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1) 全國의 風景돌아보기, 全南 順天 曹溪山 松廣寺
曹溪山(△887m) -道立公園 -順天市 松光面~住岩面
小白山脈 끝자락에 솟아 있는 曹溪山은 高溫多濕한 海洋性氣候의 영향을 받아 예로부터 ‘小江南’이라고
불렀으며, ‘松廣山’이라고 했는데 普照國師이후 松廣寺가 曹溪宗의 中興道場이 되면서부터 ‘曹溪山’이라고
했다. 피아골·홍골 등의 깊은 계곡과 울창한 숲·폭포·약수 등 自然景觀이 아름다워 1979년 道立公園으로
지정되었다. 동쪽계곡물은 伊沙川, 서쪽계곡물은 松廣川으로 흘러 드는데, 飛龍瀑布가 유명하다.
서쪽 기슭에는 三寶寺刹 가운데 僧寶寺刹인 松廣寺가, 동쪽 기슭에는 仙巖寺가 있다. 산 일대의 樹種이
다양해 산 전체가 全羅南道 採種林으로 지정되었다.
順天 松廣寺 -사적 제506호
大韓佛敎曹溪宗 第21敎區 本寺로, 法寶寺刹인 陜川 海印寺, 佛寶寺刹인 梁山 通度寺와 더불어 우리나라
三寶寺刹의 하나인 僧寶寺刹이다. 新羅末期에 體澄이 창건하고 吉祥寺라고 했으며, 高麗때 普照國師 知訥이
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修禪社라 칭하고, 道와 禪을 修練하면서, 大刹로 重建했다. 이후 普照國師의
法脈을 이은 眞覺國師가 重創한 때부터 朝鮮初期까지, 약 180년동안 16명의 國師를 배출하면서 僧寶寺刹의
지위를 굳혔다. 境內에는 16國師의 眞影을 봉안한 國師殿이 따로 있다. 壬辰倭亂때 일부가 燒失되어 한동안
廢寺狀態였으며, 뒤에 승려들이 復元하고 다시 가람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憲宗 8년(1842) 큰불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1922~1928년 건물들을 重修하고, 1943∼1956년 차례로 復元해 옛모습을 되찾았다.
1948년 麗水·順天事件과 1951년 共匪의 蠻行으로 사찰의 중심부가 불탔는데, 1983~1990년 大雄殿 등
30여동의 건물을 新築·重修해 僧寶宗刹의 모습을 갖추었다. 松廣寺에는 木彫三尊佛龕(국보 42),
高麗高宗制書(국보 43), 國師殿(국보 56) 등 國寶와 寶物 12점, 地方文化財 8점이 있다.
(*澄: 맑을 징 *訥: 말 더듬거릴 눌 *蠻: 오랑캐 만 *龕; 감실 감)
順天 松廣寺 사진 -2005.04.06
順天 松廣寺-曹溪山-仙巖寺는 案內山岳會에 同行해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山行해, 數十棟의 殿閣이 있는
松廣寺와 仙巖寺는 말할 것도 없고, 두 寺刹을 연결하는 曹溪山山行도 一行을 따라가기에 바빠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하고 극히 일부만 찍은 사진을 올린다.
(01) 松廣寺 曹溪門(一柱門)
松廣寺의 첫 關門인 一柱門으로, 扁額은 [曹溪山/大乘禪宗/曹溪寺]라고 세로로 쓰고, 안에는
[僧寶宗刹曹叢林]이라고 걸었다. 新羅末에 건립하고, 朝鮮初·中期에 3회에 걸쳐 改築하고 현재 曹溪門은
1802년 新築한 것으로 보고 있다. (*叢: 모일 총)
(02) 松廣寺 臨鏡堂
1797년에 건립한 寮舍채로 6棟이 回廊처럼 연결된 大房형식의 ‘口'字形건물이며 정면이 丁字形인
팔작지붕建物이다. [三淸僊閣]이라고 부르며, [六鑑亭]이라는 扁額을 걸었다. (*僊: 춤출 선 *鑑: 거울 감)
*六鑑亭;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생각(意)을 고요하게 해 지혜롭게 마음을 비춰보는 亭子라고한다.
(03) 松廣寺 標識石 [僧寶宗刹 曹溪山松廣寺]
(04) 松廣寺 淸凉閣
송광사에 들어서기 전에 溪流위에 있는 樓橋로, 다리는 英祖 6년(1730)에, 樓閣은 光武 7년에 건립했다.
앞면에는 [淸凉閣], 뒷면에는 [極樂橋] 扁額을 걸었다.
