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09
4월28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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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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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dxrJVLpaQc (황인성 황석두루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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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을 다시 한번 우리 삶의 중심으로!>
저희 수도회 본부에서 내려오는 지침이나 과제 가운데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영적 생활에 대한 우선권’ ‘하느님에 대한 우선권’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복음의 표현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게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복음 3장 31~36절)
오늘 내 삶 안에서도 하느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는가, 오늘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과 선택 앞에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리는가, 하느님은 오늘 내 삶 안에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가, 한번 점검해볼 일입니다.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미묘하고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동물적인 본능이 깊숙이 숨어있는가 하면,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이타성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정말 나약해서 흔들리는 갈대같이 별것도 아닌 존재 같지만 때로 얼마나 선해질 수도 있는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이런 우리 인간이기에 고른 성장이 필요합니다. 지적인 교육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숙을 위한 노력, 인간적 성숙을 위한 노력, 육체적 성숙을 위한 노력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디 그렇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죽기 살기로 달달 외우고, 반복해서 문제를 풀어 좋은 성적 내는 것이 지상과제입니다. 무한 경쟁 체제, 일렬로 줄 세우기 문화 앞에서 함께 가는 동료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떻게든 나만 잘 풀리면 그만입니다.
하느님의 영역, 신앙이 설 자리가 점점 축소되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우리 청소년들에게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 신앙과 배려에 대해, 가난과 겸손의 덕에 대해 이야기 하면 웃어버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정말 어려운 시대, 참으로 다양한 도전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그럴수록 신앙인들은 더 외쳐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이사야나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그분의 참되심을, 결국 그분께서 승리하실 것임을.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위치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소홀히 해오고 등한시해왔던 하느님의 위치를 다시금 재설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상 모든 것 위에,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내 삶의 최우선 순위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존경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 인생의 No. 1이며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역시 당연히 내 사랑에 상응하는 노력을 보여줘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계속 눈길을 돌립니다. 그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다가갑니다. 그런 순간 느낄 배신감과 비애감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각자를 향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이 지상에 잠시 머무시는 동안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시는지를 온몸과 마음으로 잘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일회적이거나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영원히 구원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십자가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런 무한정의 사랑, 정말이지 우리를 향한 불타는 사랑, 이글거리는 뜨거운 사랑,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사랑을 끝도 없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는 너무나 냉랭합니다. 감사는커녕 그 큰 사랑을 헤아려보지도 않습니다. 거의 배은망덕 수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하느님, 우리 뇌리 속에서 점차 외곽으로 밀려나시는 하느님을 다시 한번 삶의 중심으로, 정신이나 사고의 중심으로 회복시키는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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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0Hy9q5O8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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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곧 사람이다; 말씀(말+숨)이 흐르게 하라 >
오늘 복음도 요한복음입니다. 요한이 설명하려고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아드님이 하느님이 되시는 방식입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이 짧은 문장 안에서 ‘삼위일체 신비’가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아드님을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아드님을 통해 당신 ‘말씀’을 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게 하시는 힘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주시는 피입니다.
성령은 내 안에서 나의 말을 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인도하신다기보다는 나의 말을 불태우십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쉼 없이 재잘대는 자아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를 받아 전하면 나는 자아와 하나가 되고, 반면 성령으로 자아를 죽여 하느님의 목소리를 받아 전하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정은표 씨가 주말에 자녀들이 공부하지 못하게 농장에 가자고 할 때 자녀들은 공부해야 한다고 반대합니다. 이때 김하얀 씨가 어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데 토를 다느냐고 남편 편을 듭니다. 그렇게 그들은 주말농장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습니다. 김하얀 씨는 여기에서 남편의 말을 받아 전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남편의 사랑입니다. 남편의 것은 다 아내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 말씀을 받아 전하는 아드님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전부인 하느님의 ‘신성’(神性)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아드님을 믿는다는 말은 ‘어떻게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지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드님을 믿으면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곧 신성을 받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하신 성경 말씀을 예수님은 거부하시지 않고 오히려 옳은 말로써 당신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삼으십니다.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신이라” 한 말씀은 참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신이 되셨습니다. 본래 신이시지만 세 분이 한 신성으로 하느님이 되셔야하기에 누군가는 파견하고 누군가는 파견 받고 누군가는 파견하신 분의 말씀이 파견된 이를 통해 전해질 수 있도록 힘을 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세 분이 한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영화 ‘바람’(2009)는 유명 배우 정우의 실제 고등학교 이야기입니다. 정우는 엄한 아버지와 더 무서운 형 밑에서 자랐습니다. 형과 누나는 공부를 잘했지만, 정우는 공부를 못하여 상고에 진학합니다. 상고에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담배 피우고 자율학습을 땡땡이치는 일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아버지와 형에게 꼼짝 못 했습니다.
