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오피니언
[사설]내부서도 “C학점 안돼”… 그런 연금개혁안 더 후퇴시킨 정부
입력 2023-10-30 00:12업데이트 2023-10-30 03:10
27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2023년도 제3차 국민연금 심의위원회 회의가 비공개로 열리고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안에 대해 ‘얼마를 내고 얼마를 받을지 숫자가 빠진 맹탕 개혁안’이라는 비판이 잇따르자 보건복지부가 어제 “정부의 연금 개혁 의지는 확고하다”는 해명 자료를 냈다. 그러나 복지부 자문기구인 재정계산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정부의 개혁 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나온다. ‘더 내고 늦게 받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위원회가 막판에 ‘받는 돈’ 인상안을 추가한 배경에는 정부의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재정계산위는 지난달 공청회에서 내는 돈과 받는 시기 등을 조합한 18가지 개혁안을 발표해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회의록에 따르면 내부 회의에서도 “C학점 이상 받기 힘들다” “국민들이 대체 어떡하라는 거냐고 할 것 같다”는 강한 비판이 제기됐다. 하지만 마지막 회의에서 복지부 연금정책관이 “정부 입장에서는 다양한 안이 왔으면 좋겠다”며 받는 돈(소득대체율) 인상안도 넣어 달라고 했고, 결국 최종보고서에는 24가지 백화점식 개혁안이 담겼다. 전문가 집단이 단일안을 내도록 유도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선택지를 늘려놓아 개혁 논의를 후퇴시켰으니 연금 개혁의 발목을 잡았다고 비난받아도 뭔 할 말이 있겠는가.
복지부는 또 해명 자료에서 핵심적인 숫자가 빠졌다는 비판에 대해 역대 정부에서도 구체적인 숫자 대신 개혁 방향만 제시한 적이 두 차례 있었다고 했는데 이 역시 맥락을 무시하고 사실을 오도하는 변명일 뿐이다.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08년 연금개혁안에서 숫자가 빠진 것은 한 해 전 노무현 정부가 소득대체율을 60%에서 40%로 인하하는 개혁을 했기 때문이다. 2013년 박근혜 정부는 보험료를 인상하지 않는다고 처음부터 명시한 바 있어 ‘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하다’면서 수치를 빼먹은 이번 정부와 비교하기 어렵다. 더구나 박 정부는 2014년 공무원연금 개혁으로 수백조 원의 재정 절감 효과를 거둔 바 있다.
저출산 고령화 저성장을 감안하면 정부의 표현대로 ‘연금 개혁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일본은 일찌감치 개혁해 연금 줄 돈을 100년 치 쌓아두었다. 그런데 일본보다 저출산 고령화 속도가 더 빠른 한국은 겨우 32년 치밖에 없는데도 개혁할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정부는 황당한 변명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다. 국민연금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가감 없이 공개해 꺼져가는 개혁의 불씨를 어떻게든 살려놓아야 한다.