(05) 松廣寺 三淸橋 및 羽化閣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9호
大雄殿입구 通路의 무지개다리 三淸橋(凌虛橋)와 그 위에 지은 건물 羽化閣이다. 凌虛橋는 19개의 네모난 돌로
무지개모양을 만든 후, 양 옆에 다듬은 돌을 쌓아 올려 무게를 지탱하도록 했다. 무지개모양의 중심에는
如意珠를 물고 있는 龍頭石이 나와 있다. 朝鮮 肅宗 33년(1707) 다리를 만들고, 英祖 50년(1774) 補修했다.
(*凌: 업신여길 능)
羽化閣은 사람들의 통행을 돕고자 만들었으며, 入口는 팔작지붕, 出口쪽은 맞배지붕을 올렸는데 이는
出口쪽 지붕이 옆 건물 天王門과 가까워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록 雄壯하지는 않으나,
유물이 다리역할과 통로역할도 하는 二重效果를 보이고 있다.
(06) 松廣寺 鐘鼓樓
종고루는 7칸의 큰 건물이었으나 6·25戰爭때 共匪의 所行으로 燒失되어 1962년 정면 3칸, 측면 2칸의
2層樓閣으로 重建했으며, 2층에는 法具四物(梵鐘·木魚·法鼓·雲板)을 安置했다. (*鼓: 북 고)
(07) 松廣寺 僧寶殿
僧寶寺刹인 松廣寺를 상징하는 僧寶殿에는 釋迦牟尼부처님이 靈鷲山에서 說法하던 모습을 再現한 부처님과
十大弟子, 十六羅漢을 비롯하여 1,250명의 스님을 모신 殿閣이다. 6·25戰爭때 燒失된 大雄殿을 7次重創때
復元하면서 건립했으나 8차중창때 大雄寶殿을 건립하면서 현재위치로 移建했다. (*鷲: 독수리 취)
(08) 송광사 비사리 구시
나무로 만든 거대한 木造容器로, 僧寶殿 옆基壇에 있다. 1724년 全北 南原 松洞面 細田리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지자 이를 재료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쌀 7가마에 해당하는 약 4,000명의 밥을 담을 수 있는
밥통으로, 朝鮮 英祖以後 송광사에서 國齋를 모실 때 절을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 밥을 담아두었다고 한다.
高麗때 普照國師와 담당국사가 나란히 꽂은 지팡이가 살아서 자랐다는 傳說이 깃든 ‘順天 松廣寺 天子庵
雙香樹(곱향나무/천연기념물 88호)’와 어느 순서로 포개도 크기가 딱 들어맞는다는 바리때(공양 그릇)인
‘能見難思(전남유형문화재 제19호)’와 함께 松廣寺의 三大名物로 꼽힌다.
*비사리: 싸리나무의 方言
*구시: 구유의 方言(家畜에게 먹이를 담아주는 그릇)
*송광사 비사리구시 등 전국의 싸리나무기둥이라는 木質을 확인했더니 細胞構造가 느티나무[槐木] 아니면
소나무 또는 밤나무라고 한다.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 <계간 한옥문화> 2007년 겨울호
(09) 松廣寺 大雄寶殿
송광사의 中心殿閣으로, 여러 차례 燒失과 重建을 거쳤으며, 1951년 燒失되어 1988년 8次重創때 정면 7칸·
측면 5칸 ‘亞’字形建物로 건립했다. 佛壇에는 過去佛인 燃燈佛, 現在佛인 釋迦如來佛, 未來佛인 彌勒佛의 三世佛을
主尊으로, 文殊∙普賢∙觀音∙地藏 등 四大菩薩을 夾侍로 奉安했다. 三世佛의 뒤에는 1987년 丹靑匠인 金魚 石鼎스님이
그린 釋迦牟尼後佛幀∙過法燃燈佛後佛幀∙未來彌勒尊佛後佛幀을 後佛幀으로 奉安했다. (*鼎: 솥 정)
(10) 順天 松廣寺 靈山殿 -보물 제303호
朝鮮 仁祖 17년(1639)에 건립하고 英祖 12년(1736) 修理했으며 1973년에 보수한 殿閣이다. 靈山殿에는
釋迦牟尼佛像을 모시고 釋迦의 生涯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八相圖와 釋迦의 說法場面을 담은 靈山大會 그림을
봉안했다. 건물은 좁은 자리에 앞면 3칸·옆면 2칸의 多包樣式 팔작지붕建物로, 아담한 규모의 素朴한 건물이나
部材의 細部技法이 힘차고 간결해 朝鮮前期建物의 技法을 잘 보여주고 있다. (*涯: 물가 애)
(11) 順天 松廣寺 國師殿 -국보 제56호
송광사 국사전은 나라를 빛낸 큰 스님 16분의 影幀을 모시고 그 德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로, 옛날에는
參禪하던 곳이다. 高麗 恭愍王 18년(1369)에 건립했으며, 두 차례 補修했다. 앞면 4칸·옆면 3칸의 柱心包樣式
맞배지붕建物이며, 건물내부는 ‘井’字모양의 천장에 연꽃무늬를 장식했는데, 천장의 연꽃무늬와 대들보의
龍무늬는 건물을 지을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朝鮮初期樣式의 建築構造를 지니고 있는
國師殿은 順天 松廣寺 下舍堂(보물 제263호)과 같은 시대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소박하고 아담한 형태와
技法도 柱心包中期形式의 표준이라고 할 중요한 건축물이다.
