠. 우리 애들은 절대 그렇게 못하게 하는
: 데... 한 번은 너무 심하다 싶어서 타일렀죠. '너희들 이렇게 하면 안된다. 축구를
: 잘하는 것보다 스포츠맨쉽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라도 그런 이야기를 해줘
: 야 할 것 같아서... 애들은 아직 잘 모르니까요."
:
: 어쩐지 그 앞에서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타깝기만
: 했던 선수 생활의 미련을 접고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꿈'이 반
: 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
: "유럽 무대를 밟고 싶어요."
:
: 선수 시절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꿈 또한 세계적인 리그에서 세계적인 선
: 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 프로리그에서 뛰
: 고 싶다거나 지도자로 나서면서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
: 은 많이 봤어도 유럽에서 지도자 생활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사람은 처음이었
: 다.
:
: "마흔 다섯 되기 전에 세계적인 지도자로 인정받는게 목표에요. 황당하다고 생각할
: 지 모르겠지만 노력할거예요."
:
: 그러고 보면 외국인 감독을 데려오는 경우는 많아도 우리 지도자들이 외국에 나가
: 외국 선수들을 지도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이
: 태리나 스페인 1부 리그에서 한국인 감독을 볼 수 있다면 보통 자랑스러운 일이 아
: 닐 것이다.
:
: 갑자기 우리도 젊은 사람들이 프로팀이나 대표팀 감독하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들
: 었다. 성급한 이야기 같지만 네델란드의 레이카르트를 보면 꼭 허황한 생각만은 아
: 니지 않은가. 물론 한국적 현실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
: 이제 머지 않은 장래에 90년대를 풍미했던 우리 대표 선수들이 하나 둘 씩 지도자
: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들 가운데 다시 우리 대표팀 감
: 독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
: "대표팀 감독은 하늘이 내리는 자리죠. 그게 목표가 될 수는 없고... 그래요. 나랑
: 같이 뛰었던 선수들도 언젠가 은퇴하면 지도자로 다시 만나겠죠. 하지만 굳이 의식
: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나는 내가 할 일이 있는 거니까..."
:
: 그를 만나기 전에는 그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생계에 위협을 받을 만큼 힘든 생활을
: 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선수로서 겪었던 불운의 늪
: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며 미래까지도 놓치고 있다면 그건 정말이지
: 본인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팬들에게도 비참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
: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참으로 밝았고 자신에 차 있었다. 이제 마지
: 막 질문을 던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우문인 줄 뻔히 알면서도....
:
: "당신은 지금 불행하십니까?"
:
: 。
:
: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
: '그가 다시는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 '천재' 운운하며 사탕발린 소리 늘어 놓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 . 그를 부상에서 지켜주는 일. 그가 부상 당하지 않게 축구 환경을 바꿔주는 일 말
: 이다.
:
: 그가 다시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 선수가 아니니 운동장 안에서 다칠
: 일은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 그의 축구 인생에서 다시는 부상으로
: 신음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팬들이 도와준다면 이 번에는 가능할 것이다.
:
: "선수로서 나는 불행했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이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축구는 여
: 전히 제 꿈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마음이 흔들리고 나태해질 땐 이 말을 되새기며
: 의지를 다집니다. 나는 한국 축구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한다."
:
:
: 고용국 (desk@web2socc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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