그런데 불시로 학교 폭력을 조사하러 나온 경찰들에 의해 구치소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다행히 하루 만에 나오기는 했지만, 부모님은 정우가 빼앗은 돈의 열 배씩 돌려줘야 했습니다. 아버지도 정우의 가방 속의 담배를 보고 뺨을 때리고, 형은 더 심하게 때렸습니다. 그런데도 정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간암에 걸려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정우는 그때부터 아빠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목욕탕에서 등을 한번 밀어드리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서 바로 돌아옵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정우는 장례식장에서 오열합니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아버지 사랑합니다.” 군대에서 돌아온 형은 정우를 보고 “다 컸네!”라고 합니다. 정우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갑니다.
며칠 전에도 예로 들었듯이 ‘파친코’에서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줄 알면서도 할머니에게 계약서에 사인하지 말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이유는 자신 안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가 사인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우도 자신의 말을 하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와 형의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오는 것은 피이고 성령입니다. 말로만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말을 하게 만드는 힘이 성령, 곧 피여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정우는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여 이제 아버지처럼 됩니다.
우리 각자는 누군가의 말이 나를 통해 흘러나오게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자아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선생님일 수도 있고, 애인일 수도 있으며,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누구의 말이냐에 따라 내가 누구인지가 결정됩니다. 말이 곧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피를 준 이의 말을 하도록 합시다.
정우는 친구들이나 선배의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모만큼 자신에게 피를 흘리며 말을 가르친 이들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은 곧 누군가를 계시하고 그 누군가가 내가 됨을 잊지 맙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말씀을 ‘말’(진리)과 ‘숨’(은총)의 결합이라고 하듯, 성령과 함께 오시는 말씀만이 나에게 생명을 줍니다. 우리는 생명이 섞인 말씀을 받아 전하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창조자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피조물은 타자의 생명을 먹고 생존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4-25)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5) 말을 받아 전하는 것이 곧 그 말씀을 하시는 분과 하나가 됨을 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기 위해 그분께 다가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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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위에서 오신 분이시다. 아드님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니셨으며 아버지의 광채요 모습이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드님을 공경해야 한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 5,23)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32절) 그분은 보고 들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성적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었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품에서 완전한 상태로 나오셨기 때문에 당신 안에 이미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참되고 거짓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따르려 하지 않는다.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그분을 닮아간다. 그러기에 위에서 오신 분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는 진리가 하느님께 가깝고 소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34절) 아드님이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우리도 말을 하려고 할 때, 말하려는 개념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의 말이 되어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말씀을 품으셨고, 아드님을 낳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낳으셨으며 아드님을 통하여 시간을 창조하셨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아버지의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하신다. 이 아드님은 성령을 온전히 지니고 계시며, 친히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는 그분께 성령을 주십사고 청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35절) 여기서 ‘모든 것’이란 아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당신과 같은 존재이시므로 또 다른 당신을 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유일한 말씀이시자 지혜이신 그분은 본성적으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영원으로부터 가지고 계시다. 단지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6절)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착한 생활과 행동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36절)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는 것은 치유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분을 믿고 따른다면 하느님의 분노가 떠나고 생명이 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8) 하셨다. 이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잘 따라 그분을 닮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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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에서 오시는 분은>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1-36)
이 말은, 앞의 3장 3절-21절에 있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해설이기도 하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 개인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입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는 말은, “예수님은 만물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이 권한은 글자 그대로 ‘모든 권한’인데, 우리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구원할 권한’과 ‘구원하지 않을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내주셨기 때문입니다.(35절) ‘땅에서 난 사람’은 하느님 나라, 내세,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 관심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땅에 속하고’는 ‘허무하게 사라지고’입니다. 