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시(일본어: 佐渡市)는 니가타현 북서쪽의 동해에 위치한 사도가섬 전체를 행정 구역으로 하는 시이다.
2004년 3월 1일, 사도가섬의 전 자치체가 통합해서 발족했고 인구는 약 7만명으로 시청은 구 가나이 정에 위치해 있다.
면적은 855.69km로 대한민국 원주시(872.45km)보다 약간 작다.
난류와 한류가 접하는 지역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自然植生은 극히 다양하다.
사도 섬내에서는 홋카이도, 오키나와 등 두 지방 사이의 식물이 위치한 매우 드문 지역이다.
또 일찍이 유형지였으며 독자적인 문화가 발달해왔다.
그 외에도 일본 최대의 금광 지대로 손을 꼽히고 있는 사도 금광(일본어: 佐渡金山 사도 킨잔)이 있다
이 광산의 광석은 주로 '은흑'(銀黑)이라고 불리는 石英중에 脈象에 존재하던 輝銀鑛 및 자연 자연금의 미립자였다.
1601년에 금맥이 발견된 이래 '에도 시대 '기간 동안 중요한 재원으로써 개발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의 전성기에는 금이 1년 동안 약 400kg, 은이 약 40톤 이상 채굴된 일본 최대의 금광산으로,
은 생산에서도 일본 유수의 광산이어서 은 화폐의 제작을 위한 재료를 공급하는 중요한 광산 구실을 했었다.
그 중 아이카와 광산은 에도 막부가 직할 경영하여, 대량의 금은을 산출한 사도 금광의 중심이었다.
산출하여 제련한 철심과 회취은은 막부에 상납되어, 이를 긴자에 맡겨 화폐를 주조하였다.
또한 은은 특히 生실 등의 수입 대가로써 청나라 등에 대량 수출되어, 사도 산출의 회취은은 '세다 은'으로도 불렸다.
이 광산은 일본 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경제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금속 자원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사도광산은 이러한 자원을 제공할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다.
일본 본토에서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보다 저렴한 인건비를 가진 한국인들과 다른 식민지 국가의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는 제국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도광산 강제동원 조선인 '747명 그리고 772명’. 이름이라도 ‘찾은 자’와 이름조차 모른 채 ‘남겨진 자’의 숫자다.
모두 1519명의 ‘사람’들은 1939년 2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충남, 충북, 전남, 전북, 강원, 경기 등의 고향을 떠나
‘강제’로 배를 타야만 했다.
목적지는 이름조차 낯선 일본 니가타현의 작은 섬.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말부터 사금 산지로 명성을 떨쳤던 곳.
당시도 지금도 사람들은 이곳을 ‘사도’라고 불렀다.
섬에 도착한 사람들이 향한 곳은 광산이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광업(주)의 작업장이 그곳에 있었다.
낯선 곳으로 끌려온 이들은 익숙지도 않은 광부일을 해야 했다.
갱을 파고 금 등의 광석을 채굴하는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진폐증이 대표적 사유다.
채굴 과정에서 ‘폭파’라는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해 사망하는 때도 비일비재했다.
운이 좋아 섬에서 탈출했거나 해방 이후 살아 돌아와도 탄광 생활의 흔적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후유증으로 가족들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광산 강제동원은 끝끝내 이들의 삶을 파괴했다.
사도는 결코 아름답거나 추억할 만한 공간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현재는 광산이 고갈되고, 금의 가치와 노동자 임금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수지가 맞지 않아
1989년 3월 31일 채굴이 중지되어, 금광은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갱도의 총 연장은 약 400km에 이르지만, 그 중 관광 노선으로 개발된 구간은 300m 정도이다.
이 밖에, 매년 7월 25일 ~ 7월 27일 사이에 금광 축제가 열린다.
일본이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자 하는 목적은
문화유산 보호 및 자산화, 국제적 이미지 강화, 역사적 재정립으로 자신들의 역사 해석을 강화하고,
과거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려고 하는데 있다.
이는 일본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특히 조선시대에 한국에서 강제로 동원된 '징용' 문제와 관련하여 역사적 논란이 있다.
2022년 2월 1일에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사무국에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해달라고 추천서를 보냈으나
온전한 역사를 보여주지 않고 시기를 에도 막부 시대로만 한정해 놓은 관계로 보류 중이다.
일본이 2015년 7월에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등재시켰을 때 국제 사회에 피해자들에 대한 시설도 설립될 것이라 약속 했지만 2021년 7월에 유네스코에서 현장 조사를 한 결과 피해자들을 기억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확인된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는데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에 대해
사도광산의 역사에서 강제 징용과 같은 인권 문제를 강조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전달하여 일본의 입장을 반박할 필요가 있고
다른 국가와 협력하여 사도광산 문제를 공동으로 다루고, 국제적 관심을 유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자체적으로 한국의 역사적 유산과 관련된 문화유산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캠페인을 활발히 진행해,
한국의 문화유산의 가치를 높이고, 일본의 시도에 대한 우려를 제기할 수 있고 국제사회 및 유엔과 같은 기구를 통해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제기하고, 공론화를 시킬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