(12) 松廣寺 觀音殿
1903년 건립당시에는 聖壽殿으로, 1902년 高宗皇帝의 聖壽 望六(51세)을 맞아 賜額된 皇室 祈禱處였으며,
1955년 殿閣이름을 觀音殿으로 바꾸었다. 觀世音菩薩 左右에 해와 달은 高宗皇帝와 明成皇后를 상징하며,
壁畵에는 文臣들이 허리를 굽히고 佛壇을 향해 서있다. 外壁에는 花鳥圖와 山水畵를 그려 다른 寺刹의
壁畵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13) 松廣寺 地藏殿
大雄寶殿 좌측에 있어 僧寶殿과 함께 左右法堂으로 사용되며 1988년 松廣寺八次重創期의 重建以前에는
冥府殿으로 사용했다.
(14) 聖寶閣. 松廣寺의 博物館 -1988년 건립
(15) 松廣寺 聖寶博物館
順天 松廣寺 木造三尊佛龕(국보 42)∙ 惠諶 告身制書(국보 43) 등 國寶 2점과 大般涅槃經疏 券九~十(보물 90) 등
보물 9점, 能見難思 등 全南有形文化財 5점을 비롯해 英祖 御筆, 秋史의 書帖, 興宣大院君의 蘭草簇子 등
총 6천여 점의 佛敎文化材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佛敎專門博物館이라고 한다.
(*龕: 감실 감 *諶: 미더울 심 *涅: 개흙 열 *槃: 쟁반 반 *疏: 소통할 소 *帖: 문서 첩 *簇: 모일 족)
(16) 順天松廣寺 普照國師 甘露塔 -전남 유형문화재 제256호
觀音殿뒤쪽 丘陵에 있으며 탑 전체높이는 286㎝이다. 松廣寺 16國師中 第一世인 普照國師 知訥(1158~1210)의
甘露塔으로 지눌이 53歲로 入寂하자 高麗 熙宗은 ‘佛日普照國師’라는 諡號와 함께 ‘甘露塔’이라는 塔號를 내려
康宗 2년(1213)에 건립했다. (*寂: 고요할 적)
*普照國師(1158~1210) -黃海道 瑞興出生 -俗姓 鄭氏 -高麗中期의 禪僧 -法名; 知訥 -號; 牧牛子 -諡號; 佛日普照
8세에 出家, 25세에 僧科及第했으며 몇몇 道伴과 定慧結社를 기약했다. 昌平 淸源寺에서 <六祖壇經>을 보다가
깨닫고, 智異山 上無住庵에서 精進하다가 <大慧語錄>을 보고 다시 크게 깨달았다. 1200년부터 涅槃할 때까지
松廣山 吉祥寺(現 松廣寺)에서 結社해 頓悟漸修와 定慧雙修를 주장하며, 禪으로써 體를 삼고, 敎로써 用을 삼아,
禪ㆍ敎의 合一點을 모색하며 後學을 지도했다. 弟子들이 많이 모여 들었으며, 깨달음을 얻은 제자가 많았다.
<修心訣>, <佛祖要經> 외에도 많은 著書가 있다. (*涅: 개흙 열 *頓: 조아릴 돈 *悟: 깨달을 오 *漸: 점점 점)
(17) 松廣寺 普照國師 甘露塔碑
甘露塔碑에는 葦滄 吳世昌의 글씨로 [佛日普照國師甘露之塔]이라고 刻字했다. (*葦: 갈대 위 *滄: 큰 바다 창)
曹溪山 사진
(18) 順天 曹溪山 將軍峰, 小白山脈 끝자락.
(19) 順天 曹溪山 頂上(△884m) 將軍峰 標石
- (6-17-2) 全國의 風景돌아보기, 全南 順天 仙巖寺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