그리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라는 말은, 인간들이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욕심 부리고, 집착하는 것을 꾸짖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는 말은,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고,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라는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분으로서(요한 1,1-2) ‘인간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생각과 계획을 정확하게 알고 계시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보고 들으신 것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들은 ‘진리’이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해 주는 가르침들이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꾸짖는 말입니다. 여기서 ‘아무도’ 라는 말은, 믿는 사람들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일 뿐이고, 실제로 아무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수는 적었지만, 그래도 사도들과 몇몇 신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겨자씨’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인간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에 그렇게 증명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금’ 그렇게 증명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은, 예수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자기들의 목숨을 바쳐서 증명한 증인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도 예수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삶’으로 증명하는 증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은 ‘메시아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들과 가르침들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고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다.”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사랑으로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은, 인간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이루는 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그 힘으로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에 ‘한 분이신 하느님’입니다.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라는 말은,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과 똑같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들은 모두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어떤 ‘물증’으로 증명할 수도 없고, 이론적인 논쟁이나 토론의 대상이 될 수도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로 갈라질 뿐입니다. 신앙은 깨달음이고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이 아무런 증거도, 근거도 없이 무턱대고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보았고, 특히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을 직접 체험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믿게 되었습니다. 후대의 신앙인들은 그들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그들의 신앙고백은 진리라고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믿어라.”라는 권고입니다.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갖기를 거부하는 자입니다.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입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라는 말은, “신앙을 갖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선택한 사람은 ‘지금’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선택하는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지금 그 생명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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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활의 삶은 이제 세상의 것, 사람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가서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먼저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 장애인, 죄인들, 여성들에게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늘 세상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셨고,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신앙인은 늘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경청하기’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은 먼저 제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도 먼저 들어 주셨습니다. 의사가 환자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먼저 나의 주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본당의 단체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먼저 듣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생기곤 합니다.
세 번째는 ‘존중하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모상을 닮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피부색, 신분, 성별, 지역, 이념, 종교 때문에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 죄인, 세리, 가난한 이, 병든 이들 모두를 소중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을 존중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참여하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고, 제자들과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모두가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고, 가진 것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을 이끌어 가는 것은 참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조금은 부족해도, 모두가 함께 일을 나누어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능력이나 재주를 보고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남에게 미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입니다. 봄에는 많은 꽃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개나리, 진달래, 철쭉, 채송화, 나팔꽃, 장미’와 같은 꽃들은 자신이 최고라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다른 꽃들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공동선과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 다양한 종교들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공동선을 위해 함께 연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욕망, 시기, 질투, 불신, 분노, 원망의 삶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신뢰한다면, 함께 나눈다면,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바로 이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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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심원택 토마스 신부님]
한 주간의 시작인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니코데모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 의원입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유다의 전통에 따르면 모세가 이를 구성했으며(민수 11,16∼24), 로마 지배시대에 이 의회는 가장 큰 세력이었습니다.
국가의 내무행정은 실제로 여기에 속해 있었으며, 사법권뿐만 아니라 유다 율법에 따른 재판권도 행사하였습니다.
