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영혼의 건강 수련자 시절 처음 일본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식사 시간에 형제들이 줄을 서서 밥과 반찬을 떠가고 있었다. 늘 그렇듯 맨 끝은 국이었다. 머리가 하얀 노인 형제가 국을 떠주고 있었다. 수도 생활을 배우기 시작한 나에게 그 모습이 너무 신선해서 그 형제가 천사 같았다. 자기 국을 푸기 위해서 밥과 반찬이 잔뜩 담긴 그릇을 잠시 내려놓아야 하는 수고를 하지 않게 해줬다. 신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돌아오니 나이가 가장 많은 형제가 땅콩을 까서 통에 담아놓고 있었다. 먹고 싶은 사람이 까서 먹으면 되는데 왜 그런 수고를 하냐고 핀잔하듯이 물으니 그렇게 해놓으면 다른 형제들이 먹기가 더 쉽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한 TV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처럼 사랑은 내가 해도 되는 것을 남이 그것도 굳이 해주는 것인가 보다.
바리사이들은 병적으로 정결(淨潔)을 중요시했다. 음식을 먹기 위해서 그들은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어야 하고 장터에 다녀왔으면 반드시 몸을 씻으며 그 밖에도 잔, 단지, 놋그릇, 침상을 씻었다(마르 7,3-4). 지금처럼 위생과 감염 때문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였다. 반면에 예수님은 외적인 정결 행위가 아니라 속마음을 정결하게 하라고 주문하신다.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그런 행위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 된다.
바리사이들을 비난할 입장이 못 된다. 미사 중에 내 탓이라고 가슴을 치면 뭐 하나, 통회와 뉘우침이 없고 게다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러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죄를 죄다 기억해 내기는 어려워도 분명 죄가 있을 테니 가슴을 친다. 후회와 부끄러움보다는 참 좋으신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에 슬퍼하는 마음이어야겠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시하신 정결해지는 방법은 자선이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바리사이들이 돈을 좋아하는 줄(루카 16,14) 익히 아셨던 예수님은 겉으로만 유난스럽게 깨끗한 척하지 말고 자선으로 그 탐욕을 지워내라고 말씀하신 거였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가 해도 되는 걸 대신 해주겠다고 나서지 않을 거다. 식탁에서 생선 가시 발라주고, 젓가락이 가는 반찬을 그 앞으로 옮겨 놓는 게 다 사랑이다. 사랑은 수고하는 거다. 내 재물과 시간을 내어주는 거다. 탐욕은 영혼을 병들게 하지만 사랑은 영혼에 생기를 돌게 한다. 내 것의 일부가 없어지고 내어준 시간만큼 잠을 덜 자야 하는 데도 말이다. 호감이 가는 이성친구나 마음 맞는 친구에게 그렇게 하는 건 누구나 다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기회만 되면 그가 누구든 그것이 크든 작든 호의와 자선을 베푼다. 그를 좋아해서나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하면 하느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죄는 엎질러진 물이다. 아파하고 뉘우치면 용서받는 줄 믿는다. 그 감사가 사랑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우리의 관심은 정결이 아니라 자선이고, 죄가 아니라 사랑이다. 베드로 사도가 알려준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1베드 4,8).”
예수님,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입니다. 제의나 영대 색깔, 제대 초의 개수가 아니라 성찬례에 담긴 의미이고, 제 삶을 남에게 나눠주고 내어주는 겁니다. 그래서 제 영혼은 주님처럼 자유로워지고 독수리처럼 하늘 높이 날게 될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를 더 가볍게 해서 어머니 계신 곳에 제 마음을 두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