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2024년, 대한민국이 이대로 망한다면 국회 때문일 거라고 많은 국민들이 우려한다. 죽을 날이 가까워진 노인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편이다. 특히 3분의 2 가량이나 의석을 차지한 다수당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그들은 어느 게 된장이고 어느 게 똥인지 구분이 안 되는 모양이다. 휴전선 너머에 대치하고 있는 적을 돕자고 나서는 자들도 많다. 나라가 결딴나고 나서 이들을 뽑은 국민들을 원망해봐야 사후약방문이 될 것이다.
너무도 우연한 기회에 대한민국 현역 국회의원을 만났다. 의원 사무실은 도심을 약간 벗어나 있었지만 내부는 청결했고 분위기는 밝았다. 새벽 6시에 전화를 해서 나를 이곳까지 부른 인동장씨 대종회장은 종중 소유 토지주차장에 부과된 세금이 부당하다는 입장이었고 이제 갓 마흔 중반을 넘긴 의원은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원론적인 입장이 아니라 민원인의 뜻을 시청 업무 담당자에게 알아봐서 민원인의 뜻이 관철되도록 해보자고 했다.
인동장씨 대종회장이 낸 민원의 처리 결과를 예단할 순 없지만 의원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기 위해 많은 학습을 했을 터이다. 그는 사람을 대하는 센스도 뛰어났다. 첫 대면에서 명함을 건넨 나를 보고 “아! 아버지”라고 했다. 진주강씨 박사공파 족보에 ‘석’자 항렬 밑에 ‘구’인 것을 그는 그렇게 표현하여 상대를 배려하면서 친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회의실 한쪽 벽면엔 관내 지도가 크게 나붙어 있었다.
지도엔 일본 강제징용에 끌려가기 전까지 나의 아버지가 사셨던 ‘무을면’ 글자를 매직펜으로 덧씌워 또렷했다. 지도 왼쪽으론 나의 고향 김천이 좁다랗게 붙어있었다. 중학을 마칠 때까지 살았던 고향에 마치 발이라도 디딘 것처럼 잠시 향수에 잠길 수 있었다. 두세 명의 젊은 보좌관들이 좌우에서 의원의 답변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민원 관련 지시는 떨어지지 않았다. 의원은 시종일관 밝은 표정으로 민원인을 대했다.
부산엔 국회의장을 지낸 인사가 셋이다. 그 중에서 가장 선임인 P가 치매로 고생을 하고 있다니 생의 종말이 얼마나 지난할까 싶다. 그는 툭하면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땡깡을 부리던 자의 탄핵 결정 때, 국가원로로서 국민들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했던 인사였다. 그가 중년이었을 때 부친이 온천장에 사는 관계로 자주 우리 성당 미사에 참례했었고 내 아들놈 동래고 졸업식 때도 그가 축사를 맡는 바람에 만나 인사를 나눴다.
의사 출신 J의원이 초선일 때 천주교 부산교구청에서 만났다. 그는 수필가여서 문협에서 나와는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착좌식을 갖는 정명조 주교는 교유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안상영 시장을 비롯하여 지역 국회의원 육칠명이 교구청 잔디정원에서 환담을 나누는 곳에 내가 불려갔다. 난 가톨릭신문 위촉기자로서 신문사에서 붙여준 젊은 기자를 데리고 행사사진 촬영을 총괄하고 있었다. J의원은 의사였고 부산에 대형병원도 소유하고 있었다.
국회로 돌아간 J의원이 며칠 후 출판기념회 초대장을 보내왔다. 참석하지 못하면 협찬금만 보내도 된다면서 지로용지까지 들어있었다. 직장 상사 출신 H의원은 집이 서울에 있었다. 동래지점에서 함께 근무할 땐 좌석이 그의 붙어 있었다. 그 상사가 어느 날 감사결과에 불만을 품고 사표를 낸 후 서울로 돌아갔지만 난 서울 출장 때마다 그를 만났다. 제3공화국 시절 야당의 거물 정치인 홍익표 의원이 그의 형이었다.
홍 의원이 갑자기 타계하자 상사가 보선에 출마했고 거뜬히 당선됐다. 그 무렵 구포열차사고가 있었고 상사가 금배지를 달고 우리 동래지점에 나타났다. 모두들 금의환향한 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힘찬 박수를 보냈다. 당시 직장 출신은 국회에 정래혁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채용수 의원과 홍 의원까지 셋이었다. 자기들끼지 인사할 땐 90도로 고개를 숙이지만 외부인은 청문회 등을 통해 가차없이 조진다는 말도 그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