이처럼 최고의 위치에서 학식을 겸비한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인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밤’, ‘어두운 밤’에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아마도 사람들의 이목이 귀찮거나 두려워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처지의 니코데모였지만 내적으로는 어둠 속의 삶과 다를 바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과 삶의 돌파구를 찾고자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지적 편견으로 인하여 ‘…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새로 태어남이란 인간의 내면적인 삶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지식과 이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코데모는 자신의 지성에 의존하며, 또한 여전히 외형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있음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성숙한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박해를 받던 사도들은 제일 먼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들의 기도는 외적인 고난으로부터 보호해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이들의 모습은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간혹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그냥 주저앉고 하느님께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고난이 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들은 생명을 걸고 그런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 고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드리지 않고, 오히려 그런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합니다. 믿음을 갖고 찾아 나서면, 하느님의 은총의 이끄심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심지어 고통 안에서도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이루어내길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능력과 삶이 다다를 수 없는 그 이상의 삶을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는 오늘 하루가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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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를 냉정히 분석, 토론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또한, 낯선 곳에 가서 길을 물어보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간혹 있지 않습니까? 자신도 잘 모르면서 엉뚱한 곳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정확하게 알려면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일을 알아보려면 그곳에서 오신 분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는 오직 예수님만이 온전히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하느님에 관해 전문가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요즘에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들이 있지요. 하지만 그들은 막상 예수님을 보여 주지는 못합니다. 증거는 오직 자신의 삶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삶으로써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하느님의 참된 뜻을 더욱 널리 전파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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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우정 베드로 신부님]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다 보면 경문과 기도문의 깊이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각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 습관적으로 하다 보니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미사 중에 듣는 기도문입니다. 대부분 사제들이 이 경문을 말하기 때문에 늘 듣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 경문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을 뵙고,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 때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미사와 성사와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과를 통해 또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신심이나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이따금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과 다르다고 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무시하거나 온전하게 주어져 있는 진리조차 왜곡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키워나가고 진리에 다가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몸소 하느님을 드러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시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지금도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성사 안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사랑 안에 들어갈 때, 우리도 그분처럼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돌려줄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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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4.28.“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오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차이, 곧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곧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인 "CREDO"라는 단어 역시, 'CRO'라는 ‘가슴, 심장, 생명’이라는 말과 ‘DAER'라는 ’주다‘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곧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심장, 생명, 곧 자기 자신을 건너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의미합니다. 곧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되고,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곧 현재가 되고, 현세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생명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 입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골로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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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주님! 저희는 당신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지지 않는 것을 줄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께서는 그것을 내어주시기에 진정, 사랑이십니다.
주님! 당신을 믿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을 믿는 우리가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을 이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5,5)
“위에서 오신 당신”(요한 3,31)을 받아들여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 살기에,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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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과 땅>
요한 3,31-36 (하늘에서 오시는 분)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하늘과 땅>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라네
땅이 있어
하늘이요
하늘이 있어
땅이라네
땅을 감싸니
하늘이요
하늘을 받치니
땅이라네
땅으로 내려오니
하늘이요
하늘로 오르니
땅이라네
하늘과 땅은
다르지만
하늘과 땅은
하나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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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다>
"인생은 정직과 거짓, 충직과 불충, 이기심과 이타심, 선과 악이라는 두 길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다르며 대치되는 논리로 이루어진 두 길 사이에서 오고 갈 수는 없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야말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루카16,13)
집회서를 보면“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16-15-17)고 적혀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신중한 처신이 요구됩니다. 죽음도, 생명도 지금 여기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생명이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미래의 생명은 지금 사는 이 생명의 완성입니다.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서도 예수님과 복음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 모든 것 위에 있으면서 그분이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어도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깨우침을 주면 계산하지 말고 먼저 받아들여야 더 큰 것을 알게 되고 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위에서 오신 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고 오신 분,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하느님의 말씀과 권능으로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믿음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지닌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영생을 기뻐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혼자만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모시는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면 할수록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위인 중 한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말씀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하늘의 삶을 갈망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자신의 영혼 사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보다는 멸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22,14)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로 초대받았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완벽하고 좋은 일을 해 공로를 많이 쌓아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결점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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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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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삶>
오늘 복음 말씀에서 ‘땅’이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서 현실을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땅’으로 번역된 희랍어 ‘게스γῆς’는 주님의 기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에 있는 ‘땅’과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으론 모든 진리의 원천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시기에 이 땅을 절대화시키는 것도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현실의 세계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러한 균형을 잃어버린 신앙생활에 대해 듣게 됩니다. 가정이나 직장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과도하게 신앙행위에 몰두하는 것은 신앙 공동체 입장에서는 열정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선과는 거리가 먼 행위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무리 좋은 덕행이라도 균형을 잃고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을 악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은 ‘분별prudence’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때가 되기 전까지는 요셉 성인과 성모님과 함께 집안일을 돌보며 사셨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아듣는 분별의 은총을 청합시다.
(《생활성서》 2022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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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말씀에서 ‘증인’, ‘증언’이라는 표현을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사도들이 대사제 앞에서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유다인들이 나무에 매달아 돌아가시게 한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성부께서 성자를 당신 오른편에 앉히시어,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해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사도들의 이 증언이 참되다는 것은,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요한 복음사가의 ‘독립적인’ 묵상으로 여기는 것이 문맥상 설득력 있어 보이는데, 그는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께서 증언하신 내용은 성부에게서 직접 보고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이는 성부께서 참되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은 내재적 삼위일체론, 곧 세 위격이시나 한 실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내적 친교와 일치를 표현합니다. 성부께서 교회에 보내신 성령께서는 파스카 신비로 완성된 성부와 성자의 구원 업적에 대한 증인이십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며 교회 구성원인 우리도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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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하느님의 사랑법!>
오늘 복음(요한3,16-21)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이야기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외아들을 내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십자나무에 달리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법'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법'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사랑법'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법'은 '너를 위해 자기를 죽이는 사랑'입니다.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죽으셨으니,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죽는 사랑'입니다.
'이 극진한 사랑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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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스포츠 경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응원하는 팀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최악의 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질 것이 뻔해 보였습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고 그래서 텔레비전의 전원을 껐습니다.
저녁에 스포츠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졌을 것으로 생각했던 경기에서 막판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지며 행복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이 감정은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통해서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내 생각을 통해 얻은 행복이 아닐까요? 운동 경기 자체가 행복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경기를 바라보는 내 생각이 만든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나의 감정을 만듭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라보면 분명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은 내 모든 부정적 감정의 원인이 되고 맙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상황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상황 자체가 바뀌는 일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상황을 대하는 내 감정은 분명히 바뀌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 생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⁹3
어젯밤 꿈꾼 것을 두고 계속해서 연연하며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꿈이니까 그냥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생각이 있다면, 이를 흘려버릴 수 있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두지 않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믿음을 두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믿지 못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내 생각을 믿지 않는 방향으로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자리에 위치시킵니다. 결국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내 생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책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생각을 하게 될 때는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또 그런다.” 그때 내 생각을 다시 전환할 힘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주님을 향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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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 참나의 삶; 사랑과 순종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2.9)
어제에 이어 반복되는 화답송 시편은 늘 들어도 새롭고 좋습니다. 건강한 영혼의 본능적 영적 욕구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요, 믿는 이들은 물론 누구나의 깊은 영적 욕구는 참나의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영적 본능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라 갈파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만나러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궁극의 목표도 한번뿐이 없는 소중한 삶을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참내가 되어 참삶을 살 때 참기쁨에 참행복일 것입니다. 작년 12월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주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며 써놨던 ‘평생소원’이란 고백기도문 일부를 나눕니다.
“나 하느님이 되고 싶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내가 하느님이 될 때
전인적 치유가, 온전한 참나의 구원의 이뤄지겠나이다.
내 소원, 이것 하나뿐이옵니다.
오, 주 하느님!
일편단심一片丹心 당신만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이런 하느님이 되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영혼 깊이에서의 갈망입니다. 이래서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을 일컬어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하느님과 하나되는 예닮의 여정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사막교부들의 언행록중 사막 수도자들의 아버지라 일컫는 안토니오 압바의 두 일화를 나눕니다. 예수님을 닮아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살았던 수도자들의 모범, 안토니오 압바였습니다.
-세 제자들이 해마다 복된 안토니오를 찾았습니다. 그들중 둘은 스승 안토니오에게 자신의 생각들과 영혼의 구원에 대해 스승의 자문을 구했으나, 오직 한 제자만은 언제나 질문 하나 함이 없이 침묵중에 머물뿐이었습니다. 얼마후 안토니오와 그 제자간 오고 간 대화입니다.
“너는 여기 방문할 때 마다 있는 내내 어떤 질문도 결코 하지 않았다.”
“사부님, 저에겐 사부님을 뵙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It’s enough for me just to see you, father).”-
아마 제자는 침묵 중에 예수님을 닮은 복된 안토니오를 모습을 보며 모든 답을 찾았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하나 예화입니다.
-한 원로가 하느님께 사부들을 뵙게 해 주십사 청했고, 하느님이 원로에게 사부들을 보여 줬을 때, 안토니오 아빠가 보이지 않자 그 원로와 하느님과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안토니오 압바는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이 계신 어디든, 거기 안토니오 압바도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늘 하느님과 함께 일치된 영원한 삶을 살았던 안토니오 압바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생전 처음 수도원의 저를 찾았던 94세 송율리안나 자매와 83세 한젬마 자매를 잊지 못합니다. 노년에도 치매기 하나 없는 밝고 맑은 웃음에 부드러운 표정,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에 또랑또랑한 음성이었습니다.
참으로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는 튼튼한 영혼의 자매들이었고, 참 많이 예수님을 닮은 분이었기에 예수님을 대하듯 정성을 다해 환대했습니다. 83세 한젬마 할머니는 수년간 날마다 제강론을 200명에게 발송하다 요즘은 50명에게 발송한다 하며, 94세 송율리안나 자매는 수년간 제 강론을 날마다 받아봤던 애독자라 고백했습니다. 새삼 디지털 문명의 경이로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믿는 이들 삶의 여정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날로 하느님과의 일치가 깊어져 가면서 참내가 되어가는 ‘예닮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 목표이자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요 기쁨이자 행복일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 참 내가 됩니까? 답은 단 하나 간단합니다. 주님께 사랑의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진리 말씀이신 주님께 사랑으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과 깊은 결속관계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애매하고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구체적 행위를 겸비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복음서 저자의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깊은 묵상을 전해줍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한량없이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이야 말로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한 우리들에게는 유일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예수님을 닮아갈 때 하느님과의 일치로 인간 본래의 존엄한 품위를 회복하여 참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은 참내가 되어가는 사랑과 순종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사면초가의 적대적 상황속에서도 용감히 주님을 증언한 베드로와 사도들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 참나를 산 사도들임을 깨닫습니다. 사도행전 후반부 사도들의 확신에 넘친 감동적 고백을 전부 인용합니다. 역시 핵심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순종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그 증인입니다.”
참으로 회개하고 죄를 용서 받는 길은,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 길은 오직 하나, 우리의 영도자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대한 한결같은 사랑과 순종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는 참으로 무지에 눈먼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최고의회 일원들이 참 개탄스럽습니다. 문득 헨리 8세를 영국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하느님 진리에 순종하다 순교한 토마스 모어의 감동적인 고백도 생각납니다.
“저는 왕의 착한 종이지만 이에 앞서 하느님의 첫 번째 종입니다(The king's good servant but God's first,).”
물론 왕도 사랑했지만 하느님의 진리를 거스를 수 없어 진리에 순종하다 거룩한 순교의 죽음을 맞이함으로 주님 안에서 영원한 참나의 삶을 살게 된 성 토마스 모어입니다. 새삼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 라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과 순종의 예닮의 여정,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알렐루야.”(마태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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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uHY-6vdy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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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 36)
생명의
봄날 속에서
감사와 찬미를
깨닫게 된다.
우리의
호흡에서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만난다.
생명 없이는
다른 무엇을
결코 할 수 없는
우리들이다.
영원한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영원한
생명이 가고자
하는 길이
바로 믿음이다.
생명 한 가운데에
계시는 믿음의
예수님이시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으로
믿음을 실천하셨다.
믿음의 길이
생명의 길이다.
믿음은
잡고 있는 것을
놓아 버리는
부활의 체험이다.
잡고 있는 것을
놓아야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방향이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믿음과 생명
생명과 하느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사람과 사람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
이 모두에는
믿음과 생명이
존재한다.
믿음은
살아있는
생명의
정신적인
가치이다.
생명의 기쁨을
나누는 복음의
가치이다.
한 순간도
하느님
생명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이다.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믿음이
이 땅에 오셨다.
쉼 없이 흐르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진정한 믿음이
우리와 함께
호흡하시는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영원한 생명은
이와같이
멀리있지 않다.
생명을 만나는
인격의 가치이며
살리시고
열어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다.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올바른 삶의
방식을
일깨워주시는
믿음의
예수님이시다.
생명의 질서가
믿음의 질서임을
순종을 통해
배우는
생명의 길에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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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 36)
우리를 향한
믿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깊어지는 믿음만큼
우리의 삶도
깊어질 것입니다.
뿌리로 생명을 얻듯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는영원한 생명을
얻게됩니다.
생명은 믿음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생명이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참된 길입니다.
참된 생명을 위하여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힘은
우리를 살게 하는
가장 강력한 생명의
힘임을 믿습니다.
믿음을 위하여
믿음 자체이신 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늘의 생명은
믿음의 생명입니다.
그 믿음을
받아들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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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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